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웅준호] 에이스와 부주장의 육아사정 6
-태웅이랑 준호가 육아(?)하고 썸도 타는 이야기-
이를 갈고 준비한 결승리그 2차전, 무림전은 북산의 승리였다. 이것으로 1승 1패. 전국대회 진출에 한발짝 다가선 북산이었다. 무림전에 이어서 해남과 능남의 경기가 이어졌다. 중간에 먼저 자리를 떠난 부원들과 달리 준호와 치수는 관객석에서 경기를 끝까지 관람할 예정이었다. 안선생님이 쓰러지셨다는 연락이 없었다면 말이다.
"대처가 빨라서 다행이야. 백호가 잘해줬네."
"그 녀석이 그랬다니 믿기지는 않지만 말이다."
다행히 안선생님의 생명에 지장이 없었다. 쓰러지고 바로 병원으로 이송된 덕분에 대처가 빨랐던 게 다행이었다고 안선생님의 부인은 말했다. 백호군에게 감사해야겠어요. 라는 말에 준호 역시 저도요. 라고 대답할 뻔했다.
'안선생님이 무사하셔서 다행이지만..'
준호는 치수와 같이 병원을 빠져나오며 안선생님이 있는 병실 쪽을 쳐다봤다. 병원에 온 후배들의 말에 따르면 해남과 능남의 경기는 해남의 승리로 끝났다고 했다. 이로써 해남은 2연승으로 우승이 확실시 되는 상황이고 능남은 북산과 같은 1승 1패가 되었다. 능남 역시 북산을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것저것 따질 것없이 이기는 팀이 준우승으로 전국대회에 나간다. 치수는 알기 쉽다면서 의지를 불태웠고 준호 역시 그의 말에 긍정했지만 한편으론 걱정도 됐다. 감독이 없는 상황에서의 시합 같은 건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었다. 건강을 이유로 농구부 연습에는 잘 나오지 않았던 안선생님이지만 정식경기에는 항상 참여했었다. 감독의 자리가 선수들에게 그리고 시합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본인이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안 선생님이 안 계신 상태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결승리그...내가 할 수 있는 건...'
준호는 뭔가 다짐한 듯 표정을 짓더니 병원으로 온 후배들과 치수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냈다. 내일을 대비한 컨디션 관리가 중요하다고 잔소리를 하며 그들을 보내놓고 정작 본인은 집이 아닌 체육관으로 향했다. 식스맨인 준호의 투입은 항상 감독인 안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행해졌다. 그렇지만 내일은 다르다. 내일은 준호 본인이 직접 판단해 자신의 투입을 고려해야 한다. 어떤 상황이 그에게 닥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대처할 수 있게 자신이 준비되어 있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학교 정문을 지나 체육관에 가까워졌을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준호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경기 관람 중에 먼저 돌아갔던 태웅이 자전거에 오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웅아 너 여기, 있었어?"
"네, 연습하고 있었어요."
"역시 우리의 에이스. 기특하네."
준호는 숨을 고르면서도 후배에 대한 칭찬을 잊지 않고 건넸다. 자전거에서 내린 태웅은 준호의 앞으로 다가왔다. 준호는 제 앞으로 다가온 후배의 등을 토닥여주곤 그의 등 뒤로 보이는 체육관을 쳐다봤다.
"체육관에 누구 있어??"
"아뇨, 지금은 아무도 없어요."
태웅은 준호를 따라 체육관을 쳐다보며 말했다. 30분 전까지만 해도 태웅은 대만, 태섭 그리고 백호와 함께 체육관에서 내일을 대비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연습이라고 해도 대부분은 백호의 훈련을 돕는 일이었다. 옆에서 잔소리해주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태웅은 백호가 슛을 하나 쏠 때마다 옆에서 자세를 지적해줬다. 그때마다 태웅을 잡아먹을 듯이 보는 백호였지만 지적이 틀린 건 아니었기에 궁시렁거리면서도 그의 말을 따랐다. 목표량을 채운 백호는 다시 슛 연습을 하려 했지만 무리하면 안된다는 대만이 말에 연습을 마무리 지었다.
"백호도 기특하네. 근데 태웅이 넌 왜 같이 안 가고 지금 가? 너도 무리하면 안돼."
"멍청이 연습 봐주느라 제 연습은 많이 못 해서요. ...무리는 안했어요."
"그래? 그럼 다행이네. 백호 연습 봐주느라 고생했어."
들어가서 푹 쉬고 내일 보자. 자신의 등을 두어번 토닥여주고 체육관으로 가는 준호의 뒷모습을 태웅은 눈으로 쫓았다. 준호가 건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태웅은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준호의 연습을 돕고 싶긴 했지만 여기선 준호의 말을 듣기로 했다. 내일 경기는 절대로 질 수 없었다. 전국대회를 위한 마지막 경기에 반드시 이겨야 할 존재가 소속된 상대팀 그리고 준호의 은퇴가 걸린 이 경기를 태웅은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았다. 태웅은 정문 앞에서 체육관 쪽을 한 번 더 쳐다보곤 페달을 밟았다.
***
다음 날 아침, 인터하이 마지막 결승리그가 열리는 경기장 앞은 아침인데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차에서 내린 세준은 주차장에서도 보이는 인파에 감탄하다가 차에서 내리는 엄마의 곁으로 다가왔다.
"엄마엄마, 저기 봐봐. 사람들 엄청 많아!"
"그러게. 마지막 경기라 그런지 보러 온 사람이 많네."
세준의 엄마, 태희는 아들의 말에 경기장 입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태웅이 경기 보는 게 얼마만이더라.. 중학교 전국대회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네. 그 때도 이렇게 사람들이 많았었지. 태희는 경기장 쪽을 바라보다가 몸을 숙여 시선을 맞췄다.
"세준아, 여기 사람들 많으니까 길 잃어버리지 않게 엄마 손 꼭 잡고 있어야돼. 알았지?"
"응!"
세준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엄마의 손을 잡았고 태희도 그 손을 마주잡고 몸을 일으켰다. 주차장을 빠져나와서 경기장 입구 쪽으로 가니 단순히 경기를 보러 온 사람들 말고 각 학교를 응원하러 온 학생들도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태웅의 이름이 크게 박힌 깃발을 들고 있는 여학생들이었다. 세준은 엄마의 손을 잡아당기며 깃발을 든 여학생들 쪽을 가르켰다.
"엄마! 저거 봐봐. 삼촌 이름 적혀 있어!"
"응? 아.....풉, 그러네. 삼촌 팬들인가봐. 삼촌은 인기스타네~"
태희는 웃음이 나려는 걸 꾹 참으며 말했다. 태웅의 인기가 좋은 건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저런 깃발을 들고 응원하러 와주는 팬들이 있는 줄은 몰랐다. 엄마한테도 말해줘야지. 좋은 놀림감이 생겼다고 여기면서 태희는 세준과 함께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객석에 앉은 세준은 코트에서 몸을 풀고 있는 선수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삼촌이 없어! 하고 제 엄마를 돌아보자 태희는 세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 하는 경기는 삼촌네가 하는 경기가 아니야."
"에~ 그럼 언제 해?"
"이거 다음에 바로 이어서 할거야. 저기 해남이라고 적힌 유니폼 보이지? 저 학교가 제일 농구를 잘하는 학교래."
태희는 몸을 풀고 있는 학생들 중 흰색 해남 유니폼을 입은 이들을 가르키며 말했다. 태희는 농구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어깨 너머로 주워들은 건 많았다. 남매의 어머니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고교농구계에 대해 박식해졌다. 그런 엄마와 대화를 나누다보니 태희도 자연스레 이런 쪽으로 지식이 늘게 되었다. 해남이 현 내 최강이라던가 오늘 북산과 경기하는 능남에 다른 지역에서 스카웃해 온 뛰어난 선수가 있다던가 그리고 오늘 북산의 감독이 없다는 것도.
'아침에 나올 때부터 말 걸기 어려울 정도였다지..'
태희는 경기장으로 출발하기 전 엄마와 나눈 통화에서 태웅의 분위기가 어제랑 달랐다는 얘기를 떠올렸다.
'감독님이 안 계셔서 그런지 애가 기합이 잔뜩 들어있더라. 경기하는 데 괜찮을지 모르겠네..'
'에이~ 엄마도 참. 태웅이가 어린애도 아닌데 뭘 그렇게 걱정해. 괜찮을 거야. 엄마 아들 슈퍼루키인 거 벌써 잊었어?'
'그렇긴 하지만.. 오늘은 그거잖니. 결승리그 마지막 경기.. 여기서 지면 전국에 못 나가니까 걱정이 돼서 그렇지. 이겨야 한다고 괜히 또 무리하는 건 아닌지...'
한숨을 쉬는 엄마에겐 괜찮을 거라 얘기하긴 했지만 태희 역시 걱정이 되긴 했다. 1차전에서 페이스 조절에 실패해 후반전에 체력이 부족했다는 얘긴 태희도 엄마에게 알고 있었다. 이번엔 그런 일이 없어야 하는데.. 태웅이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애는 아니지만.
"아냐! 삼촌네 학교가 최고야!"
세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세준에게 있어서 농구를 제일 잘하는 건 태웅이니까 그런 태웅이 있는 북산이 최고인 게 당연했다.
"삼촌네도 저기 있는 학교한테 졌는 걸."
"끄응.... 그래도 삼촌네가 최고야 제일 쎄!"
태희가 알려준 진실에도 세준은 볼을 부풀리며 삼촌이 제일 쎄다고 소리쳤다. 아이의 목소리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쳐다보자 태희는 죄송하다며 사과를 했다. 하지만 세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삼촌네가 제일 잘한다며 투정을 부렸다.
"북산이랑 태웅 삼촌이 최고야!!"
"그래그래, 알았어~ 삼촌 경기는 이따가 하니까 좀만 기다리자."
뾰루퉁해진 세준을 달래고 있자니 해남과 무림의 경기가 시잗되었다.해남의 경기력은 일반인인 태희가 봐도 알 정도로 훌륭했다. 상대팀인 무림에겐 미안한 말이었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경기가 진행될 수록 분위기는 해남 쪽으로 기울었고 경기 마지막 해남 10번의 덩크 슛과 함께 해남은 17년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환호성이 들렸고 태희는 정말 강하네..라고 중얼거렸다. 북산이 진 것도 이해가 가네 라고 생각하며 세준을 쳐다보자 세준은 그래도 삼촌네가 더 쎄...라면서 중얼거렸다. 아까와 달리 기가 죽은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북산이 강하다고 말하는 세준을 보며 태희는 웃었다. 누굴 닮아 고집쟁이인지 모르겠네.
"계속해서 제 2경기 북산고등학교와 능남고등학교의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2경기를 알리는 방송 소리와 함께 코트 위로 각 팀 선수들이 올라왔다. 태웅의 모습을 보고 세준은 크게 삼촌! 하고 그를 불렀지만 태웅은 듣지 못한 건지 반응이 없었다. 뒤이어 나온 준호를 보고 이번에도 세준은 크게 이름을 불렀지만 역시나 답이 없었다.
"힝...삼촌도 선배도 아는 척 안해줘..."
"지금은 경기 준비하는 것 때문에 바빠서 못 듣는 거니까 이따가 다시 큰 소리로 불러보자. 그럼 삼촌도 들을거야."
울상이 된 세준을 토닥이며 태희는 동생의 얼굴을 바라봤다. 멀리서 보이는 거라 제대로 표정을 읽을 순 없었지만 엄마가 말해준대로 상당히 기합이 들어간 모습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비단 태웅 뿐만 아니라 북산 농구부원들 모두 그랬다. 능남의 선수들 역시 비슷했지만 감독 부재라는 예상치 못한 핸디캡이 발생한 북산의 분위기가 그들보다 한층 더 비장했다. 태희는 부원들을 쭉 훑다가 세준이 말한 준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북산에는 안경 쓴 부원이 둘 있었지만 세준이 하도 준호선배, 준호선배하며 노래를 부른 탓에 어느 쪽이 준호인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쟤가 준호구나... 세준이가 왜 따르는지 알겠네.'
태희는 준호를 보면서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자신의 남편을 떠올렸다. 멀리서 본 준호의 인상은 어딘가 남편을 닮아 있었다. 태희의 남편은 준호처럼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지만 온화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냉한 표정이 집안 내력인 태희와는 정반대의 인상이었고 태희는 그 점을 좋아했다. 세준이 준호를 따르는 건 자신에게 잘 해주는 게 좋아서도 있겠지만 아빠와 비슷한 인상도 한 몫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이런 것도 유전이 되는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벤치 쪽에서 시선을 돌렸다.. 태희의 생각대로 북산의 분위기는 평소보다 무거웠다. 특히나 태웅은 같은 부원들이 말을 걸기 어려울 정도였다. 오늘 아침부터 태웅의 머릿속에 다른 건 들어있지 않았다. 반드시 이긴다. 그것만이 태웅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코트 정비의 시간이 끝나고 각 팀의 주전 선수들이 코트 위로 올랐다. 북산 주전들의 이름이 하나씩 불릴 때마다 객석에서는 뜨거운 호응이 이어졌다. 태웅의 이름이 호명될 때는 여학생들의 열렬한 환호성이 태희와 세준이 움찔할 정도였다. 무서워...하고 중얼거리며 세준은 제 엄마의 팔을 붙잡았다. 북산 5인의 이름이 다 호명되자 능남 선수들의 이름이 하나씩 호명되었다.
"에..준호 선배는 안 나오네."
세준은 스타팅 멤버로 나오지 않고 벤치에 앉아있는 준호를 보고 아쉬워했다. 이윽고 경기가 시작되자 아쉬움은 잠시 미뤄두고 세준은 경기에 집중했다. 경기 전반의 흐름은 북산보단 능남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감독이 없는 탓인지 초반 북산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주장인 치수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게 객석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아이인 세준의 눈에도 치수의 움직임은 이상해보였는지 태희를 향해 저 형아 이상해 라고 했다. 이상한 것은 또 하나 있었다. 바로 태웅의 활약이 잠잠하다는 것이었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 태웅은 공격에 적극적으로 나오질 않았다.
"삼촌이 이상해..."
좀처럼 태웅의 득점소식이 들려오질 않자 세준은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엄마에게 기댔다. 태희는 세준의 등을 토닥이며 코트 위에 있는 동생을 쳐다봤다. 태희가 보기에도 태웅의 움직임은 조금 의외긴 했다. 본래 태웅이라면 이런 상황에 더 득점을 하기 위해 나섰을텐데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했다.
'무슨 생각인 걸까..'
알 수 없는 태웅의 플레이는 전반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중간에 작전타임을 한번 가졌던 북산은 벤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주춤거렸던 치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장인 그가 살아나자 북산의 분위기도 단번에 살아났다. 그렇게 좋은 분위기를 탔지만 전반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고 백호가 이마에 부상을 당해 교체당했다.
"으아.....빨간 머리 형아 피나.."
피를 흘리는 백호를 보고 세준은 자기가 다치기라도 한 것마냥 울상이 돼서 엄마에게 안겼다. 하지만 북산은 동요하지 않고 득점을 이어나갔고 전반 종료 스코어는 6점차로 따라붙었다. 후반에는 삼촌이 골 많이 넣으면 좋겠다! 태희가 챙겨온 바나나 우유를 빨대로 홀짝이며 세준은 다시 코트 위로 올라온 부원들을 바라봤다. 세준의 바람이 통하기라도 한 건지 태웅은 잠잠했던 전반과 달리 후반에 들어와선 공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래서 조용했던 거구나. 동생의 의도를 이해한 태희는 조용히 웃었다. 완급조절도 할 줄 알게 된 동생의 성장이 퍽이나 기뻤다. 하지만 능남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북산이 흐름을 완전히 가져오는 걸 막으면서 조금씩 자신들의 기세를 높여가고 있었다. 1경기가 해남의 압도적 승부를 끝났다면 2경기는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접전이 이어졌다. 그리고 북산의 14번, 대만이 탈진으로 벤치로 들어가자 준호가 교체되어 올라왔다.
"준호 선배 또 올라왔다! 선배! 힘내라~!"
준호가 다시 들어오자 세준은 이번에 태웅이 아닌 준호의 이름을 부르며 응원했다. 하지만 그게 무색하게 능남의 득점이 이어졌고 스코어는 65 대 64. 1점차로 좁혀졌다. 역전을 노리는 능남의 공격을 막아낸 건 백호였다. 윤대협에 이어 변덕규까지 막아낸 백호의 움직임은 풋내기였지만 위협적이었다. 후반을 1분 남긴 시점, 공은 백호의 손에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대다수가 같은 생각을 했다. 그가 북산의 에이스인 11번에게 공을 보낼 거라고. 능남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태웅에게 수비가 붙었지만 백호의 패스는 다른 이에게 향했다.
"준호야, 프리다 쏴라!"
공은 준호에게로 향했고 준호는 치수의 외침과 거의 동시에 림을 향해 슛을 던졌다. 준호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태웅에겐 준호의 슛이 마치 슬로우모션이 걸린 것처럼 보였다. 공을 던지는 손끝부터 점프를 한 발 끝까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자세를 한 준호만이 시야에 가득했다. 마치 이 코트 위에 준호 혼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바로 다음 공격을 대비해야 한다는 걸 머리는 알고 있었지만 태웅의 시선은 여전히 준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물을 통과한 공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서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부원들에게 둘러싸여 칭찬받는 준호를 보고 태웅은 아주 조금이지만 백호에게 고마웠다. 그 멍청이가 뭔가 생각하고 패스를 한 건 아니겠지만 능남에게 한 방 먹여주고 준호의 깔끔한 슛을 볼 수 있었으니까. 준호의 옆에서 잘했다며 등을 팡팡 치던 백호는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을 느끼고 태웅을 쳐다봤다. 뭐야? 라고 백호는 물었지만 태웅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으르렁 거리는 백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태웅은 신경쓰지 않았다. 능남의 작전타임이 선언되고 치수는 부원들을 진정시키며 방심하지 말라 말했다. 1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역전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작전타임이 끝나자마자 능남의 득점이 터졌다. 점수차를 4점에서 2점으로 좁히며 역전을 노리는 능남이었지만 경기는 백호의 슛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70 대 66. 북산의 승리였고 2승 1패로 전국대회 진출권을 확정짓는 순간이었다. 3학년이 입학한 이래에 첫 전국대회 진출이었고 준호와 치수가 오래 전부터 바래왔던 전국제패라는 꿈이 드디어 꿈이 아니게 되었다. 준호는 벅차오르는 마음을 꾹 누르며 부원들을 챙겼다. 마지막 슛을 성공시킨 백호는 준호를 보며 씨익 웃었다.
"안경 선배, 은퇴는 연기된 거죠? 이 천재 덕분에."
순간 억눌렀던 마음이 울컥하고 솟아올랐다. 조금 더 농구를 할 수 있다. 조금 더 이 멤버들과 전국을 향해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고 좋아서. 하지만 후배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 없었다. 우는 건 주장 하나로 충분하니까. 준호는 안경을 고쳐쓰면서 한 번 더 제 마음을 추스렀다.
"날 울리지 마. 문제아 주제에."
"하하핫, 고릴라도 우는데 안경선배도 울면 좀 어때요? 고릴라가 우는 것보다야 안경선배가 우는 게 훨씬 보기 좋을텐데."
백호의 말에 준호는 울음 대신 웃음을 터뜨렸다. 한바탕 크게 웃으며 준호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태웅은 그런 둘의 모습을 뒤에서 가만히 지켜봤다. 은퇴 연기돼서 다행이에요. 라고 자신이 먼저 말하고 싶었는데 선수를 뺏긴 것이 조금 못마땅했다.
"태웅아, 수고했어."
하지만 준호와 좀 더 함께 농구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기뻤다. 팀이 이겼다는 사실보다 그 사실이 더 좋았다.
"준호 선배."
정렬을 위해 부원들을 모으는 준호를 바라보며 태웅은 수고했다며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준호의 이름을 불렀다.
"은퇴 연기돼서..다행이에요."
"그러게. 다 너희 덕분이야. 정말 고맙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선배도.."
열심히 하셨잖아요. 태웅의 말에 준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열심히 했다라는 말을 후배에게, 그것도 태웅에게 들을 줄은 몰랐다. 애들이 오늘 날 울리려고 작정했나.. 준호는 아까처럼 안경을 밀어올리며 웃었다.
"..그래, 우리 모두 다 열심히 한 결과야."
"네."
"앞으로도 열심히 하자. 믿고 있어. 넌 우리의 에이스니까."
준호는 태웅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여느 때와 다를 거 없는 손길이 오늘따라 유독 다정하게 또 뜨겁게 느껴졌다. 며칠 전 준호와 얘길 나눴던 그 날처럼 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건 분명 운동을 하고 난 후에 느끼는 두근거림과는 달랐다. 이건....
"삼촌!!!"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드니 관중석에서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는 세준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서야 태웅은 세준이 경기를 보러 오겠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완전히 까먹고 있었어..
"세준이가 왔네."
"네.. 오늘 경기 보러 온다고 했거든요."
"그래? 이기는 모습을 보여줘서 다행이다. 옆에 계신 분은 누나시고?"
"네"
객석에 있는 세준을 발견한 준호는 손을 흔들며 물었다. 사실 굳이 묻지 않아도 태웅과 닮은 그녀가 누구인지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미남미녀 남매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준호는 태희를 향해 목례를 냈고 태희는 그런 준호의 인사에 화답하는 듯 똑같이 목례를 했다. 태웅에 이어 준호까지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해주자 세준은 좋아서 폴짝폴짝 뛰었다. 태희는 그런 세준을 진정시키며 다시 자리에 앉게 했다.
"엄마! 나 삼촌한테 갈래! 축하해줄거야!"
"그래, 집에 가서 축하해주자."
"시러! 지금할래! 준호 선배한테도 축하한다고 해줄거야~!"
"지금?"
세준의 말에 태희가 난처해하고 있을 떄쯤, 경기장에 안내방송이 울렸다.
[이어서 시상식이 진행될 예정이오니 선수들은 정리 후 다시 경기장으로 집합해주시기 바랍니다.]
"시상식이라..바로 이어서 하는 구나. 음.. 세준아, 삼촌 축하해주고 싶어?"
"응!"
"근데 집에 가서 축하해주는 건 싫고?"
"응! 나 빨리 축하해주고 싶어!"
단호한 아들의 말에 못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태희는 세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시상식 끝날때까지 기다렸다가 삼촌 만나러 갈까?"
"응! 선배도 만날래!!"
"그래, 준호 선배도 만나자. 엄마도 준호선배랑 인사하고 싶어졌어."
***
경기가 끝나고 잠시 정리 시간이 있은 후에 이어서 시상식이 시작됐다. 북산은 준우승으로 당당하게 단상 위에 섰다. 준호가 입학하고 난 이래에 처음으로 북산은 전국대회에 진출했다. 거기에 베스트 멤버로 치수와 태웅이 선정되는 겹경사가 이어졌다.
"왜 여우 녀석이 베스트 멤버고 이 천재는 없는 건데?!"
"...네가 있을 리가 없잖아. 멍청이."
"뭐라고?"
상장을 받고 단상에서 내려오는 태웅을 보며 백호가 씩씩거리는 바람에 또 다툼이 벌어질 뻔했지만 좋은 날에 싸우지 말라며 말리는 준호의 중재에 둘 다 조용히 물러났다. 시상식이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온 부원들은 분주하게 짐을 챙겼다. 특히나 대만이가 어서 선생님께 이 소식을 전해드려야 한다며 서둘렀다. 태웅은 짐을 챙기다가 객석에서 본 세준의 얼굴을 떠올렸다. 집에 가면 볼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경기장을 떠나기 전에 와줘서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하고 싶었다. 태웅은 치수에게 가족이 와서 잠깐 보고 오겠다고 양해를 구한 후 가방을 어깨에 멨다. 그대로 나가려다가 문득 준호와 함께 가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준이가 계속 선배를 찾았으니까.....
"준호 선배"
"응?"
"세준이한테 인사하러 갈건데.. 같이 가실래요?"
태웅은 짐을 챙기고 있던 준호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세준이도 선배 보면 좋아할 것 같아서요. 라고 덧붙이며 눈치를 살피는 태웅을 보며 준호는 가방을 어깨에 맸다. 그럴까? 긍정적인 대답과 함께 돌아온 미소에 태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는 치수에게 잠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고 태웅과 함께 대기실 밖을 나갔다. 대기실 밖 복도를 따라 걸으니 이쪽으로 걸어오는 세준과 누나 태희의 모습이 보였다. 세준은 태웅을 발견하자 꼭 잡고 있던 엄마 손을 놓고 태웅에게 달려가 그의 다리를 꼭 끌어안았다.
"삼촌 축하해!!"
"응, 고마워."
"축하해, 태웅아. 음.. 꽃다발이라도 준비했어야 했나?"
"됐어. 바로 집에 가는 것도 아닌데."
꽃다발 애기에 고개를 젓는 태웅을 보고 태희는 웃었다. 가족에게 축하받는 걸 어색해하는 동생은 언제봐도 즐거운 일이었다. 태희는 시선을 돌려 동생의 옆에 서 있는 준호를 바라봤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풍기는 분위기가 남편과 닮은 게 맞다고 생각했다.
"반가워요. 그쪽이 준호 선배 맞죠?"
"아, 네. 안녕하세요. 권준호라고 합니다. 태웅이 농구부 선배에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세준이가 준호 선배, 준호 선배 하고 노래를 불렀거든요."
그치? 하고 세준을 보며 묻자 세준은 응! 하면서 태웅에게서 멀어지더니 이번엔 준호의 다리를 꼭 끌어안았다. 헤헤 하고 웃는 세준과 눈이 마주치자 준호는 눈웃음을 짓곤 아이를 번쩍 안아올렸다. 힘들텐데 내려놓아도 된다는 태희 말에도 준호는 괜찮다며 웃었다.
"삼촌 응원하러 온거야?"
"응! 선배도 응원하러 와써!"
"정말? 고마워. 세준이 덕분에 이겼네."
"어머.. 누가 보면 형제인 줄 알겠네."
너도 보고 배워야겠다. 태희가 장난스레 말하며 자신을 쳐다보자 태웅은 대답 대신 시선을 피했다.
"전국대회 진출 축하해요. 감독님께 보고 하러 가야겠네요. 병원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네, 어제 갑자기 쓰러지셔서.. 병원에서 괜찮다고 하니까 별일 없을 거에요."
"다행이네요. 전국대회 진출에 부원 중 2명이 베스트 멤버.. 이것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겠네요. 조금 우쭐해도 되겠네?"
"...우쭐 안해."
또 다시 장난스레 말을 걸어오는 누나를 보고 태웅은 뾰루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역시 가족 앞에선 태웅이도 표정이 자연스레 나오는 구나.. 귀여워.. 준호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며 그를 바라봤다.
"선배~ 우리 또 농구해요! 이번엔 삼촌 이길거야!"
"그래? 세준이 농구 연습했어?"
"응! 아빠랑 둘이서 엄청 열심히 연습했어."
자랑하듯이 연습했다 말하는 세준을 보고 태웅은 누나를 쳐다봤다. 동생의 시선이 무슨 의미인지 눈치챈 그녀는 네 매형이 고생했지 라며 웃었고 준호는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세준이 아빠는 농구할 줄 모르거든요. 운동신경도 별로 안 좋아서.."
"연습하다가 아빠가 다쳐서 엄마가 약발라줬어요! 아.. 이건 아빠가 말하지 말랬는데.."
세준은 황급히 제 입을 막으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리곤 준호에게 다른 사람한테는 비밀이에요 라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모습에 준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한테도 안 말할게~ 여기 있는 사람들만 아는 걸로 하자."
준호의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세준은 고개를 끄덕이곤 준호의 목을 끌어안았다.
"너희 선배 혹시 동생 있어?"
"모르겠는데.. 아마..없을껄?"
"그래, 애 보는 게 나보다 나은 것 같은데? 세준이가 왜 그렇게 노래를 불렀는지 알겠어."
"..선배는 다정한 사람이니까.."
태웅은 세준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준호를 보며 중얼거렸고 태희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동생을 쳐다봤다. 태웅은 운동부 특유의 기강이 잘 잡혀 있는 편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선배에 대해 함부로 평가를 하는 일이 없었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가족끼리 대화할 때도 선배가 어떻다 라는 식의 말은 잘 하지 않았다. 한다고 해도 농구 실력에 관한 평가가 전부였다. 주장의 덩크는 위협적이다, 복귀한 선배는 체력이 부족하지만 실력은 확실하다. 라는 식으로. 그런 태웅이가 자신보다 2살 선배에게 다정한 사람이라 평가하는 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준호를 잘 따르는 건 세준이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네.. 아니 태웅이 쪽은 조금 다른 의미일 수도...'
태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세준과 함께 있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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