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준호] 복마전(伏魔殿) 6
구 탐정 정대만
그렇게 잠이 들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해가 이미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후였다.
"미친... 얼마나 잔거야..."
소파 팔걸이에 아직도 숙취의 여운이 남은 듯 울리는 머리를 댄 채 대만은 미간을 문질렀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몇 시간 전에 온 영걸의 메시지가 있었다. 지난 번 통화에서 얘기한 두바이라는 룸살롱의 주소와 약속시간이 적혀 있었다. 다행히 시간에 늦지는 않겠네.. 주소를 천천히 읽다 대만은 욕설을 뱉으며 소파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왜 하필 거기에 있는 거냐 거긴 형사일 때도 잘 안 다녔는데..."
안그래도 웅웅 울리던 머리가 더 아파오는 걸 느끼며 대만은 자켓을 여몄다. 일단 좀 씻고 정신차리자. 맨 정신으로 가도 큰일 나기 쉬운 곳이니... 이런 꼴로 가면 더 험한 꼴을 보겠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대만은 두 뺨을 손바닥으로 쳤다. 그 길로 대만은 사무실 위층으로 갔다. 출퇴근이 긴 건 싫고 이미 손 벌릴 만큼 졌다며 근방에 있는 좋은 아파트를 구해주겠다는 아버지의 말을 거절하고 얻은 그의 집이었다. 간단히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대만은 그 길로 영걸이 알려준 룸살롱 두바이로 향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오긴 했는데....."
대만의 사무실에서 차로 20여분 정도 떨어진 거리. 두바이가 있다는 그 거리에 도착한 대만은 영 불편한 얼굴이었다. 그럴만도 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거리는 붉었다. 가게 안에서 밖으로 붉은 조명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거리를 가득 채운 가게들 중 안 그런 곳이 없었고 백이면 백 가게 앞에는 여자들이 헐벗은 차림으로 앉아있었다. 그랬다. 두바이는 사창가. 그것도 사창가 중앙에 있는 룸살롱이었다. 거리의 중앙쯤 되는 곳에 높게 올라선 건물이 두바이였다.
"하아... 오늘따라 채치수 얼굴이 그립네."
그 녀석은 이런 데서도 아무렇지 않게 다녔는데.. 뭐 험상궃은 그 녀석 얼굴에 다가오는 이들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쫄지말자, 정대만. 형사...아니 탐정이라는 이름이 울라."
마음을 크게 먹은 대만은 붉은 거리로 한 걸음 내딛었다. 시선을 정면에 두고 한 발, 두 발... 거리 안 쪽으로 깊숙히 들어갈 수록 대만은 제게 꽂히는 시선들이 늘어가는 걸 느꼈다.
"어머, 저 분 예전에 왔던 형사님 아니야? 늘 같이 다니던 덩치 좋은 분은 어디 가셨나~?"
"그럼 놀러오신 건가? 우리 가게에서 잘 해줄게요~ 놀다가요~"
"얘 좀 봐. 저 분은 내가 먼저 찜했어!"
"외모는 잘생겼는데 다른 데는 어떤지 몰라~ 특히 아래가.."
자신을 두고 상스러운 말을 나누는 여성들의 웃음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내가 이래서 여기가 싫었던 건데.. 마음을 다잡는 듯 숨을 한번 내쉬고 대만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신의 시선을 잡아끌려는 여자들의 몸짓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거리를 걷다보니 '두바이'라고 적힌 네온사인이 보였다. 지금껏 고만고만했던 크기의 가게들과 다르게 크기도 크고 높이도 높은 건물이었다. 룸살롱과 모텔이 함께 있는 모양새였다.
"여기가 두바이.."
대만은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간은 6시 53분. 박철과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은 7시였다. 룸살롱으로 이어지는 문 앞에는 가드로 보이는 우락부락한 남자 둘이 서 있었다. 그들은 서늘한 시선으로 가게 앞에 서 있는 대만을 쳐다봤다. 말 한 마디 없었지만 그들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말은 명백했다.
'꺼져라'
"하, 누가 그렇게 보면 겁먹을 줄 알고..."
그들의 싸늘한 시선에 대만은 코웃음을 치고는 옷매무새를 고쳤다. 그리고 당당히 그들 앞으로 걸어갔다.
"..박철 만나러 왔는데."
"네놈이 뭔데 우리 형님을 찾아?"
문 왼편에 서 있던 남자가 위협적으로 대만의 코 앞으로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손을 올릴 것 같은 기세였지만 대만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내가 너같은 녀석들 한 두번 상대한 줄 아냐? 대만은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약속 잡고 온 거니까 잔말 말고 비켜."
"이게 진짜.... 야, 너"
"그만해라."
건물 안에서 나온 건 단발머리의 남자였다. 가드들 못지 않게 좋은 체격과 험악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의 등 뒤로 역시나 체격 좋은 남자 서너명이 따라나왔다.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나온 그는 눈짓으로 대만의 앞에 있던 남자를 뒤로 물러나게 했다.
'저 녀석이 박철.... 확실히 두목노릇할 만하네.'
철은 대만을 위아래로 찬찬히 훑다가 거의 타들어간 담배꽁초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이영걸이 만나보라 해서 누군가 했는데.... 서부 경찰서 미친 개군. 아니지. 이제 형사가 아니랬나?"
"네가 박철이냐? 나 유명한 거야 별로 놀랄 일은 아닌데 낯익은 얼굴이 아닌 걸 보니.."
대만은 말끝을 흐리며 박철의 모습을 그가 한대로 똑같이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곤 그가 나온 건물을 보며 가드들을 지나쳐 철의 앞으로 다가왔다.
"겉만 번지르르하지.. 실속은 없는 모양이네. 이런 걸 보고 빛좋은 개살구라 하던가?"
대만은 철의 가슴언저리를 주먹으로 툭툭 쳤다. 힘이 실린 주먹질은 아니었지만 상대를 도발하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도발에 걸린 건 철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사내들이었다.
"이 새끼가 건방지게"
"어디서 형님한테.."
당장이라도 대만을 잡아먹을 듯이 사내들이 철의 뒤에서 걸어나왔지만 이번에도 철은 눈짓 한 번으로 제 부하들을 말렸다. 철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얼굴엔 번진 건 분노도 불쾌감도 아니었다.
"미친 개 소문대로네... 들어와."
철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대만은 철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그를 따랐다. 지하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니 길게 이어진 복도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룸들이 보였다. 복도에는 술을 서빙하는 웨이터들과 룸으로 들어가는 여자들로 북적였다. 철은 제 뒤를 따라오는 대만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복도를 따라 걸어 가장 안 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미리 준비해둔 것인지 이미 술과 안주가 준비되어 있었다. 철이 의자에 앉자 대만은 그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철을 따라오던 남자들 역시 안으로 들어오려 했지만 철의 제지로 다시 되돌아 나갔다. 룸에는 대만과 철 두 사람뿐이었다. 테이블을 쓱 훑은 대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술상까지 봐주고 여기 손님 접대가 나쁘지 않네."
"접대하는 게 일인데 이 정도 준비야 어려울 것도 없지."
철은 양주병의 뚜껑을 따서 잔에 가득 술을 부었다. 넘치지 않게 찰랑거리는 잔을 대만의 앞에 내려놓고 철은 자신의 잔에도 술을 양껏 따랐다. 하지만 대만은 잔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접대받으러 온 거 아니니 용건만 말하지. ...허윤진 죽은 건 알고 있겠지?"
"알지. 이 바닥에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났는데 모를리가."
"그럼 허윤진 죽기 전 날에 만난 게 너라는 것도 알고 있겠네."
대만은 잔을 옆으로 밀어내고 테이블 위로 위협하듯 상체를 내밀었다. 룸살롱의 룸은 순식간에 취조실 같은 분위기로 변했다. 대만의 행동에도 철은 개의치 않은 듯 술잔을 비웠다.
"알아."
"그럼 내가 묻고 싶은 말이 뭔지도 알겠네. ...무슨 얘기 했는지 말해. 입 다물고 있어봤자 좋을 거 없어."
"요즘엔 탐정도 심문같은 걸 하나? 뭐 배운 게 그 짓거리뿐이라면야 어쩔 수도 없지."
철은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르며 웃었다. 쾅! 테이블이 큰 소리를 내며 룸 안을 울렸고 안주가 담긴 접시들이 살짝 흔들렸다.
"말 돌리지 말고 얘기해."
"성미도 급하군. ..허윤진이 전화를 했지.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말이야. 전화가 와서는 잠시 할 말이 있어 만나자고 했다. 그래서 그 날 밤에...만났지."
"허윤진을 만나?"
"그래, 만났다. 바로 여기서."
'산왕 쪽 녀석이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서 보자 했지?'
'거두절미하고. 박철, 나랑 손잡고 일해볼 생각 없나?'
'일? 산왕하고?'
'아니, 산왕이 아니야. 나랑 하자는 거지.'
박철이 꺼낸 얘기는 뜻밖의 것이었다. 허윤진은 산왕을 배신할 생각이었다. 보스인 이명헌도 그에게 따르지 않는 김현수도 따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박철이 운영하는 룸을 본거지로 하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마약 역시 이 곳을 중심으로 유통시키려고 했다.
"무슨 배짱으로 그런 소리 하나 싶었지. 산왕의 돈줄이나 다름없는 마약 유통의 한 축을 맡고 있는 녀석이라 간부급만큼은 아니어도 끗발은 날린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국내 최대 조직인 산왕에서 나와 자기 조직을 만들려고 했다... 무슨 수로? 산왕에서 가만 있지 않았을텐데"
의아함이 섞인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대만에게 철은 글쎄.. 라며 말끝을 흐렸다. 조금 전 채운 술잔이 어느 새 비워져 얼음만 흔들렸다. 내부 분열에 이어서 아예 조직을 떠나려는 녀석까지 속출했다는 건 그 만큼 산왕 내부의 상황이 위태롭다는 건가. 이명헌이 정보를 제한적으로 말한 건 이런 상황을 염두해서였나. 조직 바깥 사람에게 이런 것까지 말할 수 없었으니까?
"나도 그래서 물었지. 뭘 믿고 그런 걸 하느냐고. 그랬더니 그 녀석이 그러더군. ...자기에겐 그걸 해낼 힘이 있다고."
"힘? 무슨 힘?"
"그거야.. 돈이지."
철은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흔들었다. 과거 뒷세계를 살아가는 조폭들에게 필요한 건 문자 그대로의 힘이었다. 상대 조직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힘. 그것이 조폭들에게 법보다 더 위에 있는 규칙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가면서 규칙 역시 바뀌게 되었다. 조폭들의 세계에서 우위를 가리는 건 힘이 아니라 돈이 되었다.
"자금은 자신이 얼마든지 준비할테니 이걸로 마약과 사람을 모으자고. 지금 내 밑에 있는 녀석들과 자신에게 동조한 산왕의 조직원들을 더하면 충분할 거라고 했지."
"아무리 마약 유통으로 잘 나갔다고 해도 간부급도 아닌 녀석이 무슨 수로 그렇게 호언장담했지?"
"거기까지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 때 보인 자신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돈..허윤진에게 조직을 하나 만들 정도로 돈이 있었다. 이건 생각치도 못한 정보였다. 대만은 팔짱을 끼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한번 잡혔던 이후로 잠잠했던 녀석이 무슨 수로 그만한 돈을 벌었지? 역시 마약유통인가? 하지만 그랬다면 산왕에서 몰랐을 리가 없는데... 생각에 잠겼던 대만은 다시 시선을 철에게로 옮겼다. 철은 시종일관 여유있는 태도로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그래서 손 잡기로 했나?"
"생각해보겠다 했지. 사업을 키울 수 있다면야 나로서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으니까. 거기에 돈도 그 녀석이 다 준비하는 거라면 말할 것도 없고."
철은 그렇게 말하고 바지 주머니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수첩에서 뜯은 듯한 쪽지에는 뭔가 적혀 있는 듯 했다.
"생각이 있으면 여기 적힌 주소에서 만나자며 넘겨줬다. 통화로 하면 위험할 수도 있다고."
"통화로 하면 위험.. 산왕에서 도청이라도 했다는 건가?"
"그야 나도 모르지. 이걸 넘겨주고 그 녀석은 여길 떠났어. 그리고 다음 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
"....그 쪽지 이쪽으로 넘겨."
대만이 손을 내밀자 철은 손에 든 쪽지를 한 번 보고 그의 손바닥 위에 내려놓을 것처럼 손을 내렸다. 하지만 쪽지가 대만의 손에 닿기도 전에 철은 다시 쪽지를 자기 쪽으로 가져왔다. 대만이 미간을 찌푸리며 노려보자 철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냥은 못 주지. 형사였으니까 잘 알 거 아냐?"
"..뭘 원해"
"허윤진이 뒈져서 나도 좀 피해를 볼 것 같거든. 요컨대 용의선상에 오를 것 같다는 말이지."
철의 말 뜻을 이해한 대만의 표정이 굳었다.
"정황상 내가 마지막으로 통화하고 만난 사람이겠지.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경찰들이 나를 찾아올 거고."
"알리바이가 있으면 그걸 대면 될 일 아니야"
"나는 허윤진과 그 날 이후로 만난 적이 없고 녀석이 죽었다고 하는 날에는 난 집에 있었다. 그걸 증명해줄 녀석들이 없는 것도 아니지. 하지만 우리 의심많은 짭새들은 그 녀석들 말은 안 믿어줄 것 같거든. 형사 출신 탐정님이 같이 있었다 증언해주면야... 믿어줄지도 모르지."
증언의 신뢰성이 없는 부하들을 대신해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언해달라고 박철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경찰들은 이미 한통속인 박철과 그 부하들의 증언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할 게 뻔했다. 대만이 경찰이었다고 해도 그렇게 판단하고 다른 증언과 증인을 요구했을 테니까.
"..부하들 말고 증언해줄 다른 이는 없나?"
"있었으면 탐정님한테 이런 거래하자고도 안하지. ...내 가게 짭새들이 들쑤시고 다니는 꼴 별로 보고 싶지 않거든."
알리바이가 불확실하다는 걸 알면 경찰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대만도 잘 알았다. 당사자인 박철은 임의동행식으로 서로 가서 구치소에 있을테고 우두머리를 잃은 부하들은 경찰들의 감시 하에 있어야 했다. 그러면 자연스레 가게 주변에 경찰들이 진을 칠테고 오가는 손님의 발길은 점점 줄어들 게 뻔했다. 그렇게 한 번 끊긴 발길을 다시 돌아오려면 몇 달이 걸릴지는 아무도 몰랐다.
"자, 선택해. 거래 할건지 말건지."
"..."
시종일관 여유 있는 태도는 이거 때문이었나. 칼자루는 자기가 쥐고 있으니까 꿀릴 거 없다.. 웃기지도 않는 군. 이가 바득바득 갈리는 일이었지만 대만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겨우 보인 실마리였다. 여기서 놓는다면 그가 다시 실마리를 잡는 건 언제가 될 지 알 수 없었다. 산왕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꾸물거리다간 진실을 알기도 전에 모든 게 그들 손에 묻힐 수도 있었다. 입술을 꾹 깨문 채로 대만은 철을 노려봤다.
"거래 좋지. 네가 나한테 빚지는 거래. 위증죄는 생각보다 패널티가 크거든.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갚아야 할거야."
철은 피식 하고 웃더니 대만의 손에 들고 있던 쪽지를 넘겼다. 쪽지를 펴보니 적혀 있는 건 경기도 양평의 어느 주소였다.
"산왕의 눈을 피해 만든 아지트라고 했지. 진짜인지 아닌지는 나도 몰라. 가기도 전에 그 새끼가 뒈졌으니까."
대만은 쪽지의 주소를 속으로 곱씹다가 다시 곱게 적어 자켓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 주소가 맞길 바라는 게... 네 놈 신상에 좋을 거야."
"부디 그러길 바라지."
대만은 옆으로 치워뒀던 술잔을 힐끗 보고 단번에 들이켰다. 큰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5만원권 두장을 꺼내 내려놓았다. 빈 잔과 지폐를 보고 철은 소리내어 웃었다. 미친 개는 직업을 바꿔도 미친 개라는 건가.
"술, 잘 마시고 간다."
그렇게 룸 밖으로 나가려는 대만의 등 뒤로 철이 목소리가 들렸다.
"충고 하나 하지. 정대만"
"..."
"그 성격 좀 죽이는 게 좋을 거야. 미친 개라고 해도 제 목숨 중한 줄 아는 법이지.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날뛰는 건 미친 개가 아니라... 뒈지고 싶어서 환장한 놈이지."
대만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철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만은 발길을 돌려 철의 앞으로 다가왔다. 몸을 숙여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나도 충고 하나 할까 박철"
"..."
"분수를 알고 떠들어. 나 네 놈같은 뒷골목 조폭한테 충고 들어야 할 정도로 타락하진 않았어. 나 정대만이야. 경찰이든 탐정이든 그거 하나는 안 변해. 그 머릿속에 잘 새겨두라고."
검지로 철의 이마를 툭툭치고 대만은 몸을 일으켜 룸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한 룸에서 박철의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철의 부하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도 함께 들렸지만 대만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 곳에서 할 일은 끝났다. 이제 해야할 건 박철이 넘겨준 주소로 향하는 뿐이었다.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들어갈 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대만은 사창가 입구 쪽으로 나왔다. 거리 한 쪽에 세워둔 자신의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제법 먼 거리였다.
"오랜만에 멀리 나들이 나가네."
부웅하는 엔진 소리와 함께 차는 어둠을 가로질렀다.
***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은 허름한 별장이었다. 근처에 있는 마을과도 차로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별장이었다. 대만은 별장으로 이어진 좁은 골목 입구에 차를 세우고 별장을 바라봤다. 밖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안에는 사람이 있는지 불이 들어와 있었다. 차에서 지켜본 지 10여분. 별장 안을 들어간 이도, 나간 이도 없었다.
"사람이 없진 않은 것 같은데... 기척이 안 느껴지는 거 말고는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고.."
역시 직접 들어가보지 않으면 안되나. 대만은 자신도 모르게 왼쪽 옆구리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쳇, 이미 없는 총은 왜 찾는거야 멍청하게."
가볍게 혀를 차며 대만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리고 주위를 경계하며 천천히 별장 쪽으로 향했다. 별장의 대문 앞까지 다가왔지만 여전히 인기척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순간 싸늘한 감각이 등을 스쳐지나갔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는데.. 그리고 그걸 증명하듯 별장의 현관 앞에는 엎드려 쓰러진 누군가가 보였다. 그것도 그냥 쓰러진 게 아니라 피를 흘리고 쓰러진 모습이었다. 대만은 뛰어들듯이 다가가 핸드폰 손전등을 꼈다. 엎드린 몸 아래에는 피가 고여 있었다. 몸을 뒤로 돌리니 가슴엔 칼로 찌른 상처가 있었다. 그리고 상처에서 튄 듯한 피가 남자의 옷에 잔뜩 묻어있었다.
"단번에 가슴을 찔렀어. 그리고 이 자리에서 찌르고 뽑아서..."
남자가 쓰러진 주변에 피묻은 신발자국이 보였다. 신발자국은 그대로 현관문 너머까지 이어졌다.
"안으로 들어갔다.. 누가 여길 알았다면.... 인기척이 없는 게 이해가 되네."
그리고 신발자국은 안으로 들어간 것 밖에 없다. 그렇다는 건.. 아직 안에 범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야. 대만은 들고 있던 시신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순간, 철의 충고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성격 좀 죽이는 게 좋을 거야. 미친 개라고 해도 제 목숨 중한 줄 아는 법이지.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날뛰는 건 미친 개가 아니라... 뒈지고 싶어서 환장한 놈이지.'
"미안하지만 난 죽고 싶진 않거든."
그의 말에 대꾸하듯이 중얼거린 대만은 시신의 옷 안 쪽을 살폈다. 이 놈이 허윤진처럼 조폭인 거라면.. 분명 제 몸 하나 지킬 무기 정도는 있겠지. 그거 꺼낼 겨를도 없이 죽었지만. 그의 생각대로 남자의 허리 춤에는 총이 있었다. 불법적인 루트를 통해 들여왔을 6연발 리볼버. 쏜 흔적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대만은 총에 손을 댔지만 이내 다시 손을 거뒀다. 총은 가급적이면 쓰고 싶지 않았다. 사격 솜씨에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
다시 시신을 뒤지자 시신의 왼쪽 발목에 숨겨져 있던 잭 나이프가 나왔다. 이거라면.. 대만은 나이프를 꺼내 오른손에 쥐었다. 이거 쓸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대만은 몸을 일으켜 문쪽으로 향했다. 살짝 밀자 제대로 닫혀있지 않던 문이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안에선 피냄새가 진동했다.
"이건......"
현관에서 보인 풍경은 피투성이였다. 바닥은 물론이고 벽에도 피가 잔뜩 튀어 있었고 보이는 시신만 4구가 넘었다. 몸싸움이 있었는지 거실에 있는 가구들이 엎어지고 깨지고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대만은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거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범인이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긴장의 끈을 쉽게 놓을 수 없었다. 거실에 있는 시신은 현관 밖 시신과 달리 여기저기 부상의 흔적이 있었다. 몸싸움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밖에 있던 녀석은 기습으로 제거하고 여기에 들어와서 남은 녀석들이랑 싸웠다 라는 건데... 그렇다면 단독범은 아니겠군. ...이명헌이 먼저 선수친 건가 아니면 그 김현수란 녀석이...?"
가볍게 시신의 상태를 확인한 대만의 시야에 가장 안 쪽 방이 보였다. 문이 살짝 열린 방은 불이 켜져 있는지 빛이 나오고 있었다. 지금 불켜진 건 여기랑 저 방뿐인가.. 그렇다면 범인이 있을지도 몰라. 대만은 손에 든 나이프로를 고쳐쥐고 벽에 붙어 안쪽 방으로 걸어갔다. 열린 문 틈으로 안을 살피자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의자 등받이 뒤로 손이 묶인 채 고개를 툭 떨구고 있었다. 이미 죽은 건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확인하고 대만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묶여있는 남자의 앞쪽으로 돌아가자 역시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이 녀석은 누구지? 게다가....밖에 있는 놈들과 상처가 달라.. 이건.."
죽은 남자의 고개를 들자 코와 입에서 피가 흐른 자국이 있었다.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 맞은 자국이 역력했지만 몸싸움을 하다 난 상처와는 달랐다. 일방적으로 맞은 자국에 가까웠다. 의자에 묶인 채로 맞은, 고문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오른팔에는 주사자국과 의자 밑에 사용한 주사기들이 떨어져 있었다. 심각한 외상은 없고 마약을 투입한 흔적은 있는 시신이라... 대만은 시신 주변에서 물러나 방 안을 살폈다. 의자에 앉아있는 시신을 제외하면 방은 깨끗하다못해 삭막했다. 증거은 더 없는 건가? 분명 살인범에 대한 증거가 더 남아있을텐데. 방을 뒤지는 그의 모습은 이미 탐정이 아닌 형사였다. 현장조사에 열중한 탓이었을까 대만은 제 등 뒤로 다가오는 그림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른 건 안 남겼군. 그러면 시신이 누구인지 확인해..."
퍽하는 소리와 함께 대만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실수했다. 뒤늦은 후회와 함께 눈앞이 흐릿해졌다. 바닥에 쓰러진 대만의 시야에 구두가 보였다. 남성용 구두였다. 얼굴을..봐야,해. 시선을 조금 위로 올려보려했지만 조명 때문에 남자의 얼굴에 그늘이 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죽고 싶어 불로 뛰어드는 불나방이 따로없군."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이의 목소리였다. 그 때였다. 대만의 시야에 또 다른 이의 발이 보였다. 이 녀석은 또 누구야.. 어떤 새끼야..
"어떡할까요? 이대로 죽일까요?"
새로 등장한 자의 얼굴 역시 그늘이 져서 알아볼 수 없었다. 젠장, 누구야.. 누구냐고! 대만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구둣발이 그의 얼굴을 밟았다.
"큭..!"
"얌전히 누워 있는 게 덜 괴로울거다. ..어떡할까요?"
"자게 내버려둬. 우리가 원래 계획한 대로."
역시나 대만이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뒤늦게 등장한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대만을 내려다보다 방을 나갔다.
"쳇, 그냥 죽여버리면 깔끔한 것을.. 아직 네 목숨줄 다 하지 않은 모양이다. 뭐 그래봤자 잠깐이겠지만."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는 얼굴을 짓밟고 있던 발로 대만의 얼굴을 걷어찼다. 컥 소리와 함께 대만의 몸이 돌아갔다. 흐릿해진 시야를 천장에 달린 등이 하얗게 채웠다. 대만을 걷어 찬 남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잘 가라, 정대만. 네 놈이랑 다시 볼 일이 있겠냐만...본다면 그 때는 확실하게 네 멱을 따주마."
"너, 누구...."
"나? 글쎄.. 한번 찾아보든가."
내려오는 눈꺼풀을 막으려 애썼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씨발.. 나지막히 욕설을 내뱉으며 대만은 정신을 잃었다. 마지막에 들려온 건 낯선 이의 목소리가 아니라 익숙한 목소리였다.
'...앞으로도 잘 지내시길 바랄게요. 위험한 일은 하지마시고요.. 치수도 걱정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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