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2차 창작

[정환수겸] 김감독의 내 집 마련 프로젝트 07

믿기 힘들겠지만 아직 안 사귑니다.

현관 앞에 놓인, 크기가 조금 다른 실내화가 두 쌍.

세면대 위엔 색깔이 다른 칫솔이 두 개가 꽂혀있고.

협탁 위엔 다이아가 박힌 결혼반지가 한 쌍 놓여있다.

그리고 안방 라지킹 사이즈의 침대 위 베개는 두 개, 이불은 하나.

거실 한복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린 결혼사진까지.

그저 흔한 신혼집의 풍경이었다. 전혀 이상할 것이 없고, 누가 봐도 거리낌이 없을.

그러나 현준의 눈엔 너무나 이상하게 보였다. 적어도 현준이 아는 선에선, 김수겸과 이정환의 집은 이런 풍경이면 안 됐다. 대체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니, 애초에 신혼여행을 가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그 전에 그딴 프러포즈를 날리고, 그걸 또 덥석 받아줘 버린 인간들의 정신상태부터 문제가….

“준섭이 형, 이 과자 드실래요?”

“호장아, 이런 건 주인한테 먼저 허락받고 꺼내야지. 수겸이 형, 이거 먹어도 돼요?”

“이미 포장 벗기고 있으면서 빨리도 물어본다. 먹어라, 먹어. 현준아, 너도 먹을래?”

그러나 이곳에서 현준을 제외한 그 누구도 이 기묘한 동거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한숨을 한 번 쉬고 콧잔등까지 내려온 안경을 다시 추켜올린 현준이 식탁에 둘러앉아 사이좋게 과자를 나눠 먹고 있는 세 사람을 보며 말했다.

“근데 오늘 집들이 나 혼자만 온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었지. 초대도 안 했는데 이 녀석들이 멋대로 찾아온 거야.”

“죄송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원래 집들이는 사람이 많아야 좋은 거잖아요!!”

말로는 죄송하다고 하지만 전혀 죄송해 보이지 않는 녀석 하나와 여기가 마치 제집인 양 뻔뻔하게 구는 녀석까지. 오늘 집들이엔 현준 말고도 초대받지 않고 찾아온 손님이 둘이나 더 있었다.

“시끄러. 여기가 무슨 너네 아지트냐? 시도 때도 없이 자꾸 찾아올래?!”

“하지만 이 집은 정환이형 집이기도 하잖아요?”

“맞아요. 우린 정환이형 보러 오는 건데…. 아! 왜 또 저만 때려요!!”

“네가 목소리가 더 크니까 그렇지. 너네 자꾸 이렇게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면 다음부턴 문 안 열어줄 거야.”

“에이, 거짓말-! 오늘도 인터폰 카메라에 술이랑 안주 사 온 거 들이미니까 바로 열어줬으면서!!”

호장이가 약 올리듯이 혀를 삐죽 내밀고선 말했다. 이번엔 수겸도 반박의 여지가 없었는지 분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찌 됐든 현준이 보기에 저 두 사람이 이 집에 놀러 오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닌 게 분명했다. 문득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본 현준이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그나저나 이정환은 언제쯤 오는 거야? 나 내일 데이 근무라서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

“오늘 퇴근이 좀 늦어져서. 아까 출발했다고 했으니까 한 20분 뒤면 도착할 거 같은데?”

“헤에, 정환이형 동선을 환히 꿰고 계시네요?”

“그럼 내가 남편 스케줄도 모를까 봐?”

문제의 발언을 한 당사자를 제외한 세 명이 일제히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손님들이 질색하건 말건, 수겸이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남편 맞잖아.”

“그치만 두 분 아직 사귀진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사귀진 않는데. 어쨌든 결혼은 했으니까.”

“준섭이형, 지금 이게 앞뒤가 맞는 말이에요??”

“지적해 봐야 소용없어, 호장아. 이 형들은 애초에 순서부터 잘못됐으니까.”

그 순간, 가만히 앉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현준이 안도하며 말했다.

“휴우, 다행이다.”

“뭐가?”

“난 여기서 나만 이상하게 생각하는 줄 알았잖아. 역시 너희가 봐도 얘랑 이정환이 제정신이 아닌 게 맞는 거지?”

건너편에 앉은 준섭과 호장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 그들 세 명 사이엔 어떠한 유대감이 형성되고 있었다. 반면, 수겸만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다고? 우리가?”

“당연히 이상하죠!!! 누가 사귀지도 않는데 결혼하고 동거를 해요?!!”

“전호장, 너…. 우리가 동거하게 된 계기가 누구 때문이었는지 그새 까먹은 모양이다?”

수겸의 반박에 기세 좋게 소리치던 호장이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 일은 죄송하다고 했잖아요…. 형네 어머님이 주소 물어보시길래. 전 정환이형이 바빠서 깜빡한 줄 알고 그랬죠….”

기가 팍 죽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호장을 보면서, 수겸은 속으로 웃음을 참느라고 혼났다. 지난번 호장이 실수했던, 일명 ‘시어머니 기습 방문 사건’에 더이상 남아 있는 앙금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그 덕에 대출 전액 상환이라는 쾌거를 이뤄냈으니. 결과적으로 수겸에겐 이득이었다. 하지만 호장이는 놀리기에 타격감이 너무 좋았다.

“아무튼. 그 사건 이후로 더 치밀하게 연기하고 있는 것뿐이야. 호칭 같은 것도 평소에 자주 불러야 남들 앞에서도 자연스럽게 보일 테니까.”

수겸의 말에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준섭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두 분 언제까지 그렇게 연기만 하실 거예요?”

“글쎄. 이혼하기 전까진 계속해야겠지?”

“네에-?! 정환이형이랑 이혼하실 거예요?!!”

“뭘 새삼스럽게…. 처음부터 청약 넣으려고 결혼한 거였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언젠간 이혼해야지.”

갑자기 일동 숙연해졌다. 이번에도 먼저 침묵을 깬 건 준섭이었다.

“그럼 앞으로 계획은요? 어차피 이혼하실 거면 언제까지고 질질 끌 수는 없잖아요.”

전부터 느꼈지만, 준섭이는 사람의 허를 찌르는 재능이 있었다.

“이혼하게 된다면, 늦어도 2년 안에는 해야겠지.”

“에엑-?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허, 저번에 7년 뒤에 한다고 할 땐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난리 쳤던 놈이 누구더라? 너네 형 혼삿길 막힌다고 난리 난리를…!”

“아니, 그때는 저도….”

“됐어. 나도 네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니까. 어차피 놓아줘야 하는 거면, 빨리 놓아줘야지. 붙들고 질질 끌지는 않을 거야.”

단호한 수겸의 어조에 호장도 더는 대꾸가 없었다. 좌중에 과자 씹는 소리와 술 넘어가는 소리만 들리고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결국, 이 불편한 공기를 못 견딘 호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준섭이형, TV나 볼까요?”

“그래, 그러자.”

준섭이 호장과 함께 거실로 나가자 현준이 수겸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 뭐 필요한 거 있어? 결혼 축하 선물 겸, 내 집 마련 축하 선물 겸해서 하나 사줄까 하는데.”

“글쎄. 이사 오면서 웬만한 건 다 새로 사서. 이따 정환이 오면 물어볼까?”

“그러던지.”

나란히 앉아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대화하는데, 현관에서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기다리던 이 집의 또 다른 주인이 분명했다. 그 소리에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한 호장이 거실 소파에서 현관까지 부리나케 튀어 나갔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정환을 온갖 호들갑을 떨면서 맞이했다.

“…꼭 주인 오기만을 기다리는 반려견 같네.”

“그러게. 누가 보면 쟤가 이 집 식구인 줄 알겠다니까.”

현준의 말에 수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마중 나간 호장이와 함께 들어온 정환이 집에 온 손님들에게 차례대로 인사하고 현준과 수겸의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수겸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빈 잔을 하나 가져오더니 자연스럽게 정환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얼씨구? 그 모습에 현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수겸이 옆으로 오자 당연히 제 옆에 앉을 줄 알았다는 듯이 수겸이 앉기 좋게 의자를 뒤로 빼주는 이정환. 굳이 이정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서, 건너편에 놓인 아까까지 본인이 마시던 잔을 손을 뻗어서 가져오는 김수겸. 이정환 잔에 술을 따라서 건네주는 김수겸. 그런 수겸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수겸의 볼에 붙은 속눈썹을 떼어주는 이정환.

진짜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래 놓고 저게 다 연기라고? 이정환은 둘째치고, 김수겸이 저런 연기를 한다고? 굳이?

현준이 수십 년간 알아 온 김수겸은 절대 그럴 인간이 아니었다. 둘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던 현준이 시선을 돌려서 거실 소파에 늘어져서 TV를 보고 있는 준섭과 호장에게로 향했다. 이정환과 김수겸이 찰싹 붙어서 저러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는 걸 보니 그들에겐 이미 익숙한 광경인 듯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현준은 안중에도 없이, 수겸이 정환에게 말을 걸었다.

“정환아. 현준이가 우리 결혼 선물 준다는데 너 뭐 필요한 거 있어?”

“음, 딱히 없는데.”

“너는 물어보면 맨날 그러더라. 이 집 살면서 바라는 게 진짜 하나도 없어?”

“물질적으로 바라는 게 없어서.”

“꼭 다른 쪽으로는 바라는 게 있는 것처럼 들린다?”

“나는 그냥…. 지금처럼 너랑 서로 편하게 이름 부르고, 힘든 일이 있을 때 같이 나눌 수 있고. 그럴 수 있으면 더 바라는 거 없어.”

끄아아아악-!

순간 거실에서 괴성이 들리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괴성의 주인공이 양팔을 벅벅 문지르며 소리쳤다.

“준섭이형, 어디서 닭털 날리는 소리 안 들려요?! 저 완전 닭살 돋았잖아요, 지금!!”

“응. 어쩐지 아까 네 입에서 닭털 뽑히는 소리 나더라.”

“준섭이형은 정말 비위도 좋네요.”

호장의 비꼬는 말투에 정환은 웃어넘겼지만, 수겸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러나 수겸은 이제 호장이 다루는 데는 정환이나 준섭만큼이나 도가 터 있었다.

“현준아. 우리 결혼식 촬영 비디오 보여줄까? 너도 기억하겠지만, 그날 축가 부르다가….”

“아악-!! 제가 잘못했어요!!!”

호장이 입막음하는 데엔 이만한 카드가 없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에서 축가 부르다가 통곡하는 호장의 모습이 가차 없이 찍힌 문제의 동영상은 지금도 호장이 자다가 이불을 걷어차게 만드는 지울 수 없는 흑역사였다. 동영상 얘기만 꺼내도 펄쩍 뛰는 호장이를 보면서 모두가 빵 터져서 즐겁게 웃었다.

이후로는 왁자지껄하게 흘러갔다. 다섯 명 모두 같은 지역 농구부 출신이기에 공유할 이야기들이 끝이 없었다. 한참을 신나게 떠들다 보니 어느새 늦은 밤이었다. 현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가 볼게. 오늘 초대해줘서 고마워.”

“그래. 다음에 또 보자.”

“조심히 들어가세요.”

“벌써 가세요? 더 놀다 가시지….”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현준이 나갈 채비를 하는데 수겸이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현준이 배웅해주고 올게.”

“응? 나 혼자 가도 되는데….”

“내 손님인데 내가 챙겨야지. 가자, 현준아.”

수겸에게 등 떠밀려 현관을 나서면서도 현준은 안절부절못했다. 뒤통수가 너무 따가웠기 때문이었다.

수겸아. 제발 네 남편 얼굴 좀 보고 얘기해라. 네가 따라 나오는 게 영 싫은 눈치잖니….

그러나 수겸은 이런 쪽으론 눈치가 꽝이었다. 현준의 만류에도 기어코 따라 나온 수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문을 닫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둘만 남게 되자 현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이정환이랑 진짜 사귀는 거 아니야? 나한텐 말해줘도 되잖아.”

“응? 아닌데? 다 연기야, 연기.”

“그래…? 난 네가 연기를 그렇게 잘하는지 몰랐네….”

메소드 연기자 납셨네, 아주.

현준이 속으로 빈정거렸다. 지금 그들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심상치가 않은데도, 끝까지 안 사귄다고 부인하는 건 현준에겐 기만으로 느껴졌다. 지들이 고등학생들도 아니고.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어른들인데 썸이라도 타는 거야, 뭐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현준은 수겸과 함께 단지 밖으로 나왔다. 미리 불러둔 택시가 때마침 도착했다. 뒷좌석에 탑승하는 현준에게 수겸이 손을 흔들었다. 현준은 무언가 말하려다 도로 입을 다물고 손만 흔들어 인사했다.

택시를 타고 아파트를 벗어나면서, 백미러에 집으로 돌아가는 수겸의 모습이 보였다. 현준은 아까 뱉으려다 만 말을 다시 떠올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혼하지 말고 둘이 잘살아도 되지 않냐는 말을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너무 오지랖인가 싶었다. 한두 살 먹은 애들도 아니고. 자기들끼리 알아서 지지고 볶고 하겠지. 현준은 뒷좌석에 몸을 기대고 편히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더는 이 정신 나간 신혼부부에게 놀아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집들이가 끝나고 돌아오는 주말, 준섭은 호장과 함께 번화가의 한 술집에 앉아 있었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탓에 그들은 아직 오지 않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을 보면서 준섭이 생각에 잠겼다.

준섭이 친구라고 자신 있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딱 두 명이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옆에 있는 호장이다. 물론 호장이는 1살 어린 동생이지만. 굳이 그들의 관계를 정의해보자면 선후배나 형, 동생보단 친구에 더 가까웠다. 아마 호장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정환이형은 조금 달랐다. 정환은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선배’였고, ‘형’이었다. 친근하고 편하지만 호장이에게 느끼는 감정과는 달랐다. 준섭은 정환을 존경하고 의지했다. 아마 호장이도 그럴 것이다.

준섭은 타고나기를 눈치가 빠르고 기민했다. 그래서 처음 정환이 수겸과 모종의 이유로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정환의 결정이 실리를 따지거나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감정에 따른 것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평소 정환은 의사 결정을 할 때 감정에 치우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준섭은 정환의 이 같은 결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몰라 불안한 마음에, 한때는 이 결혼을 막아보려고도 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준섭의 마음을 바꾼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정환이었다. 수겸의 곁에 있는 정환은 누가 봐도 행복해 보였다. 준섭은 그거면 되었다. 정환이형이 행복하다면야.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해도 상관없었다.

그래서 수겸이 2년 안으로 이혼할 거란 말을 했을 때, 진심으로 이걸 막을 순 없을까 고민했다. 남의 결혼 생활에 왈가왈부해서는 안 되지만, 그들에겐 이혼하지 않고 이대로 같이 사는 선택지도 있는데 왜 이걸 전혀 고려하지 않는 건지. 답답한 심정이었다. 짐작건대, 수겸이 이 결혼을 제안하고 정환이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수겸에겐 마음의 짐이 생긴 것 같았다. 이 짐이 항상 마음에 얹혀 있어서 수겸이 지금의 행복에 욕심내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둘 다 조금만 더 솔직해지면 좋을 텐데.

“준섭이 형, 무슨 고민 있어요?”

옆에 앉은 호장이 물었다. 생각이 깊어지다 보니 저도 모르게 심각한 표정을 지었던 모양이다. 바로 표정을 풀고 대답했다.

“별건 아냐. 그냥 정환이형이랑 수겸이형 생각이 나서.”

“아, 그 형들 진짜 웃겨요! 누가 봐도 서로 좋아 죽는 구만. 근데도 이혼하네, 마네.”

투덜거리는 호장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준섭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둘 중 한 명이라도 호장이 같은 성격이었다면 편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태산이 형은 언제 도착해요? 배고파 죽겠는데. 우리 먼저 시키면 안 돼요?!”

오늘은 준섭의 또 다른 친구와 함께 만나기로 되어있었다. 약속 시간이 다 되었는데 아직 태산이 보이지 않자 준섭이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메시지가 와 있었다.

[ T : 나 10분 정도 늦을 듯. 오는 길에 친구를 만나서.]

[ T : 친구가 너희 보고 싶다는데 같이 가도 돼?]

준섭이 미처 보지 못한 사이에 메시지와 함께 부재중 전화도 찍혀 있었다. 준섭은 당황했다. 태산이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약속 장소에 지인과 동행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아니, 그 전에 태산이한테 나 말고 친구가 또 있었나?

“아까 하던 말 말인데, 수겸이 형이 이혼하자고 하면 정환이 형은 본심이 어떻든 간에 결국엔 받아들일 것 같단 말이죠.”

호장이 옆에서 계속 떠들었지만, 준섭은 태산에게 전화를 거느라 제대로 대꾸하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통화연결음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 생각만 하면 답답해 죽겠어요. 아무리 주택 청약하려고 결혼했다고는 하지만. 굳이 2년 만에 이혼할 필요는 없잖….”

“그게 무슨 소리야? 정환이형이 뭐가 어째?”

낯선 목소리에 준섭과 호장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준섭의 눈에 먼저 띈 건, 진동이 울리는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엉거주춤 서 있는 태산이었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한껏 멋 부리며 위로 삐죽 세운 머리와 지나가다가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수려한 얼굴.

“하…. 어쩐지. 그렇게 된 거였어….”

잠시 찌푸려졌던 미간이 곧게 펴지면서 예쁜 눈매가 휘어지도록 웃었다. 그 미소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세간의 평가에서 농구선수 윤대협은 뛰어난 스코어러이자 팀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에이스로 불렸지만, 그의 진면목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준섭이 기억하고 있는 윤대협은 누구보다 상황 파악이 빠르고 코트 위 흐름을 읽는 능력이 탁월한 선수였다. 어쩌면 준섭보다도 더 기민하게.

대협과 눈이 마주친 순간 준섭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이 작은 단서만으로 이미 상황 파악을 마쳤다는 사실을.


단잠에 빠져있던 수겸은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분명 저녁 먹고 TV를 보고 있었는데, 언제 잠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소파에서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억지로 잠을 깨워서 그런 건지. 오늘따라 휴대전화 벨 소리가 더 요란하게만 느껴졌다. 누워있던 몸을 반쯤 일으켜서 지칠 줄을 모르고 울려대는 전화기에 손을 뻗었다.

“…여보세요?”

[수겸이 형-!!!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요!!! 정환이 형은 연락도 안 되고. 미치겠네, 정말-!!!]

귀청 떨어질 듯이 소리치는 탓에 수겸이 얼굴을 찌푸리며 수화기를 귀에서 조금 떨어뜨렸다. 남아 있는 잠이 몽땅 달아날 정도로 급박한 목소리였다. 호장이는 늘 시끄러웠지만. 오늘따라 배는 더 심했다.

“좀 차분하게 말할 수 없니? 왜 이렇게 흥분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지금 큰일 났어요!! 하아, 제가 좀 더 입조심 해야 했는데…!]

“뭐야? 무슨 일인데 그래?”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수겸이 자세를 바꿔 꼿꼿이 앉아서 전화를 고쳐 들었다. 이어질 대답을 기다리는데 목이 바싹 말랐다.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윤대협이 알았어요. 형들 주택청약 때문에 가짜로 결혼한 거. 윤대협이 알았다고요-!!]

그리고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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