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주 목요일의 천사.
백호와 호열 위주 NCP
양호열은 둘째 주 목요일에 태어난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사명을 가진 천사이다. 그의 주된 업무란 아이의 주먹 하나에 들어갈 정도의 눈물을 떼어놓기도 하고 품에 넘치는 사랑을 분배해가면서 어린이들이 잠에 들었을 때 머리맡에 그것들을 놓아두어 꿈으로 스미게 하는 일이다. 아이들의 정신은 그 사랑을 기억한다. 하여서 앞으로의 세상살이에 용기를 얻게 하는, 진실로 사랑을 옮기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 호열의 최종적인 목표였다. 하늘은 먹색. 호열은 금일도 급류를 따라 날개 펼쳐 내려온다. 팔 할의 거리를 날아 지칠 때 즈음엔 가나가와의 평면적인 파도를 타고 뭍으로 올라와 집집마다 찾아든다. 어린이들은 알까? 성축일의 산타클로스는 사실 25일에 태어난 어린이들을 위해 예비된 젊은 천사 이름이라는 것을. 그는 스스로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먹었는지 잘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아자엘이 인간에게 불칼을 쥐여주었을 때의 광경을 목도한 몇 안되는 천사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궁창을 나누고 빛과 어둠을 그을리면 자연스레 날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숫자로 날이라는 것이 확립되기 이전까진 얼마나 어지럽던지.
그러니까 요지는, 양호열은 아주 많은 어린이들을 봐 왔고 그들이 성년이 되는 해에 마지막 축복을 뿌리면서 건강하고 씩씩하되 구부러지더라고 꺾이지 말며 살거라, 하는 말을 남기며 새로운 목요일의 어린이를 맞이하러 가는 것이 연례 행사라는 의미다. 그에게 새 생명은 하나의 일과이며 익숙한 창조이다.
이제 호열은 날개를 접고 무겁게 올라온 느티나무를 중심 삼았다. 그 우편에 앉아서 새 탄생을 지켜본다. 몇십년 전 같았으면 지켜본다는 내용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거니와 앉는다는 말이 자신에게 붙을 수도 없는 사치 중 하나였는데, 저출생의 파도에 쓸려가느라 요란하게 뒤집어지는 왕국을 이해 못할 수도 없다. 그러나 별 수 있나. 세상은 변해간다. 가끔 전능자의 예비가 모자랄 정도로 가파르게. 왜. 창작물에는 콘티가 있다는데 그것들은 쌓아두고 쌓아두고 하더라도 금방 동나버린다 하지 않던가. 무한의 창작자이자 전능한 보호자께선 이 상황에도 머리를 쥐어뜯고 계실 터였다. 호열은 양 손으로 턱을 괴곤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다가, 아, 품에 들어가는구나. 싶을 때 슬그머니 창을 넘는다.
막 태어나 물에 불어 쪼글쪼글하고 새빨간 갓난쟁이다. 그게 온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콩알에서 막 머리를 든 싹만한 주먹을 움킨 채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호열은 진실로 최근 들은 울음 중 이렇게 용감무쌍한 울음을 들은 적은 없어서, 워어, 하며 얼빠진 소리를 내곤 웃었다. 어머님, 아기 울음이 호랑이 같은데, 이렇게 열심히 우는 애는 마음이 희고 명랑하더라고요. 땀에 젖은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떼어주는 호열은 공기 속에 스민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백호라고 하시는게 어때요? 용호는 너무 무겁고 백찬이는 너무 순하니까. 앞 뒤 글자를 따서요. 물론 이 말은 직접 닿지는 못하고 어떤 꿈의 흔적처럼 남겠지만, 호열은 이제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넘어서 급작스러운 첫 호흡에 짜그라드는 아기의 마늘쫑 같이 조그맣게 붙은 코를 검지로 톡 건드리고선 웃었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체온이 옮았다. 얘. 내 이름은 호열이야. 양호열. 네 보호자가 널 사랑하는 것 보다 조금 더 널 사랑할테고, 네게 무슨 일이 있으면 아마 내가 제일 먼저 오겠지. 호열은 사붓이 접은 날개를 푸르르 떨었다. 흰 깃털이 공기를 층층이 쌓아서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는다. 기적의 시작은 세상에 만연하다. 잘 부탁한다. 참으로 선선한 인사 아닌가.
둘째 주 목요일의 천사.
강백호가 양호열을 만났다 인식하는 최초의 날은 그의 나이 일곱살이었다. 이 어린이는 뭇 수많은 작은 존재들이 그러하듯 마음의 허들이 말랑했고, 가끔 하나에 집중을 하느라 나머지는 뒷전에 두곤 했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저 아직 어리기 때문에 벌어지는 사태다. 그래. 오늘이 특히나 그런 날이었다. 백호는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가는 강가에 서서 비탈진 풀숲을 헤집으며 놀고 있었다. 계절에 따라 다른 풀벌레가 백호의 신경을 바짝바짝 당기면서 호기심을 부추겼다. 세상은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으니 설탕가루를 뿌린 것 같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놀고 보는 것이 백호의 주된 관심사였다. 집 안에서 엄마의 품에 기어들어가 이불 속에서 이야기를 하며 노는 것도 좋았지만, 엄마는 잠을 좀 자야 해, 하는 아빠의 다정한 말에 조용조용히 집 안을 돌아다니는 것 만도 한계가 있었으니까. 그래도 백호의 부친은 실로 인덕도 있고 인복도 있는 사람이다. 이 어린 나이의 애가 동네를 나돌아다님에도 아무 일 없는 데에는 온 동네가 이 새빨갛고 찌끄만 어린이를 위해 손 하나씩 얹은 덕이 크겠다. 하여도 오늘은 늦은 시간이 아닌가. 원래대로라면 백호를 찾아 집까지 데려다 줄 손 하나가 비었다. 그걸 어린이가 눈치채어 먼저 찾아갈 의무는 없다. 다만 약간… …그 언저리에 그림자가 기울어진다.
백호야. 너 거기서 뭐 하니.
성인이라기엔 막 변성기를 건너온 듯한 젊은 목소리였다. 필시 처음 듣는 부류의 것인데, 당연히도 백호에겐 이 목소리 나이 즈음의 형제도 친구도 없다. 한창 풀을 헤집는 것에 집중하던 백호의 마음 따위가 싸악 흩어지며 고개가 쑥 들린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백호는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보다는 조금 작고 어머니보단 주먹 하나 정도 큰 사람이 가만히 노을을 등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이젠 그 윤곽 안쪽이 들어온다. 새카만 머리를 포마드로 넘기곤 요령 좋게 잔머리를 뺀 모양이 영락없는 멋쟁이었다. 팔꿈치에 패치를 덧붙인 청자켓을 걸친 채, 깊은 자켓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넣고 조금 비뚜름하게 서 있었다. 나이는 이제 열 일곱이나 되었을까. 나이까지 짐작하지 않더라도 풍겨나오는 풋내나는 어른스러움을. 그의 시선으로도 백호는 그가 일반적인 어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을 소마냥 씀뻑거리는 것을 보던 소년은 빙긋 웃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풀이 무성하게 자란 비탈. 발을 헛디디면 강으로 빠지기 딱 좋은 곳에 서 있는 백호에게 손을 뻗었다. 거기 계속 있으면 접질리겠다. 이리와. 그 목소리는 어쩐지 안온하고 부드러워서 백호는 응, 하고 순순히 그가 뻗은 손 위에 흙과 풀의 진액이 묻은 손을 겹쳐올렸다.
백호의 손은 조금 뜨거운 것에 반해 소년의 체온은 아주 미적지근했다. 마치 단정하게 매듭진 끈을 매만지는 것 같이 느껴졌다. 물론 백호가 거기까지 생각을 하진 않았다. 그냥 그가 자신을 가볍게 끌어올려 강가의 좁지만 평탄한 길로 올리는 중에, 형 손 진짜 딱딱하다. 라고. 어린이의 부족한 어휘에서 파생된 - 오직 직진만 남은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소년은 푸하하. 막힌 숨을 터트리는 것 처럼 웃더니 지저분해진 백호의 매무새를 다듬어주기 시작했다. 여전히 한쪽 무릎은 꿇은 채였다. 오늘 재미있었어? 백호의 물음 아닌 물음에 답하는 대신 소년은 회색 티셔츠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백호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릴 질문을 던졌다. 별사탕 같은 대화의 초두였다. 강백호 어린이는 기다렸다는 것 처럼 오늘 하교 후 란도셀을 집 안에 던져놓고서 뛰쳐나와 본 온 골목의 풍경과 바람냄새. 어린이들의 골목대장 일을 했던 오후의 조각. 강아지와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기싸움을 하다가 요란하게 들리는 소리에 도망치던 일. 흘러흘러 여기까지 와 풀을 헤집었다는 멋들어진 견문록을 혀로 엮으면서 소년의 옆자리를 차지한 채 씩씩하게 걸었다. 소년은 가로등이 듬성듬성 불을 띄우고 하늘의 가장자리가 장막을 펼친 듯 어스름해지는 경계에 서서 조잘대는 백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보폭과 속도를 맞추어 걷느라 시간은 아주 길었다. 그러나 아주 꾸준했다. 어느 사이에 낮은 집들이 줄지어 늘어선 주택가에 도착했고, 저 멀리 익숙한 색의 지붕이 보이자 백호의 걸음은 약간 빨라졌다. 반대로 소년의 걸음은 좀 느려졌다. 그 둘의 간격은 미세하게 벌어지기 시작하다가 종국엔 백호가 자신의 집 앞에 도착할 때 즈음 가로등 불빛 두 개 만큼 벌어져 있었다. 기척이 흐릿해진 것에 백호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고개를 돌려 떨어진 소년을 찾았다. 그는 어슴푸레한 밤거리에 놓여있었고, 백호는 보랏빛으로 염색된 낮의 막차에서 내리려던 참이었다.
백호가 물었다. 밥 먹고 갈래? 소년이 말했다. 다음에. 백호가 말했다. 다음에 언제? 소년이 말했다. 필요할 때에. 백호가 물었다. 형 이름이 뭐야? 소년이 말했다. 너 날 정말로 완전히 잊어버렸구나?
괜찮아. 그럴 수 있지. 그러나 백호는 그 말에 억울해하거나 섭섭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소년의 어둑어둑해지는 인영을 주시했다. 이상하다. 분명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저 거리 끝까지 볼 수 있었는데 저 형 만은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으으음. 백호는 미간에 어그러트리다 못해 콧잔등에도 주름을 잡고 집중했다. 웃음소리가 스몄다. 난 호열이야, 백호야. 양호열.
잘 있으렴. 라는 호열의 말 들은 백호가 눈을 깜빡였을 때 어린이는 이미 집 안 현관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백호는 그 날 밤 어떤 검지손가락이 자신의 코 끝을 톡 치는 꿈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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