농놀

가을의 이름.

대협태웅

센도 아키라라 함은, 그러니까 료난의 나이스 가이 센도 아키라 이전에, 일이년 전 쯤으로 돌아가서, 센도 아키라라 함은, 도쿄에서 사업하시고 물결을 잘 타 졸부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그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진 못하고 이 또한 실력과 신의 안배 덕이라 악수를 나누던 센도 씨 댁 넷째 아들 아키라 군이라 함은, 구태여 도쿄의 부르는게 값인 땅에 양옥이 아닌 다리와 다리로 오가는 전통가옥을 지은 센도 씨 댁의 아키라 군이라 함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있어 계절의 정취를 알고 집 안에 자연을 조각내 들여놓은 정원의 구성을 입맛대로 배치하는 것이 고상함의 시작이라 아는 집 아키라 군이라 함은, 이름 들으면 딱 고개 돌아가는 포목점에서 비단천 늘어놓고 채촌을 하기 위해 줄자를 목에 걸어놓은 직원이 종종걸음으로 오가면서도 게다 끌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게 미덕으로 아는 집 아키라 군이라 함은, 먹색 바탕에 버드나무 가지가 멋스럽게 늘어진 비단실 수놓은 천, 이게 좋겠다는 말에 가만히 웃기나 하는, 사붓하게 인사 올리고 가는 등 사라지도록 나와있는 사람의 인기척을 느끼며 생각한다. 인생이 너무 지루해서 힘이 든다.

가을의 이름.

아키라와 나이차가 열살 안쪽인 큰 형님은 일찍이 대학 명패를 구렁이 담 넘듯 따놓은 뒤 가업을 이었고 뒤이어 나이차가 많이 나지 않는 가까운 둘째와 셋째 형님은 예술을 한다. 무슨 현대적 분리의 어쩌구라고 했다. 둘째와 셋째는 전부터 죽이 잘 맞아서 부친에게 말을 넣어 아메리카와 유럽에 하나씩 아틀리에를 두고서 오가며 센도 이름을 달고 예술활동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건 예술활동이라기보단 배 내놓기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 일에 침 흘리지 않을 테니 적당히 돈이나 떼어다 주세요, 하는. 여기에서 넷째이고 그 아래에 금쪽같은 막내둥이 여동생 하나 달고 있는 아키라는 올해 열 여섯이고, 고등학교 들어갈 때지만 그 말은 즉슨 그 역시 이 때에 별 행동을 하지 않으면 대학도 가기 전 일 하나가 낀다. 아버지 슬하 무릎걸음으로 가 사내답게 대업을 이루어야 한다는 포부를 달고 사업을 보조해야 한다는 말이다. 센도 씨는 치열한 약육강식을 선망했고 해묵은 우성론을 쥐고 살았기 때문에 인간들이 솔개의 자식처럼 서로 목이 터져라 울고 밀어내며 둥지 안에 두 발로 서 있어야 하는 자기증빙을 하길 바랐다. 요구는 은근했고 잘하면 거절도 할 수 있지만 후일 취급이 어떻게 떨어질지는 누구도 모른다. 손바닥 뒤집듯 내칠 수 있는 것이 졸부들의 규격맞춤형 품위였다.

아키라는 이렇게 저렇게 어떻게 빠져나가면 좋을까 혼자서만 고민하다가 어느날 큰형님이 딱딱한 정장을 입고 센도 씨 방에서 뒷걸음으로 살금살금 나와서 예의바르게 인사한 뒤 양 손으로 미닫이문을 닫고서 숨 돌리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그와 그는 눈이 마주쳤다. 큰형님의 눈빛은 도시의 네온사인에 잔뜩 물들어서 알록달록한 빛을 담고 있었는데, 어쩌면 기억도 안나는 예명의 연예인이라던가 보드라운 흰담비 목도리를 한 채 살그마니 명함을 내미는 브로커 따위와 잔뜩 엉겨붙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키라, 왔니. 큰형님이 말했고 아키라는 네, 중학교랑 달리 고등학교라 그런가 여기저기 볼게 많던걸요, 하면서 생판 아무것도 모르는 명랑한 낯을 하고서 큰형님에게 다가갔다. 그는 정말로 피곤해 보였고, 눈가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으며, 그러나 그럼에도 갖춘 사람 특유의 번드르르한 풍족함 따위가 어깨선에 맞춰서 잘 재단된 양장에서 훅 끼쳤다. 일 마치고 막 오셨나봐요, 아키라가 말하자 큰형님은 밋밋한 백짓장같은 미소를 그리며 그의 가벼운 저지 차림을 보곤 한쪽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키 차이가 있었지만 센도 씨 부터가 그 나이 사람 치고 커서 그런가 큰형님도 보통 큰 사람은 아니어서 팔의 각도가 우습지 않을 정도로만 기울어져 아키라에게 닿았다. 턱 만져지고 슥 스윽 문질러지는 온건한 동작에서 아키라는 이 양반이 또 나한테 기분 나쁜 일 따위를 묻히나 보구나 짐작했으나 그저 명랑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맹추마냥 내내 고생하셨으니 쉬어야죠, 하며 벌렁 넘겨버리고 말았다. 아키라는 인생이 쉽고 요령도 알았는데 그 중 제일은 추잡한 가족싸움은 아웃이라는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 순순하고 멍청이같은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가 큰형님은 하핫 눈 위를 쓰는 바람처럼 소리내 웃더니 그러마, 하고 아키라의 옆을 지나쳐 잘 짜맞춘 나무복도를 따라 걸었다. 

일정하게 가지를 잘라내는 정원수가 심긴 아름다운 뜰과 꾸준하게 밥을 먹여서 통통하게 살이 오른 비단잉어가 있는 연못. 그 중앙을 차지하는 시시오도시가 흔들리면 딱 따악 하고 일정박이 먹 묻은 붓처럼 허공을 찌르르하게 갈라낸다. 그림으로 그려놓은 귀한 저택은 사람 사는 집 같지가 않다던가 단칸방이어도 좋으니 피붙이의 화목을 즐기고 싶다던가 하는 것 아키라는 모른다. 그냥 본인이 태어나고 보니 도련님 소리를 들었을 뿐이고, 맛있는 것이면 맛있는 것 아닌 것은 아닌 것 갈라치기 하듯 배워 입에 넣어졌을 뿐인 바 어쩌면 까탈스러운 그의 형체는 사업가의 귀한 아들 정도로 조형되었으니, 후일 나쁘지 않은 셀링포인트를 달고 판매되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 이전에 아키라는 이 집이 좀 심하게 재미가 없다. 어디든 좋으니 이 집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멀리, 아주 멀리. 어쩌면 홋카이도도 괜찮고, 시간 죽이는데에 낚시질 하는 것 만큼 괜찮은 것 없으니 아예 오키나와로 빠져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운동에 재주가 있는게 천운인가, 남이 봐도 잘 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아키라는 농구를 잘했고 농구도 아키라를 잘 다뤘다. 

학년이 오를 수록 스카우트라는 것이 왔다. 다음 학교는 이 쪽으로 와 보는게 어떻느냐는 말을, 그 반짝거리고 알이 꽉 들어찬 유리알 같은 눈이 조금은 부담스럽고 그보단 더 흥미로워서 팜플렛을 달라고 했던 것도 같다. 정말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에 왔을 때 즈음 센도 씨는 사업의 몇주기를 축하하기 위해 지사가 있는 가나가와로 가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자고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족이란, 센도의 오남매를 포함한, 사촌, 육촌, 나아가서 외가와 기타 일가친척에 딸려있는 식솔을 포함하는 바, 행복이란 전시이고 전염이며 그에 반해 얻어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골이 떨리고 감사만을 가슴에 새기라 말하는 고상한 짓누름이었다. 얻어먹으면서 산다면 감사와 염치를 알아야 한다는 말을 누가 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금방금방 알아들었다. 아키라는 정말이지 사람들의 이 눈치라는 것이 모든 것을 지루하게 돌아가게 만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키라는 얌전하게 머리를 내리고 가나가와에 왔다. 차체가 낮고 우아한 그 시대의 검은 세단은 운전수를 대동하여 이렇게 저렇게 도로를 가로질렀고 일가친척은 각자 어울리는 만큼 자리를 만들어서 왔으니 아키라는 손님맞이라던가 출객표 따위를 살핀다던가 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큰형님이 있고 둘째와 셋째도 있는데 뭐하러 시퍼런 넷째까지 나서서 말을 한단 말인가. 저기에 나서봤자 귀찮기만 하고 가끔씩 어머니의 불륜상대인 외조카가 본인을 보고 눈을 찡긋하는 것에나 웃어주고 말면 되었다. 그러나 딱 하나 아키라에게 맡겨진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센도 씨의 금지옥엽 막내딸 아야네였다. 숱 많은 새까만 머리를 일본 인형처럼 귀 밑으로 똑 잘라버린 채 빗질을 얼마나 열심히 받았는지 아주 움직일 때 마다 차르르 하고 머리카락 가닥마다 빛이 났다. 그 아야네가 심통이 난 듯 볼을 붉게 물들이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키라는 어린아이 다루는 것은 사실 잘 모르겠지만 인간 다루는 것은 거기서 거기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아야네의 앞에 거대한 몸을 구겨서 쪼그려 앉아가지고 물었다. 

얘, 아야네. 우리 공주님이 왜 이러실까. 마음이 안 좋으니? 아키라 특유의 서글서글한 웃음이며 담백한 말씨 따위가 아야네의 얼굴에 톡 닿을 때 아야네는 자신이 입은 드레스 - 시폰으로 만들어져 하늘하늘하고 같은 소재의 긴 리본끈을 가슴 바로 아래에 쫌매고 그 밑으로 튤립을 뒤집어 놓은 것 처럼 부풀어놓은 벨 라인의 아동용 옷 - 자락을 불만스러운 얼굴로 쥐었다. 고사리만한 손이 힘은 얼마나 센지 시폰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못 내고 오그라들었다. 아키라는 이 애도 센도는 센도구나 싶어서 웃기만 했다. 막냇동생의 투정이라던가 빠르게 식어버리는 관심 같은걸 아키라는 하나하나 받아주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눈 앞에서 피부는 유모 머리카락은 사용인의 옷자락으로 거두어져서 애교 부릴 때에나 살그마니 방 밖으로 나오는 어린아이에게 못나게 굴 정도로 정신머리 없는 놈은 아니었다. 옷이 마음에 안 들어? 아키라는 막내의 솜털 난 뺨을 부드럽게 만져주었다. 막냇동생의 작은 손에 구겨진 시폰은 복숭아 과육보다 연약했지만 그처럼 으스러지는 않아서 아이가 힘을 풀자 미적대는 기운 없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자신의 자리로 가 우그러진 적 없다는 듯 원래의 형태를 만들었다. 나도 오빠처럼 기모노 입고 싶은데. 왜 나만 이거 입어? 나만, 이거, 하는 것에는 아키라 뿐만 아니라 그의 손위형제가 다 포함되는 부분이었는데, 여기에는 센도 씨의 직계 가족 중 왜 본인은 양장을 입었느냐에 대한 불안함, 가족을 따라하지 못한다는 불편함, 공동체에 속하지 못했다는 억울함 따위가 뒤엉켰는데 어쩌면 그걸 다 떠나서 순전히 아키라의 먹색 기모노가 아주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아키라는 이것이 뿌리 깊은 성별 이분법적 태도라던가, 말년에 얻은 고명딸 하나가 귀여워 어쩔 줄 몰라 세상 예쁘고 좋은 것 다 해다 입히는 자신에게 취해 어줍잖은 짓 하는 부친에 대해 설명을 할까, 하다가. 어차피 알아들을리도 없고 알아들어봤자 좋은 일 하나 없으니 아키라는 그냥 웃으면서 다음에 어머니와 같이 포목점엘 갈까? 하고 넘겨버렸다. 다행스럽게도 막내아이는 거기까지 깊은 생각은 없었던 모양인지 금방 얼굴을 풀고 응! 하고 답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울분에 찼던 손바닥을 내밀며 새침하게 말한다. 손 잡아줘 오빠. 아키라는 막내를 보다가 하하 웃더니 그대로 막내를 공주님처럼 한 팔로 안아들고 다른 손으로 찌끄만 손을 잡아주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높아진 막내는 흥분에 꺄아꺄아 소리를 냈고 잠시간 우아하게 꾸며놓은 파티 홀은 사랑스러운 아이의 앙증맞음으로 잠식되어 그 아래 깔린 많은 이해관계는 눈꺼풀을 내려주었다. 잠시.

그리고 센도 아키라가 잠시 숨을 트기 위해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아침 일찍 도착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노을이 지고 있었고 바다를 뒤로한 채 웅장하게 주홍빛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숯불의 안쪽 덜 그슬린 부분이 시뻘겋게 익을 열기를 내는 것 같이 그 가을날은 아키라에게 별 반 다르지 않은 장소였다. 그래도 치자면, 좋다, 요 근래 들어온 스카우트에서 가나가와의 어떤 고등학교가 이리 오라 러브콜을 울리기는 했다. 그래서? 아키라는 별 생각이 없었고 어디든 고르면 되었다. 사실 가나가와라고 해보았자 신칸센 타면 얼마나 걸리며 그마저도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곳이었는데 뭐하러 여기로 온단 말이야. 아키라는 하오리의 넉넉한 소매에 손을 집어넣고 따각따각 게다 굽 소리를 내며 걸었다. 어지간히도 세련된 곳을 잡으셨는가 가도 가도 끊임없이 바다만 나왔다. 아키라는 한참을 걸었는데 그러던 와중에 텅텅 바닥에 바람 든 물건이 닿아 튕겨지는 소리가 나서 바다에만 두었던 시선을 돌려 다른 쪽을 보았다. 매끈하게 다듬어놓은 바닥에 페인트 칠을 하고 흰 선을 그어다가 만들어놓은 농구 코트가 있다. 뭉특한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꼬아놓은 철제 울타리를 두른 채 깔려 있다. 그 위에 사람이 서 있다. 키가 겅중하고 무릎뼈는 말라 있었는데, 전체적인 뼈대가 낭창하고 덜 여문 것이 많이 쳐 주어도 중학 삼년생이었다. 땀에 젖은 앞머리가 조금 길어서 그림자가 덮인 눈을 찌를 듯 해 있었다. 그러나 관리받지 않았다거나 방치되었다거나 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귀찮아서 놔둔 것 같은 사람 특유의 느낌이 있었다. 텅 텅 하고 바닥을 치던 농구공이 라인에 들어가는 발과 손목으로 던지는 것이 아니라 무릎과 허리로 던지는 공이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면서 그대로 림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이거 잘 하는걸. 아키라는 조금 자란 앞머리를 살짝 옆으로 넘기면서 울타리 너머에서 그가 하는 모양을 보았다. 

아키라는 처음으로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했다.

울타리 안쪽으로 돌아서 들어와 벤치 옆에 게다를 내려놓고, 솜이 들어가 조금 두툼한 타비도 벗어놓고 한 낮의 열감이 남은 코트 안으로 들어갔다. 비단천이 사그락거리며 스치는 소리, 둘러놓은 하오리를 벤치에 늘어놓고서 그렇게 다가갔다. 시선이 맞는다. 뭐야, 라고 소년은 말했는데, 그건 시비가 아니었다. 아키라는 안다. 그림자에 묻혔을 뿐이지 얼굴선이 아주 섬세해서 밖에서 보았으면 꽤 곱게 생겼겠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키라는 웃으면서 기모노의 자락을 살짝 들어올려 자신의 발목과 정강이를 보였다. 원온원 할 사람 안 필요해? 고관절을 접고 허리를 어슷하게 숙인 채 한 손을 앞으로 내민 자세는 꽤나 우스웠으나 옷이 아니었다면 전문적으로 보였을 모습이었다. 소년은 아키라의 그 자세를 보다가 같이 자세를 낮췄다. 몇 점 내는걸로? 기모노가 어쩌니 불편하니 맨발이 뭐니 말하지 않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모양이 유쾌해서 아키라는 푸핫 소리내며 웃어버렸다. 소년은 눈만 꿈뻑대다가 십오 점 하자. 하고 곧장 아키라의 앞으로 치고 나왔다. 아키라의 단정하게 펴놓은 목깃이 구겨지기 시작한다.

둘은 한참을 놀았다. 한 명은 쇼트 팬츠에 반소매를 입고 조던을 신었는데, 한 쪽은 맨발에 윤이 좔좔 흐르는 비단 기모노를 입은 채 뛰어다니고 있다. 둘 다 새까맣고 어지럽게 흩어지는 머리를 정돈도 않았다. 필시 어울리지 않는 모양인데 어설프게 기모노 쪽이 키가 커서 수비에 유리한 것 처럼 보였다. 땀이 흐르는 소년 둘이서 어깨로 밀고 반칙이 되기 직전까지 싸우고 공을 들고 머리 위로 올렸다가 드리블로 옆구리를 찌르면서 노을은 더 뜨거워졌고 가로등의 점만이 양 옆을 지킨다. 이 쇼트 팬츠의 소년이 뛰어올라 림 위로 공을 밀어붙일 때 들어오는 짧은 헛숨만이 아키라를 즐겁게 만들었다. 아키라의 눈에 천연색 우주가 들어선다. 우주의 끝에는 공이 있다. 공을 내려박는 반듯한 손톱이 있다.

십오 점의 구 점을 아키라가 받아먹었다. 예상 외의 고전이었는데, 분명 그렇게 된 일의 팔 할은 아키라의 의복 탓이었겠다. 해도 그렇게 온 몸을 흔들어대면서도 허리를 동여맨 오비가 풀리지 않았던 것은 아키라가 몸을 잘 쓴 탓도 있겠지만 그의 옷을 입혀준 사용인의 아주 노련한 손길 탓이겠지, 그러나 아키라는 거기까지 생각지 않는다. 그저 즐겁기만 했다. 벤치에 주저앉아서 헐떡이는 두 소년 사이에 개운함이 남는다. 그러다가 쇼트 팬츠의 그 아이가 말했다, 한번 더 해. 본인이 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낯이라서 아키라는 응? 이라는 요상한 소리를 냈다가 웃어버리고 말았다. 좋아! 그리고 아키라가 일어나려던 차에 저 멀리서 도련님, 도련님 하면서 애절하게 자신을 부르는 여자의 소리를 듣는다.

먼 곳에서 흩날리는 풀벌레같은 소리는 필시 자신을 찾아오지 않으면 경을 치리라는 부친의, 어쩌면 모친의 말일 수도 있고, 어쩌면 큰형님의 말일 수도 있다. 아키라는 그 쯤 되어 이 곳에 농구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축하연 중이었지 하는 생각을 하곤 다시 지루해졌다. 아아. 안되겠는걸. 아키라는 돌아간 오비를 대강 매만져 그럴듯하게 만지고 벤치에 발을 올려 타비를 한 짝씩 신었다. 그리고 게다를 신고 마지막으로 하오리를 둘렀다. 땀에 젖은 머리칼만 아니라면 그는 정말 반듯한 도련님이었다. 뜨거운 기운이 비단 아래에 갇혀 아키라를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저기로 돌아가면 다시 어영부영 뭐든 하다가 웃고 예의바르게 굴고 천상 바보로 살아야겠지. 싫다. 땀에 젖어 눅눅해진 옷깃을 매만지던 아키라를, 소년을 보다가 말한다. 나 여기 살아. 아키라는 소년을 본다. 매일 여기 나와 있어. 아키라는 그 말의 의미를 찾기 위해 호흡을 다듬는다. 다음에 또 원온원 하자. 딱. 가로등빛이 소년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쇼트 팬츠의 달라붙는 그림자가 허벅지 선을 그대로 그리며 그림자를 만들었다. 아키라는 눈을 깜빡이다 웃는다. 너 이름이 뭐니?

도련님을 겨우 찾아온 센소는 어쩌다 이렇게 땀에 젖으셨는지 옷은 왜 이리 흐트러지셨는지 아니 도대체 여기까지 왜 나오셨는지를 하나하나 묻고 싶었으나 당장에 급한 것은 곱게 도련님을 모셔오는 것이었으므로, 숫제 울면서 도련님의 옷만 다듬어주는 센소에게 아키라 도련님은 미안해, 미안해. 하며 여전히 철 없이 웃고만 있었다. 들어간 파티 홀의 분위기는 마무리 건배사를 남겨놓은 파장 분위기였으니, 아키라는 죄송해요, 넉살 좋게 웃으면서 달각달각 소리도 내지 않고 높은 의자에 앉아있는 막내 옆에 가 앉았다. 막내가 아키라를 보더니 오빠 뺨이 왜 그렇게 빨개? 하고 물어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막내에게 넷째 오빠는 항상 저지 차림이라 느슨할지언정 열 오른 모습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키라는 막내를 보더니 언제나의 사붓한 미소가 아니라 정말로 기분이 들떠 어쩔 줄 모르겠다는 웃음을 함박 입에 물었다. 있지, 아야네. 오늘 되게 재미있는 아이를 봤어. 진짜? 응. 이름이 뭔데? 아, 가을 같은 느낌이었는데 말야….

센도 아키라는 빼곡한 러브콜을 물리치고 가나가와의 료난에 왔다. 선택사항은 다양하지만 하나는 스카웃을 대리인이 아닌 감독이 직접 왔다는 것이고 둘은 섭섭치 않은 대우 -과연 센도의 아키라에게 얼마나의 감동을 줄 지 모르겠으나- 를 약속했다는 것에다가, 셋은 쇼트 팬츠의 그 소년이라면 필시 이 학교에서 스카웃 하리라는 어떤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길죽한 뼈대와 관습을 아는 듯 반듯하게 선 자세에서 아키라는 분명 여기로 오겠거니 생각하며 도쿄의 본가에서 료난과 가까운 곳에 멘션을 얻었다. 도련님, 물론 이리저리 여행을 자주 다니셨다지만 홀로 나와 사시는 것과 독채에서 홀로 사시는 것은 아주 다르답니다. 꼭 일주일에 두 번은 사모님께 연락하셔요. 센소의 가느다랗고 풀숲에 숨겨놓은 종같이 시원한 목소리가 아키라의 귀를 쓰다듬었다. 그 말에 아키라는 웃기만 한다. 외조카를 데려다가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어떤 스카프가 더 잘 어울리겠느냐 평 듣느라 받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 다행이 아닌 상황을 생각하면 아키라는 여러가지로 곤란해졌다. 패륜에 불륜에 이중선을 쥔 채 다 아는 분들은 알지만 센도 씨만 모르는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유지하면서 짜릿함을 느끼는 것일까. 즐거움에 목을 매는건 인간의 본능인가. 하다면 사모님과 아키라는 피붙이가 맞으니, 필시 아키라는 일말의 정이라는 말 이전 그저 재미를 찾으려는 동지애적인 부근으로 양육의 책임을 놓은지 오래된 보호자 방임의 순간을 너그러이 넘어가주고 만 것이다. 자신 뿐만 아니라 동생마저도. 결과는 막내의 죽 끓는 듯한 변덕이라던가 순진해서 지독한 부분이라던가 하는 성격 형성에 큰 몫을 하고 말았지만, 알 바인가. 그래도 아키라에겐 어떤 잘못도 없고 그저 사람을 잘 모시고자 하는 마음으로 충만해 있을 뿐이었으니 좋아, 그러도록 할게. 그러니 너무 걱정은 말고. 하며 다정스러운 도련님이 되어 그이를 다독이곤 하는 것이다.

가나가와에 내렸을 때 느낀 것은 생각보다 공기에서 그렇게 짠 맛이 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기사 사면이 바다인 땅에서도 일부는 내륙이고 일부는 접경인데 접경에서도 사방이 물냄새가 날 필요가 있는지? 이 부근에서 아키라는 본인이 꽤나 도쿄 깍쟁이같은 생각을 했다고 느끼고 키득키득 웃어버렸다. 짐을 옮기는 하인이 잘 다려놓은 흰 드레스 셔츠에 꼭 잠군 검은 조끼를 입었음에도 타이를 매지 않은 것은 짐 사이에 타이가 껴버리면 이래저래 곤란해지니 그러지 말라 한 아키라의 말 탓이다. 언젠가 그렇게 놔두었다가 일이 터져 뒷수습하는 것을 코앞에서 본 아키라로선 그 일을 두번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한 행동이었지만 체면을 중시하는 까탈스러운 집안의 몇 안되는 인격자 대우를 받게 되어 기분이 아주 오묘해졌다. 나는 좋은 주인인가? 그것은 아닌 것 같은데. 팔짱을 끼고서 방 두개에 거실과 주방이 분리되어있는 집안에 가구를 들여놓으면서, 사실 방 두개까지는 필요도 없고 적당히 보통처럼 방과 거실이 나뉘어져있는 한 칸 짜리여도 충분한데, 말을 하고 싶었으나 거기까지 가면 센도의 이름이니 뭐니 하며 여러모로 피곤해질 것이 자명하여 아키라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단 넓은게 낫기도 했으니까. 아니라면, 아닐 때에는 그 때 가서 줄여도 될 일이다. 상세한 것 따위 나중에 망신받기 싫으면 어른들이 손과 발을 휘저어서라도 해결을 볼 것이고 그럼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는 일이 나올것이고. 그렇게 보면 센도 아키라는 참 잘 사는 집 도련님 티가 난다고 할까 생각을 끊어버리는데 도가 텄다고 할까. 좌우간 그 나이 답지 않았다. 근처 카페에서 따뜻한 음료 한 잔을 주문해 잔을 만지작대며 입을 축이고 있다 보면 사람이 물처럼 몰려왔다가 밤처럼 사라진다. 정리가 끝난 집 침대에 혼자 누워서 얼룩 없이 새하얀 천장을 보고 있다가 잠에 들었다. 아주 조용했다. 

수속을 밟고 료난의 저지를 받아든 다음부터 센도 아키라는 기다렸다. 나와 같은 나이인가? 모른다. 농구는 본격적으로 하는 것인가? 어쩌면, 하지만 정확하게는 모른다. 이름? 가을의 향기가 묻어있었다만, 사실 그 역시도 그렇게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주 아가씨 같은 어감이었다는 생각 밖에 나지 않는다. 그러나 또렷한 것은 변성기를 건너가는 것 같은 거친 목소리, 흰 바탕, 목이 긴 조던 농구화가 코트를 삐꺽거리며 비비는 소리, 그리고 쇼트 팬츠 아래로 나온 흰 허벅지, 농구공을 잡은 손가락은 살짝 힘이 들어가 단단하게 만든 손 끝. 그 동작. 매끈하게 옆구리로 파고드는 조금은 전형적인 수법을 손바닥에 그리면서 센도 아키라는 그 소년이 료난에 올 때를 기다렸다. 일 학년은 아주 조용했다. 아무래도 나와 동갑은 아닌가보지. 키와 체격을 생각했을 때 못해도 다음 해에는 료난에 올 것이다. 아키라는 그걸 생각하면 갈비뼈가 붙은 등골의 뿌리 부근이 아주 빠듯하게 당겨오는 것만 같았다. 환희의 감정은 순정의 기쁨과 닮았다는 것을, 아키라는 그렇게 알았다. 

그리고 사 월. 료난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뭐, 아무도 안 온 것은 아니고, 정확하게는 센도 아키라가 바라던 그 소년은 오지 않았다. 왜지? 가나가와에 있을 거라면서. 원온원 하자고 하지 않았나. 하여튼간 그 소년은 없고 아키라 뿐인 것이다. 그래도, 좋다. 한 사람만을 쫓아 학교에 온 것만은 아니었고, 이 곳에는 이 곳만의 유쾌함이 있다. 시간이 빌 때에는 낚시도 할 수 있고. 가끔 잡아놓은 물고기를 풀고 던져주느라 중간중간 늦어버릴 때가 있긴 하지만, 하여튼, 좋다. 세상은 넓고 농구 하는 사람은 이 땅에 몇이나 있겠는가. 그정도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경기에서 만나고 하겠지. 못 만나면 그정도일 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마음이 아주 게을러졌다. 잠깐의 즐거움이 별빛처럼 뭉그러지고 눈 앞에서 산화해버린 것만 같다. 일년여를 버텼음에도 돌아오는게 없다니, 기대하지 않아도 무언가가 손에 들어오던 강물같은 순간에 이정도 일은 아키라를 김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고 그는 그 스스로도 생각지는 않았지만 재미있는 것들에 대한 기대를 반쯤 놓았다. 그래보았자 착취성이 다분한 향락에 취한 큰형님이라던가 지척의 스릴을 요구하는 사모님을 생각하면 그저 소년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정도였으니 이게 아키라에게 큰 무언가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 지루해졌다. 

센도 아키라 열 여덟, 고등학교 이 학년이 된 그는 남아있는 삶을 헤아리면서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나눠야 조금이라도 덜 지루하게 살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사춘기 청소년의 센치함이라기에 아키라는 정말로 가나가와의 물결과 바람 그리고 느긋함이 좋았지만 그것은 그 뿐이어서 더이상 아키라에게 어떤 감흥을 주지 않았다. 고등학생이 끝나면 어디 실업팀이라도 알아보는게 좋겠지. 대학에 간다면 선수가 되는 것을 전제로 알아봐야 할 테고. 공 굴리는 것은 아주 재미있지만 그게 뼈가 울리도록 즐겁냐고 물어보면 잠시 말을 멈추게 된다. 하지만, 좋아, 농구는 즐거워. 그것은 아키라에게 있어 몇 안되게 호승심을 불러 일으키는 물건이어서, 그래, 좋아, 농구는 아키라를 잘 다뤘다. 하지만 정말 모든게 없다면, 센도 아키라는 센도로의 값을 해야 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면 낚싯줄이 팽팽해지고 아키라는 릴을 감아올린다. 알을 밴 것 같은 암놈이 아키라의 손에 걸려들었다. 아키라는 물고기의 차르르한 비늘을 보다가 엄지를 아가미의 벌어진 틈에 밀어넣어본다. 꿈틀거리는 생동감이 손톱과 손가락 옆살에 밀려들면 그제야 바늘을 빼어주고 바다에 던져주었다. 퐁당. 하는 야트막한 소리가 바닷바람에 쓸려 흐무러진다.

센도 선배!

응? 하는 소리에 아키라가 고개를 돌리면 어쩐지 얼굴이 시퍼래진 후배 하나가 달려들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하고 물으니 후배가 헐떡이는 숨을 두어번 쓰윽쓰윽하며 가라앉히곤, 오늘 연습경기 있으시잖아요! 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아키라는 그 즈음에. 아. 했다. 아, 가 뭐예요! 허둥지둥 아키라의 손에서 낚시대를 뺏어들어 접고 가방 안에 쑤셔넣으면서 물고기 바구니가 없어서 다행이니 뭐니 종알거리던 후배는 상체만한 낚시가방을 어깨에 매고 아키라를 돌아보았다. 가죠! 상대는 쇼호쿠예요. 들어본 적 없는 학교, 라고 생각하면서도 아키라는 웃기만 했다. 대신 오래 기다렸느냐 천연덕스럽게 말을 했는데 후배는 아주 질색을 하면서 감독님이 얼마나, 하고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학교로 들어가 로커룸에 가서. 낚시가방은 어딘가에 던져놓고. 뒤늦게 환복을 하는 센도에겐 어떤 기대감도 없었다. 이름이 올라오지 않은 학교라면 이 연습경기를 위해 감독간 어떤 대화를 나눴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어른들의 대화는 대충 감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던 아키라라지만 그의 감독은 꽤나 건실한 사람이라는 사실엔 부정할 여지 없는 부분이었던데다가 어느정도 프로의식과 신뢰성이라는게 있어서 아키라는 그가 하라는 것은 군 말 없이 했다. 군말만 없었을 뿐이지 해라 했을 때에는 자주 늦어버렸지만. 

센도 아키라가 코트 위에 올라왔을 때, 시합은 시작 직전이었다. 유니폼을 입은 쇼호쿠의 학생들이 몸을 푸는걸 넘어서 왜 지연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들 나누고 있었다. 아, 늦어서 미안합니다. 아키라가 넉살 좋게 웃으며 들어왔고 감독이 그에게 달려왔다. 너는 정신이 있는거냐! 아키라는 이크 한번 하더니 죄송해요, 죄송해요. 하며 바로 섰는데. 저 건너에 가을이 있었다.

센도 아키라는 소년의 이름을 생각했다. 손에 잡혀들지 않는 오묘한 말씨도 떠올렸다. 그러다가 소년이 자신의 위치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아키라는 다시 료난의 센도 아키라가 되어서 공을 바닥에 대고 두드릴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본 소년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옥신각신하는 악우가 생긴 것 같다. 아키라는 매끈하게 다듬은 손톱이 공에 쓸리는 감각을 상기하면서 소년의 앞에서 뛰어올랐다. 통풍이 잘 되도록 작은 구멍이 나 있는 스포츠웨어 한 벌이 떰에 젖어 출렁이며 아래로 무거운 주름을 잡으며 떨어진다. 여전히 쇼트 팬츠 아래의 무릎뼈는 덜 여물어 있었다. 센도는 웃어버렸다. 키가 더 크겠는걸. 부저가 울린다. 료난이 두 뼘 정도 점수를 벌려 이겼다.

경기에는 승패라는게 나뉜다. 스포츠 타올로 땀에 젖은 얼굴을 닦아낸 뒤 레몬 절임을 입에 물고 있던 아키라는 저 건너 로커룸으로 사라지는 쇼호쿠를 보았다. 승패에 저렇게까지 슬퍼할 이유, 있지. 이것만큼은 아키라가 세상에서 가장 물적으로 이해를 잘 하는 물건이었다. 마지막 표정이 어땠는지? 자신을 보는, 손 끝으로 향하는 시선은 어느 빛이었는지? 하나 확실한 것은 우주의 물결과 비등했다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이렇게 울렁거리는 감각을 전달 받는다는건 아키라에게 있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이 말이 안된다는 것은, 그것이다. 겪어본 적 없는 상황이라는 진부한 말이다. 너무 풍족해서 부족해본 기억이 없는 사람 특유의 마른 심상에 소년이 닿았을 때, 아키라는 꿀과 레몬의 신 맛이 남은 입을 한 채 로커룸 쪽으로 빠졌다.

로커룸 문 밖에서 기다리던 아키라는 쇼호쿠의 학생들이 하나하나 나가는 것을 보다가, 이제는 땀도 열기도 뭣도 없이 잔열만이 심장에 남아 쿵쿵 뛰고 있을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저기. 소년이 고개를 돌려 아키라를 보았다. 뭐야. 첫 만남과 비슷한 뉘앙스에 아키라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너 나 기억 안 나? 뭐를. 우리 원온원 했었잖아. … 머리를 올려서 모르는건가? 왁스로 박박 세워놓은 기가 센 머리카락을 검지로 가리키던 아키라가 눈썹 끝을 늘어트렸다. 소년은 뭐라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아키라를 보았다. 기억 안 나. 아키라는 남모르게 한숨을 한번 쉬었다. 있잖아, 바다 근처 코트에서 기모노 입고…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것은 센도 아키라에게 맞지 않다. 한번도 이정도 위치에서 자신을 설명해본 적 없다. 그러나 비굴하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모든것이 새로워서 좋았다. 하오리를 던지고 게다를 벗은 뒤 맨발로 림에 매달렸던 시간을 말하면, 그제서야 소년의 눈에 이채가 돈다. 그리고 말한다. 왜 안 왔어? 응? 원온원 하기로 했잖아. 응?

그래서 말 하기를, 여기에서 아키라는 하나 실수한 것이 있다. 쇼트 팬츠의 이 소년은 원온원 하자고 하긴 했지, 미래약속을 한 것이 아니다. 일단 료난에 갈만한 성격이 아니었던데다가, 정확하게는 료난에 가겠다 확답을 한 것도 아니었고, 솔직히 말해서, 그거다. 센도 아키라와의 원온원 약속은 해변가 어딘가의 농구코트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만나자는 그 약속을 어긴 것은 아키라가 먼저다. 그러나 센도 아키라는 어쩔 수 없는 도쿄 깍쟁이 도련님이고 암만 머리가 좋고 생각이 또렷하다고 해봤자 그 기이한 틈에 그렇게 마음도 주지 않았던 바, 당연지사 실력이 있으면 날 붙잡았던 것 처럼 그 아이도 료난에서 붙잡아 끌고오겠거니 어림짐작 했을 뿐이다. 너무 당연하게 료난에 오겠거니 한 것이 실책이다. 거절에 대한 생각을 하지도 않은 것은 아키라의 맹점이다.

그래서 이제야 질답과 약속의 거대한 크레이터를 마주한 아키라는 아아, 하면서 이마를 문질렀다. 땀이 식어 드러난 어깨가 차가웠으나 정신 차리기에는 그 정도가 딱 좋았다. 큼지막한 손으로 아예 얼굴까지 덮어버린 아키라는, 소년에게, 잠시만 기다려봐, 하곤 표정을 다듬었다. 그러니까, 순전히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학교를 선택하는 바보같은, 이 쇼트 팬츠의 소년이 나와 농구를 하기 위해 하루 온 종일 그 코트에서 왕자를 기다리는 여우처럼 있었다는 사실을 음미한다. 표정이 느슨해진 것을 끌어올리고 긴장감을 남기고 승패에 관계없는 담백한 낯을 덧씌우면 센도 아키라는 정말로 료난의 나이스 가이가 된다. 그리고 손을 내리고 악수를 권한다. 땀 없이 보송한 가을의 소년에게. 소년은 센도 아키라를 바라보다가 오른손을 맞잡는다. 공을 사이에 두지 않은 손은 사실 소년보다 청년에 가까워서 센도 아키라는 어쩌면 이 소년을 지금 만난 것이 천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즐거움은 멀고 오래 기다릴 수록 행복하다. 단순하면 더 좋다. 맞잡은 손을 흔들고 놓는다. 센도가 입을 연다. 있잖아, 나 네 이름을 까먹었는데 말야. 소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눈이나 깜빡인다. 다시 한번만 말해줄 수 있어? 

센도 아키라는 다시한번 정취를 손바닥에 긁는다. 봄을 건너가는 능선에서 만나는 단풍잎은 뚜렷한 먹색. 좋아, 루카와. 난 센도 아키라야. 그리고 풀었던 손을 홀로 쥐고 다시 펴내는 센도의 손바닥 정 중앙 완만하게 파인 굴곡점에는 계절풍의 자취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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