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드림

[태웅주영] Once upon the day

로판au 11살 탱쥬의 첫만남

하얀 건물 밖으로 훌쩍한 키의 소년이 걸어 나왔다. 줄곧 자리에 앉아있느라 굳어진 몸을 쭉 뻗고 잠시 볕을 즐기던 소년은 문득 주변을 돌아보았다. 쫓아오는 어른은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다. 망설임을 덜어낸 발걸음이 넓게 펼쳐진 숲을 향해 가볍게 내달리고, 햇살 속에 윤기를 내는 머리칼이 바람을 따라 흩어졌다.



그러니까 지금 이곳은 대대로 뛰어난 마법사를 배출해온 집안의, 뭐였더라, 첫째인지 둘째인지, 아니면 막내랬던가? 잘은 모르겠지만 그쪽으로는 이름만 들어도 안다는 집안의 어느 가족에게 연이 닿아 초대받은 참이었다. 덕분에 마법에 꽤나 능통한 어머니는 저택의 주인과 부단히도 이야기꽃을 피우고, 아버지는 언제나 그렇듯 어머니의 성이 찰 때까지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중이었지만…….

서재 구석에 끌밋한 용모가 아름다운 소년의 관심은 낯선 저택 어디에도 자리 잡지 못하고 새파란 하늘의 구름처럼 둥실거렸다. 아이들이 있다더니, 다들 어디로 도망간 거야?

마법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으나 또래의 소년이 있다는 말에 검술 대련이라도 신청할 요량으로 졸린 눈을 비비며 따라왔건만. 저를 데려가려는 어머니의 과장이었는지 도착한 이래로 남자아이의 'ㄴ'자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복잡한 도식을 가득 늘어놓은 채 펼쳐지는 어른들의 열띤 토론을 듣고 있자니 기껏 쫓아냈던 잠이 창조처럼 밀려들었다. 이럴 시간에 나가서 말이라도 달리면 좋을 텐데. 터져 나오는 하품을 참아내려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던 찰나 수마에 반쯤 굴복한 눈이 창밖에 닿았다.

보통은 깔끔하고 따분한 정원이 있을 위치였지만, 무색의 유리판 너머로 끝없이 보이는 것은 영락없는 어느 숲의 초입이었다.

형태도 빛깔도 희한한 꽃과 나무가 서로 다른 면적으로 군집을 이루고 진녹색 나뭇잎 새로 떨어지는 연한 햇살이 무지갯빛 풀밭 위에 나풀거렸다. 어린 아이의 손톱보다도 작은 갖가지 보석 위에 오색 염료를 가득 뿌려놓고 휘젓는다면 저런 그림이 될까. 짙푸른 초목들이 설레며 은근한 광채를 뿌리는 풍경이란 꼭 물꽃이 피는 바다에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어느덧 잠이 달아난 것도 잊은 채 창문 너머에 눈길이 붙들렸던 소년이 방 저 쪽을 힐끔거렸다. 책장 앞에 모여있는 어른들은 새로 꺼내 든 책(열 권을 넘게 보고도 또 책이라니!)에 한창 정신이 팔려있었다.

지금 조용히 나갔다가 금방 돌아온다면 괜찮겠지. 자리를 비운 것을 들킨대도 집 뒤켠이 아름다워 구경하고 싶었다고 말하면 이해해줄 것이다.

아름아름 결론을 내린 소년은 고양이 같은 걸음으로 서재를 빠져나와 뒷문을 향했다.


언젠가 책에서 본, 요정이 나온다는 숲이 실제로 이렇게 생겼을까?

그늘 속에 가려진 가느다란 풀잎까지도 물기를 머금은 채 반짝이고 제가 올라타도 거뜬할 거목의 가지 틈으로 속삭이듯 나직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종전엔 보지 못한 색채가 눈에 드는 모양새에 만족한 소년은 하얀 디딤돌이 이끄는 대로 발을 옮겼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걷다 다다른 곳은 물망초가 새파랗게 흐드러진 자그마한 연못이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물가마저도 마음에 들었는지 소년은 덤불 사이를 헤치고 다가갔다. 크고 납작한 바위가 물속에 발을 담그기 위한 방석처럼 알맞게 자리하고 있었다. 제법 따뜻하게 달아오른 바위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주저앉자 태양빛이 먹색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낮잠을 자기 적당한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리 따분한 시간이었기로 남의 집 정원에 대자로 누워 잠드는 짓은 작은 신사로서 해서는 안될 일임이 자명했다.

그 대신 물장난이나 조금 치다 돌아갈 요량으로 연못에 손을 담그자 두어 마리의 물고기가 모여들었다. 나비 날개를 닮은 지느러미가 손 끝에 살랑이는 느낌이 간지러워 저도 모르게 미소 짓던 소년의 시선이 문득 수면에 닿았다.

이상한 광경이었다.

두터운 진녹색 커튼 같은 나뭇잎 사이에 여자아이가 비쳤다. 물낯에 바람이 스칠 때마다 얕은 너울이 이는 탓에 생김새는 보이지 않았지만, 긴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내린 소녀가 이쪽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어디에 있는 거지? 설마 물 속에 있나?

호수의 요정들이 아름다운 인간 남성에게 반해 그를 물 속으로 데리고 갔다는 설화가 떠오르자 팽팽한 긴장감이 몸을 휘감았다. 지금은 저에게 친근한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더 가까이 가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숨을 죽이고 조심스레 물러난 소년은 경계심에 눈을 가늘게 뜨고서 수면을 노려보았다. 흘겨보는 내내 몇 번 물고기들이 올라와 참방대기는 했어도 요정이나 물귀신 같은 존재가 물 밖으로 튀어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휴, 다행이다.

한시름 덜고 참았던 숨을 내뱉자마자, 불행히도 소년의 귀에 조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목덜미에 한기가 오르고 소름이 돋았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 온 사방으로 고개를 돌리던 소년에게 그 존재는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당황한 저를 안심시키려는지 자못 애타는 음색이 속삭였다.

"위쪽이야……."

위쪽? 고개를 들어 바라본 소년의 눈이 커다래졌다. 조금 전까지 수면에 아른거리던 요정이 나무 위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반만 묶어 올린 밤색 머리카락이 동그란 뺨을 지나 어깨 위로 풍성하게 흘러내렸다. 흑진주를 닮은 동그란 눈동자가 드디어 소년과 마주치자 앵두빛 입술이 달싹였다. 요정은 저렇게 생겼구나.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아낼 듯한 표정에 덩달아 마음이 풀린 소년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왜 거기 있어?"

"처음 보는 새가 둥지를 틀어서 조금만 보려고 올라왔어."

그렇구나, 요정에게 눈을 붙박은 소년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기회를 보다 달아나려던 계획은 찻잔 속의 각설탕처럼 녹아 없어진 터였다. 별다른 대꾸 없는 제 태도가 감질났는지 요정은 조그만 목소리로 다시 조르기 시작했다.

"저기…… 내려가는 것 좀 도와줄래? 오빠한테 들키면 또 잔소리를 할 거야."

요정은 혼자서 나무에서 내려올 수 없는 건가? 아니, 그보다 요정한테도 오빠가 있나? 예상과 전혀 다른 평화로운 흐름에 소년은 망설임 없이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튼튼해 보이는 가지와 옹이를 능숙하게 골라 밟으며 꽤나 높은 곳까지 도달하자 그 앞에는 안도감에 훌쩍이는 요정이 있었다. 그네를 묶어도 될 만큼 두껍게 뻗은 가지 위에 올라선 소년이 손을 내밀었다.

"잡아."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 눈가를 훔친 요정은 소년의 손이 구명줄이라도 된 듯 단단히 붙들었다. 금방 지나온 정원의 꽃송이처럼 하얗고 보드라운 손이 쥐어졌다. 발 디뎌야 할 곳을 일러주며 찬찬히 요정을 인도한 끝에, 그가 옷자락을 정리하기 위해 맞잡았던 손을 놓은 것이 소년은 어쩐지 아쉬웠다.


땅으로 내려선 요정은 저보다 한 뼘도 넘게 작았다. 그제서야 소년은 이 저택에 있다는 아이들이 떠올랐다. 그럼 이 아이는 요정이 아니라 여기 사는 남자아이의 동생이었나? 아까부터 홀린 듯 멀뚱한 시선의 소년을 앞에 두고서 열심히 주머니를 뒤지던 소녀는 드디어 원하던 것을 찾아낸 듯 고개를 쳐들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이거는 보답이야."

작은 손아귀 안에서 커다란 손바닥 위로 알사탕만 한 구슬 하나가 떨어졌다. 분명 햇볕과 별개로 따스한 구슬이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이 저택에 있는 건 뭐든 빛이 나나보다. 꽃도, 구슬도, 연못도. 그리고 또…….

"지금은 그거 한 개 밖에 없는데, 다음에 만나면 네가 원하는 색으로 더 만들어 줄게. 잘 가!"

더 말을 붙여볼 새도 없이 돌아선 자그마한 소녀는 제가 걸어왔던 길을 따라 종종거리며 멀어졌다. 아담한 어깨 뒤로 물결치는 초콜릿 빛깔의 머리카락 위로 점점이 드리운 태양빛이 스칠 때마다 부드러운 광채가 흩뿌려지다가 이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자취를 감췄다. 처음부터 이곳에는 혼자만 존재했던 것처럼, 달큰한 향기를 실은 잔바람만이 달아오른 뺨을 간지럽혔다.

뒤를 쫓을 걸 그랬나. 외따로 떨어진 유리구두라도 되는 양 손 위에 오도카니 남겨진 구슬을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 어떤 마력이라도 담겨있는지, 매끈한 수정덩어리는 튤립처럼 연한 분홍빛을 품고서 그늘 속에서도 식지 않는 온기를 발산했다.

그림으로도 담을 수 없는 다채로운 숲속에,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자신만큼이나 작은 단서 하나만 남기고 사라진 아이라니. 소년은 이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기회가 된다면 또 와야지. 그렇지만…….

"바보."

이름을 알려줘야 다시 찾을 거 아냐. 중얼거리는 입술 위로 슬며시 즐거운 기색이 어렸다. 햇빛 한 조각을 동그라니 빚은 듯 일렁이는 구슬을 주머니에 밀어 넣은 소년은 저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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