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백호열 베이스 호열모브
…결혼 오 주년의 겨울날, 퇴근시간을 맞춰 택시를 잡아타고서.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화사한 디너를 먹으면서. 서로서로 준비한 약소한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웃으면서. 시내의 랜드마크가 보이는 높은 호텔의 창 앞 테이블에 앉아 술을 나눠 마시면서. 그 모든 일을 보내는 내내 웃었지만 태양을 보지 못한 식물처럼 파리하고 조금씩 말라가는 남편의 옆얼굴을 보며 희애는 그가 열병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희애는 이것이 분기에 한두번 정도 있던 편지글로 해결될 범주의 것이 아니라는걸 알았다. 이건 여자의 본능이나 감 따위가 아니라 사랑을 하기에 알 수 있는 관찰에서 도출한 결과였다. 남편은 여전히 누구가를 사랑한다. 선자리에서 보았던, 흰 도자기처럼 청빈한 미소가 이제는 무슨 의미인지 안다. 사랑을 뒤로하고 현재에 충실한 남편은 그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아이가 없지만 화목한 가정은 이인삼각처럼 화기애애하게 돌아간다. 그러나 희애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희애는 처음 성당에를 가 보았다. 미사일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들어갔다가 그냥 빈 의자에 앉아있기만 했다. 그러나 희애는 빈 손을 마주잡을 정도의 정신은 있었다. 희애는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몫을 다하고자 하는 이에게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신에게 왔다. 자애로우신 성모 마리아께 여쭙기를, 이 세상 모든 사랑이 죄가 아니라면, 성모님, 남편을 볼 때마다 저는 왜 이렇게 괴롭습니까?
그 날 희애는 성당의 높은 천장은 높은 곳의 신을 받들기 위함이 아니라, 실상은 인간 마음의 눈물을 채워 떠나보내기 위한 첨탑임을 깨달았다. 그 짠 물은 인간에게 가면 칼이 된다. 돌아오는 길 희애는 프리지아 세 다발을 사서 집에 왔다. 당신 왔어? 남편이 주방 테이블에 반찬을 꺼내놓고 있었다. 여보, 우리 예전에 산 화병이 어디에 있었지? 유리로 된 거. 희애가 거실 소파에 고양이 얼굴이 큼지막하게 박힌 남색 에코백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남편이 화병? 하고 되묻고는 주방에서 빠져나왔다. 프리지아네? 웃음기 묻은 목소리가 사랑스러웠다. 희애의 얼굴에 낚시줄로 당겨놓은 웃음이 걸린다.
남편이 창고로 쓰는 베란다 한쪽을 뒤적여 신문지에 싸놓은 화병을 들고 나왔다. 당신, 오늘 좋은 일 있었어? 희애가 꽃을 사는 날은 열에 아홉은 즐거움이 묻었고 남은 하루는 그저 사고 싶었을 뿐인 날이어서 남편은 오늘도 그럴까 싶어 물었다. 희애는 대답 않고 남편이 신문지를 벗겨낸 화병을 받아들었다. 흰 형광등의 아래 유리를 가공하여 긴 목을 따라 올록볼록하게 선이 남은 디자인이 아주 마음에 들어 신혼여행에서 사 왔던(남편이 가격을 박박 깎아 내쫓기기 직전까지 갔던)것이었다. 희애는 잠시간 그것을 보다가 냉동고에서 얼음틀을 꺼내 부스러진 얼음조각을 화병에 넣었다. 십원짜리 하나도. 그리고 주방의 싱크대로 가 수전을 아주 한쪽으로 돌려 차가운 물로 틀어놓은 뒤 물을 받았다. 물꽂이를 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아 리본 포장을 해놓은 프리지아 다발이 싱크대 한 쪽에 선물처럼 놓여 있다. 희애는, 희애는 그것을 보다가 병아리 솜털같이 노란 리본을 풀었다. 풍성하고 노란 봄꽃을 꽂아놓은 화병이 거실의 낮은 테이블 가운데를 장식한다. 남편은 희애가 하는 것을 보다가 마저 상을 차렸다. 이번에도 오래 가겠네. 그 말씨는 언제나처럼 아주 다정하고 친근하여서 희애는 대답하느라 움직이는 혀뿌리가 끊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부부침실의 침대에 나란히 누워 수면등을 끄고 나서도 한참. 희애는 그 날 처음으로 잠 든 남편을 침대에 두고 주방으로 갔다. 지난주 매운탕을 먹겠다고 사 놓고 다 마시지 못한 소주 반 병이 냉장고 문짝에 세워져 있었다. 희애는 그럼에도 일말의 의례는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라 잔 하나를 꺼냈다. 곁들일 음식을 하기에 남편은 잠귀가 밝았다. 희애는 표하지도 않을 복수심 이전 인간 도리로 한번 깨고 나면 쉬이 잠들지 못하는 남편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생각했다. 허나 이 집에는 간식거리가 없었다. 둘 다 주전부리를 즐기는 편은 아니어서였다. 그 사실이 희애의 어떤 후회를 자극하진 않았다. 그래서 희애는 주방 테이블에 소주 반 병과 소주잔 하나를 놓았다. 의자를 살짝 들어 소리가 나지 않게 빼고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탁 트인 베란다 통창을 보며 술을 마시고 있으려니, 불 켜지 않은 집안보다 저 멀리 샐러리맨들이 돌아다니며 밝히는 도시의 머나먼 불빛이 더 밝아 보였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그러니까 남편은 참 좋은 남편이었다. 대화를 하고 오래 생각해준다. 고민이 길어질 것 같으면 항상 양해를 구하고 시간을 보냈다. 화를 내지 않았다곤 말 못하겠다. 그러나 항상 왜 그랬는지 말했고 사과를 잊지 않았다. 결혼 선언문에서 당신은 아침 차려주는 사람이 아니니까, 라고 말하며 선언문의 양식을 바꾸자고 말했다. 선자리의 애프터에서 신발을 확인하고 오래 걷지 않게 카페로 향해 요즘 재미있는 영화가 뭐가 있을까요, 하고 물었다. 선자리에서 처음 만났을 때 희애 씨 리본이랑 제 타이가 같은 색이네요. 하면서 부드럽게 말을 풀어나갔다. 희애는 스치우는 별들처럼 모든 장면을 뒤로 돌려 떠올렸다. 그 때 남편은 아주는 아니어도 그럭저럭 마르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살이 내리기 시작했다. 희애는 비운 소주잔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어깨를 떨었다. 남편이 언제부터 살이 내렸더라.
희애는 그 날 새벽 다섯시 경까지 남편에 대한 생각, 적확하게는 남편의 몸에 대한 생각을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에 대한 진실한 연민이 피어올랐다. 물을 먹을 수록 머리를 크게 키우는 수국다발 필사의 항거처럼 희애의 가슴엔 애상이라는 이름의 자기보호가 자리잡았다.
사랑을 못 접는 것, 그게 희애의 잘못은 아니다. 희애는 그 사실을 알았지만 갈비뼈 안쪽에 거품이 들어찬 것 처럼 끅끅거리며 소리를 삼켰다. 테이블 위에 눈물이 자체의 형태를 남기고 방울져 자리잡는다. 희애의 양 팔꿈치가 주방 테이블에 올라가고 손바닥은 눈가를 짓눌렀다. 뜨거웠다.
그 사람, 정말 좋은 사람이야. 희애는 손바닥이 다 젖어 더이상 눈물을 훔쳐낼 용도로 쓸 수 없어지자 뒤집어 손등으로 뺨을 훔쳤다. 온 얼굴이 뜨거웠는데, 귀만은 그렇게 차가울 수가 없었다. 한 몸에 붙어있는 기관의 온도차가 이렇게 선명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희애는 오늘 알았다. 희애는 모로 누울 때 조차 자신을 보는 쪽으로 눕는 남편을 생각했다. 아침부터 머리를 올리느라 바른 왁스를 씻어낸 뒤 베개 위에서만 조금 뻣뻣하게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누구도 보기 힘든 동반자의 장면을 희애는 계속해서 마음에 그렸다. 나 당신을 정말 사랑하고 있어.
푸르스름한 새벽의 빛이 희애의 젖은 뺨을 어루만지면, 희애는 더이상 울 수 없는 시간임을 깨닫는다. 남편은 희애보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다. 희애는 이 슬픔을 가리는 것이 그를 위하는 것 이전 자신의 품위를 지키기 위함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희애는 다 마신 병을 베란다 분리수거함에 넣고 이른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잠옷을 벗어 한쪽에 놓아두고 수전을 돌려 미지근한 물의 온도를 손바닥으로 느꼈다. 체온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뜨거웠던 물이 식어 희애는 한기를 느꼈다. 훈기가 샤워부스를 가득 채우고서야 희애는 물 아래 몸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다 씻고 나오자 사람 소리가 들렸다. 까치집이 진 머리로 주방에 서 있는 남편이 보였다. 당신 오늘 일찍 일어났네. 잠이 좀 묻어서 밍밍한 소리로 남편이 말을 걸었다. 희애는 두툼한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둘둘 만 채 남편의 등을 보다가, 불쑥 그러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남편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웃음. 목구멍을 가늘게 긁는 듯 성마른 소리.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으면 희애의 팔에 몸을 놔둔 채 남편이 달래듯이 말한다.여보, 나 지금 칼 들고 있어. 그러나 놓으라는 말을 하지 않아서 희애는 남편의 날개뼈에 얼굴을 묻었다. 자고 난 사람 특유의 높아진 체온이 얇은 잠옷 건너편으로 다가온다. 여보, 오늘 아침 괜찮아? 당신 잘 못 잔 것 같은데. 남편이 두부 반 모를 다 썰어 다 끓어가는 된장국에 튀지 않도록 넣으면서 말했다. 희애는 코를 들어 남편의 뒷머리에 박은 채 말했다. 두그릇 먹을래. 남편이 웃었다. 세그릇 드세요, 사모님. 희애가 웃었다.
봄이 간다. 여름이 오면 남편은 자주 해외에 보내는 편지를 적었다. 친구에게라고 했다. 농구선수라고. 이 시기가 그나마 한가하다고 말했다. 사실 편지라고 하기엔, 남편은 단어를 고르는 데에만 반나절을 쓰다가 종국엔 다 쳐내버리고 말아서 엽서 한 면에 안부를 짧게 적는 것이 전부였다. 낮은 거실 테이블에 맞추기 위해 바닥에 앉아서 가장 잘 나오는 잉크펜을 들고 열심히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때 남편은 정말 물을 잔뜩 먹어 양 팔을 위로 올린 식물같이 보였다. 잎맥이 뚜렷해지고 무성한 잎을 손바닥으로 올리고 올려 하늘을 다 뒤덮어버릴 것만 같았다.
희애는 계절이 오간다는 것을 남편의 엽서로 느꼈다. 그것이 이번 년도도 다르지는 않다. 시간이 되면 보내야겠어, 말하고 남편은 다 적은 엽서를 팔랑팔랑 흔들어 잉크를 말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애는 남편의 반듯한 이마를 보다가, 응, 하고 말했다. 왜 몰랐을까. 희애는 그것이 사랑 때문이겠지 생각했다. 가끔 사랑하던 시기의 초장에는 너무 사랑해서 못 보는게 생기곤 했다. 예를 들어 곤란할 때에 눈썹 끝을 긁는 남편의 버릇이라던가. 아무리 절친하다 하더라도 한시간씩 고민하고 적는 단어의 나열이라던가. 그럼에도 결과는 인사 뿐이라던가. 사랑의 이름을 뒤로하고 문지르는 모든 일들에 희애는 목이 막히는 것을 느낀다. 장부를 뒤적이며 오늘도 희애는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 산다는 것이 그렇다. 매몰될 시간은 적거나 없고, 있다 한들 길게 유지해서는 안 된다. 물놀이와 익사는 다르다.
가을이 온다. 희애는 오래 준비했던 서류를 다시 매만지면서 가슴을 가다듬었다. 여보. 응? 타이를 풀고 편한 셔츠차림으로 돌아온 남편을 희애가 부른다. 금요일 저녁이었다. 이 날 부부는 자주 식사를 시켜먹었기 때문에 오늘도 메뉴 선정 때문에 부르겠거니 생각하는 듯 남편의 얼굴은 편안했다. 희애가 반듯하게 앉아서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남편이 이게 뭐야? 하고 봉투를 열어 종이를 꺼냈다. 서류였다. 제목과 일정 서식을 두고 찍혀있는 글자를 보던 남편은 한 손으로 테이블을 짚은 채 서 있다가 조용히 의자를 빼 앉았다. 여보. 응. 내가 무슨 잘못을 했어? 희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남편은 많이 울었다. 희애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이유를 말해달라고 했다. 희애는 남편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연신 쓸고 어깨를 다독이면서도 그만두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희애는 들썩이는 등에 양 손을 얹어 몸을 오그려 그의 상체를 덮듯이 숙였다. 호열 씨. 희애는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호열은 엉망인 얼굴을 들어 희애를 보았다. 희애는 낯을 짜그라트리는 것 처럼 웃더니 이게 뭐야, 하면서 마른 손으로 호열의 얼굴을 계속 닦아냈다. 계속 눈물이 나서였다. 왜 이러는 거야? 호열이 갈라진 소리로 물었다. 희애가 계속 얼굴을 닦아주었다. 우리 둘 다 불쌍한 사람이라서. 우리 다 미련한 사람이라서 그래. 희애는 무릎꿇어 아래에 있는 호열의 양 뺨을 붙들었다. 눈물이 말라가며 피부가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매듭을 푸느니 끊어낼 때가 수월할 때가 있다. 희애에게 호열과의 결혼은 그런 것이었다. 어떤 악감정도 없었으므로 누구보다 수월했다. 복수도 슬픔도 이 사이에 남지 않길 바랐다. 하여서 조정기간은 물처럼 흘러갔고 혼자 일하는 겨울은 시렸다. 때는 다시 봄. 초입이다. 완전히 남이 되었음을 선고하는 말을 듣고 희애와 호열은 가정법원의 낮은 계단을 내려왔다. 나란히 걸었는데, 호열의 걸음이 천천히 느려지며 희애가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호열이 희애의 등을 보았다. 카멜색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작은 등이 오늘 아주 후련해 보였다.
호열이 속도를 붙여 희애에게 다가갔다. 어디를 잡지는 못했다. 그저 가까이 갔을 뿐이다. 호열이 말했다. 희애야, 내가 잘못한게 있어?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없을까? 그 말은 희애가 들었던 것들 중에 가장 선명했다. 지나간 계절이 그간 마주했던 겨울 중 제일 차가운 공기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희애는 호열을 바라보다가 웃어버렸다. 호열을 만나고 이 사람이라면 한 이불을 덮어도 좋다고 다짐했을 때 새어나온 것과 똑같았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 나 당신이랑 결혼해봐서 정말 좋았어. 그리고선 마저 길을 걸었다. 영화처럼 바로 앞에서 택시가 서서 희애는 그 택시를 잡아탔다.
여의도로 가 주세요, 오전반차를 내고 왔던 것이라 서둘러 회사에 들어가야 했다. 차창에 이마를 대고 흘러가는 풍경을 보면서, 희애는 울고 싶다는 생각도 안 했는데, 그러니까, 울게 됐다. 울다가 소리가 났다. 얼마나 울어댔는지 운전석의 기사가 사모님 괜찮으시냐고 몇번을 물었다. 택시 안에서 희애는 회사에 전화를 했다. 오늘 도저히 출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목소리가 심상찮은 것을 느꼈는지 상사가 그러세요 하고 전화를 먼저 끊었다. 희애는 다시 목적지를 말했다. 택시가 크게 유턴을 했다. 희애는 집에 오자마자 화장을 지우고 머리를 풀었다. 헤어캡을 쓴 뒤 샤워를 하고 가방을 정리했다. 꺼내입은 옷을 옷걸이에 잘 걸어둔 뒤 늦은 점심을 먹고 바로 침대에 들어가 낮잠을 잤다. 깨어났을 때에는 딱 저녁을 먹을 때였다. 희애는 점심이 다 꺼지지 않았음을 느꼈지만 이럴 때 일 수록 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냉장고를 털어 반찬을 늘어놓고 한 수저씩 얹어서 먹었다. 딱 한 그릇을 비운 뒤 정리했다. 점심의 설거지를 다 해치운 뒤 편두통 약을 먹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시간은 아주 이르다. 그러나 잠을 자야 했다. 머리는 내일 아침 출근준비를 하며 감자.
혼자라는 사실은 괴롭지도 외롭지도 않고, 가끔 손이 부족할 때가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잠이 온다. 희애는 싱글베드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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