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청춘송(靑春頌)

청춘을 빛나게 하는 것, 무모함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걸까. 경기 중간에 교체 당했던 것? 아니면 처음부터 온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것? 그것도 아니라면... 그 사당에 가서 소원을 빌었던 것일까.

[ 산왕 공업 고등학교 인터하이 첫 경기에서 패퇴. ]

산왕공고의 인터하이 패배는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 무패 신화 최강산왕 ' 이라는 이름 아래로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그들을 응원했던 것을 새카맣게 잊은 듯 얼굴을 붉혀가며 그들의 패배를 지탄했고 경기에 임했던 선수들은 생각해 본적도, 겪어 본적도 없는 패배를 받아들이기도 전부터 사람들의 야유를 받아내야만 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슴 속에서 흘러넘치다시피 하는 감정들을 추스르고 또 추스르는 것 뿐이라, 선수들은 숙소에 돌아가 짐을 챙겨 버스에 오를 때까지 그것이 설령 슬픔이라고 해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이윽고, 버스가 움직이고 타인의 시선이 걷히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가 그들뿐일 때가 돼서야 선수들은 억누르고 있던 울음을 울분과 함께 터뜨렸다.

원래의 계획이라면, 언제나의 상황이었다면 경기장 근처에 얻어놓은 숙소로 돌아가 다음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을 자신이 어째서 돌아가는 버스 위에 있는 건지. 우성은 닦아내고 닦아내도 제멋대로 흐르는 눈물에 수건을 제 눈두덩이 위로 던지듯 덮어두며 눈 위로 드리워진 어둠을 노려보았다.

 차량 특유의 엔진소리 말고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버스 안. 누구인지 모를, 눈물을 참으려 애쓰는 소리를 시작으로 점점 번져가는 훌쩍임에 우성은 귀를 틀어막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충동을 억누르며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미 들어버린 소리로 인해 제멋대로 머릿속으로 파고들어 오는 생각을 막기에는 턱 없이도 모자라서 우성은 눈을 감는 것을 포기하고 이미 들어찬 생각들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 내가 그때 공을 넣기만 했었더라도... 팀을 승리로 이끌지도 못했는데 대체 누가 에이스야 정우성. '

경기 중반부에 넣지 못했던 공이 왜 이리도 눈에 밟히는 건지, 우성은 산왕공고로 돌아가는 내내 처음으로 저를 갉아먹는 자괴감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넘쳐흐르다 못해 이내 저를 집어삼킬 듯 구는 감정에 너무 깊이 빠지지 않으려 허우적거리며 버티고 있었을까. 속도가 점점 느려지던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멈추어 섰고 감독님의 목소리를 따라 부원들이 하나둘 내리기 시작했다. 버스를 가득 채우던 부원들이 전부 내릴 때쯤이 되어서야 가만히 누워있던 우성이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리던 수건을 치워내곤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짐을 챙긴 뒤, 버스에서 내렸다.

가라앉은 기분으로 버스에서 내리며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까. 정면을 바라본 우성의 시야에 들어온 건 쉬는 시간인 것인지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서 저들을 쳐다보고 있는 수십, 수백개의 시선들이었다. 저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을 이토록이나 두렵고 역겹다고 느낀 적이 있었는가? 우성은 난생처음 타인의 시선에 공포심을 느끼곤 몸을 움츠러트리며 시선만이라도 피해 보고자 고개를 숙이려 몸을 움직였다. 우성이 몸을 움직여 정면을 향해 있던 고개가 조금씩 숙여질때쯤 우성보다 약간은 작은, 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등이 나타나 그 앞을 가로막듯 섰다.

갑자기 나타나 제 앞에 서 묵묵히 우성이 느꼈던 시선들을 모조리 받아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명헌이였는데 명헌은 고개를 숙이기는 커녕 똑바로 정면을 응시한 채로 흔들림 없이 주장으로서의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손짓도 눈짓도 그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성은 명헌의 등이 제게 고개를 숙이지 말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 아래로 향하려는 고개를 억지로 붙들어 정면을 바라보곤 명헌의 지시를 따라 체육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명헌의 등만 바라보며 도착한 체육관에서는 으레 그랬던 것처럼 경기 후 얻은 정보들을 대략적으로 서로 전달하고 부족한 점과 채워야 할 점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다음을 대비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첫 인터하이 패배다 보니 지금까지도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원들이 많아 이대론 안 되겠다는 감독 선생님의 판단하에 늘 긴 시간 동안 진행되던 회의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끝나면 다들 휴식을 취한다는 명분으로 숙소를 향해 제각기 흩어졌다. 평소와 다름 없었더라면 우성은 원온 원이라도 더 하자며 주위를 소란스럽게 만들었을 것이었으나 이날 제일 먼저 체육관을 벗어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우성이었다.

' 2인 1실을 이렇게나 불편하다고 느낀 게 언제였더라... 아, 명헌이 형하고 같이 못 있는 게 아쉬웠을 때였나? 그때였던 것 같은데.. '

들어오자마자 가방은 바닥에 떨궈버리고 옷은 갈아입지도 않은 채 침대에 누워 멍하니 생각해보면 우성은 정말 이런 방식으로 기숙사의 불편함을 다시금 깨달을 줄 몰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던 것인지 생각이 거기까지 뻗어나간 적이 없었던 거였지만 어쨌든 그랬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제 뒤통수를 시원하게 때려 저를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들었고 덕분에 가만히 누워 비 맞는 꼴을 면치 못하게 된 저는 곧 돌아올 룸메이트에게 귀가 들리는 것이 끔찍하다고 느껴질 만큼이나 시달려질 것이었다. 너무나도 끔찍한 상상에 우성이 눈을 번쩍 뜨며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먼저 자리를 피할까 했지만 그마저도 힘이 없어 포기하곤 될 대로 되라는 마음가짐으로 눈을 감아버렸을까.

" ... 그나저나 명헌이 형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지...? "

경기가 끝난 직후에는 제 감정 하나만으로도 벅차 주위를 둘러볼 틈이 없었기에 명헌의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나는 것이 없어, 소리라도 내면 떠오를까 싶은 마음에 말해 보았으나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경기 후 명헌의 반응을 보지를 못했으니 이제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건 연인이자 주장인 명헌의 예상 반응이었으므로 우성은 상상 속에서의 명헌에게 여러 번 혼이 나, 점점 더 서러워지는 마음에 몸을 움직여 베개에 얼굴을 쳐 박고 웅얼거렸다.

" 곧 있으면 미국에 가야 하는데... "

사실 우성은 지금의 답답하고도 분한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지, 또 누구를 향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또 인터하이의 패배가 왜 저가 겪었던 수 많은 패배들 속에서도 단연코 눈에 띄일 만큼 불쾌하게 느껴지는지도. 이는 단 두 가지의 진실 때문이었다.

첫째 정우성이 이명헌과 대회를 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렸다.

둘째 정우성은 이명헌과의 떠나기 전 마지막 추억을 패배로 장식했다.

우성은 패배와 동시에 제게 떨어진 이 두 개의 진실이 너무나도 무거워 이미 체감한 경기 결과에 괜한 불쾌함을, 또 승리로 이끌지 못한 자신에게는 분함을 내비치며 제가 마주해야 할 일들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하지만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누가 그랬던가. 우성의 작전은 시작과 동시에 실패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 이유는 우성이 살아오며 쌓아온 가치관에 있었는데 우성은 체구가 공만 했을 때부터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살아오며 눈앞에 떨어졌던 문제들을 직면하면 직면했지 도망치거나 시간을 벌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없었으니 이번 일이 성공하지 못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 아... 정말 싫다. "

명헌이 어떤 심경으로 지금 방에 있을지, 주장이라는 무게를 알지 못하기에 명헌의 마음을 유추할 수도 없어 우성은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과 동시에 내일 마주할 그가 두려워졌다. 선배이기만 했다면 지금보단 나았을까. 저를 이끄는 주장임과 동시에 헤어질 날이 머지않은 연인을 동시에 해내고 있는 그의 반응은 그게 어느 쪽에 치우쳐져 있다 하더라도 타격을 줄 것이 뻔했으므로 우성은 시간이 흘러가면 흘러갈 수록 초조함을 느꼈다.

사실 명헌이라면 패배의 이유를 누구 하나를 콕 찝어 말하거나 질책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 누구보다도 우성은 잘 알고 있었다. 왜, 저가 명헌의 연인이라? 아니면 그의 인간 됨됨이를 봐서? 아니, 농구는 팀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기량을 두고 승부를 보는 스포츠가 아닌 각각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목표만을 보며 달려가는 스포츠라 우성은 명헌이 그러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승리가 보장된 경기가 없다는걸 알기에 뛰어난 원맨에게 기댄다 한들 그것을 받쳐주는 팀원들이 없다면 승리는 더더욱 먼 이야기가 되어버리니 원맨이나 팀원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지기 보다는 하나로 융화되는 것이야말로 모든 팀 스포츠가 지향하는 바였고 이는 승리와 직접적으로도 연결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성은 오늘 겪은 패배가 더더욱 믿기 어려웠다. 저가 몸담고 있는 산왕은 모두가 강했으니까.

우성이 알고 있는 산왕은 원맨도, 뛰어난 팀원도 갖추고 있어 매번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가는 대회마다 눈에 보이는 결과들을 내놓았었다. 덕분에 산왕이라는 이름은 농구를 하는 이들에게는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또 경기를 보러온 이들에게는 승리의 이름으로 자리 잡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이 오늘로써 처참히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패배는 대체 무엇 때문일까? 이 부분이야말로 우성을 제일 괴롭게 했는데 뛰어난 팀원들이 있는 팀이 패배를 했다면 그 이유는 딱 하나 에이스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는 가정만 남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처음 보는 학교라고, 처음 보는 초짜 선수가 있다고 방심한 적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일의전심이라는 말 그대로 모두 최선을 다해 분석하고 끊임없이 연습했을 정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진지하게 임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딱 하나 북산의 에이스보다 산왕의 에이스의 존재감이 희미했다는 것. 우성은 멍하니 기숙사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지난 일들을, 제 생각들을 하나둘 되짚고 있다 보면 문득 인터하이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우성이가 미국 가기 전 마지막 대회니까 이번에도 우승해서 메달을 모두 우성이에게 몰아주자며 웃던 제 선배들의 모습이 떠올라 우성은 자신을 향한 분함을 숨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곤 한숨을 내뱉었다.

우성이 더 깊은 생각으로 빠지려는 순간, 기숙사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이름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룸메이트가 방으로 들어왔다. 잠든 척을 하기에도 이미 늦었다 생각한 우성이 제게로 쏟아질 질문들에 눈을 질끈 감았으나 룸메이트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가방 정리를 마치곤 그대로 옷을 챙겨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을 뿐 평소처럼 그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우성의 생각과는 다르게 시선 하나, 말 한마디를 건네지 않고 욕실로 휙하고 들어가 버린 룸메이트 덕에 당황한 우성이 한참을 눈만 끔뻑이고 있었을까. 그새 다 씻은 것인지 젖은 머리를 말리며 나온 룸메이트가 우성을 보곤 얼굴을 있는 힘껏 찌푸렸다. 급격한 표정 변화에 울컥한 우성이 입을 열어 한 소리하려던 순간 질색한 듯한 룸메이트의 목소리가 한발 빠르게 먼저 들려왔다.

" 윽, 실외복 입고 침대에 올라가는 것 좀 그만둬라. 안 찝찝하냐? "

" ....? "

" 뭘 봐 그럴 시간 있으면 옷이나 좀 갈아입어. 도착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실외복에 침대 위야? "

예상하지 못한 이유로 질책을 들으니 더 알 수 없어진 우성이 몸을 일으켜 저지를 벗어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어놓곤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멍하니 옷을 벗고 착실히 몸을 닦아내는 와중에도 상황 파악은 쉬이 되질 않아 우성이 아무 생각 없이 손만 움직이고 있었을까. 그제야 씻고 온 것을 기억해낸 우성이 룸메이트를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 야! 나 씻고 왔거든!? "

" 누가 씻으랬냐? 옷 갈아입으랬지? "

" 아, "

욕실 문밖에서 들려오는 기가 찬 듯한 목소리에 머리를 긁적이며 어쩔 수 없이 조용히 씻기 시작한 우성이 비눗물을 씻어내다 갑자기 터진 웃음을 막지 못하고 욕실이 떠나가라 크게 웃어대자 이에 룸메는 실성했냐며 조용히 좀 하라고 화를 냈다.

" .. 괜찮네 "

그렇게 폭풍과도 같던 하루가 지나가고 다음 날 아침.

룸메덕에 전날보다는 기분이 나아졌지만 제 스스로에게 분한 마음이 여즉 남아있던 우성이 얼굴을 굳히곤 아침 훈련을 위해 이른 시각부터 체육관으로 향했다. 체육관에 도착하고 보니 다들 어제와 같은 절망감을 내비치고 있진 않았지만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은 자명해 보였다. 우성이 제 자리로 가 서는 순간 타이밍 좋게도 체육관의 문이 열리며 감독님과 함께 명헌이 들어왔고 간단한 조회부터 시작해 훈련이 이어지자 우성은 평소 집중력이 부족하다고 들어온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해 냈다.

간만에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던 훈련이 끝나면 선배들이 다가와 웬일로 집중력이 이렇게나 좋은 거냐는 말을 꺼내며 우성의 분위기를 살폈지만 우성은 제가 느끼고 있는 감정들을 숨긴 채 평소와 다름 없는 듯한 분위기를 내보여 제게로 쏟아지는 관심을 분산시켰다. 훈련하는 중간중간 명헌과 눈이 마주치기는 했으나 명헌이 가까이 다가오거나 말을 거는 일 없이 무사히 훈련이 마무리 되어 안심하고 제 반으로 돌아가려 했을까, 돌아가려는 우성을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명헌이었다. 우성은 속이 울렁이는 걸 참아내며 부원들이 흩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둘만 남게 된 순간 태연한 낯을 하곤 명헌을 향해 입을 열었다.

" 응? 명헌이 형 할 말 있어요? "

" 정우성 "

" ... 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정우성이예요? 너무하다. "

하하하 웃으며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는 우성을 무표정한 얼굴로 응시하던 명헌이 짧은 말을 내뱉곤 우성을 스쳐지나 체육관을 나섰다.

" 점심 때 뒤뜰 체육 창고 "

명헌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우성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 교실로 뛰어갔을까. 아슬아슬한 시간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수업이 시작되었다. 평소라면 반 이상은 흘려들었을 수업을 억지로 머릿속에 집어넣어, 점심 때 있을 일을 모르는 척 노력하고 있으면 괜찮아지기는 무슨, 우성은 수업이 하나둘 끝나가면 끝나갈수록 널뛰고 있는 심장이 제 가슴팍을 찢고 나올까 두려운 마음으로 떨고 있었다.

점심을 먹기전 마지막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우성이 다시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힘들게 억누르곤 급식실로 가 느릿느릿하게 밥을 먹고 있으면 여느 때와 달리 혼자 먹고 있는 우성에게 많은 사람들이 다가와 말을 걸기 바빴으나 조금 뒤의 일로 걱정이 태산인 우성은 과거 명헌의 말을 반찬삼아 모래알 같은 밥을 떠넘기며 멍하니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을 뿐이었다.

' 당연히 밥 먹고 만나는 거겠지...? 맞아... 괜히 지난번에 시간 아깝다고 밥 안 먹고 달려갔었을 때 무진장 혼났었으니까.. 하아... '

대충 밥을 먹고 자리를 정리 한 뒤 급식실을 나와 체육 창고로 향하던 우성은 점점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 경기에서 진 것도 분한데 형 만나러 가는 것도 이런 기분으로 가야 해? '

연인이 되었어도 기숙사 생활과 농구부 훈련으로 둘만의 시간을 갖기 어려웠던 두 사람은 하필 산왕공고에서 제일 눈에 띄는 인물들이라 어디를 가도 쉽게 알아보고 말이 돌았기에 둘만의 장소가 필요했었다. 두 사람이 전전긍긍해 하던 와중 명헌이 주장이 된 덕에 체육관과 더불어 체육 창고의 열쇠가 명헌에게 주어졌고 이에 자연스럽게 멀리 떨어져 있는 뒤뜰의 체육 창고가 둘만의 아지트로 자리 잡게 되어 점심시간마다 아지트에서 만나는 것이 둘만의 오랜 비밀 약속으로 굳혀졌던 것이었다.

둘의 아지트로 갈 때에는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달려갔었는데, 아침에 말 한마디 섞어보지 못한 것도 모자라 이런 축 처진 기분으로 가야 한다니. 우성은 사실 모든 게 저로 인해 벌어진 사단임을 알았으나 명헌이 제게 있어 주장이기도 했지만 연인이기도 했기에 어떤 얼굴과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되었을 뿐, 별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보니 억울한 마음이 더 커 우성은 입술을 비쭉였다.

동아리 활동 중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먼저 다가오는 일 없는 명헌이 먼저 다가와 둘에게 있어서 암묵적인 약속이나 다름없는 점심시간을 직접적으로 거론한걸 보면 한 소리를 들을 것이 분명하긴 한데, 지금의 감정을 어찌해야 할지도 정하지 못한 우성에게 있어 지금의 상황이 꽤 복잡하고도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라 우성은 복잡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한참을 걸어 드디어 도착한 체육 창고의 문 앞에서 우성이 심호흡을 한 뒤에 조심히 문을 열면 우성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매트 위에 앉아 있던 명헌이 우성과 시선을 마주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우성이 천천히 발을 움직여 창고 안으로 들어가는 동시에 문이 닫혔을까. 아무 말 없이 시선만 주고받던 두사람의 적막을 깬 건 다름 아닌 명헌이었다.

" 우성이 이렇게나 패배에 약한 줄 몰랐는데용. "

" .. 지금 놀려요? "

" 아니, 안심 중 "

" .. 안심이라니 대체, "

" 우성은 즐겁게 농구를 하다가도 가끔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으니까. "

" .... "

" 우리가, 한국이 널 담기에 작다 생각해서 널 미국에 보내는 건데 "

" .... "

" 한국에도 너를 패배하게 만들 선수들이 있고, 네가 그 패배에 진심으로 분해하거나 다른 감정들을 느낀다면 희망이 있지 않나 싶어서. "

" .. 무슨 희망인데요. "

" 네가 돌아올 곳이 한국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 "

" 형? 지금 무슨, "

" 그렇잖아. 너는 미국에 가면 훨씬 더 농구가 재밌어질 거야. 도전을 즐기는 너니까 더 이상 뛰어넘을 것이 없을 때까지 도약하고 또 도약하겠지, 그때 한국이 눈에 들어오겠어? "

" 형, 형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어요. "

" 너는 확신이 있어? 우리가 헤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

명헌의 말을 들은 우성이 순간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똑바로 말해요. "

" 확신이 있냐고 "

" 당연히! "

" 있겠지 네 마음에 대해선 당연하게. 하지만 내 마음은? "

" ... 헤어지고 싶다는 거예요 지금? "

" 봐. 내 마음에 대해서는 확신 없잖아 너 "

우성이 손이 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쥐곤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 ... 있어요... 있다고요. "

" 우성, 속일 걸 속여 나한테 통할 것 같아? 너 요즘 매일 불안하고 초조하잖아. "

" .... "

" 특히 어제가 최악이었지. "

" .... "

" 우리는 잘했어. 너무한 건 강백호 선수였지, 제 선수 생활을 걸고 덤벼드는 녀석은 우리로서도 처음이었으니 대처가 부족했을 수 밖에. 그리고 송태섭 선수도 마찬가지로 훌륭했어 작은 것만 커버하면 될 줄 알았더니 인텐셔널 파울을 이끌어낼 줄이야 마지막쯤에서는 동요하는 모습도 많이 줄어들었었지. "

" .... "

"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겠는데, 경기 결과에 대해 나는 한 번도 후회하거나 결과에 대해 쓴 생각을 한 적도 없어 왜? 나는 마지막이라 생각한 공을 너에게 줬고 너는 그걸 넣었으니까. "

말 없는 우성을 흘긋 바라본 명헌은 말을 이어갔다.

" 좋은 경기였고 서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 경기였어. 우리의 패배를 입에 쉽게 올리던 사람들을 무시할 만큼 좋은 경험이었지. 근데 우성, 너는 이번 경기로 뭘 느꼈지? "

명헌의 말에 우성이 고개를 숙인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 평소였다면 다른 사람들보다도 먼저 느끼고 말하고 다녔을 네가 그러지 못했다는 것만 봐도 네가 다른 이유로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겠는데 나보고 믿으라고? 우성아 네가 지금 흔들리고 있는 이유, 나잖아.  "

" 킁.... "

명헌의 말을 들은 우성이 주저앉은 채로 훌쩍이는 소리를 내자 뒷짐을 지고 있던 명헌이 한숨을 내쉬곤 우성 앞에 앉아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톡톡 닦아주었다. 그러자 더 많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닦아내는 것을 포기한 명헌이 손을 들어 우성의 볼을 감싸 엄지로 살살 쓸어주며 말했다.

" 하아... 지금까지는 주장. 지금부터는 남자친구. "

" ....? "

" 우성. 이제 알았나용? 지금 우리가 기대고 있는 건 진실일지 아닐지 모를, 진실이라 해도 그 기한을 알 수 없는 얄팍한 말뿐이라는걸? 그게 아니었다면 우성이 이렇게까지 불안해하지 않았을 거예용. "

" 킁... 그래, 그래서 어쩌자고요? 헤, 헤어지자는 거예요? 싫어요! 얄팍해도 좋으니까 제발... 제발 헤어지자는 소리만 하지 말아요... "

애절하게 말하며 명헌의 품으로 파고든 우성 때문에 쪼그려 앉아 있던 명헌이 뒤로 넘어졌지만 우성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우성의 뒤통수를 손으로 살살 쓸어내던 명헌이 우성의 반응이 조금 잠잠해지자 입을 열었다.

" 헤어지려 한 적 없는데 이러면 어떡해용.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뿅. "

" .....? "

" 우리에게 있는 거라곤 사랑한다는 얄팍한 말뿐이지만 우리 나이에는 이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 "

" .... "

" 네가 미국이 아니더라도 더 넓은 곳으로 갈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고, 각오도 했었으니까 괜찮아. "

" ... 그런데요. "

" 내가 말한 희망은 내가 이곳에 남아 노력해서 좋은 팀들을 만나 너에게 패배를 안겨 줄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너를 미국한테서 다시 찾을 수 있겠다는 거였어. "

" .... "

" 북산을 봐. 우리가 모두, 너조차도 최강이라 생각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승리를 당연시하고 있었는데 보기 좋게 당해버렸잖아. 미국이 아닌 한국에도 좋은 선수들은 있고, 내가 그들과 노력하면 미래의 너라도 승리를 장담 할 순 없을 거야. "

" ...훌쩍 "

" 미국에서 하고 싶은 일, 해내고자 했던 일을 끝마치고 더 넓은 땅을 향해 네가 시선을 옮길 때. "

" .... "

" 그때 한국이 눈에 들어올 수 있게끔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자신이 있어서. "

윽! 갑자기 온 몸에 힘을 주어 짓누르는 우성 덕분에 말을 하던 중간에 신음을 흘린 명헌이 제 위에 엎어져 있는 우성을 치우려 팔을 잡아채자 자세를 바꾼 우성이 명헌의 위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명헌의 얼굴을 감싼 뒤, 이마를 붙이곤 말했다.

" 킁... 사랑해요... 진짜 사랑해... 이런 사랑을 잊을 수 있을 리 없어... "

명헌의 얼굴 위로 우성의 눈물이 떨어지자 눈물길을 따라 입술을 내린 우성은 그대로 명헌의 목덜미로 파고들어 끙끙거렸다.

" 킁, 너무 좋아... 진짜... 진짜 사랑해... 킁, 내꺼야... 으응.. 이명헌... " 

" 이명헌? "

" 아... 형... 이번만 봐줘요.... "

애교를 부리듯 자신의 목에 제 얼굴을 비벼대는 우성을 보며 헛웃음을 지어 보인 명헌이 한숨을 내쉬듯 말하며 지긋이 두 눈을 감았다.

" 애 키우는 건 힘드네용.... "

" 킁, 누가 애라고요? "

" 우성 뿅. "

" 아니거든요!? "

" 강한 부정은 긍정 뿅. "

" 아! 형!! "


...


그로부터 두 달가량이 지났을까. 어느 가을날의 인천 공항에는 산왕공고 농구부원들이 모여 무언가를 바쁘게 만들고 있었다.

" 아, 이명헌! 너 건들지 마! 어떻게 네가 만지기만 하면 부서져! "

" 피효옹.... "

" 낙수야 너무 그러지 마 명헌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 "

" 맞, 맞아요 선배... 주장이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닐 거예요.. "

" 그럼 니들이 할래? "

" 하! 그게 뭐 어렵다고 줘 봐라. "

낙수가 현철에게 성냥을 건네자 성냥을 받아든 현철이 불을 피우기 위해 마찰을 시키면 성냥에 불이 피어오르기도 전에 반으로 부서져 땅으로 떨어졌다.

" ..... "

" 한 번 더하면 할 수 있어. "

" 그게 마지막이었는데. "

" ..... "

적막감이 맴돌자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성구가 다급하게 말했다.

" 공항 내에서는 담배도 안 되는데 화기 전부가 안되는 건 아닐까? 어차피 우성이가 케이크를 들고 타지도 않을 테고 그냥 초만 꽂아서 가져가자. "

" 그러면 왜 지금까지 이러고 있었는데 "

눈을 날카롭게 뜨며 낙수가 말하자 하하하... 하며 웃어 보인 성구가 동오를 팔로 툭툭 건드렸고 이에 동오도 진정하라며 낙수를 말리기 시작했다.

결국 초만 꽃은 채로 우성에게 가기로 한 부원들은 현필이의 뒤로 케이크를 든 낙수를 숨긴 다음, 우성이 연락을 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 자신들을 찾는 건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서 있는 우성을 발견한 부원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더니 우성과의 거리가 다섯걸음 정도 되었을 무렵 낙수가 큰소리와 함께 케이크를 들고 나타나, 우성을 놀라게 만들어 기어코 서프라이즈의 성공을 이끌어냈다.

" 하하하. 이게 뭐예요. 저 불 안 붙여진 케이크 처음 받아봐요! "

" 마지막으로 해주랴? "

" 아, 너무해요. 저 오늘 가는데 "

" 큼, 아주 가는 것도 아니고 연락도 할 텐데 뭘 "

" 맞아. 우성아 가서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

" 맞, 맞아요.. 우성이 형 꼭 연락해요. "

" 그리고 몸 조심하고. 너 아무나 믿고 따라가면 안된다. "

" 우성아 그동안 수고 많았다. 늘 덕분에 든든했어. "

" 잘해 뿅. 그리고 내가 했던 말 잊지 마. "

명헌의 말까지 들은 우성이 활짝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모두가 헤어짐의 인사말과 더불어 걱정스러운 말들을 주고받고 있으면 어느새 시간이 다 된 것인지 게이트 안내 방송과 함께 우성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여권 검사를 마치고 들어가기 전까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오히려 활짝 웃어 보인 우성이 마지막으로 손을 크게 흔들어 보이면 부원들 모두가 웃는 얼굴로 우성을 배웅했다. 그것을 빠짐없이 눈에 담고 있던 명헌도 우성과 시선이 마주치자 살짝 손을 들어 흔들어 보이는 것으로 제 마음을 전했고, 명헌의 배웅까지 받고 나서야 우성은 뒤를 돌아 게이트로 들어갔다.

이 날 우성을 배웅하고 나가는 내내 부원들이 울보인 우성이 울지 않은 것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었으나 정작 그 이유를 알고 있는 명헌은 대화에 끼지 않은 채로 작게 미소 지으며 태평하게 휴게소에서 먹을 간식 이야기나 하기 시작했다.

우성의 미국행은 더 이상 두사람에게 있어 헤어짐이나 장애물 같은 것이 아닌, 미래를 약속하게 만든 사랑의 증거가 되었기 때문에 우성이 울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를 잡으려면 상대가 있는 곳까지 가야 한다니. 다가올 미래에 제 사랑을 증명해내기 위해선 지금부터 움직여도 시간이 한참 부족했으므로 우성과 명헌은 눈물도 그리움도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청명한 가을. 미래에 있을 비행을 위해 두 청춘이 도약을 시작하기에 딱 좋은 계절이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