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놀

가을 풍경.

백호열


귓바퀴에 덜그럭거리는 소음이 닿는다. 백호는 술기운이 달아난 다음 날 특유의 기묘하게 나른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뜬다. 태양빛을 한번 걸러 비추는 커튼은 아이보리 빛. 아무리 쉰다 한들 아침은 아침답게 반듯하게 일어나야 한다고 호열이 주장하던 통에 밝은 것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학생 때와는 다르니 어른이면 어른답게 굴어야지. 짐짓 엄하게 말하며 아침마다 이불을 걷던 손길은 매섭다. 백색과 아이보리 중에 그나마 때가 덜 탈만한 것을 집어들자 만족해하는 얼굴이 스친다. 모로 누웠던 몸을 돌려 바로 눕는다. 시선 끝의 천장은 조금 높다. 맨 위의 다락을 뜯어서 층고를 올렸다. 호열은 참 기가 막히게 꼼꼼했다. 도면을 직접 보고 여긴 이렇게 해 달라 저긴 저렇게 해 달라 오목조목 의견을 내는 것이 기가 막힌 수준이었다. 보통 그런 식으로도 따지고 드나? 하지만 중요한건 그 쪽이 아니다. 옆자리가 비어있다. 하기사 양호열 하면 새벽의 사나이라지만 암만 그래도 신나게 마시고 몇탕을 구른 다음날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안개처럼 몰린 피로를 양 손으로 몰아내면서 배를 긁던 백호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이 목조 주택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다. 암만 뜯어 고치더라고 골조가 나무 아닌가. 방음에 취약하니 한 층 위든 아래든 거기 있는 사람이 뭘 하던간 대충 무슨 행동을 하는지 때려맞출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이 생기고는 한다. 오늘도 그렇다. 출렁거리는 매트리스 아래로 다리를 떨구고 일어난다. 저 아래쪽에서 물 쏟는 소리가 선명하니 백호는 별 고민도 않고 바닥에 떨어진 속옷을 주워입고 껄렁껄렁한 걸음으로 부부침실을 나섰다. 

구름은 흰 색. 가을의 접경은 참으로 아름다워서 어느 장소에 머무르든 그 손바닥만한 창으로 보이는 윤곽만으로도 사람을 만족하게 만든다. 강백호는 거실과 주방을 가로지르는 미닫이 문을 떼어낸 나무 문틀에 비스듬하게 기대 서서 풍경화를 보듯 있었다.

보자. 중간에는 네 명이 둘러 앉을 정도의 밝은 색 사각 테이블이 하나 있다. 의자는 짝을 맞춰 두 개씩 네 개를 넓은 쪽에 두었는데 어차피 쓰는 것은 그것 중 두 개 뿐이니 가끔 좋을 대로 돌아다니곤 한다. 쭈욱 왼쪽으로 가면 용량이 큰 흰색 냉장고 하나. 뒤집어진 ㄱ자로 꺾인 구석에는 층층으로 쌓아두는 트롤리가 있어서 양념이나 자잘한 주방 물건 따위를 이름 붙여다가 차곡차곡 넣어놓았다. 그 뒤의 나무벽. 그대로 계속 시선을 가로로 옮기면 코 앞에 좁게 창을 뚫어놓은 넓은 개수대가 있다. 그 옆 렌지대 맨 위에는 조금 오래 쓴 티가 나는 렌지 하나. 중간에는 밥솥 하나. 아래쪽 빈 곳은 광목천을 조금 잘라다가 붙여 가려두었는데, 아마 쌀독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 작은 선반에는 검은색 커피포트 하나. 서랍이 붙어있어서 그걸 열면 짝 맞춰 놓은 식기가 가지런히 있을 테다. 호열은 거기, 그 서랍의 두번째 칸을 열어서 칼 한 자루를 꺼낸다. 서서 한 손에 적당히 들어오는 과도를 쥐고 사각사각 과일을 깎는다. 셔츠 아래로 쭉 나온 종아리를 본다. 저거 내 건데. 백호는 생각한다. 아무래도 어지간히 뭐 챙겨입기 귀찮았나보다 짐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렇게나 단추를 끌러서 주름진데다가 끝자락은 대충 접혀 말려 올라가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편의를 찾겠답시고 넓은 품의 셔츠의 소매자락을 몇번 접어 팔꿈치 아래로 올린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백호야, 일어났으면 세수 하고 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는 꾸준하게도 다정하다. 작은 접시에 사과를 잘라다가 늘어놓는 호열은 등 뒤에 누가 있는지 모를 위인이 아닌지라 이 때 까지 말 안 건 것이 용한지도 모르겠다. 백호는 비죽비죽 웃으며 칼 들었다고 경고하는 호열의 말을 귀 닫아 막은 뒤 등 뒤에서부터 허리를 둘러매듯 안았다. 그리고선 까치집의 정수리를 찾아 턱을 올린다. 야, 호열아. 너 네 티셔츠 안 입고 왜 내꺼 뺏어입어. 백호는 부러 시비를 걸듯 하며 호열의 셔츠 틈으로 손가락을 밀어넣는다. 호열은 거의 다 깎아가는지 껍질이 조금 남은 사과 하나를 백호의 입가에 대어주곤 발 뒤꿈치로 그의 정강이를 아프지 않게 찼다. 위험하니까 놔라 백호야. 사과가 입에 물려지는 것을 느끼고선 손 거둔다. 다 깎아놓고 살이 남은 깡치를, 호열은 입에 물어 뜯어먹는다. 아삭거리는 소리가 주방을 채운다. 셔츠 아랫단추가 풀어지며 초가을의 공기가 호열의 아랫배에 닿으려다 백호의 더운 손바닥에 막힌다.

다음 수순을 눈치챈 양호열은 흐름을 끊기 위해 재빠르게 사과 하나를 더 들어서 백호의 입에 들이밀었다. 사과를 문 강백호가 호열을 안아들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계단 오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커플링
#백호열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