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sing By(2)-완
Still I'm Missing You
* 시간의 흐름이 좀 복잡합니다.
* 의식의 흐름대로 썼습니다. 가볍게 읽어주세요.
* 연성 초보입니다. 너그럽게 봐주세요.
* 여러분의 취향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수겸에게서 느꼈던 이질감은 그저 과한 걱정이었을까? 아니면 곧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에게서 정환이 자신도 모르게 느꼈던 서운함에서 기인하는 것이었을까? 농구 경기를 보면서 두 볼을 발갛게 상기한 채로 목청 높여 응원하는 수겸을 보고 있으니, 경기장에 오기 전에 보았던 수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신경 쓴 것은 과민반응이었다고 여겼다. 서운함은 뒤로 하고 정환도 지금 그와 함께하는 이 시간을 한껏 즐기기로 했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불쾌한 기계음은 그저 정환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그러려니 했다. 그저 정환이 무시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조용한 피아노와 현악기가 어우러져 연주하는 곡이 낮게 울려 퍼지고 오렌지색 낮은 조도의 조명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은식기들과 곡선이 멋들어지게 깎인 깨끗한 흰색 접시가 체리목의 라운드 식탁 위에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식전 음료를 권하고 굳이 종업원을 부르지 않아도 때맞추어 테이블로 다가와 더 필요한 것이 없는지 물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식당은 무척이나 무거운 지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정환이 아무리 유복한 집안의 자제라 해도 이런 레스토랑은 학기에 몇천 하는 학비를 내며 세계에서도 물가 1위의 도시에서 생존해야 하는 그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운 곳일 것이다. 그래도 같이 오랜만에 새해를 맞이하는 기념으로 뭔가 연인으로서 할 수 있는 그럴싸한 것을 주고 싶었다. 허세라면 허세였을 수도 모를 일이지. 이 식당이 제법 값이 나가는 장소임을 수겸은 눈치챘을 것이다. 이 식사가 다 끝나고 정환의 아파트로 돌아가면 기다렸다는 듯이 잔소리를 늘어놓겠지. 그저 수겸이 말없이 웃으며 식사를 이어가는 이유는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얼굴 붉히는 일을 원치도 않을뿐더러 어쩌면 무리해서 그를 대접하고자 하는 정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따금 죄지은 강아지처럼 목구멍으로 음식물을 넘기기 힘든 느낌에 결국은 이실직고하고 말았다. 그래, 도둑이 제 발 저린 경우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여기 오려고 용돈 모아놓았고 결코 부모님께 손 벌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어쨌든 네가 돌아가야 하니까 그 전에 단둘이 좋은 장소에서 식사를 하고 싶었어.”
“어?”
“곧 돌아가야 하잖아. 다음 방학까지는 또 반년이나 남았는데, 내가 이번엔 본국에서 여름방학 동안 지내긴 할 테지만, 그래도.”
“나 겨울방학 동안 여기 머문다고 했잖아.”
“뭐?”
수겸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식사를 마저 이어갔다. 마치 사전에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정했다는 듯이 말하는 그의 태도에서 정환은 낯선 무언가를 느꼈다.
“무슨 소리야? 방학 동안 있다니? 그럼, 훈련은 어쩌고? 봄이 되면 바로 대학리그가 시작될 텐데.”
“대학리그라니?”
수겸이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말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 안에 방금 잘라서 쏙 넣은 고기 조각을 씹으며 되물었다.
지잉- 지이잉- 찌지직-
간헐적으로 귓가를 괴롭히던 기계음이 이번엔 제법 크게 울렸다. 관자놀이의 통증이 제법 강력했다. 정환의 눈앞에 보이는 수겸의 얼굴이 일렁거린다. 수겸은 그저 웃으며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조심조심 썰고 있었다. 시야가 흐려졌다.
***
달그락, 달그락. 부엌에서 나는 그릇 소리가 정환의 침실까지 울려 퍼졌다. 후라이팬에 지글지글 무언가가 구워지는 냄새가 아직 잠이 덜 깬 정환의 식욕을 자극했다. 정환이 손만 움직여 협탁 위 전자시계에 손을 가져갔다. 7:50. 액정 화면에 나타난 숫자를 보고 있으니 하여튼 수겸은 부지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어젯밤에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만 같은데. 술을 많이 마셨나? 정환에겐 와인 두 잔도 치사량인데, 어제 와인을 그렇게까지 마실 이유가 있었나? 아니. 애초에 지금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날은 아니다. 어딘가 석연치 않았지만 정환은 주방에 있을 수겸을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인용 식탁 위에는 갓 구워진 베이컨과 계란과 토스트가 놓여 있었다. 수겸이 잠이 덜 깬 채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는 정환을 보며 부지런히 오라는 듯 웃으며 손짓했다. 금방 내려진 커피 향이 향긋했다. 정환은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한번 쓸어 올리고는 의자를 끌어내 자리에 앉았다. 어느새 정환의 집 안에 있는 식기들이나 주방 도구들의 위치를 수겸은 다 익혀두었나 보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 번쯤은 정환에게 그릇이나 주방 도구들의 위치를 물어볼 법도 한데 말이다. 그런데 어제 분명히 수겸이 정환에게 예상 밖의 말을 해서 그를 놀라게 했던 것만 같은데, 머리가 계속 지끈거려서 도무지 떠오르질 않는다. 하릴없다는 듯이 포크로 계란 노른자만 터뜨리는 정환을 수겸이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답답하다는 듯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한숨을 팍 내뱉었다.
“나 오늘 12시 비행기라고. 늑장 부리면 곤란해.”
“어?”
무슨 말이야? 분명히 네가 나에게 그러니까….
- 나 겨울방학 동안 여기 머문다고 했잖아.
“너 분명히 나한테 겨울방학 동안 머물 거라고.”
“그래. 그 겨울방학이 이제 곧 끝나간다고. 벌써 2월 중순이야. 나도 돌아가서 시차 적응은 해야지.”
“그게 아니라. 네가 분명 어제…”
지잉- 지이이이잉- 찌이이이이이익-
기계음이 제법 신경질적으로 머릿속까지 바늘로 찌르듯 침투했다. 순간적인 고통이 심해 정환이 그만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떨구고 말았다.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본능적으로 손을 가져가 입을 틀어막았다. 순간적인 큰 고통으로 인해 온몸에 소름이 바짝 솟아오르고 식은땀이 흘렀다. 수겸이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물을 담아와 정환에게 건넸다. 괜찮냐는 물음이 아득히 먼 곳에서 외치는 소리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 또 눈앞이 울렁거렸다. 정환이 힘겹게 눈알만 굴려 창가로 시선을 보냈다. 창살이 휘어지듯 일렁댔다.
***
오전에 식탁 위에서 보인 추태가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여전히 석연치 않은 이 감정이 더 무거웠다. 수겸이 낯설다. 수겸만? 아니, 정환은 그를 둘러싼 이 모든 상황이 낯설었다. 어제까지 분명 새해를 둘이 축하하고 있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2월이 벌써 이 주나 지났다는 것도 그 사이에 이런저런 추억을 많이 쌓았다는 것도-그 증거로 같이 찍은 수많은 사진이 있어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수겸은 우스갯소리로 저와의 이별이 아쉬워 머리가 이상해진 것이 아니냐며 정환을 놀렸다. 정말 그런가? 내가 돌아버린 것인가? 공항으로 이동하는 택시 안에서도 수겸의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시선을 주지 못하고 창밖에 빠르게 지나가는 마른 가지들만 휘날리는 나무만 본 이유도 그러하기 때문이었다. 정환의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겸 역시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JFK 공항은 평소에도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오늘은 유독 더 사람이 많았다. 뉴욕이라는 도시는 이다지도 삭막함에도 무슨 매력에 다들 이끌리듯 이렇게 발걸음하고 돌아가는 길에 아쉬움을 가득 남겨두는지 정환으로서는 모를 일이었다. 서로 아무 말 없이 수속을 마치고 작별 인사를 하기 전, 정환의 몸은 주책맞게도 화장실에 가야 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나, 화장실 좀”
“어, 다녀 와.”
싸운 커플처럼 몇 시간을 말 한마디 하지 않다가 겨우 꺼낸 말이 화장실에 좀 다녀오겠다는 말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정환은 화장실 세면대에 손을 닦으며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았다. 수겸과의 예정된 이별이 무척이나 서운한 모양이다. 그러니 낯빛이 더 어둡다.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억지로라도 웃어야 떠나는 수겸이 덜 힘들어할 테니까. 손수건을 찾으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찾으려는 손수건은 없고 작고 보드라운 느낌의 상자가 손끝에 느껴졌다. 정환이 상자를 손으로 잡아 주머니에서 꺼냈다. 붉은 벨벳 천으로 싼 작은 상자였다. 정환이 상자를 조심히 열었다. 조명을 받아 상자 안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반지가 반짝반짝 빛났다. 설마 수겸에게 청혼하려 했었나? 그래서 이 반지를 준비해 놓았던 것일까? 그래. 만약 수겸이 이 겨우내 정환과 시간을 보냈고 그와의 이별이 아쉬웠고 계속 함께 하고 싶었던 정환이라면 충분히 고려했을 옵션이다. 밑져야 본전이다. 정환은 상자 뚜껑을 조심히 닫고 상자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KJ081, 00항공 서울행 비행기의 수속이 곧 마감됩니다. 아직 수속을 마치지 못하신 손님께서는 속히…』
“이제 들어가 볼게. 여름에나 볼 수 있겠네.”
모든 짐을 수화물로 부치고 배낭 하나만 단출하게 메고 있는 수겸이 웃으며 말했다. 정환은 한 손을 계속 외투 그 주머니에 찔러 넣어놓고 있었다. 주머니에 넣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는 정환이 야속하다는 듯이 하지만 이해한다는 듯 수겸은 정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럼, 여름에 만나. 잘 지내.”
수겸이 등을 돌렸다. ‘Departure’라고 크게 쓰여 있는 안내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을 옮기려는 찰나 정환은 그의 팔을 잡았다.
“김수겸”
고개를 돌린 수겸의 시선이 정환의 시선과 맞닿았다. 수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수겸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 것을 보니 아픈 모양이다. 이내 힘을 풀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여전히 한 손은 외투 주머니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작은 상자를 잡은 손에 땀이 잔뜩 고였다. 마른침을 삼키고 심호흡을 크게 한 번 내쉬었다. 손을 천천히 주머니에서 빼냈다.
수겸의 동그란 눈이 더 커졌다. 암갈색의 머리카락의 색과 닮은 그의 눈동자 색이 오늘따라 더 밝은 갈색을 띠는 듯했다. 수겸의 시선은 정환의 손에 고정되어 있어 평소보다 살짝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정환의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심장이 사정없이 쿵쾅거렸다. 수겸의 뒤로 보이는 각각의 행선지로 떠나는 항공기 스케쥴을 알리는 전광판의 글자들이 일렁이는 것을 보니 무척 긴장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김수겸, 나와 결혼해 줄래? 당장 아니더라도.”
수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암갈색 머리카락의 색을 닮은 눈동자가 천천히 정환의 눈동자가 향하는 방향으로 올라와 서로를 바라보았다.
***
- 김수겸, 결혼하자.
- 정환아. 내가 뉴욕에 온 이유는….
- 김수겸?
- 잘 들어. 정환아. 나는 네 청혼을 받을 수 없어.
- 무슨…?
- 정환아. 우린 오늘 헤어지는 거야. 내가 이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면 우린 이제 더 이상 같이 미래를 꿈꾸는 사이가 아닌 거야.
***
정환은 잠시 눈앞에 펼쳐진 환상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멍하니 수겸을 보았다. 수겸은 빙그레 웃으며 두 볼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지금 그의 기분이 어떠한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수겸이 손을 가져와 반지 상자의 반지를 꺼내 들었다. 수겸이 반지를 기꺼이 그의 왼손 약지에 끼웠다. 정환의 시선이 불안했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그를 감싸 시선이 떨려 반지를 낀 손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눈을 질끈 감고 수겸의 왼손을 잡아 다시 반지를 빼냈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반지를 빼낼 때 마찰 때문에 통증이 있었다는 듯 수겸은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감싸며 정환에게 대체 왜 그러냐 물었다. 정환은 고개를 저으며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이정환? 왜 그래?”
“아니야. 넌 김수겸이 아니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정환의 불안한 음색과는 다르게 수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어린아이를 달래듯 수겸이 한 손을 정환에게 내밀며 이리 오라는 듯이 다가갔다.
“내가 김수겸이잖아. 왜 그래?”
“아냐. 김수겸은 분명…”
BREAKING NEWS: HIJACKING, KJ081, NO SURVIVORS
그래, 김수겸은 그날. 그날 분명히. 내게 이별을 고하고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내…가 김…수…겸…이…야.”
수겸의 입에서 자신이 수겸이라 주장하는 말이 마치 기계음처럼 음절마다 끊겼다. 그러고는 이내 늘어진 테이프를 재생하듯이 늘어지는 기괴한 목소리로 변하더니 “내가 김수겸이야.”라는 말만 힘없이 반복하기 시작했다. 일그러지던 전광판이 마치 조각조각 깨지듯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전광판을 시작으로 전광판 옆의 벽 그 뒤엔 공항의 창문과 장식물들 정환과 수겸이 디디고 있는 바닥 그리고 종국에는 수겸의 존재까지 마치 깨진 유리 조각이 아무렇게나 맞춰진 듯이 조각나고 존재를 왜곡시켰다. 그렇게 순식간에 정환이 보고 있는 세상이 무너져 내려 종국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백지와 같은 공간만 펼쳐졌다.
***
“이정환 씨! 정신이 드세요? 일어나세요! 여기!! 빨리 의료팀 지원 불러!!”
정환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으로 바로 들어오는 새하얀 빛이 너무도 눈이 부신 것이 첫 번째 이유요 그다음은 도무지 이 눈꺼풀이 무거운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목이 지독히도 건조했다. 여름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갈라진 대지가 목으로 들어온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어느새 도착한 의료팀이 정환을 들어 올려 들것 위에 옮겼다.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하지만 팔이고 다리고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그 상황에서 정환은 보았다. 자신이 꺼내진 커다란 수면 기계의 모니터를 꽉 채운 “Error Code: 1213”을. 그 의미는 물론 알 수 없었다.
***
“이정환 고객님, 우선 우리 회사의 기계적 결함에 대하여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본디 SIMU(‘Still I’m Missing You’의 줄임말)은 충분한 임상실험을 걸쳐 기계가 사용자에게 보여드리는 고인과의 만남에 과도하게 중독되지 않도록 설계하였으나 우리 측에서 미처 살피지 못한 에러가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번 사고는 우리 엔지니어들이 해당 기계를 검토한 결과 설비적 결함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아직 에러 코드 1213에 대한 정확한 원인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저희가 기계 사용 전 늘 경고해 드린 대로 과도한 사용은 환각이나 의식불명 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하고 과도하게 기계를 오남용한 고객님의 귀책 사유도 있으나 과실 비율이 저희 쪽에 큰 만큼, 이정환 고객님께서 겪으신 피해에 대한 보상은 고객님께서 섭섭하지 않을 수준으로 배상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정환이 알아낸 사실은 정환이 잠들어 있던 SIMU가 작동을 멈추어 정환을 꺼낼 수 있게 된 원인은 바로 그 에러 코드였던 1213 덕이었다는 것뿐이었다. 오직 그것뿐이었다.
***
“환자분, 이런 몸 상태로 뉴욕행 비행기에 오르는 것은 의사의 입장에서 권하지 않습니다. 치료에 집중해도 모자랄 시간입니다.”
“그렇기에 더 다녀와야만 해요.”
수겸은 해맑게 웃었다. 고통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이.
“이게 마지막이라면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덜 슬퍼해야만 하니까요.”
십수 년 간 쌓아온 의사로서의 경험이 말하고 있었다. 이 환자는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그는 마음먹은 일이라면 어떻게든 관철해내는 사람임을. 수겸의 주치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우스를 움직여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마우스 버튼을 몇 번 딸깍딸깍 누르더니 손을 키보드에 가져가 자판을 천천히 두드렸다.
수겸이 정환을 만나러 뉴욕으로 향하기 몇 주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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