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명헌] 러브러브 데이트 서비스-외전1

그러니까, 우성아. 이제 와서 털어놓자면


“예 아닙니다.”

수신종료 버튼을 누르며 입속말로 새끼야, 를 덧붙였다. 명헌은 미간 사이에 빗금을 그리고 커피를 순식간에 반절 비웠다. 옆자리 동료가 얼마 전 출장 갔다가 사 왔다던 물건이었다. 호불호가 갈리는 독특한 향이 나서 대부분의 직원은 마시지 않았지만,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는 점에서 명헌의 취향이었다. 원체 남들과는 다른 취향인 편이기도 했고. 이런 거라도 없으면 당장이라도 때려치웠다. 

책상 위로 컵이 탕 소리 내며 떨어졌다. 오늘만 해도 세 번째였다. 옆자리에서 타자 소리가 한결 더 빨라졌다. 아마 이명헌이 또 빡쳤다는 요지의 메세지를 바지런히 퍼 나르고 있을 터였다. 

“광고 아무 곳에나 뿌리는 짓은 대체 언제쯤 멈춘답니까?”

타자 소리가 딱 멎더니 파티션 옆으로 멋쩍은 얼굴이 슬그머니 나타났다. 입꼬리가 어색하리만치 팽팽히 당겨져 있었다. 자기의 소관이 아니라 딱히 무어라 할 말은 없으나 전적으로 네 의견에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눈매가 축 쳐진데다 온통 둥근 선으로 이루어진 주제에 한 번 빈정이 상하면 눈 마주치는 것도 무서워지는 인상이 그 원인일 터다. 어쩌면 ‘새끼야’를 입 밖으로 뱉었는지도 모르고. 평소라면 됐다, 너한테 말해서 뭐 하겠냐 하는 심정으로 입을 다물었을 법했지만 이즈음 되니 알게 뭐냐 싶었다. 일단 입 밖에라도 안 꺼내면 당장 영업부에 쳐들어가 깽판 칠 판국인데. 

“그러게요. 근무시간 내내 쓸데없는 연락이나 자꾸 오고. 조금 전에는 무슨 내용이었어요?”

명헌은 마른 손으로 얼굴을 죽 훑었다. 힘 조절이 들어가지 않아 얼굴 거죽이 끌려 내려갔다. 눈 밑 붉은 점막을 드러내고 흰 눈 뜨는 얼굴에 옆자리에서 힉하는 소리가 났다. 그것 역시 이명헌이 알 바는 아니었다. 용. 귀찮을 때, 대꾸하기 애매할 때, 기분이 내키지 않을 때 대답 대신 따라붙곤 하는 말버릇에 피로함이 덕지덕지 묻어나왔다. 평소보다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도, 가감 없이 짜증을 드러내는 태도에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하는 것은 명헌이 이 회사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인재라는 걸 의미했다.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신경질 내는 편도 아니었고. 인공 뇌 삽입술을 받았다는 카더라가 돌 정도로 감정 컨트롤에 도가 텄다면 모를까. 이명헌이 부쩍 짜증이 많아진 건 새로운 프로젝트를 꾸리기 시작하면서였다. 러브러브 데이트 서비스. 이름을 누가 이딴 식으로 지었나 했더니 대주주님이시란다.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본래 행성 간의 교류 서비스를 제공하던 회사가 야심 차게 내놓은 만큼 이번 상품을 누가 운영할지를 두고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 와중에 나온 것이 이명헌의 이름이었다. 나이는 젊지만 영리하고, 제 몫을 정확히 해낼 뿐 아니라 일 처리에 있어 실수하는 법이 없어 이미 타 팀에서도 눈독을 들이고 있는 인재였으니까. 이만하면 슬슬 연차도 찼으니 새 프로젝트를 맡겨도 좋지 않겠냐는 의견이었다. 면담 이후에 몇 다른 후보가 나오긴 했으나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명헌도 처음에는 기대에 부풀었더란다. 처음으로 도맡는 새 프로젝트. 이름 모를 사람들 상대로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관계가 무엇인지, 또 거기에 가장 알맞은 인재는 누구인지 파악해 적재적소하고 기간에 일정 컨트롤까지 하는 것이 제 성미와 제법 잘 맞기도 했고. 위에서 신경 쓰고 있는 프로젝트에요. 잘할 수 있겠어요? 전 팀장이 하는 염려에도 덤덤하게 맡겨줘용. 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잘할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데이트’라는 단어였다. 성애적 감정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쉽게 타인의 권리를 무시했다. 왜 인간들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함부로 하는 걸까. 더없이 좋아하는 것에 애정이란 단어를 붙이면서 아무렇게나 손에 쥐고 휘둘러도 된다는 양 구는 건 무슨 심보인가. 사랑을 변명 삼아 타인의 존엄성과 인권을 손쉽게 무시하는 것에 이명헌은 천천히 지루해졌다. 무능한 팀원은 덤이었다. 프로젝트가 시작한 지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도 여즉 손발이 맞지 않았다.

“담당자 자지 크기만 네 번쯤 물어보더라고용.”

“네? 그래서요?”

“말해줬어용.”

“...네? 그래서요?”

“뻥치지 말라기에 아니라고 했더니 끊던걸용.”

그전에는 모텔비 더치페이에 관해 논문이라도 쓸 기세였고, 그전에는 자식뻘 되는 나이를 지명한 성도착남. 저기요, 여기 어린애들도 보는 곳인데 이런 파렴치한 광고를 내걸다니 부끄러운 줄 아세요. 경찰서에 민원접수 했으니 그리 아시고요, 하고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던 사람. 그즈음 되니 동료의 입꼬리가 가련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넓은 우주에 감정교류 서비스와 육체 교류 서비스를 혼동하는 지성체가 이토록 많을 줄이야. 

아무튼, 이번에야말로 영업팀에 한마디 해야겠다 마음을 다잡는 와중에 수신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두 사람의 머리가 동시에 명헌의 자리로 휙 돌아갔다. 실적이 안 나니 궁둥이에 불붙은 영업부가 사방팔방 광고를 뿌려대는 바람에 오늘만 벌써 네 번째 전화였다. 그러면 뭐 하나. 정작 본계약은 한 건도 못 올린 것을. 동료는 기다렸다는 듯 파티션 너머로 쏙 들어가 버렸다. 

명헌은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네. 러브러브 데이트 서비스입니다.”

수화기 너머는 조용했다. 거리가 너무 멀면 종종 연결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가 발생하곤 했기에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명헌은 조금 전까지 부글부글 끓던 사람 같지 않게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여보세요. 그제야 너머로 펄쩍 뛰어오르는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네, 네. 그게. 벽에 적힌 걸 보고 전화를….”

허둥지둥 말하는 모양이 무척 당황한 눈치였다. 목소리는 앳됐고, 혀끝마다 단어가 튀었다. 할 말을 미리 골라두고 전화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본인이 전화를 걸어놓고 정작 누군가 받을 건 예상치 못했다는 듯. 이번에도 계약하긴 글렀구나. 그나마 받자마자 욕설내지 희롱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 프로젝트를 맡으며 수많은 데이터와 기록을 찾아본 결과 얻은 기술이 하나 있다면, 어떤 사람이든 5분만 대화하면 그 치의 연애역사를 얼추 읊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5분까지 갈 것도 없었다. 수 많은 자료를 참고하지 않아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터였다. 연애라곤 그 근처도 가본 적 없는 풋내기. 짝사랑이나 해봤으면 다행이고, 연애에 있어 필요한 매너따위를 알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번에도 인내심이 필요한 통화가 될 것임을 직감한 명헌이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더 삼켰다. 빨리 묻고 끝내자. 

“서비스 이용을 원하시나요?”

“아뇨, 네?”

아니라는 거야 네라는 거야. 연이은 진상 처리에 밑으로 가라앉혀두었던 짜증이 슬그머니 고갤 들었다. 명헌은 다시 커피를 삼켰다. 이제 딱 두 모금이 남았다. 그게 이명헌의 인내심인지, 이 업종에 대한 미련인지, 그럼에도 남아있는 직업적 책임감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요약건대 이명헌은 권태로움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변하지 않는 일상들과 도통 애정이 가지 않는 상황들에. 처음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는 좀 달랐던 것 같긴 했다. 밤새 데이터를 찾아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에피소드를 물어보고. 불처럼 타올랐다가 식어 데면데면한 만남이나 몇 번 반복했던 지난날의 연애사도 되새겨보면서. 그저 그런 잔정 없는 성격이니 사사롭게 휘둘리지도 않을 것 같고, 너랑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단 말들도 이젠 사그라들었다. 새로움이라곤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나날들에서 성취감을 찾기란 ‘그’ 이명헌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서비스요. 광고 보고 연락 주셨다고 하길래.”

별 기대없이 습관적으로 발신자 위치를 확인한 명헌이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어처구니없음에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지구, 한국 강원도 소재의 한 고등학교 위에서 녹색 점이 깜빡깜빡 점멸하고 있었다. 걸리는 구석이 한두군데가 아니라 눈을 지르감았다가 떴다. 이번 통화가 끝나고 나면 영업부에 찾아가 불이라도 질러버리리라. 사람 눈에 띌 만한 곳이라면 길거리 전봇대건 분식집 벽이건 안 가리고 써 붙이는 게 능사가 아니란 말 한지 고작 이틀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명헌의 짜증이 부쩍 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떨어지는 실적, 그에 초조해져 벌이는 효율적이지 못한 일들. 성과가 전부라는 주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성과를 못 낼건 없지 않나. 명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 계획에 어긋나는 팀원들의 미숙한 일처리, 거기에 걸려드는 온갖 진상들. 그야말로 별 이상한…

“저기…혹시 거기 이상한 가게, 뭐 그런 거예요?”

명헌은 다시 컵으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고 모니터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지금 내가 속마음을 뱉기라도 했나. 주변을 돌아봤다. 이쪽을 쳐다보는 대신 각자의 업무에 집중하는 머리통들만 빼곡했다. 그렇다면 소리를 내어 말한 것은 아닐 테고. 명헌은 검지 위로 펜대를 굴리며 발신자의 당돌한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이상한 가겠느냐고.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금 경우에 빗대어보자면.

이상(異常)하다.

1. [형] 정상적인 상태와 다르다.

2. [형]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지식과는 달리 별나거나 색다르다.

3. [형] 의심스럽거나 알 수 없는 데가 있다.

지구는 범우주적 관계 제공 서비스는 물론이고 아직 그럴싸한 탐사 기술조차 개발되지 않은 행성이었다. 지성체가 사는 가장 가까운 행성과의 교류도 채 이루어지지 않은 곳. 그런 곳에 살고 있다면야 명헌이 일하고 있는 이곳을 이상한 가게라 불러도 틀린 점은 없을 터였다. 되려 이 정도 의심 어린 질문 정돈 정당히 여겨질 정도다. 명헌이 알고 있기로 이번 프로젝트는 물론이고 다른 상품조차 제대로 팔려 본 역사가 손에 꼽히는 미개척지기도 했다. 연락이 온 게 신기할 정도로. 상대방은 조심스레 물어보면서도 끊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호기심이 많거나 과하게 솔직한 성격이리라. 어쩌면 전부 해당할 수도 있고. 

근 며칠간 온갖 추레한 인간군상을 다 봤더니 이 정도 문의는 새삼 귀엽게까지 느껴졌다. 더해서 미개척지라는 점에서 약간의 흥미가 생기기도 했고. 외딴섬 같은 별에서 뭘 믿고 여기까지 연락을 주셨나. 명헌은 바람 새는 것 같은 소릴 낸 다음 컵을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지금 그쪽이 생각하는 게 뭔진 모르겠지만 아닙니다.”

뻔뻔스러운 부정에, 수화기 너머에서 아… 하고 박 터지는 소리가 났다. 명헌의 머릿속에서 잔뜩 긴장한 동물, 예를 들어 우주수달같은 작고 어린 포유류가 눈을 떼록 굴리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똘망똘망한 얼굴을 하고 있는 어린놈으로. 그렇게 생각하니 너머의 상대방이 다소 귀엽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전화를 걸어 추잡스런 소릴 지껄이거나 가당찮은 요구를 일삼는 다른 이들과는 전혀 다른 종인 듯. 지구가 어떤 행성이더라. 머릿속에서 자료를 뒤적이는 사이 수화기 너머의 인물도 나름의 고민을 끝낸 눈치였다.

“아뇨, 그래도 역시,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되바라진 어조의 질문치고 제 딴에 예의는 지키려고 하는듯한 목소리였다. 그 입장에서는 수상쩍기만 했을 광고를 보고 전화를 건 이유가 뭔지, ‘이상한 곳’이냐 물어본 다음 아니란 말에 안도하면서도 머뭇거리는 연유는 또 어떤 건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캐물었다가 냉큼 전화를 끊기라도 하면 난처한 쪽은 이명헌이었으므로. 대신 덫을 놓았다.

“후회하지 않겠어, 뿅?”

“네?”

딸꾹질 하듯 목소리가 튀었다. 망설이고 쭈뼛거리는 동물 앞에 달콤한 먹이를 두고 흔드는 기분이었다. 해치지 않는다고, 괜찮다고. 한 발자국만 더 가까이 오라고 유혹하는 손짓. 문장 사이사이 들어차는 망설임을 보아 어르고 달래는 것 보단 도발하는 쪽이 잘 먹히는 타입처럼 보였다. 이런 쪽으로 명헌의 짐작은 빗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넘어왔다. 입꼬리가 올라갈 듯 말 듯 했다. 사람을 좀 놀리고 싶게 만드는 구석이 있네. 지구인은 원래 다 이런가. 문득 얼굴이 궁금해져 점멸하고 있는 녹색 점을 클릭하자 그 위로 흰 팝업창이 떴다. 서비스 신청 전이라 부분 정보만 열람 가능하단 내용이었다. 당장 확인할 수 있는 건 세 가지 항목뿐이었다. 이름 정우성. 성별 남성. 나이 열여덟. 명헌의 눈매가 살짝 좁아졌다. 우성. 입 안으로 이름을 되뇌었다. 닿지도 못할 항성을 이름에 새기고, 평생 가볼 일 없는 곳에 전화를 건 열 여덟살 남자애. 

명헌은 한 손으로 책상 어딘가를 더듬거리다 무료 체험 이벤트 관련 서류철을 꺼내 들었다. 반짝 이벤트처럼 광고했지만, 고객이 별로 없는 근래에는 거의 상시로 진행되는 건이라 페이지 수가 많지 않았다. 이미 닳도록 읽었던 내용이라 눈 감고도 욀 수 있었다. 기간은 4주. 본격적인 서비스 이용에 조심스러운 고객들을 대상으로 권장한다는 문구들 아래 체험 서비스 이용 후 연장계약 성사율, 종료 후 재계약률이 유의미하게 높아졌다는 통계표가 뒤이어 적혀있었다. 명헌의 뭉뚝한 손끝이 표 위의 숫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정 불안하면 무료 체험이라도 신청해보던가, 뿅. 마침 지금 이벤트 중이니까.”

이명헌은 원체 사람을 잘 다루는 편이었다. 본인의 사교성이 뛰어나게 좋거나 이유 없는 호감을 사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누군가를 이끄는 것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열기라곤 품어본 적도 없고, 따듯함보다 미적지근함이 어울리는 얼굴을 한 채 군더더기 없는 언행을 보이면 타인은 쉽게 믿음을 줬다.

상대방의 반응은 예상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른 별과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는 주제에 이름에 별을 품은 지구인은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잠시간 어물거렸다. 머릿속에서 바쁘게 굴러다닐 생각들이 손에 잡힐 듯 선했다. 가시지 않은 의심과 숨겨지지 않는 호기심이 저울 위에서 깐닥깐닥 기울고 있을 터였다. 이즈음에서 의심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면 ‘됐습니다’ 따위의 매몰찬 말로 통화를 종료할 터였고. 명헌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기울어라. 

그리고 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맑고 높은음이 들렸다. 바로 헉 숨 삼키는 소리가 뒤따랐다. 수화기를 놓치지 않은 것이 장하다 싶어질 정도로 기겁하는 낌새였다. 이명헌은 파고들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할 거야, 뿅?”

“네? 네, 네!”

별이 옆구리라도 찔린 듯 펄쩍 뛰었다. 말 끝나기가 무섭게 화면 위로 팝업창이 떴다. 조금 전 통화 간에 나온 ‘네’가 서비스 신청에 있어 긍정적인 표현을 한 게 맞는지 재확인하는 창이었다. 이명헌이 동의했음에 체크하고 이후 진행될 계획절차들이 뜨기까지 채 1초가 걸리지 않았다. 경험상 양심은 실적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이렇게 궁금한 고객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이었으므로. 더해서 남들에 비해 그 양심이란 것의 크기가 다소 작은 편이기도 했다. 이렇게 쉬워서야 이 험한 인생 어떻게 살아가나. 누구한테 호구 잡히지 않으면 다행, 뿅. 방금 날치기로 동의 얻는 데 성공한 이명헌이 기운 저울 위에서 뻔뻔스레 생각했다. 

"근데 제가 지금 수업에 들어가야 해서요. 죄송합니다!” 

방금 그 말은 동의로 간주하겠다는 것부터 인적 사항 확인, 계약서를 들고 언제쯤 찾아가겠다는 내용을 전달하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겼다. 마지막까지 깍듯한 목소리에 머리라도 복복 만져주고 싶은 기특함마저 느껴졌다. 며칠후면 실제로 만져볼 수도 있겠지.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광고에 날름 전화를 걸어보는 경솔함도, 속내를 고스란히 내보이는 솔직함도 명헌이 제재할 바는 아니었다. 그건 그와 좀 더 친밀한 관계의 누군가의 몫일 터였다. 가볍게 만났다가 헤어질 서비스 직원이 아니라. 그러니 정말 가볍게, 연애란 게 뭔지 밤톨만큼도 모르는 어린애에게 시범을 보이고만 오자. 명헌이 통화를 종료한 기색이자 옆자리에서 익숙한 얼굴이 슬쩍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또 어떤 진상이었는지 묻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원래 다른 사람의 고난은 또 다른 사람의 컨텐츠인 법이었으니까. 조금 꼴 받긴 했으나 지지난 주 회식 때 한 짓이 있어 이번만큼은 넘어가기로 했다. 그때답잖게 진탕 취해 인공 모발 심은 걸 뻔히 알면서 거기에 물을 뿌리고 무럭무럭 자라라 덕담해주는 게 아니었는데.

"어째 기분 좋아 보이네요?"

계약 한 건 따낼 것 같아서용. 명헌은 대충 대꾸하며 모니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점멸하고 있던 녹색 점이 파랗게 바뀌어있었다. 대기 신호다. 문득 무언가에 생각이 미쳐, 산왕고등학교를 비추고 있던 모니터를 줌아웃해 단숨에 대기권 밖으로 화면을 돌린다. 

명헌이 내려가게 될 행성은 파랬다. 온 공기층마다 물내가 날 것처럼. 흰 구름이 퍼져있는 모양새마저 파도의 포말 같았다. 그 파란 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감정을 놓치고 싶지 않아 날치기 계약을 성사했단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우성아. 이제 와서 털어놓자면 네 시작과 내 시작은 동일한 점에서 시작된 셈이다. 그 앞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하고 우리를 나아가게 해주는…호기심.

“말꼬리를 바꿔볼까 해용.”

“어라, 바꾼 지 얼마 지나지 않았잖아요?”

“글쎄용. 데이트 가기 전에 잘 보이고 싶어서. 뿅이 좋겠어용. 마음에 들어 해주면 좋겠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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