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매망량 1화
인연생기 (因緣生起)
겨울이 떠나가기 전, 이제 막 싹을 트려는 생명들을 시기하듯 매서운 바람이 부는 날
온 나라가 연이어 벌어진 해괴한 일들로 인해 떠들썩 했으나 명헌이 있는 곳만큼은 매우 고요했다.
전 당상관의 자제 인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소박한 흰 옷에 초라한 초가(草家)에 머무르고 있는 명헌은 15살임에도 불구하고 제 또래보다 야위어, 수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 났을 때부터 귀한 손으로 여겨졌던 저가 가족도 명예도 전부 잃어, 역모라는 말도 안 되는 죄명으로 귀양에 처해지리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명헌은 이 모든 게 버겁기만 했다.
잠시라도 눈을 감으면 모든 게 뒤바뀌었던, 끔찍한 그날의 기억들이 생생히 밀려오는 듯해서. 억지이긴 하였으나 눈을 감지 않으려 노력하며 이 지루하면서도 참담한 시간을 흘려보내곤 했다. 누군가 들었다면 그 무슨 쓸데없는 고집이냐 하겠냐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기에 명헌은 헛수고임을 알면서도 내내 쓸모없는 일에 매달려야만 했다.
나라의 하늘이 바뀐, 모든 게 뒤바뀌었던 그날.
유난히 맑고 따듯했었던 그날 오전에 무작정 들이닥친 역도의 세력들은 무자비하게 명헌의 가문 사람들을 끌어내기 시작했고, 그곳에는 명헌의 어머니를 비롯해 명헌과 동생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 반정이 일어났습니다. 도총관께서 어떤 결단을 내리시느냐에 따라 이 가문과 정부인의 처우가 결정될 것이니 기다리시지요.
명헌의 어머니는 그들의 무례함에 분노를 표하려 하였으나, 날카롭게 이어진 말에 주저앉고는 명헌을 보호하듯 끌어안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천천히 명헌의 집으로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김의윤, 제 아버지의 둘 도 없는 벗이었다.
익숙한 얼굴에 안심하며 환한 미소를 띄어 보이던 제 어머니의 모습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그런 어머니의 희망을 짓밟듯 김의윤은 처리하란 말을 내뱉었고 그 한마디에 명헌의 집에는 비명으로 가득 차, 그 외의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눈 앞에서 쓰러지는 노비들과 제 아우들, 그리고 어머니까지. 고작 13살의 명헌이 겪고 이해하기엔 버거운 것들 뿐이어서 명헌은 그저 소리도 내지 못한 채로 죽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었다.
모두 죽었다 생각했는지 떠나가려는 김의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명헌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배신감에 못 이겨 널브러져 있던 낫을 들고 김의윤에게 달려들었고, 이는 군관에게 쉽게 가로막혔다.
그런 명헌에게 칼을 뽑으려는 군관을 막은 김의윤은 차디찬 눈으로 명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 어리긴 하나 기개가 있는 것이 도총관의 자식이 맞구나.
"어찌 감히!!! 네가!!! 죽여버릴 것이다!!!!!"
- 그러나 너무나도 어린 티가 나는구나. 아무리 영특하다 한들 애는 그저 애일 뿐이로군.
"어째서... 어째서... 아버님을...."
- 어린 네가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뜻이 달랐을 뿐이다.
".... 그리도 중요한가, 벗을 배반할 정도로 그 뜻이 중요한가."
- 중요하지, 나라의 존망이 걸린 문제다. 네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벗이라 하였느냐? 그래, 벗이었지. 네 아비와는 벗이었어. 하지만 그것도 뜻이 같았을 때나 하는 것이다. 뜻이 달라지고 가는 길이 달라지면 아무리 벗이라고 해도 갈라질 수 밖에 없어.
"... 그것이, 그것이 죽음일 필요는,"
- 무지하고 어리석구나. 네 아비가 죽고, 네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한 것은 네 아비가 끝끝내 무능했던 임금의 옆을 지켰기 때문이다. 나도, 네 아비도 자신의 목숨은 물론 가문의 명줄까지 걸고 한 일이란 말이다. 그런 일에 자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그럼 죽이거라!!! 내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을 죽인 것처럼 당장 내 목을 베란 말이다!!!"
명헌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바라보고 있던 김의윤이 빼지 않은 검을 들어 그대로 명헌을 내리쳤고 그 뒤로는 암전이었다.
명헌은 그날 제게 있어 하늘과도 같았던 아버지를 잃었고,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었다.
그뿐이랴? 저를 따라다니며 함께 울고 웃었던 귀여운 동생들과 가문의 명예, 재산 그 모든 것을 통째를 빼앗겨 버렸고. 자신은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그 시체로 길을 만들어 살아남았다.
김의윤이 왜 자신을 살려두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제 꼴을 보면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소복과도 같은 하얀 옷에 초라한 행색. 이런 저가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있어 승리의 증거일 테지.
그런것을 떠올리면 혀를 콱 깨물어 죽고 싶었어도 명헌은 그럴 수가 없었다.
혹시나 제게 주어질 작은 기회를 위해서, 그 기회를 잡아 가문의 철천지원수인 김의윤을 죽일 수만 있다면 명헌은 제 삶이 아무리 힘들고 갖은 수모를 당하더라도 살아낼 수 있었기에 역겨운 피죽을 삼켜내며 배를 불렸고 이따금 지나가며 수군거리는 이들을 보면서도 담담한 낯을 꾸며내었다.
그래, 제 가문이 당한 것에 비한다면 지금 저가 겪고 있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내게 무엇을 하라고?
- 죄인 이가 명헌은 나와, 전하의 교지(敎旨)를 받으시오!
명헌은 입술을 짓이겼다. 저 교지에 적혀 있는 것이 자진을 요구하는 것이거나 사약이 내려진 것이라면... 하지만 명헌에겐 나가는 것 외에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고, 결국 몸을 일으켜 교지를 받기 위해 문밖으로 나섰다.
명헌이 문밖을 나서니 예상과는 다르게 많은 인원이, 그것도 번지르르한 인물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 곁에 있던 관군들이 명헌에게 다가와 무복(武服)을 건네주고는 갈아입으라는 말을 건넸다.
무복을 입으라니, 명헌은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덤덤한 낯을 꾸며내고는 들어가 의관을 정제하고 나왔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고작 2년이 흘렀건만 무관의 옷을 입고 나온 명헌의 모습은 별 다른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젓한 무관의 태가 나고 있어, 그 광경을 보던 군관들은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막 지학을 넘긴 아이 주제에 눈빛은 어찌나 서늘한지, 덩치는 왜소했으나 풍겨대는 기운은 무시할 것이 못되었다. 저런 기개는 얻고자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무관들의 눈이 명헌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르자, 이를 의식한 것인지 교지를 들고 있던 승선(承宣)이 목을 가다듬는 척하며 소리를 내었다. 자신이 준 눈치에 정신을 차린 군관들이 재정렬 하던 것을 흘겨보던 승선은 다시 한번 입을 열어 명헌에게 교지를 읊어주기 시작했다.
- 죄인 이가 명헌은 전하의 교지를 받으라!
승선의 말에 명헌이 차디찬 땅으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 이가 명헌의 가문은 입에 담기에 참담할 정도의 죄를 저질렀으나 나라가 혼란스러운 지금, 백성들을 위해 이가 명헌의 품계를 정4품 진위장군에 봉하니 삿된 것을 쫓아내는 공을 세워, 전하의 은혜에 예를 다하도록 하라!
교지에 쓰여진 어명을 받들기 위해 앉아있던 명헌이 엎드리고, 승선이 이어 입을 열었다.
- 이가 명헌은 전하가 계신 방향으로 사은숙배(謝恩肅拜)를 올리시오!
궐이 있는 방향으로 절을 하면서 명헌은 웃음을 참기 위해 용을 써야만 했다. 사은숙배라니, 사은숙배라 하면 왕은(王恩)에 감사를 표하는 것이 아니던가. 정당한 왕위 계승자인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대역무도한 자에게 대체 어떤 감사함을 느껴, 절을 해야 한단 말인가. 머리에 가득 찬 생각과는 다르게 명헌은 꿋꿋하게 절을 마저 해냈다. 그래. 비록 저 역도들로 인해 하늘이 바뀌고 제 가족이 참살을 당했지만, 이리 멍청하게 나와주니 그것만큼은 감사해주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내게 칼을 쥐여 준 것을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리라.
네가 쥐여준 검을 들고 네가 사랑하는 것들을 찾아갈 것이다.
그것들을 찾아 네가 내게 그랬듯 네 눈앞에서 사랑해 마지않는 것들을 하나씩 죽여나갈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네 머리를 베어 내 아버님의 묘소에 피를 뿌려줄 것이다.
절을 하며 굳은 결의를 다진 명헌의 눈은 처음과 달리 생기가 감돌며 더욱 깊어 보였다.
그런 명헌의 변화를 모르는 승선은 펼쳤던 교지를 다시금 말며 관군에게 턱짓했고, 관군은 포승줄을 가져와 명헌의 팔을 상체와 함께 감기 시작했다. 황당한 절차에 미간을 찌푸렸던 명헌이 표정을 풀어내는 것과 동시에, 승선이 빠르게 몸을 움직여 명헌의 집을 벗어났다.
남겨진 관군들에 이끌려 말을 타게 된 명헌은 어디로 향한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한 채 마을을 떠나야 했는데, 그런 명헌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표정은 참으로 역겹기 그지없었다.
자신을 흘긋대는 눈동자와 수군거리는 말소리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백성들에게 많은 것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대체 내가 왜 이런 멸시어린 표정과 수군거림을 듣고 있어야만 하는가.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역도들은 지금 뻔뻔하게도 궁을 차지하고 있고, 태양은 하나라는 무관의 신념으로 인해 마지막까지 임금의 곁을 지켰던 아버지의 아들인 저는 다른 이도 아닌 백성들에게 이런 수모를 겪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도 기가 찼다.
팔이 상체와 묶여 홀로 말을 탈 수 없었기에 다른 관군과 함께 말에 탄 채로 달려야만 했던 명헌이, 달리고 달려서 도착한 곳은 어느 산의 입구였다. 산의 입구라는 것을 파악하기가 무섭게 관군에 의해 말 위에서 끌어내려진 명헌이 바닥에 쓰러지자, 칼을 빼든 관군이 포승줄을 거칠게 잘라내곤 말했다.
- 이 산에는 도깨비가 산다. 네가 오늘 전하의 교지를 받은 것은 전부 이를 위한 것이니, 도깨비를 죽이고 네 쓸모를 다하거라.
멍하니 엎어져 있는 명헌에게 검을 던져준 관군들은 명헌이 산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기라도 하려는 듯 움직이지 않고 명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정신을 차린 명헌이 몸을 일으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을까. 한참이 지나 당차게 산을 오르던 명헌의 발이 점차 느려지며 군관들의 시야에서 벗어났을 때쯤, 완전히 멈추어 선 명헌이 생각했다.
'지금 바로 내려가는 것은 위험하다. 아니, 당분간은 이 앞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어째서 2년이란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저는 무능한 것인지.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지금 저가 해낼 수 있는 것이란, 그들의 말대로 도깨비를 찾아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생각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역겨우면서도 나아가기 위해서는 별 다른 방법이 없으니 명헌은 제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아내지 못하고 검집 그대로 검을 휘둘러 애꿎은 나무를 때려댈 뿐이었다.
애꿏은 나무에게 분풀이를 해대고 진정이 된 명헌은 도깨비를 찾기 위해 산을 오르고 또 올랐으나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고 이내, 금방 해가 져버렸다. 주어진 것이라곤 달랑 검 한 자루.
한숨을 내쉰 명헌이 달빛에 의존해 나아갔을까. 신기하게도 물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산이라 들었는데 샘이라도 있는 것일까? 급한 대로 목을 축이기 위해 물소리를 따라 걷던 명헌은 점차 몸이 더워지는 것을 느끼곤 멈추어 설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분명 이곳에는... 허겁지겁 달려간 명헌의 시야에 펼쳐진 건 따끈따끈한 열을 뿜어내는 온천이었다.
대체 왜 이런 곳에 온천이 있단 말인가. 온천이라 하면 조정에 빠짐 없이 올라가 있을 것이고 그에 따른 관리도 잘 되고 있어야 마땅했다. 그런 온천이 이렇게 방치되고 있다는 건..
"도깨비가 있다 하여 산에 들어오지도 못한 것인가."
헛웃음을 친 명헌이 온천 근처에 앉아 차가워진 손을 담갔다. 봄이긴 하나 추운 날씨에 꽁꽁 얼어있던 손이 따듯한 물로 인해 조금씩 녹아가자, 잔뜩 날이 서 있던 신경줄도 점차 늘어지는 듯 했다.
예기치 못한 행운에 명헌이 잠시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을까. 불쑥 등 뒤에서 나타난 손이 명헌의 등을 밀어 온천 속으로 빠트렸다. 갑작스러운 입수에 놀란 명헌이 당황한 마음을 추스르곤 겨우 몸을 일으켜 저를 빠트린 인물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누구길래,"
"나? 이거 주인."
산속의 있는 온천에 주인이 있을리가... 얼굴에 묻은 물기를 손으로 닦아낸 명헌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한 사내였다. 그것도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풀어헤치고 바지와 장옷만 걸친, 아주 남사스러운 복장을 한 사내. 사내의 터무니 없는 말에 다시 한번 입을 열려던 명헌은 그의 다리를 보고는 반쯤 열었던 입을 다시 닫았다.
"음? 왜 입을 닫아? 말을 해."
"......"
"넌 이상하네."
사내의 재촉에도 명헌은 말 할 수가 없었다. 봄이긴 하나 겨울의 추위가 가시지 않은 지금, 장옷과 바지만 걸친 맨몸에 신은 신지도 않았다. 그 뿐이랴? 버선 또한 신지 않은 맨발은 붉게 물들어 있지도 않았고 흙이 묻어있지도 않았다 이를 모두 종합해 본다면,
"... 자네가 도깨비로군."
"응 맞아. 근데?"
쭈그려 앉은 채로 무릎에 양손을 올려 턱을 괸 도깨비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대답하며 고개를 기울였고, 그 천진난만한 모습에 긴장이 풀린 명헌은 느껴지는 추위에 다시 온천 속으로 몸을 담갔다.
"자네가 빠트렸으니 좀 사용하겠네."
"푸핫! 하하하!! 너 진짜 특이하다! 재밌어!"
도깨비가 웃기도 하나... 노곤해지는 몸에 멍하니 생각한 명헌은 몸을 움직여 도깨비가 있는 근처로 다가갔다.
"나를 보고 재미있다 말한 건 자네가 처음이라."
"그으래? 인간들은 참 이상하다니까? 난 이렇게 재밌던 걸 본 적이 없는데. 아, 열 하루 전이었나 그땐 좀 재미있었을지도?"
"무엇을 했기에?"
"인간과 내기를 했지."
"내기?"
"응 내기."
"어떤 내기?"
"순라잡기를 했지."
"성년을 넘긴 듯 한데, 순라잡기를 했나? 무엇을 걸고?"
"인간은 성년이 되면 순라잡기를 못해? 그자는 하던데?"
"아니, 할 수는 있으나 좀..."
"좀?"
"... 되었네. 그것은 뒤로 넘기고, 무엇을 걸었기에 다 큰 사내들이 순라잡기를 하였는가."
"나는 금은보화를 걸었고."
"... 금은보화"
"그자는 명(命)을 걸었지."
도깨비의 말에 명헌의 몸이 굳어지며 공기가 싸늘해졌다.
"덕분에 나도 인간들이 하는 놀이를 해봤거든, 아주 즐거웠어."
도깨비의 밝은 어조에, 명헌이 마구잡이로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뒤로하곤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사내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야 당연히 죽었지."
"......"
"내기에서 졌잖아? 어쩔 수 없지."
"... 애초에 도깨비인 자네에게 이길 수 없는, 불공평한 내기가 아닌가."
"그렇지만 어떤 것으로 내기를 할지 정한 건 내가 아니라 사내였는걸? 그 정도면 공평하지 않을까?"
도깨비의 반문에 명헌은 할 말을 잃었다. 말이 없는 명헌을 흘긋 바라보던 도깨비는 시선을 떼 정면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개죽음이라 생각하지? 그러니 너는 이만 돌아가."
"... 뭐?"
"너도 나랑 내기를 하기 위해 온 거잖아. 너는 내기를 안 해도 재미있었던 최초의 인간이니까 이대로 보내줄게."
"그게 무슨,"
"그렇지만 너처럼 재밌는 걸 바로 죽이는 건 아깝잖아."
"......"
"그러니 여기서 몸 좀 담그고 있다가 깔끔하게 돌아가. 알았지?"
".... 싫다면?"
"뭐?"
"그래도 내가 너와 내기를 하겠다면, 어쩌겠느냐고 물었네."
명헌의 말에 도깨비가 눈을 가늘게 떠 보이더니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꾸어냈다.
"이건 재미없는데? 두 번의 기회는 주지 않아. 그건 나에게 공평하지 않은 거니까."
".... 내기를 하도록 하지."
"하아... 진짜 똑똑한 줄 알았는데 너까지 멍청하면 인간은 어떡해?"
"... 내가 멍청한 거랑 인간이 멍청한 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
"네가 그나마 희망이었잖아. 인간의 희망."
"그런 게 된 적 없으니, 어서 내기나 하지."
"... 이미 뱉은 말은 지켜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 하자. 내기."
"어떤 것으로 할지는... 내가 선택하는 거겠지?"
"응, 맞아. 네가 선택하는 거야. 그럼 그러기에 앞서 대가를 정해볼까?"
"좋지."
"대가는 네가 빌 소원의 크기에 따라 달라져. 큰 것을 바라면 너도 큰 것을 내주어야 하지."
"그렇다면 사소한 것을 빌면 목숨을 잃을 일은 없다는 것인가."
"아마? 장담은 못하겠지만."
".. 그래, 내가 내어줄 대가는 목숨으로 하지."
"웩, 지겨워. 그래 목숨까지 걸 만큼 원하는 게 뭔데?"
명헌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말이 있었으나, 겨우 삼켜내곤 도깨비를 향해 웃어 보였다.
"승패가 결정되고 나서 그때 말하겠네."
명헌의 말에 도깨비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더니 빠르게 일어섰다.
"와- 나 진짜 이런 거 처음 겪어 봐. 너 진짜 재밌다."
".. 칭찬으로 듣겠네 고맙군."
"응! 진짜 칭찬이야. 꼭 이겨 알았지? 너처럼 재밌는 걸 죽이고 싶지 않은 걸..."
".... 그렇게 될걸세."
"좋-아! 그럼 무엇으로 내기를 할지 말해주겠어?"
도깨비의 말에 한참을 뜸 들이던 명헌이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기한은 지금으로부터 5년 뒤 내가 약관이 되는 해의 오늘, 자네가 나를 사랑하게 될지 안 될지를 두고 내기를 하도록 하지."
"?"
"......."
명헌의 말 뒤로 침묵이 이어지고 멍한 표정의 도깨비가 다시 한번 되물었다.
"사랑? 내가 너를?"
".. 그래, 5년이다."
"허? 내가 5년이란 시간 안에 너를 사랑하게 된다면 나의 패배고, 지금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나의 승리다?"
"잘 이해했군."
하하하하!! 한참 동안 박장대소를 하던 도깨비는 불쑥 웃음을 멈추더니 표정을 굳혀 보였다.
"너 재밌는 줄 알았는데 재미 없다."
"....."
"내가 기회를 줬는데 왜, 이딴 시간 벌이를 하지? 애초에 하지 않았으면 그만인 것을, 왜?"
"글쎄. 내가 얻어내려 하는 것이 그 시간 속에도 있는 거겠지."
"하아... 대체 인간은 뭐가 그렇게 문제야?"
"문제가 없는 네가 더 신기하다만."
"끄응... 아!!!! 어쩔 수 없지. 알겠어! 내기를 하기로 했으니 받아들일게!"
"그래, 그럼 일단 네가 사는 곳으로 가도록 하지."
"뭐? 왜?"
"내기를 하려면 내가 살아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네 집으로 돌아가면 되잖아!"
도깨비의 말에 조소를 지어 보인 명헌이 대답했다.
"집은 없어진 지 오래라."
"허어? 행색은 그리 나쁘지 않은데?"
"아아, 이것을 말하는가? 이 거지 같은 옷 좀 버려버리고 싶어서 그런데 옷도 좀 빌려주겠어?"
"너... 거지야?"
"하하하. 거지? 글쎄 그것보다 더하지 않나."
"너...."
"..... 추우니 어서 가지."
순간, 자조적인 명헌의 말에 한숨을 쉬어 보인 도깨비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안 되겠는지 다시 한번 명헌에게 말했다.
"도깨비가 사는 곳에 가는 거야. 인간의 세계와는 다르고, 위험해. 그래도 가겠어?"
"여기에 있으면 난 바로 죽어. 그러면 너와 약속한 내기를 끝마치지 못하겠지. 그래도 괜찮겠어?"
"... 어떻게 한 마디도 안져....? 듣기 거북하니까 말 좀 편하게 해. 그리고 그 옷은 왜 거지 같은데? 좋은 거잖아."
"도깨비가 옷감에 대해서도 알아?"
"너 지금 나 무시해!?"
"아니, 나는 잘 몰라서 물어본 거야. 난 모르거든."
"몰라? 인간의 옷이잖아?"
"몰라. 아주 오래전 말고는 입어 본 적 없으니까."
"그러면 왜 거지 같은데? 오랜만에 입은 거면 더 좋아야 하잖아."
눈치도 없이 제 속을 찔러대는 순진무구한 질문에 기분이 나빠진 명헌이었으나, 도깨비에게 앞으로 갈취할 것을 생각하니 양심에 찔려 순순히 답해주었다.
"이 옷을 입기 위해 원수에게 엎드려 절을 했어."
"....."
"그 덕분에 이 옷이 내 사람들의 피와 거죽처럼 느껴져."
"......"
"지금 당장 이 옷에 닿은 살을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거지 같으니까. 얼른,"
명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움직인 도깨비가 손을 움직여 명헌의 옷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기 시작했다.
"알 거 같긴 한데 속곳은 니꺼야?"
"......"
대답 없는 명헌의 반응을 긍정이라고 생각했는지, 도깨비가 고개를 끄덕이곤 속곳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명헌을 무 뽑듯 들어 땅 위에 두었다. 추운 탓에 명헌이 덜덜 떨자, 제 장옷을 벗어 둘러준 도깨비는 명헌을 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속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짙은 어둠에 두사람의 모습이 삼켜지고
여느때보다 흐릿한 달만이 끝까지 두사람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길이 될지, 흉이 될지 알 수 없는 인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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