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웅백호/루하나] Red is liar [샘플]

*6/11 우결온에 나왔던 구간의 샘플입니다.

*사망 소재 주의.

*해피엔딩입니다.

*서태웅의 가족에 대한 날조가 있습니다.

*오리지널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

병실 앞에서, 보도 윤리 따위는 집어치운 하이에나들의 눈이 남자를 잡아먹을 듯 빛났다. 수많은 카메라의 렌즈와 마이크 따위를 들이밀며 소리치는 목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고에 본인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붉은 머리의 남자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여기가 어디인지 파악하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가,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사람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남자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끝내 오열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제 가슴께를 쥐어 뜯으며 소리 없이 절규하는 그 모습을 수많은 카메라가 담기 시작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눈물만을 흘리는 그 모습이 평범한 교통사고의 생존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그의 답을 기다리던 도중, 그 침묵을 기다리지 못한 한 기자의 입이 열렸다.

“Mr. 루카와 선수와는 어떤 관계이십니까!”

그 말에, 붉은 머리의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질문이 들어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그 모습에 모두가 숨죽여 그를 바라보았다.

“…”

“나는…”

침묵속에서, 누군가가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말이 없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말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나는 그의 연인입니다.”

전 미국. 아니, 전 세계를 강타할 스캔들의 시작이었다.

**

“어이 사쿠라기. 소식 들었어?”

농구화의 끈을 묶고 있던 하나미치가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옅은 밀색 머리를 질끈 묶은 장신의 남자는 그의 팀 동료인 리암이었다. 말이 많은데다, 소문에 밝은 그는 무언가를 알게 되는 순간 남에게 말하고 싶어 미쳐 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을 시끄럽다며 무시하는 다른 팀 동료와 달리,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하나미치를 꽤나 좋아하는 편이었고, 그 때문인지 무슨 소식만 들었다 하면 그에게 다가와 이것 저것 떠들고는 했다.

하나미치는 표정을 조금 찌푸렸다. 평소라면 그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어줄 법도 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같은 날 저 녀석이 들고 올 소식이야 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그 자식의 소식이겠지.

오늘 대결 상대인 상대 팀의 에이스, 루카와 말이다.

하나미치는 그 재수 없는 얼굴을 떠올렸다.

루카와는 고등학교 졸업하기 무섭게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저 혼자 밝게 빛나는 태양처럼, 낯선 땅에서도 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는 무명의 동양인 선수에서, 기대되는 NBA의 떠오르는 신성이 되었다.

물론, 하나미치도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그 뒷모습을 쫓았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가 이 코트 위에 올라와 있는 자신이었다.

NBA에 진출한 두 사람을 묶어 어디에서는 동양의 기적, 운명의 라이벌이니 떠들어 대던 모양이었지만, 라이벌은 무슨. 루카와 자식과 자신은 이따금 시합에서 마주칠 때도 사적인 대화 한번 한 적 없었다. 한때는 코트 위에서 함께 서 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닌. 그래, 우리는 딱 그 정도의 관계였다.

하지만 리암과 동료들의 생각은 다른지, 오늘처럼 루카와의 팀과 경기가 있는 날이면 하나미치에게 루카와와의 관계를 물으며 그를 자극하곤 했다. 심지어 평소에도 툭하면 그 녀석의 소식을 물어오는 그들 덕분에 언제 그 녀석이 뭘 하고, 뭘 먹고, 무엇을 말했는지와 같은 알고 싶지 않았던 사소한 소식까지 알게 되었다.

하나미치는 오늘도 리암의 말을 한 귀로 흘릴 준비를 하며 입을 열었다.

“뭔데?”

하나미치의 그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굴하지 않은 리암이 이건 너도 놀랄 거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나미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리암을 바라보았다. 리암은 그런 하나미치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뿌듯한 표정이 되었다가, 그를 노려보는 시선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Mr.프린스가 아직 도착을 안 한 모양이야.”

그 말에 하나미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Mr.프린스는 저놈들이 루카와를 부르는 별명 같은 거였다. 동양에서 온 코트 위의 아름다운 왕자님이라나 뭐라나. 언제 한번 여우 자식한테 거하게 깨진 적이 있다더니, 그때 머리를 다친 게 분명했다. 평균 2m가 넘는 남자들이 지은 별명이라기보단 루카와의 친위대가 지을 만한 별명 이여서, 저 녀석들이 그 녀석을 그렇게 부를 때마다, 하나미치는 속이 메슥거리는 듯했다.

“또 어디서 졸다 오는 거겠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신발 끈을 다시 묶으려 고개를 숙인 하나미치를 향해, 리암이 팔짱을 끼며 그를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너 Mr.프린스를 기다리고 있었잖아.”

그 말에 하나미치는 우뚝, 행동을 멈추곤 리암을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사나워서, 리암은 오. 하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뭐 잘못 먹었냐?”

그 말에 멈출 것이라면 처음부터 시작도 안 했을 것이었다. 리암은 하나미치가 저러는 것이 정말 즐거웠다. 언제나 쾌활하고 힘이 넘치는 유쾌한 팀메이트는, 한 남자의 이야기만 나오면 저렇게 변하곤 했다. 리암은 어깨를 으쓱 움직이곤 그에게 대답했다.

“솔직해지라고, 난 내가 본 걸 말했을 뿐이야.”

하나미치는 그 말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대답하기도 싫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그런 하나미치의 뒤통수를 향해 수많은 야유가 쏟아졌다. ‘맞아 솔직해지라고!’ ‘우우- 도망치지 마라-’ 그런 말들의 나열에, 하나미치가 휙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안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락커의 문 뒤에 숨어있는 그들을 향해 중지 손가락을 들어 보인 하나미치가 중얼거렸다.

“엿이나 먹어.”

그 행동에 가장 먼저 웃음을 터트린 것은 캡틴인 윌리엄이었다. 그는 제 팔을 하나미치의 머리 위로 꾹 누르며 그의 머리를 으하하. 웃으며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하나미치는 뚱한 표정으로, 하지 말라는 듯이 그를 뿌리치려 했다. 윌리엄은 어이쿠. 하는 시늉을 하며 하나미치에게서 떨어져선 함께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팀원들을 향해 크게 박수를 두어번 쳤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윌리엄은 씩 웃고는 입을 열었다.

“자, 자. 어린애 그만 놀리고 다들 집중해라.”

어린애 발언에 자신을 바라보는 하나미치의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윌리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Mr.프린스, 아니 Mr.루카와가 오든 오지 않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저 놈들을 쳐 부수는 거다.”

“저번의 패배를 잊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는 윌리엄의 눈빛이 매우 매서워서, 대기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는 듯했다. 누군가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였다, 갑자기 대기실의 문이 벌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평범한 인상의 직원이었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직원은, 잠시 움찔거리더니. 결심한 듯 그들을 바라보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여러분 말씀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밖에서 사고가 있었어요. 많이 소란스러울 겁니다.”

그 말에 누군가 되물었다.

“사고?”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교통사고요. 앰뷸런스가 오고 있고, 아마 경찰도… 올 것 같군요.”

그 말에 그들이 슬쩍 시선을 교환했다. 윌리엄도 그런 그들을 바라보더니 직원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지.”

윌리엄의 냉정하지만 현실적인 말이 직원을 향해 떨어졌다. 그 말에, 직원은 또다시 입을 열지 못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는 어째서인지 슬쩍 하나미치의 눈치를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하나미치는 어쩐지 뒷목이 서늘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 그건.”

마치 슬로 모션 영상처럼, 그의 입이 아주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내뱉어진 말은, 모두를 충격에 빠트리기 충분한 말이었다. 그래선 안되는걸 알면서도, 모두가 반사적으로 시선을 한곳으로 돌렸다.

하나미치는 그 순간, 아가미를 가진 인간이 되었다. 숨 쉬는 법조차 잊어버린 그는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되풀이 했을 뿐이었다.

**

푸른 바다가 저 멀리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해가 떠오른지는 꽤 지난 터라, 햇살은 바다에 비추어 반짝이는 포말이 되어 부스러졌다. 달궈진 해변가에 앉아 그런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곤 했다.

뭐, 그런 감상을 하고 있자면, 언제나 그것을 깨트리는 녀석이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양반은 당연히 못 되는지, 하나미치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때려 박혔다.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냐. 멍청이.”

세심한 면이라곤 쥐뿔도 찾아볼 수 없는 녀석다웠다. 하나미치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루카와였다. 바닷바람에 검은 머리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뭇 여인들이었다면 홀린 듯 바라보았을 모습을 헹 하는 콧방귀와 날려버린 하나미치는 그 말에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기다린 거 아니거든?”

루카와는 여전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하나미치의 저절로 표정이 찌푸려졌다. 괜히 루카와를 다시 노려보던 하나미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모래를 털어냈다. 그 거친 손길에 모래가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제야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하나미치는 자신을 찾아온 것이 분명한 손님에게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놈이야 말로 이 천재가 그리웠나 보지?”

그 말에, 루카와가 눈가를 찌푸렸다.

“헛소리.”

서로 주고받는 말이 유치하기 그지없었다. 또다시 티격태격 말이 오갔다.

그날, 루카와와 해변에서 만난 이후부터, 저 녀석은 이곳에 불쑥 나타나곤 했다. 처음에는 우연으로 치부하려고 했지만, 그 마주침이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지경이 되자 하나미치는 그것이 우연이 아님을 모른 척하려 해도 할 수 없었다.

그러면 여우 자식은 왜 이 먼 곳까지 와서 자꾸 제 앞에 나타나는 걸까? 처음에는 놀리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았고, 걱정되어 찾아왔다기엔 저 녀석과 자신은 그렇게 친밀한 사이가 아니지 않은가.

이상한 녀석,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언제 만나자. 라는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를 마주치게 되었다. 만나기만 하면 시시한 말다툼을 할 뿐이었지만, 아주 가끔, 아무 말 없이 바다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렇게 약속 아닌 약속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듯이 이 만남에도 끝이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하나미치는 오늘 아침 듣게 되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목소리가 말했다.

“경과는 장기적으로 지켜봐야겠지만, 이제 퇴원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생각이 난 것은 어째서인지 그 재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 녀석이라면 이 소식을 듣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스스로도 왜 그것이 궁금한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쿠라기 군?”

듣고 있나요? 의사 선생님의 물음에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그 녀석이 어떻게 반응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쓸데없는 생각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지 않은가. 하나미치가 입을 열었다.

“저, 그러면…”

이제 코트 위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목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의사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에 핀 미소가 그를 향했다.

“성공적으로 재활을 끝마친 걸 축하해요.”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그 얼굴이 아직도 기억이 났다. 하나미치는 고개를 돌려 루카와를 바라보았다. 이유 모를 의문의 해답이 나올 시간이었다.

“어이, 여우 자식!”

루카와의 시선이 하나미치를 향했다. 하나미치가 자신을 가리키며 크게 웃었다.

“기뻐해라! 이 천재님의 복귀 날이 정해졌다!”

“그러니까 네놈도 이제 긴장하는 게 좋을걸? 이렇게 여유 부리고 있었던 걸 후회하게 해주마!”

으하핫 소리치며 하나미치는 루카와를 빤히 바라보았다. 루카와는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뭘 기대한 거람. 역시 재미없는 녀석이었다. 루카와의 입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언제인데.”

“엉?”

“퇴원, 언제 하냐고.”

물론, 당연히 나올법한 물음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저 녀석에게만은 퇴원일을 알려주기가 싫었다. 입술을 쭉 내민 하나미치가 루카와를 탐탁지 않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알아서 뭐하게.”

데리러 오기라도 할 거냐?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곤, 하나미치는 무언가 말하려는 루카와의 말을 끊으며 제 말을 이어갔다.

“퇴원 날까지 네놈 얼굴 보고 싶지 않거든?”

루카와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하지만 하나미치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무언가 생각난 듯 또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너 말고도 아무한테도 안 알려 줄 거다!”

진심이었다. 딱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괜히 귀찮게 구는 것도 싫었고, 다시 돌아온 자신을 보고 깜짝 놀라는 모습이 보고 싶기도 했다. 돌아온 천재를 보고 놀라는 사람들. 그게 좀 더 천재의 복귀에 어울리는 모습이 아닌가?

“몰래 찾아갈 거야. 다들 갑자기 이 몸이 나타나면 깜짝 놀라겠지?”

그러니까 내가 퇴원한다는 말 어디서 하고 다니지 말라며, 단단히 경고하는 하나미치를 향해 루카와가 입을 열었다.

“유치하긴.”

“뭐 임마?”

루카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떠나버렸다. 내심 더 물어올 것이라 생각했던 하나미치는 더 묻지 않는 루카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지고 있었다.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수면이 그런 하늘을 따라 붉게 일렁였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저 녀석에게 내 퇴원은 아무 일도 아닌 거겠지. 아니 그러면 왜 맨날 찾아온 거야!? 하나미치는 표정을 찌푸렸다. 내심 섭섭했다. 어라, 섭섭? 내가, 저 녀석에게? 인정하기 싫었다. 이제 익숙해진 그 녀석과의 만남도, 나름 가까워졌다고 생각해 버린 자신도. …가장 인정하기 싫었던 것은, 제 복귀에 그 녀석이 기뻐하길 바랬다는 것이다. 하나미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시간은 흘러 퇴원 당일이 되었다. 하나미치는 마지막 재활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은 텅 비어있었다. 어제 갑작스레 찾아온 영감님은 아직 무거운걸 드는 건 피하는 것이 좋다고, 미리 하나미치의 집으로 짐을 옮겨주겠다고 말했다. 덕분에 마지막에 병실에 남은 것이라곤 이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둘러보았지만 역시 챙겨가야 할 물건은 더 이상 없었다. 하나미치는 몸을 휙 돌려 병실 밖으로 나왔다.

이제 여기랑 정말 작별이구나.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걷고 있자니, 이제는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재활 기간을 함께한 재활 동지들이었다.

“퇴원 축하해 사쿠라기 군.”

“나가서도 연락해! 경기 있으면 꼭 보러 갈 테니까.”

퇴원 판정을 받은 그를 부러워할 법도 했는데, 그들은 모두 잘됐다는 얼굴로 하나미치를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말이 다정했다. 당연하죠! 라고 대답하며, 하나미치는 웃었다.

그렇게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병원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거기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엔 루카와가 있었다.

어떻게 안 건지 태연한 얼굴로 나타난 루카와는 하나미치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갑자기 크게 뛰었다. 우연일지도 몰랐다. 저 녀석은 언제나 뜬금없이 찾아오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하나미치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자전거였다. 그것도, 마마챠리.

물론 그게 이상한 물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루카와의 손에 들려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위화감 때문에 그 존재감이 어마무시했다.

루카와와 마마챠리, 그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하나미치는 그만 풋 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저 녀석은 언제나 그 멋지게 생긴 자전거나 탈 것 같았는데. 갑자기 웬 마마챠리란 말인가.

“뭐냐 그 자전거는.”

“타.”

“뭐?”

“타라.”

평소라면 웃기지도 않는 소리 말라고 말했을 텐데, 어째서인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루카와의 원래 자전거에는 없었을 짐칸에 털썩 주저앉은 하나미치는 루카와의 등을 바라보았다.

180이 훌쩍 넘는 남자 둘을 태운 자전거가 위태롭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휘청이는 것 같은 그 느낌에 불안해진 하나미치의 표정이 점점 새하얘졌다.

“야, 뭔가 이상하지 않냐?”

“…”

“자전거 무너지는 거 아니야!?”

농담이 아니라 지금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하나미치는 루카와를 향해 소리쳤다. 루카와는 표정을 찌푸리며 답했다.

“시끄러워.”

“젠장! 이 천재의 복귀를 이렇게 늦출 생각이었구나 여우 자식!”

그럴 줄 알았다며 소리치는 하나미치의 손이 루카와의 머리채를 잡았다. 루카와는 운전 중인 제 머리채를 잡는 하나미치의 손길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멍청이가!”

자전거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면서도 엉망진창이지만 조금씩 나아갔다. 바람을 가르고, 이제는 익숙해진 장소들이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 풍경들과 마주친 하나미치는 어느새 손에 힘을 풀고 빠르게 사라지는 그 모습을 조금 멍하니 바라보았다.

짧은 머리카락을 흔들리게 하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듯 햇살이 눈부시게 빛났다. 하나미치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웃고 있는 것을 느꼈다. 걱정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밀려오는 즐거움을.

그래, 잊을 수 없어서 괴로워지는 것이다.

**

사람은 잃고 나서야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게 된다.

언제나 바라보았던 익숙한 뒷모습은 더 이상 제 앞을 걸어주지 않는다고.

그런 현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루카와 카에데가 죽었다.

코트 위에 서는 것이 당연하고, 죽음마저 그곳에 바칠 것 같았던.

수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던 농구의 화신은.

역설적이게도 그것과 거리가 먼,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숨을 거뒀다.

비상하던 젊은 NBA 스타의 죽음은 미국 전역을 뜨겁게 달궈놓기 충분했다. 게다가 그 주인공이 인종의 차이를 극복하고 전 세계의 농구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던 동양인 선수라면? 가십거리로는 더할 나위 없을 것이었다.

신문 1면이 앞다투어 그의 죽음을 보도하고, 수많은 유명인들이 젊은 천재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물론, 그들이 모두 그와 아는 사이는 아니었으나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모르는 강아지가 죽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애도 아니겠는가? 하물며 사람이라면 어떨까.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그렇게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갔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의 관심이 죽어버린 그 본인을 넘어 그가 죽음을 감수하면서 까지 지켜낸 사람에게로 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사고의 충격 때문인지 아직 깨어나지 못한 그를 향한 관심은 나날이 커지고 있었고,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기자들은 벌떼처럼 몰려 병실 앞을 서성였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

하나미치는 세면대를 붙잡고 거울 속의 자신을 노려보았다. 거울 속의 남자는 형편없는 얼굴을 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리했지만 어딘가 어색한 붉은 머리, 몇 번 입어보지도 않았던 정장, 목을 죄이는 듯한 넥타이. 어디 하나 멀쩡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끼얹었던 찬물을 닦아내며, 허리를 편 하나미치는 굳게 닫힌 문을 열며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침묵이 깔린 공간을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몇 되지 않는 사람들은 굳은 표정으로 걸어갔다. 어떤 사람은 눈가가 붉었다. 그리고,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랬다.

하나미치는 지금, 그의 장례식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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