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문모음

[태웅준호] 로미오와 줄리엣

-로미오 역을 하게 된 태웅의 이야기

* 그냥 생각나서 월루 겸 써봄

* 뒷이야기는 없고 딱 여기까지만 생각나서 씀

"태웅아, 부탁이야. 이 역할은 너밖에 할 사람이 없어!!"

태웅은 제 손을 꼭 잡고 부탁해오는 반장의 열렬한 시선을 피해 눈을 슬쩍 돌렸다. 이맘때면 어느 학교고 문화제를 준비하는 시기였고 북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고로 문화제라 하면 반 별로 여러 가질 준비하기 마련이다. 어디는 음식을 판다, 어디는 귀신의 집을 한다, 어디는 카페를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선 꼭 연극을 하는 반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올해 연극은 1학년 10반에서 하게 되었다. 연극 감독이 꿈이라는 10반의 반장이 학생회한테 자신의 반에서 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얘길 태웅도 어렴풋이 들었었다. 사실 태웅은 반에서 뭘하든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자기가 할 게 있으면 하고 아니면 말고였다. 근데 연극을 따낸 반장이 태웅에게 부탁한 건 놀랍게도 극의 남자주인공이었다. 

"자신 없는데.."

"아냐, 태웅아 너라면 잘 할 수 있어. 연기가 조금 어설퍼도 네 얼굴만으로도 다들 납득할거야. 그러니까 제발 맡아줘! 로미오는 너 밖에 없어!"

'...지금 그거 칭찬인가...'

그것도 무려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였다. 이런 쪽에 무관심한 태웅도 로미오와 줄리엣 정도는 알고 있었고 그래서 맡기가 부담스러웠다. 거의 무릎을 꿇기 직전인 반장의 애원하는 목소리에 교실 밖으로 새어나갔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10반 교실을 쳐다봤다.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서태웅이 남주..? 

"대박... 이번 10반 연극 장난 아니겠다.."
"태웅이가 로미오면 줄리엣은 누가 할까? 저 얼굴이면 태웅이가 줄리엣까지 해야 되는 거 아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이길 로미오가 여기서 나올 줄은 몰랐다.. 세상에..."

교실 내외부에서 수군거리는 이들의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목소리 뿐이랴 자신을 보는 눈빛이 마치 농구코트에서 자신을 보는 관객석들의 눈빛과도 같았다. 북산의 에이스 서태웅이 나서길 바라는 그런 기대에 찬 눈빛. 코트에서 그런 기대를 받는 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위치와 제 어깨에 짊어진 게 무엇인지를 상기시켜줘서 좋았다. 지금 이 시선이 코트에서 느껴지는 거라면 더 좋았을텐데.. 

"제발 태웅아! 이렇게 부탁할게!!"

반장은 어느 새 무릎을 꿇고 있었고 이렇게 되면 아무리 태웅이라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태웅은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알았어 라고 답했고 반장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태웅은 자신이 로미오 역을 하는 게 이렇게 환호할 일인가 싶었다. 

"...망해도 난 몰라."

태웅은 뒤늦게 덧붙였지만 반장에게 그 말은 들리지 않는 듯 했다. 그리고 태웅이 로미오 역을 수락한 지 1시간도 안 돼서  학교 전체에 서태웅이 로미오 역으로 연극을 한다는 얘기가 퍼졌다.

"태웅아, 너 연극한다는 거 사실이야? 로미오 역으로?"

방과 후, 농구부 연습을 하러 체육관에 온 태웅이를 보자마자 먼저 와있던 한나가 태웅을 붙잡고 물었다. 태웅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소문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어? 세상에..."

너 그런 거 안 할 줄 알았는데? 라는 한나의 말에 태웅은 어쩌다보니...라며 말끝을 흐렸다. 

"로미오 역...꼭 해달라고 해서요. 반장이.."
"아, 니네 반 반장이 걔구나?? 학생회에 자기네 반이 연극하게 해달라고 했다는 애가.. 연극 감독이 꿈이라더니 어지간히도 진심인가봐. 뭐..."

태웅이 얼굴 보면 연기를 잘하든 못하든 남자주인공 시키고 싶지.. 라고 생각하며 한나는 태웅을 쳐다봤다. 태웅은 누가봐도 미인이라고 할 정도로 잘생겼다. 농구라는 실내 운동을 해서 그런지 다른 운동부와 비교하면 하얀 피부에 오뚝한 콧날, 찰랑거리는 까만 머리카락과 수려한 턱선 그야말로 미인의 조건을 다 갖춘 존재였다. 그런 미모의 소유자가 무대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흥행은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물며 역할도 비극적 로맨스의 주인공인 로미오였다. 이건 무조건 시켜야지. 한나는 반장의 생각이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 체육관에 오는 부원들은 마치 인사라도 되는 것마냥 태웅에게 진짜로 로미오 역이야? 라고 물었다. 처음엔 그렇다고 대답하던 태웅도 나중에 가선 지쳤는지 물어보기도 전에 네, 로미오 역이에요 라고 말하는 지경이 됐다. 소식을 접한 부원들은 모두 놀라면서도 그럴만 하지 라는 반응이었고 주장인 태섭은 연습은 못 빼준다면고 못을 박았다. 소연이는 무대에서 로미오역을 하는 태웅의 모습을 상상했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였고 백호는 소식을 듣고 유독 태웅을 사납게 쳐다봤다. 저런 여우놈한테 로미오 역이라니 라고 이를 박박 가는 듯했지만 하루종일 같은 질문에 답해주고 있다보니 백호의 혼잣말에 장단 맞춰줄 기분이 들지 않았다. 농구부 연습을 보러 온 준호 역시 태웅이 로미오 역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에 놀랐다.

"정말? 태웅이한테 잘 어울리네."

근데 이번에도 로미오와 줄리엣이구나 준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팔짱을 꼈다. 이번에도? 다른 선배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인 준호를 보고 태웅은 눈을 껌벅였다. 

"누가 또 했었나요?"

"응? 아, 작년에도 연극했던 반이 있었어. 그 때도 로미오와 줄리엣이었거든."

"뭘 남의 반얘기처럼 하고 있는 거냐. 네가 한 거잖냐."

가장 마지막으로 태웅의 소식을 접한 치수는 준호를 보며 조금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하긴 뭘 했어 라며 손사레치는 준호를 보고 태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배도 로미오 역할이셨어요?"

"아니, 난 연출 쪽이었어. 치수는 소품 담당이었고."

치수가 그 때 고생 좀 했지. 준호는 그 때를 회상하며 웃었고 치수는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소품제작하느라고 며칠동안 밤을 샌 걸 생각하면 치수입장에선 별로 좋은 추억이 아니었다. 태웅은 준호가 연출을 했다는 말에 무심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배우인 것도 그에게 잘 어울렸겠지만 극의 전체적인 흐름을 만들어내는 쪽이 더 그에게 맞는 일 같다고 생각했다. 벤치에서 주전들을 응원했던 것처럼 배우들이 연기할 때마다 잘했어! 지금처럼만 가자! 하고 격려하는 준호의 모습이 머릿 속에 절로 그려졌다. 

"대본은 그 때랑 똑같으려나."

"그건 잘 모르겠어요. 아직 대본을 못 받아서. ....잘할 자신은 없지만요."

태웅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몸으로 하는 거라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머리 쓰는 일은 서툰 자신을 태웅은 잘 알았다. 망해도 모른다 라곤 했지만 정말로 자기 때문에 모두가 준비한 연극이 망하는 건 원치 않았다. 태웅의 무덤덤한 얼굴에 걱정이 어린 걸 보고 준호는 말했다.

"그럼 내가 도와줄까? 대본 외우는 거."

"선배가요?"

"응, 대본이 좀 다르다고 해도 기본 흐름은 같을테니까 어떻게 연기하면 좋은지 대본 리딩 같은 거 봐줄게."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번 해봤으니까? 라며 웃는 준호가 태웅은 순간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선배라면 의지할 수 있지만..

"선배는 수험생이시잖아요."

입시를 이유로 농구부를 은퇴한 준호의 시간을 뺏는 일이었다. 무턱대고 호의를 받아들일 순 없다라고 태웅은 생각했지만 준호의 생각은 좀 다른 듯 했다. 태웅의 말에 쉬는 시간에 짬내서 봐주는 건 괜찮아. 라며 준호는 태웅의 어깨를 토닥였다. 시합할 때 그를 칭찬하던 그 손길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다정한 손길이었다.

"네가 로미오 역할 하는 거 나도 기대되거든. 도움이 된다면 내가 더 영광이지."

"...그럼, 부탁드릴게요."

 

태웅은 가볍게 목례를 했고 준호는 그런 후배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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