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헌태섭 영화합작

파워오브도그

명헌태섭 영화합작

초벌 by 안료

이것은 내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없을 승리의 기록이자 죄로 얼룩진 사냥의 기록이다.

고개를 들었다. 가슴팍에서 느껴지던 고동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빠르게 식어가는 살덩이가 체온을 전부 빼앗아가는 듯 했다.

딱딱 이가 부딪혔고 소름이 돋은 살갗엔 솜털까지 빳빳하게 서버렸다. 커튼 사이로 희미한 새벽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온 사방에서 죽음의 냄새가 났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안식이 될 수 없는. 나는 그의 손을 그러쥔 채 한참을 기다렸다.

무엇을.

언젠가 치러야할 죗 값을. 그것이 다가올 때를.

꼬르륵 배에서 음식을 찾는 소리가 났다.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의 욕구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토록 투명히 제 기능을 하려 든다. 의자를 밀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땀에 절은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허락할게요.”

그를 위한 마지막 축복이었다.

*

야생에서 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삶을 포기함과 상통한다. 거친 자연의 한 가운데에서 서부 남자들의 생은 서열로 시작히거 끝이 났다. 언제고 뒷덜미를 물 준비가 된 자들 사이에서 그는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었다. 광기를 품은 새카만 눈은 얼어붙은 채 늘 서늘한 한기를 뿜고 있었다.

나의 새아버지인 후카츠 지로의 형, 후카츠 카즈나리. 그를 처음 본 날을 떠올렸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점심이었다. 문을 열고 가게 안을 훑는 남자의 눈빛이 형형했다. 인근에서 동생과 함께 대규모 농장을 하고 있다던 그는 정식 목장주가 된 기념으로 이곳을 방문한 것이었다.

모처럼 맞는 단체 손님에 도움이 되고 싶었던 나는 여동생 안나와 함께 종이를 오려 꽃을 만들어 테이블에 장식했다. 안나는 아직 어려 손이 느렸기에 거의 모든 작업은 내 손에서 이루어졌다.

남자와 그의 일꾼들은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거칠게 소리치며 잔으로 테이블을 쾅쾅 쳐댔다. 탐색하는 시선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던 그가 테이블 위의 종이꽃을 꺼내들었다.

“어떤 귀여운 아가씨가 이 꽃을 만든 건지?”

싱글거리는 낯이었지만 가시 숨긴 말투가 날카로웠다. 본능적으로 적개심을 감지한 안나가 우물쭈물거리는 사이 안나를 숨기고 내가 나섰다.

“제가 만들었습니다. 마음에 드시지 않는 걸까요?”

그는 짐짓 놀란 표정을 하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계집아이가 만든 줄 알았다며 사내에게 그런 말을 해 미안하다 사과했다. 그것이 진짜 사과가 아니란 것쯤은 거기 있는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모욕적인 언행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내 뒤로 다가온 그는 나의 허리를 그 커다란 손으로 잡아챘다. 화들짝 놀라며 몸을 비틀었지만 허리에 가해지는 힘만 세질 뿐이었다.

“너무 가늘어서. 기분 나빠 말길. 이 정도면 여자 대신 안겨도 아무도 모르겠는데?”

그가 웃자 나머지 사람들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나는 수치심에 벌개진 얼굴과 함께 주방으로 몸을 피했다. 태어나 처음 접한 희롱의 말에 눈가가 붉어졌다. 무슨 일이냐는 어머니의 말에 대답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밖으로 나섰다. 상황을 파악한 어머니가 그에게 무어라 항의하는 듯했지만 되돌아온 건 비아냥 뿐이었다.

그곳에서 우린 철저히 약자였다. 타겟을 괴롭히며 자신의 야생성을 과시하는 집단 앞에서 뼈저린 무력감을 느꼈다. 기분이 더러웠다. 두 번 다시 마주치지 않기만을 바랐다.

바람이 무색하게 다음날부터 지로가 찾아왔다. 형을 대신해 어머니께 사과하고 싶다고 했다. 은근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지로는 매일 같이 가게에 발걸음 했다. 어머니는 점차 지로에게 마음을 열어갔다. 여름이 지나고 들녘이 온통 노란빛으로 물든 계절, 지로는 어머니에게 청혼했다. 후카츠가의 반대가 심한 듯 했지만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혼인 신고를 하고 어머니는 지로와 집을 합치기로 하였다. 때마침 나는 대학에 합격해 기숙사로 떠났다.

편지를 통해 종종 소식을 전해받았다. 어머니는 만나보았던 여느 남자들과 달리 감정 표현이 풍부한 지로에게 나날이 빠져드는 듯 했다. 그러나 카즈나리는 달랐다. 가끔 그와의 서먹한 사이를 걱정하는 듯한 편지가 오긴 했지만 지나가듯 언급된 말을 깊이 염두에 두진 않았다. 그것이 문제였을까.

의학 전공을 위해 준비하는 선행 과목들을 복습하고 나면 진이 다 빠져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어머니와의 편지도 점차 뜸해져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 학기가 지나고 맞이한 첫 방학, 드디어 집으로 향했다.

이제 더 이상 내 옷을 물려받지 않을 안나의 옷차림을 상상하며 설레던 마음은 몬테나의 농장에 도착한 순간 산산조각났다.

그곳에 안나는 없었다. 남은 건 알콜중독에 빠져 파리해진 낯빛의 어머니 뿐이었다.

내가 떠난 후 카즈나리는 짐덩이를 치우듯 안나를 기숙학교에 쳐박았다. 홀로 남은 어머니를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로는 최선을 다했지만 자주 집을 비워야했고 그 공백은 오롯이 카즈나리와의 시간으로 채워졌다. 그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 어머니를 괴롭혔다. 감히 동생을 꾀어 팔자를 펴보려한 과부를 제발로 걸어나가게 하기 위해서.

뿌리내리기 어려운 후카츠가의 영토에서 어머니는 그렇잖아도 애쓰고 있었다. 은근한 멸시와 핍박은 그런 어머니에게 치명적인 독이었다. 불안할 때마다 한 잔씩 마시던 술은 손쉽게 어머니를 함락시켰다. 술만이 그녀를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분노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지로를 사랑했다. 지로를 사랑한다는 믿음은 마지막 보루였다. 그것마저 잃는다면 어머니는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을 테다.

숨막히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어느 쪽도 물러서지 않는 싸움에서 나는 점점 지쳐갔다. 매일 아침 달력의 날짜를 헤아렸다. 학교가 그리웠다.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쳐 얄량한 지식더미에 파묻히고 싶었다.

*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다. 목장을 거닐던 나를 일꾼들이 에워싸고 조롱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우두머리가 나를 싫어한다는 걸 그들은 잘 알았다. ‘계집애’, ‘호모새끼’. 뻔한 말들이 쏟아졌다. 타격은 없었다. 피식자가 되고 싶지 않은 몸부림이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무심한 얼굴로 내가 해야할 일에 집중했다. 그 때였다. 나를 바라보던 카즈나리의 눈에 순간 이채가 돌았다. 그날부터 그는 나를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료타-.’하고.

나의 무엇이 그의 마음을 동하게 한 것인지 그때는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갑작스레 친근히 구는 그가 낯설 뿐이었다.

그와 둘이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매일 함께 식사를 했고 식사 후엔 말 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나를 보는 그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는 걸 모두가 알았다. 자연스레 괴롭힘도 줄었다. 왕을 거스르고 싶어할 신하는 없으니까. 카즈나리가 미우면서도 그를 거역할 수 없었다. 나는 약했고 나를 보호해주는 강함은 너무나 강렬한 유혹이었다. 누리는 편안 속에서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은 그에 비례해 커져만 갔다.

*

“오늘은 조금 멀리 나갈 거다. 옷을 단단히 입도록.”

조용한 새벽, 카즈나리가 나를 깨웠다. 말을 타고 농장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으로 향했다. 나무가 우거진 곳에서 그가 멈춰섰다. 덤불을 헤치고 들어가자 길이 나타났다. 한참을 들어가보니 탁 트인 공터와 호수가 보였다. 가만히 호수를 바라보던 그가 입을 떼었다.

“이곳은 외로운 곳이지.”

“그러나 외로움을 드러내는 건 허락되지 않아. 기억해둬라.”

“.......”

“울고 싶어질 때면 여길 찾아, 료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반듯한 이마, 일직선으로 뻗은 콧날, 두툼한 입술,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 두려워만했던 그의 눈에서 일순간 감정이 떠올랐다 점멸했다. 그것은 어머니의 눈과 같았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 당하는 자의 필연적인 불안과 외로움.

그가 손을 내밀었다. 굳은 살이 덕지덕지 붙은 상처투성이의 손. 신체의 남성성을 떠나 영혼까지 남성임을 증명하기 위해 거칠게 굴러온 삶의 흔적. 그위로 내 손을 겹쳤다. 따스했다. 그 따듯한 체온에 감기듯 빠져들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 해갈할 수 없는 감정이 목구멍을 쳤다. 그러나,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니, 단 하나 뿐이었다.

매일 밤 카즈나리는 밧줄을 꼬기 시작했다. 내가 학교로 되돌아가기 전 완성된 밧줄을 선물로 건네고 싶다 말했다. 그의 스승이 그에게 건네었던 것과 같은 밧줄을.

그 바람은 정확히 절반만 이루어졌다. 카즈나리가 밧줄을 완성했던 아침, 그는 쓰러졌고 영영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

컴컴한 창밖으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허공을 가르는 빛줄기가 멀리서 보였다. 다시 천둥이 친다. 몸을 뒤틀며 경련을 일으키는 카즈나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 말했다.

나도 모르게 떨었던 것 같다. 유리창에 그의 얼굴이 비춰지고 있었다. 고통에 일그러지는 얼굴. 그의 뺨을 타고 빗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탄저병이 의심된다고 했다. 지로는 고개를 저었다. 카즈나리는 절대 동물의 사체에 손을 대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만히 웃었다. 그가 내게 말 타는 법을 가르치고 처음 스스로 먼 길을 나섰던 날, 절벽에서 가져온 병들어 죽은 소의 가죽을 떠올렸다.

그는 내게 언제나 남자가 될 것을 종용했다. 가족을 지키지 못한다면 진짜 남자가 될 수 없다. 나의 손에 모든 것을 쥐어준 건 카즈나리, 바로 그였다.

무릎을 꿇고 앉아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마지막 고통 속에서 그의 눈이 나를 보려 애쓰고 있었다. 그 아련한 시선에 온몸이 에이는 듯했다.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시편 22:20)

카즈나리의 눈이 쩡 하고 갈라지는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의 내면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계속해서 속삭였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당신의 밧줄로 하는 최초의 사냥을 직접 보여드릴 수 있어 다행예요.”

축복과도 같은 고해가 끝났다. 딱딱하게 굳은 카즈나리의 몸을 보듬어 안았다.

“이제 편안하신가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밧줄을 쓰다듬다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라텍스 장갑 아래 느껴지는 거칠한 감촉이 마치 호숫가에서 만졌던 그의 손 같다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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