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 낭만주의보
호열백호 | <슬로우 스타터와 버저 비터>로 발간된 글입니다.
펜슬 서비스 시작된 기념으로 호백 첫 글을 가져와보았어요~ 다른 사이트에 올린 글에서 달라진 건 없음!
<슬로우 스타터와 버저 비터>로 7월 대운동회에서 발간된 글입니다.
날이 좋다. 드문드문 구름이 떠 가고 적당한 바람이 불었다. 날은 목요일, 애매하게 나쁘지 않은 시간. 괜찮은 오후, 잠시 놓쳤다가 정신을 차리면 지나있을 때.
이도 저도 아닌 날. 기억에 남지 않을 만큼 평범하고 단출한 저녁.
고르고 골라 아무것도 아닌 날에, 양호열은 실연하기로 했다.
열렬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닌걸까?
절실한 애정을 호소하는 텔레비전 속 사람들을 바라보며, 양호열이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새천년이 오고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다. 좀 더 어릴 때에는 사랑의 열병에 밤마다 앓으며 99년 말일에 지구가 닫혀버리길 바랐던 것도 같은데 이젠 그런 치기도 없다. 질투도 해봤고 원망도 해봤다. 가끔은 돌아버릴 것 같았고 가끔은 아주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타오른 적은 없다. 홀로 이를 악무는 한이 있어도 양호열은 침묵했다. 그의 연정은 언제나 은밀하고도 고요했고 그래서 누구의 눈에도 띈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도 들어가질 못했다.
그는 변명한다. 어릴 적부터 친했던 친구를 사랑한다면 이럴 수밖에 없노라. 가장 친한 친구의 자리라도 유지하자면 침묵할 수밖에 없노라고.
별로 이상한 건 아닐걸.
그래, 그는 사랑을 고백하길 오래 전에 관두었다. 새천년 직전의 날에는 천지를 울리는 카운트다운 앞에서 한탄도 해 보았지만, 결국 시대는 다시금 천년기를 맞았다. 양호열은 매정한 시간 앞에서 납득했다. 아무렴, 세상이 망하면 안 된다. 백호는 농구를 해야 하니까. 그는 앞으로도 잘 나갈 테니까. 그가 사랑하는 세상에서, 그를 사랑하는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테니까. 양호열은 고작해야 제 사랑 때문에 그게 닫히길 바라지 않기로 했다.
그를 애태우는 것은 환하게 웃는 강백호였으므로.
해서 십여 년. 시작 시점을 정확하게 헤아릴 수 없으므로 적당히 그 즈음. 강백호와 양호열이, 백호군단이 모두 어른이 되고, 각자의 길로 떠나간 뒤에. 프로 농구 선수 강백호의 이름이 꽤나 유명해졌을 때에. 친구들도 하나 둘 결혼하고, 양호열 역시 나쁘지 않은 생활을 이어나갈 때 즈음에.
양호열은 결정했다. 이쯤이면 되겠노라고.
날을 고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까다롭게 결정했다. 누구의 생일도 가깝지 않은 날. 어느 때도 아닌 날. 아무것도 아닌 요일. 특별할 것 없는 날씨. 다시 되새길 수도 없는 날. 그는 준비했다. 실연이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무엇 하나가 그 날에 박혀 기억 속에서 내내 되새겨지는 일은 거절하고 싶었다. 그런 날만 되면 실연을 되새기며 가슴 아프고 싶지 않았다.
자리를 잘 보는 거지. 양호열은 스스로를 평가했다. 그는 강백호처럼 맞아가며 싸우는 타입이 아니다. 맷집이 센 것과 타격을 입는 건 다른 이야기니까. 고통이 축적되면 부지불식간에 쓰러지기 쉽다. 호열은 자신이 입을 고통을 계산했다.
실연 뒤에도 백호와 친구로 지내야 하니까. 너무 많이 아파선 안 된다.
그야 그를 좋아하는 건 제 일이었다. 멋대로 좋아해놓고, 멋대로 사랑을 고백하고, 멋대로 떠날 수는 없다. 양호열은 강백호의 인생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조각 중 하나다. 그도 그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연인은 될 수 없지만, 어쩌면 ‘가장 친한 친구’란 건 연인보다도 더 깊은 법이니까. 영원히 네 사랑이 되지는 못하겠다마는. 그래도 영원한 친구로는 남아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실연하는 것은 양호열이다. 강백호가 그래선 안 되지.
호열은 백호와의 우정은 실연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고백하고, 거절당하고, 멋쩍게 웃으면서 알았어, 그럼 친구로 지내자. 난 괜찮아. 그거면 되겠지. 백호는 당황할 테고, 그를 살피겠지만, 그래도 양호열이 다름없는 친구로 남는다면 곧 그도 괜찮아질 것이다. 양호열이 강백호에게 그 정도는 되겠지. 사랑을 고백한다고 해서 나를 멀리하진 않겠지. 이 마음만 떠나보낸다면, 이따금씩 고개를 드는 ‘혹시’ ‘어쩌면’ ‘백호도’ 따위를 이 실연으로 죽여버린다면, 이 우정에는 더 이상 어떤 금도 가지 않겠지.
확신이 생기기까지 십여 년이 걸렸다. 실연 후에도 백호가 그를 떠나진 않을 거라는 확신.
그동안 백호는 농구선수로서 안정을 찾았다. 친구와 동료가 아주 많이 생겼고, 그를 순수하게 애정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게다가 그는 한번 경험했다. 소연이에게 건넨 고백이 정중하고도 신중한 거절로 돌아온 후, 여전한 친구로 지낸다는 평범한 경험을. 곁에서 호열 역시 학습했다. 백호도 애정을 우정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걸. 그렇다면 자신과도 계속 친구로 남아주리라는 것을. 서른 살의 강백호는 그랬다. 그는 안정된 사람으로 자라났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농구가 있었다. 강백호는 사랑을 불태운다. 온 몸을 바쳐서 사랑을 한다. 림이 부서져라 때려넣는 슬램덩크, 환호 속에서 부르는 구호. 우리는 할 수 있다. 천재 강백호가 나가신다. 가자, 한 골 더 넣자. 걱정마, 임마! 이 몸이 해낼 테니까.
가자! 외치는 그 길에 양호열은 없지마는. 그래도 백호가 경기를 마치고 거는 전화선 너머에는 양호열이 있었고 그건 변하지 않을 것이다. 관중석 가장 앞 자리. 퇴근길의 곁 자리. 뜨겁게 타오르는 강백호의 인생에도 낮과 밤이 있다. 양호열은 열렬하던 해가 지고 난 뒤의 노을에 서 있었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일부가 되어.
이거면 됐다. 양호열은 자신할 수 있었다. 백호가 그래도 나를 미워하진 않으리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 고백해도 떠나지는 않으리라. 비열한 계산속이라고 가슴 속 누군가가 비판했지마는, 어쩌겠는가. 그는 고통을 계산한다. 이 정도 아픔이라면 백호의 곁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 사랑에 몸져누워 친구를 외롭게 만들지 않아도 된다.
중학 시절의 어느 밤, 강백호가 유난히 외로워졌을 때에. 양호열은 강백호를 떠나지 않기로 맹세했으므로. 그는 신중해야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네게 실연하고도 너를 떠나지 않으려 한다. 그건 네게 너무 아픈 일일 테니까.
자, 그럼 준비가 됐다. 양호열은 늘 하던 대로 강백호가 연습에서 돌아오는 길목을 지켰다. 그 역시 퇴근하는 길이었다. 약간 긴장이 되어 손을 문지르고 있었더니, 백호가 버스에서 내린다. 여, 이제 늘 비슷한 길이로 유지하는 스포츠머리가 오늘도 멋들어졌다. 그와 함께 세팅하던 리젠트 머리는 아니지만. 그는 이제 그 머리를 두고 아쉬워하기도 그만두었다. 나이를 먹고도 아직 머리를 세우는 건 양호열의 괜한 미련이었으니까. 호열이 손을 흔들었다.
“오늘도 잘 했어?”
“그러엄, 끝내주지.”
백호가 신나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이번에 팀에 새로 들어온 선수가 어쩌고. 자기 만큼은 아니지만 실력이 대단해서 저쩌고. 그렇게 말하는 강백호도 서른이 넘어가자 충분히 의젓해졌다. 마냥 천둥벌거숭이도 아니었고, 신입 후배를 이끌어줄 만큼은 됐다. 백호가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 가르쳐주고 있는 걸 보면 양호열은 정말이지…….
아니, 이게 아니지. 호열이 머리를 슥슥 넘기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른스러운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뛴다는 건 곧 실연할 사람에게 좋은 감성이 아니었다.
강백호는 가는 길에 만두를 한 팩 포장했다. 야식으로 먹을 모양이었다. 내일 아침에 출근해야 하니 오늘 밤엔 같이 놀 예정이 없었다. 이렇게 수다 떨며 들어가서, 각자 자기 집에서 하루를 정리하고 잠들면 그만이다. 저녁을 걸렀으니 호열 역시 집에 가서 컵라면을 하나 먹을 생각이었다. 괜히 잠 설치지 말고 푹 자야지. 그리고 아침엔 출근을 하고, 할 일을 하고, 하루를 보내고, 다시 퇴근길에 만나서 집에 가면 된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양호열은 마침내 저질렀다. 새천년이 도래하고 나서야 고백할 수 있었던, 끓지 않는 연정을.
백호야, 나, 너를, 좋아해.
물론 말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의 사랑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의 어린 시절에 시작했음을. 그때부터 나는 너를 그렸고 네 그 끝없던 실연의 연장전에 늘 서 있었음을. 네가 패배를 기록하고 돌아오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너를 위로했음을. 그 비겁함에 가끔 역겨워하면서도 별 수가 없었음을. 그런 사랑은 너무 무거우니까. 네가 거절하기엔 너무 고약한 무게니까. 양호열은 본능적으로 무게를 줄였다. 강백호에게 알릴 것은 작은 부분이면 됐다. 백호는 몰라도 돼. 이것은 네가 조심스럽게 툭, 걷어차고 갈 만큼의 무게여야 했다.
그러나 그 많고 많은 계산의 종점에 서 있는 것은 강백호였다.
양호열이 언제나 상상 그 이상으로 사랑하고 마는 강백호.
당황으로 멍해졌던 그가 침묵한다. 침묵이 길어지자 불안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양호열이 웃었다. 미안, 갑작스러웠나? 머뭇거리던 백호가 묻는다.
“어, 음……. 진심이지? 장난치는 거 아니고?”
“으응.”
내가 이런 걸로 네게 장난을 치겠어? 호열은 자신의 마음을 반신반의하는 그 표정 앞에서도 침착했다. 백호가 어려워할 것쯤은 미리 생각해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 뒤로 따라붙는 말 만큼은 예상하지 못했다. 머리를 벅벅 문지른 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근데 나, 좀 더 생각해봐야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되냐?”
“으응?”
거절하는데 무슨 생각씩이나? 눈을 깜빡인 호열이 당황해 손을 내저었다.
“어, 백호야. 그렇게 무겁게 생각할 거 없어. 그냥 편하게…….”
“아니, 인마.”
너 내가 했던 말 기억 안 나? 강백호가 약간 붉어진 귓가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생각도 안 해보고 거절하는 거 싫다고.”
“그랬지…….”
갑작스러운 고백이라 당황스러우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되는 거 아니야? 왜 갑작스럽다고 갑자기 거절하는 거냐고! 어느 날의 강백호가 징징거리며 했던 말이었다. 고등학생 때의 일이지만. 안정을 찾은 백호는 굳이 여자애들을 쫓아다니며 갑작스러운 사랑에 빠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양호열이 얼떨떨하게 강백호를 올려다보았다. 멀뚱하게, 오래된 친구를 내려다보던 그가 머쓱하게 고개를 돌렸다.
“음, 그럼 생각 좀 해본다.”
“그, 그래. 고마워…….”
해서, 양호열은 컵라면을 사지도 못하고 홀로 집으로 돌아왔다.
전혀 예상해본 적 없는 ‘보류’라는 답변을 들고서.
“아니…….”
호열이 마른세수했다. 닫고 들어온 문 너머로 빗소리가 울린다. 열어둔 창문으로 빗방울이 들이친다. 쏴아아, 시원하게 내리기 시작하는 빗줄기 아래서 호열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일기예보까지 보고 고른 날씨인데 이게 웬 소나기야. 갑자기 내린 비처럼 강백호는 그랬다. 하고많은 날 중에 아무것도 아닌 날을 고르고 골라 내민 고백은, 그가 대비한 실연은 미뤄졌다. 큰일났다, 양호열은 참 큰일이었다. 이제 소나기만 내리면 널 생각하게 생겼다. 네 답이 무엇이건 간에, 빗방울과 함께 떨어지던 ‘생각 좀 해본다’에 마음 팔게 생겼다.
그래도 싫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상처받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쿵, 쿵, 거세게 뛰는 심장을 내려다보며 양호열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지하게 생각해보겠다는 네 말이 어찌나 기쁜지. ‘혹시’ ‘어쩌면’ 그가 살해하려던 마음이 시원한 빗줄기를 맞으며 춤을 추었다. 이대로 진지하게 생각한 거절의 답이 돌아오기 전에 세상이 끝나길 바라게 생겼다. 천년의 말일에도 꿈꾸지 않기로 한 걸 백호야, 한 마디로 이렇게 되돌리고 말다니. 그의 사랑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경종이 울린다. 이를 어째. 실연의 이후에 마음을 정리하겠노라고 다짐했는데. 이제야 진짜로 진실된 너의 친구가 되겠노라고 맹세했는데. 너를 혼자두지 않기 위해 그 많은 아픔을 손수 계산했는데. 강백호는 양호열을 가만두질 않았다. 그가 불을 든다. 백호가 성냥을 그었다. 새천년, 너를 첫 사랑했던 날은 이미 옛적이 되어버렸는데. 창밖의 네온사인이 창가를 적색으로 물들인다.
양호열은 열렬한 적 없다. 불태우지 않아도 사랑이다. 불사르지 않아도 사랑이었다.
하지만 너는 나를 쉽게도 태우는구나.
불 앞에서 마음이 춤을 춘다. 낭만을 주의하세요! 경보처럼 울리는 맥박 앞에서 호열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로맨스는 혼자 시작하는 것도, 혼자 끝내는 것도 아니었다. 소나기와 함께 쏟아지는 불확실한 기대와 설레이는 연정이 한 점 한 점 마음을 그었다. 탁, 타닥, 불꽃이 튄다. 사랑이 그를 방화한다. 양호열이 입술을 벌리고 숨을 토해냈다. 마음이 뜨거웠다.
강백호가 그의 실연을 거절했다. 이제 강렬해진 이 밤 잠을 설치며 양호열은 한바탕 앓을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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