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창작

[태섭대만] 인권유린상자

에 갇혔다

눈을 뜬 송태섭은 제 몸을 짓누르는 묵직한 무게에 당황했다. 이게 뭐야? 빛이 아주 약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었다. 제 위에 엎어진 남자 때문에 사지가 부자유한 것도 이유이긴 했다. 태섭은 끄응, 소리를 내며 남자의 아래에 눌려있던 팔을 빼내었다. 얼마나 오래 그러고 있었는지 내 것이 아닌 양 감각이 없다가 저릿저릿하게 통증이 올라왔다.

‘아오 죽겠네...’

피가 돌기 시작한 손으로 주변을 더듬어보니 차갑고 딱딱한 벽이 만져졌다. 매끄럽고 건조했다. 빛이 통과하는 것을 보아 아크릴판으로 만든 상자 같았다. 외부에서 불투명하게 처리를 했는지 주변이 색의 혼합으로 흐리게 보였다.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더라. 태섭은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이제야 정상으로 돌아온 손으로 볼을 꽉 꼬집어보기도 했다. 진짜 아팠다. 꿈은 아닌 게 확실했다. 제 위에 엎어진 이 남자를 깨워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내버려둘까. 숨결이 닿는 것으로 미루어 죽은 건 아니니 이대로 두는 게 나으려나. 태섭은 가만히 제게 엎어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이마가 말끔했다. 그 아래로 반듯한 눈썹과 살포시 내려감은 눈이 보였다. 손을 움직여 정대만의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상자가 좁아 불편했지만 쓰다듬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조용하네.’

태섭은 천천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불투명한 처리가 되어있긴 하지만 경첩과 자물쇠로 보이는 회색 물체가 보이는 걸로 보아서는 위쪽으로 열리는 구조인 것 같았다. 잠금장치는 그것 하나 뿐이었다. 저것만 부수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몸이 멀쩡하면 모를까, 잠들어있는 대만을 몸에 얹은 채로 무슨 수로 자물쇠를 깨부순단 말인가. 체념한 태섭이 에라 모르겠다, 하고 몸에서 힘을 풀었다. 그와 동시에 대만이 움찔거렸다. 기척에 예민한 건지 타이밍이 좋은 건지. 대만은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꿈벅이고 몸을 일으키다가 아크릴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악!”

“뭐해요?”

태섭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대만을 쳐다보았다. 건장한(?) 운동선수 둘이 갖혀있기엔 버거운 크기였다. 팔도 다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서로 엉킨 채 누가누가 오래 버티나 시합을 해야 할 수준이었다. 대만은 제 뒤통수를 손으로 문지르면 스으, 소리를 내다가 제 팔에 갖혀 누워있는 태섭을 발견했다.

“너 왜 이러고 있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요.”

아무리 봐도 자세가 오묘했다. 팔을 제대로 펴기 어려운 높이 탓에 반쯤 굽힌 대만의 양팔 사이에는 태섭의 얼굴이 있었다. 숨결이 미약하게 닿을만큼의 거리만을 두고 떨어진 얼굴은 서로의 숨을 마시며 호흡하고 있었다. 강제로 눈을 맞출 수밖에 없는 자세였다. 더 가관인 것은 벌어진 두 다리 사이에 태섭의 왼쪽 다리가 들어와있었고, 대만의 왼다리 옆에 태섭의 오른다리가 딱 붙어 벽면과 아슬아슬한 간격을 유지한 상태라는 것이다. 다리 사이에 끼워진 태섭의 다리는 좁은 공간 탓에 벽을 발바닥으로 짚은 상태였기에 거의 직각으로 들려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사타구니에 무릎이나 허벅지가 문질러질 터였다. 그것까지 생각이 미친 태섭이 몸을 굳혔다. 움직이면 큰일난다. 아무리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라지만 이런 상자에 갖혀서 영문도 모르고 고간을 맞대고 싶진 않았다. 반투명한 상자 안에서 섹스 비슷한 무언가라도 했다가는 일본이든 미국이든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것이다.

태섭은 눈을 감았다. 코로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심호흡을 하는 태섭을 내려다보던 대만이 의아한 투로 말을 꺼냈다.

“네가 이런 건 아니지?”

“내가 왜요?”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몰라요. 움직이지나 마요, 닿을 것 같으니까.”

태섭은 범인 추리에 열을 올리지 않았다. 눈앞에 당면한 과제에 더 집중할 생각이었다. 골똘히 생각하던 대만이 전혀 짚히는 곳이 없다며 한숨을 푹 내쉬자 간지러운 숨이 닿아 약간 움찔했을 뿐이었다. 어떻게 나간담. 아크릴은 그렇게 강한 소재가 아니지만 이 좁은 곳에서 안간힘을 써봤자 주먹만 아플 게 뻔했다. 대만은 괜히 손으로 벽을 툭툭 치거나 발로 팡팡 걷어차보았지만 자물쇠가 덜컹거리는 소리만 날 뿐, 상자는 금조차 가지 않았다. 그런 걸로 부서질 상자였다면 먼저 깬 태섭이 진즉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대만은 부질없는 짓을 멈추기로 했다.

“여기 뭘로 잠겨있는지 보이냐?”

“네. 자물쇠요.”

“깨부술 수 있을까?”

“이 자세로요?”

자물쇠로 잠겨있다면 작은 틈이라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대만은 머리에 닿는 천장을 꾹꾹 밀어 얼마나 들리는지 확인했다. 태섭도 그런 그의 뜻을 눈치챘는지 팔을 뻗어 천장을 밀어내보았다. 살짝 들린 이음매는 1센티미터나 될까 싶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대만이 태섭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셋 세면 들 테니까 틈새 벌려봐.”

“힘들면 말해요. 손 빼야 하니까.”

서로의 말이 끝나자 대만은 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흡..!”

신호에 맞추어 대만이 온몸으로 천장을 밀어내었다. 태섭은 재빨리 틈새에 손을 밀어넣고 더 벌려내려고 힘을 주었다. 대만의 얼굴에 피가 몰려 터질 듯 빨개졌다. 태섭도 마찬가지였다. 아크릴판을 세게 쥔 손마디가 하얘졌다. 두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상자를 밀어냈다. 대만의 꽉 막힌 목소리가 들렸다.

“좀, 더..!”

“으윽..!”

태섭은 젖먹던 힘까지 다 쏟아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필사적이었다. 대만도 그랬다. 그는 자신의 온몸으로 상자를 부수려 했다. 온 몸에 힘을 준 탓에 태섭의 다리가 대만의 사타구니에 닿았다. 대만이 헉, 숨을 들이켰다. 깜짝 놀란 태섭이 재빨리 손을 빼자 간발의 차로 대만이 고개를 숙이며 힘을 뺐다. 대만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붉어진 얼굴과 거친 숨소리가 반투명한 상자의 적은 공백을 채워나갔다. 정사라도 벌인 것마냥 내부의 공기가 더워졌다.

“하, 진짜...”

“그거 좀 닿았다고 유난 떠는 거예요?”

“애인이랑 딱 붙어있는데 유난 안 떨게 생겼어?!”

“세우지 마요. 여기서 하면 형 머리 박으니까.”

태섭은 다리도 제대로 못 펴는 이 좁은 공간에서 분위기에 휩쓸려 벌이게 될 정사를 상상하곤 눈을 감았다. 일단 삽입부터 버거운 위치였다. 게다가 무릎도 안 좋은 사람을 이렇게 구겨놓고 아래에서 박겠다고? 정대만이 아무리 수그려도 뚜껑에 머리를 쾅쾅 박을 것이다. 꿇은 무릎은 보호대 없이 딱딱한 바닥 위에서 바들바들 버티고 있겠지.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나가서 해줄 테니까 지금은 좀 참아봐요.”

여유로움을 가장한 태섭의 말에 대만이 눈을 치켜떴다. 그래봤자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론 요만큼도 무섭지 않았다.

“너...”

“왜요.”

“…제대로 안 하기만 해.”

태섭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강한 척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니까. 태섭은 대만의 허리에 팔을 둘러 안았다.

“언제 제대로 안 해준 적 있었나?”

메번 먼저 나가떨어지는 건 그쪽이면서.

“……얼른 나가기나 하자.”

태섭을 내려다보던 대만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진짜 안 섰는데, 조금만 더 있으면 일이 날 것 같았다.

대만은 몸을 추슬렀다. 이번엔 성공한다.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으리라. 송태섭이 고간에 허벅지를 비벼댄다고 해도! 이곳에서 빠져나간 뒤에 해결할 것이다! 난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니까!

태섭은 어쩐지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 같은 대만을 잠시 쳐다보다가 눈을 돌렸다. 빤하다, 빤해.

“간다, 태섭아.”

“예, 준비 됐습니다.”

“하나, 둘… 셋!”

쯔억.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크릴판에 금이 가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한 번 시작된 균열은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성공을 직감한 대만과 태섭은 더욱 세게 천장을 밀어내었다.

파삭!

마침내 불투명한 판이 깨져 나가떨어졌다. 자물쇠로 고정된 부분의 위쪽부터 호를 그리며 쪼개진 플라스틱판은 위에 붙은 불투명시트 때문에 완전히 떨어지지 못하고 덜렁거렸다. 대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빠끔, 부서진 사이로 나온 대만의 눈이 사방을 훑었다. 수상한 점이 없음을 확인하고 천천히 좁은 구멍으로 몸을 빼내었다. 그 과정이 상당한 유연성을 요함과 동시에 매우 민망한 자세-대만의 고간이 태섭의 코앞까지 왔다-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태섭은 그 짧은 시간이 가장 고역이었다. 대만이 나간 뒤 태섭도 몸을 일으켜 상자에서 빠져나왔다. 대만은 이미 옷을 털어내고 멀끔해진 상태였다. 태섭은 땀으로 엉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정리했다. 곧 대만이 아크릴상자로 다가와 자물쇠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어떤 놈이 이런 질나쁜 장난을 친 거야?”

“그러게 말이에요.”

정돈되지 않은 숨이 방 안에 흩어졌다. 너무나 평범한 호텔의 객실 같았다. 대만은 파김치가 된 몸을 비척비척 움직여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후, 더워.”

대만이 입고 있던 티셔츠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땀에 젖어 반투명해진 흰색 티셔츠가 대만의 몸에 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태섭도 더웠다. 정말, 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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