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마전(伏魔殿)

[대만준호] 복마전(伏魔殿) 4

구 탐정 정대만

대만이 찾아간 곳은 그의 사무실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떨어진 어느 이자카야였다. 문에는 close라고 적힌 팻말이 걸려 있었지만 그는 아랑 곳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서자 오픈식으로 된 주방과 바 형태의 테이블이 보였다. 주방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걸아"

"어서 와. 대만아."

남자는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자리에 앉으라 손짓했고 대만은 주방과 가까운 바 테이블에 앉았다.

"영업 준비 중이었을텐데 미안하다."

"신경쓰지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부탁인데."

이영걸. 한 때 뒷골목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던 조폭이었다. 젊은 혈기에 무서운 것 하나 없이 일대를 주름 잡고 다니던 그였지만 지금은 완전히 손을 씻고 이자카야 주인으로 성실하게 살고 있었다. 서로 경찰과 조폭일 적에는 악연이었지만 지금은 속내를 터놓을 수 있을 정도로 막역한 사이가 됐다. 테이블에 앉은 대만에게 영걸은 시원한 보리차를 한 잔 따라주고 마주 앉았다.

"이런 일로 자꾸 도움 청해서 미안하다. 너도 이제 그 쪽 세계 사람이 아닌데.."

"서운하게 그런 소리 하지마라. 네 덕분에 이렇게 번듯하게 가게 내고 살게 됐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뭐든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해."

이 형님만 믿어라. 라며 가슴을 치는 영걸을 보고 대만은 든든함과 함께 안도감을 느꼈다. 경찰을 그만 두고 탐정 일을 시작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의뢰를 받아 조사를 시작하려면 뭐부터 해야할 지 막막하기만 했다. 경찰이라는 이름으로 행할 수 있었던 일들은 많았지만 탐정이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건 아주 적었다. 그런 그에게 영걸은 소중한 친구이며 정보원이었다. 뒷세계를 떠난 지 3년이나 지났지만 영걸의 인맥과 영향력은 아직 건재했다. 

"허윤진이라면 나도 들어본 적 있다. 산왕의 국내 마약 유통책 중 하나라고.."

"꽤 유명했나 보네. 난 처음 듣는 이름이었는데."
"너나 채치수는 마약 수사보단 살인, 강도 같은 강력 범죄 쪽을 더 맡아 했으니까. 그리고 몇 년 전에 마약 수사팀에서 대대적으로 체포작전한 이후로는 은밀하게 움직인 것도 있고."

"아, 그거라면 알고 있지. 아주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갔다고 이를 갈던 후배가 있어서."

아직도 마약 수사팀에서 일하고 있을 당찬 후배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다. 어쩌면 이번 일로 다시 얼굴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태섭, 신나겠네. 

"그런데 그 허윤진이 죽었다는 거지?"

"..그래. 누가 죽였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짐작 가는 사람도 없고?"

대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짐작 가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명헌이 말했던 산왕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허윤진은 보스 자리를 두고 벌어진 내분의 희생양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범인은 자연스레 둘 중 하나였다. 이명헌을 따르는 이거나 반대측의 인물이거나. 하지만 맘에 걸리는 건 이명헌의 태도였다. 사무실에서 보였던 장난같았던 도발과 말투, 자신의 개입을 반가워하지 않으면서도 쉽게 정보를 알려준 점 등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태도가 석연치 않았다. 분명 뭔가 더 있는 거야. 그걸 알아야 해.

"내가 아는 것만 얘기하자면.. 산왕의 국내 유통책 중 하나로 경기인천권 유통을 전담했다는 거야."

"경기인천권? ...설마 지역마다 유통책이 달랐어?"

영걸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대만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걸의 말에 따르면 산왕의 국내 마약 유통책은 최소 다섯이고 각자 맡은 구역의 총괄을 맡고 있고 그 아래에서 직접적으로 개인이나 업소, 클럽에 약을 전달하는 이들이 여러 있었다. 

"현장에서 검거가 되면 그런 운반책들을 잡아가게 두고 자기네들은 숨어버리는 거지."

"꼬리자르기라는 거네. 말단에게 다 떠넘긴다 이거군."

"말단이면 다행이지.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대학생들이나 어린애들 꼬드겨서 하는 경우가 많아. 그러다가 대대적으로 수사가 벌어져서 잡혀들어갈 뻔 했던 거지. 산왕 쪽 로비로 어떻게 빠져 나온 것 같지만.... 그 후로는 잠적해서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까지가 내가 아는 내용이야."

잠적했던 마약유통책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라.. 대만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허윤진이 내분의 희생양이라고 생각한다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활동하기 시작한 것도 내분과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높겠지.. 이명헌이 나한테 털어놓은 거 말고 숨기고 있는 게 있을테고.. 나한테 알려준 정보가 전부 진실일 거라는 보장도 없어. 적어도 자기들에게 불리한 얘기는 빼고 했을테니까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위험하겠지. 치수한테 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면 신뢰도는 오르겠지만.. 팔짱을 낀 대만의 손가락이 까닥거렸다. 깊게 생각할 때면 나오는 대만의 버릇이었다. 형사일 때부터 변함없는 그의 버릇을 보며 영걸은 피식 웃었다.

"일단 내가 애들한테 허윤진 최근 행적이랑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서 알아봐달라고 했다. 소식 오면 바로 알려줄게. 하는 김에 요즘 산왕 쪽 소식도 좀 알아보라고 했어."

"...내가 부탁하려던 걸 용케도 알았네."

"당연하지. 형.. 아니 탐정 친구랑 알고 지내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허세를 부리듯 가슴을 펼쳐보이는 영걸을 보며 대만은 피식 웃었다. 영걸은 부엌으로 돌아가더니 다시 얼굴만 내밀고 대만을 쳐다봤다. 

"온 김에 밥이나 먹고 가. 뭐든 밥을 든든하게 먹어야 하는 법이잖냐."

"가게 준비해야 되는 거 아니야? 나 밥해줄 시간이 돼?"

"탐정님 식사 챙겨드릴 틈은 있으니 걱정마시고 앉아 계십쇼~"

장난스런 말투로 대꾸하며 영걸은 완전히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고 얼마 안돼서 물소리와 함께 식기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영걸이 호의를 받도록 할까. 앞으로 바쁠테니 지금은 이렇게 여유부리는 것도 괜찮겠지. 대만은 턱을 괸 채 가게를 채우는 이름 모를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의 사무실에서 느꼈던 급박함과는 다른 평온함이었다. 


***


"보스 소집 명령에 집합한 게 이게 다야?"

서울 강남구의 어느 고급 한정식 식당. 호화스럽게 차려진 식탁이 길게 이어져 있었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건 4명뿐이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빈 자리를 노려보며 묻는 성구를 향해 맞은 편에 앉아있던 거구의 남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보스는 현철이 형이랑 오는 중이고 우성이 형은.. 오늘 못 올 것 같다고 연락왔었어요.."

덩치와 다르게 성구의 눈치를 보는지 잔뜩 주눅이 든 그를 보고 동오는 괜찮다고 등을 토닥이며 잔에 물을 따라줬다. 다들 간부급의 포스를 가지고 있는 것과 달리 덩치 큰 남자는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은 듯 보였다. 덩치는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컸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넷 중 가장 연약했다. 

"나머지 녀석들은?"

"그게..."

"연락이 왔겠어? 아니 그새끼들 입장에선 이게 지들 의사표명이겠지. 너무 열내지마. 어차피 그 녀석들은 보스를 따를 생각이 없는 놈들이야."

성구의 옆에 앉은 낙수는 술이 든 병을 들고 진정하라는 듯 그의 잔에 술을 따라줬다. 김낙수, 정성구, 최동오. 이 세 사람은 산왕에 10년 이상 몸을 담구고 있는 간부들이자 보스 이명헌을 따르고 있었다. 비어있는 자리 역시 간부들의 자리였지만 오지 않았다는 건 그들이 보스를 따를 생각이 없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멍청한 것들. 안 봐도 뻔해. 김현수 그 새끼가 입에 발린 말로 다른 녀석들을 꾀어낸 거겠지. 주제 파악도 못하고."

"진정하라니까. 네가 열낸다고 그 녀석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냐."

성구에게 술을 따라준 낙수는 이내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그리고 단번에 술잔을 비워냈다. 다시 한번 술잔을 채우려고 병을 들자 맞은 편에 있던 덩치 큰 남자가 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제가 따라드릴게요."

"그래."

낙수는 술을 따라주겠다는 남자의 말에 순순히 병을 넘겼고 남자는 정중한 자세로 낙수의 잔에 술을 채웠다. 술이 가득 채워지자 낙수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다시 그가 술병을 잡자 이번엔 동오가 술병을 잡았다.

"낙수야, 너도 진정해라."

"난 충분히 진정하고 있어."

"진정하고 있긴.. 아직 보스 오지도 않았는데 술부터 동낼 생각이야?"

무표정한 낙수의 미간에 주름이 졌지만 다시 술병을 뺏지는 않았다. 자신의 말을 납득한 듯 얌전해진 낙수를 보고 동오는 한숨을 쉬었다. 요즘 산왕의 분위기는 이런 식이었다. 전대 보스의 사망으로부터 시작된 조직의 갈등은 1년이 지났음에도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새로운 보스 이명헌을 필두로 그들을 따르는 조직원들은 대부분 5~10년 이상 산왕에 소속된 이들이었다. 이명헌과 함께 말단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온 이들은 가족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끈끈한 사이였다. 반면 김현수를 따르는 이들은 거진 산왕에 소속된 지 1년이 채 안되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대다수가 산왕의 새로운 비즈니스인 마약유통에 관련된 이들이었다.

"그 새끼가 마약 유통같은 걸 하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조직이 이렇게 되지 않았어."

성구는 낙수가 따라준 잔을 비우고 화를 삭히며 중얼거렸다. 현재 산왕의 분열은 신구조직원들의 갈등이면서 동시에 마약 유통이라는 산왕의 핵심 비즈니스와도 관련이 깊었다. 이명헌을 따르는 일파들은 마약 유통을 크게 달가워하지 않았다. 리스크가 크다는 게 이유였다. 실제로 경찰에 구속된 적도 있으니 그들의 염려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기어이.. 조직원까지 죽어나가게 만들고 말이야. 지 밑에 있던 애가 죽었는데 보스한테 보고도 없이 이런 식으로 굴고 대체 어디까지 막 나갈 셈인 거지."

화가 사그라들지 않는지 잔을 쥔 성구의 손이 작게 떨렸다. 허윤진의 사망은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미 산왕 내부에선 소식이 어느 정도 퍼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와 관련하여 김현수는 그 어떤 보고도 명헌에게 하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아예 그 새끼들 쓸어버려야 해. 같은 조직원이라고 마냥 봐주니까 아주 지들 세상인 줄 알지.."

"낙수야,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보스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들어봐야..."

"그럴 필요 없어뿅."

순간, 문이 열리고 명헌과 현철이 안으로 들어섰다. 명헌의 등장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명헌은 괜찮다며 손짓했다. 아무도 앉지 않은 빈 상들을 지나쳐 그는 가장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동행한 현철은 비어있던 명헌의 왼쪽 자리에 앉았다. 방에는 순식간에 무거운 공기가 들어찬 것마냥 고요해졌다.

"...낙수 말대로 계속 봐주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내가 마음에 안 들어 불복종하는 거까지야 눈감아줄 수 있다쳐도.. 같은 조직원까지 죽이는 건 용납못해뿅."

"보스.. 보스께선 허윤진의 죽음이.. 김현수 일당 짓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명헌의 말에 동오가 조심스레 물었다. 명헌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대신 잔을 들었다. 현철이 술병을 들어 잔에 술을 한가득 붓자 명헌은 그대로 단번에 술을 들이켰다. 탁 하고 술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방에 울러퍼졌다.

"그런 식으로 죽인 거면 그 녀석들 뿐이지."

"그런 식....."

명헌의 말을 곱씹던 동오의 얼굴에 점점 놀라움이 퍼졌다. 비단 동오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 명헌의 말을 이해한 얼굴이었다. 

"...보스, 허윤진의 시신을 확인하신겁니까?"

"맞아, 나랑 현철이가 최초 발견자야뿅. 물론 신고는 안했지만."

어느 새 다시 채워진 술잔을 비우며 명헌은 얼떨떨해하는 조직원들을 쳐다봤다. 여전히 그는 어떤 생각도, 표정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조직원을 희생시키고 그에 대한 이유 역시 밝히지 않는다면 나는 그 녀석들을 더 이상 우리와 같은 조직원으로서 인정할 수 없다. 이 시간부로 이 자리에 없는 김현수와 그 일당들 거기에 동조하는 모든 조직원들을 산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반대하는 사람 있나?"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그의 말에 반대할 이 같은 건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좋아, 그리고... 아무 이유도 없이 우리의 조직원을 죽인 죄를 김현수에게 묻겠다. ...살려서 내 앞에 끌고 와. 대화만 가능하다면 어떤 상태든 상관없어. 그외에 방해하는 녀석들은 알아서들 처리하고"

"알겠습니다. 보스"
"얘기는 여기까지... 다들 그렇게 딱딱하게 앉아있지 말고 편히 먹어라뿅. 음식 남기면 벌 받는다뿅."

다시 장난스러운 말투로 돌아온 명헌은 상에 놓인 전을 집어먹으며 말했다.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풀리긴 했지만 여전히 무거운 공기가 그들 사이에 존재했다. 이제 산왕의 내부 분열은 더 이상 내부 분열이 아니었다. 그들의 말로 표현하자면 이건 이제 항쟁이었다. 어느 하나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끝나지 않는 전쟁의 시작이었다. 


***


"실례합니다."

허윤진 살해사건이 터지고 일주일 뒤, 준호는 서류봉투를 들고 강력 2팀을 방문했다. 그들이 가장 기다렸을 허윤진의 부검 결과가 드디어 나온 것이다. 오랜만에 방문한 강력 2팀의 분위기는 분주했다. 팀장인 치수는 부재 중이었고 태섭은 어딘가에 전화를 하고 있었다. 태웅은 태섭에게 할 말이 있는지 그의 통화가 끝나길 옆에 서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다들 바쁘네 라고 생각하는 준호를 반긴 건 서류와 씨름 중이던 백호였다. 준호를 발견한 백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강형사님"

"안녕하세요. 검시관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서류를 보고 있을 때와 다르게 표정이 밝아진 그를 보며 준호는 조용히 웃었다. 서류와 씨름하는 건 그에게 안 맞는 일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준호는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제 앞에 내밀어진 서류봉투를 받고 백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뭔가 생각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검시결과 나왔나요?"

"네, 오늘 아침에 나왔어요. 치수.. 채팀장님께 전달해드리러 왔어요."

"팀장님은 잠깐 자리 비우셨는데 곧 오실 겁니다."

손에 들린 봉투와 준호의 얼굴을 번갈아보는 백호의 표정이 바뀌었다. 아직도 통화 중인 태섭의 눈치를 보는지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가 무엇때문에 그러는지 눈치챈 준호는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먼저 보시겠어요? 허윤진의 부검보고서에요."

"아, 네! 그럼 제가 먼저..."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억지로 참으며 백호는 준호가 건넨 서류를 확인했다. 서류를 확인하는 그의 표정은 조금 전과 다르게 진지했다. 통화를 마친 태섭도 이 쪽의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태웅의 보고를 받고는 준호에게 다가왔다. 서류를 쭉 읽던 백호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질린다는 듯 인상을 잔뜩 쓰더니 옆으로 다가온 태섭과 태웅에게도 보고서를 보여줬다.

"진짜 끔찍하네."

백호가 처음 뱉은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허윤진의 상태는 끔찍했다. 고문의 흔적이 있긴 했지만 그건 별로 놀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뒤에 적힌 코카인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마약이 치사량 이상으로 검출되었다는 결과는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살인사건 제법 보긴 했는데 이런 건 또 처음이네."

"저도 이렇게 한 시체에서 마약이 다종으로 검출되는 건 처음 봤어요.

"..고문했다는 건 뭔가를 알아내려고 했다는 거 같은데.. 그 후에 굳이 이런 식으로 죽인 게 이상하네요."

태섭의 옆에서 조용히 부검보고서를 훑던 태웅이 입을 열었다. 

"고문 후에 죽이는 게 목적이었으면 굳이...마약을 썼을까요?"

"그러게. 그냥 칼로 찌르거나 총으로 쏴버리는 쪽이 더 간단했을텐데."

"그렇다는 건 약을 써서 죽이는 행위에 의미가 있다는 거겠지. 피해자는 마약 유통책이었어. 본인이 다루던 마약때문에 죽는다 라는 걸 강조하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아니면 한...크흠, 이 형사 말대로 산왕 내부분열을 암시하는 걸 수도 있고."

머리를 맞대고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세 사람의 대화를 준호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 때, 끼익 하는 문소리와 함께 치수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여기서 뭐하나"

"팀장님, 검시관님이 부검 보고서를 가져오셨습니다."

태섭은 들고 있던 부검 보고서를 치수에게 건넸다. 보고서라는 말에 심각해진 얼굴로 서류를 받은 치수에게 준호가 가까이 다가왔다.

"채 팀장님,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치수는 준호의 표정을 힐끗 보더니 보고서를 다시 태섭에게 돌려줬다. 둘 사이의 분위기를 읽은 태섭은 별 말없이 보고서를 받아 치수의 자리에 뒀다.

"밖에서 얘기하시죠."

치수의 말에 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 서서 가는 그를 따라 사무실을 나왔다. 두 사람은 건물 뒷편에 마련된 흡연구역 자리로 옮겼다. 둘이서 사담을 나눌 때면 건물 옥상으로 가곤 했지만 준호가 다친 이후로는 이 곳이 두 사람의 밀담 장소가 되었다. 

"부검보고서는 꼭 네가 전해줄 필요는 없을텐데.. 나한테 할 말 있어서 온 거냐?"

치수의 말에 준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얼추 짐작이 됐다. 치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함께 꺼낸 라이터로 불을 붙여 깊게 빨아들인 후 허공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푸른 하늘에 회색빛 연기가 먼지처럼 흩어졌다.

"...대만이에 관한 거냐?"

"응, ..지금껏 부검하면서 이만큼 다양한 마약을 그것도 치사량으로 주입당한 건 나도 처음 봤어. 이런 식의 살해방법은 개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약을 이만큼 구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테니까."

".."

"그리고 이런 마약문제로 경찰에서 예의주시하고 있는 게... 산왕이잖아. 나도 그 정도는 알아. 피해자가 산왕 쪽 조직원이었다는 것도 이형사를 통해서 들었고 조금 전 사무실에서도 산왕의 이름이 나왔어."

준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산왕의 이름은 그 역시 자주 들어서 알고 있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조직 폭력배. 이미 한 번 구속되었지만 로비활동으로 검경을 모두 엿먹이며 도망간 그들은 위험한 존재였다. 그런 산왕이 엮여 있는 사건이었다.

"혹시 이 사건....정형사님도 관련이 있는 거야?"

그렇기에 사건 현장 앞에서 마주친 대만이 걱정스러웠다. 혹시 어떤 식으로도 사건에 연관되어 있는 거라면 무슨 일이 그에게 닥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탐정이라 할지라도 그는 일반인이었다. 혹시라도 산왕과 연관되어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거라면... 준호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준호를 가만히 바라보던 치수는 담배연기를 한숨처럼 뱉어냈다. 친구의 걱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2년 전 사건 대만이 경찰을 떠난 이후로 준호는 대만의 근항에 대해 묻지 않았다. 묻지 못했다에 가까웠다고 치수는 생각했다. 경찰을 천직으로 여기던 대만을 그렇게 만든 건 자신이라고 준호는 스스로를 탓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대만의 이름을 담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잘못한 건 아무도 없는데 바보같긴.. 치수는 몇번인가 떠올렸던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모르겠다."

"..."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지난 번에 그 녀석에게 물었을 때는 '상관없다'라고 말했다는 것 뿐이야. 그것이 진실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빈말따윈 하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감상을 전하면서 치수는 말끝을 흐렸다. 그 녀석이 정말로 상관없는지는 나도 몰라. 그 녀석 성격 상 거짓말을 하는 걸수도 있고. 

"정대만이 다치는 일 같은 건 절대 만들지 않을 거다. 경찰로서.. 일반인이 사건에 휘말리는 걸 보고만 있을 생각은 없어."

"치수야.. 고마워."

"뭐가 고맙냐. 난 내가 할 일을 하겠다고 한 것 뿐이야."

치수의 말에 준호는 조용히 웃었다. 자신이 할 일을 하겠다고 한 것뿐이라 했지만 그 말에는 자신과 대만을 향한 배려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준호의 가슴에 싹트기 시작한 불안감이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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