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
적과의 동침 외외전
1.
포스트 시즌까지 모두 종료된 뒤 찾아온 2개월의 휴식 기간에도 대만은 개인 훈련 루틴을 유지하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대단한 루틴이 있는 것은 아니고, 여섯시 쯤 일어나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의 러닝을 한시간 남짓 하는 것이 전부다. 일어나서 가볍게 씻고 나갔다가 운동을 끝마치면 대략 일곱시 반 정도가 되는데, 집앞 베이커리나 토스트 집이 영업을 시작할 때라 간단한 아침거리를 사들고 귀가하곤 했다. 오늘 대만의 선택은 베이커리였다. 과일이 들어간 샐러드와 치킨샌드위치, 그리고 컵수프를 고르고 포장을 기다리는데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다. 낯이 익은 점원이 그 소릴 듣곤 한마디 건넸다. 뭐 기분 좋은 일 있으신가봐요? 대만은 그저 날씨가 좋아서 그런거 같다고 말하며 포장된 것을 받아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고 빨랐다.
휴가 시즌은 원래 모두 좋아하기 마련이다. 개인 루틴을 유지한다고 해도 대만도 다를바는 없어서 원래 이 시기엔 기분이 늘 좋았다. 다만 오늘 특히 더 기분이 좋은 것은 집에 사람이 있어서였다. 아니, 사람이야 원래 늘 있었다. 저와 다르게 준호는 집에서 출퇴근을 하는 몸이니 엄연히 말해선 제가 집에 늘 붙어있는 게 특별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오늘 조금 더 다른 것은, 준호가 출근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준호가 몸담고 있는 워리어스는 남부쪽 지방이 연고지인 팀이라 사무국 사무실이 사실상 두 곳이었다. 모그룹 본사에 있는 사무국 사무실과 연고지 구장에 있는 사무실. 준호는 홍보팀 대리라 본사에 자리가 있지만 업무상 구장 사무실 출장이 잦은 편이었다. 어제도 연고지 사무실로 출장을 다녀왔는데 기실 거의 2일간 봐야 할 업무를 하루만에 해치우고 귀가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은 것인지 준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나 내일 회사 안 간다? 휴가받았어.”란 말부터 했다.
준호는 평일, 그것도 금요일에 출근을 안 한단 사실이 순수하게 기뻐서 자랑한 것이지만 듣는 대만은 제멋대로 해석했다. 내일 회사 안 간다, 그러니까 오늘은 늦잠 자도 된다. 그 말인 즉, 밤새 자기랑 놀아도 된다. 아침해가 다 뜨기도 전에 새벽같이 출근해서 열시가 다되어서 돌아온 준호를 대만은 냅다 침대로 몰고 갔다. 잠깐만, 대만아. 잠깐! 아니, 나 좀 씻고와서! 절 말리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대만은 사뿐히 무시했다. 어차피 권준호는 좋아할테니까. 친구로 15년, 연인으로는 7년, 그리고 부부로는 3년. 그간 착실히 쌓아온 단계와 세월이 대만에게 답을 알려주었고, 그것은 역시나 정답이었다.
그렇다고 준호를 한참 붙들고 못살게 군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출근을 안 한다고 하니 내일 하루 종일 붙어있을 수 있고, 또 주말도 붙어있으니 대만은 늦게 퇴근하는 준호를 기다린 것만 보상받는 정도로 멈출 수 있었다. 대신에 아침밥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올라가는 내내 대만의 머릿속은 오늘 뭐하지 같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날도 좋은데 어디 나갔다올까? 아님 집에서 뒹굴까? 이런 저런 후보지를 떠올리는 대만은 다시 또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불렀다.
집에 들어선 대만은 사온 것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조용히 침실문을 열었다. 아직 자고 있겠거니 하면서도 잠깐 얼굴만 보자 싶어 연 것인데 예상외로 준호는 깨어 있었다. 것도 그냥 깨어난 게 아니라 안경까지 끼고 앉아서 휴대전화 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벌써 깼어?”
슬며시 이마에 입술을 내리면서 묻는데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대만은 그를 틈타 볼에도 입을 맞추는데 그러자 으응, 하면서 몸을 비튼다.
“회사 일이야?”
결혼 3년차. 아직 풍월을 읊을 만큼 세월이 지나진 않았지만 준호가 답도 못할 만큼 뭔가에 몰입하는데다 스킨십까지 회피할 때는 일 아니면 드라마 볼 때 둘 중 하나란 것을 알기엔 충분했다. 대충 넘겨다 본 화면이 메신저창이었으니 후자는 확실히 아니고. 미간까지 슬며시 찌푸리는 게 확실히 일 때문인 것 같았다. 대만은 더 묻지 않고 한 번 더 준호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데 그제야 준호가 고개를 돌려 대만에게 눈을 맞췄다.
“씻으러 가려고?”
“엉. 샌드위치랑 스프 사왔어. 배고프면 먼저 먹어도 돼.”
“아냐, 너 나오면 같이 먹을래. 어차피 봐야 할 것도 있고.”
“회사?”
준호는 입술을 길게 삐죽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침부터 회사 연락이라니. 이거 오늘 출근해야 하는 건가 싶은 불안감에 대만의 미간에 저절로 힘이 실렸다.
“뭐야, 출근하래?”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뭐 좀 보기만 하면 돼.”
“진짜? 혹시라도 너 출근하면 나 니네 회사 처들어간다.”
대만의 말이 농담처럼 들렸는지 준호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어, 나 심각해. 진담이야, 이거. 대만이 덧붙여도 준호는 웃으면서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진짜 안 나가. 그니까 얼른 씻기나 해. 그래야 나랑 하루 종일 놀지.”
“알겠어. 그럼 나 얼른 씻고 온다. 졸려우면 더 자고 있든가.”
“으응.”
착실하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준호를 보다가 대만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조금 전 거절당했던 볼쪽으로. 실은 입술에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빨리 욕실로 가지 못할 거 같아 방향을 틀었다. 이게 다 권준호 때문이다. 침대 위에 앉아서 다 흐트러진 차림새로 하루 종일 놀잔 말을 하다니. 정확히 그 말 때문에 빨리 씻고 나와야겠단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참 앙큼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그걸 노리고 한 말이란 점에서 더 앙큼했다. 하지만 일단은 착실하게 하루를 보내려면 루틴을 마무리 지을 필요가 있었다.
쪽 소릴 내며 떨어진 대만은 냉큼 방 밖의 욕실로 튀어갔고, 닫히는 문 틈새로 그런 대만의 모습을 보던 준호는 마침내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나고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곧장 협탁에 둔 태블릿을 끌어와 화면을 켰다.
2.
아침 댓바람부터 준호에게 왔던 메시지는 같은 홍보팀 팀원인 박 주임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대리님 큰일큰일! 하면서 시작한 그 메시지는 간단히 요약되었다. 밤새 모 대형 커뮤니티에서 머만권 얘기가 아주 넘실댔다, 이러다 들키는 거 아닌지. 특단의 대책이 필요. 그는 사건의 기승전결-그러니까 어제 있었던 김덕후의 계실부터 현 상황까지-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알려주었는데 덕분에 준호는 잠을 제대로 떨칠 수 있었다.
아직 여덟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커뮤니티는 활활 불 타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글들이 새벽반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는데, 육두문자만 안 썼다뿐이지 가히 법원에 데려가도 될 법한 수위로 폭력적인 언사가 많았다.-와중에 준호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돌이켜보며 직업병이다, 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다행히 커뮤니티 사용자들도 그런 감이 잡혔는지 더 말 이어갈 거 없이 신고나 하자는 식으로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고 금세 그 쪽으로 이야기가 몰렸다. 준호는 그들이 신고좌표라고 올리는 링크를 하나하나 따라가 보았다. 몇 개는 박주임이 보내준 캡쳐로 본 글이었고, 몇 개는 새로 보는 것들이었다. 개중 준호의 눈을 사로잡은 글은 대만의 목격담 정리글인데, 결혼했던 그 해를 기점으로 시즌 중에도 집 근처에서 봤단 sns나 커뮤니티 글들을 정성껏 모아놨다.
주말에 경기 있으면 퇴근하고 바로 간 것으로 보이고, 주말 경기 없는 때엔 금요일 저녁부터 출몰함. 고로 주말엔 꼭 집으로 간 거지. 이거 완전 주말 부부 아님?ㅋㅋ
준호는 그 시기에 대만이 자주 하던 말이 떠올랐다. 신혼인데 주말부부라니 뭔가 잘못 됐다, 이거. 안 그러냐, 준호야? 그러면서 숙소로 돌아가기 전까지 껌딱지마냥 붙어있던 대만이었다. 정말이지 다들 귀신인가봐. 준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한숨을 푹 쉬었다.
대만과 결혼을 하면서 대만네도, 준호네도 주요 관계자들은 둘의 관계를 완벽히 인지하게 되었다. 사실 그 전에도 암암리에 알고 있던 사안이기도 했다. 특히 대만의 경우 관계자들에게 준호와의 관계를 좀 더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고 대만 본인도 그다지 숨기려는 생각이 없었기에 연애 첫해에 거진 대부분이 알았다. 그와 달리 준호는 대만에게 영향이 가는 것이 우려되어서 최대한 숨겼기에 의도치 않게 알게 된 극소수, 예를 들어 윤대협 선수 같은 경우를 제외하곤 결혼을 통해 처음 알았다. 연애와 동거를 같이 했으니 그것이 결혼이 만들어준 가장 큰 분기점이었다. 동시에 결혼을 한 이유 중 큰 부분이기도 했다.
사실 대만은 제법 공개적으로 알릴 생각도 있었다. 아니, 준호가 느끼기엔 제법 수준이 아니라 그게 본심에 가까웠다. 하지만 사회의 통념이나 구단의 입장 등도 있으니 둘은 그 부분은 조금 미뤄두기로 했다. 구체적으론 대만이 선수 생활을 모두 마무리 하고 4, 5년 쯤 뒤로. 그 얘길 하면서 대만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그럼 한 45살 쯤에 말하게 되는 건가.” 라고 중얼댔다.
「40살까지 뛰기로 한 거야?」
「그 정도면 원없을 거 같아서. 너 나 농구 안 한다고 버리고 그러면 안돼.」
「나 그런 생각 한 적 없는데?」
「그야 지금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가만 보면 너는 애인 정대만보다 농구하는 정대만을 더 좋아하는 거 같아서 불안하단 말이지.」
「그래도 이제 남편 정대만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남편 정대만을 제일 좋아해볼게.」
그런 얘기를 장난스럽게 주고 받으면서 막연히 미래를 생각했는데… 이래서야 45살은 무슨 35살에 공개발표를 하게 될지도 모를 판국이었다. 문제는 대만이었다. 애초에 본심이 그곳에 있었던 이 남편 녀석은 은근히 저희 둘의 사이를 의심인지 신임인지 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머만권러’라는 사람들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제일 거리를 둬야 할 사람들인데 은근슬쩍 사진 한 번 더 찍어주고 사인도 더 해주고 있으니 배우자이자 (타구단이지만) 농구팀 프런트 스태프로서 환장할 노릇이었다. 몇 번 그 얘길 하긴 했으나 이 포기를 모르는 남자는 그런 것까지도 포기를 몰라서 말을 돌리거나 대충 눙치는 것으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은 대만을 생각하면 더더욱 빨리 잠재워야 할 상황이었다. 특히 김덕후, 이 팬을 대만이 알고 있단 것을 고려하면 더욱 이 상황을 대만이 알아선 안 되었다.
준호는 고개를 들고 흡, 하고 기합을 넣었다. 그러곤 휴대전화를 쥐고선 메신저 앱을 열었다. 박 주임님. 우리 이거 일단 신고부터 하죠. 몇 초 남짓 지났을 까 답이 곧장 왔다. ㅇㅋㅇㅋ 안 그래도 부계 총 동원해서 하고 있어요. 회사 도착하기 전까지 다 해볼게요. 박주임에게 준호는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며, 다음주에 점심 사겠다는 말을 끝으로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그리고선 준호도 해야 할 일을 시작했다. 단정하고 둥근 손끝이지만 한때 농구선수였던 사람답게 민첩하고 빠른 움직임으로 하나하나 신고 버튼을 누른다. 미안합니다, 다들. 십 년 정도만 기다려주세요. 그때는 확실히 말할테니까요.
3.
대만이 욕실에 나왔을 때에도 준호는 침대 위였다. 태블릿까지 끌어다 보면서 뭔가를 하더니 대만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일한 거야? 다시 잠들었겠거니 했는데.”
“으응. 근데 이제 다 끝났어. 더 안 봐도 돼.”
그러면서 좀 전에 대만이 했듯이 준호도 대만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대만의 키가 조금 더 큰 탓에 살짝 허리와 까치발을 드는 모습이 새삼 좋아서, 대만은 금세 떨어지는 준호를 붙잡고 고스란히 입술을 돌려주었다. 나 사온 거 차려놓고 있을테니까 머리 말리고 나와. 준호는 젖은 대만의 머리를 살짝 쓸어주고는 곧 방 밖으로 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살짝 벌어진 틈새로 달그닥 그릇이 부딪는 소리와 커피캡슐이 추출되는 소리가 연이어 들린다. 대만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짧게 자른 머리를 수건으로 탁탁 털어냈다. 또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지만 대만은 자각하지 못했다.
수건으로 물기를 최대한 털긴 해도 드라이기 사용을 아예 안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럴 찰나에 협탁 위에 올려두었던 대만의 휴대전화가 울리는 바람에 대만은 드라이기보다 전화기를 손에 들게 되었다. 화면에 뜬 것은 송태섭의 메시지였다.
-님 팬들 귀신인 듯요. 다 꿰뚫어 보고 있네요.
뭔데 이거. 대만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물음표 하나를 써서 보냈다. 그러자 몇 개의 이미지가 화면에 올라왔다. sns 캡쳐본이었는데, 그 계정의 주인은 대만도 익히 아는 팬이었다. 아, 내 사진 잘 찍어주는 팬. 몇 년 전에 준호가 보여줘서 처음 알게 된 팬인데, 그 이후로도 준호가 이 팬의 사진을 저장하는 게 보여서 구단 행사 등에 이 팬이 오면 아닌 척 신경을 써주고 있었다. 사실 마음 같아선 ‘내 사진 잘 찍어준 덕분에 내 남편이 나에 대한 콩깍지가 날로 두꺼워지고 있다’며 인사해주고 싶은데 그럴 순 없으니, 그게 대만 나름의 화답이었다. 근데 얘가 뭐? 대만은 마저 이미지 속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 정대만... 걍 권준호랑 결혼했다고 말해주면 안됨?........ 엥.
-뭐냐 이거
-커뮤니티 눈팅하는데 보이던데요? 지금은 지워진 거 같은데 아무튼 조심 좀 해요 ㅋㅋㅋㅋ 보면 준호형만 신경쓰는듯ㅋㅋㅋㅋㅋ 준호형도 참 어쩌다 저런 거랑 결혼을 해서ㅠ 사서 고생을 하는지ㅠㅠㅠ
-뭐임마?
-한나가 불러서 가요. 아무튼 잘 좀 해요;;; 준호형 이거 알면 또 별거 하자고 할지도 모름 ㅇㅇ 이건 농담 아니고 선배 생각해서 하는 말임
‘별거’라는 두 글자가 단번에 대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결혼 이전에 한 번 그런 소동이 있기는 했다. 타이탄즈 홈-워리어스 어웨이로 경기가 있던 날, 준호가 일로써 구장을 찾았다가 경기를 끝마치고 나온 대만과 따로 만났었다. 한창 시즌 중이라 대만은 숙소살이를 했던 터라 나름 오랜만에 만나던 것이었고, 또 당장 다음날에도 경기가 있던 터라 그 짧은 만남이 대만에게는 너무 귀중했다. 그래서 앞뒤 생각않고 준호를 한품에 가둬 안고 한참을 서 있었다. 그렇다고 아예 생각 없이 행동한 건 아니었다. 사람 안 다니는 구석진 곳에서 그런 것이었으니. 준호도 그걸 알아서 마냥 대만에게 안겨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넓은 경기장에 사람 안 다니는 구석을 찾는 이가 대만과 준호만 있을 리 없었다. 덕분에 준호의 뒷모습이 적나라하게 찍힌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정대만 왜 워리어스 스태프랑 이러고 있음?
사진의 파급력은 실로 어마했다. 하필이면 워리어스가 버저비트 1점차로 이겼던 날이라 더 그러했다. 그 해 시즌 내내 타이탄즈가 워리어스를 거의 ‘발라먹었’고 그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게 대만이었음에도-그 날의 경기도 대만은 훌륭했다. 스타팅 센터의 부상으로 전력 손실이 온 게 문제였을 뿐.- 순식간에 불미스러운 말들이 돌았다. 한창 야구판에 승부조작 이야기가 나오던 때라 그런 쪽의 상상도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그야말로 거의 장작에 기름까지 다 부어놓은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긴급히 판에 물과 모래를 끼얹은 것은 뜻밖에도 윤대협이었다.
애초에 준호가 구장을 찾았던 이유가 윤대협 때문이었다. 구단 홍보에는 응당 얼굴마담이 끼기 마련이고, 그 윤대협을 전담하게 된 게 준호였던 것이다. 다른 선수들은 이미 다 찍은 인터뷰 영상을 윤 선수 혼자 도망다니는 바람에 마감 코앞까지 닥치고 말았고 결국 준호가 그를 잡기 위해 직접 차를 끌고 가야 했다. 그래서 대만에겐 말을 하지도 않고 간 것이었는데… 대만이 준호를 발견하는 바람에, 그것도 준호의 차까지 발견하는 바람에 일이 좀 다른 방향으로 튀었었다. 마지못해 뒷좌석에 앉아있던 윤대협은 준호가 운전석에 올라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수석에 올라타는 대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것만 본 게 아니고 대만이 말도 없이 어떻게 왔냐며 반가워 하고 준호가 뭐라 말리기도 전에 냅다 입술부터 부딪치고 보는 것까지 보았다. 대만아!!! 하고 빽 소리를 지른 권준호가 정대만을 끌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야만 했던 이유가 윤대협이었던 것이다.
윤대협은 촬영 내내 우왕좌왕 하는 홍보팀 권주임-안 그렇게 생겨서 근성 있어서 은근 씨알도 안 먹히는 타입. 도망다니기 어렵다. 라고 윤대협은 줄곧 생각해왔다.-을 보느라 지루한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그 덕에 경기도 뛰고 촬영도 했음에도 기분이 괜찮았던 윤대협은 거의 접속하지 않는 sns에 오랜만에 들어갔고 당일 촬영한 포토슛을 몇 개 올리기까지 했다. 심지어 댓글에 실시간 반응까지 해주었다. 하지만 얼굴마담은 어그로도 쉽게 끌리기 마련인 법. 안 그래도 화려하게 생긴 데다 대중 접촉이 적은 윤대협은 이유를 알 수 없게 루머가 자주 나돌았는데, 그 때문인지 sns에 직접적으로 비아냥 대는 댓글도 꽤 달리는 편이었다. 그날 윤대협이 발견한 댓글은 ‘경기 뛰고 홍보 촬영이라니 역시 승부조작으로 이기는 팀다운ㅋㅋㅋㅋㅋ’이었고 윤대협은 그 댓글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온갖 사생활 루머를 무대응으로 무시해 팬들한테 윤답답으로 불리곤 한다지만 그런 것은 그도 넘어갈 수 없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윤대협은 인터넷을 떠돌던 그 사진을 본인 sns에 올리며 준호가 누구인지 적시했다. 본의 아니게 대만과 준호의 사이를 알게 되긴 했어도 그걸 말할 순 없으니, 준호가 북산의 식스맨이었고 여전히 둘 사이가 절친함을 얘기하는 것으로 막 불타오를 뻔한 헛소문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대신에 ‘머만권’이라는 것이 타오르게 되었지만 그것까지는 윤대협이 알 수 없었다.
헛소문이야 잠재워졌지만 다음날 그걸 알게 된 준호는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연애 초에 있었던 사건 때처럼 대만은 만남을 거부당했다. 그나마 일이 금세 사그라들어 면회 거부의 시간이 한달이 조금 안 되게 짧았지, 하마터면 준호가 집을 따로 구해 나갈 뻔 했다. 그런 관계로 대만은 준호 못지 않게 바깥에서 행실을 조심하고 지냈다. 하지만 결혼 이후론 그것도 거의 옛말이었다. 뭐 이미 결혼했는데 지들이 뭐 어쩔 건데. 부부 사이를 누가 갈라놓는다고? 대충 그런 생각인 대만이라 태섭의 말엔 틀린 게 없었다.
하지만 부부사이 남들이 갈라 놓을 순 없어도 당사자가 별거 같은 걸 원하면 그건 또 따를 수밖에 없으니 역시 조심은 좀 해야겠지. 대만은 ‘별거’라는 어마무시한 단어를 다시 한 번 떠올리며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곤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드라이기를 집어들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뜨거운 바람과 함께 쏟아졌다.
근데 이건 자기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니니까 벌써부터 이런 걱정을 할 필욘 없지 않을까. 거울을 보며 머리를 털털 말리면서도 생각은 끝이 나질 않았다. 태섭이 보내왔던 캡처 사진도 떠올랐다. 눈물을 머금고 응원해주겠다고. 참 기특한 팬이다. 마음 같아서야 그 팬의 말대로 말해주고 싶은데 역시 그건 좀 무리고… 담에 보면 인사라도 좀 제대로 해줘야지. 이건 준호가 알게 되어도 별 생각 안 할테고. 그래도 준호가 이 팬이 뭐라고 했는지는 못 보게 해야지. 뭐 어차피 삭제 되었으니까 모르려나? 그럼 더 좋고.
금세 뽀송해진 짧은 머리는 어느 곳 하나 눌린 데 없이 잘 말랐다. 대만은 드라이기를 꺼 내려놓고 한 번 더 머리를 만진 뒤 방문을 열었다. 복도를 몇 발자국 걸으면 나오는 부엌 한가운데에 준호가 앉아있다. 따뜻한 커피를 호호 불면서 식히는 모습이 새삼 소중했다. 이런 사람을 배우자로 두고 있음에도 세상 사람한들한테 내꺼라고 공개선언 할 수 없다니. 그게 또 새삼 안타까웠다. 대만이 속칭 ‘머만권러’인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건 결국 이 때문이었다. 자기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정대만과 권준호는 사랑을 하고 있다고 얘기해주는 사람들이어서. 그리고 이제 김덕후도 거기에 확실히 포함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준호는 모르게 해야지. 아무튼 이것도 저것도 모르게 하고 내 옆에 꼭 붙들어둬야지. 그런 추상적인 다짐을 되새기면서 대만은 준호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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