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안에 연인에게 차이는 법 下

우성태섭 영화합작 참여작 / 10일 안에 남자친구에게 차이는 법 (2003)

; by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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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0일 안에 연인과 헤어…… 져야 하는 거겠지?

어제는 헤어지자며 싸우고 오늘은 여행을 가기 위해 그를 기다리고 있다니. 우성이 한숨을 푹 쉬었다.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어제 태섭이 애원했을 때 모른 척하고 집으로 돌아가 칼럼을 완성하는 게 맞는 건데, 태섭의 애원을 왜 받아주고 여행도 가겠다고 대답했는지. 완전히 비논리적인 행동이었다. ……뭐, 기분 전환이 필요하긴 했으니까. 우성은 애써 여행이라는 단어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 거라 생각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거 에피소드가 하나 더 생겼다는 것에 기뻐하며 여행을 즐기면 되는 일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괜히 중간 원고를 확인했다는 라나의 메일만 들여다보던 우성은 희미하게 들리는 오토바이 소리에 황급히 핸드폰을 가방에 밀어 넣었다. 정확히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한 태섭의 오토바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우성의 앞에 섰다. 오토바이를 본 우성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자, 헬멧을 벗은 태섭이 웃으며 우성을 쳐다봤다.

“두 시간 반 정도 가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안 괜찮으면 어떻게 할 건데요.”

“음. 기차를 타야겠죠? 그런데 기차 타면 두 배는 걸려요.”

태섭의 말에 입술을 삐쭉 내민 우성이 헬멧을 썼다. 잠가줘요. 우성의 말에 태섭이 웃으며 손을 뻗었다. 태섭의 손길을 얌전히 받으며 고민하던 우성이 태섭의 뒷자리에 앉으며 그냥 오토바이로 가자고 웅얼거렸다. 오토바이를 두 시간이나 탈 생각에 파르르 떠는 우성의 커다란 손을 토닥인 태섭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대한 천천히, 안전운전 할게요.”

“응…….”

“너무 무서우면 이야기해요. 쉬었다 가도 되니까.”

“알겠어요.”

불퉁하게 대답하는 우성을 말끄러미 쳐다본 태섭이 말없이 출발했다. 방향을 바꿀 때마다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오토바이가 여전히 무서웠지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꽉 막힌 차 사이를 달리니 확실히 기분이 풀렸다. 이래서 다들 오토바이를 타나 싶을 정도였다. 오토바이를 힘들어하는 우성을 배려해서인지 태섭은 중간 중간 쉬어갈 만한 곳이 나오면 꼭 멈춰서 우성에게 커피나 간식을 먹였다. 그 탓에 처음 태섭이 이야기했던 것보다 더 오래 걸렸지만, 우성은 크게 지치지 않은 상태로 도착할 수 있었다.

한적한 주택가에 들어설 때부터 속도를 줄인 태섭 덕분에 우성은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짭짤한 바다 냄새가 희미하게 나는 조용한 동네였다. 한결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을 한 우성이 태섭의 허리를 붙잡은 팔에 더 힘을 주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정원이 예쁘게 가꿔진 집 주차장에 태섭이 오토바이를 세우기 무섭게 우성이 후다닥 내렸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구경하는 우성의 헬멧을 벗겨 잘 정리한 태섭이 우성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저를 이끄는 단단한 등을 보며 뒤따라가던 우성이 걸음 속도를 높여 태섭과 나란히 섰다. 어깨가 닿을 정도로 바짝 붙어 서는 우성에게 태섭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편하게 있으면 돼요.”

“흐응…….”

“바다부터 갈래요? 오늘 날씨가 좋아서 수영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난 수영 할 줄 몰라요.”

“그래? 그럼, 다음에 알려줄게요. 바다 수영이 꽤 재미있거든.”

자연스럽게 다음을 기약하는 태섭을 물끄러미 보던 우성이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귀 끝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우성이 뾰족하게 내민 입술을 움직여 자신이 왜 수영을 할 줄 모르는지 조잘대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튜브를 끼고 바다에서 나오다 파도에 밀려 뒤집어졌다는 시시껄렁한 이야기였지만, 태섭은 진지하게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많이 놀랐겠다며 우성의 손등을 토닥여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신이 처음 형에게 수영을 배우던 날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우성은 조용히 그 이야기를 듣다가 바다에 관련된 기억을 꺼내고 태섭은 그것과 연관 된 다른 기억을 꺼내 우성과 나누었다. 둘의 대화는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 짐을 풀고 가벼운 차림으로 농구공을 챙겨 바닷가 근처 야외코트에 도착할 때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차분한 태섭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파도 소리와 함께 밀려와 우성의 마음을 적셨다.

태섭이 데려간 야외 코트는 사람들이 자주 다니지 않는 외진 곳에 있었지만, 누군가 꾸준히 관리를 하는지 말끔했다. 태섭이 던진 농구공을 받아 몇 번 튀겨 본 우성은 금방 감을 잡고 온갖 묘기를 다 부리며 자신의 실력을 자랑했다. 가볍게 넣는 3점 슛은 물론이고 우다다 달려가 덩크까지 넣은 우성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태섭을 돌아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봤지, 봤지? 내가 멋있다고 말해! 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얼굴이었다. 벤치에 앉아 우성의 농구 쇼를 보고 있던 태섭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쳤다.

“와, 우성 진짜 잘하네요. 관둔 거 너무 아쉽다.”

태섭의 칭찬에 콧대가 높아진 우성이 턱을 치켜들었다. 더 해줘. 더 칭찬해 줘! 오랜 시간에 걸쳐 농구에 대한 미련과 슬픔 전부 털어버렸지만, 여전히 잘한다는 소리는 듣기 좋았다. 태섭은 우성이 원하는 대로 우성의 폼이 얼마나 좋은지, 우성을 놓친 NBA가 얼마나 멍청이인지 떠들었다. 태섭의 칭찬을 배경음 삼아 백덩크까지 성공한 우성이 해사하게 웃으며 태섭 쪽으로 공을 던졌다. 가볍게 공을 받은 태섭이 어깨를 으쓱하며 우성 쪽으로 걸어왔다.

“우리 둘이 원온원은 나한테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에요? 체급이…….”

“질까 봐 무서워요?”

턱을 치켜들고 도발하는 우성의 말에 태섭이 사납게 웃으며 대꾸했다.

“우성이 처참하게 당하고 농구에 대한 흥미를 잃을까 봐 걱정돼서 하는 말이죠.”

아랫배가 찌릿할 정도로 매서운 얼굴에 마른침을 삼킨 우성이 두 손을 뻗어 태섭의 두 뺨을 움켜쥐고 입을 맞췄다. 도대체 어디서 버튼이 눌린 건지 모르는 태섭이 놀란 듯 우응! 하는 소리를 냈지만, 우성은 자신이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태섭을 놔주지 않았다. 실컷 태섭의 입을 헤집은 뒤에 입술을 뗀 우성이 만족스럽게 웃었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태섭은 씨근대며 숨을 몰아쉬다가 아프지 않게 주먹으로 우성의 어깨를 쳤다.

“다리 힘 풀릴 뻔했잖아요!”

“페널티로 왼손만 쓸게요.”

“그건 당연, 당연한 거고!”

눈까지 질끈 감고 소리를 빽 지르는 태섭이 귀여워 우성은 참지 못하고 또 키스했다. 뭐라고 태섭이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지만, 어차피 우성의 혓바닥 아래 뭉개져 제대로 된 문장은 되지 못했다. 결국 태섭의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때까지 키스한 우성은 아예 태섭을 코트에 눕혀놓고 이리저리 만지며 욕심을 채웠다. 까무잡잡한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마음껏 주무르고 맛본 우성은 코트에 누워 잔뜩 흐트러진 채로 헐떡이는 태섭을 안아 벤치로 옮겼다. 원온원 하자며! 벤치에 앉자마자 우성의 멱살을 잡으며 외치는 태섭의 뺨 여기저기에 입을 맞춘 우성이 큰 소리로 웃었다. 농구 이야기할 때마다 쿨한 얼굴로 있어서 원온원에 별로 욕심 없는 줄 알았는데, 내심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었는지 태섭의 얼굴에는 속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음에 해요. 응? 다음엔 열 번 해줄게.”

“……약속한 거예요.”

“응. 약속.”

우성의 말에 입술을 삐죽이던 태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성은 자신이 태섭에게 다음을 약속한 것도 모르고 열심히 태섭을 달래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아, 태섭 진짜 귀여워. 평생 이렇게 놀리고 귀여워하고 싶어. 투닥거리며 아프지 않게 우성의 등을 때리던 작은 손이 조심스럽게 제 옷깃을 쥐는 걸 느끼며 우성은 다시 한번 칼럼의 희생양을 태섭으로 고른 일을 후회했다.

머리로는 빨리 태섭이 자신에게 헤어지자고 말할 때까지 이상한 행동을 반복해야 한다 외치고 있었지만, 우성은 도무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도 이렇게 태섭과 좋은 시간을 보내면 안 되는데, 칼럼 같은 건 전부 잊고 그냥 태섭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아무 걱정 없이 즐겁게 웃고 떠들며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칼럼 때문에 당신에게 접근하고 미친 사람처럼 군거라고 이야기하면, 태섭은 날 용서하지 않겠지.

우성은 자신이 이상한 행동을 할 때마다 참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던 태섭의 얼굴을 기억했다. 우성을 달래는 말을 하면서도 혼자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던 것도 기억했다. 그가 어제 엘리베이터 앞에서 자신에게 화를 낼 때도 끝끝내 가장 심한 말은 삼켰다는 걸 알았다. 화가 났을 때도 자신을 배려하는 다정한 사람에게 더 이상 상처 주고 싶지 않은데, 우성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 그것뿐이라 괴로웠다. 그냥 애초에 이렇게 만나지 말아야 했는데.

급격하게 기분이 가라앉은 우성이 얌전히 태섭을 풀어주자, 태섭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태섭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고 저 멀리 굴러간 농구공을 주워 온 우성이 태섭의 옆자리에 털썩 앉자, 태섭이 머뭇거리다가 우성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괜찮아요?”

“응.”

“진짜로?”

“진짜 괜찮아요. 안 괜찮을 건 또 뭐람.”

애써 웃은 우성이 가볍게 태섭의 뺨에 입을 맞추며 일어났다. 바다 보러 가요. 우성의 말에 태섭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성을 올려다보다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우성은 태섭이 일어나기 무섭게 냉큼 태섭의 손을 잡았다. 어차피 태섭을 상처 입히고 끝나야 한다면 그전까지라도 하고 싶은 건 다 해야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우성의 생각을 모르는 태섭은 우성의 손을 마주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코트에서 바닷가는 금방이었다. 바닷가로 가는 길에 있는 작은 핫도그 집에서 핫도그를 산 두 사람은 해변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뚝딱 핫도그를 해치웠다. 그래도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보니 자신을 답답하게 누르고 있던 우울함이 파도에 쓸려 사라지는 것 같아 우성은 자신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두 눈을 감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 있던 우성은 어느새 신발을 벗고 맨 발로 모래사장에 들어선 태섭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 신발 벗어야 해요?”

“응? 아니. 그냥 들어와도 되는데, 바다에 발 안 담글 거에요?”

“……모르겠는데.”

쭈뼛거리며 망설이는 우성을 본 태섭이 웃으며 다시 우성 쪽으로 걸어왔다. 그럼, 일단 신발 신고 들어와요. 태섭이 내민 손을 잡은 우성이 모래사장으로 들어갔다.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리며 몇 걸음 걷던 우성이 킥킥대며 태섭에게 몸을 기댔다. 흔들림 없이 우성을 받쳐준 태섭이 웃으며 우성을 올려다봤다.

“신발 진짜 안 벗어요?”

“벗을래요.”

“잡아줄 테니까 양말이랑 다 벗어요.”

태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우성이 신발과 양말을 훌러덩 벗었다. 우성이 벗은 양말을 잘 말아서 신발 안에 넣은 태섭이 한 손에 자신의 신발과 우성의 신발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우성의 손을 잡았다. 느릿한 태섭의 걸음에 맞춰 걷던 우성이 킥킥 웃었다. 발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모래의 느낌이 간지러워서 자꾸 웃음이 났다. 발가락을 꼼지락대던 우성이 고개를 돌려 바다를 쳐다봤다. 마지막으로 바다에 왔던 게 언제더라. 기억을 더듬던 우성은 마지막 기억이 초등학생 때 부모님과 함께 갔던 거라는 걸 알고 피식 웃었다. 아, 그때 선크림 잘못 발라서 어깨가 미사 손자국 모양으로 탔었지……. 혼자 실없이 웃는 우성이 궁금한지 태섭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 게 느껴져 표정을 갈무리한 우성이 말했다.

“이렇게 맨발로 모래사장 밟는 거 오랜만인 거 같아요. 바다도 오랜만이구.”

“오자고 하길 잘했네.”

“응. 엄청 좋아.”

“바다에 발 담글래요?”

“좋아요.”

우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의 신발을 내려놓은 태섭이 우성의 팔을 잡아끌며 바다 쪽으로 달렸다. 어어? 얼떨결에 태섭을 따라 달리던 우성이 비명처럼 태섭의 이름을 불렀다.

“어어, 잠깐만! 태섭, 잠깐마아안!”

우성은 어떻게든 태섭을 멈춰보려고 했지만, 태섭이 조금 더 빨랐다. 파도에 발이 닿는 위치에 먼저 도달한 태섭이 몸을 빙글 돌려 그대로 우성을 바다에 밀어 넣었다. 속도 때문에 제때 멈추지 못한 우성이 우당탕탕 바다로 달려 들어갔다. 조금이라도 덜 젖어보려고 팔을 휘젓던 우성이 중심을 잃고 요란하게 넘어졌고 얼굴부터 바다에 처박히는 우성을 본 태섭이 매우 놀라 후다닥 우성에게 달려왔다.

“헉, 우성 괜찮아요? 미안해요. 이렇게 넘어질 줄은 몰랐……!”

허우적대며 일어나는 우성을 도우려던 태섭은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는 손을 느끼자마자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직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태섭의 예상대로 우성은 태섭을 세게 잡아당겨 똑같이 넘어뜨렸다. 요란하게 바닷물이 튀었고 태섭을 넘어뜨리다 제가 더 물을 많이 먹은 우성이 콜록거리며 기침했다. 넘어질 걸 예상한 태섭은 넘어지자마자 용수철처럼 몸을 반쯤 일으켰다.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기침하는 우성을 보고 크게 웃음을 터뜨린 태섭이 축축한 자기 셔츠를 끌어당겨 우성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안 다쳤어요?”

“눈 아파요…….”

“어디 봐봐요.”

태섭이 아파서 눈 뜨기 싫다고 칭얼거리는 우성을 달래 간신히 눈을 뜨게 했지만, 눈을 뜨자마자 두 사람을 덮친 파도 때문에 태섭은 다시 넘어졌고 우성은 소금물을 한 대접은 마셨다. 캑캑거리며 기침하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이 상황이 너무 바보 같고 웃겨서 두 사람은 서로를 붙잡고 깔깔 웃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파도에 몸이 떠밀려 비틀비틀 걸으면서도 둘은 서로를 꼭 잡고 바다에서 빠져나왔다. 쫄딱 젖은 옷을 짜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못한 두 사람이 헐떡이며 모래사장에 주저앉았다.

“아, 진짜, 거기서 왜, 파도가 치는 건데.”

꺽꺽거리며 웃은 우성이 저한테 반쯤 기대서 숨넘어가게 웃고 있는 태섭을 붙잡았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입을 맞췄다. 바닷물에 젖은 몸은 차가웠는데 맞붙은 입술을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태섭은 우성의 목을 끌어안고 아예 그의 허벅지에 앉았고 우성은 바닷물로 차가워진 태섭의 허리를 주물렀다. 태섭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이 우성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앓는 소리를 내며 우성의 몸에 바싹 달라붙은 태섭은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원래도 사람이 없는 해변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다행히 근처에 사람이라고는 우성과 태섭 뿐이었고 순식간에 계산이 선 태섭이 티셔츠를 벗으려던 순간이었다.

“엣치!”

입술을 떼자마자 재채기하는 우성 때문에 태섭이 움직임을 멈췄다. 저도 놀랐는지 우성이 입을 틀어막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태섭을 쳐다봤다. 서로 쳐다만 본 채 가만히 있던 두 사람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 진짜 우성 분위기 잘 깬다.”

“재채기가 나오는데 어떡, 엣취!”

태섭의 핀잔 아닌 핀잔에 발끈한 우성이 반박하려다 다시 재채기했다. 이러다 감기 걸리면 큰일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태섭이 우성을 붙잡아 일으켰다. 슬슬 추운지 팔을 쓸어내리며 코를 훌쩍이는 우성을 세워두고 후다닥 달려가 아까 던진 운동화를 챙겨 온 태섭이 웃으며 우성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신발 벗길 잘했죠.”

“응……. 신발도 젖었으면 진짜 울고 싶었을 거 같아요.”

태섭이 해주는 대로 순순히 발을 움직여 양말과 운동화를 신은 우성이 헤헤 웃었다. 정작 자기 양말은 주머니에 쑤셔 넣고 운동화는 대충 구겨 신은 태섭이 우성의 손을 잡았다. 빨리 가서 씻어요. 우성을 태섭의 재촉에 빠르게 걸음을 옮기다 허리를 숙여 태섭의 귓가에 속삭였다.

“빨리 씻으라는 말 너무 야하게 들려요.”

“아이, 진짜!”

 

 

집에 들어오자마자 태섭이 둘러 준 커다란 수건을 꼭 붙잡고 뜨거운 물이 욕조에 가득 채워지고 있는 화장실에 앉아 있던 우성이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반짝 들었다. 여전히 축축한 옷차림 그대로 나타난 태섭이 우성에게 약을 내밀었다.

“감기 걸릴 수도 있으니까 약 하나 먹어요.”

“으응. 고마워요.”

태섭이 내미는 대로 약을 입에 넣은 우성은 뒤이어 태섭이 내미는 컵 안의 물을 꼴깍꼴깍 마셨다. 꿀을 탔는지 물이 달콤했다. 따끈한 물이 몸에 들어가자 저절로 몸이 떨렸다. 우성이 컵을 싹 비우는 것까지 본 후에야 태섭은 바쁘게 움직였다. 욕조 안의 물이 충분히 따뜻한지, 샴푸와 바디워시는 남은 양이 충분한지, 수건은 몇 개나 남았는지 확인하는 태섭의 뒷모습을 보던 우성이 코를 훌쩍였다. 아주 작은 소리였고 욕조에 쏟아지는 물소리에 묻혀 분명히 들리지 않았을 텐데 태섭이 우성을 휙 돌아봤다.

“추워요?”

“응? 아니, 이젠 안 추워요.”

“근데 왜 자꾸 코를 훌쩍거리지…….”

성큼 다가와 손을 뻗어 우성의 이마를 짚어보는 태섭의 심각한 얼굴을 올려다보던 우성은 제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태섭에게 들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세게 뛰는 심장 때문에 당황한 우성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열은 없는데? 중얼거리는 태섭의 말을 들은 우성이 수건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미셸, 헤일리. 나 어떡해? 나 태섭이 너무 좋아. 이 사람을 놓치고 싶지가 않아…….

“우성?”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진 우성의 얼굴을 본 태섭이 당황했는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우성, 괜찮아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오는 태섭을 올려다본 우성이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태섭은 정말 다정한 사람이에요.”

“응?”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따뜻하지…….”

작게 웅얼거린 우성이 두 손을 뻗었다. 축축한 옷 때문에 망설여지는지 잠시 머뭇거리던 태섭이 느릿하게 다가와 우성을 안아줬다. 등을 토닥여주는 작고 단단한 손에 우성은 터질 것 같은 눈물을 애써 삼키며 태섭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줬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우성이 신경 쓰였는지 태섭이 살짝 몸을 떼고 우성의 얼굴을 살폈다. 시무룩해진 우성의 두 뺨을 쥔 태섭이 허리 숙여 우성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따끈하고 말랑한 입술이 눌렀다 떨어지는 느낌에 한숨을 쉰 우성이 두 손을 뻗어 태섭의 목을 감쌌다. 가장 마지막으로 태섭의 입술이 내려앉은 곳은 우성의 입술 위였다. 느릿하게 파고드는 혀에 입을 벌린 우성이 얌전히 태섭의 키스를 받았다. 몇 번이고 입술을 다시 마주 대던 두 사람은 욕조에서 물이 넘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후다닥 뛰어가 물을 잠근 태섭이 웃음을 터뜨리며 우성을 돌아봤다.

“빨리 씻어요. 진짜 감기 걸린다.”

“으응.”

고개를 끄덕인 우성이 그대로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벗겨줘요. 애교 섞인 우성의 목소리에 태섭이 황당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빨리이. 우성이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하자 한숨을 푹 쉰 태섭이 성큼성큼 걸어와 우성의 티셔츠를 쑥 끌어 올렸다. 깔끔하게 벗겨진 티셔츠를 바닥에 떨어뜨린 태섭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자기도 벗겨달라는 행동에 피식 웃음을 터뜨린 우성이 벌떡 일어나 태섭의 티셔츠를 벗겼다. 왁스가 다 풀려 곱슬하게 내려온 머리를 쓸어 올린 태섭이 머쓱하게 웃으며 우성에게 속삭였다.

“같이 씻을까요?”

태섭의 속삭임에 우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태섭을 번쩍 안아 올렸다. 작게 비명을 지른 태섭이 두 다리로 우성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우성이 킥킥 웃으며 천천히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태섭의 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시 도시로 돌아온 두 사람은 계속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우성의 아파트 앞에 도착해서야 손을 놓은 우성이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태섭을 쳐다봤다. 뭐라도 말해서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은데, 할 수 있는 말은 지난밤에 다 털어놓았다. 남은 건 숨겨야 하는 말뿐이라 우성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쉬움에 입술만 달싹이던 우성이 머뭇거리다 뒤돌아서자, 태섭이 다급하게 우성의 옷깃을 붙잡았다. 우성이 기다렸다는 듯 돌아보자 태섭이 웃으며 물었다.

“내일 밤, 다이아몬드 고객을 위한 파티가 있어요. 괜찮다면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요.”

태섭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정말?”

“응.”

“……그러면 거기서 모두에게 당신이 내 애인이라고 소개해도 될까?”

태섭의 말에 피식피식 웃은 우성이 태섭 쪽으로 걸어왔다. 오토바이를 타는 내내 우성이 세게 쥐어 잔뜩 구겨진 태섭의 셔츠 자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우성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애인?”

“응.”

“태섭, 그거 알아요? 내일이면 우리가 만난 지 10일째 되는 날이에요.”

“그러네.”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성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태섭이 작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우성의 뺨을 살살 쓸어내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잡을 때는 주저하면 안 돼, 우성.”

“……좋아. 날 연인으로 소개해도 좋아요.”

태섭이 원하던 대답을 내준 우성이 방긋 웃으며 태섭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이제는 정말 헤어질 시간이었다. 아쉬움과 슬픔을 애써 삼킨 우성이 태섭에게 손을 흔들었다.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드는 태섭을 물끄러미 보다 뒤돌아선 우성은 자꾸만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뛰듯이 걸어 집으로 들어왔다. 현관문을 닫고 깊게 한숨을 쉰 우성이 짐을 내려놓으려던 찰나 가방 속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잔뜩 지친 얼굴로 핸드폰을 들여다본 우성은 태섭에게 온 문자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 13일에는 꼭 시간 비워놔요. 좋은 자리는 아니지만 7차전 티켓 있으니까.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우성이 후다닥 창가로 달려가 창문을 열고 몸을 내밀었다. 이미 갔을 거라 생각했던 태섭의 오토바이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우성이 내다볼 걸 알았다는 듯 올려다보고 있던 태섭이 웃으며 품 안에서 꺼낸 티켓을 흔들었다. 우성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후에야 헬멧을 쓴 태섭이 오토바이를 출발시켰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는 오토바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우성이 앓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나 어떡해, 진짜…….”

내일이면 저 사람을 잃어야 한다는 사실에 도저히 눈물이 참아지지 않아 우성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훌쩍이며 울었다.

 

 

 

6. 칼럼과 다이아몬드

“편집장님.”

“어, 우성!”

바쁘게 무언가를 확인하던 라나가 우성의 얼굴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칼럼은 거의 마무리되었나요? 라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우성이 쭈뼛거리며 라나의 책상 앞에 섰다. 마감일이 코앞이라 많이 정신이 없는지 라나는 그 짧은 사이에도 바쁘게 고개를 돌려 무언가를 꺼내고 덧붙이고 조정했다. 그런 라나를 보며 머뭇거리던 우성이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편집장님, 저 이 기사 못 쓰겠어요.”

“컴퓨터가 고장이라도 났나요?”

심드렁하다고 느낄 정도로 차분한 라나의 말에 고개를 저은 우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남자는 칼럼에 적합하지 않아요. 다른 남자를 구해야겠어요. 원고는 이전에 쓰던 걸 드릴게요. 그것도 괜찮을…….”

“우성.”

우성의 말을 싹둑 자른 라나가 언제 웃고 있었냐는 듯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우성은 그 칼럼을 마무리 지어야 해요. 왜냐하면 당신의 상사인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라나…….”

“이미 표지 인쇄에 들어갔어요. 다이아몬드 특별 광고까지 들어가면 이번 호는 아주 완벽할 거예요.”

“라나, 제발요.”

“48시간 내로 원고를 가져와요. 다른 말은 듣지 않겠어요.”

“…….”

“우성은 프로잖아요? 주어진 일은 제대로 마무리해요. 그다음에 그 남자와 뭘 어떻게 하든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더 이상 우성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듯 등을 돌려버린 라나의 뒷모습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던 우성이 힘없는 발걸음으로 편집장실을 나왔다.

 

 

우성은 도착했다는 태섭의 연락을 받고 몸을 일으켜 느릿하게 아파트 로비를 빠져나갔다. 우성의 자랑인 넓은 어깨와 날렵한 허리선이 잘 드러나는 노란색 새틴 셔츠를 입은 우성을 본 태섭의 눈이 크게 떠졌다가 곱게 휘어졌다. 성큼 걸어와 그의 손을 잡은 태섭이 우성에게 속삭였다.

“오늘 정말 예뻐요.”

“고마워요. 당신도 예뻐요.”

우성의 칭찬에 쑥스럽다는 듯 웃은 태섭이 우성을 에스코트했다. 그 며칠 사이에 남의 에스코트에 익숙해진 우성이 자연스럽게 태섭에게 기댔다.

이런 제대로 된 파티는 오랜만이라 우성은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우성을 귀엽다는 듯 힐끗 본 태섭이 우성의 손에 샴페인을 쥐여주었다. 태섭이 준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여기저기 진열된 다이아몬드를 구경하던 우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섭에게 속삭였다.

“이게 다 한 회사가 공급하는 다이아몬드라고요? 브랜드는 다 다른데?”

“델라 다이아몬드가 전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을 꽉 틀어잡고 있거든요. 델라한테 밉보이면 다이아몬드 사업은 접어야 할 정도로.”

“우와, 그렇구나…….”

그럼 우리 잡지에 이번에 실리는 광고도 델라 다이아몬드겠구나. 우성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당황한 태섭이 입을 꾹 다물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다이아몬드를 구경하는 우성을 힐끔 본 태섭이 우성의 귓가에 잠시 혼자 있을 수 있겠냐고 속삭였다. 그 말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우성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뗀 태섭이 성큼성큼 걸어 바 앞에 서 있는 클레어에게 걸어갔다.

“태섭.”

“클레어.”

서로 고개를 까딱인 두 사람이 말없이 우성을 쳐다봤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즐겁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우성을 보며 클레어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축하해. 저 남자를 여기 데려온 거 말이야.”

“고마워. 덕분이야.”

“뭐, 아직 성공인지 실패인지는 모르지만.”

클레어의 덧붙임에 웃은 태섭이 클레어를 쳐다봤다.

“두고 보면 알겠지.”

자신만만한 태섭의 표정을 보고 한 번 방긋 웃은 클레어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런 클레어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태섭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이아몬드로 휘감은 여자가 호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태섭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사람이 누군지 전해 듣지 못했지만,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온몸에 휘두르고 있는 다이아몬드와 당연히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호의적일 거라 믿는 얼굴 그리고 모두가 긴장하고 있는 파티장에서 자신의 안방에 있는 것 같은 태도. 이 여자는 델라 다이아몬드의 사장이 분명했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기 무섭게 영업용 미소를 지은 태섭이 여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엘렌 광고사의 태섭 송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난 에블린 델라라고 해요.”

바텐더에게 자신의 술을 시킨 에블린이 웃으며 태섭을 돌아봤다.

“엘렌 광고사라면 클레어가 있는 곳이네요?”

“네, 그렇습니다. 클레어와 저는 선의의 경쟁을 하는, 아주 친한 동료 사이죠.”

“아하.”

눈썹을 한 번 들었다 놓은 에블린이 알만하다는 듯 웃으며 바텐더가 내미는 잔을 받았다.

에블린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태섭을 발견한 우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사람은 누군데 태섭이랑 몸을 저렇게 바짝 붙이고 서 있지? 태섭은 불편한 내색도 없이 자신에게 기댄 여자의 몸을 지탱한 채로 뭐라 속살거리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가서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 생각이었던 우성은 자신의 옆에 서서 헛기침하는 여자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구두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놀란 와중에도 도대체 이 사람이 언제부터 자신의 옆에 서 있었는지 되짚어보는, 날이 선 우성의 표정과 우성의 시선이 닿아있던 태섭을 번갈아 쳐다본 여자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다이아몬드로 온몸을 휘감고 있는 사람 보이나요?”

“네?”

“저 사람이 바로 델라 다이아몬드의 사장인 에블린 델라에요. 다이아몬드 시장에 뛰어들려면 무조건 저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하죠.”

“아아…….”

보석 광고 쪽을 노리고 있는 태섭이 잘 보여야 하는 여자란 소리였다. 그제야 표정이 누그러지는 우성을 보고 웃은 여자, 엘렌이 웃으며 말했다.

“애인인가 봐요?”

“누가요?”

“에블린 델라 앞에 서 있는 사람이요. 아주 열렬한 눈으로 쳐다보던데.”

“애인…… 까지는 아니구요.”

얼굴을 붉히며 부정하는 우성을 본 엘렌이 인자하게 웃었다. 애인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군요? 엘렌의 말에 머뭇거리던 우성이 태섭의 눈치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다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사랑까진 아닌 거 같아요. 이제 열흘 만났는데. 아직은 너무…… 이르죠.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설레고 그가 좋긴 하지만요.”

붉어진 얼굴로 횡설수설하는 우성의 행동에 엘렌이 우성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은 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답죠. 지금 당신의 얼굴이 이 회장에서 가장 빛나고 있고요.”

“농담하지 마세요.”

“내가 이런 걸로 농담을 왜 하겠어요.”

가볍게 웃은 엘렌이 태섭을 힐끗 쳐다봤다. 아직도 에블린에게 붙잡혀 있는 태섭이 웃기다는 듯 작게 웃은 엘렌이 혼자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 우성을 보며 말했다.

“저 남자는 참 행운아네요.”

당신 같은 미인의 사랑을 받으니까요. 엘린이 장난스럽게 덧붙인 말에 우성이 두 뺨을 물들이며 배시시 웃었다. 그 얼굴을 머리에 새길 것처럼 쳐다본 엘렌이 말없이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오늘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가볍게 말을 걸고 사라진 사람들이 많았기에 우성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붉어진 볼을 식히기 위해 손부채질을 열심히 했다.

그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술을 먹이려는 에블린에게서 간신히 도망친 태섭은 우성에게 가려던 길을 가로막는 칼과 윤을 보고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태섭을 본 윤이 인상을 찌푸리며 한 걸음 다가왔다.

“여기 데려온 걸 보면 여행에서 잘 푼 것 같은데, 어때. 사장님 앞에 데려가도 될 만큼 구슬렀어?”

“모르지…….”

“모르면 어떡해! 오늘이 결전의 날인데!”

그 자리에서 펄쩍 뛴 칼이 큰 소리로 외치자, 태섭이 놀라서 칼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말해! 태섭의 질책에 고개를 끄덕인 칼이 입을 꾹 다물었다. 주변을 살피며 우성에 관해 이야기 하려던 태섭은 갑자기 자신의 앞에 나타난 엘렌을 보고 놀라서 작게 비명을 질렀다. 칼과 윤도 놀라긴 마찬가지라 세 사람은 그대로 얼어붙어 엘렌을 쳐다봤다. 나긋한 웃음을 지은 엘렌이 태섭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방금 그 사람을 만나고 왔어.”

“네? 네, 아, 그러셨어요?”

“태섭에게 푹 빠졌던데? 사랑에 빠진 게 분명한 얼굴이더군. 자네가 이겼어. 다이아몬드 광고 맡을 준비하고 있게.”

엘렌의 말에 태섭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고 엘렌이 자리를 뜨자마자 칼과 윤이 작게 비명을 지르며 태섭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태섭, 드디어 우리가! 우리가 보석 시장에 들어가는 거야!”

감격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치는 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태섭은 목소리가 들릴 법한 위치에서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클레어와 눈이 마주쳤다. 의기양양하게 웃는 태섭을 보던 클레어가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고 태섭의 눈앞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나타났다. 와, 오늘 모르는 여자 많이 만나네. 속으로 생각한 태섭이 영업용 미소를 짓자, 여자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방금 들었어요. 당신이 새 다이아몬드 광고의 담당자라면서요? 난 ‘컴포저’의 편집장인 라나에요.”

“아, 안녕하십니까. 편집장님.”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라나의 말에 대답하던 태섭은 뒤늦게 엘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태섭에게 푹 빠졌던데? 사랑에 빠진 게 분명한 얼굴이더군. ……우성이 나에게 푹 빠졌다고? 정말? 라나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심장 부근을 꾹 누른 태섭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한 편, 태섭이 컴포저 편집장과 이야기를 하는 걸 두고 축배를 들기 위해 이동한 칼과 윤은 파티장 구석에서 샴페인으로 건배했다. 히히덕 거리는 두 사람의 뒤로 클레어가 조용히 나타났다. 클레어를 발견한 칼이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돌아봤다.

“클레어, 들었어? 다이아몬드 광고는 우리 거야.”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그게 무슨 소리야?”

클레어의 말에 샴페인을 마시던 윤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클레어가 몰랐냐는 듯 칼과 윤에게 속삭였다.

“태섭이 너희까지 속인 거야. 저 남자는 태섭이 광고를 얻기 위해 접근한 걸 알아. 어떻게 꼬드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둘이 합심해서 엘렌을 속인 거라고.”

“거, 거짓말하지 마.”

“뭐, 내 말을 믿지 않는 건 너희 자유야. 하지만 나에겐 증거가 있고 지금 엘렌에게 말하러 갈 거야. 엘렌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광고는 다시 내 것이 되겠지. 태섭은 엘렌을 상대로 사기를 친 거니까, 앞으로 광고를 맡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다이아몬드 광고를 쥐고 있는 짧은 순간을 즐기길 바라.”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핸드백 속의 핸드폰을 꺼내 흔드는 클레어를 보는 칼과 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클레어의 표정이 너무 당당했다. 그제야 칼은 늘 항상 패악을 부리던 우성이 오늘따라 유난히 얌전하고 차분하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사람이 있건 없건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는 사이코가 이렇게 얌전한 것에는 이유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시선을 교환한 칼과 윤이 서둘러 우성에게 달려갔고 그 둘의 뒷모습을 보며 클레어는 파티 장에 들어와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태섭을 기다리며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자리에 앉아 있던 우성은 사색이 된 칼과 윤이 자신에게 달려오는 걸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 다 오랜만이에요. 그날은 내가 그렇게 가버려서 너무 당황했죠.”

“우성.”

손사래를 쳐 우성의 반가운 인사를 멈추게 한 윤이 다급하게 우성의 이름을 불렀다. 칼도 아니고 항상 예의를 차리던 윤의 행동에 놀란 우성이 눈을 깜빡였다. 주변을 살피던 칼이 말하라는 듯 윤에게 손짓했고 윤이 목소리를 낮춰 우성에게 속삭였다.

“그, 저기 저 하얀 머리의 여성분이 보이시나요?”

“응? 누구? 아, 저기 백조 모양의 동상 옆에 서 계신 분이요?”

“네네. 그분이 우리 사장님이거든요.”

“네?”

아까 자신과 대화하고 간 여자가 태섭의 상사라는 걸 안 우성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우성을 보며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핥은 윤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곧 사장님이 이쪽으로 오실 텐데, 우성에게 부탁이 있어요.”

“뭔데요?”

“우성이 알아서 잘하겠지만, 내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처럼 해줘요.”

“내기?”

“다이아몬드 광고 내기 말이에요!”

계속되는 우성의 반문이 답답한지 칼이 버럭 화를 냈다. 놀란 우성이 입을 꾹 다물자, 윤이 달래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섭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얘기해줬으면 좋겠어요. 오늘 연기하고 있는 톤으로 차분하게, 그 말이 진심으로 느껴지게끔요. 물론 그 사랑에 미친 집착 사이코 캐릭터도 우리에겐 꽤 설득력 있었지만, 아무래도 어르신들에게는 얌전하고 진실한 캐릭터가 잘 먹히거든요.”

“아…….”

빠르게 식어가는 우성의 얼굴을 본 윤은 칼이 우성의 연기를 깍아내렸기 때문에 표정이 굳어지는 거라 생각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태섭이 다이아몬드 광고를 얻을 수 있게 협조해 준 건 정말 고마워요. 기한 내에 당신과 연인이 되지 못할까 봐 사실 굉장히 초조했는데, 우성이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인 걸 알았다면 진작에 모든 걸 오픈하고 시작했을 거예요.”

윤의 말에 가만히 발끝만 쳐다보고 있던 우성이 간신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잘 말할게요.”

“정말, 정말 고마워요.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아참, 오늘 그 셔츠 정말 잘 어울려요.”

“고마워요.”

몇 번이고 고맙다 말하고 가는 칼과 윤에게 손을 흔든 우성이 입술을 짓씹으며 자신의 샴페인 잔을 노려봤다. 내기라고? 기한 내에 나와 연인이 되어야만 다이아몬드 광고를 따낼 수 있는? 배신감에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제야 우성은 자신의 말도 안 되는 패악질을 버티던 태섭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나와 헤어지면 다이아몬드 광고를 못 얻게 되니까 버텼구나. 엘리베이터 앞에서 말을 골랐던 것도 내게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상처 입은 내가 다시 받아주지 않을까 봐…….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처럼 집으로 들어갔다가 허둥지둥 달려 나와 다시 만나달라고 애걸했던 것도, 본가에 데려갔던 것도 전부 다이아몬드 광고를 위해서였구나.

물론 자신도 태섭 앞에서 당당하진 못했다. 순수한 목적으로 태섭에게 접근한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태섭을 사랑하게 된 우성에게 논리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배신감과 충격에 온 사고회로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태섭이 좋아져서 칼럼까지 그만 쓸 생각을……. 위가 꼬이는 것 같은 괴로움에 인상을 쓴 우성이 몸을 수그렸다.

 

 

“컴포저의 독자 성향이요? 건강하고 진취적이고 도전적이죠.”

라나와 대화하며 광고의 방향성에 관해 이야기하던 태섭의 눈에 홀로 의자에 앉아 있는 우성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우성을 너무 오래 방치한 것 같았다. 우성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되자 빨리 우성의 곁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다. 광고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라나에게 양해를 구한 태섭이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미팅 날짜를 잡고 하죠. 지금은 저 노란 새틴 셔츠의 남자에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오, 우성을 말하는 건가요? 우성은 우리 ‘컴포저’의 자랑인 비법 특강의 기자예요. 원한다면 소개해 줄게요.”

“비법 특강이요?”

처음 듣는 기색의 태섭을 보며 환하게 웃은 라나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비법특강은 3년 동안 독자들이 가장 기대하는 코너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아주 인기 있는 코너랍니다. 지금 우성은 ‘10일 안에 연인에게 차이는 법’이라는 칼럼을 쓰고 있어요.”

잔뜩 들뜬 라나의 말을 들은 태섭의 눈이 의아함으로 크게 떠졌다. 10일 안에 연인에게 차이는 법이라고? 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잡힐 것처럼 머릿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태섭의 의문을 긍정적인 것으로 해석한 라나가 우성의 원고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지금 우성은 어떤 얼간이를 만나서 칼럼의 제목인 10일을 채우기 위해 억지로 데이트를 이어가고 있는데, 이게 아주 재미있어요. 이번 호는 아주 많이 팔릴 게 분명해요.”

행복에 젖어 떠드는 라나의 말을 들으며 태섭은 칼럼의 내용이 우성이 자신에게 했던 행동임을 알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우성의 기이한 행동의 이유를 알아낸 태섭은 갑자기 치솟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 이를 악물었다. 이때까지 했던 그 말도 안 되는 사이코 같은 행동들이 전부 칼럼을 위한 거였다고? 내가 싫은데 10일이라는 날짜를 채우기 위해 억지로 만나고 입 맞추고 나를…… 나를 사랑하는 척했던 거란 말이야? 파르르 떨리는 손을 등 뒤로 숨긴 태섭이 입을 꾹 다물었다. 우성은 전혀 자신에게 마음이 없는데, 그것도 모르고 우성과 계속 함께 할 생각을 했다는 게 바보 같았다.

신나서 칼럼에 대해 떠들던 라나는 뒤늦게 태섭의 얼굴을 보고 놀라서 말을 멈췄다. 태섭의 시선이 고정된 곳을 본 라나가 놀라서 태섭에게 물었다.

“호, 혹시 우성이 데이트하고 있는 사람이…….”

거기까지 말한 라나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뒷걸음질 쳤다. 칼럼을 쓰고 싶지 않다고 했던 우성의 시무룩한 얼굴이 뒤늦게 떠오른 라나가 태섭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태섭은 손쉽게 라나의 손아귀를 빠져나가 우성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앞에 있던 샴페인을 원 샷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우성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태섭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도저히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앞에 선 태섭의 얼굴도 만만치 않게 굳어 있었지만, 지금 우성은 태섭을 신경 쓰고 싶지가 않았다. 태섭을 외면한 우성이 대충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태섭, 미안한데 나 먼저 돌아가야…….”

“왜. 칼럼 쓰러 가려고?”

태섭을 스쳐 지나가려던 우성은 태섭의 말에 놀라서 그를 돌아봤다. 어떻게……. 우성의 웅얼거림을 들은 태섭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저를 비난하는 게 분명한 시선을 마주한 우성은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기는 소리를 들었다. 입술을 비틀며 웃은 우성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태섭이야말로 내가 이렇게 가면 곤란한 거 아냐? 나를 이용해서 다이아몬드 광고를 받아야 하잖아, 네 상사에게서.”

“뭐? 그건 또 어떻게…….”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해? 네가 날 출세의 발판으로 삼았다는 게 중요하지.”

“그럼 너는! 우성, 당신은 나를 기삿감으로 삼았잖아. 뭐? 10일 안에 연인에게 차이는 법? 그 미치광이 사이코 같이 굴었던 게 다 칼럼을 위해서였다니. 하!”

“미치광이 사이코?!”

둘은 지금 파티 한 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웠다.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칼과 윤이 놀라서 후다닥 달려와 태섭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분노에 가득 찬 태섭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경악한 엘렌의 얼굴과 만족감으로 가득 찬 클레어의 얼굴도 스쳐 지나갔다. 지금이라도 다이아몬드 광고를 붙잡으려면 입을 다물고 우성을 달래야 하지만, 태섭은 배신감과 분노 때문에 도저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래! 미치광이 사이코! 3분 간격으로 사람한테 전화하고, 문자 보내며 어딘지 확인하고, 아무 때나 찾아오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으면 악을 쓰고 난리를 치며 집을 다 헤집어 놓는 사람을 미치광이 사이코가 아니면 뭐라고 해?!”

“하, 당신은 뭐 잘한 줄 알아? 처음부터 다 거짓말이었지? 그 잘난 다이아몬드 광고를 얻으려고 아무나 골라잡아 유혹하려고 했는데, 내가 걸린 거잖아. 사람 마음을 갖고 노니까 즐거워? 그럴 거면 나를 왜, 왜 바다까지 데려갔어? 그냥 적당히 갖고 놀 수 있었잖아!”

“태섭, 제발 진정해!”

윤의 애원을 뿌리친 태섭이 우성에게 한걸음 성큼 다가갔다. 우성은 태섭의 뒤에서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라나와 눈이 마주쳤다. 입술을 비틀어 올린 우성은 속으로 라나에게 빈정거렸다. 칼럼의 마무리가 아주 성대할 테니 즐거우시겠군요, 편집장님. 다이아몬드 담당자는 바뀌겠지만. 저를 불태울 것 같은 눈으로 노려보는 태섭과 눈을 마주한 우성이 이를 악물었다.

우성의 가슴팍을 세게 밀친 태섭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에게 나는 실험용 쥐였던 거야. 틀려? 네 이론의 실험 대상 말이야. 이렇게 하면 떨어져 나가겠지? 저렇게 하면 떨어져 나가겠지? 하면서! 실험하면서 아주 즐겁고 질렸겠어. 내가 도무지 떨어져 나가질 않아서!”

태섭에게 밀려 몇 걸음 뒷걸음질 친 우성이 날 선 말투로 쏘아붙였다.

“그래, 당신이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얼마나 초조하고 질리든지! 아주 미치는 줄 알았어. 태섭도 질렸지? 술집에서 손쉽게 이용해 먹을 사람을 골라잡았는데, 그 사람이 미치광이 사이코처럼 굴어서! 어떻게든 날 붙들어 놔야 했잖아. 자존심 많이 상했겠네.”

“그래. 질리더라. 다이아몬드만 아니었어도 진작 헤어졌을 텐데.”

태섭이 짓씹듯이 내뱉은 말에 우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상처받은 우성의 얼굴을 마주한 태섭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이렇게까지 말할 건 아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그를 달래기 위해 뻗은 태섭의 손을 우성이 매섭게 쳐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태섭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우성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 당신이 다이아몬드 광고를 못 따게 만들어서. 다음에는 더 신중하게 사람을 고르고 끝까지 잘 속여.”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려 파티장을 빠져나가려는 우성을 노려보던 태섭이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아주 훌륭한 기자야, 우성.”

“…….”

“10일 안에 남자를 잃는 것 말이야. 성공했잖아. 축하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돌아서는, 자신을 상처 입히고 싶어 어쩔 줄을 모르는 태섭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우성이 태섭을 불렀다. 아니, 당신이 틀렸어 태섭. 우성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보는 태섭을 향해 우성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진 적이 있어야 잃을 수도 있는 거야.”

“…….”

“난 당신을 가진 적이 없잖아. 내가 가졌던 건 가짜니까.”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돌아섰다. 그러고는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반대 방향으로 걸으며 상대에게 준 상처와 자신이 입은 상처를 곱씹었다.

 

  

 

7. 10일 만에 차였던 연인과 다시 만나는 법

우성은 자신의 원고를 읽는 라나를 초조하게 쳐다봤다. 무표정한 얼굴로 원고를 읽던 라나가 우성을 힐끗 쳐다봤다. 이틀 전에 파티장에서 만난 화려한 남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척한 얼굴을 한 우성이 어설프게 웃었다. 작게 한숨을 삼킨 라나가 다 읽은 원고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기대한 방향은 아니네요.”

“네?”

“훨씬 더 좋아요. 아주 잘했어요, 우성.”

라나는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성의 기운을 북돋아 주려고 했지만, 우성은 힘없이 웃으며 감사하다는 이야기만 내놓았다. 어떻게든 우성의 기운을 돋아보려던 라나가 포기하고 우성에게 나가보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우성을 부른 라나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우성.”

“네?”

“……그렇게 그 남자가 좋으면 다시 잡아봐요.”

“됐어요. 그날 보셨잖아요. 저한테 정이 다 떨어졌을 거예요.”

“그래. 나는 그날 다 봤어요. 우성이 떠난 후에도 말이야.”

라나의 말에 우성이 라나를 돌아봤다. 며칠 전에는 저 자리에서 무조건 칼럼을 완성하라고 매섭게 몰아붙이던 라나였는데, 이제는 다시 태섭을 찾아가 보라고 설득한다는 게 웃겼다. 우성이 피식 웃자, 자기 말을 듣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는지 라나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날 우성이 떠나고 그 남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어요. 혼자 구석에서 술 마시고 손을 떨고……. 물론 광고 담당자는 저번에 봤던 클레어가 됐지만, 그런 건 안중에도 없는 눈치였다니까요? 결국엔 혼자 울다가 나가더라고.”

“울었다구요?”

“응. 아주 서럽게 울던데요? 다들 광고를 뺏긴 분노와 우성과의 싸움 때문에 부끄러워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알지. 그 남자, 당신을 좋아해요. 그래서 운 거야.”

“의견 감사합니다.”

“아니 진짜라니까요? 내가 얼핏 들었는데, 사랑한다더니 그게 거짓말이었냐고 중얼거렸어요!”

대충 넘기려는 우성을 붙잡은 라나가 꽥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우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자 라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날 말실수를 한 게 신경 쓰여서 그래. 우성도 아직 마음이 있잖아요. 응? 다시 한번 만나봐. 그 남자도 무조건 마음 있다니까요?”

라나의 말에 일단은 알겠다는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 우성이 터덜터덜 걸어 편집장실을 빠져나왔다. 그 사람을 어떻게 다시 만나. 그렇게 끝났는데. 혼자 중얼거린 우성이 마른 눈가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기운이 쭉 빠졌다. 어제는 간신히 태섭에 대한 건 잊고 원고에만 집중했는데, 이제는 집중할 원고도 없었다. 미셸이나 헤일리를 만나서 하소연하고 싶어도 헤일리는 아까부터 마감 때문에 고개 한 번 들지 않은 채 타이핑하고 있었고 미셸은 어젯밤에 열흘 전에 도망갔던 그 남자가 용서해달라고 되돌아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 부르기가 미안했다. 어쩔 줄을 모르고 자신의 자리 앞에 가만히 서 있던 우성이 한숨을 쉬며 일단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사무실 의자에 눕듯이 앉아 있던 태섭이 한숨을 쉬며 책상에 있는 NBA 티켓을 쳐다봤다. 이미 날짜가 지난, 주인을 잃고 사용되지 않은 두 장의 티켓을 보던 태섭이 신경질적으로 티켓을 구겨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프고 이유 모를 분노가 치솟아 뭘 할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싸우고 술 처먹으면서 운 거? 그건 괜찮았다. 업계에 들어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더 쪽팔리고 이상한 짓 많이 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시간이 지나면 더 자극적인 사건으로 덮여 모두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기 마련이었다.

클레어가 다이아몬드 광고를 가져간 거? 손에 쥐기까지 했다가 놓친 거라 조금 뼈아프긴 했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애초에 클레어의 것이기도 했고 세상에 보석이 다이아몬드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기존에 맡은 일을 하며 다시 차근차근 준비하면 된다.

우성이 보여줬던 것들이 전부 거짓이었고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다는 거. 그게 태섭을 미치게 했다. 그가 끔찍한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다가도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떠오르면 괴로움이 분노를 덮어버렸다.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을 거라는 저주를 퍼부으며 그를 매도하고 싶다가도 전부 용서할 테니 제발 다시 나를 만나 달라 매달리고 싶기도 했다. 그의 집으로 달려가 당장 나에게 잘못했다 빌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과 널 속인 나를 용서해달라고 빌고 싶은 마음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정우성이 보고 싶은 만큼 미웠고, 미운 만큼 보고 싶었다.

“사랑 그거 무서운 거였네…….”

한숨과 함께 중얼거린 태섭이 몸을 일으켰다. 사무실에 앉아 있기만 하면 끊임없이 땅을 파고 들어갈 것 같았다. 잠시 나가서 바람을 좀 쐬며 기분 전환을 할 생각이었다.

회사 건물 앞에 세워둔 오토바이 앞에서 타고 달릴지 아니면 걸을지 고민하던 태섭의 눈에 가판대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컴포저가 들어왔다. 인상을 구기고 가판대 앞으로 걸어간 태섭은 표지에 대문짝만하게 적힌 ‘10일 만에 연인에게 차이는 법’이라는 타이포그래피를 보고 이를 악물었다. 결국엔 그 칼럼을 완성했다는 거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가판대 앞에서 무시무시한 얼굴로 컴포저를 노려보고 있는 태섭을 힐끔 쳐다본 주인이 슬쩍 태섭에게 컴포저를 내밀었다. 빼앗듯이 잡지를 받아 든 태섭은 값을 치르고 다시 오토바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를 이렇게 짓밟으면서 얼마나 대단한 칼럼을 쓴 건지 직접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글이 별로라면 종종 자신의 직업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드러냈던 우성을 잔뜩 비웃어 줄 작정이었다.

오토바이에 걸터앉은 태섭이 거칠게 페이지를 넘겼다. 화려한 패션 화보와 쓸모없는 연예계 소식과 생활 정보를 넘긴 후에야 태섭은 환하게 웃고 있는 우성의 사진이 작게 박혀 있는 페이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태섭은 작은 우성의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한참이나 가만히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우성의 사진을 한 번 쓰다듬은 태섭이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리고 억지로 눈을 돌려 잘 들어오지 않는 글자를 꾸역꾸역 머릿속으로 밀어 넣으며 칼럼을 읽기 시작했다.

잔뜩 날 서 있던 태섭의 얼굴은 칼럼을 읽는 동안 서서히 무뎌졌다. 우성의 낚시에 걸린 태섭을 잔뜩 비웃고 놀리는 내용일 줄 알았던 칼럼은 우성의 후회를 담고 있었다. 왜 이 칼럼을 쓰게 되었는지, 얼마나 자신이 안일 했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한 칼럼은 우성이 태섭에게 했던 행동을 서술했다. 내용은 자학에 가까울 정도로 우성 자신을 난도질하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큰 소리로 웃었을 게 분명할 정도로 유쾌한 문장의 나열이었다. 실수를 되돌릴 수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전부 다 놓쳐 버린 자신의 어리석음과 실패를 양분 삼아 여러분은 사랑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는 말로 마무리된 칼럼을 물끄러미 보던 태섭이 중간에 인용구로 표시된 문장을 작은 목소리로 따라 읽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진실해야 함을 잊지 말 것.’”

한참을 가만히 있던 태섭이 잡지를 챙기고 헬멧을 썼다. 지금 당장 우성을 보고 싶었다.

아슬아슬하게 교통 법규 위반 딱지를 떼지 않을 정도로 속도를 올려 우성의 회사로 간 태섭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도 없어 8층까지 단숨에 달려 올라갔다. 숨을 몰아쉬며 컴포저 사무실로 들어선 태섭은 지나가던 직원을 붙잡고 우성의 자리를 물었다.

직원이 알려준 대로 찾아간 자리에는 우성이 없었다. 우성의 이름표가 붙어있으니, 그의 자리가 맞을 텐데. 아예 출근하지 않은 것처럼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자리를 기웃거리고 있자 뒤에서 누군가가 태섭의 어깨를 두드렸다. 뒤를 돌아보자, 초면인 여자가 묘한 표정으로 태섭을 훑어보고 있었다. 뭘 말하고 싶은 듯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며 고민하던 여자가 태섭에게 물었다.

“혹시 그쪽 이름이 태섭인가요?”

“절 아세요?”

“아, 음. 안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해야 할지…….”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하며 눈을 데굴데굴 굴린 여자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우성은 오늘부터 일주일간 휴가에요.”

“네?”

“어디로 가는 지는 묻지 않아서 모르는데, 어쨌든 아직 출발 안 했을 게 분명해요. 우성은 여행을 갈 때마다 여유롭게 움직이는 편이니까 지금 바로 출발하면 잡을 수 있을 거예요.”

“아.”

“우성의 집 주소는 아세요?”

모르면 지금 불러드릴게요. 여자의 말에 태섭이 고개를 저었다. 우성의 집이라면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었다. 눈을 깜빡이며 여자를 내려다보던 태섭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 여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우성과 자신이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긴 태섭이 빨리 안 가고 뭐 하냐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여자를 보며 웃었다.

“고마워요.”

여자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태섭은 빠르게 몸을 돌려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붙는 것도 모른 채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온 태섭이 허둥지둥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여행이라니.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 우성이 출발하는 걸 놓치면 일주일 동안 마냥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였다. 급해진 마음에 태섭은 헬멧의 잠금쇠를 제대로 잡지 못해 세 번이나 헛손질했다. 침착하자, 송태섭. 침착하게. 심호흡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나서야 헬멧을 제대로 쓴 태섭은 속도를 올려 우성의 집으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우성이 살고 있는 건물 근처에 도착했을 때, 태섭의 눈에 우성이 들어왔다. 살이 빠졌는지 며칠 전보다 조금 수척해진 낯의 우성은 캐리어와 함께 길가에 서 있었다. 당장에라도 우성에게 달려가서 꾹꾹 눌러왔던 말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빨간 불이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우성을 보고 있던 태섭이 목이 터져라 우성의 이름을 불렀지만, 안타깝게도 요란스러운 사이렌 소리에 묻혀 우성의 귀에 닿지 못했다.

태섭이 정직하게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우성은 도착한 택시에 캐리어를 싣고 어딘가로 출발해 버렸다. 필사적으로 우성이 탄 택시의 번호를 외운 태섭은 초록 불로 바뀌기 무섭게 우성이 탄 택시가 사라진 방향으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택시가 다른 골목으로 빠졌을까 봐 초조해하며 달리던 태섭은 저 멀리에 보이는, 익숙한 번호판에 저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태섭은 속도를 올려 차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우성이 탄 택시를 따라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운전 경력이 긴 택시 기사인지, 우성이 탄 택시는 요리조리 차선을 바꿔가며 꽤 빠른 속도로 움직였기에 태섭은 택시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태섭은 택시를 잡을 수 있을 것처럼 근처까지 접근했다 신호에 걸려 멀어지는 일을 몇 번 반복했다.

요리조리 달리던 택시가 대교로 진입하는 걸 확인한 태섭이 훅 숨을 몰아쉬고 택시의 뒤를 따라갔다. 다들 빠르게 달리는 대교에서 무리하게 끼어들기를 했다간 우성을 만나기 전에 조상님을 먼저 만날 가능성이 높았기에 최대한 침착하게 운전해야 했다. 물론 태섭은 침착하지 못했다. 무리하게 끼어든 뒤 빵빵대는 차를 돌아보며 미안하다고 고개를 꾸벅 숙이는 일을 도대체 몇 번이나 했는지. 식은 땀에 등이 축축하게 젖은 게 느껴졌다. 가족들이 알면 당장 오토바이를 팔라고 길길이 날뛸 정도로 위험한 운전이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넘어 간신히 우성이 탄 택시의 옆으로 진입하는 것에 성공한 태섭이 망설임 없이 주먹으로 택시 창문을 두드렸다. 택시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알았지만, 우성을 부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멍하니 앉아 있던 우성은 갑자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깥을 쳐다봤다. 헬멧을 쓴 태섭이 택시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가만히 태섭을 쳐다보던 우성은 다시 한번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창문을 내렸다. 활짝 웃으며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태섭을 본 우성이 빽 소리를 질렀다.

“태섭, 미쳤어요?!”

“잠깐 내려봐요! 할 이야기가 있어!”

“아니, 지금 이게 무슨……!”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하고 태섭만 쳐다보던 우성이 한숨을 푹 쉬었다. 무시하고 모른 척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여기서 그를 무시한다면 목적지까지 저 난리를 치면서 따라올 게 분명했다. 그리고 솔직히 우성도 태섭과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다. 이게 태섭과 이야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잖아…….

태섭의 오토바이가 택시를 긁을까 봐 예민하게 태섭을 힐끔거리며 운전 중인 택시 기사에게 우성이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사님, 죄송한데 갓길에 잠시 세워주실 수 있으실까요?”

“대교에서는 주정차 안 돼요.”

“네…….”

매몰찬 택시 기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우성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우욱!”

“뭐야.”

“욱! 토할 것, 토할 것 같……! 우으엑!”

“어어, 참아요. 손님! 잠깐만 참아봐요!!”

우성이 택시에 토할까 봐 다급해진 기사가 깜빡이를 켜며 갓길로 빠졌다. 택시가 서기 무섭게 문을 열고 내린 우성이 오토바이에서 내리는 태섭을 노려봤다. 며칠 만에 보는 태섭은 얄미울 정도로 이전과 똑같아서 부아가 치밀었다. 피부는 왜 더 매끈해진 거야? 옷도 예쁘게 입었네. 며칠 동안 관리를 안 해 푸석해진 얼굴과 어젯밤 내내 울어 퉁퉁 붓고 충혈된 눈이 신경 쓰여 우성은 태섭이 더 가까워지기 전에 허둥지둥 가방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태섭이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는 걸 알았지만, 엉망인 얼굴을 보여주느니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게 나았다. ……슬프지만 그에게 우성은 이미 사기꾼이니까.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새침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는 우성의 앞까지 걸어온 태섭이 챙겨 온 컴포저를 우성의 앞에 내밀었다. 이걸 왜 내미냐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한 우성을 보며 태섭이 물었다.

“칼럼 읽었어요.”

“……그런데요?”

“칼럼에 적은 거, 사실이에요?”

“태섭.”

우성이 한숨을 쉬자, 태섭이 인상을 쓰며 다시 말했다.

“다시 한번 물을게요. 사실이에요? 아니면 칼럼을 팔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거예요?”

태섭의 물음에 우성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우성은 말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당장에라도 우성의 어깨를 붙잡고 빨리 대답하라고 재촉하고 싶었지만, 태섭은 기다렸다. 이건 우성 스스로 해야만 의미가 있는 말이었다.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던 우성이 코를 훌쩍였다. 이 상황에서 도망갈 수도 없고 대답을 들을 때까지 태섭이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선글라스 아래로 투둑 떨어지는 눈물을 빠르게 닦아낸 우성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칼럼에 거짓말 안 써요. 독자와의 신뢰는 소중한 거니까.”

우성의 대답에 태섭은 그제야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 근육을 느슨하게 풀었다. 순식간에 온화해지는 태섭의 얼굴을 본 우성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모로 돌렸다. 울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우성을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태섭이 말했다.

“칼럼이 사실이면, 왜 나한테 안 왔어요.”

“내가 당신에게 왜 가야 하는데요.”

날카롭게 쏘아붙인 우성이 씩씩대며 태섭을 쳐다봤다가 멈칫했다. 태섭은 모든 사실을 알기 전의 태섭이 자신을 쳐다보던 얼굴로 보고 있었다. 우성을 잠 못 들게 했던, 이 사람이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는 얼굴이었다. 다정한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우성은 애써 단단하게 쌓았던 마음의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고개를 숙여 태섭에게서 시선을 돌렸던 우성이 머뭇거리다 다시 태섭을 쳐다봤다. 못된 소리를 했는데도 태섭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우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는 우성이 하는 말을 전부 들어 줄 생각으로 온 사람 같았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여기서 뭐라고 해야 그를 잡을 수 있는 거야?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해졌다.

어쩔 줄을 모르고 우물쭈물하는 우성에게 한 걸음 다가간 태섭이 우성의 손을 잡았다. 흠칫 놀란 우성이 태섭의 얼굴을 보자 태섭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왜 나한테 안 왔냐고요.”

“……내가 어떻게 가요. 그런, 그런 짓을 했는데.”

“그래서 도망가는 거예요?”

“도망 아니에요!”

발끈한 우성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태섭이 쿡쿡 웃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우성이 머뭇거리다 두 팔을 벌려 태섭을 안았다. 순순히 안긴 태섭이 우성의 두툼한 허리를 끌어안으며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봤다. 선글라스 사이로 보이는 퉁퉁 부은 눈에서 또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우성 씨, 몰랐는데 울보구나……. 속으로 생각한 태섭이 우성의 허리를 토닥였다. 훌쩍이던 우성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랑 다시, 다시 만나 줄 거에요?”

“우리의 일로 칼럼 안 쓴다고 약속하면요.”

태섭이 덧붙인 말에 우성이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뒤꿈치를 들어 울음을 참느라 호두 턱이 돼버린 그의 매끈한 턱선에 입을 맞춘 태섭이 방실방실 웃으며 말했다.

“나도 광고 일 안 끌고 올게요.”

“…….”

“그럼, 이제 나한테 올 거예요?”

“응…….”

“도망도 안 갈 거고?”

“도망 아니라고요…….”

울먹이는 와중에도 반박하는 우성이 웃겨서 키득키득 웃은 태섭이 두 손을 뻗어 우성의 선글라스를 벗겼다. 그리고 그의 목덜미에 두 팔을 감아 끌어당겼다. 태섭이 끄는 대로 순순히 허리를 숙인 우성이 태섭에게 키스했다. 체온이 올라 뜨거운 우성의 키스를 받아낸 태섭이 헐떡이며 우성에게 속삭였다.

“우리 집으로 가요.”

태섭의 말에 우성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태섭은 아예 창문을 내리고 둘을 구경하고 있는 택시 기사에게 지폐를 건넸다. 짐은 다시 그 건물로 가져다주세요. 태섭의 말에 인상을 구겼던 택시 기사는 지폐를 한 번 세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창문을 올렸다. 말없이 출발하는 택시를 보던 우성이 키득대며 태섭에게 몸을 기댔고 태섭은 그런 우성을 지탱하며 천천히 오토바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完.


오래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ㅠ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해주신 분들 덕분에 끝까지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합작 때 후기 보내주신 것도 넘넘 감사했습니다. 많은 힘이 되었어요 🥰

원작인 10일 안에 남자 친구에게 차이는 법은… 저도 글을 쓰기 위해 처음 봤는데 훨씬 골 때리고 재미있답니다. 아무래도 옛날 영화라 걸리는 부분이 있지만요 ㅋㅋ 저는 티빙에서 봤었는데, 지금은 티빙에서 내려가고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네요 ㅎㅎ 하 편 쓰느라고 다시 봤는데, 여전히 골 때리더라구요.

다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건강 관리 잘 하시구 오래오래 같이 우태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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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 감동하는 청설모

    너무행복한 이야기였어요.. 끝까지 이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ㅜㅜ

  • 독창적인 드래곤

    저들의 직장 동료가 되어 꿀잼 연애를 지켜보고 싶다…👀 찬바람 불고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마음이 쓸쓸해져서 그런지 평소에 잘 보지도 않았던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괜히 기웃거리게 되지 않나요. 저만 그런가요… ‹10일 안에 연인에게 차이는 법›을 읽고 정말 마음이 너무 풍족해졌습니다. 너무 달달하고 기분 좋게 따끈한 이야기였어요.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욕심으론 둘 다 울었으면🤭…했는데 정말 둘 다 울어줘서 음흉한 웃음이 나오려는 걸 입술을 말아 참으며 읽었습니다. 완결 축하드리고, 하편까지 이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는데 모쪼록 감기 조심하세요!

  • 연주하는 달팽이

    기다린만큼... 기다린거보다 더ㅠㅠ 재밌었어요 엄청 순식간에 읽어버렸네요ㅠㅠㅠ 아껴읽었어야되는데 ㅠㅠㅠ 둘이 엇갈리는 장면에서 찌통이 왔다가ㅋㅋㅋ 아 이 찌통만큼 둘의 재결합이 짜릿하겠지싶어서 기뻤고ㅋㅋㅋㅋ 실제로 미친듯이 짜릿했어요ㅋㅋㅋㅋㅋ 귀여운 자식들.... 😭😭 정말 잘 읽었습니다 끝까지 볼수있게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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