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헌 일기

사랑은 파울을 타고 카페 협력작


1993/10/10

6:17 기상

신현철이 알람 시계 부수기 전에 일어나라고 성질내는 바람에 송태섭이랑 데이트하는 꿈 꾸다가 깼다. 연습량 두 배로 늘리려다가 참았다. 아침에 있었던 일을 전화로 얘기했더니 뭐가 그렇게 웃긴지 한참 웃는다. 송태섭은 웃음이 많다. 웃기만 잘 웃는 건 아니고 감정 표현이 풍부하다. 인내심이 없어서 화도 자주 내고, 화를 냈다가도 금방 사과하고, 풀 죽은 것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걱정할 때는 눈썹이 팔자가 되고, 서운한 티를 못 숨겨서 입술을 삐쭉이는 것도 재밌다. 하나부터 열까지 나랑은 다 다르다. 

1993/10/23

6:02 기상

매번 저기, 거기, 그쪽, 이명헌 씨. 하는 게 거슬려서 형이라고 부르는 게 부끄러우면 이명헌이라고 반말해도 된다고 했더니 바로 형이라고 부른다. 기분 좋은 거 티 안 내려고 전화 빨리 끊었다. 

1993/11/1

6:05 기상

송태섭이랑 싸웠다. 내가 잘못한 건가? 

1993/11/2

6:01 기상 

전화했는데 여동생이 받았다. 송태섭 바꿔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집에 없어서 안 된다고 하던데, 이 남매는 거짓말은 못 하는 거 같다. 있으면서 없는 척을 하네. 열받게. 

1993/11/4

6:01 기상 

전화가 올지 안 올지도 모르면서 매일 저녁 아홉 시마다 전화기 앞에서 기다리는 것도 못 할 짓이다. 

1993/11/7

6:00 기상 

송태섭에게 전화가 왔다. 받자마자 윈터컵 준비로 예민해져서 화를 냈다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붉은 머리 녀석의 재활도 아직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타 팀 주장으로 충고를 해줘야 하는 건지, 그냥 송태섭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해줘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넌 잘 할 거라는 뻔한 대답만 했다. 내가 생각해도 별로다. 

1993/11/10 

5:30 기상 

오랜만에 외출 허가를 받아서 카나가와에 갔다. 기차역 앞에서 기다리는 송태섭이 머리를 내리고 있어서 전혀 못 알아봤다. 묻지도 않았는데 송아라가 갑자기 약속 있다고 욕실을 쓰는 바람에 머리할 시간이 없었다고 투덜거렸다. 머리에 뭘 그렇게 공을 들이는지 잘 이해는 가지 않지만, 본인에게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건 알겠다. 혹시 빡빡머리는 싫냐고 물어봤더니 하고 싶어도 두상이 예뻐야 한다고 했다. 그런 의미로 물어본 건 아니었는데…   

아무튼 머리 내리니까 할아버지가 키우는 강아지 뽀뽀랑 똑같이 생겼다. 

태섭이 좋아하는 액션 영화를 보러 갔다. 오토바이 볼 때마다 눈이 반짝 빛나는 게 꼭 가면라이더 보는 어린애 같아서 웃겼다. 다 끝나고 영화 어땠냐고 물어보는데 별로 기억나는 건 없어서 할 말이 없었다. 송태섭이 귀여웠고 손도 잡을 수 있어서 재밌었다고 말할 수도 없고. 가끔은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송태섭 손은 농구하는 거 치고 되게 작은데, 단단하다. 

1993/11/20 

6:17 기상 

신현철이 알람 시계를 집어던졌지만 살아남았다. 

1993/12/1

6:03 기상 

윈터컵 끝날 때까지는 농구 얘기는 서로 금지하기로 했다. 무슨 얘기할까 하다가 할 얘기가 없어서 감독님이 보는 주간잡지에 나오는 아저씨 개그를 들려줬더니 숨넘어가게 웃는다. 

1993/12/6

6:06 기상 

매일 매일 하는 게 농구 뿐이라 무슨 대화를 해도 농구로 흘러간다. 끝말잇기라도 하면 어떻겠냐길래 알겠다고 했다. 이제 주간잡지 대신 사전이라도 들고 다녀야 할 거 같다. 

1993/12/10

6:03 기상 

끝말잇기 하다가 나도 모르게 고백했는데, 송태섭은 못 알아챈 거 같다.  

‘특종’ 다음에 ‘좋아해’라고 말했는데 ‘해질녘’ 하고는 자기가 이겼다고 신나서 전화 끊었다. 사람이 너무 황당하면 뒷통수가 얼얼해진다. 좋아해는 단어가 아니라서 게임 룰 위반이다. 끊긴 전화기 붙잡고 5분 넘게 서있다가 감독님에게 한 소리 들었다. 

1993/12/24 

6:05 기상했다가 연습 없어서 다시 잠 

크리스마스이브라고 감독님이 파티해 주셨다. 윈터컵 우승한 뒤로 얼빠져 있는 녀석들 정신 좀 차리라는 말도 함께였다. 우승이 특별할 것도 없는데 지난 인터하이가 역시 충격이긴 했나. 윈터컵 마지막 결승 상대가 북산이어서 다들 속으로 긴장했던 거 같다. 

송태섭이랑 코트를 마주하고 설 때마다 농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준우승 축하한다고 말이라도 할까. 한참 고민하다가 서럽게 우는 빨간 머리 달래주는 송태섭 얼굴도 그만큼 빨개져 있어서 그냥 나왔다. 

1994/1/1 

윈터컵 이후로 전화 한번 없다가,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편지가 왔다. 날짜 일부러 맞춰 보냈나. 새해에 딱 받은 게 신기하다. 농구부도 12월 31일로 공식 은퇴를 해서 이제 정규 훈련도 없다. 하루가 너무 길어서 기분이 이상하다. 

1994/1/15 

오랜만에 카나가와에 갔다. 늘 기다리는 기차역에서 태섭을 기다리는데 뒷짐을 지고 어정쩡하게 걸어오기에 뭔가 했더니 장미꽃을 들고 있었다. 성인 된 거 축하하는 선물이라는데 기분이 묘해졌다. 태섭은 아직 일 년 남았네. 하니 또 불량한 얼굴을 했다. 부끄러울 때 짓는 표정이라는 걸 이제는 바로 알아볼 수 있다.  

오늘 보니 송태섭 왼쪽 귀에 늘 하고 다녔던 피어싱이 안 보인다. 생각해 보니 첫 만남 이후로 차고 나온 적이 있었나? 혹시 그때 내가 지적했던 걸 신경 쓰고 있나… 

1994/1/16

하루 종일 신경 쓰여서 결국 전화했다. 피어싱 안 하냐고. 자연스럽게 물어봤어야 하는데 삑사리 난 거 같아서 전화 끊어버리고 싶은 거 겨우 참았다. 근데 송태섭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형이 싫어한다고 해서 안 한다고 하길래. --------------------------------

선물은 피어싱으로 하기로 했다. 내가 본 송태섭은 한번 좋아하기 시작하면 끈질긴 타입이라, 좋아하는 걸 나 때문에 그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를 좋아한다면 그 마음이 오래 변하지 않으면 좋겠다. 

- 2024.6.2

카페 협력으로 함께할 수 있어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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