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마전(伏魔殿)

[대만준호] 복마전(伏魔殿) 7

구 탐정 정대만

치수가 준호와 얘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사무실에서 얘기 중인 세 사람이 보였다. 그들은 치수의 책상에 놓인 부검 보고서를 사이에 두고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뭔가 알아낸 게 있나?"

치수가 물으며 다가오자 세 사람은 책상 뒤로 물러났다. 

"아뇨, 전혀요. 왜 번거롭게 그렇게 죽였나 싶긴 한데.. 그거 말고는 특별한 건 없어요."

뭐, 그게 제일 문제지만요. 라고 덧붙이는 태섭의 말을 들으며 치수는 보고서를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었다. 고문의 흔적으로 보이는 타박상과 불로 지진 듯한 화상자국이 몇 군데 있긴 했지만 이건 죽음에 이를 정도는 아니었다. 죽을 만큼의 고통은 있었겠지만 사인은 약물 중독이 맞았다. 다수의 마약을 이용한 살인. 태섭의 말대로 범인은 피해자를 손이 많이 가는 방법으로 죽였다. 굳이 이런 방법을 선택했다는 건 방법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거겠지. 역시 산왕측 인물인가.. 치수는 보고서를 한 쪽으로 치우며 자리에 앉았다.

"허윤진 핸드폰 조사는 어떻게 됐나?"

"아, 그거라면 여기요. 최근 일주일 사이의 통화내역이에요."

태섭은 자신의 자리로 가서 서류를 들고 왔다. 조금 전, 준호가 오기 전에 통화를 하고 있던 건 이 내역때문이었다. 태섭은 서류를 치수에게 건네고 옆에 있던 태웅에게 눈짓을 했다.

"..선배님이랑 같이 확인한 내용인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일주일 사이에 통화를 제법 했지만 정작 그 수가 많지 않습니다. 보시면 반복되는 번호가 대부분입니다."

태웅의 말대로 허윤진의 일주일 통화내역은 적다고 할 수 없었다. 하루에도 10~15통 정도 통화를 했지만 스팸으로 보이는 번호를 제외하면 반복되는 번호와 통화한 게 대부분이었다. 같은 사람과 계속 통화를 했다는 흔적이었다.

"내역에서 자주 보이는 번호가 3개 정도 되는데 지금 명의랑 위치 추적을 요청한 상태입니다. 반복되는 번호들 중에 유일하게 다른 번호가 있는데 허윤진과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입니다."

"반복된 번호들은 허윤진과 같은 산왕의 조직원일 가능성이 클 거다. 하지만 이 번호는..."

통화내역 마지막에 찍힌 번호를 보며 치수는 뭔가 쎄한 기분이 들었다. 눈에 익은 번호 같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기분 탓이겠지. 수사에 사적인 감정을 섞어선 안 된다는 존경하는 선배의 말을 떠올리며 치수는 내역이 적힌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이 번호도 명의확인이랑 위치추적하고 있나?"

"네, 내일 아침이면 내역 나올 겁니다."

"음, 송형사"

"넵"

"허윤진 부검 보고서 사본 만들어서 마약 수사팀에도 공유해줘. 그 쪽이라면 마약 유통 경로에 대해서 우리보다 잘 알테니까 살해도구로 쓰인 마약이 어디서 흘러들어온 건지 파악할 수 있을 거야. 산왕일 가능성이 크지만 아닐 가능성에 대해서도 확인해둬야 돼."

치수는 부검 보고서를 태섭에게 맡겼다. 시원하게 대답한 태섭이었지만 이내 헤벌쭉해진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고 혀를 찼다. 실력이 좋은 녀석이지만 이형사만 엮이면 정신을 못 차리는 군. ...누구 후배 아니랄까봐. 보고서를 들고 자리를 떠나는 태섭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둔 치수는 자신의 지시를 기다리는 태웅을 쳐다봤다.

"..서형사"

"네"

"서형사는 핸드폰 위치추적이랑 명의 확인되는 대로 보고해. 명의는 크게 기대할 만한 게 없을 거야. 이런 놈들 태반이 대포폰을 쓰는 데다가 실제 명의자는 자기 명의만 돈 받고 팔았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덤덤하게 치수의 말을 듣고 있던 태웅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크게 기대할만 한 게 없을 거라는 말에 꽤나 실망한 눈치였다. 아닌 척하지만 이 녀석도 수사욕심이 많지. 강백호처럼 행동이 앞서는 타입이 아니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래도 위치추적을 하면 실 사용자가 어디에 있는지는 확인이 될거야. 허윤진처럼 산왕 조직원이고 그와 가깝게 지냈다면 최근 허윤진 행적이나 상태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을 거다. 피해자의 행적을 알면 범인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어. 무슨 말인지 알지?"

"..네"

태웅은 고개를 꾸벅거리리곤 제 자리로 돌아갔다. 

"고릴...아니 아니라 팀장님 저는요?저는 뭘 하면 될까요???"

태웅이 물러나자 백호가 그 자리에 달려와서 물었다. 자신에게도 뭔가 시켜줬으면 하는 티를 팍팍 내는 백호를 보고 치수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그의 머리를 서류철로 가볍게 쳤다.

"뭘 해야할지 묻기 전에 그 전에 시킨 것부터 보고하는 게 순서다. 허윤진 주변 인물 조사 어떻게 됐어?"

"아... 그거 말이죠. 조사를 하긴 했는데 솔직히 죄다 변변치 않은 녀석들 뿐이라구요."

백호는 투덜거리며 제 자리에 놓여진 서류 파일을 가져왔다. 파일 안에는 허윤진과 가깝게 지냈던 인물들의 명단이 들어있었다. 대부분 산왕 내부의 조직원이거나 그에게서 마약을 받아 개인에게 유통하는 마약소매상들이었다. 

"기대할 만한 게 전혀 없다구요. 거기에 반절은 이미 잡혀서 빵에 들어가있거나 잠적상태에요. 최근까지 연락한 사람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라니까요? 잠적하고 있다가 최근에 활동하기 시작했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음, 소매상들말고 조직원들 위주로 좀 더 조사해봐. 아무리 내부 분위기가 별로였다고 해도 같은 조직원이면 서로 연락하며 지냈을 가능성이 높아. 서형사가 핸드폰 명의랑 실 사용자 확인해줄테니까 같이 대조해보면 되겠네. 서 형사, 명의 확인되면 바로 강 형사한테 넘겨."

치수의 말에 자리로 돌아간 태웅은 백호를 쓱 한 번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는 뚱한 표정으로 태웅을 노려봤다가 치수를 쳐다봤다. 나 저 놈이랑 수사하기 싫어요. 라는 얼굴을 한 백호를 보고 치수는 아까처럼 서류파일로 그의 머리를 쳤다. 

"같은 팀끼리 사이좋게 지내라. 이런것도 일일히 가르쳐야 하나.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닐텐데?"

"...쳇...그래도 저 놈은 정이 안간다구요."

"됐으니까 가서 조사나 계속 해."

치수의 야단에 백호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백호를 보고 태웅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백호와 눈이 마주쳐 또 시비가 붙을 뻔했지만 치수의 눈빛에 둘 다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태섭은 철부지들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후배들을 바라봤다. 사무실에 조용해지자 치수는 그제서야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허윤진에 대한 수사는 속도가 빠르다고 할 순 없지만 어쨌든 순조로웠다. 마약수사팀에서도 협력하고 있으니 크게 걱정할 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문제는 대만이었다. 자리에 앉은 치수는 의자를 돌린 채 생각에 잠겼다. 준호가 염려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이제 경찰이 아니었다. 탐정이라지만 대만은 어디까지나 일반인이었다. 공권력을 동원해서 상대해도 모자랄 판에 일반인인 그가 산왕을 적대하는 거라면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사고치지 마라. 정대만.. 준호를 생각해서라도.."

착잡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치수는 낮게 읊조렸다. 다행히 그 목소리는 후배들에게 닿지 않았다.

***

다음 날, 허윤진과 통화한 핸드폰의 명의와 위치가 확인되었다. 치수의 말대로 반복되는 번호들은 허윤진과 함께 활동한 산왕의 조직원들이었다. 실제 명의는 그들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명의로 핸드폰을 이용하고 있는 건 조직원들이 맞았다. 그의 선견지명 덕분에 조직원들을 잡아들이는 건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게 바로 짬밥이라는 건가? 대단한데 고릴..이 아니라 팀장!"

치수가 말한대로 척척 진행되는 수사에 백호는 어린 아이처럼 신난 표정을 지었고 치수는 수사가 놀인 줄 아냐면서 한 마디 쏘아붙였다. 조직원들 체포에 반색인 백호와 달리 마약수사팀의 한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강형사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찬물 끼얹어서 미안하지만.. 이런 피라미들 잡은 걸로는 의미 없어요. 못해도 몸통 정도 되는 녀석을 잡아야 의미가 있는데.."

그녀의 말대로 잡혀온 조직원들은 마약유통에는 관련되어 있었지만 그래봤자 말단이라 허윤진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고 질좋은 정보를 아는 이는 없었다. 게다가 그와 통화한 이 전부가 잡혀온 것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건질만한 것은 딱 하나. 최근에 허윤진이 뭔가 큰 건수를 잡았다며 좋아했다는 것 뿐이었다.

"아, 그리고 허윤진 부검보고서에 적힌 마약들은 다 산왕에서 취급하는 것들이에요. 얘네만큼 마약을 다양하게 들여오는 조직은 없거든요."

"역시..."

"내부 싸움의 희생자인 건 확실해보이죠. 실제로도 지금 그쪽 바닥에 소문이 파다하대요. 산왕이 두 파로 갈라졌다고."

한나는 팔짱을 끼며 말을 이어갔다. 허윤진의 시신이 발견된 날부터 산왕은 외부에서 보기엔 몸을 사리는 것처럼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내부에선 두 파로 갈라진 조직원들끼리의 싸움이 매일같이 벌어졌다고 했다. 그런데 그 싸움의 양상이 달랐다. 서로를 향해 죽일듯이 굴긴 했지만 어느 한 쪽을 몰살시킨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서로 상대보다 뭔가를 먼저 찾으려고 난리래요. 싸움은 그 과정에서 따라오는 것뿐이고.)

"돈인가?"

"그거 말고 뭐가 더 있겠어요. 도진우의 사라진 비자금. 그걸 찾는 거에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허윤진이 죽었어요. ..대충 상상이 가죠?"

치수는 그녀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어렵지 않은 추론이었다. 산왕의 분열, 사라진 비자금, 죽은 조직원. 그 모든 것이 말해주는 건 하나. 

'허윤진이 비자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허윤진 명의 통장이나 금융내역에선 그런 거금이 오고 간 적은 없었어요."

"현물화해서 가지고 있겠군."

"역시, 채팀장님이에요. 척하면 척이시네요."

어떤 바보들이랑은 딴판이라니까. 가볍게 팀원들에 대한 불평을 쏟아낸 한나는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렸다.

"현물화를 한다면 뭘로 했을 것 같으세요?"

"...5만원권 현금이 아니라면 금이겠지."

치수는 그녀가 들고 있는 서류를 힐끗 쳐다봤다. 일대의 금은방 리스트들이었다. 아무래도 한나가 생각하는 건 후자인 모양이었다. 치수의 시선을 눈치챈 그녀는 싱긋 웃었다. 

"전 돈보다는 금이 더 끌리거든요. 지금부터 탐문수사 다닐거에요. 결정적인 건 안 나와도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건 나오겠죠."

"자네도 고생하는군."
"고생은 뭘요~ 이게 다 산왕을 일망타진하기 위함이니까요. 어우, 정말 지긋지긋하다니까요. 이번에 진짜 끝을 낼거에요."

지친 기색없이 씩씩하게 대답하는 한나의 어깨를 토닥이며 치수는 말없이 응원의 시선을 보냈다. 뒤에서 따끔하게 꽂히는 시선이 있긴 했지만 그런 건 이미 익숙했다. 그러고보면 대만이 녀석도.. 준호랑 얘기 나누는 걸 보고 괜한 질투를 했었지. 갑작스레 찾아온 옛 추억에 치수는 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추억에 잠길 여유는 그리 길지 않았다.

"팀장님"

"뭐지 서형사?"

"허윤진이랑 통화한 이들 중에 산왕의 조직원이 아닌 자가 있어서 조회했는데.."

태웅은 치수에게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서류에 적힌 이름을 보고 치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박철. 그가 아는 이름이이었다. 산왕 만큼은 아니어도 뒷세계에서 꽤나 알아주는 이였다. 허윤진은 무슨 꿍꿍이로 이 자에게 접근한 거지? 

"그리고 뒤를 보시면..."

태웅이 서류를 뒤로 넘겨주자 핸드폰 위치 추적 결과들이 보였다. 그의 주 활동지였던 인천과 다른 꽤 거리가 있는 지역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가평?"

"허윤진이 경기인천권의 마약유통책이긴 했지만 가평이라니 좀 쌩뚱맞긴 하네요."

"가평만 같은 게 아니라 아예 위치가 같습니다. 같은 곳에서 전화가 온 것 같습니다."

"위치는 같은데 번호는 다 다르다..."

"아무래도 거기가 허윤진 패거리 아지트인 것 같은데요. 한 건 했네 서형사?"

한나는 태웅을 향해 씨익 웃으며 팔을 툭툭 쳤다. 찌릿 하고 치수에게 꽂혔던 시선이 이번엔 태웅에게 꽂혔다. 하지만 태웅은 눈치를 못 챈 건지 신경을 안 쓰는 건지 시선에 개의치 않고 한나를 향해 감사인사를 했다. 치수는 서류를 태웅에게 돌려줬다. 아지트를 알아낸 건 큰 성과지만 그만큼 박철이라는 인물이 신경쓰였다. 분명 뭔가 아는 게 있을 테지. 

"서형사"

"네"

"송형사랑 같이 여기 주소지로 가봐. 정말 아지트라면 아직 체포되지 않은 조직원들이 있을지 몰라. 산왕의 최근 행보랑 관련해서 자료들이 남아있을지 모르고."

"그런 거라면 저도 갈래요. 그 녀석들이 전담했던 게 마약이잖아요. 그럼 우리쪽에서 가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에요."

"그래, 그럼 이형사랑 같이.."
"바로 준비해서 출발하겠습니다 팀장님!"

근처에서 지켜보던 태섭이 갑자기 치수 앞으로 끼어들며 말하더니 태웅을 데리고 사라졌다. 분명 시덥지 않은 부탁을 하는 게 뻔했다. 대만이 태섭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여간.. 일하는 걸 보고 배울 것이지 저런 걸 닮기는.. 혀를 차는 치수를 보고 한나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역시 이 팀은 재밌단 말이야~ 치수가 들으면 불쾌해했을지 모를 생각을 하며 출동준비를 하겠다 한나 역시 자리를 떴다. 

"강형사"

"왜 고릴.. 아니 아니라 팀장님! ...뭐야? 다들 어디갔어?"

오랜만의 현장검거에 아직도 심취해있던 백호는 텅 빈 사무실을 둘러보고는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치수를 쳐다봤다. 그런 백호의 이마에 꿀밤을 먹인 치수는 따라 나오라고 손짓했다. 

"갈 곳이 있다."

***

밤거리의 네온 사인이 화려한 골목이었다. 옷을 걸친 건지 만 건지 싶은 여자들의 시선이 치수와 백호, 두 사람에게 꽂혔다. 치수는 덤덤한 듯 걸었지만 백호는 그런 시선이 영 익숙하지 않은지 자꾸 치수 쪽으로 붙었다.

"똑바로 걸어라 강형사"

"고릴 같으면 똑바로 걸어지겠어?! 저렇게 쳐다보는데!"

"네 직업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런 거에 굴해서 어쩌자는 거야"

치수의 핀잔에 백호는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치수 옆을 떠나지 않았다. 화려한 골목 가운데 선 가장 큰 건물 앞에 서자 가드로 보이는 남자 둘이 서 있었다. 그들의 신분을 눈치챈 듯 가드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봤다. 백호 역시 그 시선에 지지 않고 마주 노려봤고 치수는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경찰이다. 박철을 만나러 왔는데."

"형님은 바쁘십니다. 나중에 약속 잡고 다시 오시죠."

"깡패 보는데 형사가 약속도 잡아야 하나. 체포영장 가지고 오라는 소리면 이해하겠는데."

치수의 말에 가드들의 눈빛이 더욱 살벌했지만 그들보다 체격에서 앞서는 치수에겐 별로 와닿지 않는 시선이었다. 거기에 치수의 옆에서 그에 못지 않은 시선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이가 있으니 더 그랬다. 그 때, 건물 안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어이쿠, 벌써 짭새가 납셨나."

"박철"

담배를 입에 문 철이 건물 밖으로 나오며 그를 보고 웃었다. 하지만 그와 마주한 치수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굳어있었다. 그것이 박철 눈에는 퍽이나 재밌었다. 몇 시간 전에 본 어떤 인물과 다른 듯 닮아있었다. 그러고보니 저 녀석이랑 파트너랬나. 철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래서 짭새께서 여긴 어쩐 일로?"

"..허윤진 사망사건 건으로 왔다. 네 녀석이 허윤진이랑 마지막으로 통화한 인물이다. 이렇게 말하면 왜 왔는지 굳이 말 안해도 알테지."

역시나 그 건이었나.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질문에 철은 입꼬리를 올리며 후 하고 담배연기를 뱉어냈다. 그와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정면에 서 있던 치수의 얼굴 위로 뿌연 담배연기가 흩어졌다.

"별 같지도 않은 녀석이랑 엮여서 영 피곤하네."

"..."

"네 녀석 말대로다. 내가 마지막으로 통화했지. 무슨 얘길 나눴는지는 뭐... 그쪽에서 알아서 확인해보고. 어차피 그거 하는 게 댁들 일이니까."

빠르게 치수와 백호를 번갈아보는 시선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치수 뒤에 가만히 서 있던 백호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철의 앞으로 다가서려 했지만 치수에 의해 제지당했다. 소란 피우지 마라. 치수의 한 마디에 백호는 이를 갈면서 물러났다.

"저 녀석이 새로운 미친 개인가보지? 이거 원 짭새가 아니라 조련사가 더 잘 어울리겠어? 뭐 온 김에 미리 말해두자면 난 그 녀석 죽음과 요만큼도 관련이 없어. 알리바이도 확실하고 말이야."
"알리바이?"

"그래, 짭새들이 좋아하는 그 알리바이 말이야."

철은 다시 한 번 담배를 입에 물고 깊게 빨아들였다. 

"내 알리바이는 정대만이 대줄거다. 뭐하면 본인한테 직접 물어봐."

정대만이라는 이름 세글자에 치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것이 즐거워 철은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정대만도 그렇지만 채치수 역시 이 세계에선 유명했다. 드라마에나 나올 것 같은 강직한 형사 그 자체. 고지식하고 규칙을 중시할 것 같은 남자. 그리고 그 남자가 정당방위였지만 살인을 했고 그 살인의 이유가 파트너였다는 아주 복잡한 과거사가 있다는 게 철은 꽤 재밌었다. 정대만에게 순순히 협조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정대만을 아나?"

"알지. 미친개 유명했잖아. 그리고 마침, 오늘 왔다갔거든."

미간에 진 주름이 아까보다 깊어진 걸 보고 철은 마지막 회심의 한마디를 준비했다.

"너랑 똑같은 걸 묻던데? 그래서 내가 아는 걸 다 알려줬지. 가령 그 녀석 아지트 같은 거."

순간 가만 있던 치수가 손을 뻗어 철의 멱살을 잡았다. 그의 입에 물려 있던 담배꽁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드들은 치수를 떼어내려 다가왔지만 철은 괜찮다는 듯 손을 올렸다. 아마 가드들은 치수를 제압하고 싶어도 못했을 터였다. 치수의 뒤에서 그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까.

"장난 치지 말고. 아는 거 다 말해."

"그걸 알아내는 게 니들 일이라고 말했을텐데? 게다가 친절하게 말해줬잖아? 아지트라고."

치수는 당장이라도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을 듯 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한참이나 멱살을 잡은 채 철을 노려보던 치수는 손을 놓고 그에게서 멀어져 등을 돌렸다.

"정대만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너부터 가만 안 둔다. ...가자, 강형사."

"아, 어, 어..네!"

먼저 걸어가는 치수를 보고 백호는 황급히 따라갔다. 그러면서도 건물 앞에 남은 이들을 향해 가운데손가락을 날려주는 것도 있지 않았다. 철은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떠나는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재밌네. 미친개랑 그 조련사 짭새들."

철의 눈빛이 재밌는 장난감을 찾은 아이마냥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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