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안에 연인에게 차이는 법 中

우성태섭 영화합작 참여작 / 10일 안에 남자친구에게 차이는 법 (2003)

; by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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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일 안에 연인에게 차이는 법 : 연인의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걸 이야기하기

태섭에게 다시 연락이 온 건 둘이 헤어진 지 8시간 만이었다. 사무실로 커다란 꽃을 보낸 태섭 때문에 한껏 기분이 좋은 상태였던 우성은 오래 사귄 애인에게나 들려주는 달콤한 목소리로 태섭과 통화를 나누었다. 태섭은 우성이 ‘실수’로 두고 간 클러치를 직원이 ‘실수’로 쏟아 그 안에 있던 오늘 자 NBA 티켓을 봐버렸다고 시인했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함께 가고 싶다는 말을 온갖 방법으로 우회해서 표현하는 태섭 때문에 억지로 웃음을 참은 우성은 흔쾌히 그의 동행을 허락했다. 어차피 동행이 필요했던 차였다. 우성과 태섭의 통화를 엿듣던 미셸과 헤일리는 우성의 패악질에 휘둘려 NBA 경기를 제대로 관람하지 못할 태섭에게 닿지 못할 애도를 보냈다.

그리고 지금 우성은 태섭과 함께 경기장 안에서 선수 유니폼을 입은 채 목청껏 닉스를 응원하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닉스에만 파울을 선언한 감독에게 욕을, 프리스로에 실패한 선수에게는 야유를 퍼붓던 우성은 문득 자신을 올려다보는 태섭의 시선을 느끼고 배시시 웃으며 태섭을 쳐다봤다. 앗차차. 너무 평소처럼 했나. 조금 전에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거칠었는지 잠깐 되짚어 본 우성이 살짝 고개를 숙여 태섭의 귓가에 속삭였다. 왜 그렇게 봐요? 애교 넘치는 우성의 물음에 태섭이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태섭은 우성의 새로운 면을 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분명 어제 이야기할 때는 자신의 커리어에 자부심을 가진 새침하고 당당한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거칠고 야성적인 사람이었다. 진짜 매력적이네, 이 사람. 나한테 빠졌으니까 이틀 만에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거겠지? 평소 만나던 사람들이 헤어지는 날까지 보였던 태도를 돌이켜 본 태섭은 우성이 자신에게 빠졌다는 확신을 가졌다. 델라의 파티에 우성을 데려가 그가 자신에게 흠뻑 빠진 모습을 보여주고 클레어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생각에 태섭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하프 타임 때 키스 캠에 걸려 진하게 키스까지 한 두 사람의 흥분도는 게임이 막바지를 향해 갈수록 수직으로 상승했다. 후반전이 1분 24초 남은 시점에서 두 팀의 점수 차는 고작 1점이었다. 두 사람이 응원하는 팀인 닉스의 공격이 시작됐다. 흥분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태섭이 달리고 있는 선수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옆에서 그런 태섭을 물끄러미 보던 우성이 허리를 숙여 태섭의 귓가에 외쳤다.

“태섭, 나 목말라요!”

“응?”

시선은 코트에 고정한 채 태섭이 우성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경기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못 들은 게 분명해 우성이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했다.

“나 음료수 좀 사다 줘요!”

“1분만 있으면 끝나요! 조금만 참아봐요!”

태섭의 대답에 우성이 우는 소리를 내며 태섭의 어깨에 매달렸다.

“나 목이 찢어질 것 같아요! 지금 마시고 싶어!”

그제야 코트에서 시선을 뗀 태섭이 우성을 쳐다봤다. 우성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가늠하려는 표정이어서 우성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아냐, 태섭은 경기 봐요. 내가 사 올게. 바깥쪽에 서 있는 태섭을 밀어내고 나가려는 우성을 막은 태섭이 한숨을 푹 쉬었다.

“뭐로 사다 줄까요?”

“콜라. 얼음 빼고요.”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우성과 한참 경기 중인 코트를 번갈아 쳐다보던 태섭이 번개처럼 좌석을 빠져나갔다. 뛰어 올라가면서도 코트를 돌아보는 태섭을 보던 우성이 방긋 웃으며 몸싸움이 격렬해지고 있는 코트로 시선을 돌렸다.

날다람쥐처럼 빠져나와 매점으로 달려간 태섭이 카운터에 서서 비명처럼 주문을 내뱉었다.

“얼음 뺀 콜라 주세요!”

벽에 기대서 핸드폰을 하고 있던 직원이 태섭의 주문을 듣고 느릿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직원과 경기를 중계 중인 TV를 초조하게 번갈아 쳐다보던 태섭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직원을 돌아봤다. 빈 음료 컵을 든 직원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음 넣으라고요?”

“아뇨. 빼주세요. 얼음 빼고.”

기계에서 콜라가 나오는 걸 보던 태섭이 다시 TV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도 킹스에서 타임을 외쳤는지 경기가 잠시 멈춘 상태였다. 다리를 덜덜 떨며 콜라를 기다리던 태섭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직원을 보고 지갑을 열어 지폐를 내밀었다. 하지만 직원은 콜라를 그대로 든 채로 물었다.

“25센트 더 내면 사이즈 업 가능하신데요.”

“아니에요. 그걸로 주세요. 제발. 그걸로 줘요.”

거의 애걸하다시피 말하며 콜라를 받아 든 태섭이 나머지는 팁이라고 외치며 다시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거스름돈을 받을 시간도 없었다. 흥분해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자리로 돌아온 태섭이 감동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우성에게 얼음 없는 콜라가 가득 담긴 컵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태섭. 진짜 다정하다.”

우성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태섭의 뺨에 뽀뽀했다. 때마침 경기가 재개되어 태섭은 여유롭게 웃으며 우성의 허리를 감싸 안아 한 번 세게 쥐었다 놨다. 태섭이 음료를 사 오는 사이 경기는 킹스가 닉스보다 1점을 앞선 상태였고 시간은 10초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는 태섭을 힐끗 본 우성이 우는 소리를 내며 태섭의 귓가에 외쳤다.

“태섭, 이거 제로 콜라가 아니야!”

“어?”

“나 제로 콜라가 아니면 못 마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우성을 쳐다보는 태섭을 보고 우성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줄어들고 있는 전광판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코트의 상황 그리고 옆에 있는 우성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태섭이 욕을 삼키고 다시 매점을 향해 달렸다. 태섭은 좀 전에도 시간 내로 음료수 사 오는 걸 해냈으니, 이번에도 해낼 수 있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리고 우성은 태섭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재빨리 코트로 시선을 돌리고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아, 시원하다! 목을 축인 우성이 거친 목소리로 공을 잡고 있는 선수의 이름을 외쳤다.

“켈란, 당장 슛해! 슛하라고!!”

그리고 미친 듯이 계단을 달려 올라간 태섭이 TV 앞에 서기 직전, 닉스의 선수인 켈란이 던진 공이 림을 말끔하게 통과했다. 우승이 결정된 순간, 경기장을 폭발시킬 것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고 가장 결정적인 슛 장면을 놓쳤다는 걸 깨달은 태섭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아, 켈란의 슛이 성공했습니다! 닉스가 몇 초 사이로 킹스를 눌렀습니다! 켈란이 닉스의 승리를 일궈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흥분한 중계 위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허탈하게 서 있던 태섭은 환호성을 지르며 관중석을 빠져나오는 관중들과 기운 없이 하이파이브를 했다. 곧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우성이 매점 앞에 서 있던 태섭의 앞에 나타났다. 우성이 손에 들고 있는 음료수 컵을 받아 쓰레기통에 넣은 태섭이 힘없이 웃으며 물었다.

“재미있게 봤어요?”

“응! 이런 경기를 눈앞에서 본 게 너무 행복해요. 태섭, 나 때문에 역전 골 놓쳐서 어떡해요?”

“괜찮아요.”

“웅……. 그렇지만 재미있었죠!”

“응. 재미있었어요.”

태섭의 대답에 꺄르륵 웃음을 터뜨린 우성이 태섭의 입술에 쪽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뭐, 닉스의 역전 골을 놓친 건 뼈아프지만 그 대가로 우성의 마음을 조금 더 얻었다고 생각하니 쓰린 속이 조금은 달래졌다. 반짝이는 우성의 눈이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걸 보면 적어도 델라의 파티까지는 헤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태섭에게 거의 매달린 우성이 쉴 새 없이 웃음을 터뜨리며 경기 내용에 대해 떠들었다. 농구 룰을 굉장히 자세히 알고 있는 우성을 올려다본 태섭이 물었다.

“우성은 농구를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닌 거 같은데요? 농구 룰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요?”

“아, 저 고등학생 때 선수로 뛰었었어요. 스몰 포워드. 키 때문에 졸업하면서 관뒀지만요.”

“어? 나도 고등학교까지 농구했었어요. 난 포인트 가드.”

“진짜?”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 우성이 행복한 수달의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태섭을 끌어안았다. 나 농구했던 사람 만난 거 처음이야! 우리 그러면 나중에 원온원도 해요. 우성의 말에 태섭도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진짜 어떻게 이런 사람을 골랐을까. 우성은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치는 남자였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 다이아몬드는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태섭은 행복에 젖어 재잘대는 우성을 보며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우성이 부른 택시가 도착할 때까지 신나게 농구 얘기를 하던 두 사람은 둘 다 행복한 감정에 퐁당 빠진 상태로 다음 데이트를 기약하며 헤어졌다.

 

 

 

 

2. 10일 안에 연인에게 차이는 법 : 나의 취향으로 연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그의 모든 공간을 꾸며주기 (물론 동의는 필요 없음! 우리는 같은 마음이니까♥)

우성을 알게 된 지 4일째, 태섭은 우성이 자신에게 푹 빠졌다고 확신했다.

닉스VS킹스 챔피언 결정전 1차전 경기를 봤던 날, 우성과 헤어지고 집에서 경기 편집본을 보며 심부름 악몽을 잘 달랜 태섭은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했다. 광고 문구가 마음에 안 드는지 예민하게 구는 엘렌을 보면서도 태섭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회사로 우성의 전화가 걸려 오기 전까지는……. 전화를 처음 받은 회계팀 직원이 창백한 얼굴로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와 ‘우성이 태섭을 찾는다’고 전했을 때, 태섭은 믿을 수가 없었다. 우성은 사회인이었다! 근무 시간에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어서 자신을 찾으면 안 된다는 상식 정도는 있는! 당황한 태섭이 가만히 있자 전화를 건 이가 누군지 눈치챈 엘렌이 여기서 전화를 받으라고 요구했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당긴 태섭은 전화를 받지 않아 회사로 걸 수밖에 없었다고 칭얼대는 우성의 목소리를 들으며 엘렌의 눈치를 봤다.

“응, 우성. 다 이해하죠. 그런데 나 회의 중이라…….”

- “그렇지만 너무 보고 싶었는걸요! 태섭 목소리도 듣고 싶었구. 조금만 더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음…….”

애교가 많긴 하지만 태섭과 있을 때는 어른스러운 면을 보여줬던 우성이 이렇게 애처럼 칭얼거릴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 태섭이 말을 잃었다. 태섭이 입을 다문 사이에도 우성은 오늘 점심을 뭘 먹었는지, 먹으면서 친구들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오늘 상사가 어떤 지시를 했는지 신나게 떠들었다. 통화가 점점 길어지자 험악해지는 엘렌의 눈치를 본 태섭이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우성을 달랬다.

“우리 퇴근하고 만나요. 그때 하고 싶었던 얘기도 다 하자.”

- “오늘 만날 수 있어요?”

“그럼. 영화라도 볼까요? 우성이 보고 싶은 걸로 골라요.”

- “좋아요! 이따 만나요!”

그리고 태섭은 영화 선택을 우성에게 맡긴 대가로 취향에 맞지 않는 로맨스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는 액션물만 골라보는 태섭에게는 고역인 시간이었다. 하지만 태섭이 조금만 지루한 표정을 지으면 옆에서 우성이 자기가 영화를 잘못 고른 거냐며 울먹거려 태섭은 억지로 몰입한 척 영화를 감상했다. 뭐가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영화를 보는 내내 재잘대는 우성 때문에 뒷자리 사람과 시비가 붙어 싸움이 날 뻔했지만, 간신히 폭력 사태로 번지기 직전에 무마할 수 있었다.

완전히 진이 빠진 상태로 우성과 함께 아파트로 돌아온 태섭은 집 앞에 한가득 놓여 있는 화분과 택배 상자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자신은 저런 걸 시킨 적이 없으니, 문과 복도 대부분을 틀어막고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짐은 전부 오배송인 게 분명했다. 어떤 미친 새끼가 배송을 이따위로 한 거야……. 태섭은 저걸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니 두통이 오는 것 같아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뒤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우성이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우와, 배송 진짜 빠르네. 벌써 다 도착했잖아?”

“……이거 우성이 주문한 거예요? 전부 다?”

“응. 오늘 낮에 돌아다니면서 태섭이 생각나서 이것저것 샀더니 양이 너무 많아져서 그냥 태섭 집으로 가져다 달랬어요!”

날듯이 걸어가 거대한 아레카야자 잎을 만진 우성이 들뜬 표정으로 태섭을 돌아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언제 기뻐했냐는 듯 잔뜩 주눅 든 얼굴로 태섭의 눈치를 봤다.

“……마음에 안 들어요? 다 태섭 생각나서 산 건데.”

마음 같아서는 전부 환불하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태섭은 웃으며 우성을 다독였다. 다이아몬드를 위해서라면 우성의 호감을 사야 하니, 그가 할 수 있는 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아니에요. 마음에 들어요. 예쁘네요.”

“정말이죠?”

“그럼요.”

문제는 화분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우성이 원하는 위치에 거대한 화분 20개(!)를 옮긴 태섭의 눈앞에 온갖 귀여운 소품이 튀어나왔다. 우성이 택배 상자를 뜯을 때마다 나오는 털이 북실북실한 곰 인형에 태섭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태섭의 침대, 소파, 식탁, 부엌 여기저기에 배치된 곰 인형을 멍하니 보던 태섭은 뒤이어 인테리어 소품이 줄지어 나오는 걸 보고 생각을 포기했다. 긴 시간과 많은 돈을 들여 우드 톤의 따뜻한 느낌을 내는 인테리어를 완성한 태섭의 집 여기저기에 아주 예쁜 새먼핑크 소품이 자리 잡았다. 자기 집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변한 것을 멍하니 보던 태섭은 우성에 대한 마음이 조금 식었고 다이아몬드 광고를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인테리어를 마친 우성이 다가와 같이 씻자고 속삭이는 소리를 듣자마자 부정적인 생각을 다 날려버렸다. ♥역시 인테리어의 완성은 핑크지♥

다음 날 출근 직전, 우성이 도대체 언제 사 왔는지 모르겠는 괴상한 패턴의 셔츠를 내밀었을 때 다시 마음이 식을 뻔한 위기가 있었지만(패션 잡지 쪽에서 일한다고 하지 않았나?),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진한 키스를 받고 다시 원상복구 됐다.

오늘 휴무라는 우성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한 태섭은 출근 하자마자 걸려 온 우성과 두 시간가량 통화를 하며 업무를 쳐냈다. 간신히 전화를 끊은 뒤, 점심 먹고 회사에 복귀하다 자신의 사무실 앞에 서 있는 우성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성?”

“태섭! 너무 보고 싶어서 왔어요.”

환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걸어 온 우성이 태섭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억. 얼마나 세게 안았는지 갑자기 숨이 턱 틀어 막히는 느낌에 태섭은 정신을 잃을 뻔했다. 태섭의 뒤에 서 있던 칼과 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우성의 등을 토닥여 간신히 떨어뜨린 태섭이 머쓱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가리켰다.

“여긴 칼과 윤이야. 나와 함께 일하는 친구들이지.”

“반가워요. 두 분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한 우성이 두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성과 악수를 한 칼이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태섭과 우성을 번갈아 쳐다봤다. 분명히 태섭이 설명한 우성은 ‘나와 단둘이 있을 때는 귀엽고 애교가 많은 편이지만, 남들 앞에서는 자신의 커리어에 자부심 있는 이성적이고 멋있는 사람’이었는데, 칼이 보기엔 집착 증세가 있는 미인사이코였다.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된 사람의 직장에 찾아와 그를 끌어안고 사무실 한복판에서 뺨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고 있는 저 남자를 어떻게 이성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윤 또한 당황스러운지 칼을 툭툭 쳤다. 두 사람을 태섭 방으로 밀어 넣을까? 윤의 속삭임에 칼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무실 한복판에서도 저러는데 밀폐된 공간으로 넣었다간 옷을 벗을 게 분명해…….

뽀뽀에서 멈추지 않고 혀까지 밀어 넣은 우성 때문에 칼과 윤은 강제로 혀가 왔다 갔다 하는 두 사람의 키스까지 봐야 했다. 우성에게 휘둘려 정신없이 키스를 받아주던 태섭은 뒤늦게 사무실 안의 다른 직원들이 떠올라 허겁지겁 우성을 밀어냈다. 다행히 여기서 옷까지 벗을 생각은 없었는지 우성은 촉촉한 입술을 혀로 핥으며 순순히 뒤로 밀려났다. 너무 반짝거려 광기가 서려 보이는 커다란 눈동자가 머쓱한 얼굴로 입술을 닦는 태섭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걸 본 칼이 묘하게 웃었다.

우성은 요란스럽게 떠들면서 태섭에게 매달려 사무실을 구경하고 선물이라며 퉁명스러운 표정의 오리가 대문짝만하게 프린팅된 파란색 티셔츠를 주고 돌아갔다. 빨리 입어보라고 호들갑을 떠는 우성 때문에 강제로 그 티셔츠를 입은 태섭은 우성을 배웅하고 돌아오자마자 윤의 손에 이끌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우성에 대해 한 소리 들을 각오 하고 있었던 태섭은 자신을 와락 끌어안는 칼의 행동에 파드득 몸을 떨었다.

“뭐, 뭐야!”

“태섭! 우리가 드디어 다이아몬드를 하는구나! 진짜, 난 네가 자랑스러워.”

“뭐라고?”

“다이아몬드라니. 화보 레퍼런스도 좀 보고 공부를 시작해야겠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태섭이 영문을 모르겠는 기색이자 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 ‘애인’ 말이야! 네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데.”

“……그렇게 보였어?”

“야, 누가 봐도 사랑에 푹 빠져서 사리 분별 못하는 전형적인 스타일이잖아. 다이아몬드가 걸리지만 않았으면 너 보고 도망치라고 조언했을 거야.”

칼의 말에 눈을 깜빡이며 우성의 행동을 되짚어보던 태섭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우성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정신 못 차리고 그에게 휘둘리느라 우성이 벌이는 모든 일이 한 가지 답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우성은 ‘확실히’ 태섭에게 깊은 호감이 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태섭의 눈앞에 우성을 옆구리에 낀 자신이 클레어를 누르고 다이아몬드 광고를 따내는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드디어 잡다한 술이나 운동기구와는 안녕이구나. 내가 전통 있는 다이아몬드 시장에 진출하다니……. 이상한 티셔츠를 입고 행복에 젖어 바보 같은 얼굴을 한 태섭을 보며 킥킥 웃던 윤이 태섭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이제 굳히기로 들어가는 건가?”

윤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태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나올 차례야.”

“아, 그거 진짜 환상적이었는데.”

“다음에 또 해주면 안 되냐.”

군침을 삼키며 애원하는 칼과 윤을 밀어낸 태섭은 오늘 밤 귀가하며 사야 할 물품을 되짚었다. 일단 고기는 사야 하고, 체리도 사야 하고……. 꼭 넉넉하게 만들어서 조금만 가져다 달라고 애원하는 칼을 매단 채로 태섭은 오늘 마트에 들려 구매해야 할 것들의 목록을 작성했다.

 

 

 

 

3. 10일 안에 연인에게 차이는 법 : 말하지 않아도 나의 호불호와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연인에게 서운함을 토로하기

“불평 한마디를 안 했다고?”

커피를 마시며 우성의 경과보고를 듣던 헤일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성이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끄덕이자, 미셸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말했지? 싫은 행동도 너 같은 미인이 하면 사랑해서 하는 행동이라고 선해한다니까.”

“아아, 너무 아름다운 것도 죄라면 죗값을 치러야겠죠.”

두 팔로 자신의 몸을 끌어안은 우성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미셸이 못 산다며 깔깔 웃었다. 미셸과 우성이 떠들며 웃는 걸 심각한 얼굴로 보던 헤일리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까지 흘리며 서로 웃고 떠들던 세 사람은 한참 지난 후에야 다시 원래 화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니, 사무실 사람들 앞에서 키스했는데 가만히 있었다니. 남한테 보여주는 걸 좋아하는 변태 아냐?”

“그런가?”

“어제가 나흘째였지? 섹스 후에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우는 건 했어?”

“하려고 했는데, 태섭이 기절해 버려서 그만.”

우성이 윙크를 날리며 던진 말에 미셸이 구역질했고 헤일리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귀를 닦았다.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한 우성이 몸을 뒤로 젖히고 웃었다. 아, 진짜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어. 끔찍한 표정으로 웅얼거리는 미셸을 본 헤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은 우성이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오늘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는데, 가서 뭐 할까?”

“글쎄……. 문자는 보냈어?”

“응, 5분 전에 뭐하냐고 보냈어.”

“답장은?”

“아직.”

“왜 연락 안 되냐고 빨리 재촉해.”

“……너무 미저리 같아 보이지 않아?”

“우성, 지금 너의 캐릭터는 사랑에 빠지면 사리 분별이 안 되는 또라이 사이코야.”

“웅, 지금 보낼게.”

미셸의 근엄한 말에 우성이 바로 핸드폰을 들었다. 우성은 자신이 5-6분 간격으로 보낸 뭐하냐는 말풍선으로 가득한 채팅방에 말풍선을 하나 더 추가했다. 진짜 이런 거 귀찮아서 어떻게 하는 거야. 우성의 투덜거림에 미셸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연락하는 게 이상하다는 걸 모르니까 사이코인 거지.”

“그렇구나…….”

“오늘 저녁 메뉴는 뭐래?”

“무슨 비법 소스를 곁들인 양고기래. 엄청 맛있을 것 같아서 기대돼.”

우성이 헤실헤실 웃으며 하는 말에 잠시 고민하던 헤일리가 우성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좋은 생각 났어. 헤일리의 말에 우성과 미셸의 시선이 헤일리에게 집중됐다. 자신이 떠올린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는지 배부른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지은 헤일리가 말했다.

“너, 오늘 가서 저녁 먹지 마.”

“엥? 왜? 먹고 싶은데? 나 양고기 좋아해. 그리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요리라 휴가까지 내서 준비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너무 미안하잖아.”

“왜 못 먹냐 하면 내가 식단 중인 거 몰랐냐면서 울어. 이런 거 먹으면 다 망치는 건데 당신은 날 생각하지 않는다구, 날 사랑한다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와, 이거다 우성. 이거 반드시 해야 해.”

미셸의 말에 우성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때까지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먹었는데.”

“오늘부터 시작이라고 하면 되지. 어차피 네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면서 고집부리는 거니까 논리가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네가 태섭의 성의를 눈앞에서 걷어찬다는 사실이지.”

헤일리의 말을 듣던 미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악한 얼굴로 설명을 듣고 있던 우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메뉴를 알려줬는데, 왜 못 먹는다고 미리 말을 안 해?”

“모르지?”

“그걸 이해하면 우리도 이상한 사람인 거야.”

매정한 헤일리의 말에 미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애할 때 이상한 짓 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미셸이 헤일리와 의견이 같다는 것에 놀란 우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미셸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성, 나는 연인과 행복하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야. 그를 통제하고 기분 나쁘게 만들려는 게 아니라. 미셸의 말에 우성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됐다. 사랑에 관해서는 실수투성이인 소중한 친구의 좋은 점을 봐주는 사람이 빨리 생겼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기분이 몽글몽글해진 우성이 두 팔을 벌렸다. 갑작스러운 우성의 행동에 당황한 미셸이 헤일리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뭐야.”

“미셸, 안겨 빨리. 나 지금 널 꽉 안아주고 싶어.”

“난 싫은데……?”

질색하는 얼굴로 슬슬 피하는 미셸을 보고 입술을 삐쭉 내민 우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싫다고! 우성이 뭘 하려는 지 눈치챈 미셸이 소리를 지르며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쳤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 단숨에 미셸을 따라잡은 우성이 그를 끌어안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다리가 허공에 뜰 정도로 빠르게 도는 우성 때문에 공포에 질린 미셸의 비명을 배경음 삼아 평온하게 커피를 마신 헤일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튼 애라니까, 둘 다.”

 

 

태섭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풍기는 끝내주는 소스와 양고기 냄새에 정신을 잃을 뻔한 우성이 침을 꼴깍 삼켰다. 빨리 태섭에게 차이고 칼럼을 완성하려면 이 양고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에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한 입만 먹으면 안 되나. 아무렇지 않은 척 환하게 웃으며 주방에 있는 태섭에게 달려가 키스를 한 우성이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주방으로 가니 양고기 냄새가 더 환상적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헤일리의 지령을 잊고 끝내주는 식사를 하게 될 것 같아 주방에서 후다닥 빠져나온 우성이 태섭의 집 안을 배회했다. 태섭은 정말 착실하게도 본인의 집 인테리어를 해치는, 우성이 가져다 놓은 소품을 하나도 치우지 않았다. 태섭은 진짜 이렇게 집착하고 통제하는 사람이 좋은 변태인가?; 아니면 연애하면 자아가 없어지는 타입? 태섭에게 물어볼 수 없는 의문을 삼킨 우성이 새로 사 온 폭신폭신한 털이 잔뜩 붙은 핑크색 쿠션을 태섭의 베개 옆에 내려놨다. 음, 정말 안 어울리고 귀엽다.

원래도 연애할 때 자아가 없어지는 편이지만, 지금은 목적이 있어 우성의 억지를 전부 받아주고 있는 태섭은 심각한 얼굴로 냄비 안에서 졸아들고 있는 소스를 응시했다. 소스가 완성되자마자 오븐에서 잘 구워진 양고기를 예쁘게 담고 그 위에 소스를 부은 태섭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때까지 만들었던 소스 중 가장 잘 된 것 같아 아주 만족스러웠다. 로맨틱한 분위기로 꾸며놓은 식탁을 한 번 더 확인한 태섭이 우성을 찾아 총총 걸어갔다. 여기저기 들여다보다 태섭의 침대에 엎어져 있는 길쭉한 몸을 발견한 태섭이 숨죽여 웃었다. 저 길쭉하고 거대한 남자가 왜 이렇게 귀여워 보이는 건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가 귀여웠다. 살금살금 걸어가 우성의 귀를 아프지 않게 깨물자 우성이 파드득 몸을 떨며 일어났다. 한쪽 손으로 귀를 가린 채 몸을 일으킨 우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섭을 쳐다봤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 웃겨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자 무슨 상황인지 눈치챈 우성이 장난스럽게 얼굴을 구기며 태섭을 확 끌어안았다.

“놀랐잖아요!”

“그러게 누가 무방비하게 있으래요?”

얄밉게 웃는 태섭의 뺨을 아프지 않게 와앙 물었다 놓은 우성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우성의 손을 잡고 식탁 앞까지 데려온 태섭이 손수 우성의 의자를 빼줬다. 태섭이 빼준 의자에 앉아 그가 손수건을 목에 둘러주는 것까지 얌전히 받은 우성이 방싯방싯 웃으며 말했다.

“오늘 태섭이 너무 잘 해줘서 막 설레요.”

“설레요? 그럼 성공이네.”

“뭐가 성공이야?”

“오늘 우성이 설레서 정신 못 차리게 만든 다음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핥아먹을 예정이거든요.”

태섭의 말에 우성이 웃으며 손을 뒤로 뻗어 등 뒤에 있던 태섭을 자신의 품으로 끌고 왔다. 태섭의 가늘지만 근육으로 탄탄한 허리를 꼭 끌어안은 우성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이만큼 설레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거잖아~”

“하지만 설레면 더 즐겁잖아요.”

머리칼을 살살 넘겨주는 작고 단단한 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뜬 우성이 눈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태섭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기다렸다는 듯 입을 벌리고 우성의 목을 끌어안는 태섭 때문에 속으로 웃음을 삼킨 우성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태섭은 생각보다 로맨틱한 남자였다. 미셸이 수집해 온 정보로는 짧은 연애를 쉬지 않고 해대는 엉덩이 가벼운 인간이라고 그랬는데. 지금도 봐. 키스한다고 바로 몸을 바싹 붙이며 비비는 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라고. 섹스도 어찌나 익숙하게 잘하는지. 우성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연애의 수많은 단계를 전부 바보 취급하며 섹스만이 사랑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태섭은 천천히 서로에게 녹아드는 사랑을 믿고 가끔 놀라울 정도로 순진하게 굴었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더 마음이 가는 지도……. 이어지던 우성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티셔츠 속으로 밀어 넣었던 손을 태섭이 가로막으며 끊겼다. 우성이 입술을 떼고 눈을 깜빡이자, 얼굴이 잔뜩 붉어진 태섭이 헐떡이며 속삭였다.

“밥, 밥 먹고 해요.”

“하고 먹으면 안 돼요? 나 지금 되게 설렜는데.”

“안 돼. 식으면 맛없단 말이에요.”

“으응…….”

어차피 못 먹게 될 텐데. 속으로 덧붙인 우성이 순순히 몸을 떼고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숨을 몰아쉬며 구겨진 옷을 정리한 태섭이 휘청휘청 걸어 주방으로 향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게 보여 작게 웃은 우성이 무언가를 열심히 준비하는 태섭을 쳐다봤다. 칼럼이고 뭐고 빨리 베드인 할 생각뿐이었던 우성은 태섭이 들고 오는 접시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누가 봐도 엄청 맛있어 보이는 양구이였다. 양 특유의 냄새와 달큰한 소스 냄새가 뒤섞여 저절로 입에 침이 고일 정도였다. 시선을 떼지 못하는 우성을 보고 자신만만하게 웃은 태섭이 우성의 앞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며 말했다.

“이게 바로 제가 얘기했던 우리 어머니의 특제 소스 레시피를 얹은 양구이에요. 체리를 6시간 정도 졸여서 만든 건데, 어머니만큼은 맛을 못 내지만 충분히 맛있을 거예요.”

제 앞에 놓이는 양구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우성이 홀린 듯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끔찍할 정도로 맛있어 보이는 저 고기를 빨리 입에 넣고 싶었다. 하지만 포크를 고기에 대는 순간 날카로운 헤일리의 목소리가 우성의 귓가에 울렸다. 우성, 먹으면 안 된다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우성이 떨리는 손으로 포크를 내려놨다. 우성의 앞에 앉아 그가 먹는 걸 기다리던 태섭이 의아한 얼굴로 우성을 쳐다봤다. 헤일리의 지시였던 떨리는 목소리와 울음은 연기 할 필요도 없었다. 이 요리를 먹지 못한다는 절망감에 저절로 목소리가 떨리고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오늘 고마워요, 태섭. 분위기도 좋고, 너무 아름다워요. 음식도 맛있어 보여. 정말 완벽한 밤이에요. ……아니, 완벽했을 거예요.”

태섭은 갑작스러운 우성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대답도 못하고 눈만 끔뻑이며 우성을 쳐다봤다. 왈칵 눈물을 쏟은 우성이 헤일리와 미셸이 준비해 준 대사를 비명처럼 내지르며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놨다.

“내가 이걸 못 먹는다는 사실만 빼면!”

“우성……?”

“내, 내가 오늘부터 다이어트를 시작했는데 그걸 모를 수가 있어요? 꼬박 삼 일을 굶어야 하는데, 이, 이렇게 당이 가득한 소스로 범벅을 한 요리를! 내 다이어트를 망치려는 거지!”

“어?”

“너무해. 어, 어, 어떻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무심할 수가 있어?”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우는 우성을 멍하니 보던 태섭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는지 파드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던 태섭이 자신의 의자를 끌어와 우성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축축하게 젖은 우성의 뺨을 조심스럽게 닦았다. 우성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태섭의 손에 얼굴을 기울였고 태섭이 작게 한숨을 쉬며 두 손으로 우성의 뺨을 감쌌다.

“왜 미리 말 안 했어요.”

“……이게 지금 내 잘못이에요? 마, 마, 말하지 않아도 나, 나에 대해 다 알아야 하는 거 아냐? 나를 좋아한다며!”

입 밖으로 내는 게 낯부끄러울 정도의 억지였지만, 태섭은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가 잘못했다는 듯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우성을 다독였다.

“미안해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 미리 알았으면 우성이 먹을 수 있는 걸 해놨을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태섭의 다정한 목소리에 긴장이 풀린 우성이 자신도 모르게 어리광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웅…….”

“그런데 다이어트는 갑자기 왜? 우성은 이미 아름다운데?”

“내일 모레 있을 촬영에 모델 한 명이 펑크 났는데, 새로 구하기가 어려우면 가끔 내가 때우러 가요. 그런데 옷이 사이즈가 안 맞을 것 같으니 좀 빼라고…….”

반은 거짓이고 반은 진실이었다. 펑크 낸 모델이 입어야 하는 옷은 우성에게 맞아서 다이어트 따위는 필요 없었다. 우성의 웅얼거림을 들은 태섭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아니, 지들이 부탁하는 거면서 우성한테 다이어트까지 요구했단 말이에요? 진짜 나쁜 놈들이네.”

“우웅……. 가서 혼내줘요.”

“알겠어요. 내가 꼭 가서 혼내줄게.”

우성이 슬그머니 두 팔을 내밀자, 태섭이 몸을 기울여 우성을 안아줬다. 두 사람의 체격 차 때문에 태섭이 안긴 꼴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우성은 충분히 만족하며 태섭의 품을 파고들었다. 우성을 토닥이며 식탁을 본 태섭이 내쉬는 작은 한숨 소리에 양심이 콕콕 찔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칼럼을 써야 하니까……. 애써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 우성이 태섭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줬다.

태섭의 위로를 받으며 훌쩍거리며 간신히 울음을 멈춘 우성은 기운이 빠진 게 보이는 태섭이 신경 쓰여 슬그머니 몸을 뒤로 물렸다. 식어가는 요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의 눈치를 본 우성이 태섭의 볼에 입술을 꾹 붙였다 뗐다. 자신을 봐달라는 무언의 항의에 태섭이 돌아보자 샐쭉하게 웃은 우성이 우는 소리를 내며 태섭의 얼굴 여기저기에 자신의 뺨을 문질렀다.

“나 다이어트 하려면 운동도 해야 되는데에.”

“운동? 지금 나갈까요?”

“태섭 밖에서 하는 거 좋아해요?”

“……? 좋아하죠.”

우성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하면서도 태섭은 의아했다. 태섭은 바람을 맞으며 강변을 따라 달리는 걸 좋아했지만, 지금? 운동을? 자신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기색의 태섭을 보며 웃음을 삼킨 우성이 태섭을 안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올라가는 시야에 놀란 태섭이 비명을 질렀고 생각보다 무거운 태섭의 무게에 하마터면 다시 주저앉을 뻔한 우성이 이를 악물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걸어가 태섭을 소파에 내려놓은 우성이 닫혀있던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밖의 소음이 고스란히 들어오는 걸 들으며 만족스럽게 웃은 우성이 반쯤 몸을 일으킨 태섭의 위로 몸을 기울였다. 영문을 모르는 상태로도 자연스럽게 키스를 받은 태섭의 티셔츠 속으로 손을 밀어 넣으며 우성이 속삭였다.

“밖에서 하는 건 부끄러우니까 밖에서 하는 느낌이라도 내봐요.”

“……! 아니, 나는 그런 뜻이……!”

“으응. 알겠어요.”

“뭘 알아……!”

“나는 말 안 해도 다 알지. 그러니까 당신도 내가 말 안 해도 다 알아줘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반박하려는 태섭의 입을 키스로 틀어막은 우성이 따끈한 태섭의 허리를 움켜쥐며 작게 웃었다.

 

 

 

 

4. 10일 안에 연인에게 차이는 법 : 연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알고 싶어 하고 24시간을 함께 하고 싶어 하기 (연인이 다른 사람과 있다고? 우린 사랑하는 사이인데 나도 함께할 수 있는 거 아냐?)

우성에게 휩쓸려 저녁도 거른 채 세 번 연속으로 하고 태섭은 그대로 소파에서 기절하듯 잠들었다. 눈 떠보니 우성은 이미 가고 없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식탁 위에는 밀폐용기에 잘 정리 된 양구이와 깨기 전에 가서 미안하다는 메모가 붙은 샌드위치가 있었다. 태섭은 망설이다 샌드위치를 먹고 우울한 마음을 애써 토닥이며 사무실로 남은 양구이를 들고 와 사무실 사람들을 먹였다. 그나마 다 식은 걸 맛있다고 하며 열심히 먹는 사람들 덕분에 조금 기운이 났다. 힘이 쭉 빠진 몸을 이끌고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 온 태섭이 한숨을 쉬며 의자에 눕듯이 앉았다. 피곤해……. 누가 모래라도 뿌린 것처럼 뻑뻑한 눈을 몇 번 끔뻑거리던 태섭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좀 지친다…….”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보던 태섭이 눈을 질끈 감았다.

우성이 자신에게 푹 빠진 건 확실했다. 누가 봐도 그렇게 보이니 다이아몬드는 확실히 자신에게 떨어질 것이었다. 문제는 그 누구보다 괜찮은 사람 같아 보였던 우성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 분명히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언제부터 이상해진 거지? 긴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 태섭은 상대의 본성을 보기 전에 헤어지곤 했기에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 우성의 집착이 진짜라면 태섭은 마음이 통한 사람과 천천히 잘 멀어지는 방법에 관해 공부해야 했다. 아니면 그를 설득해 함께 정신과를 방문하던가. 하지만 그게 그의 진짜 태도라고 하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몇 가지 있었다. 그래서 태섭은 우성의 태도가 꾸며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만약, 만약 그의 태도가 전부 가짜라면 우성은 오스카 수상자에 이름을 올려 마땅한 인재고 무언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하니 의심하고 경계하다 델라의 파티가 끝나기 무섭게 그를 잘라내야 했다. 하지만…….

“우성이 좋은데 어떡하지.”

어제도 하루 종일 준비한 요리를,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거절하는 우성 때문에 화가 치밀었지만,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걸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누그러지고 말았다. 누가 봐도 이상한 짓을 저지르는 우성이 끔찍하게 귀여웠다. 일단 저질러 놓고 제 눈치를 보며 큰 눈을 끔뻑이는 거대한 남자에게 화가 나야 정상인데, 왜 그가 사랑스러워 보이냔 말이야. 태섭은 우성을 만나고서야 남들이 말하는 ‘진짜 사랑’이 뭔지 알게 된 것 같았다. 그가 아무리 이상한 사람이어도 영원을 약속하고 싶을 만큼 좋았다.

뭐, 그가 좋아도 지치긴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우성에게서는 보고 싶다, 지금 뭐하냐는 내용의 연락이 끊임없이 왔다. 느리게 핸드폰을 들어 사무실이라는 답장을 하며 태섭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오늘은 ‘포커의 밤’이라 우성을 만나지 않는 날이었다. 서로의 속사정을 전부 아는 오랜 친구들과 떠들며 생각을 환기하고 기력을 충전할 생각이었다. 그래, 하루 정도 떨어져 있으면 우성도 냉정을 되찾겠지. 희망적인 생각을 한 태섭이 작게 콧노래를 불렀다. 빨리 태섭과 헤어지고 칼럼을 써야 하는 우성의 절박함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먹을 간식을 바리바리 사 들고 집으로 들어온 태섭은 포커의 밤 멤버인 칼과 윤이 식탁을 옮기는 걸 힐끗 보며 깜빡이는 전화기의 자동 응답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우성이 떠넘긴 화분에 물을 주기 위해 물뿌리개에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 총 9개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메시지는 오후 8시 21분입니다. ‘태섭, 어디예요? 왜 통화가 안 돼?’ ]

“회사였으니까 집 전화로 통화가 안 되지, 우성.”

우성은 듣지 못 할 대답을 웅얼거린 태섭이 하품했다. 화분이 어찌나 많은 지 물을 줘도 줘도 끝이 안 났다. 어떻게 몰래 버리는 법 없나. 고민하는 태섭의 등 뒤로 자동 응답기가 낭랑하게 나머지 메시지를 읊었다.

[ 두 번째 메시지는 오후 8시 23분입니다. ‘태섭, 나 우성이에요. 집에 없네요?’ ]

[ 세 번째 메시지는 오후 8시 24분입니다. ‘태섭, 나 미칠 것 같아. 도대체 어디예요? 핸드폰은 왜 안 받아?’ ]

[ 네 번째 메시지는 오후 8시 27분입니다. ‘태섭!! 진짜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예요? 이유라도 알려줘요!’ ]

그 뒤로 이어진 메시지도 전부 우성의 것이었다. 점점 더 절박해지는 목소리에 놀란 태섭이 돌아보자, 칼과 윤도 놀란 얼굴로 전화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태섭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초인종이 울렸고 포커의 밤 나머지 멤버들이 우르르 집으로 들어왔다. 요란하게 웃으며 들어오는 친구들을 반기는 태섭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던 윤이 혼자 주방으로 들어가는 태섭에게 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너 괜찮은 거야?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들렸는데.”

“만나면 괜찮아. 파티가 끝나면 내 주치의를 만나보자고 설득해 볼 생각이야. 그 전에 얘기했다가 헤어지면 안 되니까.”

“……계속 만나려고?”

윤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태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이 경악한 얼굴로 입을 벌리자, 귀 끝이 붉어진 태섭이 윤의 등을 떠밀었다.

“빨리 나가. 나가서 세팅이나 해.”

“아니, 태섭! 하고많은 사람 중에 왜……!”

“나도 몰라!”

빽 소리를 지른 태섭이 윤을 주방에서 몰아내고 씩씩거리며 간식을 준비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칼에게 윤이 속닥거리는 게 보였지만 태섭은 애써 두 사람을 모른 척했다. 냉동 튀김을 튀기고 미리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맥주를 들고 가 자신의 자리에 앉은 태섭은 자신에게 빨리빨리 다니라고 야유를 퍼붓는 친구들을 보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카드를 들었다.

우성에게 전화가 왔었다는 것까지 까맣게 잊을 정도로 게임의 열기가 달아올랐다. 알게 모르게 우성을 대하며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리는 걸 느낀 태섭이 평소보다 더 활기차게 굴자 다른 친구가 오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냐고 말하며 웃었다. 태섭이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카드를 내려고 할 때였다.

“태섭!”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리는 우성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태섭이 뒤를 돌아봤다. 오늘은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예쁜 얼굴이 무언가가 가득 담긴 접시를 들고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다들 예상외의 인물에 놀라 얼어붙었다. 날듯이 뛰어와 태섭에게 진하게 키스를 한 우성이 웃으며 주방 쪽으로 향했다. 당황한 칼이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집 열쇠도 줬어?”

안 줬다. 당황한 태섭이 고개를 젓고 큰 소리로 우성에게 물었다.

“우성, 열쇠는 어디서 난 거예요?”

“으응? 관리인인 프란체스코에게 물어보니까 바로 복사해 주던데?”

“관리인?”

짜증이 뒤섞인 당황한 태섭의 말을 들었는지 우성이 잔뜩 시무룩한 표정으로 걸어왔다. 입을 꾹 다물고 인상을 쓴 태섭의 옆에 서서 우물쭈물하던 우성이 물었다.

“화났어요……? 나는 태섭이 친구들하고 논다고 해서, 나도 함께하고 싶어서 온 건데……. 조금이라도 더 태섭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아니에요. 내가 왜 화를 내요.”

가까스로 웃은 태섭이 한 말에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우성이 배시시 웃었다. 진짜 끝내주는 미인이네. 친구 중 한 명의 중얼거림을 들은 태섭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우성에게 친구들을 소개해 줬다.

“칼과 윤은 알죠?”

“그럼요.”

태섭이 친구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웃으며 악수를 한 우성이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간식 만들어 왔어요! 이런 건강하지 않은 건 먹지도 마.”

우성이 이미 절반 이상 비워진, 튀긴 음식이 담긴 접시를 치우고 자신이 가져온 당근과 오이가 가득 담은 그릇을 내려놨다. 경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친구들의 눈치를 본 태섭의 얼굴이 부끄러움과 짜증으로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태섭의 미간이 찌푸려진 걸 눈치챈 윤이 부러 쾌활한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우성도 같이 게임 할래요? 한 자리 더하는 건 일도 아닌데.”

“아, 저는 도박 같은 건 안 해요.”

“이건 도박이…….”

“아무래도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아서.”

표정을 보니 악의 없이 한 소리겠지만, 엉겁결에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들이 된 태섭과 친구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조용해진 집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우성은 작은 콧노래를 부르며 집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들은 우성을 무시하고 게임을 진행하려고 했지만, 쉴 새 없이 태섭을 부르며 식물에 대한 이야기하고 게임을 방해하는 우성 때문에 도저히 게임을 할 수가 없었다. 식탁 가까이에 다가와 부러 꾸며낸 기침을 하는 우성 때문에 흡연자들은 전부 담배를 꺼야 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불만은 한 친구의 패를 우성이 그대로 읽어 게임을 망쳤을 때 터졌다. 그대로 얼어버린 친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긴 우성이 무언가 먹을 걸 더 해주겠다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방에 들어갔다.

“……우리 지금 게임 하는 중인 거 맞지?”

“아, 이번 판은 무효로 해. 태섭의 애인이 내 패를 읽었잖아.”

“뭔 소리야. 그대로 가야지.”

그 난장판 속에서도 이기고 있었던 윤이 으르렁거리며 무효로 하자는 친구에게 대들었다. 야, 넌 판이 망했는데도 계속하자 하고 싶어? 돈을 왕창 잃게 생긴 친구도 이를 악물고 윤에게 쏘아붙였다. 이렇게 두면 큰 싸움이 날 것 같아 태섭이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주로 중재하는 역할인 칼은 우성이 언제 튀어나올지 두려워 싸움에 집중을 못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기 일보 직전, 언제 주방에서 나왔는지 거실에 서 있던 우성이 비명을 내질렀다. 갑작스러운 비명에 화들짝 놀란 이들의 시선이 우성에게 쏟아졌고 우성이 울먹거리며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 우, 우리 카를로스가!”

“……카를로스?”

“태섭, 기억 안 나요? 우리 화분에 전부 이름 붙여줬잖아. 우리 아기들인데! 이름도 기억 못 하는 거예요?”

“아, 아니에요. 기억나요. 카를로스. 어어.”

기억 안 났다. 당황한 태섭의 대답은 제대로 듣지도 않은 우성이 성큼성큼 걸어가 책장 위에 올려놓은 화분을 내려 품에 끌어안았다. 태섭의 키가 닿지 않는 곳에 놓여 있어 한 번도 물을 주지 못한 녀석이었다. 심지어 놓인 위치도 해가 닿지 않는 곳이라 카를로스는 곧 죽을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아, 설마. 뒤이어 우성이 내뱉을 말을 예상한 칼이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카드를 뒤집어 내려놨다. 오늘 게임은 텄다.

“카를로스가 주, 죽었잖아요!”

“……죽은 게 아니고 잠든 거예요. 물주면 금방,”

“태섭이 방치한 거야!”

우성의 날카로운 말에 태섭이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카를로스만 물을 안 줬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지적을 꼭 굳이 내 친구들의 모임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도 그들 앞에서 해야 하나? 아니, 오늘 했던 모든 행동을 꼭 여기서, 이 시간에 해야 하는 건지 태섭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오늘 만나지 않는 날인데. 속으로 부글부글 끓는 분노를 꾹 누른 태섭이 뭐라고 덧붙이기도 전에 우성이 앙칼지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조금만 정이 떨어져도 우리 사랑을 이렇게 방치할 사람이야.”

“우성.”

“정말 너무해.”

울먹이며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 버린 우성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태섭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포커 치러 왔다가 갑자기 커플의 싸움을 직관하게 된 친구들이 눈치를 보다가 태섭에게 물었다.

“혹시 네 애인 분…… 오늘 드셔야 하는 약을 안 드신 거야?”

“뭐?”

“아니, 나도 약 안 먹으면 저렇게 감정이 치솟거든. 걱정돼서.”

“제발 좀 먹었으면 좋겠어. 가끔 저럴 때마다 제정신이 아닌 거 같아.”

평소의 태섭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이지만, 짜증과 분노 그리고 수치심에 절여진 태섭은 말을 고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예민한 얼굴을 한 태섭이 날카롭게 툭 내뱉었다. 그 말에 작게 웃음을 터뜨리던 친구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언제 나왔는지 우성이 과자가 가득 담긴 접시를 들고 서있었다. 태섭의 말을 들은 게 분명한 얼굴이라 윤이 놀라서 태섭의 팔을 흔들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만 쉬고 있던 태섭이 고개를 든 것은 우성이 자신의 옆에 다가온 후였다. 갑자기 옆에 나타난 우성 때문에 질겁한 태섭이 그를 올려다보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의 우성이 빼액 소리를 지르며 태섭에게 과자가 담긴 접시를 던졌다.

“내가 지금 미쳤다는 거야?!”

“악, 우성 씨 그게 아니라요……!”

“됐어요!”

어떻게든 그를 진정시키려는 윤의 손을 매몰차게 밀어낸 우성이 가만히 서서 숨을 골랐다. 태섭은 말을 잃고 우성을 올려다봤고 우성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말없이 눈물만 흘리는 우성을 보며 태섭보다 그의 친구들이 더 안절부절못했다. 자신들보다 거대한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 게 이렇게 눈치 보이고 마음이 아플 일인가.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한 채로 안절부절못하는 태섭의 친구들은 외면한 채 태섭만 물끄러미 보던 우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다 됐어.”

“우성.”

한숨을 내쉰 태섭이 우성을 잡으려고 했지만, 우성이 더 빨랐다. 성큼성큼 걸어 현관에 내려놨던 제 가방을 집어 든 우성이 현관문을 빠져나갔다. 마른세수한 태섭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친구들에게 말했다.

“잠시만.”

“어어.”

“천천히 하고 와.”

뛰듯이 우성을 따라 나가는 태섭의 뒷모습을 본 친구들이 힐끔거리며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가 현관에 바싹 붙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우성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지만, 이건 그냥 넘길 수 없는 패악이었다. 계속 우성과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었기에 태섭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우성을 불렀다. 우성. 태섭의 부름에 흠칫 몸을 떤 우성이 태섭을 돌아봤다. 눈물로 엉망인 두 뺨을 보고 물러지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은 태섭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성, 방금 내가 한 말은 사과할게요.”

“……네.”

“하지만, 도대체―…. 오늘은 만나는 날이 아니었잖아요. 내 친구들이 온다고 얘기도 했고.”

“그렇지만 나는, 나는 조금이라도 더 태섭과 함께 있고 싶단 말이에요. 단 하루라도 서로가 없는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은 건데 태섭은 아니에요? 전화도 잘 안 받고 답장도 바로바로 안 보내고! 그리고 친구? 설마 친구들 때문에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나보다 친구들이 더 소중해요?”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나한테는 그렇게 들려요!”

말이 안 통했다. 도대체 왜 저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지 납득이 되지 않아 태섭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우성이 훌쩍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우성이 과하다는 생각은 안 해요?”

“……안 해요. 사, 사랑하는데 왜 보고 싶은 마음을 참아야 해요?”

“지금 우성의 행동은 제정신이 아니에요. 조금 진정하고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미쳤단 소리예요?”

“행동이 그렇다는 거예요.”

어느새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입을 벌렸다. 상처받은 얼굴로 태섭을 쳐다보던 우성이 엘리베이터에 타며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만날 수 없어요.”

우성의 말에 순간적으로 화가 치솟은 태섭이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막았다. 지금 나 때문에 헤어지는 거라고 말하는 거야? 다이아몬드고 진짜 사랑이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이 대화로 우성과 헤어지게 되더라도 잘잘못은 분명하게 따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태섭은 우성을 달래는 대신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았던 분노를 터뜨렸다.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도대체 처음 나와 이야기했던 우성은 어디로 간 거예요? 농구 이야기를 할 때 눈을 반짝이고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이 가득했던 우성 말이야! 지금은 무슨, 오늘은 이랬다가 내일은 저랬다가 서커스를 하는 것 같잖아요!”

“…….”

“나는 우성의 괴상한 행동을 참을 만큼 참았어요. 그런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멋대로 군 건 우성이고.”

“그럼, 이제 끝이네요.”

“그래. 끝이야.”

매섭게 쏘아붙인 태섭이 그대로 뒤돌아 집으로 돌아왔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친구들을 보자마자 태섭이 사납게 얼굴을 구겼다. 구경났어?! 태섭의 말에 다른 친구들은 놀라서 후다닥 원래 자리로 돌아갔지만, 칼과 윤은 그대로 서 있다가 태섭을 낚아채 주방으로 밀어 넣었다. 두 사람이 이러는 이유를 아는 태섭이 눈을 질끈 감고 몇 번 심호흡한 뒤 말했다.

“끝났어. 다이아몬드는 포기해.”

“태섭! 고작 4일 남았어!”

“윤, 지금 봤잖아. 우성은 제정신이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 섹시하던걸.”

“칼.”

“미안.”

입을 꾹 다문 칼이 어떻게든 해보라는 얼굴로 윤을 쳐다봤다. 인상을 쓴 윤이 태섭의 두 팔을 움켜쥐고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다이아몬드? 그거 포기 하자. 그런데 너 우성과 계속 만나고 싶다고 했잖아.”

“정말?”

“……그랬었지.”

“그거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거 아냐? 아까 게임 전에 우성에 대해 말하던 네 표정, 진짜 바보 같고 행복해 보였다고. 그런 사람을 이렇게 그냥 보낸다고? 한 번 싸운 걸로? 원래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이렇게 싸우고 다투면서 서로 맞춰 가는 거야!”

“맞아. 나도 우리 자기랑 결혼 초에 엄청 많이 싸웠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윤의 편을 든 칼이 눈을 끔뻑였다. 윤의 말을 듣는 태섭의 표정은 아까보다 부드럽게 풀려있었다. 괜히 헤어진다고 했나? 라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윤이 설득에 박차를 가했다.

“우성 씨도 너무 초기라 의욕이 과해서 그런 거야. 네가 진지하게 이야기해 본다고 했잖아. 함께 문제를 알아내고 해결하면서 만나면 되는걸, 무슨, 이렇게 헤어져. 사랑한다며!”

“마, 맞아. 그, 뭐냐, 함께 여행이라도 가서 분위기도 풀고 잘 이야기해 봐. 평소에 만나던 곳에서 벗어나면 우성 씨도 여유를 되찾을 수 있을 거야. 너도 기분 좀 풀고.”

“……그런가?”

“그래! 다이아몬드 광고를 이렇게 놓치는, 아니, 우성 씨를 이렇게 놓치는 게 말이 되냐!”

빨리 가서 다이아몬드, 아니 우성 씨를 잡아! 윤의 재촉에 잠시 머뭇거리던 태섭이 집에서 뛰쳐나갔다. 1층에 도착하기 직전인 엘리베이터를 확인한 태섭이 비상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어떻게든 우성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미친 듯이 달려 내려간 태섭은 택시를 잡기 위해 걷는 우성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큰 소리로 우성을 불렀다.

“우성!”

태섭의 부름에 놀란 우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를 돌아봤다. 누구와 통화 중이었는지 급하게 전화를 끊은 우성이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며 다가오는 태섭을 쳐다봤다. 턱까지 차오른 숨을 간신히 진정시킨 태섭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미안해요.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태섭.”

“날, 날 용서해 줘요. 한 번만.”

우성의 대답이 늦어지자 초조해진 태섭이 냅다 무릎을 꿇었다. 태섭! 놀란 우성이 태섭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태섭은 막무가내였다. 다시 받아주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겠다고 버티는 태섭을 보고 한숨을 푹 쉰 우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 갈등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태섭이 벌떡 일어나 우성을 끌어안았다. 우성이 태섭을 파악한 만큼 태섭도 우성을 파악한 상태였다. 자신이 이렇게 매달리고 애원하는 것에 약한 우성을 아는 태섭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내 잘못을 만회할 수 있게 기회를 한 번만 더 줘요.”

“……뭘 할 건데요.”

머뭇거리던 우성이 태섭을 마주 안았다. 속으로 환호성을 지른 태섭이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으로 우성을 올려다봤다.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진 얼굴의 우성이 태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아직도 맺혀있는 눈물이 가로등 빛을 받아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였다. 그래, 다이아몬드. 내 다이아몬드를 위해서라도 우성의 기분에 좀 더 맞춰야지. 우성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아까는 프로답지 못 했어. 지금 자신의 행동이 광고를 위한 것이라고 하기엔 과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태섭이 혼자 반성하며 한쪽 뺨을 우성의 가슴에 기댄 채 말했다.

“본가가 바닷가 근처에요. 높은 건물이 없고 뻥 뚫려 있어서 기분 전환하기도 좋을 거예요. 바닷가 근처 야외 코트에서 함께 원온원도 하고, 내가 자란 곳도 보여줄게요.”

“…….”

“부담스럽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니에요. 가요.”

우성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환하게 웃은 태섭이 발뒤꿈치를 들어 우성의 뺨에 입을 맞췄다. 평소였다면 허리를 숙여 키스했을 우성이 가만히 서 있다가 슬쩍 태섭을 밀어냈다.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지만, 우성은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전 태섭이 좋아요.”

“…….”

“하지만 지금은 너무 미워.”

내일 몇 시에 어디로 나오면 되는지 문자로 보내요. 톡 쏘아붙인 우성이 성큼성큼 걸어 사라졌고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태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에 안도한 것인지는 자신도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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