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호부

[태웅백호/루하나] 호랑호부(狐郞虎婦)

여우 요괴 서태웅 X 여우 신부 강백호

산세가 가팔랐다.

지금 가고 있는 마을은 북산에 자리 잡은 한 마을이었다. 따로 부르는 말은 없고, 북산에 있어 북산이라고 부르곤 했다.

북산은 정말이지 험지 중의 험지였다.

이런 곳에 주기적으로 들르는 건 다 정 때문이라며, 투덜거린 방물장수 장씨는 한 보따리 짐을 지고 있는 것도 깜빡 잊을 정도로,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을 한복판에 잔치판이 떡하니 벌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울 따름인데, 잔치가 벌어졌는데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 하나 없어 보였다.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장씨는 혹시 내가 북산이 아닌 다른 마을에 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인파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곤, 제 쪽으로 휙 끌어당겼다.

“다들 왜 밖에 이리 모여있어?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벼?”

그 질문에 갑작스럽게 붙들려 끌려온 김씨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채씨네 딸 시집가는 날이오.”

“채씨네? 아, 소연이 말인가? 그 아이가 곱고 어디 하나 모난대가 없긴 하지. 벌써부터 혼담이 들어왔나?”

“…뭐, 그렇지.”

“신랑은 어떤 사람인데?”

“…”

“왜 이리 뜸을 들여? 어떤 사람이냐니까?”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말어.”

“아니 그래도 온 김에 축하는 해야 하지 않겠나. 채씨는 지금 어디 있어?”

“…”

“이 사람이 못 본 사이에 벙어리가 됐는가? 아까부터 자꾸 말을 하다 말어?”

장씨의 재촉에 표정을 찡그린 김씨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 사람한테 시집가야 축하를 하든 하지.”

그 소리를 놓치지 않은 장씨가 제가 들은 소리를 의심하며 김씨를 바라보았다.

“뭣?”

그러자, 김씨가 장씨를 제 근처로 끌어들이더니,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신랑이 사람이 아니라 여우란 말일세.”

그 속삭임에 장씨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여우가 무엇이겠는가, 김씨가 미친 것이 아니고서야 짐승인 여우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남은 여우는 한가지 뿐이었다.

사람을 홀려 죽인다는 요물.

교활하고 오만한 요괴들의 우두머리.

장씨는 그 생각을 하자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아니! 소연이가 왜 요괴에게 시집을 가!”

크게 내지른 목소리에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한 대 모였다. 그 시선에 김씨가 장씨의 목을 죄이며 그를 다시 끌어내렸다.

“소리 지르지 말어! 소문낼 일 있나!?”

다시 땅에 쪼그려 앉은 장씨가 목소리를 낮추곤 김씨를 향해 중얼거렸다.

“채씨가 드디어 미쳤는감? 어떻게 딸을 짐승한테 시집을 보내!”

“… 혼담을 물어온 건 박영감이야.”

박영감이라면 북산의 촌장이었다. 현명하고 어진 사람이라 장씨도 퍽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믿을 수 없었다. 장씨가 김씨에게 정말이냐는 듯 속삭였다.

“박영감이 여우에 홀린 게 아니고서야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있어?”

“…올해 크게 흉년이 들었잖소. 이 부근이 유독 심해서 멀쩡한 곡식 한 줌 남아있지 않아. …어쩔 수 없었던 일인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는 김씨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장씨는 허탈한 얼굴로 김씨를 바라보았다. 지난 몇 년간 보아왔던 김씨와, 눈앞의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 장씨의 눈빛에 김씨가 장씨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혼기가 찬 여자라곤 소연이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나! 우리라고 보내고 싶었는 줄 알아! 우리도 살아야 하지 않겠어!”

그 외침에 장씨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이 혼인을 무르라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차가운 김씨의 눈빛과, 마을 사람들의 흘겨보는 시선이 그를 행동하지 못하게 했다.

그때, 비가 내렸다.

하늘에서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고향을 떠나는 새색시의 눈물방울을 대신하는 듯했다.

마을 전체에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개를 걷으며, 네 명의 사내와 두 명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들은 모두 풍채가 좋고 여인들은 고왔다. 특이하게도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얼굴을 전부 가린 여우 가면이 그들의 얼굴을 보이지 않게 했다.

물건을 다뤄온 장씨는 알 수 있었다. 여섯 모두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급품이 아닌 것이 없었다.

시종과 시비들까지 저런 차림새라니 여우들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니, 정말이로구나. 한때 흘러들었던 이야기가 머리에서 엉키기 시작했다.

그중 흰 가면을 쓴 여인이 앞으로 나서 손짓하자, 저 멀리서 표정을 구기고 앉아있던 박영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장정 넷과 함께 자리를 떴다.

그리고 어디 숨겨뒀었는지 모를 꽃가마를 든 채로 다시 걸어 나왔다.

장정 넷이 들고 있는데도 어찌나 무거운지 꽃가마가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여우가 저리 가라는 듯 휘휘 손을 저었다. 그 손짓에 따라 구름이 꽃가마를 감싸더니, 가마가 허공에 붕 뜨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그 광경이 얼핏 상서로워 보이게 했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불길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그것을 흘겨볼 뿐이었다.

가면을 쓴 사내들이 꽃가마를 감싸고, 여인들이 앞장서며 몰려든 마을 사람들을 뒷걸음질 치게 했다.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 가면을 쓴 한 여인이 우습다는 듯 꺄르르 웃었다.

웃음소리와 함께 안개는 점점 짙어지고, 여우들과 신부는 그렇게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사라진 그들의 모습에, 자신이 헛것을 본게 아닐까 생각한 장씨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떠나야 했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서 관아에 신고를 하든 해야 했다.

하지만, 장씨는 떠날 수 없었다.

“밥은 먹고 가시오.”

그래도 잔칫날이니 밥은 먹고 가야지.

장씨의 어깨를 붙잡은 김씨의 눈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

한 번쯤 밖을 내다볼 법도 한데, 붉은 너울을 뒤집어쓴 신부는 겁을 먹은 듯 몸을 웅크리고만 있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그들은 마을을 떠나고도 한참을 걸었다.

분명 그 앞은 험한 산길이었을 터인데, 그들은 그곳을 너른 평지처럼 사뿐사뿐 걷고 있었다.

그때, 구름을 타고 유유자적 날아가던 꽃가마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신부가 놀라 몸을 일으키려다 천장에 머리를 부딪힌 것도 잠시, 신부는 갑작스럽게 느껴진 충격에 또 한 번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던 여인 중 한 사람이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여우 굴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이제 나오셔야죠? 모두 기다리고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는 여인의 말에는 가시가 돋아있어서, 신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마 밖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오고 말았다.

그 한심한 모습에 여기저기서 여러 감정이 담긴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자리에서 일어난 신부는 예상과는 다른 모습이었던 탓이었다.

키는 6척이 넘었고, 고운 혼례복으로 감싸져 있음에도 웬만한 사내보다 덩치가 좋은 것이 훤히 보였다.

날카롭게 쏘아붙이던 흰가면 여인도 위협적인 그 모양새에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정작, 그 상황을 만든 주인공은 눈앞에 보이는 별천지의 모습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집 여러 채가 그대로 높이 쌓여있는 것 같은 화려한 건물들이라던가, 형형색색으로 꾸며진 길거리, 심지어 저 멀리 몰려 있는 이들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이들 뿐만 아니라, 가끔 짐승의 모습을 한 이들도 섞여 있었다.

신부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자, 잠시 물러났던 흰가면 여인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신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이제 가셔야지요. 그분이 기다리셔요.”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신부가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신부의 걸음걸이가 엉성했다.

신부는 제 딴엔 사뿐사뿐 걸으려 하는 것 같았으나, 그 모양새가 씩씩하기 그지없어서 되려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신부의 뒤를 보좌하듯 사뿐사뿐 걸어오는 여인들은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며 가면 뒤로 하객들을 쏘아보았다.

물론, 신부는 그런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열심히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리고, 저 너머로 한 사내가 신부의 눈에 담겼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칼이 태양 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듯했다. 짙은 눈매와 검은 눈동자, 어디서도 본 적 없었던 빽빽한 속눈썹이 시선을 끌었다. 시선을 끄는 것은 그 눈이었으나, 다른 곳이 어디 하나 모나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균형 잡힌 그 얼굴은 누구보다 조화로워 보였다.

어찌 사람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

어느 명인이 와도 저 아름다움을 표현하지 못할 것이며, 그 어느 화백도 제 화폭에 저 아름다움을 담지 못할 것이었다.

다른 이가 입었다면 끔찍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한 혼례복도 그가 입으니 그저 한 폭의 그림 같을 뿐이었다.

주위의 모두가 넋을 잃고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으나, 신부는 마저 씩씩하게 걸어 그의 맞은편으로 걸어 들어갔다.

신랑이 그런 신부를 응시했다.

붉은 너울이 신부를 가리고 있으니, 신부가 그를 보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침묵 속에서 혼례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신방안에 나란히 앉아있는데, 두 사람 사이로 자리한 탁자 위에 두 잔이 놓여있었다.

합환주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지는 않는지 머뭇거리는 신부를 향해, 신랑이 제 잔을 들어 술을 들이켜더니, 신부를 빤히 바라보았다.

“해가 뜨고서야 마실 생각인가?”

처음으로 듣는 신랑의 목소리는 짐승과 같은 날것의 그것이었다.

유독 낮은 목소리가 조용한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에 놀라 굳어있던 것도 잠시, 신부의 손끝이 슬쩍 너울 밖으로 나오더니 재빠르게 잔을 제 너울 안으로 들였다.

그 행동이 어이가 없을 법도 한데, 신랑은 개의치 않은 듯 제 잔을 내려놓으며 신부에게 물었다.

“다 마셨나?”

신랑의 낮은 목소리가 또다시 조용한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덜걱, 잔을 내려놓은 신부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입은 꾹 다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신랑 또한 할 말이 없다는 듯 신부를 바라보자, 신부는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듯 머뭇거리며 천천히 신랑을 향해 움직였다. 그 조심스러운 행동이 마치 짐승에게 다가가는 듯 보였다.

그런 것쯤은 신경도 쓰지 않으며, 신랑은 아직도 신부를 가리고 있는 너울을 걷기 위해 왼손을 뻗으려 했다.

그 순간, 날카로운 날붙이가 번쩍였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날카롭게 벼린 순수한 살의가 그를 덮쳤다.

하지만 신랑 또한 녹록지 않은 자였다.

날붙이를 한 손으로 붙잡은 그는, 제 위에 올라탄 신부를 바라보았다. 겁을 먹지도, 당황하지도 않은 그 얼굴에 신부가 너울 안에서 이를 악물었다.

방울진 붉은 피가 결국 날붙이를 타고 흐르더니, 새것일 것이 분명한 흰 침구를 적셨다.

제힘에도 꼼짝도 하지 않는 신랑의 모습에 더욱 화가 난 건지, 신부가 몸을 숙여 더 강하게 신랑을 찌르려 했다.

두사람의 인영이 기울어지더니 붉은 너울이 신랑을 감쌌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너울만큼 붉고, 아름다운 붉은 머리칼이었다.

그전까지만해도 냉랭하기 그지없던 신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붉은 머리칼이 새순마냥 돋아난 둥그런 머리에. 눈은 부리부리하고, 콧대는 시원하게 뻗어있었다.

그랬다.

여우에게 시집온 붉은 머리의 신부는.

아주 잘생긴 남자였다.

***

“백호야, 지금이라도 그만두자. 응?”

소연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제 손을 잡아 왔다.

누구를 닮지 않아 마음씨가 이리 좋은지, 제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도 다른 이의 인생부터 걱정해주는 것이 아주 선녀가 따로 없었다.

그렇기에 강백호는 더욱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렇게 착한 사람을 요괴에게 덜렁 보내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강백호는 소연이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괘, 괜찮다니까, 혼례복도 없으면서 어떻게 시집을 간다고 그래.”

소연이가 입었어야 할 혼례복을 제 몸뚱이에 맞춰 만들었으니 당연히 소연이가 입을 혼례복은 존재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시집을 갈 듯 곱게 차려입은 제 모습을 보며 소연이는 또다시 눈물을 방울방울 떨구기 시작했다.

백호는 쭈뼛쭈뼛 소연이를 달래보려 애쓰며 주위의 친구들에게 눈을 굴렸다. 하지만 이 박정한 놈들은 이게 다 니 업보다~ 라는 표정으로 저를 보기만 할 뿐 도와주질 않고 있었다. 그런 그를 도와준 것은 소연이의 친구들이었다. 자신에게서 소연이를 떼어놓은 그들은 그들의 품에서 소연이를 달래며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고 소연이를 타일렀다.

강백호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들키기 전에 어서 빠져나가. …사형한테만 가면 어떻게든 살길이 있을 거야.”

소연이의 오빠인 치수 사형은 영감…아니, 스승님을 모시고 타지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거기까지만 도망갈 수 있다면 그다음은 분명 그 인간이 어떻게든 해줄 거라고, 강백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럼 백호 너는!?”

“다 방법이 있대도. 이 천재를 의심하는 거야?”

사실 없었다.

그것들의 본거지에서 살아 돌아올 방법 따위, 아무도 모를 테니까.

그렇다면 그저 다시는 신부를 구하지 못하도록 그 여우를 죽일 생각뿐이었다.

그러면 소연이는 무사할 수 있을 테니까.

그 사실을 꾹 숨긴 채로, 백호는 저를 바라보고 있는 소중한 친우를 바라보았다.

“호열아, 부탁한다. 너만 믿고 있을게.”

그 말에 강백호의 친구, 양호열이 작게 중얼거렸다.

“……도 너도 고집 한번 세다니까.”

“응?”

강백호의 의문 섞인 물음에 양호열이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사지로 들어갈 각오를 굳힌 자신의 친구를 보며, 양호열은 자신만 믿으라는 듯 강백호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입을 열었다.

“또 보자 백호야.”

그렇게 말한 양호열이 소연이를 그녀의 친구에게 넘겨받아 번쩍 들었다.

“자, 자. 이제 울지 말고. 조용히 떠날 시간이니까 백호한테 인사 한번 해줘. 어차피 또 볼 거잖아?”

그렇지? 그렇게 말하며 씩 웃어보이는 양호열의 모습에 소연이가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백호야… 정말 고마워. 꼭 돌아와야 해?”

그런 소연이의 말에 백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어두운 천을 뒤집어쓴 두 사람이 몰래 마을을 떠났다.

정체가 들키지 않도록 소연이의 친구들이 준비해준 붉은 너울을 뒤집어쓰곤, 제 친구들이 준비해준 날붙이를 혼례복 안에 숨겼다.

모두가 마음을 모아 필사적으로 준비한 계획이었다.실수는 용납되지 않았다.

강백호는 침을 꼴깍 삼키며 붉은 혼례복을 그러쥐었다. 손바닥에서 땀이 나는 것이 워낙 긴장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합환주까지 마셔가며 기다린 기회였다. 이렇게 끝날 수는 없었다. 강백호는 불타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한껏 적의를 드러내며 제 눈앞의 여우를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날붙이를 붙잡고 있는 그의 왼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 순간마저도 사람을 홀리듯 아름다운 얼굴의 눈썹이 조금 일그러지더니, 쨍강하는 소리와 함께 날붙이가 설탕 과자처럼 부러졌다. 손에 쥔 파편을 저 멀리 던진 검은 여우가, 순식간에 제 왼손을 뻗어 강백호의 목을 붙잡아 그러쥐곤, 그대로 힘을 주어 끌어내 침상 위로 쓰러트렸다.

순간 컥. 하는 소리를 내며 붙잡힌 강백호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금세 그 몸짓을 제압한 여우가 강백호를 내려다보았다.

흐트러진 붉은 너울 위로 흐드러진 신부는 치욕스러움에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친 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쉽게 제압당하다니. 상대가 괴물인 탓이 컸지만, 강백호에겐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자식 이거 안 놔!?”

“내가 왜?”

“이 여우 자식이…!”

이를 악물며 여우를 노려보자, 여우가 그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왜 나를 죽이려 했지?”

“…”

“대답하지 않으면 네 마을에 책임을 묻겠다.”

정말이지 치사하고 야비한 놈이 따로 없었다. 강백호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다.

“네놈이 죽어야 소연이가 안심하고 살 수 있을 테니까.”

“… 원래 왔어야 할 신부인가.”

강백호는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강백호를 보며 여우가 입을 열었다.

“멍청이.”

“뭐!?”

“내가 죽는다고 끝나지 않아. 다른 여우가 이 자리에 서겠지. 이건 그런 약속이니까.”

“…”

“그리고, 한번 인간을 내어준 자들이다. 두 번은 못 내어줄 것 같나? 도망치더라도 찾고 또 찾아서 우리의 앞에 내어놓겠지.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반박하고 싶은데 반박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박영감이 혼담을 가져왔을 때, 반발하는 채씨 집안 사람들을 가둬둔 채로 혼사를 진행시키려 하지 않았던가. 그걸 알기 때문에 강백호와 소연이의 친구들이 그녀를 필사적으로 도망치게 한 것이었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강백호를 향해, 여우가 다시 한번 말을 꺼냈다.

“…뭐, 그 여자가 신부가 되지 않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그게 뭔데?”

“네가 정말 내 신부가 되면 되는 거다.”

강백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눈이 삐기라도 했나 보지? 딱 봐도 남자인 거 안 보여?”

“… 상관없어.”

그렇게 말한 여우가 강백호에게 입을 맞췄다.

강백호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그 표정도 잠시일 뿐 제 입안에 밀어 넣어진 살덩이가 무언가를 밀어 넣었다.

꿀꺽.

강백호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삼켰다.

“…!”

“내 이름은 서태웅이다. 기억해 두도록 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커다란 격통이 느껴졌다. 목으로 넘어간 불길이 손끝까지 퍼졌다가 잦아들길 반복했다.

고통이 밀려올 때마다, 그것을 달래주듯 서태웅의 손이 강백호의 뺨에 닿았다.

“…흐, 헉. 허억…”

숨을 내쉴 때마다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괴로움에 침구를 쥐어뜯자 또다시 서태웅이 강백호에게 입을 맞췄다.

서태웅에게서 넘어오는 차디찬 기운이 불길을 식히듯 입에 머금어지자, 강백호는 거부하지 못한 채 그 기운을 받아넘길 수밖에 없었다.

몸이 이렇게 이상한 것은 분명 저 여우 자식 때문이 분명했다.

저 뻔뻔하고 죽이고 싶은 여우 자식을 한 대 쥐어패고 싶은데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차디찬 기운을 받아넘겼음에도 몸에서는 제 내부를 쥐어 뜯는듯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몸에서는 점차 불길이 거세져 몸이 붉어지고 있었다. 머리까지 뜨거움이 올라오자 점점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강백호는 어느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잊고 멍하니 눈앞의 서태웅을 올려다보았다.

서태웅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에 눈을 맞추곤 강백호를 응시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으나, 강백호에겐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저 자식을 죽여버리겠다는 마음과 함께, 이 고통을 어떻게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하기 시작했다.

어느 것이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두 마음 모두 진심일지도 몰랐다.

그것도 잠시, 짐승의 입술이 또다시 인간에게 내리 앉았다. 그 입술은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서 내뿜는 것은 사납기 그지 없었다. 그가 강백호에게 단숨에 불어넣은 기운이 몸안의 불꽃과 만나 큰 폭발이 일듯 일렁였다. 벼락이 몸 안에서 내리친 것 같았다.

벼락처럼 내리친 그의 기운은 쾌감과 함께 머리끝까지 강백호를 휘저었다. 불길을 휘어잡으면서도 또다시 벼락처럼 내리꽂는 쾌감에 벌어진 강백호의 입가에서 마저 삼키지 못한 침이 흘렀다.

이제는 그전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불길이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도 까마득했다. 어느새 아무 생각도 못 하는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의 열기를 느끼며.

강백호는 그대로 까무룩 쓰러지고 말았다.

***

탕…탕…

공이 바닥에서 튕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쩐지 낯익은 소리에, 강백호는 눈을 떴다.

사방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그는 그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탕…탕…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갔다.

어쩐지 마음이 급해진 강백호는 그곳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반긴 것은, 어딘가 익숙한 검고 짧은 머리칼이었다.

이쪽을 바라보지 않는 검은 머리의 소년이 무심하게 공을 튀기고 있었다.

그 뒤통수를 멍하니 바라보며, 강백호가 생각했다.

누구였더라? 기억나는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어쩐지 낯이 익었다.

그 순간, 강백호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다음엔 언제 올 거야?”

제가 말하고도 스스로 놀란 강백호가 손바닥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제 입에서 나왔다기엔 너무 앳된 소년의 목소리였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저 뒤돌아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나풀거리고, 흰 피부가 두 눈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깊고 짙은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친 강백호는 허공에 붕 뜨는 느낌에 상체를 퍼덕거렸다.

큰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 강백호는 제 등에 느껴지는 통증에 표정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런 강백호를, 서태웅이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일어나자마자 그 꼴이라니. 한심하다. 멍청이.”

“뭐 인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강백호가 서태웅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 태연한 얼굴을 보자마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심지어 저 여우 자식은 어제의 혼례복은 어디로 갔는지, 처음 보는 의복을 입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꽤나 멋스럽게 잘 어울렸는데,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강백호는 제가 쓰러진 사이 옷까지 갈아입은 것이 얄밉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너, 너 이 자식 어제 그런 짓을 해놓고…!”

그 말을 꺼내자 어젯밤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르기 시작했다. 죽을 것 같았던 그 고통도, 처음 느낀 그 기분도 전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내 이름은 멍청이가 아니라 강백호님이거든!?”

무엇이라 더 따지고 싶었는데, 정작 나온 것은 유치한 말꼬리 잡기였다. 그런 강백호의 말이 우스운지 콧방귀를 뀐 서태웅이 강백호를 응시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

하지만 굳이 이름으로 불러야 할 이유라도 있나? 네놈의 행동만 보면 멍청이가 딱이야. 그렇게 딱 잘라 말한 서태웅이 침상 밖으로 나와 강백호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점점 가까워져 거리에 강백호가 질 수 없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코끝이 닿았다. 그 정도로 가까이 있었지만, 먼저 뒷걸음질 치기 싫었던 강백호는 필사적으로 제 본능을 억눌렀다.

먼저 얼굴을 뗀 것은 서태웅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강백호를 응시하다가 알 수 없는 눈빛을 한 채로 몸을 돌렸다. 저절로 방문이 열리고, 서태웅은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 그런 그의 행동에 자신이 이긴 거라며 의기양양하던 강백호는 그대로 서태웅이 돌아오지 않자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여우 자식, 진짜 간 건가?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꼴 보기 싫었는데도, 정작 정말로 사라지니 강백호의 기분이 심숭생숭해졌다.

이 천재님께 한 방 맞을까봐 도망간 거 아냐? 겁쟁이 여우 자식 같으니라고…

괜스레 그런 생각을 하며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깜짝 놀란 강백호가 누구냐고 물을새도 없이, 누군가 방 안으로 잽싸게 들어왔다.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갈색끼가 있는 굽이치는 검은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묶은 강단 있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여인은 품 안에 무언가 바리바리 싸 들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가 갈아입을 옷이라는 것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여인은 강백호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어 보이곤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와 그의 품에 옷가지를 쥐여주었다. 강백호는 얼떨떨해하면서도 반사적으로 옷가지를 품에 끌어안았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몸은 좀 괜찮으세요?”

대답을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닌지, 여인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방 안의 창을 열었다. 그리곤 바닥에 쪼그려 앉아 나뒹구는 탁자와 잔을 정리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설마 남자분이 올 줄은 몰라서 준비를 많이 못 했어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으니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아차, 내 소개를 안 했네. 전 이한나라고 해요. 한나라고 불러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또박또박 쏟아지는 한나의 말에 강백호는 대답을 하려다가 실패하고, 또 하려다가 막히다가 결국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침구마저 반듯이 정리한 한나가 강백호와 눈을 마주치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마님 성함은 어떻게 되시나요?”

강백호는 그 말에 섞인 소름 끼치는 단어에 몸서리를 쳤다. 마님이라니, 설마 저게 지금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란 말인가? 금방이라도 소리쳐 정정하고 싶었지만 눈앞의 여인은 잘못이 없었다. 강백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한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마…님 이라뇨?”

그 조심스러운 물음에 도리어 한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태웅님의 부인이시니까, 마님이죠? 제가 틀린 말을 했을까요?”

강백호의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누가 그 여우 놈의 부인이란 말인가! 강백호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필사적으로 다잡으며 그 말을 반박하고 싶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생각을 말로 꺼내는 것은 강백호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도 초면인 여성에겐 더더욱 그랬다. 결국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아, 아니 그러니까. 저도 남자니까 마…님은 아니지 않…나요…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원래는 단호하게 거절하려고 했던 한나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계속 제 눈치를 보는 것 같은 강백호를 바라보며 곤란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원래는 안될 말씀이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죠. 마님의 뜻에 따를게요.”

그래서 성함은요? 그렇게 물어오는 한나의 똑 부러진 목소리에, 강백호는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강백호…인데요.”

“음음. 백호님이시구나.”

“그, 그리고 말도 편하게 해주셨음 하는데요…”

“그것만큼은 저도 양보해드릴 수 없네요~ 전 죽기엔 아직 젊은걸요.”

“…죽…다뇨?”

“어머, 모르시나요? 맞다~ 백호님은 아직 이곳에 오신 지 얼마 안 되셨으니 모르시는 게 당연하죠.”

“…?”

“자자, 우선 이야기는 이쯤 하고. 우선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계속 그런 차림으로 있으실 건 아니잖아요?”

그런 차림이라니? 백호는 그제서야 고개를 내려 제 꼴을 확인해보았다. 곱디 고운 혼례복은 이리저리 구겨질 대로 구겨져 엉망이었다. 입고 싶어 입은 옷은 아니었으나 이 혼례복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소연이의 친구들이 생각나 강백호는 어쩐지 마음이 좋지 않아졌다.

강백호의 표정이 점점 나빠지자 한나가 화제를 돌리려는 듯 강백호를 향해 물었다.

“입는 것 도와드릴까요?”

한나가 그렇게 말하자 강백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제가 입을 수 있습니다!”

“그, 그러니까 한나씨는 이제 나가보셔도…”

“음… 그러면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문제가 생기시면 불러주세요.”

꼭! 불러주셔야 해요! 그렇게 다시한번 말한 한나가 문밖으로 나가자, 강백호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폭풍이 몰아치고 간 것 같았다.

강백호는 우선 품 안에 꼭 쥐고 있던 옷을 확인해보았다. 그것은 검은빛의 의복이었다. 항상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복장을 선호해왔던 강백호로서는 처음 보는 복식이라, 어떻게 입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의복을 멀뚱히 바라보던 강백호는 우선 혼례복부터 벗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침상 위에 의복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아직 제 몸을 휘감은 혼례복을 벗기 위해 고개를 숙이다가, 이걸 어떻게 벗지. 하는 의문에 빠지고 말았다.

에초에 이걸 어떻게 입었었던가. 입을 때도 도움을 받았던 옷을 혼자 벗을 수는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강백호가 몸을 뒤틀며 혼례복을 벗기 위해 버둥거렸다.

가까스로 혼례복을 벗은 강백호가, 심하게 구겨진 혼례복을 반듯하게 접어 바닥에 내려놓곤 아직도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검은빛의 의복을 들어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팔을 한번 넣어보기도 하고, 이게 아닌 것 같아 다시 벗었다가 또다시 입었다를 반복하며 한참을 씨름하던 강백호는 결국,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저… ”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지 못하는 강백호가 문을 아주 조금 열고 문 너머에 있는 한나를 향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소리를 놓치지 않은 한나가 몸을 돌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를 바라보았다.

“네? 왜 그러세요?”

“그…죄송합니다. 입는 법을 모르겠어요”

도,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여간 곤란한 게 아닌거 같아서, 한나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말았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

쑥스러움도 잠시, 강백호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제가 입은 옷을 고개를 숙여 쳐다보았다.

살짝 뻣뻣하면서도 매끄러운 그 촉감이 살갗에 닿아왔다.

살면서 처음 입어보는 재질의 옷에 신기해하던 강백호는 이어지는 한나의 말에 표정이 일그러트렸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태웅님 옷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는데 잘 맞으시네요. 다행이다.”

그 여우 자식의 옷이라고?

그제서야 강백호는 제가 입은 옷이 오늘 일어나서 본 서태웅의 옷과 비슷하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한나는 얼굴에 생각이 그대로 드러난 백호를 보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곳에서 백호님처럼 풍채가 좋은 분은 태웅님밖에 없으니까요.”

있다고 해도 백호님께 드릴 옷은 못될 거에요. 한나는 그렇게 말을 끝맺었다. 그런 한나의 말에 더욱 할 말이 없어진 강백호가 어색하게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러면 어쩔 수 없죠.”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아참, 혼례복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역시 세탁해서 다시 가져다드릴까요? 이렇게 예쁜데 누가 이렇게 만들어 뒀을까요. 참 나쁜 사람이다. 그렇죠?”

혼례복을 들어 올린 한나가 백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범인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한나도 그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 말은 해도 괜찮다는 듯 태연할 뿐이었다.

‘그렇죠, 아주 천하의 몹쓸 여우 놈이라고요.’

그리고, 백호는 그 말에 마구 동의 하고 말았다.

다시 입을 옷은 아니었지만, 저런 식으로 버려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백호는 소연이를 위해 그녀의 혼례복을 만드는 척하면서 저에게 맞춘 혼례복을 한땀한땀 자수를 놓던 그들을 기억했다. 이건 그렇게 만들어진 마음이 담긴 옷이었다.

그래서, 강백호는 최대한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한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꺼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짧은 말 한마디에 담긴 마음이 전해졌는지, 한나도 방금전처럼 그러지 말라며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다만 아주 잠시, 고개를 숙인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이며 혼례복을 차곡차곡 접어 품 안에 끌어안았다.

“네, 믿고 기다려주세요. 아주 완벽하게 고쳐서 돌려드릴게요.”

어쩐지 방안에 따스한 공기가 흘러 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커다란 타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귀를 때리는 그 소리에 깜짝 놀란 강백호가 깜짝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한나는 조금 놀란 것 같아 보였지만 강백호와는 달리 조금 다른 것에 놀란 듯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렇게 중얼거린 한나가 제 입가에서 손을 내려놓으며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님. 정말 죄송하지만 태웅님한테 가 계실 수 있으실까요?”

한나가 정말 곤란해 보이는 표정으로 강백호를 바라보자, 갑작스러운 말에도 강백호는 뭐라 답을 하지도 못하고 또다시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네, …넵?”

“원래라면 제가 안내해드려야 하는데, 깜빡해둔 일이 떠올라서요.”

제가 없으면 안 되는 일이라… 그렇게 말한 한나가 말을 이었다.

“태웅님은 아마 뒤뜰에 계실 거예요. 오찬 전에는 항상 그곳에 계시거든요.”

뭐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한나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여기서 뒤로 돌아서 바로 쭉 가시면 뒤뜰이에요. 도착하시면 태웅님이 뭐라도 설명해 주실테니까! 꼭 여기서 나가셔서 뒤로 가신 다음에 쭉 가셔야 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이 힘차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나는 재빠르게 방 밖으로 나섰다. 그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정신을 차린 강백호가 그녀를 따라 방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저 멀리에서 걷고 있을 정도였다.

‘뒤뜰…이라고 했던가.’

재수 없는 여우 자식이 거기에 있다고…? 그러면 아까 사라진 후에 거기에 간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강백호는 계속 여우 놈의 생각을 하는 자신의 모습에 경악하며 제 이마를 뻑 소리가 나게 쳤다. 이마가 얼얼해지며 그 자리가 붉게 물들었다.

이건 내가 그 여우 놈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한나 씨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강백호가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유가 어떻든, 검은 여우가 있다는 그 뒤뜰로 말이다.

발걸음을 옮기며 가장 처음 느낀 것은, 이 부근이 정말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사람이든 요괴든 그곳에 있다면 인기척이라도 느껴질 것을, 나름 짐승 같다는 소리까지 들어온 강백호의 감각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저택이 보일 때는 조금 나았었는데, 그곳을 빙 돌아 뒤로 나오니 저택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고, 나무와 풀만 무성할 뿐이었다. 강백호는 처음엔 눈을 의심했으나, 이곳이 여우 굴임을 다시 한번 깨닫곤 이것도 여우의 요술인가보다 하였다.

그 어지러운 초목 사이에서, 강백호는 누군가의 걸음으로 만들어진 듯 한 길을 발견했다. 그 길은 성인 남성 한 명이 지나갈 정도의 넓이였는데, 강백호는 이 길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녀석이 유유자적 이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머리에 그려졌다. 강백호는 재수 없는 생각을 했다며 머리를 휘젓곤, 그 길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군가의 발걸음으로 다져진 길을 걷다 보니, 저 길 끝에서 햇빛이 반짝였다. 강백호는 왼손을 들어 눈부신 햇빛을 가로막으며 눈가를 찌푸렸다.

그리고 그 순간, 강백호는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서 호선을 그리며 지나간 가죽공이 저 높은 나무 위, 둥글게 엮인 가지 사이로 들어갔다. 뚝 하고 떨어진 공이 데구르르 바닥을 굴렀다.

정작 그 광경을 만든 장본인은 터벅터벅 걸어가 바닥을 구르는 가죽공을 줍곤 아직도 멍하니 제 쪽을 바라보는 강백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둘뿐인 공터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날 보러 왔으면 용건을 말해. 멍청이.”

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강백호가 서태웅을 향해 소리쳤다.

“네놈 보러 온 거 아니거든!?”

사실 서태웅을 찾아온 게 맞았지만,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할 말이 생각나는 것은 아니여서, 강백호는 그저 몸을 부들거리며 입을 달싹거렸다.

“그래?”

그런 강백호를 보며 콧방귀를 뀐 서태웅이 강백호에게서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강백호의 배에서 천둥이 쳤다. 꼬르르륵. 큰소리로 울려퍼지는 그 우렁찬 소리에, 서태웅이 다시 한번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너…”

또다시 천둥이 쳤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은 탓일까, 자신의 배는 눈치도 없이 계속 울어대고 있었다. 어느새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버린 강백호가 이게 다 네 놈 때 문이라는 듯이 서태웅을 쏘아보았다.

“이한나를 보냈을 텐데.”

서태웅이 말하자, 강백호가 변명하듯이 입을 열었다.

“하…한나 씨가 여기로 가보랬거든!?”

“…”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강백호는 방금전의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서야 그것이 서태웅을 찾으러 왔다는 말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정말이지 패착이었다.

강백호가 아무말도 못하고 있던 그때, 서태웅이 입을 열었다.

“따라와.”

이 몸이 왜 네 녀석을 따라가야 하는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그 말을 내뱉는 것을 강백호는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서태웅의 뒷모습을 쫓아 걸어가는 길은 어쩐지 방금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의 뒤를 쫓아간다는 건 원래 이런 기분이 드는 건가? 강백호는 제 앞에서 흔들리는 옷자락과 검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 뒷모습 하나만 보고 걷다 보니, 어느새 다시 저택의 안이었다.

서태웅은 어느 방 앞에서 멈춰서더니, 그대로 문을 열어젖혔다. 강백호는 그런 서태웅을 보며 슬쩍 방안을 훔쳐보았다. 그곳에는 커다란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자연스럽게 착석한 서태웅은, 오지 않고 뭐하냐는 듯이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강백호는 그 시선에 방 안으로 들어와 일부러 서태웅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음식을 든 시비들이 방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탁자를 채우는 음식들의 향연에 강백호는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제 입가를 가리며 입을 떡 벌렸다. 코를 간지럽히는 기름진 향기와, 달콤한 향기가 뒤섞여 입가에 침을 고이게 했다.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을 것 같은 산해진미가 눈앞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마지막 접시를 내려놓은 시비가 꾸벅 인사를 하며 방 밖으로 나섰다.

탁. 소리와 함께 저절로 문이 닫히고, 방안은 음식으로 가득 찬 탁자와 두 사람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강백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뱃가죽이 등에 붙어있는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눈앞에 산해진미를 놔두고도 먹지 못하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이 여우 자식이 그런 의도로 자신을 여기에 앉혀둔 것이라면 그대로 한방 먹여주리라 생각하는 강백호에게, 서태웅이 말했다.

“먹어.”

그 말에 강백호가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서태웅은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도 음식에 손을 대지 못하는 강백호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곤 짧게 입을 열었다.

“어제 내가 한 말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고 싶다면 먹어. 이야기는 그 후다.”

그렇게 통보해오는 서태웅의 말에, 강백호는 우선 제 앞에 놓인 그릇에 손을 댔다. 수많은 산해진미 속에서 유독 평범해 보이는 죽이었는데, 수저를 들어 내용물을 떠 입안에넣자 따듯한 온기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곡물의 고소한 맛이 혀끝에 맴돌았다.

맛있다. 강백호는 순간 여기가 어딘지도 잊어버리곤 제 친구들을 부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이렇 게 맛있는 것을 저 혼자 먹는게 미안할 정도였다.

망설였던 것이 거짓말처럼 강백호는 눈앞의 음식들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허기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바삭하게 구워진 오리는 기름기가 돌면서도 담백했고, 양념에 졸인 돼지고기는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그 밖에도 처음 보는 음식들이 많았는데, 어느 것은 오동통하니 살짝 비린 맛이 나면서도 씹는 맛이 좋았고, 어느 것은 불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사실 이건 내가 죽기 전에 꾸는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느 하나 맛이 없는 것이 없었다.

마지막 접시를 비우고 제 입가를 문지른 강백호가 저도 모르게 제 손가락을 핥았다. 이렇게 식사를 하고 만족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살면서 그가 양껏 먹어본 것이라곤 물뿐이어서, 이 정도를 혼자서 먹을 수 있는지도 처음 안 참이었다. 언제 제가 먹는 것을 보고 돼지 한 마리를 혼자 잡아먹을 놈이라고 말하던 사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말이 틀리지는 않은거같소 사형. 그렇게 자문자답하던 강백호가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시선의 주인공은 강백호를 바라보더니,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다 먹었나.”

그 말 한마디에 강백호는 다시 현실에 앉혀졌다. 그를 강제로 현재로 끌어내린 그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어제도 말했지만, 내가 죽어도 그 여자가 무사할 거란 보장은 할 수 없다.”

“이 자식이…”

또다시 소연이를 걸고넘어지는 그 말에, 강백호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든 말든, 서태웅은 말을 계속했다.

“멍청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거냐. 그렇게 중얼거리는 서태웅의 말에 치밀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히며 강백호가 입을 열었다.

“뭘 말하고 싶은 건데.”

“…그러면 반대로, 내가 살아있으면 그 여자는 어떻게 될까.”

“그야…”

그 순간, 강백호의 머리에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 저 여우 자식만 무사하다면 소연이는 무사할 수 있다는 건가? 그렇게 되묻기도 전에, 강백호의 표정을 읽은 서태웅이 말했다.

“이제야 이해한 거냐.”

이해야 확실히 됐다. 이렇게까지 떠먹여 줬는데도 모르면 정말 저 여우 자식 말대로 멍청이 중의 멍청이일 테니까.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이해는 했지.”

“이해는 했는데.”

강백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태웅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그를 내려다보며 의문을 담은 말을 꺼냈다.

“그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뭐냐?”

날 선 눈동자가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계속 저 여우 자식에게 뭐라고 하긴 했으나, 사실 저 여우 자식이 자신을 꽤나 신경 써주고 있는 편이라는 것을 강백호는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자신의 위치는 밑바닥 중의 밑바닥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말이 신부지 요괴에게 바치는 제물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든 죽여도 상관없는, 어제 처음 만난 인간 신부. 그것이 저 녀석과 나의 관계일 뿐이었다.

서태웅은 자신을 향한 날 선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가 죽지 않는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야. 네가 사라지면 신부 찾기는 계속될 거다.”

“…”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렇게 반복되겠지.”

강백호는 서태웅의 말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여우 자식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다. 그럼, 그것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강백호는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서태웅은 그런 강백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냥 있으면 돼.”

그 말에 강백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뭐?”

강백호가 놀라는 것도 잠시, 서태웅의 낮은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내 신부로서, 내 옆에 있어.”

“…”

“그런다면, 모든 것이 무사할 것이라고 약속하지.”

그렇게 말한 서태웅이 강백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답은?”

강백호는 서태웅이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저 손을 잡으면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어질 터였다.

언제나 저를 위해주던 소중한 친구들도, 선녀같이 착해서 걱정되던 소연이도, 언제나 허허 웃기만 하던 바보 같은 영감님도, 항상 화를 냈지만 그래도 자신을 아껴주던 사형과도 영영 이별해야 했다.

하지만,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저 여우 자식도 그것을 알고 내민 것이겠지.

그래서 강백호는,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마주 잡은 손은 생각보다 따듯했다고.

강백호는 생각했다.

***

아무도 없는 방에서 침상에 홀로 앉아, 강백호는 방금 전 그와 마주 잡았던 손을 천천히 접었다가 다시 폈다. 아직도 손바닥에 그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요괴의 말은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 걸까.

여우는 교활한 데다 남을 속이기 위해 거짓을 일삼는다던데, 사실, 그 약속조차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 꾸민 거짓말인 것은 아닐까?

어디까지 그 녀석을 믿어야 하는 거지?

수많은 생각이 강백호를 감쌌다.

머리가 아파오는 듯한 느낌에 강백호가 오른손을 들어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그리곤 그대로 침상에 털썩 누워버리며 눈을 깜빡였다.

생각이란걸 하며 살라며 호통치던 사형이 지금의 자신을 봤다면 그 부리부리한 눈을 크게 뜨지 않을까? 갑자기 그런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생각에 잠겨만 있는 건 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밀려드는 잡념을 쫓아낸 강백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뻐근한 목을 풀었다.

이렇게 된 거 정면으로 부딪혀 주지!

그렇게 생각하며, 강백호는 눈앞의 문을 세차게 열었다.

우선, 강백호는 여우 자식을 발견했었던 뒤뜰에 다시 한번 가보기로 했다. 이미 한번 가보았던 길이라 그런지, 조금 전보다 빠르게 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풀 사이로 난 길을 지나 도착한 너른 공터에는, 아쉽게도 여우 자식은 있지 않았다.

그럼 어디에 있는 거람. 사람 고생시키고 말이야. 괜히 투덜거린 강백호는 비어있는 공터를 슥 둘러보았다. 그리고 익숙한 물건을 발견했다.

바닥을 데구르르 구르고 있는 그것은 여우 자이 가지고 놀던 가죽공이었다. 강백호는 무심코 다가가 그 공을 주워 들었다. 얼마나 가지고 논건지 다 낡아빠진 가죽공의 모습에 강백호가 코웃음을 쳤다. 적어도 나이가 백살은 넘을 요괴가 공놀이를 좋아한다니, 마치 어린애 같지 않은가.

어쩐지 유쾌한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공을 만지작거리던 강백호는, 어쩐지 익숙한 느낌에 다시 한번 가죽공을 바라보았다. 이 모양,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곰곰이 생각하던 강백호는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눈을 크게 떴다.

아직 자신이 어렸을 적에, 손재주가 좋았던 엄마는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는 자신을 위해 여러 놀잇감을 만들어 주시곤 했었다. 그중 가장 좋아했던 것이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가죽공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달랐던 엄마만의 가죽공. 자신은 새로운 공을 가지게 되면 하루 종일 그 공을 가지고 놀았더랬다.

이 공은 아주 어릴 적, 엄마가 만들어주던 그 공과 매우 닮아있었다.

…이거 요괴들이 가지고 노는 공이었던 건가? 뭐, 낯선 사람과도 금세 사이가 좋아지던 엄마를 생각해보니 요괴 친구가 있었어도 이상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강백호는 그렇게 스스로 납득하곤, 저도 모르게 공을 한번 바닥에 튕겼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은 이후부터, 잊고 있던 이 감촉이 행복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두어 번 더 공을 튕기던 강백호가, 어릴 적 매번 그랬던 것처럼 커다란 나무 위를 향해 공을 던졌다. 공은 나무에 닿지도 못하고 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백호는 이게 아닌가, 싶어 뒷머리를 긁으며 공을 주으러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그때였다. 강백호의 뒤에서 이제는 낯설지 않은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해서 들어가겠냐. 멍청이.”

그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에, 강백호가 홱 고개를 돌렸다.

“방금은 그냥 연습이었거든!”

고개를 돌린 그곳엔 서태웅이 있었다. 서태웅은 강백호의 씩씩거리는 얼굴을 보곤 또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다시 한번 해봐.”

그 말에 강백호가 움찔, 몸을 떨었다. 사실, 자신이 없었다. 공을 만지는 것도 오랜만인 데다가, 방금도 나무에 스치지도 못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어째서인지 저 여우 자식 앞에서는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강백호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싫은데.”

그런 강백호를 향해 서태웅이 말했다.

“겁쟁이.”

“아니거든!?”

“그럼 던져봐.”

“싫어!”

유치한 말다툼이 오고갔다.

강백호는 제 눈앞에 있는 이 여우 자식이 아까 자신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내밀던 요괴가 맞는지 의심되기까지 했다. 강백호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애초에 그냥 공놀이일 뿐이잖아.”

강백호는 그렇게 말하며 서태웅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그 말에 여우 자식의 철면피에 아주 조금, 금이 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건 자신의 착각일지도 몰랐지만 일단, 강백호 자신은 그렇게 느끼고 말았다.

오늘 보았던 홀로 공을 던지던 여우 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한두 번 던져서 나오는 자세가 아니었다. 수백, 수천, 아니면 수만 번은 그렇게 혼자서 공을 던졌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침묵 속에서, 강백호가 입을 열었다.

“…혼자 하면 재미있냐?”

“…”

서태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강백호가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네, 이 천재님이 같이 놀아주도록 하지.”

“허?”

그 어이없다는 짧은 대답에, 강백호가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뭐야, 불만이라도 있냐?”

씩 웃는 강백호를 가만히 바라보던 서태웅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이나 해.”

이한나한테 말하면 그게 뭐든 준비해 줄 거다. 그렇게 말하는 서태웅이 자신을 밀어내는 것 같아서, 강백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 옆에 있으라고 한 건 저 녀석이면서, 왜 자신을 밀어낸단 말인가. 그래서 강백호는 공을 제 옆구리에 끼곤 서태웅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갑자기 이게 너무 하고 싶어졌거든?”

그것도 네놈이랑 같이. 그렇게 말을 마친 강백호가 서태웅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을 말이 없던 서태웅이 강백호를 향해 말했다.

“공 하나도 제대로 못 던지면서.”

사람 속을 벅벅 긁는 말에 강백호가 서태웅을 쏘아보았다.

“이 몸은 천재니까 금방 따라잡을 수 있거덩!?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마라!”

강백호의 우렁찬 말이 두 사람뿐인 빈 공터에 울려 퍼졌다. 그 선전포고에, 서태웅은 결국 알아서 하라는 듯 강백호에게 말했다.

“너야말로 후회하지 마라. 멍청이.”

그렇게 말한 서태웅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뒤돌아 가버렸다.

또다시 홀로 남겨진 강백호가 멍하니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표정을 찌푸렸다.

“다시 갈 거면 여긴 왜 온 거래.”

여우 자이 사라지자 불타오르던 마음의 불씨가 점점 잦아들었다. 강백호는 제 옆구리에 끼고 있던 공을 들어 올려 한번 바라보더니 휙, 하고 공을 위로 던졌다.

공은 또다시 나무를 스치지도 않고 떨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백호는 뒤돌아 저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저택으로 돌아오자, 저 멀리서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르며 급하게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익숙해서, 유심히 살펴보던 강백호는 그 인영이 오늘 아침에 만난 한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백호님…!!”

“하, 한나 씨? 왜 그러세요?”

“왜 그러긴요. 갑자기 사라지셔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그러고 보니 여우 자식을 찾아서 말을 해보겠다는 생각에 빠져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나왔었구나. 강백호는 제 행동을 돌아보곤 한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꼭 어디 가신다고 말씀 한마디라도 해주세요. 저랑 태웅님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그 말에 강백호가 눈을 크게 떴다. 한나씨는 그렇다고 쳐도 서태웅이 자신을 걱정했다니? 아까전의 그 태도를 생각하면 정말 믿기 힘든 말이었다.

“…여우 자식…아니, 서태웅이요?”

“네. 그럼요~ 태웅님도 백호님을 찾으러 가셨었는데, 못 만나셨나봐요.”

그럼 그곳에서 다시 만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 녀석이 자신을 찾으러 온것이었구나. 아니 근데 여우 자식은 왜 사람을 찾으러 와놓고 혼자 간 건데?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답을 하는것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강백호는 한나가 백호님? 하고 다시 한번 말을 걸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아, 아뇨. 만났어요.”

“어머, 그러세요? 그런데 왜 혼자 오셨지?”

그 좀생이같은 여우 자식 생각을 자신이 어떻게 알겠는가. 강백호는 무의식적으로 표정을 조금 찡그렸다가 풀었다.

“…먼저 가던데요. 여기 없나요?”

백호의 말에 한나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분이야 원래 신출귀몰한 분이다 보니까… 계셔도 마음만 먹으시면 어디에 계시는지 저희가 알 방도가 없어요.

한나가 강백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피곤하지 않으세요? 침소에서 편히 쉬고 계시면 저녁을 올려드릴게요. 아,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실까요?”

강백호는 그 걱정어린 따스한 말을 찬찬히 듣다가, 마지막 말에 눈을 깜빡였다.

필요한 것, 그게 뭘까. 그 순간, 조금 전에 나누었던 여우 자식과의 유치한 대화가 생각이 났다. 그래서, 강백호는 한나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가죽공을 하나 가져다줄 수 있으신가요.”

한나가 그 말을 듣곤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리고 되물었다.

“가죽공이요?”

“…네. 그, 이 정도 크기인데요.”

그렇게 말하며 손을 휘젓는 강백호를 보며, 한나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면 미리 만들어 둔 게 있어서 찾기만 하면 될 것 같아요. 찾는 즉시 바로 가져다드릴게요.”

한나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강백호가 감사를 표했다.

“그,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당연히 해드려야 하는걸요.”

그렇게 말하며 웃어 보이는 한나를 보며, 그 여우 자식이 뭐가 예쁘다고 이런 부탁을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고 강백호가 생각했다.

하지만 또다시 혼자서 공을 던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평생을 함께할 사이가 아닌가. 그러니까 이건 당연한 거라고, 강백호는 스스로 되뇌었다.

***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든 강백호는 퍼뜩, 눈을 떴다.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둘러보자, 가죽공이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잠에 들기전, 한나에게서 받은 가죽공이었다. 그것을 보고 나서야 강백호는 어제의 일이 꿈이 아님을 깨달았다.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킨 강백호가 혹시나 싶어 제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방금까지 강백호가 덮고 있던 이불이 구겨져 있을 뿐,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달이 높게 떠 있는 새카만 밤이었다.

이 방 안에서, 자신을 제외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여우 자식은 아직 안 들어온 건가? 아니면 다른 방에서 자고 있는걸지도. 무의식적으로 서태웅을 떠올리던 강백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섰다.

불빛 하나 없는 새카만 밤중이었지만,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이 있어 아주 안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강백호는 밤눈이 밝은 편이라 이 정도면 제 앞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강백호는 마음 가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 말도 없이 나온 것이 맘에 걸리긴 했으나, 해가 뜨기 전에만 돌아오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달을 보며 한참을 걷고 있자니, 눈앞에 보인 것은 너른 공터였다. 아는 길이라곤 여기밖에 없으니 당연한가 싶기도 하면서도, 또 이곳인가 해서 강백호는 어쩐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저 너머에 있는 익숙한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도 고운 그 얼굴이 단번에 그가 누군지 알게 했다. 아니, 애초에 여기에 있을 건 그놈밖에 없긴 했었다.

서태웅은 나무에 기대어 앉아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강백호는 일부러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걸어가 서태웅을 내려다보며 퉁명스럽게 말을 꺼냈다.

“뭐하냐, 혼자 청승 떨고 있고.”

답을 바란 말은 아니었으니, 강백호는 서태웅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행동에 서태웅은 아주 조금 고개를 돌려 강백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강백호는 그런 서태웅을 따라 저도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 높이 걸려있는 달과 수 놓인 작은 별들이 아름다웠다. 오히려, 너무 아름다워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제 옆에 있는 누구처럼 말이다.

정작 그 생각의 주인공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원체 모르겠지만.

강백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이, 여우.”

대답을 바란 부름이 아니었다. 강백호는 말을 이었다.

“아까 왜 도망간 거냐.”

차가운 새벽의 공기 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낱말이 밖으로 꺼내진다.

“날 찾으러 온 거였다면서, 그런데 왜 먼저 가버린 건데.”

서태웅은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함께 침묵하던 강백호가 또다시 말을 꺼냈다.

“솔직히 말하면 난 네가 싫어.”

“…네놈이 요괴인 것도, 네놈이 한 행동들도, 네 행동에 휘둘린 마을 사람들이나, 휘둘리고 있는 나도. 전부 싫어.”

“…”

“오늘도 그래, 네 옆에 있으라는 말 한마디만 하고 아무 설명도 해주는 게 없잖냐. 너한테는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한테는 아니거든?”

속에서 끓기만 하던 단어들이 문장이 되어 내뱉어지고 나서야, 강백호는 자신이 이 말을 하고 싶어 했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알 수 있었다. 강백호가 그 문장을 끄집어내 입 밖으로 내뱉었다.

“하지만 난 도망 같은 거 안 칠 거다.”

여우 자식을 바라보지 않았기에, 그녀석이 무슨 표정을 짓고있을지는 알지 못했다.

뭐,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건 강백호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였으니까.

“네가 약속만 지킨다면, 절대로 도망 안쳐.”

“…”

“그러니까 너도, 이 천재님이 네놈을 좋아할 수 있도록 노력해봐라.”

그렇게 말한 강백호가 입을 닫곤 잠시 말하는 것을 멈추었다가, 아주 작게 덧붙였다.

“나도, 노력할 테니까.”

“…”

“…”

조금 오랫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강백호가 무언가 생각난 듯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음, 밖이랑 서신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게 해주면 안 되냐?”

자신이 말하고도 멋쩍은지 강백호가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리던 순간, 방금까지 홀로 울려 퍼지던 제 목소리와는 다른 목소리가 강백호의 귀에 꽂혔다. 강백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전령을 한 명 붙여주지.”

그 말에 강백호가 홱 고개를 돌렸다. 서태웅은 그 시선을 모른는 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강백호의 머리 위로 무언가를 떨구었다. 제 눈을 가리는 천 조각에 그것을 끌어내린 강백호는, 그것이 방금까지 서태웅이 걸치고 있던 겉옷임을 깨달았다. 서태웅이 입을 열었다.

“바람이 차다. 빨리 돌아가.”

그 말이 끝나자 서태웅은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전처럼 순식간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따라오라는 듯 이전보다 느려진 그 발걸음에, 강백호는 서태웅의 겉옷을 걸칠 생각도 못 하고 품에 끌어안고는, 제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낼 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 뒤를 쫓아갔다.

그런 두사람을 비추는 달이 아주 밝았다.

**

달빛 아래를 함께 걸어 돌아온 한 명의 인간과 요괴는 저들의 신방에 들어섰다.

솔직히 말하면, 서태웅이 다른 곳으로 갈 것 이라 생각한 강백호는 조금 놀란 상태였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태웅은 저벅저벅 걸어가 활짝 열린 창을 닫을 뿐이었다.

방안에 들어차던 달빛이 사라지자, 방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어둠에 강백호가 눈을 찌푸렸다.

“왜 갑자기 창을 닫아?”

백호의 그 물음에, 어둠 너머에서 서태웅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자는 데 방해가 되니까.”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여서, 강백호는 뭐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어둡긴 했어도 익숙해지니 아예 안 보이는 정도는 아니었다. 대답하기를 포기한 강백호가 발걸음을 옮겨 탁자 쪽으로 걸어갔다. 저도 모르게 꼭 끌어안고 있던 누구 씨의 겉옷을 잘 접어 의자에 걸어둔 강백호가 흘끔, 인기척이 느껴지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을 닫은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서태웅을 의식하던 강백호는, 고개를 홱 돌리곤 제 옷을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 강백호의 행동에 미동도 없던 서태웅이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거냐.”

생각지도 못한 서태웅의 반응에 옷을 벗어내려던 강백호가 우뚝 행동을 멈추곤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응? 옷 벗고 있잖아. 보면 몰라? 아. 어두워서 안 보이려나.”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강백호의 말에, 서태웅의 표정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러니까 왜 옷을…”

그런 서태웅의 말을 끊으며, 강백호가 말했다.

“난 원래 옷 벗고 자.”

거치적거리면 불편해서 잠이 잘 안 와서. 근데 이런 거까지 너한테 말해줘야 하냐?

그렇게 투덜거린 강백호가 제 옷을 마저 벗었다. 어둠 속에서 강백호의 잘 잡힌 상체 근육이 드러났다. 서태웅 정도 되는 요괴에게 어둠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아서, 그 꼴이 아주 선명히 그 두 눈에 담겼다. 서태웅이 표정을 조금 더 찡그렸다.

서태웅이 표정을 찡그리든 말든, 강백호는 계속 제가 하고자 하는 행동을 했다. 윗옷을 착착 개어놓은 강백호가 제 바지에 손을 댔다. 잠시 망설이듯 고민하던 강백호가 결심한 듯 바지마저 끌어 내렸다. 순식간에 속곳 차림이 된 강백호가 서태웅이 있는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가, 보지 않은 척 다시 고개를 돌리곤 바지마저 개어 윗옷 위에 올려두었다.

“너는 안 벗어?”

강백호의 물음에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서태웅이 입을 열었다.

“…안 벗어.”

그새 어둠에 적응한 강백호의 눈이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 손을 잡아끌었다. 서태웅은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그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대로 침상으로 다가간 강백호가 서태웅의 손을 놓아버리곤 그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서태웅은 아무 말 없이 그 행동에 어울려 주었다.

침상의 빈자리에 무릎으로 기어 올라간 강백호가 그 옆자리에 풀썩, 드러누웠다. 그러곤 몸을 서태웅이 앉아있는 옆으로 돌리더니, 비어있는 제 옆자리를 툭툭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그 행동에 서태웅이 한숨을 푹 쉬곤, 침상으로 올라와 그 옆에 누웠다. 그제서야 강백호는 만족한 듯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둔갑은 안 푸냐? 왜, 여우들은 사람 모습으로 둔갑하는 거라면서. 본모습이 따로 있을 거 아니야.”

잘 때까지 그러고 있으면 안 불편해? 강백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듯한 그 시선에 서태웅이 강백호의 말에 답하기 위해 입을 뗐다.

“…이것도 내 본모습 중 하나다. 불편하진 않아.”

서태웅이 귀찮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착실하게 대답해주자 강백호는 이상하게 가슴께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것도 저 녀석 나름대로 노력이란걸 하고 있는건가. 강백호는 그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됐고.”

말을 마치자 어색함이 몰려왔다. 강백호는 머쓱해하며 몸을 돌려 서태웅을 등졌다. 강백호의 말이 끊기자,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서태웅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귀랑 꼬리를 숨기는 건. 좀 귀찮긴 해.”

그 말에 강백호가 슬쩍 고개를 돌려 서태웅을 보려 했다. 그때, 뭔가 부드럽고 비단 같은 감촉의 무언가가 강백호의 뺨을 스쳤다. 그 감촉에 눈이 크게 떠진 강백호가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검은 털의 여우 귀가 그의 머리 위에서 쫑긋이고, 그 뒤로 아홉 개의 꼬리가 살랑였다.

저를 제 팔에 가두고 내려다보는 서태웅의 그 모습에, 강백호는 여우에게 홀린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그제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원래부터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사내였으나, 지금은 그 분위기가 요사스럽기까지 했다.

강백호가 자신에게 반쯤 올라탄 사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사내는 고개를 숙여 강백호의 이마에 콩. 자신의 이마를 한번 대었다가 그대로 풀썩, 강백호의 옆에 몸을 뉘었다.

강백호는 순간 숨을 참았다가 서태웅이 제 옆에 몸을 뉘이고 나서야 다시 들이마실 수 있었다.

어둠속이여서 다행이었다. 그제서야 열이 오르는 얼굴이 붉게 타오르는 듯했다. 분명 웃긴 꼴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강백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은 건 갑자기 이런 짓을 한 여우 자식에게 화가 나서 그런 거라고 되뇌이며, 다시 한번 서태웅을 등지고 누운 강백호가 입을 열었다.

“그, 그럼, 내놓고 자던가.”

내 앞에선 상관없잖아. 그렇게 말을 이은 강백호는 입을 다물었다. 충분히 진정했다고 생각한 머리와는 다르게, 꺼낸 대답은 형편없었다. 잔뜩 흔들리는 목소리에,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누가 들으면 정말 동요라도 한 거 같잖아. 이 천재님이 저 여우놈에게 그럴 리 없는데 말이다. 강백호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강백호의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주 조금, 정말로 조금 빠르게 뛰는 것 같은 심장 소리를 몰래 삼켜내면서 강백호도 눈을 감았다.

쉽게 잠이 들것 같지 않은 밤이었다.

***

[사형에게,

지난 번에 보내준 서신은 잘 받았어.

근데 너무 길어서 앞뒤로 세줄만 읽었거던?

누가 서신을 그렇게 길게 써. 종이 아깝게. 사형 돈 많아?

뭐, 그렇게 걱정하지 마. 이 몸이 누구야, 강백호라고.

여우한테 홀린 것도, 속아 넘어간 것도 아니거든?

그냥 그 녀석도 내가 필요하고, 나도 그 녀석이 필요한 것 뿐이야.

영문 모를 녀석이지만, 그렇게 걱정할 만한 녀석도 아닌 거 같아.

… 이렇게 쓰니까 내가 여우 놈 편드는 거 같잖아. 절대로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하여튼 그 녀석 아직도 항상 공놀이를 해. 난 거기에 맞춰서 또 놀아주고 있다니까?

지긋지긋해 죽겠는데 뭐, 그래도 이 천재님이 아니면 여우 놈과 누가 놀아주겠어. 이 몸이 한 몸 희생해야지.

내 이런 희생을 사형이라도 알라고 여기에 써두는 거니까 기억해 둬.

다음에도 또 소식 전할게.

천재 강백호가.]

미리 써두었던 서신을 다시 한번 읽어본 강백호가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리더니 그것을 가지런히 접어 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전령에게 건넸다.

전령이 그것을 받아 들고 자리를 떠나자, 강백호는 팔짱을 끼고 쓸데없이 넓은 마당을 바라보았다.

서신을 몇 번 주고받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그 날 이후로 여우, 아니 서태웅과의 사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를 미묘한 관계가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언제 일어나서 나간 건지 모를 그를 강백호가 쫓아가면 또 둘이서 그 웃기지도 않은 공놀이를 했다. 그러다 밥을 먹고, 어딘가로 사라진 그를 기다리다 밤이 되면, 다시 돌아온 그와 같은 침상 위에 누워 잠을 잤다. 그런 일상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조금 달라진 것도 있었다. 이제 서태웅은 자리를 비울 때 아무 말 없이 사라지지 않았다. 말로 할 수 있다면 말로, 그렇지 않다면 다른 방법으로 제 흔적을 남기고 떠났다.

그 흔적은 대부분 ‘다녀올게.’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강백호는 돌아온 그에게 ‘왔냐?’ 라고 답하곤 했다.

그 어린아이들의 소꿉장난 같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쌓여서, 서태웅은 강백호의 삶에 아주 조금씩 스며들었다.

그런데도, 강백호는 서태웅을 몰랐다.

같은 이불을 덮고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데도, 강백호는 서태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알고 있는 것이라곤 여우 요괴라는 것. 이 저택의 주인이라는 것. 부드러운 귀와 아홉 개의 꼬리를 가졌다는 것 정도였다.

서태웅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강백호도 서태웅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강백호는 알고 싶어졌다.

그 녀석이 어떤 요괴인지 궁금했고,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고 싶었으며, 항상 사라져서 하는 일은 무엇인지, 왜 그 시시한 공놀이를 그만두지 못하는지 묻고 싶었다.

‘왜?’

강백호는 속으로 수백 번을 되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분명 웃기지도 않은 가족 놀이를 하다 보니 머리가 이상해진 거라고, 강백호가 자조했다. 애초에 그가 묻지 않아도 먼저 말했어야 하는 이야기들이 아니었던가.

저 혼자 전전긍긍하는 것 같아, 강백호는 표정을 찡그렸다. 하지만 이내 제 머리를 털며 씩씩하게 아무도 없는 마당으로 걸어가 땅을 딛었다.

이렇게 생각만 하는 건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게 꽁꽁 숨길 거라면 다 털어놓게 만들어 보이겠다고 다짐한 강백호가 몸을 움직였다. 잡념을 없애기엔 수련만 한 것이 없었다. 몇 년 동안 빠짐없이 해온 동작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뻗어 나왔다.

밤이 되면 여우 놈은 다시 돌아올 테니까, 그때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거다. 당연하게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믿음도 전부 강백호의 착각이었다. 강백호는 평소와 달리 해가 지기 전 돌아온 그가 내뱉는 말에 표정을 찌푸렸다.

“당분간 여기에 오지 않을 거다.”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운 말에, 강백호가 되물었다.

“뭐?”

서태웅은 그런 강백호에게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다. 그러니까 기다리지 말고 자도록 해.”

“…이유가 뭔데.”

“…”

그럴듯한 거짓말이라도 할법한데, 서태웅은 그런 것을 모른다는 듯 입을 다물 뿐이었다. 강백호는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팽팽히 날이 선 분위기 속에서, 강백호가 서태웅의 멱살을 잡아챘다. 서태웅의 멱살을 잡아당기며, 강백호가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네가 키우는 개새끼라도 되는 줄 알아? 네가 그렇게 말하면 고개만 끄덕일 줄 알았어?”

“…”

“제대로 설명해. 네 잘난 그 주둥이는 장식품이냐?”

여전히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는 눈이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또다시 선을 그었다.

“알아봤자 좋을 것 하나 없는 일이다.”

명백히 선을 긋는 그 말에, 강백호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서태웅의 모습이 겹쳐졌다. 강백호는 멱살을 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그건 내가 판단해.”

침묵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서태웅은 제 멱살을 잡은 손을 떼어내며 강백호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누가 와도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마.”

“내가 할 말은 이것 뿐이다.”

그렇게 말한 서태웅이 몸을 돌려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강백호는 그런 그를 쫓아 달려 나갔다. 하지만 서태웅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또다시 연기처럼 사라진 그를 향해, 강백호가 소리쳤다.

“야! 서태웅!!!”

들을 자가 없는 외침이 너른 마당에 울려 퍼졌다.

**

그리고 당연하게도 해가 지고 달이 뜨고도, 서태웅은 돌아오지 않았다. 홀로 누워 몸을 뒤척이던 강백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저벅저벅 맨발로 걸어갔다.

창을 열자 어두운 하늘에 걸려있는 달은, 정말로 예쁜 보름달이어서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쓸데없이 예쁘기만 하네.’

창밖에 걸린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한 강백호는 다시 침상에 눕지 않고 대충 겉옷을 주워 입으며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리고 의자에 몸을 기대곤 한숨을 한번 쉬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침상에 누울때만 해도 웃기지도 않다며, 누가 여우 놈 따위를 기다릴 거 같아? 하며 보란 듯이 잠에 들려고 했던 것과 달리, 강백호는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우습게도, 강백호는 그새 그가 있는 밤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때, 문 너머에서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발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 지더니, 어느 순간 뚝. 멈췄다. 강백호는 고개를 돌려 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강백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문을 바라보았다. 문 너머에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제압하기 위해 한껏 긴장하고 있던 강백호의 귀에 짐승의 것과 같은 아주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백호”

이제는 익숙해진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렀다. 긴장이 한 번에 툭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 밖에서 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어줘.”

잠금쇠로 잠근 것도 아니고, 스스로 열면 될 것을 뭐가 어렵다고 열지 못하는지 문밖의 그 녀석은 그렇게 말했다.

‘누가 와도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마’

그렇게 말하던 여우 놈이 떠오른 건 왜였을까, 떠오른 생각에 강백호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내가 네 말 따위 들어줄 거 같냐. 아주 활짝 열어주마. 강백호가 문을 열며 너머에 있을 요괴에게 중얼거렸다.

“안 온다면서 마음이 바뀌기라도 했…”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그 전에 다가온 입술이 그의 말을 먹어 치웠으니까.

강백호가 눈을 크게 떴다. 제 입술과 맞붙은 입술이 더운 숨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입을 벌려 강백호의 아랫입술을 약하게 깨물었다. 그 행동에 표정을 찡그리며 반사적으로 입술을 벌리자 그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말캉한 무언가가 파고들었다. 제 입안을 휘젓는 살덩이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강백호는 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강백호를 붙잡은 그는 강백호의 숨 한 자락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혀를 얽어왔다.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숨을 쉴 수가 없어 그의 등을 강하게 내려치고 나서야 이 당황스러운 행위가 끝이 났다.

헉, 헉. 숨을 들이키며 손등으로 제 입가를 훔친 강백호가 제 앞에 있는 짐승 새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열기로 가득 찬 눈은 강백호가 처음 보는 부류의 것이었다.

그 순간, 서태웅이 강백호의 손을 끌어 침상 위로 집어 던졌다. 문이 큰소리를 내며 닫혔다.

침상 위로 나자빠진 강백호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서태웅이 강백호의 어깨를 잡아 누르며 다시 침상에 눕혔다. 힘이 얼마나 센지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이거 안 놔?”

“…”

서태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대답 대신 강백호의 다리 사이에 파고들어 그의 위에 올라탔다. 검은 머리칼이 살랑였다. 아름다운 그 얼굴이 강백호를 내려다보았다.

그 고운 얼굴을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제멋대로인 새끼…”

“…”

“안 오겠다고 해놓고 와선, 이딴 짓이나 하고.”

“넌 내가 우습지?”

서태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꼭 그 말을 긍정하는 것 같아서. 강백호는 또다시 화가 나면서도 서러워졌다. 저 녀석이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모든 날들이 저 녀석에게 아무 의미도 되지 못한 것 같아 서러웠다. 눈물이 차오르는 것 같은 것을 꾹 참았다.

그때, 굳게 닫혀있던 서태웅의 입이 열렸다.

“이… 멍청이가.”

이를 악물고 힘겹게 내뱉은 듯한 그 말 한마디에 강백호는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이지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눈빛과는 달랐다. 희미하지만 제가 알던 서태웅 같아서, 강백호는 순간 안심하고 말았다.

“문을…”

“…”

“열지 말라고.”

“했잖아.”

그 말을 끝으로, 서태웅이 강백호의 옆으로 까무룩 쓰러졌다. 그런 서태웅을, 강백호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것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서태웅은 그가 쌓아온 것을 지켰다. 그것이 비록 그가 원하지 않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

강백호는 쓰러진 서태웅의 옆에 누워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아까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강백호는 금세 잠에 빠졌다.

폭풍이 훑고 지나간 듯한 밤이었다.

***

아침이 밝아오고, 강백호는 평소와 다른 느낌과 함께 눈을 떴다. 그리고 제 옆에 있는 누군가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아직 그 자리에 엎어져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서태웅은 언제나 강백호가 일어나기 전에 그 자리를 떠나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자는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일지도. 항상 제가 먼저 곯아떨어지고, 저 녀석 보다 늦게 일어났으니 말이다.

어제 그런 짓을 해놓고 잠이나 퍼지게 자고 말이야. 이건 누구라도 심통이 날 만한 상황이지 않은가. 강백호는 얄미운 그 얼굴을 쿡 하고 찔러보다가, 건방진 콧대를 꾹 눌렀다. 마구잡이로 얼굴을 건드리는데도 서태웅은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녀석의 얼굴을 가지고 놀고 있자니 문 너머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백호님~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익숙한 목소리에 강백호가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았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렇게 생각할 무렵, 문이 열리며 목소리의 주인이 방안으로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다.

“평소엔 저보다 일찍 나와계시면서 오늘은 조금 늦으셨네요. 즐거운 꿈이라도 꾸셨…”

그렇게 재잘거리던 한나의 시선이 침상 위에서 누워있는 서태웅에게 향했다. 한나는 자신이 무엇을 본 것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강백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어라. 태웅님?”

흔들리는 눈빛이 한나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려주는 듯했다. 그 눈빛에 강백호는 슬쩍, 한나의 눈치를 보았다. 왜 저러시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어 강백호가 한나에게 물었다.

“그,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 말에 퍼뜩 뛰어오른 한나가 손을 휘휘 저었다.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원래 태웅님이 여기 계시면 안되는 날이라. 아, 나좀봐 말을 왜 이렇게 한대.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

잠시 숨을 고른 한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태웅님이 혹시… 말씀을 안 해주셨을까요?”

“…?”

“안 해주셨군요.”

강백호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한나를 바라보자, 그 반응에 대충 알겠다는 듯 한숨을 쉰 한나가 말을 이었다.

“보름달이 뜨는 날은 요괴의 본능이 강해지는 날이에요. 이성은 흐려지고 본능이 몸을 잠식하죠.”

그 말에 어제 보았던 여우 놈의 그 눈빛을 떠올렸다. 이지라곤 전혀 없는 것 같았던 그 열기 어린 눈을 생각하면 아직도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제 팔을 쓸어 보이는 강백호의 모습에, 한나가 다급히 말했다.

“아, 물론 모든 요괴가 그런 건 아니에요. 조금의 요력만 있어도 버틸 수 있죠. 하지만 태웅님은 지금 사정이 있어서… 보름달에 취약하세요.”

“…”

“사용인들이야 잠시 저택을 떠나있으면 되지만. 이번에는 백호님이 계시니까요.”

“혹시 몰라서 백호님의 방에 주술도 걸어두신다고 했는데.”

주술? 처음 듣는 소리였다. 강백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한나를 바라보았다.

“주…술이요?”

“네, 백호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그런 주술이라고 하셨어요.”

그제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문을 열지 말라고 말하던 그 얼굴이 생각났다. 아니, 그러면 처음부터 그렇다고 말을 해야 하지 않은가. 이유를 알고 나니 태평하게 잠들어 있는 꼴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 서태웅의 볼을 쭉 늘리자, 한나가 당황하며 백호에게 말했다.

“…백호님. 아마 태웅님은… 그냥 잠들어 계신 게 아닐거에요.”

“…?”

의아한 눈빛이 한나를 향했다. 한나는 그 의문을 풀어주려는 듯 말을 이었다.

“원래 저렇게 주무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아마 지금은 동면 상태이신 거 같아요.”

“동면…상태요?”

그게 뭐냐는 얼굴로 한나를 바라보고 있자니, 한나가 강백호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꺼냈다.

“상처를 입었을 때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강제로 의식을 끊어두는 상태랍니다.”

“…”

“태웅님은 백호님을 정말 아끼시나 봐요.”

“…네?”

“… 강제로 의식을 끊는 순간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잠에 빠지는 거니까요. 모든 것에 취약해지죠. …지금처럼 충분히 안전을 확보하지 않고 동면에 드는 요괴는 거의 없어요. ”

하지만 태웅님은 그러셨죠. 그 말에 강백호는 제 옆으로 쓰러지던 서태웅을 생각했다. 이 자식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그 행동을 멈추기 위해 그런 짓을 했다는 거야? 내가 그대로 쓰러진 네 녀석을 죽이고 떠났으면 어떡하려고?

서태웅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강백호에게, 한나가 물었다.

“…백호님.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요?”

강백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한나씨가 말한 말에 의하면, 서태웅이 저런 꼴이 된 건 다 강백호의 책임이지 않은가. 열지 말라는 문을 연 것은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심술의 대가는 서태웅이 치르게 되었다. 가슴이 따끔따끔 아파왔다.

대답하지 않는 그에게, 한나가 말했다.

“묻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자책은 하지 마세요.”

“…”

“어제 밤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지금 동면에 드신 건 태웅님 스스로 선택하신 거니까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강백호에게 한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물론, 이건 제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태웅님을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그 말에 강백호가 고개를 들어 한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한나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표현이 서툴긴 해도 상냥한 분이에요.”

‘상냥?’

이전이었다면 웃기지도 않은 소리라며 코웃음 쳤을 텐데, 오늘의 강백호는 그럴 수 없었다. 잔잔했던 마음이 일렁이듯이 요동쳤다. 그 속을 들여다보니, 어느새 그 말에 동의하는 자신이 있었다.

강백호는 다시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불편한 자세로 쓰러져있는 서태웅이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서태웅을 편한 자세로 눕혀주자, 그의 얼굴이 그제서야 한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저를 바라보았던 시선은 그곳에 없었다. 굳게 닫힌 눈꺼풀이 강백호의 눈에 담길 뿐이었다.

“백호님.”

그 부름에 강백호는 순식간에 현실로 끄집어내졌다. 한나가 강백호에게 새 옷을 건네며 웃었다.

“우선 아침을 드시러 가요. 오늘은 백호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한 상 가득 차려왔답니다.”

그 말에 강백호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달이 뜬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다음날의 해는 다시 뜨는 법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하루가 시작되었다.

**

‘내일이면 깨어나겠지.’

강백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들어 있는 서태웅의 옆에 누워 잠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하늘은 강백호의 편이 아니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시간은 빠르게 흘러서, 지나간 날을 더 이상 손가락으로는 셀 수 없게 되었을 때도. 서태웅은 깨어나지 않았다.

항상 깨어났을 때 혼자였던 것이 싫었다. 매번 자신이 일어나기도 전에 훌쩍 자리를 뜨는 그 녀석이 매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깨어났을때 그녀석도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먼저 나가버리지 않고 제 옆에 있었다. 하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닌데.’

사실은 꽤나 즐거웠던 공놀이도 혼자 하니 재미가 없었고, 잡념을 없애주던 수련도 잘되지 않았다. 달라진 건 하나 뿐인데도, 많은 것이 달라진 것 같았다. 강백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점점 무력해져갔다.

그런 강백호를 지켜보던 한나가, 어느 날 그에게 말했다.

“백호님, 오늘 한번 저택 밖으로 나가보시겠어요?”

그 말에, 강백호는 고개를 들어 한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이 크게 뜨여있었다.

“…밖에요?”

“네, 밖이요.”

강백호는 차오르는 의문을 참지 못했다. 저택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거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옆에 있으라고만 했지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말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 강백호는 생각을 멈추곤 한나를 향해 되물었다.

“나가도 되는…건가요?”

“아… 그동안은 조금 소란스러웠거든요. 바깥 안내를 해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그동안은 말씀을 못 드렸어요.”

“그럼 지금은…”

“음… 지금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저도 일정이 없어서 느긋하게 안내해 드릴 수 있을 것 같고.”

강백호는 당연히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단정히 누워있는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서태웅은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 시선에 한나가 말했다.

“태웅님이 신경 쓰이세요?”

물음에 강백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한나는 그 침묵이 대답이라는 듯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오히려 여기 있으신 게 가장 안전하실 거에요. 여긴 그런 곳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태웅님이 질투 나서 일어나실 정도로, 재미있게 놀고 와요.”

그렇게 말하는 한나가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 강백호는 갑자기 눈가가 시큰해졌다. 저렇게 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침묵할 순 없었다. 강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채비를 마친 한 명의 인간과 요괴는 저택의 문을 열었다. 강백호는 문 너머가 어쩐지 눈부시게 빛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밖으로 나오자 주변에 안개가 자욱이 끼어있어 앞도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였는데, 그런 것쯤은 상관없다는 듯 한나는 앞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강백호도 그런 한나의 뒤에 딱 붙어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주변의 안개가 걷히고 시야에 탁 트인 거리가 펼쳐졌다.

잘 정비되어 넓게 펼쳐진 길의 가장자리에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고, 거리는 활기차고, 인간의 모습을 한 이들과, 본신을 드러낸 요괴들로 북적거렸다. 처음 왔을 때의 그 곳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로, 생활감이 넘치는 모습에 강백호가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자, 한나가 입을 열었다.

“많이 복잡하죠? 여기가 중심 거리에요. 필요한 건 대부분 여기서 구할 수 있죠.”

강백호는 한나를 따라 걸어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상인에게 붙잡혀 구매를 권유받기도 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시선이 따라가기도 하고, 본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요괴를 보고 살짝 놀라기도 했다.

그 일상적이고도 기묘한 풍경에 굳어있던 강백호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듯했다. 한나는 그런 강백호를 흘끔 바라보곤 기분전환이 된 거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슬쩍 웃었다. 그동안의 그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쩐지 위태로웠다. 사실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낯선 곳으로 끌려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유일하게 교류하다 싶이 한 태웅님도 쓰러져 있었으니… 이제 돌아갔을 때 태웅님이 깨어계신다면 완벽할 텐데. 아무래도 그건 어렵겠지. 그렇게 생각한 한나가 좌판을 구경하고 있는 강백호에게 물었다.

“배고프시진 않으세요?”

그 물음에 강백호가 답했다. 아니, 답해진 것에 가까웠다.

꼬르르륵

입을 열기도 전에 울려 퍼진 배꼽시계에 강백호가 멋쩍게 뺨을 긁었다. 점점 붉어지는 그 얼굴에 한나가 하하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근처에서 잠깐 기다리고 계세요. 간단한 주전부리라도 사 올게요. 이게 제법 별미랍니다?”

그 말을 마치고, 한나는 몸을 돌려 경쾌한 발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했다. 강백호는 그래서 살 건가 말건가 하며 그를 재촉하는 상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꺄아악!

저 멀리서 샛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듣지 못할 소리였으나 귀가 밝은 강백호에게는 들릴 정도의 소리였다.

근처에서 기다리라고 했던 한나의 말이 점점 멀어졌다. 지금 강백호에게 중요한 것은 우선 저 비명소리의 주인을 도와주는 것이 되었다. 강백호는 비명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골목과 골목을 빠르게 달리며 소리가 들린 곳에 도착하자, 여인의 팔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여우 요괴와 그의 호위로 보이는 남자 셋이 강백호의 눈에 들어왔다.

강백호는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가 여인의 팔을 붙잡고 있던 여우의 팔을 힘을 주어 잡았다. 그 힘에 여우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놓았다. 순식간에 자유로워진 여인이 반사적으로 강백호의 뒤로 숨었다. 강백호는 칼을 빼 들려는 셋에게 허튼짓을 하면 잡고 있는 이 팔을 부러트려 버릴 거라고 말하듯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여우가 더 큰 비명을 질렀다.

“그, 그만! 너희들도 당장 멈춰!”

그 말에 호위무사들은 망설이며 다시 칼을 집어넣었다. 강백호는 그제서야 여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갈색 털을 가진 여우였는데, 솟아오른 귀와 흔들리는 꼬리 하나를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날 보았던 서태웅의 다른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이 녀석은 같은 여우였지만 잠시 서태웅을 떠올렸다는 게 미안할 정도로 그 녀석과 완전히 달랐다.

‘같은 여우인데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나.’

그런 생각을 하는 강백호에게, 여우가 소리쳤다.

“네, 네놈은 뭔데 갑자기 이러는 거지?”

잔뜩 겁을 먹은 여우가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그 와중에도 그 목소리에서 거만함이 묻어 나와서, 강백호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여전히 등 뒤에서 떨고 있는 듯한 여인을 다시 한번 가리며, 그가 말했다.

“그러면, 네놈들은 이분에게 무슨 짓을 하던 건데?”

강백호의 그 말에, 여우의 얼굴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난 그저 이 몸의 여자가 될 기회를 주려던 것 뿐이다! 그리고 건방지게 그걸 거절한 건 저 천한 것이고!”

“허?”

“감사하며 받들어도 모자를 판에 그렇게 건방지게 구는 것을 그냥 두고 봐야 했단 말이냐!?

“…”

강백호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제 말에 동의하는 것이라 생각한 여우가 더욱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네놈도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사과한다면 이 죄는 묻지 않으마.”

이제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똑똑히 알았겠지. 여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강백호가 쩔쩔매는 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눈에 비친 것은 그가 기대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그 표정을 본 순간 포식자 앞에 놓인 피식자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몸이 벌벌 떨리고, 그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너, 쓰레기구나.”

마치 판결을 내리듯 내려친 그 말과 함께, 우드득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백호가 손을 놓자, 여우가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고통에 비명을 질러댔다.

“원재님!”

“네놈!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 있는 거냐!”

팔을 붙잡고 고통에 비명 지르는 여우를 본 호위무사들이 그렇게 소리치며 칼을 빼 들었다.

강백호는 여인에게 도망가라는 듯 눈짓했다. 여자는 벌벌 떨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곤 재빠르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런 여인을 호위무사 한 명이 쫓아가려 하자, 강백호는 재빠르게 다가가 주먹으로 그놈을 후려쳤다. 순식간에 나동그라진 호위무사는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땅바닥에 몸을 기댔다.

남은 두 명의 호위무사가 강백호를 노려보았다. 그들은 순식간에 당한 제 동료를 바라보곤, 방심을 버리고 강백호의 빈틈을 기다리고 있었다.

“와, 여우 골에서 여우를 건드리는 간 큰 놈이 있네.”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멋스럽게 정리한 머리가 눈에 띄었다.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린 한 남자가 지붕 위에 쪼그려 앉아 턱을 괴고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장은 조금 작은 편이었는데, 그런 것 치곤 몸이 옹골차 약골로 보이지는 않았다. 갑작스러운 난입에 호위무사 한 명이 그를 쏘아보며 위협하는 듯이 소리쳤다.

“누구냐!”

그 위협적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을 가리킨 남자가 이내 푸핫 하고 웃곤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 내가 누군지는 알 필요 없고.”

그리고, 말을 마치자마자 남자가 쏜살같이 낙하했다. 그대로 호위무사의 위로 떨어진 그는 나자빠진 호위무사를 뒤로 하고 강백호에게 소리쳤다.

“어이 빨간 머리!”

강백호는 갑자기 제 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눈을 크게 뜨곤 저를 부르는 듯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덥석. 손이 잡혔다.

“뛰어!”

그렇게 말한 남자는 강백호의 왼손을 붙잡곤 앞으로 달려 나갔다. 강백호는 어, 어. 하며 얼을 타다 그대로 끌려가듯 발을 움직였다.

“빨간 머리가 도망간다!”

“쫓아라!”

댓바람부터 추격전이 벌어졌다. 남자는 바람을 가르며 뛰어나갔다. 강백호는 지금까지 자신이 느리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이 남자를 쫓아가는 것도 벅찰 지경이었다.

난데없는 추격전 끝에, 그들을 따돌린 남자가 이제 됐다는 듯이 손을 탁 놓았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백호의 얼굴을 본 그가 휴. 하고 숨을 내뱉더니 장난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 참, 큰일 날 뻔했네. 너 목숨이 9개 정도 있냐?”

그렇게 말한 남자는, 딱히 대답이 듣고 싶어서 한 말은 아니었다는 듯 강백호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속 시원하더라. 간만에 재미있는 장면을 봤어. 난 송태섭이라고 하는데, 너는?”

“…강백호.”

“오, 멋진 이름이네.”

그렇게 말한 송태섭이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너, 왜 그런 곳에 있었어? 여긴 아무것도 없어서 아무도 안 오는 곳인데.”

송태섭이 팔짱을 끼고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물론, 정말로 그 점이 의아해서 물어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 시선에 담긴 것은 의문과 약간의 의심이었다.

“어. 그게…”

강백호의 머리에 그제서야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어 달라고 한 한나의 말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으아악!!!!!!”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강백호를 보고 깜짝 놀란 송태섭이 강백호에게 물었다.

“우왓,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하지만 백호에겐 그건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찾고 있을 한나의 생각에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강백호가 두 손으로 송태섭의 어깨를 붙잡았다.

“섭섭이! 여기 길 잘 알아!?”

송태섭은 떨떠름한 얼굴로 강백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섭섭이는 또 뭐냐? 뭐, 당연히 잘 알지.”

“그럼 나 한 번만 도와줘!”

“뭐?”

강백호는 다급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송태섭이 그를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일행이랑 같이 왔는데. 일행을 두고 달려와 버려서 길을 잃었다. 이 말이지?”

강백호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다시 돌아가야 하고?”

끄덕. 강백호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돌아가면 그 여우가 부른 놈들이랑 마주칠 텐데?”

그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는 듯, 강백호가 눈을 크게 뜨며 송태섭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저절로 읽혀서, 송태섭은 속으로 네가 바보인 거야. 라고 딴지를 걸곤, 한숨을 쉬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차라리 잠깐 안전한 곳에 있다가 일행을 찾으러 가는 게 나을걸. 아니면 먼저 집에 돌아가 있는 게 낫지 않아?”

“…”

“…?”

“어디에 있는지 몰라.”

“…네 집이잖아.”

“…그렇긴 한데, 또 그런 건 아니고… 아니 이제 맞나?”

결혼했으니까. 맞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강백호를 송태섭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녀석 정말로 이대로 냅두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 송태섭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선 내가 아는 곳이라도 가자. 일행 찾는 건… 내가 도와주지 뭐.”

송태섭의 그 말에 강백호가 송태섭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정말? 고마워!”

그 밝은 대답에 어이가 없어졌다. 너무 쉽게 믿는 거 아니야? 진짜 바보인가? 그렇게 생각한 송태섭이 잡힌 두 손을 빼내며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쉽게 믿는 거 아니야? 내가 뭘 할 줄 알고?”

강백호는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송태섭을 바라보았다.

“…그럴 거였어?”

여전히 바보 같은 대답이었지만, 그 근거 없는 믿음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송태섭이 피식 웃었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어디 가서 쉽게 사람 믿지 마라~ 그렇게 말하며 송태섭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다시 뒤를 돌아보며 강백호에게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 손짓에 강백호가 송태섭을 따라 걸었다.

“근데 너, 이야기 하는 걸 들어보면 여기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맞아?”

“엉.”

“역시, 너같이 그렇게 눈에 띄는 녀석을 내가 모를 리가 없지.”

“그거 무슨 뜻?”

“말 그대로야, 여우를 건드리는 성질머리를 가진 녀석인데 소문이 안 나는 게 이상하잖아.”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여우가 왜? 그냥 여우잖아.”

그 말에 송태섭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그가 고개를 돌려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강백호는 정말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송태섭은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며 강백호를 쳐다본 송태섭이 입을 열었다.

“우와, 이거 걸작이네.”

하지만 웃는 것도 잠시, 여전히 강백호가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자 송태섭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곤 다시 말을 꺼냈다.

“진짜 몰라?”

“…”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송태섭은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너, 여기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어?”

팔리듯 끌려와서 알려주는 것 하나 없이 저택에 갇혀있었는데 무엇을 알 수 있었을까. 강백호는 송태섭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송태섭이 한숨을 한번 쉬곤 말을 이었다.

“누가 널 데려온 건진 모르겠지만… 이런 건 좀 설명을 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

“여기가 왜 여우 골이라 불리는지 알아?”

“…여우가 살아서?”

“반은 맞긴 한데. 조금 달라. 여기가 원래 여우들의 땅이기 때문이야.”

그렇게 말한 송태섭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여우 구슬의 비호를 받는 땅. 이지만”

여우 구슬. 그 단어를 듣자마자 강백호의 머리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주 어릴 적, 엄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여우 구슬 이야기는 그중 하나였는데, 하늘에서 떨어진 보옥을 주운 여우 요괴가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다녔다는 이야기였다. 지금이야 그 이야기를 믿지는 않지만, 어릴 적에는 그 이야기를 정말로 좋아했었다. 강백호가 무의식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소원을 들어준다는 그거?”

그런 강백호의 말에, 송태섭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래.”

조금 무안해진 강백호가 제 볼을 벅벅 긁었다. 송태섭은 그런 강백호를 바라보다 다시 말을 꺼냈다.

“뭐, 근데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소원을 들어준다고 착각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보배라고 하거든.”

말을 마친 송태섭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그런 걸 가지고 있으니까 이 땅을 통째로 인간들 사이에서 숨겨둘 수 있는 거고. 그걸 할 수 있으니까 여기선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거야.”

“…”

“그래서, 이제 좀 무서워?”

후회되고 그래? 그렇게 말하며 송태섭은 강백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강백호는 그 시선을 받으며 생각했다. 나는 그 상황에 끼어든 걸 후회하는가? 대답은 당연히 정해져 있었다. 강백호의 입이 열렸다.

“아니.”

그 단호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송태섭이 씩 웃었다.

“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피곤하다. 빨리 가자고.”

강백호의 어깨를 두드려준 그가 다시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백호도 그를 쫓아 발걸음을 옮겼다. 쉬지 않고 걸음을 옮기면서, 무언가 떠오른 강백호가 물었다.

“근데 그러면 섭섭이는 괜찮은 거야?”

그 걱정 섞인 말에, 송태섭이 입을 열었다.

“아~ 괜찮아. 다 믿는 게 있으니까 저지르고 보는 거라고.”

무대포인 누구랑 다르게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강백호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걱정해줬더니 농담이나 하고 있어.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뭐라 반박하지는 못한 강백호가 송태섭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그렇게 조금 더 걷자, 그 앞에는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여기는 뭐든 크고 높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구나 싶어 강백호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봤던 거리만큼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전혀 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쩐지 모두 지쳐 보였고, 겁먹은 얼굴을 하거나, 경계하듯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뛰어놀던 아이들은 어느새 담장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면서도 그 너머로 강백호를 빤히 바라보았는데, 그 본인과 눈이 마주치자 담장 아래로 쏙 숨어버렸다.

어색하게 서 있는 강백호에게, 송태섭이 놀리듯 뒤를 바라보고 소리쳤다.

“애들 겁 먹이지 말고 들어오기나 해라~”

“아무것도 안 했거든!”

그렇게 툴툴거리며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따라가던 강백호는 그대로 벽에 얼굴을 처박았다.

“악!”

얼굴을 부딪힌 강백호가 코를 부여잡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허리를 숙여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송태섭이 쯧쯧 혀를 찼다. 저래서 키 큰 놈들은 안된다니까.

안으로 들어오자, 그곳은 여러 개의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는 공간이었다. 식당이라도 되나 싶어 방금전까지 음식을 집어 먹던 사람들의 시선이 강백호에게 쏠렸다. 송태섭은 그러지 말라는 듯 손을 휘휘 앞뒤로 움직이더니, 대충 빈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안 앉냐고 말하는 그의 턱짓에, 강백호도 그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렇게 앉아있으려니 탁자 위로 탁 소리가 나게 무언가가 올려졌다. 탁자 위에 새로 놓인 것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왕만두였다. 코에 흘러들어오는 맛있는 냄새에 강백호의 배에서 저절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렇게 왕만두를 앞에 두고 입맛만 다시고 있자니, 송태섭이 그대로 만두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만두 안 좋아하냐?”

근데 어쩌냐, 여긴 만두밖에 안 파는데. 그렇게 말하는 송태섭을 강백호가 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나 돈 없는데.”

“뭐야, 그런 걱정 하고 있었냐? 내가 살 테니까 그냥 먹어.”

그 말에 송태섭을 흘끔 바라본 강백호가 슬쩍 손을 뻗어 왕만두를 하나 집었다. 뜨끈뜨끈한 온기가 손가락을 데웠다. 제 근처로 왕만두를 끌어온 강백호가 그것을 한입에 욱여넣었다. 그 모습을 본 송태섭이 신기한 놈을 다 본다는 듯이 강백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 안 뜨겁냐?”

“응?”

“야 대답하지 마, 입 열지 마 임마!”

양 볼이 가득 찬 상태로 우물우물 거리면서도 그의 물음에 대답하려는 강백호를 다급히 송태섭이 말리고 있을 때, 누군가 송태섭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나왔다.

“태섭아!”

뛰어나온 것은, 순박해 보이는 작은 체구의 남자였다. 그는 송태섭을 보고 조금 놀란 듯 보였는데, 그래도 그 표정에는 기쁨이 깔려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다들 걱정을 많이 했어.”

남자는 안도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송태섭이 뒷머리를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하여간, 다들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여기서 네 걱정을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렇게 말한 남자는 송태섭을 바라보며 여전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잠시 눈을 돌린 남자는 그대로 만두를 집어먹던 강백호와 눈이 마주쳤다. 그제서야 강백호의 존재를 눈치챈 그는 강백호를 바라보곤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이 분은 누구셔?”

갑자기 자신이 대화의 주체가 될 줄은 몰랐던 강백호는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송태섭은 태연하게 강백호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녀석은 강백호라고 하는데, 아주 대형 사고를 치고 있길래 데리고 왔어.”

그 말에 강백호가 눈썹을 치켜들며 송태섭을 쳐다보았다. 송태섭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 이글거리는 눈빛을 무시했다.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송태섭은 이번에는 남자를 가리키며 강백호에게 말했다.

“인사해. 이쪽은 내 친구인 이달재.”

송태섭의 말에 이달재라고 불린 남자는 강백호를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 미소에 강백호가 인사를 하듯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송태섭의 입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자, 이제 여기 있는 달재가 네 일행 찾는 걸 도와줄 거야.”

그 발언에 강백호와 이달재가 동시에 송태섭을 바라보았다.

…내가?

섭섭이가 도와주는 거 아니었어?

그렇게 말하는 듯한 시선에 송태섭이 말을 이었다.

“꼬맹이들 좀 불러줘.”

“…!”

“걔들은 너만 따르니까. 네가 도와주는 셈이지.”

“음…, 위험한 일은 아니지?”

“그냥 사람 하나 찾는 것뿐이야. 아마 큰 거리에 있을 텐데, 음… 그러고 보니 어떻게 생긴지도 안 물어 봤네, 무슨 요괴야?”

그렇게 물어보는 송태섭에게 대답하기 위해 말을 꺼내던 강백호는 순간 멈칫 멈춰서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강백호는 한나가 어떤 요괴인지도 알지 못했다. 만난지 꽤 되었는데도, 그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그녀의 이름 정도였다. 나, 생각보다 주변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구나. 조금 참담한 기분으로, 강백호가 대답했다.

“…몰라.”

“…?”

“둔갑한 모습만 봐서… 잘 몰라.”

“…그럼 어떻게 생겼는데?”

강백호는 머릿속으로 한나의 생김새를 떠올리며 손가락을 접었다. 그러니까 분명…

“머리카락은 긴 곱슬머리고, 검갈색인데… 눈은 고동색이고…”

“그리고?”

“아. 오늘은 분홍색 겉옷을 입었어.”

“키는?”

“섭섭이랑 비슷할지도…? 아니다 조금 더 작나?”

“흐으음…”

턱을 괴고 탁자를 두드리던 송태섭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둔갑을 잘하고, 키는 나 정도. 머리카락은 검갈색 곱슬머리, 눈은 고동색에 분홍색 겉옷을 입은 사람이라..."

송태섭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모습이 슥 스쳐 지나갔다. 모아두고 보니 어쩐지 그녀를 떠오르게 하는 특징들이었다. 하지만 설마 저 녀석의 일행이 그 사람일 리 없지 않은가. 송태섭은 그렇게 생각하곤 그 말도 안 되는 가설을 머릿속에서 치워버렸다.

“뭐, 이 정도면 됐나.”

그렇게 중얼거린 송태섭이 고개를 돌려 달재를 바라보았다.

"부탁한다. 달재야."

“알았어. 방금 말한걸 말해주면서 이쪽으로 모셔와 달라고 하면 될까?”

달재의 말에 송태섭이 고개를 끄덕이자, 달재는 건물 밖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보며, 강백호는 송태섭에게 물었다.

“왜 섭섭이가 직접 안 가고 다른 사람을 시키는 거야?”

그 말에 송태섭은 의자에 기대어 맞은편의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아까 너랑 도망친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강백호는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눈에 띄지 않고 숨어들 방법이야 많았고, 실제로 직접 가는 편이 가장 빠르고 정확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송태섭의 직감 때문이었다.

저 빨간 머리를 혼자 두면 안 된다. 뭐, 그런 직감 말이다. 이전에 이런 류의 직감이 그의 그녀를 만나게 해주었기 때문에, 송태섭은 이번에도 번뜩인 자신의 직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송태섭이 강백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끝. 이긴 한데, 궁금한 거라도 있어?”

“…딱히 없는데.”

“쓸데없는 것도 괜찮아. 그냥 기다리는 것도 심심하고. 내가 아는 선에선 대답해줄게.”

이거 엄청 좋은 기회다? 여기서 나만큼 뭐 알고 있는 사람이 없을걸. 그런 그의 말에, 강백호는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고 있던 서태웅을 떠올렸다. 강백호의 입이 열렸다.

“…동면 중인 요괴는 보통 언제쯤 깨어나?”

기껏해야 여기가 어디인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물음에 송태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면?”

“응.”

“그거야, 얼마큼 회복해야 하느냐에 다르지?”

“…”

“일반적인 상처론 보통 동면까진 안 들어가니까, 적어도 10년? 더 걸릴 수도 있고.”

10년? 생각보다 긴 시간에 강백호는 눈을 깜빡였다. 한 달이 채 안 된 지금도 그렇게 길었는데, 10년은 얼마나 길까. 점점 어두워지는 강백호의 얼굴에, 송태섭이 말을 덧붙였다.

“그냥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얼마 되지도 안잖아?”

강백호는 그렇게 말하는 송태섭을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그의 눈앞에 있는 저 남자가 요괴임을 다시 깨닫고 말았다. 인간과 요괴는 삶의 길이부터 다르다. 그가 말하는 10년은 눈 깜빡할 시간이었지만, 자신에게는 아니었다. 인간의 삶은 짧다. 아무리 길어도 100년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었다.

강백호는 생각했다. 10년이란 시간이 흐르면, 서태웅을 떠올릴 때 드는 이 감정은 온전할 수 있을까. 자신은 변하지 않고 이 기약 없는 기다림을 견딜 수 있을까? 그는 이 마음이 스러지기 전에, 서태웅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좀 더 일찍 깨어나게 하는 방법은 없어?”

강백호는 송태섭을 빤히 바라보았다. 송태섭은 그 시선에 팔짱을 끼곤 강백호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한참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결국 백기를 든 것은 송태섭이었다. 그가 꼭 듣고 싶냐는 듯 입을 열었다.

“…있긴 하지.”

강백호가 그 말에 반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뭔데?”

이쪽으로 시선이 쏠리는 것 같자, 송태섭이 우선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그 손짓에 강백호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송태섭은 그제야 다시 말을 이었다.

“정기를 나눠주면 돼.”

그렇게 말한 송태섭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 송태섭의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지, 강백호가 물었다.

“정기는 어떻게 나눠 줄 수 있는데?”

“그거야 당연히 이거지?”

그렇게 말하는 송태섭은 한쪽눈을 감아보이며 제 입술을 가리켰다. 그런 송태섭을 바라보며 바보같은 표정을 지어보인 강백호가 눈을 깜빡이자, 송태섭이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뭐, 어린애는 몰라도 돼. 알아도 시도할 생각도 하지 말고.”

“…”

“정기를 나눠주려고 시도했다가 골로 간 놈이 한둘이 아니거든? 의식이 없는 놈들은 본능적으로 정기를 흡수하려고 한다고. 한도 끝도 없단 말이야.”

괜히 말했다는 듯 송태섭이 제 머리를 헝클였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백호님!”

갑자기 불려 오는 강백호의 이름에 송태섭과 강백호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여인 한 명과 그 여인에게 바짝 붙은 아이들이 있었는데, 아이들을 이끌고 온 여인은 강백호에게 정말 익숙한 사람이었다. 강백호는 반가운 마음에 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한나씨!”

“한나!”

강백호와 송태섭이 동시에 한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당황도 잠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송태섭이었다.

“뭐야, 너 한나랑 아는 사이였어!?”

그리고 그런 송태섭의 말에 한나가 버럭, 송태섭에게 소리쳤다.

“너가 뭐니 송태섭!”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송태섭은 한나에게 그게 아니라며 필사적으로 변명을 하고 있었고, 한나는 그런 송태섭을 나무라고 있었다. 강백호는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한나씨와 송태섭이 아는 사이인 건가? … 송태섭이 저러는 걸 보니 그냥 아는 사이 정도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새 강백호에게 다가온 한나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송태섭의 눈에 불이 붙었다. 그러든 말든, 한나가 입을 열었다.

“말씀드릴 게 너무 많은데, 여긴 보는 눈이 너무 많네요. 우선 저택으로 돌아가요.”

어쩐지 서슬 퍼런 한나의 말에 강백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을 본 한나가 이번엔 송태섭을 바라보며 말했다.

“송태섭. 너도 따라와.”

송태섭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밖으로 나서자, 한나와 함께 돌아왔던 달재가 떠나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강백호의 첫 나들이는 끝이 났다.

***

“백-호님!”

넓은 방에 앉아 두 사람이 한나를 올려다보았다. 한나는 우선 백호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지은 죄가 있어서, 강백호는 아무 말 없이 한나의 눈치를 보았다.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백호님은 없지,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셔서 무슨 일에 휘말리신 건 아닐까 노심초사했다구요.

“그…죄송합니다.”

“마침 거기 계셔서 다행이지, 잘못하면 집으로 못 돌아오실 뻔한 거예요.”

미리 오가는 방법을 알려드렸어야 했다고, 안일했다며 자신을 탓하는 한나에게 강백호가 그러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한숨을 쉰 한나가 강백호의 두 손을 잡으면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는 혼자 그렇게 사라지시면 안 돼요. 아셨죠?”

그 눈빛에 강백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나가 강백호의 손을 살포시 놓아주었다.

이야기가 끝난 것 같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던 송태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한나야. 나한테도 설명 좀 해주면 안 될까?”

그 말에 한나가 송태섭에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봐. 우선 네 소개부터 다시 해야지.”

그렇게 말한 한나가 송태섭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시 한번 소개 드릴게요. 이쪽은 송태섭이라고 하고, 태웅님의 수족 중 하나에요. 정보를 물어다 주는 소식꾼이면서, 전령일도 하고 있죠. 원래 백호님의 서신을 전달하는 일은 태섭이에게 부탁하려고 했는데, 최근에 임무 때문에 인계에 나가있었어서… 다른 사람이 맡게 된거에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두 분이 만나게 될 줄이야…”

그렇게 말을 마친 한나가 이번엔 백호를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그렇게까지 자세히 소개해야 하냐며 한나를 바라보던 송태섭은 한나가 가리키는 대로 강백호를 쳐다보다, 이어진 한나의 말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분은 백호님. 태웅님의 반려셔.”

잠시 강백호를 빤히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던 송태섭이 무언가 생각하듯 표정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잠깐만 그러면…”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손가락을 들어 강백호를 가리켰다.

“네가 그 인간 신부!?”

그런 송태섭에게 한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송태섭!”

송태섭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이신가요.”

어색하게 덧붙여진 존대에 한나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백호는 자신이 다 머쓱해지는 상황에 뒷목을 벅벅 긁었다.

“소문만 무성해서 어떤 인간일지 궁금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

“예상외네.”

강백호가 표정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무슨 의미야 그건.”

“그야 말 그대로의 의미…죠?”

그렇게 말하며 송태섭이 한나의 눈치를 슥 보았다. 강백호는 그런 송태섭을 보며 의아해졌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긴 했으나 저렇게 까지 남의 눈치를 볼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어쩐지 한나의 앞에 선 송태섭은 꼬리를 내린 개처럼 보였다.

…그 순간, 강백호의 머리로 한가지 가설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한나씨를 좋아한다던가? 그렇다면 모든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한나씨가 자신의 손을 잡을 때마다 느껴졌던 이글거리는 눈빛, 저렇게까지 눈치를 보는 이유, 한나씨를 헤벌쭉 바라보는 저 멍청한 얼굴도…

여태껏 눈치 못 챈 것이 이상할 정도로 모든 것이 한 가지를 말하고 있었다. 어쩐지 다른 사람의 짝사랑을 훼방 놓은 것 같아 미안해진 강백호가 송태섭을 조금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왠지 변명이 필사적이더니… 미움받기 싫구나. 송태섭…’

강백호가 아무 말 없이 송태섭을 바라보자, 괜스레 찔린 송태섭이 말을 늘어놓았다.

“아니, 정말로 아무 뜻 없었으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보통 인간들은 신부라고 하면 젊은 여자를 보내니까요.”

“인간 남자가 오는 경우가 없다 보니까… 설마 태웅님을 죽이려고 오셨던 건 아니죠?”

뭐, 그러면 여기 이렇게 계실리가 없죠. 그렇게 제 딴엔 분위기를 풀어보기 위해 던진 그 말에, 이번엔 강백호가 몸을 움찔거렸다.

…죽이러 왔던 거 맞는데.

강백호가 대답하지 못하자, 송태섭이 설마 하는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강백호는 그 시선을 피하며 또다시 대답을 회피했다.

“…”

“…”

침묵이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한숨을 쉰 한나가 송태섭을 쳐다보았다.

“태섭아.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끄덕. 강백호가 그 말에 작게 끄덕이자, 한나가 눈가를 찌푸리며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님도 그래요. 이럴 땐 아니라고 하셔야죠. 거기서 가만히 계시면 어떡해요.”

이번엔 송태섭이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한나가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는 더 영양가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게 판단한 한나가 입을 열었다.

“남은 이야기는 태섭이에게 들을게요. 백호님은 방으로 돌아가시겠어요?”

명백한 축객령에, 백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넵?”

“많이 피곤하시지 않으세요? 목욕물을 준비하라 일러두었으니 바로 씻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에, 강백호는 그제서야 제 몰골을 돌아보았다. 옷자락에는 흙과 먼지가 엉겨있는 데다가, 몸은 전력으로 뜀박질을 해서 그런지 땀이 말라붙어 끈적거렸다. 확실히 씻어야겠다고 생각한 강백호가 한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런 한나의 말에 놀랐던 가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백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던 순간, 무언가 생각난 듯 뒤를 돌아 송태섭을 바라보았다.

“오늘 고마웠어! 다음에 또 보자 섭섭이!”

탁.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강백호가 사라진 방 안에서, 두 요괴는 숨을 죽이며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었다. 발걸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송태섭이 한나를 바라보았다. 웃음기가 빠진 그 얼굴엔 거대한 의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말해줘.”

여전히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는 한나가 답했다.

“뭐를?”

그렇게 말하는 한나의 얼굴을, 송태섭은 볼 수 없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송태섭은 입을 열었다.

“뭘 말하는지 알고 있잖아.”

“…”

한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송태섭이 말을 이었다.

“저거, 어떻게 살아있는거야?”

**

아직도 따끈한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다. 강백호는 부드러운 천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으며 저벅저벅 걸어갔다.

송태섭은 돌아갔으려나? 아니면 아직 한나씨와 이야기 중인가? 방금 전까지 이야기하던 방이 있는 방향을 슬쩍 바라본 강백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생각은 아니었다. 강백호가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해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 법이었다. 자신이 없어야 할 수 있는 말이 있을 테니 지금은 두 사람만 있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맞다는 것을 강백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홀로 이방인이 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문득 강백호는 자신이 자연스럽게 딱 봐도 값비싼 천을 물기 닦는 데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우뚝 멈춰 섰다. 언제부터 이런 사치스러운 생활을 당연히 여기게 된 걸까. 처음에는 분명 질색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이런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점점 이곳에서의 삶에 익숙해지고 있는데, 그들은 아직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이.

애초에 자신이 지금 있는 자리는 누구여도 상관없는 것 아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자, 왜인지 여우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강백호는 천을 목에 두르곤,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이제는 익숙한 방 앞에 도착한 강백호는 문을 열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그는 곧바로 문을 닫고, 침상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서태웅이 있었다.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강백호가 침상 위 빈자리에 털썩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잠을 자듯, 감겨있는 눈꺼풀이 보였다. 강백호가 그런 서태웅을 향해 말을 걸었다.

“야, 서태웅. 나 오늘 밖에 나갔다 왔다?”

“원래 네놈 빼고 실컷 놀다 오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뜀박질만 하다가 왔네.”

“아, 송태섭도 어쩌다 보니 만났거든? 근데 알고 보니까 네 부하라고 하더라고, 세상 참 좁아. 그치?”

“섭섭이 발 엄청 빠르더라. 내가 못 따라잡을 정도는 처음이었어.”

일부러 자랑하듯 말을 늘어놓던 강백호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다시 입을 닫았다.

이쯤 되면 시끄럽다고 깨어날 법도 한데,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눈꺼풀이 야속했다.

강백호가 입을 열지 않자, 순식간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그 침묵 속에서, 강백호는 그날 밤의 서태웅을 생각했다.

이 녀석은 그날 충분히 자신을 취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강백호는 고개를 숙여 서태웅을 내려다보았다.

서태웅. 만약에 내가 아니라 다른 인간이 여기에 왔어도, 너는 똑같이 행동했을까? … 곁을 내어주고, 그 사람이 한 말에 귀 기울여 주고, 네 행동으로 그 사람을 상처 입히기 전에 이렇게 될걸 알면서도 그만두었을까?

…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나여서 그랬던 걸까.

나는 어떤 대답이 듣고 싶은 걸까. 강백호가 작게 중얼거렸다.

“잘 모르겠어.”

솔직히,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자신답지 않았다. 살면서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네가 잠든 그 순간부터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멍청이가 된 것 같았다.

이게 다 제때 일어나지 않는 네놈 때문이라면서, 다시 한번 모든 것을 서태웅의 탓으로 돌린 강백호는, 결심한 듯 서태웅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태평하게 잠들어 있는 네놈을 깨우기 위한 행동일 뿐이야.’

위험하다고 말하던 송태섭의 말은 어느새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아름다운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강백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서태웅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에 닿자, 강백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입을 맞춘 건 처음이 아니었으나, 강백호가 스스로 입을 맞춘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입술을 맞대고 있던 강백호는 결국 참지 못하고 겹쳐있던 입술을 떼어냈다.

강백호는 슬쩍 실눈을 뜨며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서태웅은 여전히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강백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이걸로는 부족하다는걸. 그가 깨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래, 그… 저 자식이 그날 자신에게 했던 입맞춤 같은 것 말이다.

…언제나 평범한 삶을 그리던 강백호에게, 요괴에게, 그것도 남자인 자식에게 먼저 그런 입맞춤을 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우 자식을 깨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니 완전히 못 할 짓은 아니라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

“너는 진짜 나한테 감사해야 한다. 여우 자식아”

강백호는 손을 뻗어 서태웅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엄지를 그의 입술에 대자, 방금전 입술에서 느꼈던 감각이 손끝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강백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손에 힘을 줘 아래로 당기자, 서서히 서태웅의 입이 열렸다. 무방비한 그 모습에 강백호는 자신이 몹쓸 짓을 하는 무뢰한이 된 것 같았다.

멋대로 쓰러진 건 저쪽인데, 왜 도와주려는 자신이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강백호는 벌어진 틈으로 제 혀를 집어넣었다.

물컹한 살덩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 무언가 질척이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감촉과 소리에 움찔거린 강백호는 혀를 빼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행동에 배덕감까지 들던 그 순간, 속에서 불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화르륵 불타오르는 그것은 강백호의 몸 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걸 눈치채기도 전에, 불길은 마치 처음부터 그의 것이었던 것처럼 흐르는 강물같이 서태웅에게 흘러 들어갔다.

무언가 빠져나가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던 강백호의 뒤통수를 커다란 손이 붙잡았다. 손의 주인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더니, 한 팔로는 강백호의 허리를 감싸고, 한 손으로는 강백호의 뒤통수를 붙들었다.

깊게 파고든 상대의 혀가 강백호의 혀와 얽혔다. 살덩이들이 함께 비벼지고, 입천장을 쓸었다가, 또다시 혀를 얽어 강백호의 숨을 먹어 치웠다. 그 농밀한 입맞춤에 강백호의 점점 정신이 몽롱해졌다. 여전히 기운은 그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그를 먹어 치운 상대방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강백호는 그제야 숨을 크게 들이쉴 수 있었다.

입술을 엄지로 슥 문지른 서태웅이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강백호는 붉어진 얼굴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에게 외쳤다.

“너 사실 잠들어 있던 거 아니지!?”

“…”

서태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또다시 강백호의 턱을 당겨와 가볍게 입을 맞췄다. 강백호는 그제서야 서태웅의 눈이 풀려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 자식 지금 제정신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그는 강백호의 벌어진 입술을 핥곤, 제 혀를 집어넣었다. 또다시 침입한 침략자에 강백호가 대응하지 못하자, 그것은 강백호의 입천장을 길게 쓸었다. 몸에서 흘러 나가는 기운 탓인지 몸에 점점 힘이 풀렸다. 그가 내뱉은 숨결이 강백호에게 파고들었다.

어디선가 달콤한 향기가 풍기는 것 같았다. 그 향기와, 시선에 점점 이성이 흐려졌다. 좀 더 닿고 싶었다. 조금 더 나를 가져줬으면 좋겠다.

‘아, 이게 여우한테 홀린다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서태웅의 목에 팔을 건 강백호가 서태웅의 움직임에 응했다. 다시 혀와 혀가 비벼지고,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서로의 타액을 삼켰다.

그때, 서태웅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의 눈에 빛이 아주 조금이지만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강백호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서태웅이 다시금 입을 뗐다. 그게 아쉬워서, 강백호는 흐려진 눈빛으로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강백호.”

익숙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꽤나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그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자 어쩐지 안심한 강백호는 몸을 숙여 서태웅에게 몸을 기대었다. 달콤하고 묵직한 향기를 들이쉬며, 강백호가 서태웅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올려다본 서태웅은, 그 잘생긴 눈가를 찌푸리고 있었다. 몽롱한 와중에도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강백호가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하아. 서태웅이 더운 숨을 내쉬었다. 그는 강백호를 자신에게 떨어트리곤 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무엇을 참듯이 이를 악물었다. 그때 본능적으로, 강백호는 지금이 앞으로 일어날 상황에서 도망갈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주고 싶다. 가지고 싶다. 멈추고 싶지 않다. 그 마음에 공명하듯 불길이 일었다. 일렁이는 기운이 서태웅을 향했다. 그리고 그 빛에, 미약했던 빛은 다시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

어느 순간, 강백호는 자신이 낯선 공간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이상하다, 나는 방금까지 서태웅이랑…’

그런 생각도 잠시, 어둠이 짙게 깔린 밤에, 달빛만이 길을 비췄다. 그때, 저 너머에서 누군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희미한 빛을 따라 앞으로 걸어가자니 그곳에는 묵빛 머리칼을 화려하게 장식한 여우 여인과, 화려한 의복을 걸친 여우 남자가 한 소년의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매우 닮아있었는데, 검은 머리칼이나, 빽빽한 속눈썹이라던가, 섬세한 이목구비 등이 그러한 것을 보아 부모 자식이 아닐까, 강백호는 멋대로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 그들을 향해 걸어가던 강백호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주저앉고 말았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의아함이 컸다. 다시 한번 앞으로 걸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겨보아도,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덕분에 강백호는 그들을 저 멀리서 구경하는 구경꾼처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제 앞을 가로막는 것을 두들겨 보기도 하고, 저 너머를 향해 소리쳐 보기도 하였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저들은 제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돌아보지도 않았다.

무슨 이런 꿈이 다 있냐며 투덜거린 강백호는, 제 눈 앞에서 보이는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여인은 소년의 손을 끌고와 무언가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아이의 손 위로 오색찬란한 조각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반짝이며 떨어지는 별의 조각 같기도 했고, 하늘의 무지개가 굳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인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울려 퍼졌다.

“자, 먹으렴.”

모두를 위해서란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여우 여인의 말이 제 귀에 속삭여지는듯 했다. 강백호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알 수 가 없었다. 분명 저건 먹을게 아닌 것 같은데 왜 저런 걸 먹이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거 먹으면 큰일 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한 강백호가 다시 한번 제 앞의 벽을 쾅쾅 두드렸다.

아이의 손이 그 작은 입으로 향할수록, 여전히 조각은 아름답게 빛났다. 그럴 수록, 강백호의 심장이 더욱 두근거렸다. 저것을 막고 싶었다. 강백호는 저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사실 소년의 이름도 몰랐지만, 반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외치고 말았다.

“야! 서태웅!!”

그 외침에, 꿀꺽. 제 입으로 들어간 파편을 삼킨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그 눈동자와 갈색 눈동자가 또다시 마주쳤다 생각된 순간.

강백호는 또다시 번쩍, 눈을 떴다. 허억. 숨을 들이킨 그는 눈을 깜빡였다. 온몸에 따뜻한 물의 감촉이 느껴졌다.

“…”

누군가 강백호의 눈가를 제 손으로 가렸다. 갑자기 찾아온 어둠에 강백호가 몸을 들썩였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백호를 향해, 손의 주인이 속삭였다.

“더 자라.”

낮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익숙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을 들으면 강백호가 아니었다. 손을 떼어내며 벌떡 몸을 일으킨 강백호는 허리의 통증에 비명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까 더 자라고 했잖아.”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물기를 머금은 공간 안에서, 재수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누구 때문인데.’

강백호가 서태웅을 노려보자. 서태웅은 여전히 흐트러진 모양새를 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제 그 눈 속에는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나던 화가 푸스슥 식어버려. 강백호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런 강백호에게, 서태웅이 입을 열었다.

“일어났으면 스스로 나와. 멍청이.”

그 말에 강백호가 자신의 상황을 돌아보았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따듯한 물이 가득 찬 욕탕 안에 들어가 있었는데, 분명 엉망이어야 할 몸이 누가 씻긴 듯 반질반질했다.

시중받는 것이 익숙해 보이는 저 요괴가 자신을 직접 씻겼다는 것이 순간 이해가 가지 않은 강백호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서태웅을 바라보자, 서태웅은 더 기다릴 생각은 없다는 듯이 손을 뻗어 강백호를 욕탕에서 건져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화를 내기도 전에, 부드러운 천이 강백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상대방의 커다란 손이 다가오더니 머리의 물기를 털어냈다. 면포로 물기를 닦아내는 손길이 조심스럽기 그지 없었다. 어째서일까, 어제의 그 손길보다 지금이 훨씬 더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린애가 따로 없군.”

“뭐? 이 자식아!?”

강백호가 무엇이라 더 말하려던 찰나, 서태웅은 강백호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말을 이었다.

“왜 그런 거냐.”

“뭐가.”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한 건지 자각도 없군.”

“일어났으니 된 거 아니냐?”

“…멍청이”

“이 자식이 기껏 깨워놨더니!”

강백호가 버럭 화를 내자, 서태웅이 한숨을 쉬곤, 강백호를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어디 아픈 곳은?”

“죄다 아파 무식한 새끼야”

“…”

“왜, 이제 미안한 마음이 드냐?”

“…”

“이럴 땐 그래. 라고 말 좀 하면 덧나냐?”

“… 그래.”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강백호의 얼굴을 본 건지 만 건지, 서태웅은 그가 입고 있던 겉옷을 강백호에게 대충 걸쳐 입혀둔 뒤, 그를 번쩍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서태웅의 품에 공주님처럼 안기게 된 강백호는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눈을 크게 떴다. 물론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는 서태웅은 강백호를 안고 성큼성큼 걸었다.

“야! 이게 무슨 짓…”

이게 무슨 짓이 나며 버둥거리던 강백호는 금방이라도 풀어질 것 같은 겉옷에 잠시 발버둥을 멈췄다. 발버둥이 멈추자, 강백호를 바라본 서태웅이 입을 열었다.

“뭐가 문제지?”

그 의아한 말에 속이 터지는 듯한 기분이 든 강백호가 한 손으로 서태웅의 머리채를 잡으며 중얼거렸다.

“나도 걸을 수 있거든?”

머리채가 잡히자 그대로 고개가 기울어진 서태웅이 강백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프다고 한 건?”

“그건 그거고!”

“…”

“그러니까 내려…”

놔! 까지 말하려던 찰나, 어디선가 부산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귀에 걸렸다.

“세상에, 태웅님!”

그렇게 외친 한나가 서태웅의 품 안에 안긴 강백호의 모습에 또다시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백호님도!”

“두 분 다 어디 가셨나 했어요!”

그렇게 두 사람을 바라보며 후다닥 뛰어온 한나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가를 달싹였다. 그 모습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한나가 입을 열며 말했다.

“그게,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네, 혹시나 마주치시면 귀찮아 지실까봐 두분방에 가봤는데 안 계셔서, 급하게 찾았다고요.”

강백호가 의아한 말투로 한나에게 물었다.

“…누구길래 그래?”

“…아, 그게.”

한나가 입을 떼기 전에, 다른 쪽에서 답이 나왔다.

“…대장로인가?”

낮은 목소리에선 어째서인지 확신이 묻어나오는 듯 했다. 그리고, 그것이 맞다는 듯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혼자 오지도 않았겠군.”

“…네에. 그 아들에 시비에 시종들에 바리바리 싸 들고 왔더라고요.”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한나를 보며, 한나가 저 정도로 말할 정도면 사이가 정말 안 좋은 관계겠구나 지레짐작한 강백호는 서태웅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 슬쩍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서태웅은 여전히 귀찮다는 표정을 한 채로 한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나는 그런 서태웅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돌려보낼까요? 깨어나셨다고 해도 많이 피로하실텐데, 제가 알아서 돌려보낼게요.”

“……아니, 들여보내.”

“네?”

“안 나가면 더 귀찮게 굴게 뻔하니까.”

서태웅은 아직도 제 머리채를 잡고 있는 강백호를 흘끔 바라보더니, 다시 제 방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대신 조금 시간이 걸릴 거라 전해둬라. 이 정도는 저들도 감안해야지.”

그 말에 방긋 웃은 한나가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전해두겠습니다. 아, 의복은 다른 시비를 통해 전달해 드리도록 할게요.”

“…마음대로 해.”

서태웅의 품 안에서 내려가지도 못한 채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강백호가 서태웅을 찡그린 얼굴로 바라보자, 서태웅은 또 강백호를 한번 바라보더니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두 사람의 휴식 아닌 휴식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

방에 도착하자 서태웅을 밀쳐가며 바닥에 발을 디딘 강백호는, 휘청이는 몸을 가누다 못해 다시 털썩, 침구 위로 주저앉았다. 그런 강백호의 행동을 지켜보던 서태웅은,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강백호가 표정을 찡그렸다.

“왜 그렇게 보냐?”

그 탐탁지 않아 하는 말에, 서태웅이 담담한 얼굴로 답했다.

“멍청이가 따로 없어서.”

그 말에 강백호는 표정을 더욱 찡그러트리더니, 서태웅을 세게 쏘아보았다. 또다시 별거 아닌 것으로 시작되는 투닥거림이 시작되려던 찰나,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미 없는 싸움을 멈춘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강백호가 말 하지 않고 뭐하냐는 듯이 고개를 까닥거리자, 서태웅이 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어 들어오라 말을 꺼냈다.

그 말 한마디에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의 새 의복을 가지고 온 시비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사뿐사뿐 침구 위에 의복을 놓아둔 뒤,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방 밖을 나섰다.

시비가 밖으로 나가자, 강백호는 그녀가 두고 간 의복을 뒤적이며 그중에서 자신의 의복인것을 골라 꺼내곤, 나머지를 서태웅에게 던져주었다. 서태웅은 그것을 한 번에 낚아채곤, 제 옆에 있는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것을 보며, 한번을 안 놓친다며 강백호가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퍼졌다.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강백호는 자신을 둘둘 싸매는 듯한 겉옷을 벗어 던지곤, 새 의복을 주섬주섬 꿰어 입으며 방금 전부터 피어오르던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야, 그런데 아까 그 손님이라는 사람 말인데.”

“…?”

“대체 누구길래 그래?”

너도 그렇고, 한나씨도 그렇고. 별로 좋아하는 거 같진 않던데. 그렇게 중얼거린 강백호가 서태웅을 바라보자, 서태웅이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하자 서태웅이 입을 열었다.

“그자는… 귀찮아.”

“아니, 그러니까 왜 귀찮냐고 물어보는 거잖아”

“…”

서태웅은 강백호의 물음에 무언가 생각하듯 잠시 말이 없더니,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욕심이 많고, 집요해. 본신의 힘은 약하지만 꾀가 많고,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걸 휘두를 줄 아는 자다.”

서태웅의 말에, 강백호가 입을 닫았다. 저 서태웅이 저렇게 말할 정도의 요괴라면 아마 좋은 의미로 방문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백호가 다시 말을 꺼냈다.

“내가 뭐 조심해야 하는 거라도 있어?”

그 말에 서태웅이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대장로와 만나는 건 나 혼자다. 그런 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그래?”

그럼 그냥 평소대로 있으면 되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강백호에게 서태웅이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 만약 대장로의 일행이 거슬리게 하면.”

“거슬리게 하면?”

“참지 말고 한 대 쳐.”

“…그래도 되는 거냐?”

서태웅이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백호가 푸핫 하고 웃으며 서태웅에게 말했다.

“한대 말고 두 대 쳐도 되냐?”

“…마음대로 해.”

그런 서태웅의 대답이 뭐가 그리 마음에 들었는지, 강백호가 서태웅을 바라보며 씨익 웃더니, 아직 입고 있던 옷을 벗지도 않은 서태웅을 향해 말을 꺼냈다.

“옷이나 갈아입어. 아무리 못되처먹은 상대라고 해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

동의는 못 하겠다는 듯한 서태웅의 그 반응에 한껏 더 유쾌해진 강백호는 다시 한번 서태웅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빨리 끝내고 보내버리는 게 낫지 않느냐, 이대로 그놈들이 이 집에 있게 둘 거냐. 등등. 그 이야기를 듣다 못 한 서태웅이 그제서야 옷을 벗고 새 옷을 몸에 꿰어 입었다.

옷을 갈아입은 서태웅은 역시 어디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모습이라, 강백호는 입꼬리를 올려 비죽, 웃고는 문을 열어 서태웅을 밖으로 내쫓았다.

“자, 그럼 다녀오세요. 서방님.”

서태웅의 눈이 커지던 순간, 강백호가 방문을 쾅 하고 닫았다.

서방님이라고 말한 것은 갑자기 생각난 그를 놀리기 위한 장난이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뀐 서태웅의 표정이 정말이지 웃겨서, 한참을 낄낄거리던 강백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산책이나 해볼까.”

그러다가 재수 없는 녀석을 만나면 한대가 아니라 두 대 때려주지 뭐. 그렇게 중얼거리며 강백호는 문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발걸음이 가볍기 그지없었다.

***

밖으로 나선 발걸음이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서태웅은 이미 자리를 떠난 지 오래됐는지, 이 근방에선 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잽싸기도 하지. 그렇게 중얼거린 강백호가 저벅저벅 걸어 나가자, 조용한 이곳에 그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나씨가 했던 말로 봐선, 꽤 많은 요괴들이 이곳에 들어온 듯 싶었는데, 이 근처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응접실 근처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 강백호는, 그 근처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못 근처를 지나고 있을 때쯤, 강백호는 낯선 인기척을 느끼곤 그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딘가 익숙한 모양새를 한 요괴가 있었는데, 그는 강백호가 다가온 줄도 모르고 제 앞의 일행과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귀가 좋은 편인 강백호에겐 아주 쩌렁쩌렁 들리는 수준이었다. 어디선가 봤던 듯한 요괴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건 오히려 기회라고! 우리가 여우 구슬을 얻을 기회!”

그 목소리에 요괴의 앞에 있던 남자가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

“원재님, 목소리가 너무 크십니다.”

“크흠, 아니. 내가 틀린 말을 했느냐?”

그 말에 민망한 듯, 헛기침을 내뱉은 요괴는, 또다시 입을 열어 생각 없어 보이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인간이 여우 구슬을 삼켜버렸으니 이제 여우 구슬은 서태웅의 것이라 할 수 없는 거래도. 인간 하나만 구슬리면 여우 구슬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올 것 같아? 마침 그 인간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더군. 그러니 아버님이 반대하시더라도 가문을 위해서 나라도 그 인간을 만나봐야겠다.”

“그러니까 네놈도 조용히 내가 하는 걸 지켜만 보고 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강백호는 팔짱을 끼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상대방도 강백호의 존재를 눈치채곤, 경악에 찬 얼굴을 한 채로 그를 가리켰다.

“네, 네놈은!!!”

한껏 털이 곤두선 여우 요괴의 손가락질에, 강백호는 드디어 저 요괴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었다. 저 자식은 바로 얼마 전, 마을에서 여인을 희롱하고 있던 그 여우 요괴였다. 강백호는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입을 열었다.

“뭐야, 그 쓰레기 아니야?”

“쓰, 쓰레기!? 이 몸에게 그런 망언을 하다니!”

“그럼 쓰레기를 쓰레기라고 하지 뭐라고 해?”

“이, 이놈이…! 네놈이 아직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러나 본 데, 나는 대장로님의 아들인 상원재님이란 말이다!”

“아 그러냐?”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자, 상원재라고 말한 여우 요괴는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강백호는 콧방귀를 흥 뀐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장로든 대장로 아들이든 뭐 어쩌라고, 그런 생각을 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상원재는 이를 악물고 강백호를 쏘아보았다. 그 시선에 강백호가 입을 열었다.

“또 맞고 싶냐?”

“이런 폭력적인…!”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말 주먹이 날아올까 싶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 상원재를 바라보며, 강백호가 말을 이었다.

“됐고, 왜 여기에 있냐?”

그 물음에 상원재는 오히려 제가 묻고 싶다는 듯이 강백호에게 답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네놈이 왜 여기 있단 말이냐!”

그 멍청한 물음에 답해주기도 귀찮다는 듯이 강백호가 귀를 벅벅 파내며 상원재를 바라보았다. 그는 크게 모욕을 당한것 처럼 얼굴이 점점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휙 돌리며 제 옆에 있던 일행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네 녀석은 왜 아무 말도 없이 보고만 있느냐!”

그제서야 귀찮다는 듯이 상원재의 앞을 가린 그는 강백호를 향해 고개를 까딱 숙이더니 그냥 넘어가자는 듯 태연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저희 도련님과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저희 쪽에서 실수한 게 있었겠지요. 그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

배신당한 듯한 상원재의 얼굴을 무시한 채, 남자는 또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디의 누구시길래 갑자기 나타나 저희의 대화를 엿들으시고, 무례한 태도를 보이시는지에 대해선 저희도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깍듯하면서도 기분 나쁜 태도에, 강백호가 표정을 찡그리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그걸 알려줘야 하는데?”

“알려주시지 않는다면 아랫사람 관리를 잘 하지 못하신 서태웅님께 책임을 묻겠습니다.”

“허?”

“이곳에 계신다는 것은 그분의 수족이시라는 것이겠지요. 저 또한 대장로님을 따르는 자로써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애초에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큰 소리로 떠들어놓고 뭐라는 거야? 아주 들으라고 소리를 치던데, 그래 놓고 대화를 엿들어? 엿들으면 안되는 대화는 여기서 하면 안 되는거 아니냐?”

“저희는 이곳 주변의 사람들을 전부 물러달라고 요청드렸습니다만. 그것을 무시하고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난 그런 이야기 못 들었고, 들었다고 해도 그걸 들어줄 이유 따윈 없거든?”

내 집이고, 내 마음이라며 말을 이으려던 찰나, 저 너머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목소리는 아주 점잖았는데,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였다. 강백호가 고개를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자, 목소리의 주인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했다.

“저희 아들이 실례가 많았나 봅니다.”

그는 얼핏 자상해 보이는 노인이었는데, 그는 강백호를 바라보더니,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고 치지 않겠다고 해서 데려왔거늘… 또다시 사고를 쳤나 보군요. 제가 자식을 잘못 기른 탓인듯합니다.”

그 말에 그의 옆에 있던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꺼냈다.

“알긴 아는군.”

낮은 목소리가 주변을 감싸자, 상원재가 표정을 찌푸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는 서태웅을 쏘아보았는데, 그를 바라보는 노인의 시선 한 번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노인은 이번엔 강백호와 말다툼을 하던 남자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으며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저 아이도 너무 날이 서 있었군요. 한 번만 용서해 주시지요.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그 예의 바른 어조에 한껏 어색해진 강백호는, 멋쩍은 얼굴로 노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알아서 하세요.”

노인은 그 말에 더 잔잔히 미소 지으며 강백호를 향해 다가오더니, 아주 다정한 말본새로 말을 꺼냈다.

“첫 만남부터 이렇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죄송할 뿐입니다만, 괜찮으시다면 저희 가문으로 오시지 않겠습니까? 이곳보다 좋은 생활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아버지!”

“그 이야기는 아까 끝났을 텐데.”

그 말에 좌중이 얼어붙는 듯 했다. 상원재는 자신의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해 다급히 아비를 불렀고, 서태웅의 목소리도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사이에서, 강백호 또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빡이다가, 방금 전 상원재가 떠들던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저자가 여우 구슬을 원해 저러는 것이구나 깨닫고 말았다. 솔직히 아직도 여우 구슬이 저에게 있다는 둥, 여우 구슬을 삼켰다는 둥, 이해할 수 없는 말 투성이지만 저 대장로라는 자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던 지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강백호의 반응에, 약간의 아쉬움을 감추지 않은 채로, 대장로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시군요. 하지만 마음이 바뀐다면 언제든 찾아오시길 바랍니다.”

그럴 일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흘끗 서태웅을 바라본 강백호는,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일로 서태웅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숨기고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도, 그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원래부터 비밀이 많은 녀석이라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서태웅이 강백호를 끌어당겨 제 쪽으로 오도록 하더니, 대장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용건이 끝났다면 돌아가도록.”

그 단호한 목소리에, 대장로도 더 버틸 수 없음을 아는지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대장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제 아들과 수족, 시비와 시종들을 데리고 문을 나섰다.

그 많은 사람이 떠나자, 저택이 순간 조용해지는 듯했다.

강백호는 아직도 제 손을 붙잡고 있는 서태웅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 했냐?”

“…재미없는 이야기.”

“그러냐?”

“…응.”

“그럼 됐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렇게 말한 강백호가 서태웅을 잡아끌며 한 걸음 한 걸음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걸으며 강백호는 그들이 말하던 여우 구슬에 대한 이야기를 저 멀리 던져버렸다.

언젠간 때가 되면 말해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제 손으로 잡고 있는 사람을 믿기로 결심했다.

왜 그렇냐고 묻는다면… 그러고 싶었으니까.

그것이 비록 거짓말투성이여도 말이다.

***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이후, 저택에선 평화가 지속되는 것처럼 보였다. 깨어난 서태웅은 평소처럼 굴기 바빴다. 여전히 공을 가지고 놀곤 했는데, 이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저택을 방문하고자 하는 손님들이 늘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것을 전부 거절하고 있는 저 녀석을 보다 보면, 저래도 되는 건가 싶어지곤 했는데, 결국 알아서 하겠지. 하고 드러눕게 되곤 했다.

그리고 또 하나 달라진 점은, 송태섭과 함께 여우굴을 둘러보게 되었다는 거다. 이따금 저택을 방문하는 섭섭이를 따라 마을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물론 서태웅은 그가 저택 밖으로 나서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러면 뭐 어쩌겠는가. 자기가 같이 나가줄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중얼거린 강백호가 오늘도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이제는 익숙하게 저택 밖으로 나서자, 송태섭이 강백호를 기다렸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백호는 그런 송태섭을 따라 마을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섭섭이, 오늘은 어디에 갈 거야?”

송태섭은 그런 강백호의 말에 이미 생각해 놨다는 듯 말을 꺼냈다.

“오늘은 중심부로 갈까 해. 장이 서는 날이기도 해서 이리저리 난리도 아닐걸.”

“장이 열려?”

“왜, 관심 있냐?”

장난스럽게 강백호를 바라본 송태섭은 금방이라도 고개를 끄덕일 듯한 강백호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곤 푸하학 웃음을 터트렸다. 그 반응에 멋쩍게 그를 바라본 강백호가 입술을 삐쭉이며 송태섭을 향해 중얼거렸다.

“왜 웃고 그래.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아니, 그렇게 기대되면 태웅님한테 데려가 달라고 하지 그랬어.”

그전에도 장은 자주 열렸는데. 그런 송태섭의 말에, 더욱 뾰로퉁한 얼굴이 된 강백호가 송태섭에게 대꾸했다.

“섭섭이는 그 녀석이 이런 거에 관심이 있을 거 같아 보여? 아마 장이 열리는지도 모르고 있을걸.”

“하긴 그건 그렇네. 그런 거에 관심 가질 분은 아니지~”

송태섭의 중얼거림에 강백호가 맞장구치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세심함을 가진 놈이었으면 이미 같이 나가자고 했겠지.”

그런 강백호의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은 송태섭이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뭐야, 같이 나오고는 싶었나 봐?”

“…공놀이밖에 관심 없는 녀석이랑 내가 왜.”

“솔직하지 못하긴.”

송태섭은 자신을 쏘아보는 강백호의 시선을 모른척하며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서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가 보이고 있었다.

“꺄아아악!!”

커다란 비명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

남자와 여자 가릴 것 없이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빠르게 반응한 것은 송태섭이었다. 급한 마음에 송태섭은 강백호를 두고 비명이 들리는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재빠르게 달려나간 송태섭이 마주한 것은, 혼비백산이 되어 난장판이 된 거리였다. 요괴들은 부리나케 도망을 가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인간이다!”

“인간이 쳐들어왔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덩치가 크고 어딘가 험악해 보이는 얼굴의 남자가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인간 냄새가 풀풀 풍기는 것이, 나 인간이오 하고 외치고 있는 남자의 위협적인 모습에 송태섭은 금방이라도 뛰어나갈 듯 자세를 고쳐잡으며 중얼거렸다.

“인간이 어떻게 여기에 들어온 건진 모르겠지만, 이곳에 위해를 끼친다면 가만있을 수는 없지.”

그렇게 말하며 송태섭이 달려 나갔다. 빠르게 거한에게 다가간 그는 쥐고 있던 봉을 그에게 휘둘렀다. 거한은 그 순간 자세를 고쳐잡곤 손바닥을 펼쳐 송태섭의 일격을 흘려 넘겼다.

기습에 실패한 송태섭이 쳇 하고 허를 차며 다시 한번 공격을 이어 나갔다.

맨손과 봉이 부딪히는 소리라기엔 무척 험악한 소리가 울려펴졌다.

송태섭은 기를 다룰 줄 아는 상대방의 실력에 질색하면서도, 그를 관찰하길 그만두지 않았다.

어디서 온 자일까,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는 것으로 봐선 체계적으로 무술을 배운 인간이다. 어중이 떠중이가 아니야. 황제의 끄나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어.

송태섭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정말 저자가 황제의 끄나풀이든 아니든, 지금 이대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 사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송태섭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잠시 서로를 관찰하듯 바라보던 두 사람이 다시 한번 맞부딪히기 위해 각자의 무기를 휘두른 그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일격이 누군가에 의해 붙들렸다.

“!!!”

송태섭과 거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거한의 주먹과 송태섭의 봉을 각각 잡아챈 강백호는 붉게 달아오르는 듯한 두 손을 무시한 채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런 강백호를 바라본 두 사람은 경악을 금치 못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백호!!””

우선 다급히 무기를 거둔 송태섭은 거한이 강백호의 이름을 외치자 다시 한번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자가 어떻게 인간 신부의 이름을 알고 있는거지? 그 의문은 거한도 마찬가지인 듯 의아한 얼굴로 송태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사이에서, 강백호는 두 사람이 더 싸우지 못하도록 거리를 벌려두고는 거한을 향해 의문 섞인 질문을 내뱉었다.

“사형이 왜 여기에 있어!?”

***

조용한 응접실의 안에서, 한나가 내어온 차를 천천히 마신 강백호의 사형이 입을 열었다.

“방금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는 이 사고뭉치의 사형인 채치수라 합니다.”

그런 채치수의 말에 송태섭이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저야말로 실례가 많았죠. 송태섭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강백호가 팔짱을 끼며 채치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사형이 여긴 웬일이야? 저번 답신 받은지 얼마 안되지 않았나?”

그런 강백호의 물음에 채치수가 다시 한번 차를 들이킨 후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때,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세 사람이 모두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바라보았는데, 그는 서태웅이었다. 강백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빨리 오라고 재촉하며 자리에 앉히곤, 자신도 그 옆자리에 다시 앉았다. 자리에 앉은 서태웅은 채치수를 바라보더니, 굳게 다물려 있던 입을 열었다.

“초대하지 않은 객이 왔군.”

“…”

“그래서, 용건은?”

서태웅의 그 싸늘하기까지 한 말투에, 강백호는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왜 저렇게까지 뭐라고 하는거래? 속으로 작게 투덜거린 강백호가 이번엔 채치수를 바라보았다. 채치수는 서태웅이 나타나자마자 표정을 약간 찡그렸다가 마음을 다스리듯 한숨을 한번 내뱉고는, 서태웅을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제 여동생이 사라졌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강백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채치수의 동생이라고 하면 바로 소연이었다. 소연이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강백호가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채치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찾아보니 마을에서 소연이를 데려갔더군요.”

“이 자식들이…!”

이빨이 으드득 갈리는 소리가 났다. 강백호는 주먹을 쥔 채로 탁자를 내려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래서 어찌했는지 캐내어 보니 이곳에 다시 바쳤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채치수는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의심이 서려 있었다.

“정말로 이곳에 그 아이가 온 적이 없습니까?”

그 시선과 말에, 강백호도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물론 서태웅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 최근 여우굴에 인간이 들어온 건 너 뿐이다.”

“…!”

“그 정도는 알 수 있어. 그러니 헛다리를 짚었다고 말해주고 싶군.”

그런 서태웅의 말에 채치수는 한 손으로 제 오른 무릎을 꽉 쥐며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정적이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그것도 잠시, 계속될것 같았던 정적을 깨트린 것은 강백호였다. 강백호는 입을 열어 채치수에게 물었다.

“잠깐만 그럼 지금 소연이는…”

“…”

채치수는 답지 않게 말없이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강백호는 그런 채치수를 바라보며 점점 초조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강백호가 울컥 말을 내뱉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당장 찾으러 가야지!”

정신 안 차려 사형!? 그렇게 소리치는 강백호의 목소리에 채치수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며 강백호에게 우렁차게 답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그렇게 말한 채치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런 채치수를 바라보던 서태웅이, 한나를 한번 바라보았다가 다시 채치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가는 길은 저쪽이 안내해 줄 거다. 따라 나가도록 해.”

서태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한나가 채치수를 밖으로 안내하자, 채치수가 그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어색하게 앉아있던 송태섭도 기회를 봐 슬쩍 따라나선지라 응접실에는 어느새 서태웅와 강백호 두 사람만이 남아있었다.

강백호도 채치수를 따라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서태웅이 강백호에게 말을 걸어 그를 붙잡았다.

“어디 가는 거지?”

“당연히 소연이를 찾으러…”

“여우굴 밖에 나가겠다는 건가?”

“당연하지! 그럼 나보고 지금 가만히 있으라는 거야?”

“…그래.”

“…”

그 순간, 침묵이 또다시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강백호는 그 침묵을 깨트리기 위해 입을 열어 서태웅에게 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뭔데?”

서태웅은 그 질문에 잠시 말이 없다가, 짧은 대답을 내뱉었다.

“…위험해.”

강백호는 그 대답에 표정을 찡그리며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뭐가 위험한데?”

“…”

“왜 말을 못 해!?”

“그건…”

그렇게 운을 띄운 서태웅이 또 입을 다물자, 강백호는 마음 깊숙히 숨겨두었던 의심이 다시금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왜 말을 못 하는데,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라도 돼? 그렇게 숨겨야 할 일이야?”

“…”

“왜 나한테 숨겨야 하는데. 왜 내가 알면 안 되는지 말해보라고!”

강백호가 서태웅의 멱살을 잡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서태웅은 여전히 굳게 닫힌 입술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뿐이었다. 강백호는 으득 이를 갈며 서태웅을 노려보았다.

믿고 싶었다. 하지만 저 녀석은 모든 것에 침묵으로 답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서태웅의 멱살을 잡고있던 강백호의 손에 힘이 점점 풀렸다. 고개를 숙인 채로, 강백호는 서태웅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보기 위해 입을 뗐다.

“위험하다는 거, 내가 여우 구슬이라서 그런 거냐?”

그 순간, 서태웅의 눈이 놀란 듯 크게 뜨였다. 그 표정 변화에 강백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배신감이 밀려 들어왔다.

“소중한 여우 구슬이 위험에 처하면 안 되니까, 나가면 안 되는 거고.”

‘그동안 잘해줬던 것도 모두, 내가 아니라 여우 구슬을 위해 그런 거였던 거지.’

차마 그 말은 꺼내지 못한 채, 강백호는 서태웅이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로 응접실의 문을 쾅 열어 재꼈다. 그리고 이미 한참 멀어진 세 사람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숨 가쁘게 뛰어온 강백호의 모습에 깜짝 놀란 세 사람이 강백호를 바라보자, 강백호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가자.”

“강백호 너…”

“…소연이 찾으러 가야지.”

“…”

그렇게 말하며 한나를 바라본 강백호가 입을 열었다.

“… 안내 부탁해요. 한나씨.”

“백호님…”

“…딱 이번 한 번만 내 편 들어줘요.”

강백호의 처연한 그 말에, 무언가 짐작했는지 한나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그들을 여우굴 밖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강백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서태웅은 쫓아오지 않았다.

강백호는 다시 고개를 돌린 후,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

드르륵, 문을 닫으며 한나가 응접실의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곳에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서태웅이 있었다. 그런 서태웅을 바라보며, 한나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백호님은 일행분과 함께…인계로 떠나셨어요.”

송태섭이 따라붙긴 했지만,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며 한나가 다시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왜 붙잡지 않으셨어요?”

어쩐지 타박하는 듯한 그 말에, 서태웅은 아무 말도 없이 제 손을 쥐었다 폈다가, 고개를 들어 한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딘가 체념한 듯한 말을 내뱉었다.

“…나는 그를 붙잡을 자격이 없어.”

한나는 그렇게 말하는 서태웅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 가장 효과가 있을법한 말을 꺼내었다.

“하지만 백호님은 태웅님을 믿고 싶어 하셨는걸요…!”

“강백호가?”

“네, 제가 보기엔 그랬어요. 정말이에요.”

한나의 감은 날카로운 구석이 있어서, 그녀가 그렇다고 한다면 아마 그럴 확률이 높았다. 서태웅은 그것을 알고 있기에 쓰게 웃음 짓고 말았다.

“멍청이가 그랬단 말이지…”

“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쫓아가셔서…”

한나의 그 말을 끊으며, 서태웅이 입을 열었다.

“… 한나. 너는 아무것도 모르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네?”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 녀석도 그랬던 거야.”

그리고 난, 그걸 이용한 것 뿐이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고개를 숙인 서태웅을 바라보며, 한나는 의문어린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태웅님?”

“…”

하지만 서태웅은 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한나는 그 침묵을 깨트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말씀해 주세요. 저와 백호님이 모르고 있는게 대체 무엇이죠?”

“대체 그게 무엇이길래 태웅님이 지금 이러서야 하는지 저는 알아야겠어요!”

그 씩씩한 대답에, 서태웅은 다시 고개를 들어 한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그 이름을 불렀다.

“한나.”

“네.”

무거운 정적이 짙게 깔렸다. 어떤 말이 나올지 모를 분위기 속에서, 서태웅의 입이 열렸다.

“너는, 어미를 죽게 한자를 사랑할 수 있나?”

**

잠에 드는 것은 싫다.

잠에 들면 언제나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여우 구슬을 복원하렴’

‘그것을 위해 살아있는 거잖니.’

그렇게 속삭이는 어미와 아비의 원념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은 채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모님의 사랑을 위해 조각난 여우 구슬, 사라진 한 조각, 비어버린 조각을 대신하는 영혼. 오늘도 여우 구슬을 유지하기 위해 잠드는 나날이 계속된다. 200년이 넘는 삶 동안 깨어있는 날이 드물었으니, 아직 어린아이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그 탓이 크지 않을까. 그리 생각을 했다.

사실, 깨어있어도 특별히 할 일이 없긴 했다. 그가 있는 이 저택에는 그를 제외하곤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여우 구슬을 품고있는 그는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생명 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언제나 이 저택은 아무도 없는 적막한 곳이었다.

그때였다. 아무도 없어야할 뒤뜰에 무언가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은.

서태웅은 그 생명체에게 다가갔다. 그가 잠든 사이 약해진 결계의 틈 사이로 굴러들어 온 요괴 한 마리가 그곳에 있었다. 높은 곳에서 굴러 떨어진 듯 이리저리 부러지고, 피투성이가 된 호랑이 한 마리는 색색 숨을 내쉬며 아픈 숨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그런 그것을 치료해 준 것은 약간의 변덕이었다. 거의 100년 만에 보는 살아있는 것이라 그런 것뿐이라며, 구슬의 힘을 끌어다 쓰곤, 그 호랑이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렸다.

“정말 고마워!!”

눈을 뜬 호랑이는 정말 시끄러워서, 서태웅은 눈가를 찡그렸다. 서태웅은 말했다.

“이건 임시방편이고, 한 달은 더 요양을 해야 한다.”

호랑이는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고, 금세 인간 여인의 모습으로 둔갑을 하더니, 다시 한번 꾸벅꾸벅 감사를 표했다. 서태웅은 점점 귀찮아지기 시작했지만, 이미 구한 것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저택에 살아있는 생명체가 한 명 추가된 순간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하나 생겼으니 저택을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태웅은 아무것도 없어도 살 수 있었으나, 저 호랑이는 그럴 수 없는 생명체였다. 서태웅은 한숨을 쉬며 여우골로 나갔다. 그러자 저택 주변을 서성거리던 어느 요괴가 갑자기 나타난 서태웅을 보고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숙여 그에게 물었다.

“혹시 서태웅님이십니까?”

서태웅은 그 말을 무시한채로 제 할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준비해라.”

“네?”

“먹을 것과 옷가지를 준비해. 그리고 그것을 들여올 사람을 들여보내라.”

“그게 무슨…”

어안이 벙벙한 상대를 무시한 채로, 서태웅은 다시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 호랑이는 기운을 차리더니, 서태웅을 보기만 하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요양을 해야 한다고 했으니 침상에 누워는 있었으나, 그 입은 무겁게 닫혀있는 날이 없었다. 서태웅은 그 수다의 상대가 되어 강제로 시간을 때우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아주 사소하기 짝이 없었다.

한 달이 지나는 동안, 호랑이와 서태웅의 사이는 점차 가까워졌다.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았으나, 호랑이는 그를 친구라 생각할 정도였다.

마지막 날 밤. 호랑이는 잠들기 전 불현듯 서태웅에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내뱉으며 깊은 속마음을 꺼내놓았다.

“덕분에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됐어.”

그 한마디가 너무 기쁜듯 하여서, 서태웅은 저도 모르게 대꾸하듯 중얼거리고 말았다.

“…가족?”

“응, 귀여운 남편이랑 아들이 하나 있지. 그러고 보니 백호가 딱 너만 한 데 말이야~”

“백호?”

“강백호라고 우리 아들~ 정말 정말 귀여운데, 여기 없어서 소개를 못시켜주네.”

“…흥. 널 닮았다면 멍청이겠군.”

“얘 좀 봐, 어린애가 못 하는 말이 없어.”

“흥.”

어린애는 무슨, 그렇게 생각하며 콧방귀를 뀌는 서태웅을 보곤, 호랑이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엉망진창으로 쓰담기 시작했다. 서태웅은 마구잡이인 그 손길이 어째서인지 따듯하다고 느꼈다. 호랑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사람이 아무도 없네. 너 혼자서 사는 거야?”

“…그런데.”

“…있잖아 아가.”

“…서태웅이다.”

“그래, 태웅아.”

“…뭐지?”

“내일 길 안내를 해주지 않을래?”

“뭐?”

“나는 여기서 나가는 법을 모르잖아. 그러니까 네가 안내를 좀 해줘.”

“…”

“그러는 김에 내 가족도 만나보지 않을래? 너를 소개시켜주고 싶거든.”

“…”

그렇게 조근조근 말하는 호랑이는 점점 눈꺼풀이 감기고 있었다. 그리고 대답도 듣지 않은 채로 잠든 그녀를 바라보며, 서태웅은 정말 제멋대로인 요괴라고 생각하며 눈을 깜빡였다.

잠든 호랑이를 바라보며 잠을 지센 서태웅은, 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호랑이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일어나, 네 가족을 만나러 간다며.”

그 말에 호랑이가 벌떡 일어나서는 서태웅에게 다가가 활짝 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같이 가주는 거야?”

“기껏 살려놓았더니 또 죽는 꼴을 보기 싫어서 그런 거다.”

호랑이는 서태웅이 어떻게 말하든 마냥 기쁜지 방긋방긋 웃더니, 저벅저벅 걸어가는 서태웅의 발걸음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온 다음엔 내가 앞장설게."

“이미 밖이다.”

“벌써!?”

호랑이는 깜짝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 서태웅이 또다시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사실 축지를 사용한 것이였으나, 저렇게까지 호들갑을 떠니 그 모양새가 웃겨 말해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얼핏 눈치를 챈듯, 호랑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태웅이 너, 생각보다 더 대단하구나…!”

“…”

“그럼 이제부터 내가 안내할게. 남편이 있는 위치는 대략 알고 있거든.”

그러니까,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그렇게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 모습을 보던 서태웅은 그 뒷모습을 따라 걸어갔다. 축지를 쓰면 빠를 것을 그냥 걸었던 것은 왜였을까? 그저 변덕이었을까? 두 사람은 그렇게 그녀의 은신처로 향했다.

은신처는 꽤 깊은 험지에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기 무섭게, 인기척을 느낀 건지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 남자는 꽤나 유약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남자는 호랑이 여인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더니, 바람처럼 달려와 그 여인을 끌어 안았다.

‘인간?’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끌어안은 그를 바라보며, 서태웅은 묘한 기분이 되었다. 저자가 호랑이의 남편인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직접 만나고 나니 드는 의문이 있었다. 그는 인간의 향기가 났는데, 그러면서도 바람의 향기가 났다. 평범한 인간은 아닐성 싶었다. 서태웅이 그를 관찰하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해후를 기뻐하고 있었다.

“미안해, 여보.”

“당신이 뭐가 미안해요. 그놈들이 잘못한 거지.”

“그, 그래도 나 어디 하나 안 다치고 무사히 왔어. 자! 봐봐. 멀쩡하지?”

“응, 다행이에요.”

“이게 다 태웅이 덕분이니까, 감사는 태웅이한테 해줘.”

“태웅이…?”

“응! 나랑 같이온 저… 아니 왜 저렇게 멀리 떨어져 있대.”

그제서야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을 보며, 서태웅은 다시 저벅저벅 두 사람 근처로 걸어갔다.

“비켜줘야 할 것 같아서.”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썼다고…”

호랑이의 그 말에 서태웅이 호랑이를 바라보자, 호랑이는 그 눈빛을 외면한 채로 제 남편에게 서태웅을 가리키며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여보! 이쪽은 내 상처를 돌봐주고 여기까지 데려다 준 은인이야.”

그 말에 남편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하더니, 서태웅을 바라보며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함을 전했다.

“아내를 구해주신 분이셨군요. 이걸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그 극진한 감사에 그를 바라본 서태웅이 고개를 저었다.

“감사는 됐어. 그냥 살린것 뿐이니까.”

그런 서태웅의 말에 그는 다시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랑이는, 무언가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

“맞다 여보! 백호는 어디에 있어?”

“백호? 백호는 지금 뒤뜰에 있어요.”

“그래? 그럼 백호한테도 태웅이 소개시켜주고 올게!”

그렇게 말한 호랑이는 멋대로 서태웅의 손을 잡고 씩씩하게 뛰어나갔다. 서태웅은 그 힘에 이끌려 이리저리 끌려 나갔다.

그렇게 끌려간 곳에는 붉은 머리털을 가진 꼬마가 한 명 서 있었다.

그리고 그게, 멍청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사실, 첫 만남은 최악이었다.

그 멍청이는 처음 본 그 순간 그 단단한 머리를 들이밀어 부딪혔으니까.

꽝! 머리와 머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서태웅이 갑작스런 습격에 휘청거렸으며, 당황한 호랑이가 어쩔 줄 몰라 할 때, 다시 자세를 잡은 꼬마가 말했다.

“…너, 누구야!?”

라고 소리치는 꼬마는 잔뜩 날을 세운 채로 그를 쏘아보았다.

“너 누군데 우리 엄마랑 같이 있는 건데!”

그렇게 씩씩거리는 꼬마를 향해, 서태웅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호랑이가 서태웅을 제 품에 감싸며, 버럭, 화를 냈다.

“강백호! 누가 이런 짓 하랬어!”

호랑이의 벼락같은 목소리에, 깜짝 놀란 꼬마는, 금세 울먹이며 호랑이를 바라보았다.

“하, 하지만…”

“누가 그런 못된 짓 하라고 했니!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어!?”

“…엄마가… 쟤가 더 좋아서 나를 안 보러 온 거면 어떡해…”

그 순간, 서태웅은 어이가 없어짐을 느꼈다. 겨우 그런 이유 하나로 이런 행동을 한단 말인가. 서태웅의 마음속에서 꼬마가 멍청이로 격하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호랑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당황한 얼굴로 꼬마를 끌어안아 주며, 어르고 달래주고 있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우리 아들. 그런 걸 걱정한 거야?”

“하지만 그동안 보러 안 왔잖아. 내가 싫어져서 안 온 거면 어떡해?”

“아니래도? 그동안은 엄마가 아파서 못 온 거였어. 백호가 너무 보고 싶었는데 못 온 거니까 용서해 줄래?”

“…어!? 엄마 어디 아파?”

“이제 안 아파~! 태웅이가 도와줬거든. 덕분에 다시 엄마가 백호를 보러올 수 있었어. 그러니까 고맙다고 해야지?”

호랑이의 그 말에, 빼꼼 고개를 빼든 꼬마가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쏘아보던 그 시선은 어디 갔는지, 약간 의심을 품었으나 순해진 그 눈빛에 서태웅은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고, 고마워.”

“…흥”

그렇게 콧방귀를 뀌며, 서태웅이 고개를 돌리자, 강백호의 표정이 찡그러졌다.

“이익…!”

두 사람의 유치한 투닥임에, 당황한 것은 호랑이였다. 호랑이는 어쩔 줄 몰라 하다 결국 두 사람이 투닥이는 것을 말리는 것을 포기하곤, 두 사람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둘이서 잠깐 놀고 있을래?”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호랑이는 그런 두 사람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이제 너희 먹을 저녁 준비하러 가야 하는걸. 그러니까 다시 올 때까지 놀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호랑이는 슬쩍 서태웅을 향해 속삭였다.

“우리 백호 잘 부탁해. 알았지?”

그 말에 서태웅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찡긋 한쪽 눈을 감아 보인 호랑이는, 그렇게 두 사람을 놔두곤 제 남편이 있는 방향으로 후다닥 뛰어가 버렸다.

결국 둘만 남겨진 뒤뜰에서, 강백호와 서태웅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

“…”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침묵 끝에, 강백호가 머뭇거리며 서태웅에게 말을 걸었다.

“너, 이름이 뭐냐?”

서태웅은 그 물음에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은 아까 제 어미가 태웅이라고 부르는 걸 듣지 못한 건가? 역시 멍청이가 따로 없다고 생각하며 서태웅이 입을 열었다.

“아까 네 어미가 알려줬을 텐데.”

그런 서태웅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강백호가 서태웅을 바라보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나도 알거든! 근데 원래 통성명이란 건 직접 해야 하는 거라고 아빠가 그랬단 말이야!”

그러니까 빨리 이름이나 말하라며 투덜거리는 강백호를 바라보며, 서태웅이 툭, 말을 내뱉었다.

“서태웅이다. 멍청이.”

강백호는 멍청이라는 단어에 눈을 부라리며 서태웅을 보았다가, 자신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강백호다! 멍청이가 아니라고!”

그런 강백호의 말에, 서태웅이 다시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너는 멍청이면 족해.”

“이이익… 이 자식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빨갛게 달아오르는 강백호를 보며, 서태웅은 어째서인지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왜 자신이 이렇게 유치하게 구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냥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그 사이 강백호는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서태웅을 한번 슥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휙 돌려 모른 척을 했다. 그리곤 발걸음을 옮겨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줍더니, 혼자서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그 유치한 행동에 서태웅은 강백호를 흘끔 바라보았다.

“뭐 하는 거냐, 멍청이.”

“너는 몰라도 돼!”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고개를 홱 돌린 강백호가 가지고 놀던 것은 조금 특이하게 생긴 공이었다. 서태웅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바닥에 튕긴 공을 잡아챘다. 그렇게 공을 뺏기자, 강백호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서태웅은 제 손에 들린 공을 바라보며 멀뚱히 서 있었다. 반사적으로 잡아채긴 했으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 수 가 없었다. 그에게는 이런 것을 가지고 놀아본 기억이 없었고, 함께 놀 친구가 없었으며, 가지고 노는 법을 알려줄 어른 또한 부재했기 때문이었다.

서태웅이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강백호는 답답한 마음에 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야! 너는 그거 할 줄도 모르냐!”

그 외침에 서태웅은 그대로 강백호를 향해 공을 던졌다. 힘차게 날아간 공은 강백호의 이마에 맞고 허공에 붕 떠올랐다.

바닥에 툭 떨어진 공이 다시 데구루루 굴렀다. 강백호는 씩씩거리며 서태웅을 향해 다시 한번 소리쳤다.

“이게 무슨짓이야 바보야!”

그 우렁찬 외침에 서태웅의 짧게 대꾸했다.

“할 줄 모른다며.”

그래서 한 건데. 그 뻔뻔한 대답에 강백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엄마가 데려온 저 녀석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었다. 얼굴만 예쁘장하면 다인가? 성격이 저 모양인데! 강백호는 서태웅을 쏘아보다 제 옆에 떨어져 있는 공을 주워 서태웅을 향해 던져버렸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공을 가뿐히 받은 서태웅은, 다시 한번 강백호를 향해 공을 던졌다. 강백호도 이번에는 방심하고 있지 않았던지라, 어디 하나 부딪히지 않고 공을 받아냈다.

그렇게 두어 번 공을 주고받는 모양새가 되자, 멀리서 보면 두 사람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듯 보였다.

자신들이 그렇게 보이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두 사람은 열심히 공을 던지고, 받기를 반복했다.

필사적으로 덤비는 강백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열심히 반응해 준 서태웅은, 스스로는 모르고 있었지만, 이 상황을 꽤나 즐거워 하고 있었다.

결국 호랑이가 다시 그들을 부를 때까지, 공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호랑이가 오고 나서야 공을 주고받는 것을 멈췄다.

“다음엔 절대로 안 봐줄 거니까!”

강백호는 씩씩거리며 서태웅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다음을 기약하는 멍청이를 보며, 서태웅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입을 열어, 그 말에 답했다.

“다음에도 변하는 건 없어. 멍청이.”

또다시 투닥거리려는 두 사람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 호랑이는, 열심히 준비한 저녁상을 서태웅에게 내밀었다. 먹을 필요는 없었으나, 서태웅은 그것을 입에 밀어 넣었다. 화려하지도, 천하제일의 진미도 아니었으나 어째서인지 속이 따듯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를 먹었을 때 이런 느낌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떠날 시간이 되자, 그를 배웅하며 호랑이가 말했다.

“다음에 또 놀러 와.”

그렇게 말하는 호랑이는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 서태웅은 다시 한번 묘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은 다음을 약속할 수 있는 걸까? 어차피 돌아가면 다시 잠에 빠져들 텐데.

서태웅은 대답하지 않은 채로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돌아온 저택은 숨이 막힐 정도로 조용했다. 이게 당연한 것일 텐데도, 서태웅은 어느새 그 시끄러움에 익숙해진 자신을 느꼈다.

서태웅은 침상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잠은 오지 않았다. 다시 긴 잠에 빠질 것을 예상했던 서태웅은, 오지 않는 잠에 당혹스러워했다. 깨어있지 않은 삶에 익숙한 그는, 깨어있는 삶에 적응하지 못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생각이 나는 것은, 다음에 놀러 오라 말했던 그 한마디였다.

그래서, 서태웅은 깨어있는 날마다 여우 굴 밖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그때의 서태웅은 눈앞의 온기에 눈이 멀어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이 저택에 홀로 머물러야 했는지, 여우굴의 밖으로 나가서는 안됐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는 자였으니…

비극은 그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날도 서태웅은 그들을 만나러 갔다. 한동안 잠에 빠져들지 않다가 오랜만에 잠에 들었다 깨어난 날이었다. 한 달 정도 잠 들어있었던 터라 아주 심통이 난 멍청이는, 너 같은 거 모른다며 잔뜩 심통을 부렸다. 하지만 단순하기는 또 단순해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사르르 녹아서는, 다시 놀자며 새침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날 둘이서 한 놀이는 저 높이 있는 나무의 가지를 맞추는 것이었는데, 공을 주고받는 것과는 다른 재미가 있었다. 열심히 공을 저 위로 던지다 보니, 공이 저 멀리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공이 데구르르 굴러갔다. 강백호는 공을 줍기 위해 타닥타닥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때, 그림자가 강백호를 가렸다. 강백호는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누구…”

그렇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손을 뻗어 강백호를 홱 끌어당겼다. 그러곤 강백호의 목을 제 한 팔로 감곤 번쩍 들어 올렸다. 갑자기 붙잡히게 된 강백호는 버둥거리며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거 놔!”

“강백호!!”

서태웅이 그런 강백호를 보고 소리치자, 남자는 품속에서 나침반을 하나 꺼내더니, 그 방향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 방향은 서태웅이 있는 쪽이어서, 자연스레 서태웅을 바라본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찾았다.”

그 중얼거림에, 강백호는 남자가 노리는 것이 서태웅임을 눈치채고 말았다. 나쁜 놈이구나 이 자식! 그렇게 생각한 강백호가 저를 붙잡고 있는 팔을 와득 깨물었다. 날카로운 이가 살가죽을 파고들었으나,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백호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발버둥 치는 강백호가 거슬린다는 듯 그 목덜미를 내리쳤다.

발버둥 치던 강백호가 그대로 남자의 품 안에서 축 늘어졌다. 서태웅은 남자가 강백호에게 더 위해를 끼칠까 다급히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누구지?”

서태웅의 그 말에, 남자가 입을 열었다.

“요괴에게 알려줄 것은 없다.”

그 냉정하고 무심한 태도에, 서태웅은 더 이상의 말이 통하지 않음을 깨닫고 본론을 내뱉었다.

“흥. 어차피 목적은 내가 아닌가? 멍청이를 놔줘. 그럼 따라가겠다.”

서태웅의 그 말에, 제 품에 있는 강백호를 한번 바라보았다가, 서태웅을 바라본 그는, 남은 한쪽손을 까딱이며 서태웅에게 이쪽으로 오라 손짓을 했다. 서태웅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서태웅이 남자의 곁에 다가오자, 남자는 약속을 지킨다는 듯이 강백호를 홱, 바닥에 집어던졌다. 그 행동에 서태웅이 남자를 노려보자. 남자는 더 이상 강백호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강백호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피고 싶었으나, 남자를 따돌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구슬의 힘을 쓰는 방법이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아까부터 누군가 힘을 틀어막아 놓은 것처럼 숨이 찼다. 서태웅은 남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런식으로 자신을 습격할 인물은 아무리 생각해도 단 한 명뿐이었다. 서태웅의 입이 열렸다.

“황제가 보냈나?”

서태웅의 말에, 남자가 입을 열었다.

“요괴에게 알려줄 것은 없다고 했을 텐데.”

그렇게 말한 남자는, 서태웅에게 앞으로 걸으라는 듯 목을 까딱였다. 서태웅은 우선 남자가 시키는대로 앞으로 걸어갔다. 남자가 서태웅의 곁에 붙어 따라 걸어왔다. 침묵이 두 사람의 사이에 가라앉았다.

어느 정도 걷자, 그곳에는 무장한 군사들이 열댓 명정도 서 있었다. 그들은 남자가 서태웅과 함께 나타나자, 조금 놀란 얼굴로,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군사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서태웅을 한번 바라보더니, 남자를 향해 말했다.

“이 아이가 그 자가 맞는가?”

자신의 눈에는 그저 어린아이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며, 의문을 표하는 대장을 향해, 남자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내리신 나침반이 가리키고 있었소. 분명하오.”

“허, 참. 정말 믿기질 않는군.”

“당신이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습니다만,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서두르지요.”

“… 알았네.”

그렇게 말한 대장은, 어쩐지 소란스러운 군사들을 이끌고 남자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서태웅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저런 것이 요괴 무리를 이끌고 있는 질 나쁜 요괴라니, 역시 요괴는 요괴인가.”

그 중얼거림을 들은 서태웅은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누가 누구를 이끌고 있단 말인가. 역시 대놓고 여우 구슬을 노리고 있다고 말할 수 없으니 그런 핑계를 댔나 보군.

서태웅은 자신이 잡혀 오길 기다리고 있을 황제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헛웃음을 지었다. 이대로 잡혀간다면 그 졸렬한 자의 앞에 서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이모님을 배신한 그자에게 그대로 죽음으로 구슬을 헌납하게 되는 걸까?

부모의 원념이 그럴 순 없다며 울부짖었다. 모든것이 다 여우 굴 밖으로 나온 네 탓이라며 귓가를 맴돌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거대한 그림자가 군세를 덮쳤다. 그 일격에 엉망으로 흩어진 병사들이 자신들을 습격한 무언가를 향해 무기를 세웠다. 그들을 덮친 것은 거대한 호랑이었다. 호랑이는 순식간에 서태웅의 옷가지를 물고 그를 데리고 재빠르게 달려 나갔다.

서태웅은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눈을 크게 떴다.

대롱대롱 들려 움직여진 그는, 그 호랑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호랑이는 어느 정도 그들을 따돌리자 잠시 멈춰, 물고 있던 그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태웅아, 어서 타!”

그 말에, 서태웅은 반사적으로 호랑이의 등에 올라타 목덜미를 붙잡곤, 입을 열었다.

“너…이게 무슨”

그런 서태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랑이가 뜀박질하며 입을 열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있어서, 서태웅은 순간 목이 매이는 듯 했다. 그대로 서태웅은 고개를 숙였다.

“안다쳤어.”

그 짧은 대답에, 호랑이는 안심한 듯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호랑이를 바라보며, 서태웅은 묻고 싶었던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멍청이는?”

“백호는 무사해. 잠깐 기절한 것 뿐이야.”

쫓기는 와중에도, 제 아들을 걱정하는 듯한 서태웅의 말에, 호랑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백호의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저 녀석들, 너를 노리고 온 것 맞지?”

“맞아.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도망쳐.”

더 이상 엮였다간 너희도 피해를 입을 수 있다며, 서태웅이 중얼거리자, 호랑이는 그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 행동에 서태웅이 호랑이의 털을 더욱 세게 그러잡곤, 그녀를 향해 외쳤다.

“네 가족이 걱정되지 않아!?”

그 말에, 호랑이가 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꿋꿋이 그를 데리고 추격자들을 피해 달아났다. 그리곤 서태웅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도 나를 구해줬잖아. 그 은혜를 값는 거라고 생각해.”

그 말에 서태웅이 대꾸하려던 찰나, 어디선가 소름이 돋는 파공성이 들려왔다.

핑!

저 너머에서 날아온 화살이 그녀의 가죽을 뚫고 피부 아래에 박혔다. 저도 모르게 휘청인 그녀는 다시 한번 균형을 잡고 이어서 날아온 화살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틀었다.

“이쪽이다!”

가까워진 그 소리에, 호랑이는 고통을 참으며, 다시 한번 내달렸다. 하지만 그들을 쫓는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갔다. 그래서 호랑이는, 결심한 듯 차분한 목소리로 서태웅을 향해 말을 걸었다.

“…태웅아 잘들어”

서태웅은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입에서 나올 말을 듣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혼자 가는 거야. 무슨 소리가 들려도 돌아보지 말고, 네 집으로 달려가.”

이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지?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 차분하기 그지없어서, 서태웅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보고 지금 너를 버리고 가라는 거야?”

서태웅의 그 말에, 호랑이가 그게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아니. 그건 절대 아니야. 알았지? 버리는 게 아니야. 그냥, 이쪽이 더 살 가능성이 높은 거라는 거 알잖아.”

그렇게 말한 호랑이는 발걸음을 멈추곤, 서태웅을 내려준 다음,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어서 가라며, 호랑이는 서태웅의 등을 툭, 밀었다.

“어서 가!”

하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태웅이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려던 찰나, 그녀는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았다. 그동안 달려온 방향의 반대편으로 달려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서태웅은 고개를 홱 돌리곤,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서태웅은 자신의 무력함을 느꼈다. 무력하고, 한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엇이든 들어줄 것처럼 굴던 여우 구슬의 힘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잠잠하기만 했다.

저 너머에서 호랑이가 으르렁 거리는 소리와, 습격 당한 인간들이 맞서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 했다.

서태웅은 생각했다. 여우 굴, 여우 굴에만 돌아간다면 구할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여우 굴에 당도한 서태웅은, 숨을 고르며 비틀 비틀 도움을 청할만한 이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 마을에 나와있던 대장로를 발견한 그는, 그에게 달려가 당장이라도 나가야 한다며 외쳤다.

하지만, 대장로가 내뱉은 말은, 서태웅을 절망하게 하기 충분한 말이었다.

“하지만 저희가 왜 그런 위험을 부담해야 합니까?”

“…뭐?”

“자칫하단 저희마저 위험에 빠질 수 있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 호랑이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잊어버리시지요.”

“뭐라고…!”

“태웅님을 댁으로 뫼셔라!”

대장로의 그 말에, 그를 따르는 무사들이 서태웅의 팔을 한 쪽씩 붙잡곤, 힘껏 끌고 갔다. 서태웅은 반항하려 하였으나, 여우 구슬의 힘이 묶여버린 그는 아직 어린 꼬마일 뿐이었다.

대장로의 집으로 끌려간 그는, 방안으로 던져졌다. 서태웅이 다시 일어나 문을 열기 위해 힘을 주었으나, 어느새 문이 잠겨 열리지 않았다.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며, 서태웅은 목이 쉬어라 문을 열라 외쳐댔다. 당장이라도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갈 수 없었다.

바닥이 흐르는 눈물에 젖어갔다.

그렇게 자신의 무력함을 통감하며, 서태웅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

서태웅은 지금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

여우 굴에서 벗어난 세 사람은 묵묵히 산길을 걸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있는 송태섭을 보며, 강백호가 그를 째려보았다.

“잠깐만 섭섭이! 왜 여기까지 따라오는 거야!?”

“따라오면 안되는 거였어?”

“그럼 되겠어!? 너는 여우 놈 편일 거 아니야! 쫓아오지 마!”

“에이,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여기까지 길 안내해 준 게 누군데~”

“…그건 고맙지만. 그래도…”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인데? 그 소연이라는 여자를 찾으려면 우선 짐작 가는 곳이라도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건…”

“내가 그 여자를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걸? 나 이래뵈도 쓸만한 요괴거든.”

그렇게 말하는 송태섭은 당당하기 그지없어서, 강백호는 어이가 없어졌다.

그때였다, 코끝을 찌르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게 만드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강백호는 뒤따라오는 두 사람에게 손짓하곤 냄새가 짙게 나는 방향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그렇게 달려 도착한 곳은 어딘가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강백호는 이를 악물었다. 이곳은 바로 북산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피 냄새에, 강백호가 이를 악물며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바닥을 적신 핏자국과, 땅을 덮은 시체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강백호는 다시 한번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뒤따라온 채치수또한, 눈앞의 광경을 믿지 못하는 듯 그 두터운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송태섭만이 그 광경을 보며, 이 상황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임을 추측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덜컹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으나, 그 소리를 놓치지 않은 강백호가 빠르게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커다란 항아리가 있었는데, 강백호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 항아리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항아리 안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그렇게 외치는 목소리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강백호는 항아리의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사람이 겨우 들어가 있었는데, 그 익숙한 얼굴에 강백호가 눈을 깜빡였다. 그는 촌장의 아들인 박서방이었다. 박서방은 들려오는 답이 없자,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보았는데, 항아리의 안을 들여다보는 세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벌벌 떨며 몸을 웅크렸다.

그런 그에게, 채치수가 말을 걸었다.

“괜찮습니다. 접니다. 채치수.”

그 말에, 박서방은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며 항아리 안에서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항아리에서 빠져나온 그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여전히 핏기 없는 얼굴로 제 손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치수구나… 치수였어.”

그런 그를 보며, 채치수가 다시 말을 걸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그 말에 박서방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질리는 듯했다. 채치수가 그런 박서방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말씀해 주세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박서방은 그 말에 덜덜 떨리는 손을 붙잡곤, 입을 열었다.

“치수 네가 떠난 이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열댓 명쯤 되는 무장한 사람들이 마을에 찾아왔어.”

“…”

“그중 한 명이 마을 사람을 붙잡고 묻더구나. 여기가 북산이 맞느냐고.”

“그래서 그 처자는 그렇다 고개를 끄덕였지. 그러자, 그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그러는 게야, 요괴에게 제물을 바쳤다는 것을 알고있다고.”

“… 요괴와 내통했다는 걸 안 이상 그들을 보내줄 수는 없었어. 그래서 우선 우리는 그런 적 없다며 발뺌을 했는데…”

“그자는 들은 척도 안하고 아버지를 찾아서… 결국 내가 아버지 앞에 그를 데리고 갔어.”

“그리고 그자들이… 아버지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더니, 그대로 아버지를 찔러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물을 쏟는 박서방을 바라보며,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아버지를 죽인 셈이나 다름없지. 그들을 끌고 아버지 앞에 데려간 데다가, 무서워서 도망이나 쳤으니…”

“이곳에 숨어서 그저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어. 그들이 마을 사람들을 죽이며 한 말이 뭔줄 아는가?”

“’폐하의 명령이다! 요괴와 내통한 자들이니 한 놈도 빠짐없이 죽여라!’ 라고…!”

“그 말은…”

“관군이었던 거지. 관군이었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남자는 손을 딱딱 거리며 물어뜯다가, 고개를 휙 돌려 채치수에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럽게 매달리는 남자를 떼어놓지 못한 채로 붙들린 채치수는, 우선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남자는 고개를 홱 들곤 치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치수야, 한번만 살려다오, 내가 살이있다는 걸 알면 그놈들이 어떻게 할지 몰라! 내, 내가 너 어릴적에 얼마나 잘해줬었는데,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도와줘야지. 그, 그렇지?”

그렇게 말하는 남자에게, 채치수가 말했다.

“…그런데 왜 소연이를 데리고 갔습니까.”

“그건…”

“한번 팔아먹으려 했던 걸로도 모자라서, 또다시 팔아치우려 한 것 아닙니까!”

“치수야…”

“도와달라고 하기 전에 제 동생을 먼저 도와주셨어야죠. 그러지도 않았으면서 저에게 도와달라 하십니까!?”

“…”

남자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는지 채치수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런 남자를 향해, 채치수가 말했다.

“그래도 못 본 척해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남자가 슬쩍 채치수의 눈치를 보았다. 채치수가 말을 이었다.

“못 본 척해드릴테니, 도망을 가든, 이곳에 숨어있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 말에, 남자는 채치수의 눈치를 다시 한번 보더니,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를 하지 않은 채로, 몸을 틀어 후다닥 도망을 갔다. 빠르게 도망을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채치수를 향해,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백호가 입을 열었다.

“사형…”

그 걱정어린 시선에 채치수는 손을 들어 강백호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쓰다듬었다. 강백호는 엉망이 된 머리를 부여잡곤 방금까지 걱정했던 것은 어디 갔는지 그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강백호를 보고, 채치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라. 건방진 녀석.”

“이 사형이 진짜! 걱정해도 뭐라고 하네!”

“네가 날 걱정하기엔 100년은 일러.”

“으으, 내가 다시 걱정하나 봐라”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던 송태섭이, 슬쩍 끼어들며 입을 열었다.

“저기 있잖아, 둘이 사이 좋은건 좋은데, 그 동생이라는 사람 찾으러 가야하지 않아?”

그 말에 채치수와 강백호가 송태섭을 바라보았다. 송태섭이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두 사람을 향해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엔 말이야, 그 동생분이 없어진 거, 관군들이랑 연관이 있는 거 같단 말이지.”

“왜 그렇게 생각하지?”

“왜, 여우 굴에 당신 동생을 바치겠다고 놓아뒀는데, 그 이후에 나타난 관군이 이 마을을 쓸어버렸어, 그리고 당신 동생도 사라졌지. 그럼 가장 연관성 있는 게 누구겠어. 그때 나타난 관군일 거 아니야.”

“…”

“뭐, 이건 내 직감에 의한 추측일 뿐이지만.”

“아니, 네 말이 맞다. 지금은 그 추측이 가장 확률이 높아.”

“오, 내 말 믿어주는 거야?”

“믿는 게 아니라, 가장 합리적이라 받아들인 거다.”

“매정하네. 이럴땐 그냥 그렇다고 말하면 될걸.”

“…”

대답하지 않는 채치수를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은 송태섭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것도 내 직감이긴 한데, 그 녀석들 아마 아직 근처에 있지 않을까 싶어.”

“…”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두 사람이 송태섭을 바라보자, 송태섭이 크흠, 한번 헛기침읗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아까 그 박서방이라는 사람이 말한 거로 봐선, 뭔갈 찾고 있는 것 같았단 말이야.”

“그런가.”

“나는 아마 그게 여우 굴의 위치가 아닌가 싶거든?”

“여우 굴의?”

“그래, 당신은 전령을 협박해서 모르겠지만, 원래 여우 굴의 위치는 꽁꽁 숨겨져 있단 말이지.”

“…”

“근데 여기는 그 여우들과 한번 계약을 맺은 적이 있으니까.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여기에 쳐들어온 거지.”

“뭐, 물론 여기 사람들이 알 리가 없으니까. 그자들도 실패한 거겠지만.”

“…그렇군.”

“뭐, 그런 셈이지.”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강백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잠깐, 섭섭이. 근데 왜 그 녀석들이 소연이를 데려간 거야?”

“아, 그건 아마… 그 녀석들이 원래 신부로 바쳐질 사람이었다는 걸 알고 있던 게 아닐까?”

“…”

“…목표를 이루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한 거겠지. 그러니 아직 살려두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그럼…”

“그리고 아까 말 못 한 건데 말이야.”

“응?”

“그 녀석들이 여우 굴의 위치를 찾는 이유 말인데. 그거, 여우 구슬 때문인 거 같거든?”

“…”

“…지금이라도 여우 굴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

그곳이 가장 안전하다며, 송태섭이 입을 열자, 강백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반응에 송태섭은 한숨을 한번 쉬곤, 고개를 저었다.

“진짜 고집불통이라니까.”

그렇게 말한 송태섭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목적은 정해진 건가? 그 관군들을 쫓아서 소연이라는 여자를 구한다. 맞지?”

그 말에 채치수가 답했다.

“그래.”

“좋아, 그러면 어디 한번 쫓아가 보자고.”

그렇게 말하며, 송태섭이 발걸음을 옮기자, 두 사람이 그를 따라나서면서 의문섞인 말을 꺼냈다.

“위치를 알고 있는 건가?”

“뭐, 아까 박 서방이란 사람이랑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이리저리 알아봤지.”

그런 송태섭의 어깨 위로 작은 다람쥐 한 마리가 올라오더니 무언가 소근소근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송태섭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들을 향해 저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으로 가면 될 것 같네.”

그런 송태섭을 두 사람이 바라보자, 송태섭이 그들을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어때, 나 생각보다 더 도움 되는 요괴지?”

***

차가운 감각을 느끼며, 채소연은 눈을 떴다.

‘여긴…어디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채소연은, 흠칫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팔다리가 묶인채로는 그저 몸을 움찔거리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채소연을 지켜보던 시선은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일어났나 보군.”

채소연은 두려움을 느꼈다. 분명 자신은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끌려간 이후에, 강제로 치장되어 산속 어딘가에 버려져 있었었다. 하지만 눈을 뜨니 처음 보는 사람의 앞에 놓여있었으니, 이 상황을 따라 갈 수가 없었다.

무엇이라 입을 열려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틀어막아둔 천 조각이 소리를 내는 것을 막았다. 시선의 주인은 손을 뻗어 그녀의 입을 막은 천 조각을 풀어주었다.

드디어 자유를 찾은 채소연의 입술이, 망설임을 담고 열렸다.

“…당신은 누구죠?”

그 말에,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묻고 싶어 하는 것을 대신 물어보았을 뿐이었다.

“네가 원래 여우 신부로 갈 여자였다지.”

“…!”

그 말에 채소연은 흠칫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런 채소연의 반응을 허투루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말을 꺼냈다.

“그 반응을 보니 맞나보군.”

“…”

“네 친구가 대신 신부로 갔다고 들었는데, 맞나?”

채소연은 입을 꽉 문 채로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런 채소연이 같잖다는 듯 비웃었다.

“네가 대답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으니 시치미 뗄 생각은 하지 말도록.”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혼례복을 거들었던 자신의 친구들과, 백호의 친구들 정도였다. 채소연은 자신이 생각한 것이 아닐 것이라 믿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그 믿음은 바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의해 와장창 무너지고 말았다.

“가끔은 큰 재물 앞에선 우정이라는 것은 한낱 하찮은 것이 되는 것이지.”

그제서야 채소연은, 최근, 사라진 친구 한 명을 떠올렸다. 며칠 전만 해도 살갑게 인사했었는데, 어째서인지 얼마 전 야반도주를 한 친구였다. 이유도 알지 못해 답답해하고 있었는데, 지금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었다. 채소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는 그런 채소연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애초에 요괴와 관련된 일이 아닌가, 나라에 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

“네가 신부로 간 네 친구와 서신을 주고받는 것도 알고 있다.”

“…!”

“그러는 꼴을 보자니, 여우가 꽤나 그놈을 아끼는 듯 싶어서 말이다.”

“…”

“그놈을 끌어낸다면, 여우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

“…”

“그래서, 내가 왜 너를 데려왔다고 생각하느냐?”

그렇게 말한 남자는, 채소연이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오더니, 채소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채소연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런 채소연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네 친구를 다시 되찾고 싶지 않으냐?”

그 말에, 채소연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여우를 잡는 것이다. 그 인간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채소연이 그에게 묻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우리에게 협력해라.”

“…”

“얌전히 인질로써 행동한다면, 그 인간의 목숨은 보장해 주마.”

“…따르지 않는다면요?”

“…그러면 여우와 함께 그 인간도 죽일 수밖에.”

“…! 백호는 죄가 없어요!”

“요괴와 연관이 있지 않나?”

그것만으로도 큰 죄다. 그렇게 비죽거린 그는, 채소연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잘 생각해 보도록, 어느 것이 네 친구를 위한 길인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채소연을 홀로 남겨둔 채로, 방 밖으로 나섰다.

문이 닫히고, 어둠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채소연은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을 찾기 위해 이들을 찾아올 친구를 떠올렸다.

‘백호야, 오면 안돼. 오지 말아줘.’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하며, 닫혀버린 문을 바라보았다.

**

강백호는 앞장선 송태섭을 따라, 채치수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한참을 걷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송태섭에게 퉁명스럽게 말을 꺼냈다.

“섭섭이,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 강백호에게, 송태섭이 대답했다.

“제대로 가고 있다니까? 뭐, 생각했던 거보다 더 멀리 간 거 같긴 하지만.”

“…얼마나 더 가야 할 거 같은데?”

“글쎄, 이 녀석들이 말하는 걸로 봐선 그 녀석들, 계속 이동하다가 잠깐 멈춘 것 같아.”

“그래서 어디에 있는데?”

“어디 보자, 근처에 혹시 그 인원이 머무를 만한 장소가 있나?”

“그거라면, 근처에 빈 마을이 하나 있다.”

“좋아, 그럼 거기인 거 같은데, 가보자고.”

그렇게 빈 마을로 향한 세사람은, 기척을 죽이고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을의 어느 집을, 그들이 지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송태섭이 입을 열었다.

“아마 저기에 그 소연이라는 여자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채치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백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최대한 들키지 않는 방향으로 작전을 한번 짜보자고. ”

“…굳이 그래야 해?”

“아무리 봐도 우리가 불리한데 정정당당히 맞서 싸울 필요는 없잖아? 안 싸우고 구출할 수 있다면 그게 최고지.”

그렇게 말하는 송태섭의 말에, 강백호는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하며 팔짱을 꼈다. 채치수도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결정된 거다?”

그 물음에, 강백호와 채치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송태섭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상황을 지켜보다가, 감시 인원이 줄어들면 몰래 접근해서 안에 있는 사람만 빼 오는 거야.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긴 한데… 혹시 여기서 밤눈 밝은 사람 있어?”

그 말에, 강백호가 손을 들자, 송태섭은 강백호를 향해 다시 말을 꺼냈다.

“좋아, 네가 그 소연이라는 여자를 구하러 가면, 내가 반대쪽에서 시선을 끌게. 그럼 당신은 상황이 꼬이는 거 같으면 강백호한테 합류하는 걸로. 알겠지?”

강백호와 채치수는 다시 송태섭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밤이 되자, 집을 지키는 사람이 확실히 줄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강백호는 송태섭을 바라보고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겨 그들이 지키고 있는 집의 근처로 다가갔다. 훌쩍 담벼락을 넘은 강백호는, 최대한 조용히 굳게 닫힌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습격이다!!”

저 너머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강백호는 그것이 송태섭이 보내는 신호임을 눈치챘다. 그가 그들의 시선을 끄는 지금이 기회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빠르게, 닫혀있는 문을 향해 뛰어나갔다. 도착한 그곳에는 굳게 닫힌 방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백호는 자물쇠 하나 없는 문을 보며, 이곳이 맞나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 망설임도 잠시, 그 안에서 느껴지는 숨소리에, 벌컥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가 찾고 있던 그녀가 있었다.

강백호는 다급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채소연은 방안으로 누군가 들어오자 고개를 들곤, 상대가 누구인지 살피기 위해 애썼다.

그런 채소연을 바라보며, 강백호가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소연아, 나야! 강백호!”

그러자, 잠시 머뭇거린 채소연이, 희미하게 비치는 달빛에 보이는 강백호의 얼굴에 눈을 크게 떴다.

“백호야…?”

그리고, 그 얼굴은 안도가 아닌 다급함으로 물들었다. 채소연은 다급하게 강백호를 바라보며 조용히 외쳤다.

“백호야! 당장 여기서 도망가!”

“…소연아?”

“이건 다 함정…!”

그리고 그때, 날카로운 파공성이 두 사람을 지나쳤다. 강백호의 볼을 스치고 지나간 그것은, 채소연의 옆에 박혔다. 채소연은 두려움에 떨며 제 옆에 박힌 화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방의 입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멍청한 선택을 하는구나.”

강백호는 그 말소리에, 고개를 돌려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활을 든 남자였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강백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백호는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채소연을 뒤로 숨긴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그런 강백호가 우습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상황파악을 못 하는 녀석이군. 지금 네가 처한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설명까지 해줘야 하나?”

“…”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뒤로, 송태섭을 쫓아 사라진 줄 알았던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백호는 그제서야, 자신이 함정에 걸렸음을 깨달았다. 남자는 강백호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빨리 잡혀줄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멍청하군. 아니, 그 여자가 그 정도로 소중했던 건가?”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말은 비웃음에 가까워서, 강백호는 이를 악물었다.

“반항할 생각은 하지 마라, 네가 거기서 더 움직인다면, 바로 저 여자를 쏴 죽이겠다.”

“…”

강백호가 그 말에, 더 움직이지 못하자, 남자의 뒤에 있던 군사들이 방 안으로 들어와 강백호를 무릎 꿇렸다. 그 모습에 채소연이 몸을 움찔거리자, 다른 군사 한 명은 채소연의 목뒤를 쳐 그녀를 기절시켰다.

채소연이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지자, 강백호가 고개를 돌리며 크게 외쳤다.

“소연아!”

그리고, 그런 강백호를 다시 힘줘 붙든 군사들이, 그를 바닥으로 처박았다.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게 된 강백호가, 고개를 들어 군사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활을 든 남자를 쏘아보았다.

남자는 그런 강백호를 바라보며 뚜벅뚜벅, 그 앞에 다가왔다. 그리고, 발을 들어 그를 걷어찼다.

갑작스레 찾아온 충격에, 강백호가 신음을 삼키자, 남자는 다시 강백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까불지 마라, 요괴의 편에 선 역겨운 녀석. 네 녀석을 지금 살려두는 것 만으로도 자비를 베풀고 있는 거다.”

그리고 몸을 돌린 남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목표도 달성했으니, 여기에 더 있을 필요가 없지. 돌아가자.”

그 순간, 남자의 목덜미에 칼이 내려앉았다.

“아니, 그렇게는 안 된다.”

남자의 목덜미까지 다가온 날카로움에, 방안의 군사들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을 멈추라는 듯, 남자가 손을 들어 그들을 멈추게 했다.

남자의 목에 칼을 들이민 것은, 강백호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강백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남자가 입을 열었다.

“채치수…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는 건가?”

남자가 채치수의 이름을 꺼내자, 강백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 그 놀람도 잠시, 채치수 또한 입을 열었다.

“정대만… 황제의 개가 되었다고 들었다만,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

“그대로 목이 날아가고 싶은게 아니라면, 내 동생과 사제를 놓아줘야겠다.”

남자, 정대만의 목에 실핏줄이 흐르기 시작하자, 심각한 분위기가 주변에 흐르기 시작했다.

“나 하나 잡는다고 해결될 것 같으냐?”

“그럼 너를 죽이고 저 녀석들도 죽이면 끝나겠지.”

“내 말 한마디면 네 동생의 목이 날아갈텐데?”

“…그전에 네 목이 날아가겠지.”

모두가 긴장의 끈을 팽팽히 놓지 않은 상황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강백호를 붙들고 있던 군사의 목덜미를, 누군가 강타했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의 모습에, 강백호가 눈을 크게 떴다. 송태섭은 망설이지 않고 남은 군사의 명치를 강하게 치곤, 다시 머리를 가격했다. 그렇게 쓰러진 군사들에, 강백호가 풀려나자 송태섭이 정대만을 바라보았다.

“이러면 말이 달라지지 않겠어?”

그렇게 말한 송태섭이, 빠르게 앞으로 달려가 정대만의 명치를 후려갈겼다. 정대만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뒤로 밀려나자, 남은 한쪽팔로 그를 붙잡은 채치수가, 정대만의 목을 졸라 기절시켰다.

송태섭은 휴, 하며 한숨을 내쉬곤, 채치수를 바라보았다.

“자, 상황 해결이지?”

채치수는 그런 송태섭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군.”

***

정대만을 제압한 그들은, 남은 군사들도 각개격파 해 쓰러트린 후, 힘을 쓰지 못하도록 묶어 두었다. 그리고 마을에 그들을 버려두곤, 정대만만 챙겨 마을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소연이를 업은 강백호가, 채치수를 향해 물었다.

“왜, 저 녀석까지 챙겨서 내려가는 거야?”

그런 강백호의 물음에, 포박한 정대만을 들쳐맨 채치수가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이 알고 있는 걸 알아낼 필요가 있다.”

그런 채치수의말에, 송태섭이 입을 열었다.

“저 녀석, 붙잡혔다고 순순히 말할 거 같진 않던데, 뭐 방법이라도 있나 봐?”

채치수는 송태섭의 말에,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고문이라도 하게?”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그게 제일 확실하잖아.”

“…됐다. 우리는 이제부터 스승님을 만나러 간다.”

“스승님…?”

“그래, 나와 저 멍청한 녀석의 스승이시면서, …이 녀석의 스승이신 분이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눈이 크게 뜨인 강백호가 고개를 홱 돌려 채치수와, 쓰러진 정대만을 바라보았다.

“뭐!?”

그런 강백호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채치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설명은 도착해서 해주겠다. 발이나 더 빠르게 움직여라.”

그 말을 끝으로, 채치수는 입을 열지 않은 채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런 채치수를 쫓아 두 사람도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점점, 마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스승님이 계신 마을에 도착한 세 사람은, 의식이 없는 두 사람을 데리고 스승님의 거처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커다란 풍채를 지닌 영감 한 명이 그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반겨주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치수 군, 백호 군.”

그리고 고개를 돌린 그는, 송태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름 모를 요괴 군도.”

단번에 그가 요괴임을 알아본 그 눈썰미에, 송태섭이 눈을 크게 뜨며 영감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채치수가 입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스승님.”

“그래요, 고생했을 텐데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렇게 세 사람은, 그가 안내하는 대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안으로 들어가자, 스승이라고 불린 영감님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나타나, 채소연을 데리고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안에 세 사람과 한 명의 포로가 자리를 잡자, 자리에 앉은 스승은 차분히 말을 꺼냈다.

“그래요, 소연이를 데려간 건… 대만 군이었습니까.”

“…네.”

그런 채치수와, 스승의 모습을 바라본 강백호는 아까부터 있어온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사형, 영감님. 저 녀석이 대체 누구길래 아까부터 아는 척을 하는 건데요?”

그런 강백호의 말에, 스승은 착잡한 얼굴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대만 군은. 백호 군이 제 제자가 되기 전 이곳에서 무학을 수련하던, 제 제자 중 한 명입니다.”

“…!”

“…지금은 그 본인이 제 제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과거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왜 소연이를 데려가서 그런 짓을…?”

“…그건, 본인에게 직접 들어봐야 할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하며, 스승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정신을 차린 정대만이 눈을 서서히 뜨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뜬 정대만은 제 눈앞에 있는 인물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아,안 선생님?”

그 말에, 강백호는 정말로 그가 영감님의 제자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선에는 놀람과 그리움, 그리고 원망이 섞여 있었다.

“그래요 대만 군. 나입니다.”

하지만 그리움이 섞인 시선도 잠시, 정대만은 고개를 돌려 채치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강한 원망이 섞여있었다.

“왜 나를 여기로 데리고 왔지!?”

그 말에, 채치수가 말을 꺼내려 하자, 스승은 그를 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대만 군을 만나게 되면 이곳으로 데려오라 일렀습니다.”

그 말에, 정대만은 다시 흔들리는 눈빛으로 스승을 바라보았다.

“…왜 저를…”

하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았는지,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아니, 더 들을 가치도 없습니다! 배신자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아요!”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있기 때문에 대만 군을 보고 싶었습니다.”

“…”

“대만 군은 내가, 황제 폐하가 하사하신 자리를 내려놓고 그분을 배신했다고 알고 있지요?”

“…”

“가문에서 그리 알려주며 대만 군을 데려갔으니 그리 알고 있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

“하지만 대만 군도 알아야 하는 것이 있어요. 그리고, 이건 여러분도 알아야 하는 이야기 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스승은, 천천히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네 사람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특히 백호 군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이건, 여우와 관련된 이야기 이기도 하니까요.”

“…”

“대만 군. 나는 대만 군이 말하지 않아도 대만 군이 백호 군을 노린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

“황제 폐하…아니 황제는, 분명 여우를 끌어내기 위해 백호 군을 데려오라 했겠지요.”

“…그걸 어떻게…!”

“여우는 요괴들의 우두머리. 그러니 황제가 그를 노리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대만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황제 폐하께서 거짓말을 하셨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 자리에서 도망간 당신의 말을 어떻게 믿고!”

그렇게 소리 지르는 정대만을 향해, 스승의 말은 이어졌다.

“11년 전의 이야기를 하나 해주겠습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스승은 그 시선에 개의치 않고 말을 꺼냈다.

“그때도 그랬습니다. 요괴를 퇴치하기 위해 여우를 쫓으라 그가 명했죠.”

“수많은 여우들이 죽임당했습니다. 요괴이긴 하나, 너무할 정도로 그들을 죽이고, 쫓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황제는 어느 민가를 습격하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린 인간의 모습을 한 여우가 한 명 있었지요.”

“아직 어린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그에게 집착하고 있었어요.”

“…그래요. 아주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스승은, 잠시 그때를 떠올리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습격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호랑이가 모든 것을 망쳤거든요.”

“그리고 호랑이가… 죽기 전 그렇게 말하더군요. '죄 없는 어린아이 하나를 잡기 위해 이러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라!' 라고 말하더군요.”

“그 말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황제는 그 아이가 잔인한 요괴들의 수장이라 말했습니다만, 제가 본 그 아이와, 그 호랑이의 말이 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죠,”

“그래서 황제에게 물었습니다. 정말로 그 아이가 당신께서 말한 그자가 맞느냐고.”

“그런데 황제는 그러더군요. '그것이 중요한가?' 그 목소리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자는 제게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었어요.”

“…그것은. 황제가 200년 전부터,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고, 여우 구슬을 얻기 위해 여우들을 죽이며 쫓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죠?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하지만,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까지의 나는 어째서 그의 명령을 따랐는가 …그런 생각에 황제의 뒤를 캐보았습니다.”

“… 그리고 저는 그의 말이 사실임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죠. 그동안 태자가 어떤 사람이었간에, 황제로 즉위하는 순간부턴 이상할 정도로 같은 행보를 보였던 것도, 요괴를 멸하기 위해 행동한 것 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여우 하나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전부 그랬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개인의 영위를 위해 그가 저지르고 있는 죄악에 더 이상 동조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가 내려준 자리를 내려놓고, 황제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끝난 스승의 말에, 정대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굳게 입을 닫고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송태섭이 입을 열었다.

“저 영감님 말이 맞아.”

이번엔 모두가 송태섭을 바라보았다. 송태섭은 그 시선에 차분히 다시 말을 이었다.

“…황제는 여우 구슬 조각을 가지고 있거든. 200년쯤이야 너끈히 살아남았겠지.”

그 말에 정대만이 고개를 들어 송태섭을 바라보았다. 송태섭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요괴 말이라 못 믿겠어?”

“…”

“그래도 어떡하겠어, 사실인걸. 황제는 200년 전에 여우에게 여우 구슬 조각을 받고 그녀를 배신했어. 그리고 남은 조각마저 얻으려고 지금까지 이 난리를 펴왔다고. 이건 여우 굴의 여우들이면 다 아는 이야기야.”

그렇게 송태섭이 다시 입을 다물자, 스승은 다시 입을 열어 정대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대만 군의 마음에 달려있어요. 나처럼 그를 당장 배신하라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명령만을 따르는 것은 하지 않아줬으면 좋겠어요.”

그 말에 정대만이 무엇이라 말을 꺼내려던 찰나, 누군가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그 시선의 주인공은, 방금까지만 해도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강백호였다.

***

강백호는 스승의 입에서 호랑이의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자신과는 분명 상관없는 이야기일 텐데도, 자꾸만 그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민가를 습격한 스승님. 어린 여우, 그리고… 죽임당한 호랑이.

강백호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눌렀다. 하지만, 통증은 계속되었고, 끝내는 거대한 통증이 강백호의 의식을 저 멀리 날려 보냈다.

강백호는 다시 한번,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강백호는 어린아이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어린 강백호는, 어린 서태웅을 만났다. 그리고 그와 티격태격 싸우듯 놀았다. 그리고, 그렇게 놀던 도중, 다가온 엄마의 꿈을 꾸었다.

어째서 잊고 있었던 걸까. 엄마가 사라졌던 한 달, 그 이후에 엄마와 함께 왔었던 그를.

그리고, 자신 대신 잡혀갔던 그가, 엄마와 함께 돌아오지 않았던 그 날도.

돌아오지 않는 두 사람을 기다리는 자신에게, 아빠가 했던 미안하다는 말도.

저 너머에 잠겨있던 기억이 하나 둘 끄집어내지고 있었다.

쏟아지는 기억 속에서, 강백호는 눈을 떴다.

따뜻한 침구가 강백호를 감싸고 있었다.

강백호가 눈을 뜨자, 그 옆을 지키던 채치수가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괜찮은 거냐?”

그 걱정 섞인 말에, 강백호는 몸을 일으킨 다음, 채치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 안도한 채치수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녀오겠다며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홀로 남은 강백호는 다시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가, 조금 전 꿈꾸었던 내용을 되새겨보았다.

그러자, 어린 서태웅의 모습이 머리속을 가득 채웠다.

그 녀석은, 처음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왜 나를 모르는 척했을까.

혹시, 자기 때문에 우리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정말 그런 거라면… 멍청이는 너라고 말해줘야지.

강백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침상 밖으로 발을 뻗어 바닥을 디뎠다.

다행히 몸에 이상은 없는 것 같아 잠시 손을 쥐었다 편 그는, 문을 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나가서 여우 굴에 다시 돌아가자고 말해야지. 돌아가서, 서태웅에게 물어봐야지.

어머니에 대한 것도, 여우 구슬에 대한 것도, 모두 물어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려던 순간, 저절로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누구…”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의식이 다시 한번 흐려지는 것을 느낀 강백호가 비틀거리며 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천으로 제 얼굴을 가린 남자는, 그 너머로 강백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불길한 시선을 느낀 채로, 강백호는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

눈을 뜬 그곳은, 처음 보는 낯선 공간이었다.

부드러운 감촉에 아래를 내려다 본 강백호는, 자신이 호랑이의 가죽 위에 올라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넓게 펼쳐진 호랑이의 가죽 위에서, 강백호는 제 팔에 소름이 돋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본능적인 알아챔이었다. 이 부드러운 감촉도, 털의 색도,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뚝, 가죽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쏟아지는 눈물이 멈추지 않고 손등을 적셨다.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엄마였다.

그날 돌아오지 못했던 엄마는, 이곳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으리라.

용서할 수 없었다. 엄마를 죽인 것도, 이렇게 자랑하듯 꺼내놓은 것도,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것도 전부 용서할 수 없었다.

엉망인 얼굴로, 이를 악문 강백호가 고개를 들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천막 뒤의 사람이, 입을 열었다.

“감상은 다 끝났나?”

그 말에, 강백호가 다시 한번 주먹을 그러쥐었다. 황제임이 분명한 저자에게 당장이라도 달려가 주먹을 꽂아 버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 강백호를 막은 것은, 무형의 힘이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강백호를 보며, 남자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발걸음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강백호는 움직이지 못하면서도, 그를 쏘아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천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어리석군.”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째서 스스로가 이곳에 있는지보다 과거의 망령에 집착하는 것인가?”

그 말에, 강백호가 다시 그를 쏘아보자, 남자가 말을 이었다.

“지금 네게 중요한 것은, 이 가죽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나다. 너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그 말에, 강백호가 대꾸하듯 말을 던졌다.

“…여우 구슬 때문이겠지.”

그 말에, 황제가 강백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여우 구슬 때문이지. 그런데 너는 그 여우 구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그 말에 강백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황제는 다시 말을 잇기 위해 입을 열었다.

“역시 여우들이란 멍청하기 그지없구나.”

“…”

“아무것도 모르는 자에게 제 목숨을 넘겨주고는, 알려주지도 않았다니, 서희보다 멍청할 줄은 몰랐군.”

그 말에, 강백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목숨을 넘겨주다니, 저게 무슨 의미인가.

“…그게 무슨 소리지?”

강백호의 말에,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래, 너는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너는 네 안의 여우 구슬에 대해 뭘 알고 있지?”

“…”

“200년전, 여우 구슬은 조각났다. 그리고, 서희가 조각난 구슬의 한 조각을 나에게 넘겨주었지.”

“그리고, 그 구슬의 조각을 얻고 나서부터, 나는 남은 구슬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여우들은 구슬을 복구하기 위해 아주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던 여우 하나를 제물로 바쳤다.”

그 말에, 강백호는 어느 날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반짝이던 무언가를 삼키던 어린 서태웅. 그것이 여우 구슬의 조각이었단 말인가? 그게 제물로 바쳐진 것이었다고? 강백호가 황제를 바라보자, 황제가 우습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제 아들까지 이용하다니 지독한 부모가 아닌가?”

“…”

“그래서 이제 알겠느냐? 그자가 너에게 넘겨준 것이 무엇인지?”

“혼을 넘겨주었으니, 그 녀석은 얼마 살지 못할 거다. 하하하! 그렇게 해서까지 지키고자 한 녀석도 이제 내 손에 있다니.”

“…”

“200년 동안 그리 지키려 애를 쓴 것을, 네 어리석음 때문에 잃게 생겼구나.”

강백호는 그렇게 말하며 웃는 황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알려준 서태웅의 비밀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황제는 그런 강백호를 보며 다시 한번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강백호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이제,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오는 구나.”

그런 그때, 벽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저 밖에서 비명이 하나 둘 터져 나왔다.

황제는 그 소리에 쥐고 있던 강백호의 턱을 놓아주곤,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제 눈에 보이는 광경에 입을 열었다.

“이런, 손님이 찾아오셨군.”

저 너머에서 아홉 개의 꼬리가 살랑였다. 그 시선에 돌이 되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곳에는 아주 거대한 여우 요괴가 황궁을 부수고 있었다.

그리고 강백호는, 그 요괴가 누구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검은색 털을 가진 아름다운 여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단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서태웅…”

강백호의 작은 중얼거림에, 황제 또한 고개를 돌려 그 여우 요괴를 바라보았다.

“죽을 자리를 찾아왔구나. 어리석은 녀석.”

그리고 다시 한번 강백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희망이 생겼느냐?”

“…”

“그 희망이 곧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거라.”

그렇게 말한 황제는, 발걸음을 옮겨 방 밖으로 나서더니, 여우 요괴가 날뛰고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강백호는, 이를 악물고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홀로 남게 된 그는, 움직이기 위해 몸을 일으켜 보았다. 하지만 아직도 그를 짓누르는 무형의 힘에 의해 움직일 수 없었다.

제발 움직여! 움직이란 말이다!

강백호가 이를 악물며 외쳤다. 이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화가 났다. 그때, 몸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쨍그랑! 하는 느낌과 함께, 자신을 짓누르던 무형의 힘이 깨졌다.

그제서야 자유의 몸이 된 강백호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밖으로 달아났다.

넓은 황궁을 내달리면서, 강백호는 저 멀리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서태웅과 황제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요괴와 인간의 싸움은, 언뜻 보면 요괴가 우세할 듯 보였지만, 수많은 군세와 강력한 힘을 지닌 황제에 의해 점점 밀리고 있었다.

강백호는 자신이 도망치는 것이 그가 원하는 일임을 알았지만, 선뜻 발걸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도망친다면, 서태웅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기 시작하자, 강백호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돌려 싸움의 한복판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이곳저곳에서 날아가는 화살이 서태웅을 향해 날아가 박혔다.

하지만 서태웅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대로 인간으로 둔갑한 서태웅은,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며, 넓게 요술을 펼쳤다. 하나둘 요술에 집어 먹힌 군사들은,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헉헉 숨을 들이킨 서태웅은, 눈앞의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검을 들었다.

그리고 푹. 무언가를 찌른 황제는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서태웅이 아닌 다른 이었다. 배를 찔린 그는, 황제가 검을 뽑자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붉은 머리가 흔들리고, 핏덩이를 토해냈다.

찌르고자 했던 것이 아닌, 여우 구슬을 찌른 황제는, 당황해하며 검을 내려놓고 손을 뻗어 그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빠르게 다가온 서태웅이, 비틀거리는 강백호를 붙잡아 들곤, 뒤돌아 도망가기 시작했다.

등을 보이며 도망가는 여우를 향해, 누군가가 활을 쏘았다. 활은 서태웅의 등에 명중했다.

그렇게 화살을 맞으면서도, 서태웅은 멈추지 않았다. 품 안의 소중한 자를 살리고 싶어서, 자신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으며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안전한 장소로 있는 힘껏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섯 번째 화살이 명중하고 나서야, 고꾸라진 서태웅은, 들고 있던 강백호를 놓치며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점점 흐려지는 시야를 느끼며, 강백호는 함께 죽어가고 있는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서태웅 또한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쿨럭, 피를 토하며, 쿨럭거린 강백호가 서태웅의 이름을 불렀다.

“…서태웅.”

강백호는 서태웅을 향해 입을 열었다. 떨리는 입가를 무시한 채로, 또박또박 말을 꺼내기 위해 힘을 냈다.

“왜 나한테 여우 구슬을 준 거냐?”

그 말에, 서태웅은 마지막 힘을 짜내 그 물음에 답해주었다.

“…네가 …살길 바랬으니까.”

“그렇게 내가 좋냐?”

“…”

그 대답을 기다린 것은 아니였다는 듯, 강백호는 말을 이었다.

“…야, 서태웅.”

“다음 생에는, 꼭 좋은 부모를 만나. 네 녀석을 써먹으려는 부모 말고, 널 사랑하고 아끼는 그런 사람들로...

…그리고 좋아하는 걸 일찍 찾아서 누리는 거야. 넌 공을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하잖아, …그런 놀이가 있다면 그걸 하는 것도 좋겠지.”

“…”

“…그리고. 그런 삶에도 여전히 내가 좋으면, 그때는 꼭 함께하는 거야. 어때, 멋지지?”

그렇게, 자신의 소원을 건네며 입꼬리를 올리는 강백호를 바라보며, 점점 흐려지는 눈을 뒤로하고, 서태웅은 강백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더 이상 서태웅은 대답할 수 없었으나, 그것은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내세의 재회를 꿈꾸며, 두 사람은 눈을 감았다.

강백호의 안에서 따스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 빛은, 두 사람을 비추며 따스하게 빛났다.

눈을 감은 두 사람의 육신을, 빛이 감싸고, 빛이 사라지자, 두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주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

그렇게 두 사람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영롱히 빛나는 구슬 하나만 남아있더라.

그리고 그것을 황제가 손에 쥐자

그의 앞에서 형체도 남지 않고 스러졌더라.

눈앞에서 영생을 놓친 황제는 아이처럼 울었다네.

***

“으아악 이 여우 자식 용서 못 해!”

강백호는 제 머리를 쥐어 뜯으며,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이 청소를 해야 했던 서태웅이, 오늘 나오지 않아 혼자 청소를 전부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강백호를 지켜보던 채소연은, 강백호를 흘끔 바라보더니 슬쩍 말을 건넸다.

“백호야, 태웅이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야.”

강백호는 채소연의 그런 말에, 오히려 심통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 정도야 사실 알고는 있었다. 서태웅이란 녀석은, 조금 열받기는 해도 일부러 그러지는 않는 녀석이었다. 오늘 오지 않은 것도 분명 무슨 일이 있었겠지, 싶었다.

“여우 자식… 내일 만나기만 해봐.”

투덜거리는 그 말투에, 채소연이 방긋 웃음 지었다. 저렇게 말해도 둘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니까. 분명 내일 해결이 될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채소연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이 있었다.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것이었지만 물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채소연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는 강백호에게, 슬쩍 물어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백호는 왜 태웅이를 여우라고 부르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소연이의 물음에, 강백호는 움찔, 동작을 멈추며 무언가를 생각하듯 고개를 들었다.

“…여우가 여우인 이유?”

“응, 전부터 궁금했거든. 태웅이는 여우보단 고양이에 가깝지 않아?”

물론 자신도 그냥 생각해 본 거라며, 웃는 소연이에게, 강백호는 약간 멍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그냥, 그렇게 불러야 할 거 같았어.”

그래서 그런 거라고. 말하는 강백호의 말에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는 의문이 서려 있었다.

내가 왜 그 녀석을 여우라고 불렀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그 녀석을 여우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힌 채로, 강백호가 중얼거렸다.

“…그 녀석 전생에 여우였던거 아닐까?”

뒷걸음질 치다 정답을 맞혀버린 강백호는, 제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는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 그런 내세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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