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2차 창작

[정환수겸] 김감독의 내 집 마련 프로젝트 - 종결

내 집 마련하면서 남편까지 마련한 썰 푼다.

말에는 힘이 있어서 일단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절대 하지 못할 것 같았던 사랑의 말도, 한 번 내뱉고 나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한을 풀듯이 사랑을 속삭이고 쉴 틈 없이 입 맞췄다. 이젠 술기운에 얼굴이 달아오른 건지 숨이 차서 그런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잠깐 떨어져서 숨을 고르고 있는데, 수겸이 인상을 잔뜩 쓴 채로 정환을 노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정환의 가슴팍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어떠한 의도가 다분한 시선이었지만 정환의 눈에는 그저 술에 꼴아서 흐리멍덩한 눈빛으로만 보였다.

아까 수겸이 인정사정없이 멱살, 정확히는 멱살에 해당하는 부위의 와이셔츠를 주먹이 떨리도록 꽉 쥐고 잡아당긴 탓에 가운데 단추 몇 개는 빠져있고 어느새 넥타이까지 풀어져서 헐렁한 채로 목에 걸쳐서 가슴까지 흘러내려 있었다. 수겸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나 정환은 자신이 지금 어떻게 보이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손등으로 누구 것인지 모를 타액에 젖은 입술만 문지르고 있었다.

정환이 무언가 말하려는데 수겸의 손이 더 빨랐다. 목에 간신히 걸쳐져 있던 넥타이는 한 번 잡아당기자마자 스르륵 풀려서 바닥에 내던져졌다. 그리고 재빠른 손이 남은 와이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쉽게 풀리지 않았다. 술기운에 초점이 흔들려서인지 손이 떨리고 있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정환이 그런 수겸의 손목을 붙들어 저지했다.

“수겸아, 잠깐만. 나 아직 재킷도 못 벗었어.”

“씨이…. 이거 왜 이러케…. 안 벗겨져…!”

손톱만 한 와이셔츠 단추와 씨름하고 있는 수겸을 보고 있자니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손목을 잡은 그대로 살짝 밀어서 수겸을 도로 의자에 앉혔다. 그러자 벌게진 얼굴로 올려다보는데 심통이 났는지 입이 삐죽 나와 있었다. 마음 같아선 마중 나온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 주고 싶은데 그러다간 한 대 맞을 거 같아서 그만뒀다. 대신 어깨를 붙들고 달래듯이 말했다.

“있어 봐. 나 옷 갈아입고 씻고 올 테니까.”

어깨를 토닥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정환을 물끄러미 보던 수겸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비틀거리면서 뛰다시피 걸어가 정환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씻지 마…. 바로 하자…. 응?”

“뭘?”

그 순간 뒤를 돌아본 정환과 눈이 마주치자, 취한 와중에도 수겸은 즉시 깨달았다. 지금 뭔가…. 서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고.

“너어…. 나랑…, 자기 싫으냐…?”

“아, 아니…. 수겸아, 그건 아닌데.”

“그럼, 뭔데! 왜, 자꾸, 피하는 건데!!”

“그…. 지금은 하고 싶지 않아.”

일순간 수겸의 모든 사고가 정지되었다. 설마 이 타이밍에 거절의 말을 들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탓이다. 처음엔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머리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눈치를 밥 말아 먹었나. 내 말을 못 알아 처먹나? 그게 아니라면. 시발…. 내가 그 정도로 매력이 없나?! 그것도 아니면 설마…?

“수, 수, 수겸아! 갑자기 왜 이래!!”

“가만있어 봐…! 난, 지금, 당장, 확인을, 해야겠다고…!”

말릴 새도 없이 정환을 돌려세운 수겸이 그대로 우악스럽게 허리띠를 잡아당겼다. 당황한 정환이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지금 수겸은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지금 당장 저 안의 내용물이 제 기능을 하는 건지 확인해야만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정환의 눈에는 그저 자기 바지춤을 잡고 늘어지는 술주정뱅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밀고 당기는 공방전 끝에 겨우 수겸의 손을 바지춤에서 떨어뜨려 놓는 데 성공한 정환이 난감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하아, 수겸아…. 너 지금 많이 취했잖아.”

“근데…?”

“나 너랑 첫 경험인데, 이렇게 취한 채로 하는 건 싫어.”

수겸은 순식간에 머리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곧장 자신이 지금 말짱하다는 사실을 어필하려 입을 열었다.

“아뉜데…? 나 지금 완존 멀쩡한뒈…?”

그러나 혀는 제멋대로 꼬여 있었다. 그런 수겸에게 보란 듯이 정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수겸아. 오늘은 그냥 자자.”

망부석처럼 서 있는 수겸을 두고 돌아선 정환이 미련 없이 걸어서 욕실로 향했다. 그 단호한 발걸음이 오늘 밤은 어림도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욕실 문이 닫히는 광경을 멀거니 보기만 하던 수겸은 뒤늦게 제자리에서 머리를 손바닥으로 퍽퍽 때렸다. 그런데도 아프긴커녕 술이 안 깨는 걸 보니 확실히 취하긴 한 것 같았다. 수겸은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그대로 터덜터덜 걸어서 안방 침대로 쓰러지듯 누웠다.

잠시 침대에 코를 박고 시체처럼 누워있으니 안방 안에 있는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수겸은 저도 모르게 옆에 놓인 베개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수겸이 생각하기에 이건 너무 분한 처사였다. 오늘은 역사적인 날인데, 다 큰 어른들이 손만 잡고 잘 수는 없는 거잖아!

씩씩거리며 굳게 잠긴 욕실 문을 노려보던 수겸은 결심했다. 이정환이 다 씻고 나오면 한 번 더 덮쳐보겠다고. 그러나 정환은 샤워 시간이 긴 편이었고, 그때까지 버티기에 지금 수겸의 눈꺼풀은 너무 무거웠다.

그러고 보니 나 오늘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 진짜 힘든 하루였어.

쏟아지는 잠에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기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어느새 눈은 완전히 감겼고, 규칙적인 숨소리만 들렸다. 정환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수겸은 이미 코까지 골면서 잠들어 있었다. 정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다가와 수겸의 앞머리를 몇 번 쓸어올리더니 이마에 입 맞췄다. 더는 서두를 필요도, 애태울 일도 없었다. 이제 그들은 서로에게 같은 크기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다음 날 이른 아침. 정환은 밖에서 들리는 짤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켜서 주위를 둘러보니 분명 어젯밤 옆에서 잠들었던 수겸이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문밖에선 수상한 소음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반쯤 감긴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선 정환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왔다. 소리의 근원지로 가 보니 부엌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수겸이 보였다. 옆에는 어디서 구해온 건지 모를 커다란 마대 자루가 놓여있었다.

“수겸아? 너 지금….”

정환이 부르자 수겸이 돌아보았다. 그제야 정환은 잠을 깨우던 소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수겸의 손에 들린 건 다름 아닌 빈 술병이었다.

“…뭐 하는 거야?”

“보면 몰라? 술 버리고 있잖아.”

“그러니까 갑자기 멀쩡한 술을 왜….”

빈 술병을 마대에 넣자 안에 있던 다른 술병과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상당한 술들이 버려진 모양이었다. 손에 든 병을 처리한 수겸이 뒤를 돌아보며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말했다.

“나 오늘부터 금주할 거야.”

풉.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온 입을 서둘러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정환이 힐끔 눈치를 보자 수겸이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고 있었다.

“웃지 마! 난 진지하거든?!”

결국, 못 참고 발끈한 수겸이 소리치자 정환이 멋쩍게 웃으며 미안하다 말했다. 수겸의 난데없는 금주 선언이 나오게 된 계기가 무엇 때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정환이 그 원인 제공자이긴 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유혹(?)했는데도 아무것도 못 하고 끝나버린 지난 밤이 수겸에게는 너무도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었다. 어제 수겸이 과음한 건 변명의 여지가 없었고, 침대에 눕자마자 뻗어버린 걸 보면 정환의 판단이 정확했단 사실을 부정할 순 없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숙취와 함께 깨어난 수겸이 탓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술뿐이었다. 이게 바로 꼭두새벽부터 김감독이 멀쩡한 술병을 모조리 따서 버리게 된 연유였다.

김수겸은 한 번 하기로 마음먹은 건 바로 실행하는, 정말 실행력 하나는 끝내주는 남자였다. 이까짓 술 안 마시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다. 정환도 그런 수겸의 성격을 모르는 게 아니어서 당분간 얌전히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그렇게 갑자기 선언된 금주령은 별 무리 없이 유지될 줄 알았으나, 하루 만에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하고야 만다.

시작은 현준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부터였다.

[ H : 너희 집으로 결혼 선물 보냈다. 오늘 도착할 듯.]

[ S : 선물? 뭔데?]

[ H : 보면 알아. 네가 좋아하는 거다.]

무엇이든 간에 선물이면 좋은 거 아니겠냐며, 이때까지만 해도 수겸은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불렀다. 얼마 뒤, 초인종 소리와 함께 정체 모를 커다란 상자가 배송되자 수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로, 예상보다 박스가 꽤 컸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방문한 배송 기사들이 ‘어디에 설치해드릴까요?’라고 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전제품이란 뜻인데. 언뜻 봐서는 뭐에 쓰는 물건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실례지만 이게 어떤 제품인가요? 선물 받은 거라 잘 몰라서.”

“와인셀러입니다.”

마침내 선물의 정체를 알게 된 수겸의 한쪽 입꼬리가 기이하게 올라갔다. 그리고 헛웃음과 함께 이마를 부여잡았다. 진짜 눈물 나는 우정이었다.

현준아. 이 친구야. 너는 왜 이렇게 나를 잘 알아서 날 곤란하게 만드니….

박스가 벗겨지고 와인셀러의 고운 자태가 드러나자 수겸은 다시 한번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현준의 안목은 정확했다. 평소의 수겸이었다면 쌍수 들고 환영했을 선물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지금은 이 집에 자체 금주령을 내린 지 불과 하루밖에 되지 않았으며, 김감독은 어제 새벽에 이 집의 모든 술을 모조리 버려버린 뒤였다. 허탈함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부엌 한쪽에 예쁘게 자리 잡는 와인셀러를 보며 수겸은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제 고집에 못 이겨 금주하겠다고 입을 털어버린 스스로에 대한 원망 때문인지, 지난 아침 성급하게 하수구로 흘려보낸 술들이 아까워서인지는 김수겸 자신도 몰랐다. 그날 저녁, 퇴근하고 돌아온 정환이 마주한 광경은 텅 빈 와인셀러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수겸의 처량한 뒷모습이었다.

속 빈 와인셀러는 보기만 해도 아깝긴 했으나 그래도 아직은 참을 수 있었다. 수겸은 자신의 명예(?)가 회복되기만 하면 저 속을 새 술로 꽉꽉 채워주리라 다짐하며 버티려 했다. 그러나 그의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다음 날 저녁에 호장과 준섭이 찾아왔다. 그것도 양손 무겁게. 인터폰 화면상으로 잘 보이지 않아도 무얼 잔뜩 들고 왔는지는 뻔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과거의 김수겸이 저 불청객들에게 남의 집에 올 때는 빈손으로 오는 게 아니라며 착실히 교육해놓은 탓이었으니.

초인종을 눌러도 답이 없자 성격 급한 호장이 인터폰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형, 저예요! 열어주세요!]

“안 돼. 돌아가.”

[형네 집에 술 저장고 생겼다면서요!]

“형 지금 금주 중이다.”

[아, 혀엉-! 온도에 민감한 애들로 골라서 데려왔단 말이에요! 위스키 지금 울어요!]

“너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나 술 안 먹는다고!!!”

[호장아, 비켜 봐.]

수겸의 방어선은 생각보다 굳건했다. 아직은 음주 욕구보다 뱉은 말은 지켜야 한다는 자존심이 이기고 있었다. 이 정도면 포기하고 돌아가겠지 하고 생각하는 찰나. 줄곧 가만히 있던 준섭이 카메라 앞으로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건 견고하게 세워진 김감독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어떤 주당이 발렌타인 30년산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으랴. 수겸은 결국 머리를 쥐어뜯으며 열림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김감독의 금주 선언은 작심삼일로 끝이 났다.


“그래서. 그게 어떻게 내 탓인데?”

성현준은 더는 황당하다는 말을 하기에도 질렸다. 물론 이번에도 원인 제공은 김수겸이 먼저 했다.

“네가 선물한 와인셀러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참나. 결론적으로 금주 선언을 깬 건 호장이 녀석이 가져온 위스키 때문이라며.”

“네가 와인셀러만 선물 안 했어도 그놈들이 술 사 들고 쳐들어오진 않았을 거 아냐.”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맷돌도 못 돌리게 생겼다.”

“고학력자 개그냐? 재미없어.”

현준이 팔짱을 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논리적으로 대꾸하면 뭐하나. 상대방이 뻔뻔하게 나오면 아무 소용 없는데. 한숨과 함께 나오는 건 푸념뿐이었다.

“기껏 생각해서 선물했더니만. 나 그거 산다고 카드 할부로 긁었거든?”

“그래? 비싸서 그런지 좋기는 하더라.”

“필요 없으면 나한테 반품하시던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릴. 나 이제 그거 없으면 못 산다.”

결국,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아무튼 진짜 성공했네, 김수겸. 이젠 집에 술 전용 냉장고도 따로 있고 말이야.”

“그러게. 이 카페에서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집 없는 처지를 비관하면서 너랑 결혼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그러고 보니 여기가 바로 역사가 시작된 그 장소였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현준은 눈앞의 음료에 꽂힌 빨대를 빙빙 돌렸다. 얼음들이 부딪혀서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맞은 편에 앉은 수겸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한강뷰 아파트에서 와인셀러에 넣어놓은 양주 꺼내 마시면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거야!”

“진짜 인생역전이네. 나중에 자서전 하나 꼭 써라.”

“내가 또 자서전 낸다면 소재가 넘치지, 아주.”

수겸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사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으나 줄곧 그를 옆에서 지켜봤던 현준은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선수와 감독을 모두 도맡아야 했던 과거는 이젠 말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다. 그러나 수겸의 역경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대학리그부터 프로 시절까지, 농구선수 김수겸은 개인 기량은 높았으나 유독 팀 운은 정말 지지리도 없었다. 결국 우승컵 한 번 들지 못하고 은퇴했을 때도, 팬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으나 정작 본인은 덤덤했다. 수겸이 어떻게 그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는지, 현준은 잘 알고 있었다. 김수겸은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가 어떻든지 후회는 남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현준은 지금 수겸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지금의 그는 누가 봐도 근심 걱정 하나 없이 안정적으로 보였다.

“어쩌면 그간 내가 겪은 모든 고난은 이 한방을 위한 액땜이었을 지도.”

“아파트 한 방에 인생역전. 뭐 그런 거냐?”

“에이, 무슨. 아무리 그래도 아파트 하나 가지곤 좀 약하지.”

마시던 음료를 내려놓고선 수겸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인생 한 방은 이정환 아니겠어?”

이건 반박 불가다. 고개를 끄덕이며 현준이 대꾸했다.

“너 그거 다 내 덕인 줄 알아라. 내가 여기서 네 프러포즈 거절해준 덕분에 네가 이정환한테 갈 생각도 했던 거 아냐.”

“그래. 눈물 나게 고맙다. 진짜 너랑 결혼했으면 어떡할 뻔했냐?”

“확실한 건, 청약 당첨은 됐을지 몰라도 둘이서 평생 뼈 빠지게 대출 갚으면서 살았을 거다. …생각해보니 억울하네? 이정환 내가 잡을걸.”

친구의 실없는 농담에 수겸이 킬킬거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현준도 따라 웃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주택청약 넣겠다고 결혼하자고 한 건 정말 미친 짓이었어.”

“그걸 이제야 안다고? 솔직히 이정환이 받아줬으니 망정이지. 당장 미친놈이라고 신고하고 접근 금지 명령 때렸어도 할 말 없었다.”

“내가 그만큼 절박했다고 생각해줘라.”

다시 생각해 봐도 스스로가 웃겼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그땐 어떻게든 내 집 마련을 해야겠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불도저처럼 결혼을 밀어붙였다. 사실 잘 풀렸으니 망정이지 까딱하다간 귀한 인연 하나 잃을 뻔했다. 어찌 됐든 지나고 나서야 수겸도 깨달은 게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나 몰라. 막상 집도 생기고 결혼도 해보니까 알겠더라. 안정적 주거환경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1순위 조건이어야 하는 건 아니야.”

“…너 방금은 꽤 철 들은 것 같았다?”

“내가 원래 철은 빨리 들었거든? 좀 막무가내라서 그렇지.”

알긴 아네. 현준이 중얼거렸으나 수겸은 들은 채도 않고 음료만 홀짝였다. 그런 수겸을 보며 현준이 다시 물었다.

“그럼 네가 생각하는 1순위 조건은 뭔데?”

“집도 집인데, 같이 사는 사람이 더 중요하지. 솔직히 똑같은 집에 살았어도 정환이 없었으면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싶다.”

방금 한 말은 정말로 진심이었다. 그러나 수겸의 대답을 들은 현준의 얼굴에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가득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어서 그런 거 아니고?”

“그것도 무시 못 하지만. 그게 꼭 전부겠냐? 사랑하는 사람하고 같이 있는 게 중요한 거지.”

김수겸의 입에서 저런 감성적인 말이 나온다고? 누구보다 수겸을 잘 안다고 자부해오던 현준으로선 도저히 믿기 힘든 모습이었다. 결국 시험해보고 싶은 나머지 현준은 무리수를 두고야 말았다.

“수겸아. 그러면 말야.”

“…?”

“ ‘이정환이 바람피워서 이혼하기’ vs ‘지금 아파트 집값 반 토막 나기’ 중에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

수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건 김수겸이 열 받기 직전에 보이는 습관으로 평소의 현준이라면 놓치지 않았겠지만. 지금 현준은 머릿속 밸런스 게임에 과하게 심취해있었다.

“무조건 하나는 골라야 돼. 안 그러면 나중에 둘 다 일어날 수도….”

그러나 현준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소매를 팔뚝까지 걷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김수겸의 흉흉한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사태 파악을 끝낸 뇌가 살고 싶으면 얼른 도망치라고 외치고 있었다. 현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달아나기 무섭게 수겸이 뒤에서 쫓아오기 시작했다. 현준의 머릿속에 비상벨이 울렸다. 이건 잡히면 죽음이다!

“너, 너! 아까는 같이 사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며!”

“야, 이새끼야! 그래도 집값 반 토막은 선 넘었지!! 너 거기 안 서!!”

대낮의 카페에서부터 시작된 추격전은 얼마 못 가 현준이 건널목 앞에서 붙잡히면서 간신히 일단락되었다. 키가 멀대같이 큰 남자가 그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남자한테 헤드록에 걸려서 허리가 반은 접힌 우스꽝스런 광경이 지나가던 행인들의 시선을 몽땅 붙잡아두고 있었다.


김수겸은 의처증에 걸린 남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이다.

그러니까 이정환이 잠깐 몇 시간 정도 연락이 안 된다고 해서 그의 행동거지를 의심할 줄은 몰랐다는 뜻이다. 아무리 쳐다봐도 대답 없는 휴대전화를 째려보며 손끝으로 식탁을 초조하게 두드려댔다. 그러다 결국 제풀에 못 이겨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헤집었다. 이게 다 낮에 현준에게 괜한 소리를 들었던 탓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환이 자신을 두고 바람을 피울 리가 없다. 물론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누구라도 배우자의 바람에 대한 질문을 듣고 나면 없던 상념도 생기기 마련. 따지고 보면, 하필 이 타이밍에 연락 두절이 된 이정환한테도 잘못이 있는 거 아닌가?

불안함은 쉽게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수겸의 손이 무의식중에 하도 두드려댄 탓에 식탁에 구멍이 뚫리진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다행히 그 전에 도어락 버튼이 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수겸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현관까지 가는 발걸음이 신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그렇지. 이정환이 날 두고 바람을 피울 리가 없다고 중얼거리며 가볍게 통통 뛰어갔다. 그 덕에 수겸은 비밀번호가 눌리는 리듬이 평소와 좀 다르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현관문이 열리는 타이밍에 맞춰 평소와 다름없이 ‘짠-!’ 하고 반갑게 얼굴을 들이미는데, 정작 열린 문틈으로 눈이 마주친 건 낯선 남자였다. 당황한 수겸이 몸을 뒤로 빼고 물러나자 그제야 문이 활짝 열리며 기다리던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사태 파악을 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에게 어깨동무하듯 기대서 눈도 제대로 못 뜨고 흐느적대는 모습과 코를 찌르는 술 냄새만으로 정환이 만취 상태임을 알 수 있었으니까.

게슴츠레 뜨고 있던 정환의 눈이 수겸을 발견하자 일순간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곧장 수겸을 향해 팔을 내밀고 반갑게 말했다.

“수겸아아~.”

“이정환? 너 무슨 술을 이렇게 먹었어?”

수겸은 정환이 입을 떼자마자 알았다. 이 녀석이 평소 주량을 훌쩍 넘겼음을. 이정환은 술에 취하면 말꼬리를 늘이는 버릇이 있었다. 수겸의 고운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지자 여기까지 취한 상사를 메고 온 애꿎은 부하직원이 되려 그의 눈치를 보았다. 이 와중에 정작 원인 제공을 한 당사자는 벌게진 얼굴로 수겸에게 치근덕거렸다.

“으응. 오늘 기분이 좋아서~.”

“죄송합니다. 제가 말렸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여기까지 데려오느라 고생하셨어요.”

취해서 자신한테 안겨 오는 정환을 받아내던 수겸의 몸이 휘청거렸다. 원래도 무거웠지만, 몸을 제대로 못 가누니 배는 더 무거웠다. 그런 정환을 여기까지 부축해 온 직원의 노고가 안 봐도 뻔했다. 수고한 직원을 얼른 보내려는데 눈치 없는 정환이 말을 걸어서 붙들었다.

“김비서어~. 여기가 우리 수겸이다…?”

“네, 네. 잘 알죠.”

대체 언제 올린 건지. 손으로 수겸의 어깨를 꽉 잡아 돌리자 수겸이 엉거주춤 돌아서서 김비서와 다시 마주 보게 되었다. 허공에서 억지로 눈이 마주쳐 서로 뻘쭘하게 고개를 꾸벅여서 인사했다. 둘 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어 하는 눈치인데 한 명만 모르고 있었다.

“어때애? 우리 수겸이 이쁘지~?”

“네, 네. 그럼요. 하하….”

헤벌쭉 웃으며, 정환이 자신의 관자놀이께를 수겸의 정수리 쪽에 톡 내려놓았다. 지금 정환의 말과 행동에 악의라곤 전혀 없었으나 수겸의 분노를 사기엔 충분했다.

이정환! 그믄흐라고…!

이를 악물고 정환의 귓가에 복화술로 속삭였다. 수겸이 아무리 체면 안 따지는 사람이라지만, 정환의 직장 동료와 이런 후줄근한 차림으로 계속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알코올이 청각에도 영향을 미쳤는지 정환은 바보 같이 헤벌레하기만 했다. 수겸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직전이었다.

상황을 종결시킨 건 김비서의 빠른 판단 덕분이었다. 이만 가 보겠다며 서둘러 인사하고 정환이 입을 열기 전에 후다닥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기 전 약간의 틈새로 수겸에게 눈인사를 건네는 센스도 있었다. 속으로 김비서에게 따봉을 보내며 수겸도 고개를 주억였다. 이제 남은 건 이 술에 절여진 덤프트럭을 무사히 침대까지 옮기는 일뿐이었다.

물에 젖은 솜처럼 축 늘어진 정환을 거의 등에 업다시피 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 보니 목구멍에서 욕이 절로 나왔다. 내가 한 치 앞도 모른 채로 ‘남편이 바람을 피우네, 마네’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나 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런 수겸의 속도 모르고 정환이 수겸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면서 말했다.

“수겸아아…. 화났어~?”

“그럼 화가 안 나겠니?”

“미안…. 나 너무 자랑하고 싶었어….”

이건 또 무슨 생뚱맞은 소리래. 수겸이 고개를 돌려서 힐끔 돌아보자 정환이 취기에 벌건 얼굴로 웃으며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숨 쉴 때마다 입에서 나오는 뜨거운 숨결과 술 냄새가 수겸의 얼굴에 뿌려졌다.

“사람들이 다 너 이쁘대. 신기하지…? 내 눈에도 이쁜데, 다른 사람 눈에도 그런가 봐.”

그 말을 하면서 정환은 어린애처럼 웃었다. 아이같이 순수했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고등학생 시절 수없이 부딪힌 농구 코트 위에선 절대 볼 수 없었던 얼굴이었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믿어지지 않았다. 내 앞에서 아이처럼 구는 이정환과 그런 모습에 설레하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지만 싫지 않았다. 아마 이런 게 사랑이겠지.

“그래서어. 너 자랑하고 싶어서 그랬어…. 네가 내 남편이라 너무 좋다, 수겸아….”

어느샌가 수겸도 정환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웃고 있었다. 낮에 현준에게 했던 말이 맞았다. 지금 이 행복은 집이 아니라 사람이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푹신한 매트리스에 정환을 메치듯 내려놓은 수겸이 제자리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자 누워있던 정환이 그대로 손을 뻗어서 수겸의 팔을 붙들었다. 잡힌 손목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뜨거웠다. 정환이 누운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갑자기 당겨지는 힘에 그대로 몸이 휘청거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환의 위에 올라탄 상태였다.

밑에 깔린 정환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분명해 보였다. 수겸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곧장 등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뜨거운 손을 옆으로 밀어내자 정환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기회를 놓칠 김감독이 아니다. 그토록 바라던 복수의 순간이었다.

“나 술 취한 사람하고 하는 건 싫어.”

들려오는 단호한 목소리에 정환은 순식간에 술이 싹 달아났다. 수겸은 정환의 위에 엎드려있던 상체를 일으켜서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았다. 그런 수겸을 보는 정환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수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바보 같은 얼굴을 하는 이정환을 내려다보는 건 정말이지! 짜릿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너…. 그 일을 아직도 담아두고 있는 거야?”

“네가 했던 말 그대로 되돌려주는 것뿐이야.”

“아니. 나 지금 하나도 안 취했….”

“방금 전까지 똑바로 걷지도 못해서 내 등에 매달려 왔던 사람이 누구더라~?”

누가 봐도 놀리는 게 분명한 말투였다. 정환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과거의 행동에 이렇게 발목을 잡힐 줄이야. 아무리 그래도 지금 내 배 위에 올라타 있으면서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 건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다. 정환은 작전을 변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최소한 그날 네가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알겠네.”

“그걸 이제 알았냐? 다 자업자득이야. 아무튼. 오늘은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아, 수겸아아~.”

살살 달래보다가 못 이기는 척 애교까지 부려봤지만, 수겸은 여전히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제법 귀엽긴 하지만 이렇게 쉽게 넘어가 줄 순 없지. 어디 한 번 더 해보라는 식으로 팔짱을 낀 채 관람 모드에 돌입하려는데 정환이 수겸의 밑에 깔린 허리를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시선이 팔려서 잠시 몸에 긴장을 풀었더니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정환이 수겸을 붙잡고 그대로 몸을 뒤집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전세가 역전되었고 수겸의 얼굴이 당황에서 분함으로 바뀌기까지 불과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정환! 치사하게 힘으로 이러기야? 너 당장 안 내려와!”

뒤늦게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이미 허리부터 다리까지 정환이 온몸으로 누르고 있어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양팔 아래로 가둔 수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정환이 그대로 머리를 내려서 수겸의 온 얼굴과 목에 입술을 찍어 눌렀다.

“수겸아 사랑해~.”

“잠깐만, 나와 봐. 너 무겁다고! 야야, 거기 하지 마. 아, 진짜 간지럽다고!”

방 안의 열린 문으로 정환과 수겸의 웃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그들은 저기 벽 너머에 걸린 결혼사진 속 모습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 fin.

완결 기념으로 넣은 웨딩 사진 커미션입니다.

(커미션주 : @x__violet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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