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놀

생활동반자.

백호열


장마가 지나간 여름날에 남은 것은 애닳음이 뭔지도 모르고 온 골목을 쓸고 다니는 폭염 뿐이다. 올려넘긴 리젠트가 무색하게 워낙 나이 있는 어른에게 싹싹하고 예의바르게 굴었던 호열은 이번에도 예쁨을 받았는지, 오래된 목조 멘션이 좀 허전할 정도의 짐정리를 하던 와중 창 아래 아랫집 노인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목장갑 손등으로 훔치곤 호열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노인에게 다가갔다. 사장님, 무슨 일이세요? 구불구불 컬이 들어간 백발을 쫌매묶은 노인이 화장기 없는 얼굴로 호열의 어깨를 툭 하고 치곤 잠깐 와보라고 했다. 호열은 뭐 하시게요, 하고 붙임성 좋게 굴었다. 얼굴 마주한 때가 해야 고작 집을 보러 왔을 때, 계약 할 때, 그리고 오늘만 세번이었는데, 이 둘은 마치 몇년 쯤 같은 멘션에서 세들어 산 것 처럼 친근한 임차인으로 보였다. 노인이 잠시 자신의 집 문 밖에 호열을 세워두고 집 안으로 들어오더니 먼지가 좀 붙은 선풍기 하나를 들고 왔다. 호열은 에구, 소리를 내고 노인의 허리가 구부러질까 염려하듯 그의 손에서 선풍기를 받아들었다. 먼지가 잔뜩 꼈네, 세척하는거 도와 드릴까요? 묻자 노인이 선선하게 웃었다. 학생 쓰라고. 그 말에 호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아하하. 경쾌하게 웃으며 선풍기를 한쪽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과장스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친구가 더위 엄청 타거든요. 노인이 호열의 숙인 어깨를 문질렀다. 그제서야 호열은 등을 바르게 펴고 무어라 입을 열려다가, 윗층에서 내지르는 꿱 소리에 선풍기부터 집어들었다. 죄송해요, 친구예요. 그리고 호다닥 계단을 타고 뛰어올랐다.

백호는 호열이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너 쉬려면 말하고 쉬랬지. 하며 괜히 조인트를 깠다. 호열은 이크 소리를 냈지만 피하지도 않고 맞아주었고, 웃으며 한 쪽에 선풍기를 내려둔 뒤 옵션으로 딸려있던(아마 이전에 살던 세입자가 두고 간 듯한) 여닫이문이 붙은 신발장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반듯한 자세로 몇년 신은 운동화를 구겨지지 않게 잘 잡아 벗은 뒤 안으로 들어왔다. 호열은 항상 그랬다. 물건을 그리 험하게 쓰지를 않았다. 철판이 든 책가방 외에 호열은 어떤 것이든 그 수명이 언제까지 가는지 안다는 모양으로 담백하고 단정하게 물건을 썼다. 백호는 호열의 양 발이 집 안으로 들어오고서야 비죽 튀어나온 입술을 도로 밀어넣었다. 이건 뭐냐? 아랫집 사장님이 주셨어. 백호는 호열이 들고 온 선풍기를 허리 숙여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표정이 화아 풀어졌다. 야, 밤에 쪄죽지는 않겠다. 호열은 장갑을 벗어 청바지 뒷주머니에 찔러넣고는 웃었다. 그러게.

강백호는 착실하게 농구를 계속했다. 뭐니뭐니해도 그의 강점이란 괴물같은 회복력을 가진 몸이라고, 이건 재산을 넘어 보물에 가깝다는 재활치료사의 말을 들으며 호열은 웃기만 했다. 안도인지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 가슴을 쓱 쓸어갔다. 그런데 학생이 백호 학생 보호잔가? 호열은 잠시 말이 없다가, 웃음을 계속 이었다. 일단은요. 치료사의 눈빛이 미묘해졌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수많은 사정과 이유가 빼곡하게 들어찬 날의 연속이다. 배려있는 사회인인 그는 젖살이 막 빠질 시기의 어린이가 덩치만 큰 동년배 어린이의 보호자로 나오는 상황에 더 뭐라 말을 얹지 않았다. 그렇게 이 년을 더. 북산의 강백호는 이제 북산을 떠나 다른 팀에 소속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 어느날 호열과 함께 전화통 앞에서 서성거리기를 몇 시간, 백호군단의 셋이 그러지 말고 돌아와 앉아 기다리라는 말을 했음에도 호열만큼은 안절부절 못하는 백호를 보며 현관 앞 복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백호야. 어. 많이 떨려? 뒤질 것 같다. 그 말에 호열은 꽃다발을 엮는 것 처럼 자작하게 웃었다. 그 때였다. 전화가 온 것은.

하여서 이 둘은 교복을 벗자마자 서로의 가정을 벗어나 독립을 했다. 상경의 혼란은 생각보다 엄청나서 일찍이 사회의 맛을 못 호열마저 처음 며칠은 눈이 빙빙 돌았다. 하물며 백호는 어쩌겠는가. 학교 선생님이 마크하여 그를 돕지 않았더라면 서울에 붙일 짐이 부산에 가 있었으리라. 너 임마, 호열이한테 잘 해. 방학동안 집을 알라본 뒤 가계약을 체결하고 돌아온 학교에서, 찡그리듯이 웃으며 졸업장을 말아든 동급생은 백호에게 그렇게 말했고, 호열은 나만한 친구가 어디있냐? 하고 빽 소리지르는 백호의 두걸음 뒤에 서서 어깨나 으쓱였다. 백호가 몸을 휙 돌려 호열을 보았다. 야, 나만하면 나쁘지 않지? 호열이 백호를 보며 뜸을 들인다. 평소라면 툭 나올 답이 바로 나오지 않자 좋았던 기세가 물에 섞이듯 흐려진다. 나만하면… 나쁘지 않지? 전보다 좀 꺾인 목소리에, 호열은 못이기고 다가가 백호의 어깨에 몸을 쏟아낸다. 웃음이 구름처럼 성기다. 응, 너 되게 좋아. 엄청나. 장난 아니야. 그제서야 강백호는 몸을 반듯하게 세우곤 씩식해졌다. 놀러와라 임마!

다시 시간은 이때로 돌아온다. 호열은 드라이버로 조그마한 선풍기의 부품을 능숙하게 분해해 차곡차곡 쌓아두었고 백호는 어느정도 정리된 집안을 쓸고 닦아냈다. 둘 다 손 가는 지점이 어디인지 아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마냥 서툴지 않은 행동이었다. 호열이 좁은 욕실 안으로 들어가 수전을 돌려 낡은 선풍기의 먼지를 닦아낸다. 물 소리가 청명하다. 백호는 방에 연결된 베란다의 넓은 창문을 열고 주먹만한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즐겼다. 뒷덜미에 맺힌 땀이 아주 조금씩 말라갔다.

호열이 깨끗해진 선풍기를 들고 와 코드를 꽂고 미풍 버튼을 눌렀다. 백호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바람으로 호열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그에게 몸을 붙여 바람을 맞았다. 호열은 잠시 몸을 물렸다가 그냥 다시 백호에게 몸을 붙인 채 같이 바람을 맞았다. 야, 진짜 덥다 호열아. 그러게. 쩍 하고 하품하는 옆얼굴이 호열의 눈에 담긴다. 호열은 목이 좀 마르다고 생각한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한숨 잘래? 하고 운을 띄운다. 백호가 쩝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시다가 일어나기 귀찮은데, 하고 답했다. 호열은 벌렁 드러눕더니 여전히 바람을 맞는 배 위를 툭툭 두드렸다. 베고 누워. 안 무겁냐. 무겁지. 짜식. 백호는 호열의 배 위에 벌런 드러눕곤 살살 부는 인공의 정취에 흠뻑 젖었다. 얼마 못 가 작게 코 고는 소리가 호열의 귀를 간지럽힌다.

이 무게감. 언젠가 떠내보내야 하는 이 감촉들. 호열은 쉬이 눈 감지 못하고 나무를 꿰어맞춘 천장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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