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기뉴

밍기뉴 - 1부 : 심해기지 (2)

송태섭을 찾아떠나는 송아라의 여정. 태섭대만 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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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 심해기지 (2)


이달재

이달재가 삼촌에게 목수 일을 배우기 시작한 건 작년 봄부터였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벚꽃이 만개한 어느날 저녁, 출퇴근길마다 스쳐지나가던 가구점을 보고서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게 전부였다. 이달재는 일주일에 걸쳐 앞으로의 일을 계획했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기다렸다는듯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맨땅에 박치기로 배우기 시작해 몇 달 동안은 24시간이 모자를 정도로 바빴다. 오전엔 현장에서 잡다한 일을 하며 경험을 쌓았고, 오후에는 학원을 다녔다. 집으로 돌아와 학원에서 내준 과제를 하다보면 자정이 훌쩍 지나있곤 했다. 현장에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할 때도 적지 않았다. 오래전 부활동으로 새벽 훈련을 했던 습관이 남아있던지라 이달재는 녹초가 되어도 아득바득 일어났다.

설계도를 그리는 것부터 조립과 마감까지 전부 제 손으로 해내야한다는 건 까마득하고도 보람찼다. 이달재는 애매하게 남은 자재들을 챙겨 이것저것 시도했다. 의외로 작은 것들이 품이 더 들었다. 미세하게 맞지 않는 걸 모른 척하면 나중엔 아귀조차 맞지 않았다.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는 건 농구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이달재는 이 일을 상당히 오랫동안 하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송아라와 이달재의 만남은 오후 2시에 잡혀 있었다. 4개월만이었다. 이달재와 송아라는 각자 받은 송태섭의 근황을 서로 교환하곤 했다. 송태섭은 약속이나 한듯이 가족에게 보내는 것과 비슷한 횟수로 이달재에도 연락을 했다. 그가 이달재와 송아라가 비밀리에 정보교환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정보 교환이라고 해봐야 송태섭이 보낸 경기 테이프 중 다른 게 있는지, 보내온 다른 선물은 뭔지, 부탁 받은 게 있다면 무얼 요청했는지 정도였다. 송태섭이 얼마나 자주 연락하느냐에 따라 송아라와 이달재의 연락 빈도도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송태섭이 이달재에게 마지막으로 소식을 전한 건 4개월 전으로, 그다지 드문 간격은 아니었다. 시즌이 바빠질 때면 으레 있는 일었다. 이달재는 그런 송태섭에게 섭섭하긴 커녕 자랑스러웠다. 10여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그의 친구라는 점이 이달재에게 큰 동기부여가 됐다. 머나먼 타지에서 바쁘게, 또 열심히 살아가는 제 친우처럼 자신도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해왔다.

이달재가 송아라에게 연락을 받은 건 한 달 전이었다. 그날은 이달재가 삼촌에게 개인 제작을 허락받은지 두 달여만에 처음으로 의뢰를 받은 날이기도 했다. 고객은 이사를 앞둔 어느 신혼부부였다. 그들은 티크 나무로 만든 화장대를 주문하며 거울을 달지 않는 대신 거울을 세워둘 홈을 만들어줄 수 있냐고 물었다. 이달재는 제게 과분한 의뢰가 아닌가 싶어 갈등했으나 결국 의뢰를 받아들였다. 긴장 반 기대 반으로 하루를 보내고 곯아떨어지기 직전 송아라에게 연락이 왔고, 그녀의 서프라이즈 대작전을 들었다. 아라야, 정말 멋진 생각이야! 그는 오던 잠도 도망갈 정도로 격하게 호응했다.

공방이 교외에 있어 이달재는 동네에서 만나자고 했지만 송아라는 그가 일하는 곳을 구경해보고 싶다고 했다. 어수선할 텐데 괜찮겠어? 먼지도 엄청 날려서 마스크를 써야할지도 몰라. 이달재의 걱정에도 송아라는 자긴 끄떡없으니 얼른 주소를 알려달라며 재촉했다. 성화에 못 이긴 이달재는 결국 주소와 차편을 알려주었다.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서 공방까지 5분 차로 이동해야하는지라 이달재가 마중나가기로 했다. 이달재는 삼촌의 소형 트럭을 몰고 송아라가 도착하는 시간보다 20분 이르게 정류장에 도착했다. 정류장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룸미러로 제 얼굴을 살폈다. 머리는 분진이 내려 앉아 부옇고 이마 선을 따라 미처 닦아내지 못한 땀이 맻혀 있었다. 입고 있는 티셔츠가 땀에 절지 않았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손으로 머리를 털고 어깨에 걸친 타월로 얼굴을 훔치자 그나마 양호한 상태가 되었다. 퇴근하고 만났다면 말끔한 모습으로 만났을 텐데, 송아라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정각 까지 초침 두 바퀴를 남겨뒀을 즈음 먼발치서 마을버스가 왔고 정류장에 다다르자 낯익은 인영이 보였다. 송아라였다. 이달재는 트럭에서 내려 송아라를 큰 목소리로 불렀다. 아라야-! 미처 듣지 못한 건지 송아라가 두리번거렸다. 이달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한 번 더 그녀를 불렀다.

“아라야, 여기!”

무채색에 가깝던 송아라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이달재가 다시 시동을 거는 사이 송아라가 옆에 와 있었다. 송아라는 낡은 야구 점퍼를 입고 있었다. 몇 년 전 송태섭이 미국 빈티지 샵에서 샀던 것으로, 송아라가 미국에 놀러갔을 때 몇 번 빌려 입었더니 그냥 가져가라며 내줬다고 했다. 송아라는 당시 송태섭의 말투가 언짢게 들렸는지 이달재에게 속상한 마음을 토로했지만, 어디로 보나 그의 취향 범벅인 점퍼는 분명 아껴입었을 모양새라 여동생을 어지간히 아끼는구나 싶었다.

“오빠 이제 정말로 목수 같아요!”

“그렇게 보인다니 다행이다.”

트럭에 올라탄 송아라는 들뜬 표정으로 차 내부를 살폈다. 오빠 차예요? 아니, 삼촌 거야. 너 데리러 간다고 빌렸지. 그렇구나. 싱거운 대화가 오갔고 이달재는 익숙하게 트럭을 운전했다. 가게에 납품하지 않을 땐 직접 배달을 가다보니 기사 노릇도 요령이 붙었다. 비포장 구간을 지날 때마다 룸미러에 달린 마네키네코 장식이 대롱대롱 흔들렸다.

“요즘도 많이 바빠요?”

“이젠 나름 여유 있어.”

“헤에.”

“왜그래?”

“눈밑에 다크서클이 안녕하길래요.“

“하하.”

이달재는 구경도 할 겸 가볍게 한바퀴 돌자고 했다. 공방은 흡사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 같았다. 내부에선 온갖 종류의 소음이 난무했다. 합판을 자르고, 갈고, 두드리는 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대화를 하려면 웬만한 목소리론 어림도 없었다. 이달재는 커다란 목재가 쌓여있거나 절단기가 있는 곳엔 송아라를 데려가지 않았다. 이따금 주변에서 송아라를 보고 누군지 물어올 때마다 이달재는 큰 목소리로 '친한 친구의 여동생'이라 소개했다. 심지어 그의 삼촌은 송아라를 처음 보는데도 아는 체를 했다. 아, 태섭이 동생이야? 송아라는 그 물음이 반가웠는지 되물었다. 우리 오빠를 아세요? 이 놈이 원체 친구 자랑을 해서 말이지. 그정도는 아니에요, 삼촌. 이달재가 머쓱하게 대답했다. 아니긴, 우리 가족 중에 태섭이 모르는 사람이 없어. 위기를 느낀 이달재는 송아라를 데리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달재 오빠 덕분에 우리 오빠 유명인사 다 됐네요. 송아라의 짖궂은 말에 이달재는 쩔쩔 매면서도 부인하지는 않았다.

“안쪽에 사무실이 있어. 영상은 거기서 찍자.”

“응.”

편의상 사무실은 멀지 않은 곳에 있지만 이중으로 문을 닫을 수 있어 그런대로 소음이 차단됐다. 이달재는 송아라를 손님 맞이용 간이 소파에 앉도록 했다. 별도의 휴게실은 없지만 사무실 한구석에 탕비실처럼 꾸린 공간이 있었다. 처음엔 전기포트와 유통기한이 지난 티백 몇 개가 전부였던 자리였다. 이달재가 짬짬이 한입에 먹기 좋은 간식 몇가지를 사서 가져다 놓자 다른 사람들도 집에서 먹지 않는 차나 과자를 조금씩 내놓았다. 얼마뒤 이달재의 삼촌은 유성매직으로 '탕비실'이라고 쓴 나무패를 가져와 천장에 달았다. 그냥 휴게실 하나 만들어주시면 안 됩니까. 몇몇 직원들이 진담을 섞은 농담을 던졌으나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었다.

“녹차 줄까? 오렌지 주스도 있어.”

“녹차요.”

전기포트에는 뜨끈한 물이 절반 넘게 있었다. 이달재는 가장 사용감이 적은 도자기 컵을 꺼내 물을 부었다. 티백을 넣어 우러나오는 색이 진해질 즈음 티백은 조그마한 목재 접시에 따로 두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예쁜 풀빛이 담긴 컵이 송아라의 손으로 옮겨졌다. 이달재는 예의 탕비실로 돌아가 간이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냈다. 그리곤 종이컵을 오렌지 주스로 한가득 채운 후 송아라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태섭이한테 연락 온 거 있어?”

“지난주에 잠깐 통화했어요.”

“그래?”

“잘 지내고 있대요. 뭐어, 오빤 늘 바쁘니까.”

“쉬어가며 해도 좋을텐데.”

“그쵸?”

“만나면 혼쭐내줘. 무리하지 말라고.”

“당연하죠!”

기세 좋게 말했지만 이달재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몸을 두 개로 쪼갤 순 없으니 제일 먼저 뒷전으로 밀려나는 건 식사와 수면이었다. 송아라의 말마따나 안녕한 다크서클을 본다면 송태섭은 뭐라고 말할까. 이달재는 가깝고도 먼 친구의 얼굴이 새삼 보고 싶었다.

녹차에서 피어오르던 김이 거의 사라질 즈음 캠코더가 모습을 드러냈다. 송아라가 이를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며 캠코더를 조작할 동안 이달재는 남은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눈으로는 캠코더를 쫓았다. 말랑해보이는 에폭시 스티커와 종이 스티커가 골고루 붙어있는 캠코더였다. 닳고 닳은 핸드 스트랩이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데 뭔가 잘 안 되는지 송아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라, 왜 이러지?”

“잘 안 돼?”

“화면이 이상해요. 엄청 지지직거리고….”

“잠깐 줘볼래?”

캠코더를 건네는 송아라의 표정은 거의 울상이었다. 이달재는 침착하게 LCD 화면부터 확인했다. 정말 송아라의 말대로 화면이 제대로 출력되지 않고 있었다. 전원을 껐다키고 리셋 버튼도 눌렀으나 화면은 그대로였다. 설마 못 쓰는 건 아니겠죠? 송아라는 이달재가 여태까지 봐온 이래 가장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 으음. 이달재는 짧게 신음했다. 아. 무언가 떠오른듯 이달재가 작게 유레카를 외쳤다. 너무나 단순해서 잊었던 문제였다.

“아라야, 혹시 크리닝 테이프 있어?”

“잠시만요. 비슷한 걸 본 거 같아요.”

송아라는 아예 캠코더 가방을 통째로 꺼내 탈탈 털었다. 이달재는 캠코더에 내장된 테이프를 꺼내고 크리닝 테이프로 바꿔 넣었다. 테이프가 돌아가는 동안 이달재와 송아라는 약속이나 한듯이 입을 다물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작업장 소음과 캠코너 내부에서 돌아가는 모터 소리만이 사무실을 채웠다. 이달재는 벽시계를 보고 시간을 가늠하다 원래 테이프로 교체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모터 소음이 줄어든 듯했다. 다시 뜬 화면은 노이즈 없이 깨끗했다.

“이제 잘 나오는 거 같아.”

“정말요!? 아-, 다행이다.”

휴우, 송아라는 멀쩡해진 화면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달재는 캠코더가 오래된 만큼 테이프도 금방 손상될 위험이 있으니 복사본을 만들어두는 편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의 조언에 송아라는 십분 동의했다.

소소한 난관이 있었지만 이달재의 영상 편지는 별탈없이 담겼다. 만일을 대비해 이달재와 송아라는 방금 찍은 영상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자그마한 화면 속 채 가리지 못한 이달재의 다크서클을 가리키며 둘은 한참 웃었다.

이달재는 송아라를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훤한 대낮이고 길도 단순해서 천천히 걸어가면 된다며 송아라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이달재는 완고했다. 마지못해 조수석에 탄 송아라는 마네키네코를 보며 물었다. 이거 오빠가 만들었어요? 이달재는 짐짓 놀란 표정으로 어떻게 알았냐고 했다.

“제가 눈썰미가 좋잖아요.”

송아라가 활짝 웃었다. 그녀의 머리에도 어느새 부연 나무 가루가 내려 앉아 있었다. 이달재가 물티슈를 건넸으나 송아라는 괜찮다며 창문을 열고 손으로 앞머리를 대충 털었다.

송태섭을 포함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달재는 항상 송태섭이 걱정됐다. 인생의 3분의 1을 미국에서 보냈으니 자리잡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는 걸 아는데도, 쉬이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학창시절 그의 방황을 가까이서 지켜봤기에 더욱 그랬다. 그는 제 코가 석자일 때도 송태섭의 안부는 놓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믿었다. 송태섭은 어디서든 잘 지낼 거라고. 자신이 아는 송태섭은 아무리 힘들어도 기꺼이 헤쳐나오는 사람이니까.

고등학교 1학년 끝자락 무렵, 이달재는 송태섭이 사고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늘 그랬듯 땡땡이를 친 줄만 알았던 그가 사고를 당했다니. 이달재는 반신반의 하면서도 담임 교사에게 물어 수업이 끝나자마자 병원으로 찾아갔더랬다. 쉽게 만날 수 있을거라 예상했으나 병원에선 쉽사리 허락해주지 않았다. 환자분 가족이 아니시면 만나기 힘들어요. 잠깐만 만나게 해주세요, 제발요. 안 된다니까요. 앗, 달재 오빠다! 아라야! 간호사와 실랑이를 벌이던 중 송아라를 만나 겨우 병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송태섭은 목깁스를 차고 머리에 둘둘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는 몰골은 엉망인 주제에 반갑게 인사했다. 달재 네가 웬일이냐며,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이달재는 일순 가슴이 철렁했다. 자칫 친구를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 두려움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달재는 송태섭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으면 바로 올 거지? 농구하러.

"다음주지? 미국 가는 거."

"네."

"짐은 다 쌌어?"

"거의요."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태섭이한테 안부 전해줘."

"응."

금세 정류장 앞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가 왔다. 송아라는 버스에 오르기 전 이달재가 탄 트럭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달재도 손을 마주 흔들었다. 송아라는 참 좋은 동생이다. 이달재는 송태섭에게 송아라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시일은 걸렸지만 이달재는 첫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신혼부부가 이사한 집은 햇빛이 아주 잘 드는 2층짜리 주택이었다. 그들은 화장대를 보고서 기분 좋은 미소를 짓더니 서로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면서 다음에도 부탁하고 싶다며 이달재에게 명함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달재는 늘 품고 다니기만 했던 명함을 처음으로 내밀었다.

누구나 처음이 있기 마련이다. 흐름을 만드는 건 기다림이 아니라 나아가는 의지였다. 이달재는 얼굴조차 보기 힘든 오랜 친우에게서 그걸 배웠다. 그러니 믿는다. 우리는 잘 해나가고 있다고. 송태섭은 송태섭의 자리에서, 이달재는 이달재의 자리에서.




정대만

정대만은 한 달째 농구를 쉬고 있다. 원인은 교통사고였다. 출근길에 졸음 운전 차량이 뒤에서 들이박았다. 그는 주로 자전거와 버스를 번갈아 애용했는데, 주차장에 방치해둔 차가 마음에 걸려 간만에 기름칠 좀 해주려다 화를 입었다. 앞 범퍼는 완전히 박살 났고 본네트는 구겨진 신문지가 되었다. 뽑은 지 겨우 반 년밖에 되지 않았던 차는 폐차 판정을 받았다. 수리가 불가능하진 않으나 새차를 뽑는 것과 금액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부연설명을 듣고 정대만은 깔끔하게 놓아주기로 했다. 부모님께 받은 낡은 차를 벗어나 큰 맘 먹고 들였건만, 정대만의 애마는 여행다운 여행 한 번 함께 하지 못하고 폐차장으로 가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처참한 꼴이 된 자가용에 비해 정대만은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는 거였다. 약간의 타박상을 제외하곤 큰 이상이 없었다. 가장 우려스러웠던 왼쪽 무릎도 건사했다. 기적까지는 아니어도 일 년 치 운을 다 끌어다모은 수준은 되었다.

사고를 낸 운전자는 회사에서 사흘 밤낮을 시달린 직장인이었다. 정대만은 적당한 합의금을 받고 끝냈다. 딱히 가해자를 배려한 건 아니었다. 보험처리도 잘 되었고, 그다지 아픈 곳도 없는데 악착같이 치료비를 뜯어내거나 지지부진하게 사건을 끌긴 싫었다.

이주일 휴식 후 정대만은 바로 복귀했다. 몸은 괜찮냐는 말을 질릴 정도로 들었던 정대만은 자신이 멀쩡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쉬는 동안에도 틈틈이 근처 공원에 나가 연습을 했던 터라 슛감도 여전했다. 봤냐! 나 완전 괜찮다니까! 자신만만하게 외친 정대만은 그 말을 끝으로 코트에서 쓰러졌다.

정신을 잃진 않았기에 정대만은 제 발로 병원에 찾아갔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도 중간중간 어지러워 쉬었다 가길 반복했다. 정대만은 덜컥 겁이 났다. 깊은 곳에 잠들어있던 고통이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의사는 으레 있는 일이라고 했다. 교통사고 후유증이 시간차를 두고 온 것일 뿐이란다. 다만 이런 경우엔 증상이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며 재검사를 권했다.

검사 결과 세 번째와 네 번째 경추 사이에서 이상이 발견됐다. 미세한 디스크 탈출이 있었다. 의사는 무심코 지나쳤을지도 모를 증상에 대해 설명할 때마다 정대만은 없는 통증까지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치료기간은 4주 더 추가되어 도합 전치 6주가 되었다. 운이 나쁘면 반년 넘게 증상이 지속되기도 합니다. 신경써서 관리하셔야 해요. 그 말은 즉슨 관리를 잘 해도 운이 나쁘면 오래 간다는 뜻 아닌가. 정대만은 속으로 비아냥거리면서도 굳이 입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런 이유로 정대만에겐 강제 휴가령이 떨어졌다. 재활 집중. 개인 훈련 일절 금지. 다소 박한 처사였지만 정대만은 토달지 않았다. 그는 똑같은 실수를 하기 싫었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을 때까지 할 수만 있다면 고분고분한 환자가 되는 것 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정대만은 부지런히 재활 치료에 임했다. 전조 없이 두통이나 구역감을 동반한 현기증이 때때로 몰려오긴 했지만 누워서 휴식을 취하면 금세 가라앉았다. 확실히 격한 운동을 하지 않으니 쓰러지는 불상사는 없었다. 하나 회복이 빠르다고 해도 경기 중에 증상이 나타난다면 치명적이라는 건 여전했다. 운이 나빠질 일은 절대 없어야 했다.

안도와 불안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외줄타기 하듯 신경이 곤두서 있다보니 기분 환기가 간절했고, 만만한 게 본가로 가기였다. 정대만은 부모님께 언질도 드릴 겸 안부차 전화를 걸었다. 한데 그의 어머니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어떤 여자애에게 전화가 와선 정대만을 찾았다는 거다. 네 고등학교 후배의 여동생이라던데... 자기가 연락한 거 너한테 꼭 전해달라고 하더구나. 어머니의 상기된 목소리에 정대만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멍하니 서있었다. 후배의 여동생? 정대만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여동생이라곤 채소연밖에 없었다. 하지만 채치수가 그녀의 오빠라는 점에서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

"이름이 뭔데요?"

- 송아라. 송아라라고 했어.

"처음 듣는 이름인데..."

- 아무튼 한 번 연락해보렴.

정대만은 대충 수긍하며 연락처를 받아적은 뒤 통화를 끝마쳤다. '송아라'라... 진짜 모르겠는데. 영걸이한테 물어봐? 아냐, 좀 더 원론적으로 접근해보자. 여동생이라고 했으니까 성씨도 같겠지. 송 아라. 이름이 '송'으로 시작하는 후배가... 아!!! 정대만은 그제서야 한 인물을 떠올렸다.

먼발치에 있던 기억이 빛의 속도로 정대만을 향해 날아들었다. 왜 단박에 떠올리지 못했을까. 송태섭.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녀석의 존재를.

정대만과 송태섭이 함께한 시간은 열두달도 안됐지만, 시간 제약 따윈 거뜬히 뛰어넘을 만큼 많은 걸 함께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슬린다는 이유로 죽어라 치고 박고 싸웠던 원수 지간으로 시작해 없으면 아쉬운 사이가 되었으니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그에게 송태섭은 단순한 '고등학교 후배'가 아니었다. 비록 지금은 연락 한 번 오가지 않는 사이가 되었지만 말이다.

정대만의 기억 속에서 송태섭은 알면 알수록 신기한 놈이었다. 마냥 시원스러운 놈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섬세한 면이 많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의외의 면모를 발견할 때마다, 정대만은 송태섭 답지 않아서 송태섭 같다고 생각했다.

정대만은 잠겨있던 송태섭의 얼굴을 천천히 떠올렸다. 제일 먼저 그려지는 건 적정선을 모르는 삐딱한 짝짝이 눈썹이었다. 그놈의 짝짝이 눈썹이 처음엔 얼마나 거슬렸던지. 정대만은 무심결에 검지로 삐쭉한 눈썹 모양을 그렸다. 눈썹만 달린 흐릿한 실루엣이 완성됐다. 키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저보다 한참 작았다. 그런데도 저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들게 했다. 건방지게 귀에 피어싱을 달고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헤어왁스로 머리를 바짝 올리고 다녔다. 삐죽 튀어나온 입술은 또 어떻고.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채우자 낯익은 얼굴이 완성됐다. 마지막으로 본 게... 5년 전이었나. 이한나 옆에 찰싹 달라붙어선 헤실거렸지. 지금도 미국에서 지내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날 저녁 정대만은 바로 송아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길지 않았다. 여보세요? 가볍고 나긋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정대만이라고 합니다. 혹시 ‘송아라’라는 사람 있습니까? 정대만은 뒤늦게 자신이 송태섭의 선배라는 것부터 소개할 걸, 하고 후회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 말하기에도 애매해서 잠재코 반응을 기다렸다. 정말 오빠가 ‘정대만’이에요? 약간의 틈을 두고 상대방이 물어왔다. 정말로 정대만이냐니. 정대만의 대답은 단연 하나였다. 어, 내가 정대만이야.

송아라는 송태섭의 여동생이 맞았다. 한때 그렇게 붙어다녔는데 정작 송태섭에게 여동생이 있는지도 몰랐다니. 이제 와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우습지만 정대만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송태섭을 위한 영상 편지. 그게 송아라가 연락한 이유였다. 그녀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담아 깜짝 선물로 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먼저 찍은 사람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정대만을 은근히 부추겼다. 전부 반가운 이름이었다. 정대만은 달리 고민하지 않고 승낙했다. 마침 쉬고 있는데다, 정성 가득한 선물에 도움이 된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약속은 속전속결로 잡혔다. 가능하면 빨리 만나고 싶다는 송아라의 요청 때문이었다. 정대만은 본가에 내려가는 날짜를 하루만 앞당기기로 했다. 웬일이니, 네가 일찍 내려온단 소릴 다 하고. 어머니의 은근한 물음에 정대만은 약속 때문이라고 간단히 요약했다.

“안녕하세요!”

“여어, 안녕.”

송아라와 정대만이 만난 곳은 후지사와역에서 멀지 않은 돈가츠 가게였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시간이라 가게 안은 텅텅 비어 있었기에 서로를 금방 알아봤다. 메뉴를 시키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식전 샐러드가 먼저 나왔다. 샐러드라고 해봤자 채썬 양배추에 소스를 뿌린 게 전부였다.

송태섭을 닮은, 낭랑한 목소리의 여자. 쉽사리 상상이 가지 않았지만 막상 보고 나니 충분히 가능한 조합이라는 걸 깨달았다. 목소리처럼 상당히 앳된 외모였고, 이목구비는 송태섭과 비슷했으나 짝짝이 눈썹은 아니었다.

“우리 오빠랑 많이 친했어요?”

“그랬...지?”

정대만은 저도 모르게 끝을 올렸다. 친했지. 적어도 정대만은 그렇게 생각했다. 여동생이 있다는 것도 최근에야 알았지만, 그렇다고 송태섭과 함께한 시간이 희석되는 건 아니었다. 고작 서운함따위론 절대 부술 수 없는 단단한 유대가 있었다.

그럼에도 송태섭과 정대만의 연결고리는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에서 끝났다. 변치 않는 건 없다. 세월이란 그런 것이다. 거리가 시간을 만들고, 시간이 거리를 만든다. 씁쓸하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오빤 고등학교 다닐 땐 학교 얘길 거의 안 했거든요.”

송아라의 멎쩍은 미소를 마주한 순간 정대만은 급격한 껄끄러움을 느꼈다. 정대만에게 저보다 어린 여자를 상대하는 건 드문 일도 아닐 뿐더러 불편하다고 여긴 적이 없는데도 그랬다. 송아라가 다른 이들에 비해 유별난 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체 이 기분은 뭘까. 머리가 복잡해진 그와 달리 송아라는 태평하게 젓가락으로 샐러드를 집어 먹었다.

“오히려 미국에 가고나선 편지로 많이 얘기해줬어요.”

“그러냐.”

“고등학교 때 오빠는 어땠어요?”

“응?”

“그냥 궁금해서요.”

그냥 궁금하다니. 껄끄러움에 묘한 시기감이 더해졌다. 정대만은 혼란한 마음을 어떻게든 내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송아라와 통화했을 때 이 기분을 느꼈다면 정대만은 약속을 잡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만났고, 결정을 무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태섭이는….”

정대만은 최대한 말을 골랐다. 고르려고 했다.

“주먹이 장난 아니었어.”

젠장. 망할 주둥이가 먼저 움직이고 말았다. 정대만은 소리 없이 절규했다. 하필 앞니가 시큰거릴 게 뭐람. 그렇다고 짝짝이 눈썹이 별로였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네 오빠한테 맞은 적 있거든.”

“우리 오빠한테요? 오빠가요?”

“그 때 내가 좀... 잘못해서.”

정대만은 한박자 늦게 말을 아꼈다. 딴엔 분위기를 푼답시고 덧붙인 말이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패스를 잘 했다고 할 걸. 몸을 움직이는 속도도 판단 능력도 엄청나게 빠르고 센스가 좋아서 믿음직 했다고. 뒤늦게 BQ가 작동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애써 태연한척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래도 잘 화해했어. 네 오빠가 사과도 받아줬고.”

“그렇구나.”

“이제 10년도 더 된 일이니까….”

그때였을까. 찰나였지만 정대만은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혹시 가게 문이 열려있는 건가 싶어 뒤를 돌아봤다. 문은 얌전히 닫혀있었다. 정대만은 다시 송아라를 마주봤다. 서늘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훈훈한 온기만 남아 있었다.

“이제 나오나 봐요!”

갓 튀긴 돈가츠로 채워진 정식이 차례로 송아라와 정대만의 앞에 놓였다. 절인 양파와 된장국이 더해진 구성이었다. 송아라는 늦은 아침을 먹은 탓에 많이 배고팠다며 바로 젓가락을 들었다. 영상 편지는 다 먹고 찍어요. 달짝지근한 소스가 뿌려진 돈가츠 한 조각이 송아라의 입으로 들어갔다. 정대만도 제일 큰 조각을 집어 먹었다. 튀김옷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며 육즙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송아라와 달리 제때 점심을 먹었는데도 잘만 들어갔다.
접시가 거의 비워질 즈음 송아라는 가방에서 캠코더를 꺼냈다. 상당히 오래된 모델이었다. 누가봐도 여자애가 골랐을 것만 같은 스티커가 군데군데 붙어있었다. 저거 제대로 켜지긴 하려나. 정대만의 우려와 달리 캠코더는 송아라의 손에서 원활히 작동했다.

“그걸로 찍어?”

“네.”

촬영 장소는 달리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정대만은 종이 냅킨으로 한 번 더 입가를 닦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는 영상에 담을 내용을 전혀 준비해오지 않았다. 고민을 안 한 건 아니다. 종이를 펼칠 때만 해도 시간이 모자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만큼 할 말이 많았다. 한데 막상 펜을 쥐니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무수히 떠오르던 말 중 어느 하나도 문장으로 옮길 수 없었다. 결국 송태섭에게 보낼 편지 겸 대본은 '오랜만이다' 에서 멈춘 채로 그대로 책상에 방치됐다.

“오빠가 준비 됐다고 하면 시작할게요.”

정대만은 내심 강제로 시작되길 바랐으나 송아라는 예의바르게 그의 신호를 기다렸다. 시작을 미뤄봐야 막막해질 뿐이라 별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편하게 말하시면 돼요, 편하게! 저 말이 도리어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송아라는 거듭 편하게 하라 일렀다. 그녀의 눈에 어지간히도 뻣뻣해보이나 싶었다.

촬영이 끝난 후 정대만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시스템이 초기화된 컴퓨터처럼 머릿속에 새하얬다. 정대만이 제 파트를 한 번 볼 수 있냐고 물었으나 송아라는 단호히 거절했다. 이유를 묻자 다른 사람들도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찍은 걸 보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까지 하는가 싶었지만, 재차 묻지는 않았다.

송아라는 다가오는 주말에 미국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송태섭에게 두 손으로 직접 전해줄 계획이란다. 엄청 정성이네. 송태섭 이 자식, 복 받았구만. 정대만은 내심 감탄하며 접시에 남은 소스를 괜히 숟가락을 긁어모았다. 접시 한가운데에 생겨난 울퉁불퉁한 갈색 동그라미를 지켜보던 송아라가 있잖아요, 하고 조심스레 운을 뗐다.

“저랑 같이 가실래요?”

“어디를?”

“미국이요.”

“미국?”

“네.”

“너랑? 내가?”

"응."

정대만은 말문이 막혔다. 얘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만난 지 겨우 반시간된 사람과 여행을 가자니. 그것도 비행기를 타고 하루종일 타고 가야할 나라에! 거기다 본인이야 친오빠를 만나러 가는 거겠지만 나는 만난지 5년도 넘은 후배를 만나러 가는 건데? 다른 가족들은? 혹시 내가 허우대만 멀쩡한 백수로 보였나?

“진짠줄 알았어요? 농담이었는데!”

크게 곯렸다고 생각했는지 송아라가 꺄르르 웃어댔다. 정대만이 느끼기에 송아라의 표정은 전혀 장난스럽지 않았다. 위화감의 정체를 알려면 송아라에게 묻는 게 가장 빠르겠지만, 정대만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오락가락하는 몸뚱이 때문에 예민한데 피곤한 일을 만들기 싫었다. 정대만은 자기도 농담인 줄 알고 있었다며 능청스레 받아쳤다. 그렇게 파격적인 화제는 싱겁게 끝났다.

헤어지기 전 송아라는 개인 연락처를 교환하자고 했다. 그다지 연락할 일이 없을 테지만 정대만은 사양하지 않았다. 오빠한테 무사히 전하면 연락 드릴게요! 휴대폰을 돌려주며 송아라는 해말간 미소를 지었다. '무사히'? 뜬금없지만 멀리 가니 할 법한 말이긴 했다.

집으로 돌아온 정대만은 간만에 고등학교 동창인 권준호에게 연락했다. 권준호, 잘 지내냐? 오랜만이다, 대만아. 제수씨는 좀 어떠냐? 이제 2주도 안 남아서 걱정이 많긴한데, 그래도 괜찮은 거 같아. 그래? 너는 요즘 어때? 오늘 송태섭 여동생을 만났어. 아라 말이야? 어. 그럼 너도 영상 편지 찍었겠네. 뭐, 그렇지. 뭐라고 얘기했어? 그냥 이런저런 얘기했지, 그러는 너는? 나도 이런저런 얘기. 안 알려주겠다 이거지? 하하, 사돈남말 하시네. 좋은 소식 있으면 꼭 연락해라. 그래. 통화는 금세 막바지였다. 사실 정대만이 전화를 건 이유는 따로 있었다. 권준호가 이제 끊을게, 하고 완전한 종료를 선언하려는 찰나 정대만이 다급히 붙잡았다.

“준호야, 하나만 물어보자.”

- 응? 뭔데?

“넌 괜찮았냐? 그, 여동생 만났을 때….”

- 괜찮았는데.

“별말 없었어?”

- 딱히? 왜?

“그냥. 궁금해서.”

- 실없긴. 아, 와이프가 나 찾는다. 정말로 끊을게.

“어어, 들어가라.”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이 하루가 끝났다. 약속은 지켰고, 정대만이 송태섭을 위해 해야할 일은 더이상 없었다. 그걸로 됐지. 정대만은 찝찝한 상념은 집어치우기로 했다.

정대만은 그날 밤 꿈을 꿨다.

꿈 속의 정대만은 치렁치렁한 단발머리를 하고 오른손엔 마른 물밀대를 쥐고 있었다. 농구부를 없애버린답시고 떼거지로 쳐들어가 깽판을 쳤던 순간으로 돌아간 것이다.

부탁이니 모두 데리고 돌아가줘, 정대만 선배. 꿈 속의 송태섭이 말했다. 어울리지 않게 정중한 얼굴. 정대만은 돌아가달란 말이 거슬렸다. 짜증났다. 분했다. 하다하다 별 같잖은 놈들까지 저를 몰아낸다고 생각했다. 난처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이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바보같은 놈들. 소중하다고 해봤자 무릎이 갈리면 끝이야. 네가 소중하다고 여긴다고 해서, 소중한 것들도 너를 소중히 해줄 거라는 기대는버려리라고. 정대만은 마음껏 횡포 부렸다. 침을 뱉고, 들이박고, 내려치고, 달려들었다. 그리하면 속이 시원해질 줄 알았다. 한데 개운해지긴 커녕 갈수록 비참해졌다. 마음이 난도질 당하는 것처럼 아팠다. 차라리 불을 지를까? 새까만 재가 되어서 눈앞에서 사라지면 아무도 못 할 테니까.

아무도…. 아무도…. 나마저도 영영…….

철 좀 들어라, 정대만. 권준호의 일갈이 꽂혔다. 연이어 채치수의 솥뚜껑 같은 손이 얼굴에 날아들었다. 상처와 피로 범벅이 된 얼굴보다 명치 뒤에 숨은 심장 언저리가 아팠다. 정대만이 가장 하고 싶었던 건, 소중한 걸 부수는 게 아니었다. 소중한 걸 소중하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걸 인정하는 게 너무나 무섭고 겁이 났다. 개미지옥 같았던 과거로 몇 번이고 돌아가 두 번 다시 헤어나오지 못 하게 될까봐.

그렇게 정대만은 돌려받고, 얻어맞고, 오열하고, 무릎을 꿇었다. 농구가 하고 싶어요. 가장 비참하고 무겁고 요원했던 여덟 개의 음절이었다. 연극의 막이 내리듯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만일 제가 저지른 일이 이변 없이 진행됐다면, 농구부가 정말로 사라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일어나지도 않았던 일을 가정하는 것 만큼 시간 낭비인 건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만약 그랬다면 정대만은 여전히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의 정대만은 일말의 부채감도 갖고 있지 않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기 때문이었다. 정대만은 자신할 수 있었다. 그저 짐을 덜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자신이 오래도록 갈망한 것이었고, 최선의 최선을 쏟아부었기에.

한데 이 기분은 뭐지. 정대만은 제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묵직하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문득, 지금 저를 괴롭히는 괴상야릇한 감정이 송아라를 만났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끝에 송태섭이 있었다. 누구보다 과거에 얽매이는 건, 바로 당신이잖아. 언젠가 송태섭이 제게 했던 말이 선명하고 온전한 형태로 머릿속에 박혔다. 이상하게도 정대만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다른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저를 얽매고 있는 과거따윈 없었다. 아직 잠이 덜 깬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이 적기인 건 확실했다. 오만에 가까울지도 모르나, 하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다.

정대만은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상대방이 받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예감은 적중했다.

- 여보세요?

“나 정대만인데. 너 미국에 언제 간다고?”





그리고 송아라

송태섭의 부재를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송아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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