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2차 창작

[정환수겸] 김감독의 내 집 마련 프로젝트 08

위기를 기회로

‘오늘 운수가 나쁘네.’라고 생각했었다.

겨우 한 모금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이 미끄러져서 쏟아버렸다. 급한 대로 티슈를 왕창 뜯어서 사무실 책상 위에 흐르는 액체를 막아내기 바빴다. 컴퓨터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급급해서 휴지로 마치 거대한 댐을 만들 듯이 빙 둘렀다. 그새 여기저기 튀어서 커피 얼룩이 진 와이셔츠를 갈아입고 왔는데, 세상에…! 

책상 위 고여있는 커피 웅덩이에 휴대전화가 퐁당 빠져있었다. 이걸 왜 이제야 발견했는지. 뒤늦게 건져서 닦아 봤지만,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정환은 마른세수를 하며 손바닥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한숨은 덤이었다. 일이 꼬이려면 이렇게까지 꼬이는구나 싶었다.

남은 잔해들을 전부 치우고 나서야 자리에 놓인 유선전화로 수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이 되지 않아 수화기를 다시 내려놓았다. 정환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연락이 안 되면 걱정할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퇴근하면 집에서 볼 텐데. 잠깐 연락이 안 된다고 해서 무슨 일이 생기겠거니 싶었다.

업무에 매진하는데 유선전화가 울렸다. 수겸인가 싶었으나 회사 로비의 프런트였다. 손님이 찾아왔다고 했다. 미리 들은 바가 전혀 없었기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로비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넓은 회사 로비 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는데 어딘지 모르게 조금 소란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환이 형!”

머지않아 소란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국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농구 스타 윤대협이 정환을 발견하고 반갑다는 듯 손을 붕붕 흔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방문에 얼이 나가 있기도 잠시. 다시 정신을 차린 정환이 서둘러 대협에게로 다가갔다.

“대체 여기까지 왜 온 거야?”

“저 다 알았어요.”

“뭐를?”

“형 결혼이요. 다른 목적이 있어서 한 거잖아요?”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정환을 보면서 대협은 또 한 번 확신했다. 아까 술집에서 들었던 말이 역시 맞았다고.

정환이 낭패감에 어찌할 바 모르는 사이, 주위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게 느껴졌다. 주말이라 오고 가는 직원이 많지는 않았지만 여기는 회사 로비였다. 게다가 정환과 대협은 너무나 눈에 띄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얘기해도 돼요? 저는 상관없지만.”

대협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정환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대협의 팔을 잡아끌었다. 정환의 뒤를 순순히 따라가는 대협의 발걸음이 경쾌했다. 


전화기가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몇 번을 걸어봐도 전원이 꺼져있다는 음성 안내만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는 수겸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차라리 전화를 받지 못해서 부재중으로 넘어가면 바빠서 그런가 보다 할 텐데. 전원이 꺼져있으니 안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더욱 부채질하는 격이었다.

그런데도, 혹시 정환에게 언제 연락이 올지 몰라서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전화기를 잡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그래도 아픈 머리가 가라앉지를 않는다. 결국, 악수인 걸 알면서도 냉장고로 가서 소주를 한 병 꺼내왔다. 몇 잔 마시면 이 두통이 없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병뚜껑을 잡고 돌리는데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자가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다 가져다 댔다.

“이정환이야?!”

[형! 저예요!!]

젠장. 호장이였다. 

[정환이형 아직도 연락 없어요??]

“그래. 아까부터 계속 전화기가 꺼져있어.”

[저도 계속 전화 거는데 연결이 안 돼요!! 저 진짜 돌아버릴 거 같아요!!!]

보이지 않아도 미치기 일보 직전인 호장이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사실 수겸도 지금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수겸이 말했다.

“너는 당사자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난리야. 좀 진정해라.”

[제가 어떻게 진정을 해요!! 지금 형들이 9시 뉴스에 나오게 생겼는데?!!]

“…너 자꾸 재수 없는 소리 할래?!! 시끄럽고. 일단 끊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고선 휴대전화를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까 까다 말았던 소주를 마저 까서 그대로 병나발을 불었다. 목구멍을 타고 술이 넘어가자 순식간에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병을 내려놓고 양손에 이마를 대고 앉아 있으니 잠시 후 두통이 조금씩 가시면서 머리가 맑아지는 것만 같았다. 

호장이의 말이 틀린 것 하나 없었다. 윤대협이 입 한번 뻥끗하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생겼으니까. 정환과 수겸의 결혼 소식에 온갖 일간지에서 기사가 떴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파급력이 있었다. 거기다가 NBA 출신 현역 농구 스타인 윤대협까지 얽힌, 부동산 사기가 가미 된 치정 스토리라면? 언론의 먹이가 되기 딱 좋았다.

다시 또 머리가 아파왔다. 자신의 과오 때문이라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환에게 피해가 가는 건 정말 죽기보다 싫었다. 


정환이 대협을 이끌고 간 곳은 다름 아닌 회사 건물의 지하 주차장이었다. 남들 눈에 띄지 않고 대화하기에 차 안 만큼 좋은 장소도 없었다. 정환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키를 꺼내 차량 잠금을 풀자 대협이 익숙하다는 듯 조수석으로 가서 문을 열고 앉았다.

“차 안 바뀌었네요? 시트는 조정 좀 해야겠다.”

그러면서 능숙하게 조수석 옆 레버를 당겨서 시트를 뒤로 살짝 밀었다. 그 모습에 정환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 차를 끌고서 몇 번이나 공항에 대협이를 마중 가고 바래도 주고 했었다. 생각해보니 그들은 비밀 데이트를 했기에 차에서 보낸 시간이 정말 길었다. 

같이 보낸 시간이 길수록 헤어져도 잔상이 오래 남는다. 지금 생각하면 미안한 일도 정말 많았다. 비밀연애를 한답시고 데이트 한 번 하려면 무슨 첩보 영화를 방불케 했다. 남들 다 가 본 데이트 명소는 간 적도 없고 기껏해야 집, 차, 집, 차만 반복했다. 그땐 뭐가 그렇게 무서웠는지. 대협을 위해서라고 말했었지만, 사실은 정환 본인을 위해서였음을 이제는 인정할 수 있었다. 

정환은 대협이 지금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너무 잘 알았다. 자기와 사귈 때는 그렇게 숨기기 급급했던 사람이 헤어진 지 1년도 안 되어서 결혼한다고 사방팔방 알리고 심지어 기사까지 떴으니. 대협으로선 충분히 배신감을 느낄 만도 했다. 

한때는 대협과 함께하는 미래를 꿈꿨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도무지 그려지지 않는 미래였다. 그래서 정환은 더 늦기 전에 이별해야겠단 결심을 했고, 대협도 이를 받아들였다. 으레 오래된 연인들이 그렇듯 초창기의 불같은 사랑은 이미 꺼져버린 지 오래였고, 그들은 남들이 보기에 제법 쿨하게 헤어졌다. 

그래도 우리 친구나 선후배 정도로 남을 수는 있겠죠? 

이별을 받아들이면서 대협이 정환에게 했던 말이었다. 정환 역시 이에 동의했다. 칼로 자르듯이 한 번에 끊어내기에 그들은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했었다. 그래서 단칼에 관계를 정리하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남은 감정이 천천히 풍화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럼 언젠가 좋은 친구로만 남을 수도 있겠지.

“형, 저 기다릴 수 있어요.”

생각을 가르고 들어온 대협의 목소리에 그를 돌아보았다. 대협은 웃고 있었다. 그건 대협이 습관처럼 짓는 가면 같은 미소가 아니라 진짜 기쁜 마음에 짓는 미소였다. 정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기다린다니. 뭐를?”

“형, 2년 뒤에 이혼한다면서요. 저 2년 정도는 얼마든지….”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그래? 수겸이가?”

정환의 반응에 대협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환은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에 심지어 꽤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네. 몰랐어요? 아까 신준섭이랑 전호장이 그렇게 말하던걸요.”

“….”

“뭘 그렇게 놀라요. 처음부터 청약인지 뭔지 때문에 결혼한 거잖아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면서 손을 뻗어 정환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얹었다. 그러면서 또 한 번 정환의 반응을 살폈다. 대협은 정환이 자신의 말에 동의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정환의 반응은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대협은 정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정환의 표정이나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대협은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정환은 지금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형, 그 표정은 뭐예요? 왜 형이 그런 얼굴을 해요?”

이러면 안 되잖아. 당신이 이러면 안 되잖아.

“설마 진짜 김수겸 사랑하기라도 해요?!!”

있는 힘껏 소리쳐도 정환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정환의 손등에 포개어진 대협의 손이 저도 모르게 떨려왔다. 

윤대협은 결코 헤어진 연인에게 매달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지금 이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절박했다.

아마 온 세상 사람을 다 만나봐도, 대협의 인생에서 이정환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조금씩 풍화되어도 여전히 이 감정의 크기는 너무나 거대했다. 서로가 가진 감정의 크기가 다르다는 사실이 이토록 잔인할 줄은 몰랐다. 

“나 너무 늦었어요? 이번에도 지각이에요?”

대협은 어느새 울먹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정환은 그를 바라봐 주지 않았다. 정환이 포개어진 손을 빼내었다. 그리고 돌아보며 말했다.

“대협아. 네가 뭔가 오해하고 있어. 나 주택청약 때문에 수겸이랑 결혼한 거 아니야. 나 수겸이 사랑해. 사랑해서 결혼한 거야. 다른 이유는 없어.”

이번엔 대협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턱이 떨릴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신혼여행지까지 쫓아갔던 그 날. 너무 늦었냐는 물음에 정환은 그렇다고 답했었다. 이제 되돌릴 수 없다고. 그러니 단념하라고. 정환의 거절을 듣자, 대협은 후회와 좌절이 점철된 채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형이 말한 대로 돼버렸다고. 결국, 중요한 시합에 지각해 버리고 말았다고.

가슴은 찢어졌지만 단념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이 어떤 목적에 의한 수단에 불과함을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대협은 아직 이 시합이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시합에 온 힘을 다해 뛰어들겠다고 결심했다. 정환이 봐주지 않아도 포기할 순 없었다. 발목을 붙잡아서라도 그를 붙들고야 말 것이다.

“…만약 김수겸이 이혼하자고 한다면요? 이혼할 거예요?”

“그땐 생각해 봐야겠지. 하지만 우리가 이혼하더라도, 내가 수겸이 사랑해서 결혼했다는 사실은 변함없을 거야.”

가슴에 박힌 대못에 쐐기를 박는 말이었다. 대협은 더는 정환에게 자신의 감정을 호소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이쪽이 막혔다면 다른 돌파구를 찾으면 된다.

“대협아? 윤대협!!”

대협이 차 문을 열고 그대로 뛰쳐나갔다. 정환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대로 이 승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수겸은 점점 피가 말라가고 있었다. 먼저 연락하는 건 진작 포기한 상태고. 그저 정환에게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염없이 식탁에 놓인 휴대전화만 노려보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서둘러 받았더니 ‘여보세요.’란 말을 듣고도 전화를 건 상대는 한참 말이 없었다. 잘못 걸었나 싶어서 끊으려는데 그제야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저 누군지 아시죠?]

모를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제가 왜 연락 드렸는지도 아실 테고. 드릴 말이 있는데, 우리 만날까요?]

“좋아. 어디로 가면 돼?”

[밖에서 할 얘기는 아닌 거 같고. 감독님 댁에서 하는 게 어떨까요? 그동안 저만 초대 안 해주신 거 같던데.]

수겸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차라리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게 나았을 텐데. 호랑이가 제 발로 집에 찾아온다고 하면 어느 누가 대문을 열고 반기겠는가. 그러나 문을 열어주지 않자니 밖에서 호랑이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지금으로선, 이 위험한 녀석이 제집에 발을 들이는 걸 허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체념한 수겸이 순순히 집 주소를 불러주었다. 대협은 좀 이따 보자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수겸이 잠시 심호흡을 한 뒤에 양손으로 뺨을 두드렸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이제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한다.

그러나 막상 수겸은 어떠한 대비도 할 수 없었다. 윤대협이 도대체 원하는 게 뭔지, 수겸에게 찾아와서 무얼 요구할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만 흐르고, 누군가의 방문을 알리는 벨 소리와 함께 인터폰에 얼굴이 비쳤다. 수겸과는 달리 윤대협은 전혀 초조해 보이지 않았다. 버튼을 눌러 문을 열어주면서 수겸도 마음을 다잡았다. 이게 어떻게 얻어낸 집인데. 쉽게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잠시 후, 철컥이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대협이 안으로 들어왔다.

“감독님, 저 들어가도 될까요?” 

“이미 들어왔으면서, 뭘 물어봐?”

신경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잠시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혔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대협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집 구경 좀 시켜주세요. 얼마나 좋은 집이길래 감독님이 가짜 결혼까지 하셨을지 궁금하거든요.”

이 새끼가…!

수겸이 주먹을 꽉 쥐었다. 천사 같은 얼굴로 웃고 있지만 들리는 말은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수겸의 속을 사정없이 긁어내는 것만 같았다. 호장에게 들은 대로, 윤대협이 그들의 비밀을 알아챈 건 틀림 없어 보였다. 수겸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일단은 앉아서 얘기해야겠다 싶었다.

대협은 수겸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도 계속 조잘거렸다. 집이 정말 좋네요, 이런 집이라면 욕심낼 만 하겠어요, 같은. 수겸의 속을 긁는 말이었다. 끝까지 무시한 채로 식탁까지 와서 의자를 뒤로 빼는데 뒤따라오던 대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돌아보니 거실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대협이 보였다. 뭘 하는 거지? 수겸이 얼굴을 찌푸리며 유심히 보았다. 대협은 우두커니 서서 거실 한쪽 벽에 걸린 정환과 수겸의 결혼사진을 보고 있었다.

수겸이 서 있는 쪽을 등지고 있어서 대협이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수겸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서 있는 뒷모습이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결혼사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협이 입을 열었다.

“정환이형 사랑하세요?”

“….”

“바로 대답 못 하시네요. 저는 사랑하거든요. 이정환.”

꼭 사진 속 턱시도를 입고 웃고 있는 정환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 애처로운 사랑 고백을 듣고 있자니, 수겸은 기분이 나빠졌다. 날이 선 말투로 수겸이 물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저 감독님한테 바라는 거 없어요. 그냥 지금 상태 그대로 유지해주세요.”

“뭐?”

“그렇게 계속 정환이 형한테 마음 주지 마시고. 사랑하지 마세요. 그리고 계획대로 2년 뒤에 이혼하세요. 그러면 저도 끝까지 입 다물고 조용히 있을 테니까.”

정말 상상조차 못 했던 말이었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차라리 지금 당장 이혼하라던가, 부동산 사기로 고발하겠다고 협박이나 했다면 어느 정도 예상한 바라 이 정도 충격은 아니었을 텐데. 사랑하지 말란 말을, 그것도 그 잘난 윤대협이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때요?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죠?”

다시 돌아본 윤대협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고 있었다. 하지만 웃는 낯과는 달리 말에는 가시가 잔뜩 돋쳤다. 거절한다면 금방이라도 찌를 듯한 태세였다. 그러나 찔리는 게 두려워서 이대로 뒷걸음질 칠 생각은 수겸에게 전혀 없었다. 

“하나만 묻자. 너 내가 정환이 첫사랑인 건 어떻게 알았어? 준섭이, 호장이도 모르는 눈치던데.”

“제가 그걸 왜 말해야 하죠?”

“혹시 또 알아? 네가 내 비위만 잘 맞춰주면 이정환이랑 더 빨리 이혼해줄지도?”

수겸의 뻔뻔한 말에 대협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곳에 온 후로 줄곧 유지해오던 윤대협의 여유로움이 한 꺼풀 벗겨진 순간. 이 틈을 수겸은 놓치지 않았다. 

“왜? 내가 무서워? 이정환이 날 짝사랑했던 과거를 낱낱이 알게 되면 내가 흔들릴까 봐? 그래서 이혼 안 해줄까 봐?”

“무슨 소릴…!”

“너 이정환 사랑한다며. 네 사랑이 나한테 밀릴까 봐 두려워? 그렇게 자신이 없나?”

도발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이제 윤대협은 여유로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한숨을 한 번 크게 쉰 후에 대협이 입을 열었다.

“연락처에 적힌 이름 보고 알았어요.”

“이름?”

“정환이형은 참 알기 쉬운 사람이에요. 행동이 규칙적이거든요.”

과거를 떠올리는 듯 대협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약간은 꿈꾸는 것처럼 몽롱해 보이기도 했다.

“정환이형은 휴대전화에 연락처 저장할 때 규칙이 있어요. 보통은 소속, 관계, 이름순으로 적어놓죠. 친한 친구나 동창들도 예외는 없고 전부 그런 식이에요. 해남고 농구부 후배 신준섭. 이렇게.”

지금 내 이름은 뭐라고 저장되어 있으려나. 대협은 문득 궁금해졌다. 

“근데 어느 날 연락처를 쭉 보는데, 그냥 ‘김수겸’이라고만 적힌 걸 보고 말았죠.”

이 말을 하면서 대협은 수겸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그 이름을 처음 발견했던 그 날 느꼈던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다시금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형의 규칙대로라면 ‘상양고 농구부 출신 김수겸’ 이어야 하는데. 왜 이 사람만 예외일까. 그래서 물어봤죠. 처음에 엄청 당황하면서 별거 아니라고 하더니. 나중에 실토하더라고요.”

대협의 말을 들은 수겸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수겸이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저절로 그려졌다. 연락처를 저장하며 이름을 적을 때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겨우 이름 세 글자만 꾹꾹 눌러 적었을 정환의 모습이.

내 이름 앞을 비워둔 건, 특별하고 싶었던 무언가의 빈자리였겠지.

‘내가 고백하려고 할 때마다 너한테 안 좋은 일이 생겼으니까.’

‘첫사랑이 아무하고나 결혼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네가 이혼하자고 할 때 고백하면서 한 번 붙잡아나 보려고 했지.’

‘수겸아, 우리 같이 살까?’

‘지금처럼 너랑 서로 편하게 이름 부르고, 힘든 일이 있을 때 같이 나눌 수 있고, 그럴 수 있으면 더 바라는 거 없어.’

왜 지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까.

“허…? 지금 울어요? 진짜 어이없어….”

눈물을 글썽이는 수겸의 얼굴을 보자 대협은 화가 날 지경이었다. 줄곧 울고 싶은 게 누구였는데. 왜 하필이면 내가 곁에 없을 때 당신이 나타나서, 내가 정환이형을 도둑맞은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건데! 결국 대협은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감독님이 우실 게 뭐가 있어요? 애초에 주택청약 넣겠다고 정환이형 이용해서 결혼하신 거잖….”

“증거 있어?”

“…뭐라고요?”

“증거 있냐고. 내가 이 집 때문에 이정환이랑 결혼했다는 증거 있냐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면서도 또박또박 소리치는 수겸을 보자 대협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다가 대협이 다시 차분히 반박했다.

“잊으셨나 본데, 제가 신준섭이랑 전호장이 말하는 걸 분명히 들었어요.”

“그래서? 걔네가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잖아. 나랑 이정환이 그렇게 말한 적 있었나?”

“이봐요!”

어느새 흐르는 눈물을 다 닦아낸 수겸이 대협의 말에 날카롭게 반박했다. 

“물론 우리가 청약 먼저 넣고 결혼한 건 맞아. 근데 그게 뭐 어떤데? 남들도 결혼할 때 다 이렇게 하는데? 애초에 결혼하기로 약속한 다음에 청약 접수한 건데, 뭐 문제 될 게 있나?”

대협은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다. 얼른 받아쳐야 하는데 도무지 반박할 거리가 떠오르질 않았다.

“우리 결혼식에 온 하객만 수백 명이야. 결혼하기도 전에 기사 먼저 떴고, 신혼여행도 갔다 왔고. 너도 봤다시피 이 집에서 같이 살고 있고. 우리 같이 생활하는 거 증언해 줄 아파트 주민만 수십 명은 될 거고.”

“그건 전부 연기….”

“하, 너 바보야? 어떤 사기꾼이 이 정도까지 연기하겠어? 연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진짜 바보 같아. 그동안 잘도 연기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어.

수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돌이켜보면, 정환은 한 번도 연기를 했던 적이 없었다. 수겸만 바보같이 이 모든 게 연기라고 믿었다. 언젠가 현준이 말했었다. 네가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지 몰랐다고. 맞아. 나 연기 못 해. 근데도 바보같이 내가 연기한다고 믿고 있었지 뭐야.

스스로 자각한 순간. 수겸은 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다.

“나 이정환 사랑해. 우리 사랑해서 결혼했어.”

“…뭐라고요?”

“그러니까 난 절대로 포기 안 해. 네가 아무리 나한테 사랑하지 말라고 하고, 이혼하라고 해도 소용없어. 난 절대 포기 못 해! 이 집도, 이정환도 전부 내 거야!”

그 순간 윤대협은 패배를 직감했다. 시합 종료 직전, 버저가 울리기 전에 수겸의 손에서 떠난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걸 그저 망연자실하게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지금 우리 사이에서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넌 이미 늦었어.”

그리고 공이 림 중앙으로 정확히 들어갔다. 머릿속에선 시합 종료를 알리는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장 난 휴대전화를 수리센터에 맡기고 서둘러서 귀가한 정환이 허겁지겁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신발을 벗기도 전에 수겸의 이름부터 불렀지만 집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혹시 연락이 안 되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서둘러 안으로 들어오는데 식탁에 머리를 박고 고꾸라져 있는 수겸이 보였다.

“수겸아?!”

깜짝 놀라 달려간 정환이 수겸을 일으켜 세웠다. 그제야 부스스 일어난 수겸이 숨을 한 번 내뱉자 술 냄새가 진동했다. 정환이 고개를 들자 식탁 위에 온갖 술병들이 나동그라진 게 보였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수겸을 일으켜 똑바로 앉히면서 정환이 걱정하는 말투로 말했다.

“아니, 대체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신 거야?”

“…응? 이정환?”

정환의 목소리에 눈을 몇 번 끔뻑이더니 수겸이 돌아보았다. 그리고 빤히 쳐다보더니 다짜고짜 정환의 멱살을 잡았다.

“이정환, 너어…!”

“수, 수겸아?”

“너어. 우리 하와이에서 했던 약속…. 기억하지?”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정환이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하는데 수겸이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 서로 숨기는 거 없기로 했잖아. 너어. 똑바로 대답해!”

꿀꺽. 마른침을 삼킨 정환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술기운에 동공이 다 풀려있는 눈으로 한참 정환을 노려보더니 수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 나 사랑하냐…?”

“….”

“씨이. 왜. 대답이 없냐…? 나는…. 너 사랑하는데….”

뭐라고? 정환은 지금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다. 수겸의 입에서 나오리라 상상도 못 한 말이었다.

“아까. 윤대협이 왔었거든…?”

“뭐?!”

“걔가 그러더라…? 나보고 너 사랑하지 말래….”

이어지는 말은 더 충격이었다. 설마 대협이 그렇게 뛰쳐나가선 곧장 수겸을 찾아갔을 줄은 몰랐다. 알았다면 곧바로 뒤쫓아 갔을 텐데. 정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진짜 존나, 웃기지 않냐…? 시발. 이미 사랑하는데 이제 와서 어쩌라고…!”

억울하다는 듯이 울먹이며 말하는 수겸을 보자 정환은 가슴이 저렸다. 정환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김수겸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야, 이정환…! 너어, 똑바로 대답해…!”

“알겠어, 알겠어. 수겸아. 이거 좀 놓고….”

“나…. 너 포기 안 해도 되지? 응? 나…. 너도, 이 집도…. 포기 못 하겠는데…. 안 해도 되는 거지?”

멱살을 잡히고 눈물을 글썽거리면서도 정환은 웃음이 나왔다. 진짜 너무나, 오래전부터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럼. 수겸아…. 당연히 그래도 되지.”

“진짜…? 그럼 나 포기 안 한다. 너 이제 내 거야…. 이 집도, 너도 다 내 거라고…!”

그대로 정환을 끌어당겨서 입 맞췄다. 정환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 때문에 짠맛이 났다. 수겸이 멱살을 잡았던 손을 풀고서 그대로 정환의 목에 감았다. 마치 갈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입 맞추다가 잠시 떼어내고 서로 뺨을 비볐다. 그리고 다시 입 맞추고 떨어졌다가 다시 부비기를 반복했다. 

잠시 떨어져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들은 이제 서로 숨기는 게 없었다.

“하아. 이정환…! 너어, 너 내 거야…!”

“응, 응. 그래. 나 수겸이 거야.”

“이제 절대 안 놔줄 거야…! 나 너 사랑하니까….”

“나도, 나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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