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웅주영] 아침 말은 고양이가 듣는다
첫업로드: 2023.02.14. 포스타입
기말고사의 마지막 날이라는 기대감으로 들뜬 분위기 속에서도 2층 복도의 한 구석은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그곳에 모인 다섯 명의 학생들은 따끈따끈한 최신 이슈로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정말? 확실해?"
"진짜라니까! 키가 그렇게 큰데 어떻게 서태웅을 못 알아보겠어?"
"그렇긴 하지만. 여자애가 하주영인 건 어떻게 아는데?"
"주영이도 꽤 유명해. 입학할 때부터 계속 전교 다섯 손가락 안이잖아. 거기다 예쁘고."
"맞아. 전에 다른 학교 학생이 주영이 보러 오기도 하던데?"
"내 말이! 게다가 은근히 둘이 자주 같이 있단 말이지."
<서태웅&하주영 목격설>을 장황히 늘어놓던 반장이 바로 그거라는 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하나뿐인 이치라도 깨달은 것처럼 다들 심오한 표정으로 감탄하던 중 목격담의 진위를 의심했던 학생이 딴지를 걸었다.
"전에 하주영한테 물어봤을 땐 아니라고 했는데?"
"뭘 물어봐?"
"당연히,"
누군가 엿들을 새라 목소리를 죽이고서 그는 소곤거렸다. 서태웅이랑 사귀냐고. 허억, 다 같이 숨을 들이킨 아이들이 또다시 왁자지껄 각자의 의견을 늘어놓았다.
"그걸 직접 물어봤어? 대단하다!"
"당사자한테 물어보는 게 가장 정확할 것 아냐! 그때, 그런 사이까지는 아니라고 했다니까?"
"거짓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주영이가 뭐 하러~"
이내 대세는 주영의 말이 사실일 거란 쪽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친절한 모범생 하주영과 무뚝뚝한 농구부 루키 서태웅의 연애란 상상하기 어렵거니와, 두 사람이 같이 걸어가고 있던 것만으로 주영과 태웅의 관계를 단언할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그래도 겉보기엔 둘이 잘 어울린다는 둥, 하지만 낙제생은 주영의 취향이 아닐 거라는 둥. 자질구레하게 퍼져나가던 토론이 다급한 속삭임에 끊겼다. 야 저기 서태웅!
농구부의 주전답게 커다란 키에 넓은 어깨. 무심하게 바람에 휘날린 검은 생머리와 짙은 눈썹, 날카로운 눈매. 섬세한 느낌의 긴 속눈썹 끝에 졸음을 가득 담은 채 복도를 지나 교실에 들어선 서태웅이 곧장 책상에 엎드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복도에 서 있던 학생들은 서태웅이 보이는 뒷문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지금 물어봐! 잠든 다음엔 기회가 없다고."
"주영이가 아니라고 했다며!"
"저쪽 의견도 들어봐야지~"
"누가 물어볼 건데?"
네 명의 시선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 이 모든 토론의 시발점을 향했다. 함께 시내를 거니는 태웅과 주영을 봤다던 반장이 펄쩍 뛰었다. 절대 그럴 수 없다며 그는 자리를 빠져나가려 했으나 여덟 개나 되는 손이 연신 등을 떠밀었다.
"무섭다고! 같은 반도 아니고 쟤랑 한 번도 대화 안 해봤단 말이야!"
"네가 시작했으니까 네가 끝내야지! 빨리 물어보고 와."
"맞아. 반장 너 밖에 없어~"
관심 어린 격려를 한 몸에 받으며 반장은 쭈뼛쭈뼛 태웅이 엎드린 자리로 다가갔다. 손을 쥐었다 폈다, 실내화 속의 발가락을 몇 번 꼼지락거린 뒤에야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굳어진 몸을 조금 풀어낸 그는 드디어 태웅을 불렀다.
"서태웅."
태웅은 여전히 졸음에 취한 눈을 떴을 뿐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무시한 채 잠들지 않고 반응한 게 어디야. 그렇게 생각하며 반장은 제 어깨에 놓인 임무를 다하기 위해 떨리는 손을 말아 쥐었다. 등 뒤에서는 여전히 네 명의 동료가 저를 지지하며 열렬한 무음의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결의에 찬 짧은 호흡을 들이킨 그는 태웅이 도로 눈을 감을세라 얼른 하려던 말을 이어갔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뭐야."
나른한 고양이처럼 천천히 몸을 일으킨 서태웅이 드디어 대꾸했다.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는 태웅의 귓가에 익숙한 이름이 담긴 질문이 날아들었다.
"너 1반 하주영이랑 사귀는 거야?"
"응."
짧은 한 마디에 일순 고요해졌던 교실이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달아올랐다. 방금 뭐랬어? 사귄다고? 누가 누구랑? 서태웅이 하주영이랑? 1반 공부 잘하는 애?
쏟아진 쌀알에 몰려드는 참새 떼처럼, 뒷문에 매달려 귀를 쫑긋거리던 지지자들 역시 눈 깜짝할 새에 곁에 다가와 있었다. 달아오른 공기에 힘을 입었는지 반장은 진위 확인이 필요한 소식 한 가지를 더 꺼내었다.
"하주영이 아니라고 했다는데?"
"……내가 그렇게 말하라고 했는데."
"세상에."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근처에 있던 학생들 모두 저마다의 탄성을 내뱉었다. 내가 뭐랬냐며 속닥속닥 친구들을 나무라는 반장을 뒤로 하고, 반장과 함께 토론을 나누던 학생이 상기된 목소리로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어, 얼마나 됐는데?!"
이 모든 상황이 귀찮은 듯 태웅은 다시금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운 좋게 얻어낸 질문타임이 끝났음을 직감한 아이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확인한 게 어디야. 이제 교실로 돌아가자며 다들 돌아서는 찰나 낮은 목소리가 왁자지껄한 교실의 소음 사이로 선명하게 꽂혔다.
"세 달."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수확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고서 복도로 달려 나온 아이들은 비명을 질렀다. 세 달이래, 세 달! 연신 맑은 웃음을 터뜨리던 다섯 명의 학생들은 오늘의 뉴스에 대한 추가적인 의견 교환을 위해 다시금 교실의 한구석에 숨어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흘리고 간 소식은, 물 위의 나뭇잎처럼 창틈으로 들이치는 겨울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멀리멀리.
2층 끝의 10반에서 1층 저 끝의 1반에 닿을 때까지.
에취!
잠시 고개를 돌렸던 주영이 다시 노트로 시선을 옮겼다. 앞자리에 앉아 제 쪽으로 몸을 돌린 이유가 쥐고 있던 손난로를 주영의 뺨에 슬며시 갖다 대었다.
"미안… 갑자기 코가 간지럽네."
"괜찮아~ 그보다 감기 아직 덜 나은 거야? 혹시 쉬고 싶으면 다른 애한테 물어볼 테니까…."
걱정스레 묻는 이유에게 주영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주말에 시내를 돌아다닌 탓일까 잠시 의심해 보았지만, 감기라고 생각될 만한 열이나 다른 증상은 전혀 없었다. 카디건에서 날린 실이라도 코에 스쳤나 보지.
"아냐, 먼지 같은 게 있었나 봐. 어쨌든 이 문제는 여기 이 공식을 약간 변형하면 되는데…."
학기의 마지막 시험을 앞둔 주영에게 누가 누구와 석 달째 교제 중이라는 소식 같은 것은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 너무 먼 이야기였다. 그것이 자신과 태웅의 소식임을 알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12월 1일 아침의 하주영은 그랬다.
그렇기에 태웅이 직접 그런 사실을 공개했음을 꿈에도 모르는 주영은,
열심히 노트를 들여다보며 시험에 대한 열의를 불태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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