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줘요, 미토 씨!
백호열
미토 씨. 아까 그 학생 또 왔던데. 사쿠라기 씨 댁 아들이요. 어어. 그 새 키가 또 컸네. 그 나이 애들이 다 그렇죠. 아냐 아냐. 그렇게 다들 크진 않아. 그런가요? 그래. 재미있네요. 잠깐 다녀올게요. 신경 쓰지 말고 다녀와.
그러고 나서 미토 씨는 벗어놓은 모자를 집어든 채 순경실을 나섰다. 짧게 쳐서 반듯하게 올린 포마드 헤어는 예전 일을 잊지 않았다는 양 한가닥 애교머리를 뺀 채 있었는데, 미토 씨가 으레 순경들이 그러하듯 각 잡힌 모자를 쓰자 그 안쪽에 파고들어서 꽤나 담백해 보였다.
여름날 해가 쨍쨍하게 내리쬐는 파출소는 덜덜거리는 선풍기 두 대로 버티고 있었다. 그래도 그늘이 진다고 밖보단 안이 나았다. 어쩌면 차양 아래 그늘 역시 그럴지도. 거기에 통 넓은 바지에 가쿠란을 입은 학생 하나가 쪼그리고 앉아 그늘의 경계를 보고 있었다.
미토 씨는 어이가 없다는 양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금일도 대국처럼 화려하게 올려 멋을 낸 앞부분을 지나 그나마 건드려도 어그러짐이 덜 한 뒷머리 부근을 손날 부근으로 톡 쳤다. 웃, 감탄인지 짜증일지 모를 소리가 밖으로 튀어나오면 고개가 돌아온다. 너 또 왔니? 사납게 찢어진 눈매와 날렵하게 뻗은 눈썹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았다. 아주 순경 일 하려 들겠구나. 학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금이 저린 것을 다듬으려는 양 가볍게 다리를 탈탈 털더니 구부정한 자세를 조금 반듯하게 세웠다. 못 할 거 있나요? 그 덕에 미토 씨의 턱이 좀 들어 올려졌다. 미토 씨는 뭉특한 송곳니를 약간 보이며 웃었다. 공부 안 하고 냅다 돌아다니는 꼴 보면 아무래도 어렵기는 하겠다. 아, 좀. 학생의 입에서 결국 짜증 섞인 소음이 흘러나온다. 그래서 왜 왔니, 사쿠라기 군. 정말 봄 벚꽃을 잔뜩 겹쳐 태양빛에 두면 또렷할 붉은빛 옆머리를 쓱쓱 쓸던 사쿠라기 군은 주머니를 뒤적대다 가죽지갑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요. 미토 씨는 으응, 하더니 지갑을 받아 들곤 산 뒤쪽을 밀어 짧고 날카롭게 만든 눈썹 한쪽을 슬쩍 밀어 올렸다. 삥 뜯었냐? 그러다 앞에서 빽, 아니라고!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짜식이 반말은. 했지만 원체 친근한 학생이다 보니 미토 씨는 별 말은 하지 않고 지갑을 열어 신분증을 확인했다.
어디 보자, 학생 지갑은 아니네. 주인 분은 못 봤지? 묻는 말에 흥. 콧방귀나 뀐다. 무슨 소년만화에나 나올 법한 반응이라서 미토 씨는 와하하 경쾌하게 한번 웃으면서 손을 쭉 뻗어 사쿠라기 군의 머리를 팍팍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도 어디냐. 손 안에서 왁스로 딱딱해진 머리카락이 바스락거리며 흩어지는 질감이 느껴졌다. 머리 만지지 마! 엉망이 되잖아?! 급하게 두어걸음 물러나는 모양을 보면서 미토 씨는 개구쟁이 아이들처럼 키들거리며 웃었다. 기특해서 그렇지. 나도 너 땐 머리 올리고 다녔는데, 녀석 화려하게도 발라 놨네. 그 말에 부슬부슬해진 머리를 대강 손으로 문질러 도로 올리던 사쿠라기 군의 눈이 반짝였다. 요헤도 양키였어? 미토 씨는 여즉 웃는 낯을 하고 말했다. 주스 마실래? 사쿠라기 군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 양키였냐니까. 미토 씨는 아무렇지 않다는 양 몸 돌려 파출소 안으로 들어갔다. 오렌지 마실 거지? 사쿠라기 군이 발을 동동 굴렀다. 아아-! 파출소 안의 작은 냉장고 안에서 차갑게 만들어놓은 조그만 유리병을 꺼낸 미토 씨는 잔 걸음으로 나와 사쿠라기 군에게 찰랑거리는 주스를 내밀었다. 자, 오렌지 마실 거지? 어쩐지 황망하게까지 보이는 사쿠라기 군의 앳된 티가 남은 얼굴을 올려다보는 미토 씨의 눈빛은 아주 다정스러웠다. 그리고 요헤가 아니라 요헤이야. 사쿠라기는 오리주둥이처럼 입술이 댓 발 튀어나온 채 주스 병을 낚아채 비닐 포장을 벗겨냈다. 요헤. 투덜거리는 말씨. 미토 씨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래, 미토 씨라고 해라. 더한 처사에 사쿠라기 군의 머리가 쭈뼛 서버렸다. 왜! 미토 씨는 어깨나 한번 으쓱였다. 어른이니까.
그리고 미토 씨는 음료를 받아든 사쿠라기 군을 돌려 세운 뒤 그늘 밖으로 쭉쭉 밀어버렸다. 얼른 집에나 들어가거라, 어머니 걱정하실라.
말해줘요, 미토 씨!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미토 요헤이의 근무처인 파출소에 들락거리기 시작한 것은, 사실 유래가 깊다. 얼마나 깊으냐면, 대충 사쿠라기의 중등생 시절부터 읊으면 되겠다. 그때는 아직 사쿠라기가 자기가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는지 인식도 못 하고 써먹을 줄도 몰라서 어영부영 길가의 돌처럼 데구륵거리며 뽑히고 채이며 아웅다웅해가며 살던 시절이었는데, 하여간 이 어린 영혼에게 시절이라는 구구절절한 단어를 붙인 이유라 함은 정말 그의 짧다면 짧은 인생 중 이 시일이 제일 격렬하고 난감한 때라서였다.
도대체가 가만히 있는데 시비는 왜 거는지. 잘 지내보려 하는데 왜 겁을 먹는지. 지레짐작하며 옹송그리는 몸을 하면 또 가볍게 보고 끌고 간다. 사쿠라기의 머리는 안그래도 바짝 예민한 시기였는데 사방에서 주먹질을 해대려고 시동을 거는 통에 정말이지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심지어 하필이면 그날 강둑에서 그런 '패거리'를 만나 흠신 두들겨 패고 딱 그만큼 쥐어 터진 후에 도저히 바로 집에 갈 정신머리가 들지를 않아 동네나 뱅뱅 돌았지. 처량하기도 일등 가는 가을날이었다. 그러다가 끼익 하고 브레이크 쥐는 소리가 들리더니, 너어. 하는 소리가 났던 것이다. 사쿠라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거기에는 자전거를 탄 순경 하나가 있었다. 부임받은 지 얼마 안 되었는가 낯선 면이었다. 뭐야. 사쿠라기는 불퉁한 표정으로 일관했고 순경은 가만히 사쿠라기를 보다가, 뒤에 탈래? 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너무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 하기도 전에 태워졌다. 살다살다 순경 자전거 뒤에 타보긴 처음이다. 상처 좀 보러 가자는 게 이유였다. 이게 바로 센세이션이라는 것이구나, 작지만 야문 등판을 보다 어물쩍 옷자락을 쥐었을 때 사쿠라기는 누가 태워주는 자전거를 타면 체온에 덥혀져서 뺨을 스치는 바람 따위가 아주 보드랍구나, 알았다. 그리고 들어가 본 파출소는 생각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하기사 사람이 일하는 공간인지라 뭐 냄새가 나니 안 나니 따져볼 구성은 아니라지만. 파출소라고 했을 때 긍정적인 기억이 부정적인 기억만큼 많지는 않았던 어중간한 중도의 상황에서 사쿠라기는 어쩐지 그 경직되어야 할 것만 같은 첫인상을 사르르 녹이고 말았다. 하나는 본인을 데리고 온 젊은 순경 때문이었고 둘은 안쪽에 앉아있는 중년의 순경 덕이었다.
미토 씨, 무슨 일이야? 중년의 순경이 말했고 미토 씨라 불린 순경은 접이식 보조의자를 하나 꺼내 펴고선 사쿠라기를 앉혔다. 가마쿠라 선배, 아이가 다쳐서요. 그 아이가 자신이고 아무래도 여기에서 돌봐지는 것 같다는 기분에 사쿠라기는 괜히 도망치고 싶다거나 나가고 싶다거나 하는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러기에 어쩐지 순순히 나가기 뭐한 분위기라서 사쿠라기는 멋쩍은 얼굴을 하고 보조의자에 앉아서 조금 빠듯하게 맞는 학생화의 반들반들한 가죽코나 보고 있는 것이다. 가마쿠라 씨는 으음, 하고 사쿠라기를 한번 보다가 아, 하고 웃었다. 너 사쿠라기 씨 댁 아들이구나. 그렇지? 하고 친근한 체를 했다. 사쿠라기는 조금 멈칫했다. 순경들이 동네 순찰을 돈다는 명목으로 이리저리 얼굴을 비추고 주변을 환기시킨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딱 들킬 줄은, 심지어 한입 먹혀 터진 만두처럼 되었을 때 목도할 줄은 진심으로 몰랐다. 어쩌면 순진한 태도였다. 사쿠라기는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가 대답 않고 픽 고개를 숙였다. 가마쿠라 씨는 허헛 웃으며 알코올솜을 뜯어 집게로 집는 미토 씨에게 잘 좀 봐줘, 말하곤 도로 사무 업무를 보았다.
그리고 미토 씨가 사쿠라기에게 다가왔다. 그 때에도 사쿠라기는 어찌나 컸던지 보통 아이들 다친 걸 봐주는 데엔 애를 앉히고 무릎 꿇고 하면 대강 나오던 그림이 어떻게 나오질 않아 결국 미토 씨도 의자를 끌고 와 마주 보고 상처를 봐줬다. 주먹과 드잡이질. 뜯겨나가기 직전의 단추가 흔적이 되어 달랑달랑 교복에 붙어있었다. 뜯어지고 베인 상처가 알코올에 닿을 때마다 따끔 따끔한 감각을 남겼다. 그것은 아무리 익숙해진다 한들 쉽게 지나가기는 곤란한 부류의 것이라서 사쿠라기는 자꾸만 눈이 깜빡거리려는 것을 버티려 안간힘을 썼다. 사쿠라기 군, 사람이 눈을 안 깜빡거리면 어떡해. 미토 씨는 웃으며 말했다. 무섭잖아. 그렇게 말하는 모양은 두려움과는 몇 억 광년 즈음 떨어진 얼굴을 하고 있어서 사쿠라기는 저도 모르게 배웠던 거친 말 - 헛소리 하고 있네, 를 뱉었고 미토 씨는 톡톡 상처를 소독하는 손을 그대로 움직이면서 이젠 웃는걸 숨기지도 않았다. 어우 무섭다. 손이 막 떨린다. 그것이 어른들의 집요한 놀림의 서막이라는 것을 알아서 사쿠라기는 그때부터 해감되지 않은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었으나 미토 씨는 아주 집요한 사람이었으므로 모든 게 청소년의 마음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 말이다. 뒤지게 놀림받았다.
미토 씨는 사쿠라기에게 항상 사쿠라기 군, 하고 단정하게 말을 붙였다. 일말의 예의일 뿐일지도 모른다. 반듯한 성인이라면 자연스럽게 대해야 할 어떤 구성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상황 자체가 사쿠라기에는 긍정적인 심상을 남기게 되었다. 미토 요헤이라는 어른은 온후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본인에게는 무해한 사람이다. 해를 입히느냐 아니느냐가 사람의 판별 기준이 되었다는 것은 꽤나 입 쓴 사실이지만 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쿠라기는 종종 할 일이 없으면 귀가하는 길에 파출소를 들러 음료 하나씩을 얻어마시고 가곤 했다. 뭐든 다 가리지 않았지만 오렌지를 주면 좀 더 좋아해서, 가마쿠라 씨는 한창 크는 어린애가 쫑쫑거리며 오는 게 좋았는지 자주 주스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고는 했다. 그래, 한창 크는 어린애. 하루가 다르게 큰다는 말이 무엇인지, 참으로 사쿠라기는 볼 때마다 과장을 보태서 일 센티씩 커가는 것만 같다.
중학교를 올라가고 새로 맞춘 가쿠란이 계절이 바뀌었다고 또 맞지를 않는다. 새 옷을 입을 때 즈음, 무슨 물이 들었는지 사쿠라기는 왁스로 머리를 올리고 다녔다. 이야, 요령도 좋게 만들어서 아주 그냥 붉은 머리가 화사하기까지 했다. 끄트머리를 덜 만 건지 부러 안 만 것인지 잔머리가 삐죽 튀어나와선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이 더 드세보였다. 너 양키 짓 하니? 미토 씨가 오늘도 학우와의 즐거운 하루를 마치고 파출소에 출근도장을 찍은 사쿠라기에게 물었고, 사쿠라기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양키나 선생이나 하는 짓은 똑같던걸. 하곤 주스나 받아서 뚜껑을 비틀어 따 마셨다. 샛노란 오렌지 주스가 목울대를 타고 안으로 안으로 흘러들어간다. 미토 씨는 자리에 앉아서 빈 병을 만지작대는 사쿠라기를 바라보다가 웃기만 했다. 남 패고 다니지만 말아라, 다정한 말씨에 사쿠라기는 흥, 콧방귀나 한번 뀌었다. 변변찮은 대답도 하지 않은 것을 보아 아무래도 본인 입장에서 무리라는 것이겠거니. 미토 씨는 그러나 별 말 하지 않았다. 사쿠라기는 최소한의 선은 아는 아이였다.
그렇게 일학년의 초입, 벚꽃이 화사하게 피다 못해 허공에 봄 물결이 이는 듯 보였는데, 투박스러운 걸음이 드르륵 파출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미토 씨는 익숙하게 고개를 들어 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일이세요? 그 말이 끊기기도 전에 미토 씨는 입을 떡 벌렸다. 너 뭐냐? 하고 말이 툭 튀어나왔다. 뭐가. 사쿠라기가 불퉁하게 말했다. 미토 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 사이에 또 껑충 커선 고개가 뒤로 확 꺾고나서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머리가 박박 깎여 있었다. 몇 미리로 깎아놓은 거냐? 미토 씨는 요란하게 웃거나 하지 않고 그냥 다가와서 사쿠라기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보았다. 만져도 되니? 그러고 나서 허락을 구하는 말을 했는데, 사쿠라기는 반사적으로 눈을 데구룩 굴려선 그 손바닥의 단면을 보았다가 응, 하고 짧게 답했다. 고맙다. 미토 씨는 그 대답을 듣고서야 사쿠라기의 머리카락 위에 손을 얹었다.
까슬하게 올라온 머리카락이 손가락 틈을 간지럽혔다. 찌른다는 말이 어울리는 감각이다. 굳은살과 상처를 한번 감아놓은 밴드 위로 붉은색 잔디같은 결이 흩어지면 미토 씨는 훗, 하고 사붓한 미소를 그렸는데, 그에 걸리는 손길은 아주 부드럽고 살가워서 사쿠라기는 숙인 고개를 들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다 보일 것들 뿐이라지만 서도.
다 됐어? 사쿠라기의 쑥 내린 머리를 이젠 양손으로 복복 만지작대던 미토 씨는 으응, 그래. 하고 웃음이 남은 얼굴로 손을 거두었다. 쥐었다 폈다 하던 손을, 사쿠라기는 솥뚜껑만 한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를 설설 쓸어보더니 익숙하게 파출소 한 구석에 접혀있던 보조의자를 펴 앉았다. 그러고 보니 항상 들고 다니던 얇게 눌러놓은 학생가방이 아닌 더플백이 바닥에 턱 내려진다. 미토 씨가 물었다. 너 동아리 들었니? 사쿠라기는 응. 했다. 어쩐지 말하는 게 부끄러운 듯해 보였으나 항상 귀가하던 길에 이래저래 말썽에 휘말리던 날을 기억하던 입장에서 하나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 것만 같아 미토 씨는 정말이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안도를 했다. 그거 좋은 이야기인걸. 무슨 부? 미토 씨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가 앉곤 키보드 위에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하게 올렸다. 농구. 짧은 대답은 어쩐지 성겼지만 그 맹숭맹숭한 맛이 한창 청춘의 계절을 담은 모양인지라 미토 씨는 킥킥 소리 죽여 웃으며 마저 서식을 채워 넣었다. 잘 됐다. 너 키도 크고 몸도 빠르잖냐. 아주 잘 어울려, 스포츠맨.
열심히 해라. 미토 씨의 말에 뒤이어 사쿠라기가 말했다. 그럴 거야. 더플백의 늘어진 가방끈을 보는 시선이 아주 묽었다. 미지근하게 열이 올라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사쿠라기는 이 학년이 되었다. 농구부는 여전히 즐겁다고 했다. 인터하이에서 아주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했다. 신입 부원들과 엉키면서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는데 그게 또 나쁘지 않았다나. 미토 씨는 사쿠라기가 부활동이 끝난 뒤 느지막하게 노을이 드는 시점에 파출소에 들이닥쳐하는 두서없는 이야기를 잘 꼭꼭 씹어가면서 들었다. 조그만 주장부터 재수 없는 동급생과 조금 기를 못 펴는 듯하는 선배까지. 하나같이 다채로운 인물상이라는 것이 사쿠라기의 주변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고 있으려니 호기심인지 장난인지 모를 마음이 고개를 든다.
얘, 사쿠라기.
왜. 요헤.
이 녀석아, 미토 씨라니까.
아, 하여튼 왜.
넌 여기가 뭐가 재미있다고 매일 오니, 여자친구 안 사귀어? 훤칠하고 인물도 좋은데.
그리고 그 말의 끝에 쇼호쿠 자수가 놓인 체육복을 입은 다리가 달달 떠는 것을 뚝 멈춘다. 얼레, 하며 미토 씨가 고개를 들어 사쿠라기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 어린이의 목덜미와 모양 좋게 올라붙은 광대뼈에는 때 이른 열꽃이 피어 있었다. 풋풋하고 시큼한 순정의 혈색이 그의 표정은 완연한 동풍으로 이끌고 있었다. 무시하기에 그 바람은 너무나도 뜨겁고 또렷하여서 미토 씨는 아차 싶은 마음을 목구멍 뒤로 꼴딱 삼켰다. 이건, 아, 이건 정말 실수했다. 아직 심지가 굳지 않은 젊은 마음은 쉬이 흔들리고 섞이기도 하는데 그것을 잊어버린 채 움직였다. 저어, 미토 씨가 뭐라 말하려던 차에 사쿠라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잘 생겼어?
서툴고 엉성한 열기를 담은 눈빛이 이쪽을 보지도 못하고 그저 운동화 코 끝으로 시멘트를 발라놓은 바닥이나 톡톡 치며 되묻는다. 그 시간에 미토 씨는 정말 혀라도 깨물고 죽고 싶을 정도의 강한 현기증을 느꼈다.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득해지는 감각의 건너에는 이 관계를 어떻게든 돌려놓거나 끊어버려야 한다는 진한 의무감만이 남았다.
미토 씨는 사쿠라기 군을 피하기 시작한다.
이건 어른이 되어 할 수 있는 가장 선명한 계도다. 미토 씨는 가마쿠라 씨에게 부탁해 아이가 오면 돌려보내거나 본인이 올 법한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동네 순찰을 나가거나 하는 식으로 사쿠라기를 피했다. 왜,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하지 않던가. 풋사랑의 초입은 접촉이었으니 그 시일이 멀어지면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가버릴 마음이노라고 미토 씨는 직감했다. 실제로 그런 방법이 안 먹힌 것은 아니고. 본인만 해도 그러지 않았던가. 남몰래 학식을 흠모하던 교수님과의 면담 시간에, 미토 군은 마음이 물러질 때에 의지하고자 하는 사람을 만나면 붙잡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으니 스스로 단단하게 살아가는 능력을 만드는 게 좋겠어요, 하며 우아한 말과 함께 첫사랑이 피지도 못하고 끝나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말이다. 어른으로 젊은이들에게 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잡이이기도 했다. 모든 시작이 아름다울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최소한의 평균성을 가지면 즐겁지 않겠느냐고. 한몇 주일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스스로가 만든 골은 아주 아득하지도 않고 딱 한 사람 분의 공백을 만들었으므로 어떤 상황에도 문제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방금까지는 그랬다.
아이고, 사쿠라기 군!
가마쿠라 씨의 짧은 감탄인지 비명인지 한 것이 미토 씨의 귀를 쨍하게 울렸다. 소리만으로도 놀라움은 당연지사라지만 도대체 무슨 꼴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파출소 안쪽 자리에 앉아있던 미토 씨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눈앞의 광경은 참으로 장관이다. 정말로 과장을 보태지 않고 미토 씨는 입을 떡 벌렸다.
사쿠라기가 얼굴이 시뻘게져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다 큰 황소 같은 몸뚱이에는 가마쿠라 씨를 매달고선 (아마 파출소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던 차였던 듯싶다. 미토 씨는 알게 모르게 속으로 혀를 찼다. 죄송합니다, 가마쿠라 선배.) 어깨에 맨 더플백이 죽 흘러내려 구부러진 팔꿈치 오금에 매달려 있었다. 자, 다시 얼굴을 보자. 얼굴. 억울함과 어쩐지 모를 생떼가 아롱아롱 붙어서 시뻘겋게 익어버린 저 얼굴. 암만 키가 올라봤자 이제 열일곱 소년이라는 사실이 얼굴에 확 와닿았다. 그 무구한 면이 자신을 마주했을 때 안 그래도 벌건 얼굴이 더 열이 올라선 건드리면 톡 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미토 씨는 이 상황을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하나 고민도 못하고 일단 냅다 흔들리는 가마쿠라 씨를 위해 사쿠라기의 한쪽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야, 사쿠라기 군! 뭐 하는 거야! 난동을 피우면 어쩌냐!
어쩌면 정수리를 따끔하게 울리는 불호령에 아이는 놀란 듯 숨을 양껏 들이키더니 곧 빽 소리를 내질렀다. 요헤 탓이잖아! 나왔다. 저 이름. 애칭에 가까운 지극한 친근함의 단 맛. 혀 끝에서 일렁거리는 순박한 호의는 그럼에도 아이들이 어른을 여러 번 용서해 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다시금 직시하게 만든다. 미토 씨는 멋쩍은 얼굴을 한번 하더니, 가마쿠라 선배, 애 집에 데려다주고 올게요, 하곤 사쿠라기의 허리를 안고 있는 가마쿠라 씨를 바로 세운 뒤, 여기에서 기다려, 한 마디를 하곤 파출소의 안쪽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거기에는 여전히 사쿠라기를 위한 오렌지 주스 몇 병이 있었다. 미토 씨는 미지근하게 웃었다. 어쩌면 미련을 못 놓는 건 자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매끈한 유리병 하나를 집어든 미토 씨는 그대로 냉장고 문을 닫고 사쿠라기에게 향했다.
어이, 사쿠라기 군. 집에 데려다 주마.
말 똑바로 듣기 전에는 못 가.
아예 팔짱을 끼고 파출소 입구에 앉아버리는 기행에 미토 씨는 헛웃음을 뱉었다. 그리고 에잇, 소리를 내면서 차가운 유리병을 사쿠라기의 목덜미에 대었다. 와앗, 파드득 몸을 떨며 손을 뒤로 해 몸을 빼버린 사쿠라기를 보던 미토 씨는 킬킬대며 빈 손을 내밀었다. 빨리. 집에 가자. 사쿠라기는 미토 씨를 의심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다가 머뭇거리는 동작으로 손 붙들었다. 미토 씨는 상체를 완전히 뒤로 물리듯 해 체중을 옮겨서 사쿠라기를 일으켜 세웠다. 그건 그렇고 정말 커졌다, 농구를 하고 나니 더 커졌을지도. 미토 씨는 잠시간 사쿠라기를 보다가 그의 손에 뚜껑을 딴 주스 병을 들려주곤 그의 어깨를 밀어 집을 향해 걸었다.
안 마시니? 미토 씨는 언제나처럼 다정스럽게 물었고 사쿠라기는 못 본 사이에 빡빡 밀었던 머리가 어느 정도 앞머리가 삐죽 튀어나올 정도로 길어 있었다. 정말이지 사쿠라기는 이 양반이 언제 도망갈지 고민하면서 사방을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지독한 의사표명이었다. 미토 씨는 대답 대신 날카로운 눈빛만 보내는 사쿠라기를 바라보다가 어깨나 한번 으쓱였다. 설렁설렁 걷는 걸음은 아주 느긋했다. 마셔라, 어디 안 갈 테니까. 여전히 빛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미토 씨는 결국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앞으로 피하지도 않으마. 했다. 그제야 사쿠라기는 주스 병에 입을 대로 꼴딱꼴딱 몇 모금을 넘겼다. 그리고 아이가 반쯤 넘긴 주스 병에서 입을 떼는 순간 미토 씨가 물었다. 사쿠라기 군, 내가 좋으니?
그 말 이후의 사쿠라기의 표정은 참으로 볼 만했다. 열받았던 것이 무슨 체기였다는 것 마냥 쑥 내려간 듯 붉었던 얼굴이 아주 희어졌다가, 지독한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아주 파래졌다가 하며 낯빛이 만색으로 바뀌곤 하는 것이다. 미토 씨는 반으로 갈라 흘러나오는 노른자빛 노을을 등에이고서 사쿠라기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평온했다. 이 뜨거움은 사랑의 열인지 분노의 그것인지 정곡을 찔려 나오는 희여멀건한 비명 같은 것인지 사쿠라기 군은 아직 그걸 구별할 정도의 깜냥이 되지는 못하여서 그저 우뚝 선 채 몇 걸음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미토 씨의 어른스러운 표정 따위를 바라보다가, 목이 졸린 소리로, 응, 하고 형편없다 못해 궁색한 형태로 자신 마음의 모양을 까발려진 것이다.
그렇구나. 미토 씨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계절이 변하는 시일의 하늘은 항상 불타는 것처럼 태양이 지곤 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인 것만 같다. 그리고 아주 묽어서 만수선의 경계를 흐려버릴 것 같은 미소를 만든 채 미토 씨는 사쿠라기를 보았다. 내 나이가 몇인지는 알고? 돌연 치고 들어온 질문에 사쿠라기는 머뭇거렸다. 해봤자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라던가 너는 어른이 되기까지 아주 많은 시간이 걸린단다 정도의 훈계를 생각했지만 정말이지 이걸 물어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동시에 사쿠라기는 이 질문이 아주 중요한 분기점이 되리라는 것 역시 직감했다. 여기에서 말을 잘하지 못하면 말려들어서 저 이가 좋을 대로 이루게 된다. 그것만큼은 안 될 일이다. 열일곱 사쿠라기 하나미치의 짧은 듯 길쭉한 삶이 그에게 그런 부저를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스물둘? 미토 씨는 사쿠라기의 말을 듣고 있다가, 맙소사, 소리를 내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허리를 얼마나 뒤로 꺾었는지 바지 안에 잘 집어넣은 셔츠가 조금 위로 나와서 몸을 바로 세웠을 때 굵직한 주름 하나가 새로 생겼을 정도였다. 뭐어, 그렇게 웃을 정도야? 사쿠라기는 이젠 귀까지 붉어져서 괜히 우물쭈물거렸다. 하긴 순경이 될 정도면 이래저래 공부를 좀 했겠지? 그러면 스물다섯? 하니, 이것도 좀 젊은가? 그러면? 사쿠라기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사쿠라기는 눈치는 좋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운동머리 빼고는 수싸움에 약했던지라 이번에도 지는 답변을 내놓고 말았던 것이다.
…서른 다섯? 그 말에 미토 씨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얌마, 막 던진다고 다 답인 거 아냐. 그리고 다시 사쿠라기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앞서 본 모든 선례들이 그가 이런 일에 영 재주가 없음을 알려주는 바, 유감스럽게도 어느 말을 하든 답에 근접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미토 씨는 직감하였으매 차라리 스스로 자신의 나이를 밝히기로 했던 것이다. 미토 씨는 사쿠라기에게 다시 걷자는 듯 손짓을 해 보이곤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내가 스물여덟이거든, 사쿠라기 군. 그 말에 사쿠라기는 입이 댓 발 나와서 쪼르르 미토 씨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게 뭐. 그 두 사람의 등 뒤로 그림자가 아주 길게 늘어졌다. 미토 씨는 그 얼굴이 아주 웃기다는 양 미적대며 웃었다. 야, 나이 차를 생각해 봐라, 사쿠라기 군. 내가 너를 남자로 보겠니, 그전에 학생을 연애상대로 보는 성인이 있으면 그런 놈은 목매달아서 죽여야 돼. 그 말은 아주 단단하고 옳기만 한 말이어서, 사쿠라기는 정말 그 한 톨의 균열도 허용치 않는 논리의 철벽 앞에서 결국 다시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앞선 것이 불타는 탱천撐天이었다면 이번 것은 음울한 심곡深谷이었다.
왜요, 이게 뭐가 나쁜데. 주스병을 쥔 손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노을물이 들었음에도 희게 질린 것이 보여서 미토 씨는 아이고, 짧은 침음을 흘렸다. 학교 다니는 나이면 누구 좋아하는 것도 안 돼? 그것은 참아왔던 마음, 누군가 뭐라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얼기설기 눌러왔던 뚜껑이 순간 팡 터져버리고야 말았다. 폭포 옆에 서 있으면 결국 젖어버리는 것과 같은 감정의 해일에 사쿠라기는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며 반 남은 오렌지 주스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눈물 몇 방울이 이 안에 운 안 좋게 들어간 것도 같다.
그리고 미토 씨는 웃었다. 정말, 농담이 아니고 웃으면서 그의 등을 도닥였다. 그러나 눈물을 닦아주지는 않았다. 녀석, 우니까 못생겼네. 미간에 주름 진 것 봐라. 덧붙이면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방은 사쿠라기의 마음처럼 애달프게 타오르기만 하는 것 같은데 그 안에서 미토 씨 혼자만 해무를 무시하고 잔잔하게 서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발 밑에는 무한한 반석이 놓여있는 것만 같았다. 어른이어서 그런 걸까? 잘 모르겠다. 사쿠라기는 미토 씨의 손길에 이끌려서 걸음을 옮기면서도 아주 혼곤하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사쿠라기 군, 들어봐. 나도 예전에 너만 할 때 선생님을 참 좋아했거든, 그런데 그건 믿을 만한 사람을 만나서 마음이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래. 그건 좋은 어른을 만나서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기 때문이야. 내가 너에게 그런 어른이 되었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이지만, 모든 긍정의 마음이 연애감정으로 가는 건 아니야.
사쿠라기는 그 말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 모든 말이 사쿠라기의 가슴을 후벼 팠다. 순수하게 모두 본인을 위한 말임을 알아서 더 괴로웠다. 심장의 판막이 녹아버려서 숨을 어떻게 들이켜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분명 다리는 움직거리면서 몸을 옮기고 있는데, 기이하게 말이 귓가를 울려서 물속에서 듣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물고기가 듣는 세상은 이런 기분인가? 사쿠라기는 아주 막막하지만 한 감각을 느끼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다가 곧 멈춰버렸다. 묻고 싶었다. 그러면 내 마음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건 그냥 순전히 어리기만 해서 나오는 교란 같은 건가? 다 시일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정도의 물건이야? 내 마음은 그런 거야?
그리고 미토 씨는, 가만히 사쿠라기의 등을 쓸어주었다.
하나미치, 너는 아직 세상의 넓이를 세어 볼 때가 아니라서 나한테 미련이 남는 거야. 넌 무릎뼈가 쑤시도록 키 크는 나이잖냐. 나는 머리도 굳고 뼈도 굳었다고. 뭐. 나중에 좀 더 커보고 나서 다시 고민해 보던지.
그리고 미토 씨는 자신의 턱 언저리를 쓱 쓸어보더니 그제야 고개 숙인 사쿠라기의 젖은 뺨을 문질러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래. 스물 다섯 정도까지는 커라. 생각보다 넉넉하지? 그제서야 사쿠라기는 고개를 들어 미토 씨를 보았다. 시뻘건 저녁놀은 이제 푸르게 장막을 새로 입히는데 그걸 본인의 머리 뒤에 걸어놓은 미토 씨를 보면 여전히 좋아서 사쿠라기는 정말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질끈 눈을 감으면 길게 선을 그리던 눈물이 뚝 끊겼다. 더 이상 울 수 없었다. 사쿠라기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아주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 행운을 얻었음을 알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걸 알아차린 순간, 사쿠라기는 오렌지 주스를 벌컥 들이켰다. 까끌한 목구멍에 시큼한 물이 닿아 흘러내리면 입꼬리 안쪽의 침샘이 아주 따끔따끔거렸다.
알겠어, 요헤.
미토 씨.
사쿠라기는 미토 씨를 보지 않았다. 대신 손 안의 비어버린 주스 병을 노려보기로 했다.
…미토 씨.
하고. 이름을 정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쿠라기는 그 뒤 파출소에 발길을 뚝 끊었다. 중등 때부터 고등의 중반까지.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봐왔던 얼굴이기에 이렇게 빠르게 정리를 해버리다니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동시에 제대로 된 말을 해주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미토 씨는 차근차근히 자신의 일상을 일궈나가기 시작했다. 펴던 날이 많았던 보조의자는 정말 보조의 쓸모를 위해 접히는 일이 많아진다. 그 위에 먼지가 쌓이는 일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지긋지긋하게 펴지는 일 역시 없었다.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이다. 미토 씨 역시 그냥 거기에 있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난다. 다시 여름.
어느 날처럼 자전거를 타고 주변 순찰을 돌고 돌아오던 미토 씨는 파출소 앞에 서 있는 껑충한 빨간 머리를 바라보았다. 가슴속에서부터 어쩔 줄 모르는 기쁨과 반가움이 차올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저 아이를 참 귀여워하는구나. 그래서 찌르릉 벨을 한번 울리고, 어이, 사쿠라기 군, 하며 말을 걸었다. 청명한 여름 공기를 가로지르며 자전거의 브레이크가 언젠가의 저녁처럼 끼익 소리를 내며 죄어들었다. 그 무던함에 사쿠라기는 반팔 셔츠를 입은 채 자신의 앞에 스르륵 미끄러져 자전거를 세우는 미토 씨를 보곤 입술을 삐죽였다. 무슨 일이야. 바쁠 시기 아니야? 미토 씨는 더위에 셔츠 깃을 가볍게 팔락거리며 안으로 들어오겠느냐 물었으나 사쿠라기는 대답 대신 잠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 사이에 또 키가 큰 것 같아서 미토 씨는 참 뒷목이 아팠다. 사쿠라기는 한동안 눈을 다른 곳으로 두었는데, 여전히 눈을 다른 곳에 향한 채로 입 열었다. 나 농구한다고 했잖아. 그랬지. 근데 이번에 시합이 있어서. 응. 우리 농구부 정말 강하거든요. 그래. 경기 봐줄 수 있으려나.
종합하여서 본인이 경기를 뛰니 보러 와달라는 말이다. 미토 씨는 자전거에 앉은 채 여름열에 들뜬 사쿠라기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 보다가 어른답게 웃었다. 정말이지 찬란한 청춘의 계절다웠다. 언제니? 미토 씨의 말은 또렷한 수긍이었기에 사쿠라기의 얼굴은 확 펴졌고 그간의 공백이 무색하게 두 사람 사이에는 재잘거리는 대화(정확하게는 사쿠라기의 일방적인 한풀이)가 오갔다. 그 사이에 미토 씨는 스포츠에 별 관심도 마음도 없는 사람이었던지라, 사실 정식으로 경기에 초대받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사쿠라기에게 말 했고 그 처음의 순간에 본인이 함께했다는 사실에 사쿠라기는 눈에 띄게 흥분하며 그걸 숨기지 못했다. 참으로 명랑하다. 잔뜩 들 뜬 모양이 아주 또렷한 순간이어서 미토 씨는 가뿐하게 웃었다. 그 언저리에 사쿠라기는 아차 싶었는지 다시 불퉁한 얼굴을 하고선 저어 먼 곳으로 떨어졌다. 오십 미터 즈음. 늦지나 마, 미토 씨! 그리고 더 멀어졌다. 백 미터 즈음. 전반 후반에 이 몸이 나오는 모든 경기는 다 보라고! 호통치는 양 쩌렁쩌렁 외치는 말에 미토 씨는 마냥 허허실실, 오냐, 갈게, 갈게. 하면서 팔랑팔랑 점처럼 작아지는 등에 손이나 흔들어 주었다.
*
히로시마로 가는 차편은 생각보다 비쌌다. 그도 그럴 것이 가나가와에서 히로시마까지는 정확히 반나절이 걸린다. 버스에 기차에 다시 빙 돌아서 걷고. 경기장까지 가는 데에는 꽤나 많은 수고가 들었으나 그 자체는 나쁘지 않다. 즐겁지 않은가. 청춘의 일면을 장식하는 한 순간에 자신이 남아있다는 것은 고마워하는 것을 넘어 영광스러워야 할 일이다. 하여서 미토 씨는 자판기에서 물 한 병을 뽑은 뒤 어영부영 좌석을 찾아 앉았다. 사방은 경기 시작 전의 열기와 잡담에 묻혀 파도 타는 듯한 울렁거림을 흘리고 있었다. 매끈한 농구 코트가 신선했다. 그러니까 저 넓은 곳을 종횡무진하며 돌아다니시겠다. 참 자기 같은 것을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이 선명하다.
선수 호명부터 경기 돌입까지. 미토 씨는 붉은 머리가 보일 때마다 사쿠라기 하나미치의 이름을 입에 올렸고 나아가선 소리를 질렀다. 페트병에 작은 비비탄을 넣은 응원도구도 옆에서 빌려줬던 터라 허벅다리에 그것을 탕탕 두드리면서 본격적으로 굴었다. 림 밑에서 공을 낚아챘을 때에는 아주 일어나기까지 했다. 하나미치-! 목구멍이 터져라 열을 올리는 말소리에, 어, 지금, 눈 마주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고 아주 먼 거리였으니 단순한 기우일 것이다.
정신없는 러닝타임이었다. 사실 정신이 없는 걸 넘어서 혼이 쏙 빠졌다. 후반부에선 마실 물도 떨어져서 와악와악 소리지른 기억이 다였더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한참동안 넋을 놓은 채 빈 코트를 바라보고 있던 미토 씨는 아차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섬주섬 빈 페트병을 주워들고 밖으로 나왔다. 관중석 밖을 빠져나오자 보이는 것은 어두운 파란색으로 바닥칠을 해놓은 복도였다. 스포츠 경기장은 원래 이렇게 미끈미끈한 듯 차가운 기분인가? 어쩌면 순간의 열기가 빠져나가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미토 씨는 페트병의 바람을 뺀 뒤 짜그라트려 쓰레기통에 던져넣은 뒤 자판기 앞으로 가 섰다. 목이 칼칼하고 건조한 것이 시원한 음료를 마시지 않으면 영 못 버틸 성 싶다. 동전을 집어넣고 자판기의 버튼이 붉게 빛나면 뭘 마시려나 고민하기를 십여초, 불쑥 어깨 뒤에서 손 하나가 튀어나와 이온음료 아래 버튼을 눌렀다. 뭐지 하는 사이에 덜컹이며 아래로 캔 떨어지는 소리가, 잔 돈을 가져가라는 깜빡이는 글씨가 흘러간다. 미토 씨는 정수리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고개를 돌려 상대를 보았다. 아, 사쿠라기 군.
정말이지 큰 사람이다. 못 본 사이에 더 큰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자전거에 올랐던 그 때에는 스케일을 어림짐작 못 했으나, 하여간 컸다. 자판기를 앞에 둔 지금 문짝만한 한 키라는 관용어가 뭐냐고 물으면 미토 씨는 당연하게 사쿠라기 하나미치의 키를 입에 올릴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사쿠라기 군은 익숙하게 허리를 숙여 파란색 이온음료 캔을 집어든 뒤 (심지어 그렇게 작은 캔이 아니었음에도 아주 쬐꼬매 보였다. 중요하다, 조그만게 아니라 쬐꼬만 것이다.) 탁 하고 캔 뚜껑을 따고 한모금 넘겼다. 미토 씨는 씩 웃으며 느슨하게 쥔 주먹으로 사쿠라기의 어깨를 가볍게 통 쳤다. 잘 달리던데, 사쿠라기 군. 그렇게 너스레는 떨어대는 얼굴에 사쿠라기는 언제나처럼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왜 아까처럼 이름 안 불러줘요. 미토 씨는 엥? 하면서 자판기에 부족한 동전을 몇개 더 넣고 사쿠라기가 뽑은 것과 같은 것을 뽑아들었다. 덜커덩. 다시 음료가 나온다. 이번에는 미토 씨가 허리를 숙여 음료를 뽑았다. 야아, 사쿠라기 군. 예전에도 몇번 불러준 적 있잖냐. 이름 막 불렀다고 시위하는거니? 설렁설렁 하는 말에 사쿠라기는 영 불편하다는 얼굴로 눈매를 어그러트렸다. 그리고 다시 음료를 단번에 들이키더니, 미토 씨는 나 달랠 때에만 이름으로 부르고, 평소에는 좋을 대로 부르다가 자기는 이름 부르지 말라고 하고. 촉새 같아. 하고 캔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미토 씨는 사쿠라기를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맞았다. 막 씻고 나와 청결한 향기를 풍기는 사쿠라기의 머리카락은 짧았으나 여전히 물기가 떠나가지 않아 축축해 보였다. 그러다가 불쑥, 사쿠라기 군, 너 촉새라는 말도 아니? 라고. 마음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뭐어?! 사쿠라기는 한 마리의 황소처럼 쿵쾅거렸다. 농담이 아니라 온 복도가 울렸다. 그 소동을 한번 겪어보았다가 이젠 익숙해진 미토 씨는 와하하 웃으면서 사쿠라기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퉁 쳤다.
야, 멋있더라. 선수 될 거니.
말 없다.
응.
대답은 담백했으나 그 안의 열기는 뚜렷하였으므로 미토 씨는 웃었고 손을 뻗어 막 씻어서 물기가 남은 머리를 헤집었다. 점점 멋진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그 말을 들은 사쿠라기는 입을 우물대다가 무언가 매듭을 풀어버린 것 처럼 오묘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정확하게 미토 씨가 그의 얼굴을 쓸어주기 좋을 정도의 차이만 남겼다. 대학도 그 쪽으로 갈 거야? 미토 씨는 사쿠라기의 잘 올라붙은 광대뼈의 윗부분을 엄지로 부드럽게 쓸어주며 말했다. 아마도. 사쿠라기의 시선은 자판기의 가장자리를 보는 듯 싶었다. 으레 칭찬이 익숙치 못한 청소년들은 다른 곳을 보곤 했으므로. 그것의 연장이 오늘이라는 생각에 미토 씨는 마냥 즐거운 가슴을 누르면서 그의 뺨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양키 녀석이 장하네. 아, 진짜.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미토 씨는 경기장을 떠났다.
*
그리고 다시 공백. 들리는 말로 사쿠라기는 체육특기생으로 픽업되어 대학에 갔고, 그러다가 다시 미국으로 떴다던가. 그 사이에 한번도 오가지 않은 사쿠라기에게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었으나 청소년이 어른이 되어 자기만의 세상을 가진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므로. 정말이지 미토 씨는 귀여워했던 어린이가 잘 커서 날아올랐다는 사실이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종종 사쿠라기 하나미치라는 이름을 돌리는 스포츠 뉴스에서 스칠 때 마다, 저 아이가 가나가와의 그 아이입니다. 하면서 미토 씨는 비죽비죽 웃곤 한 것이다. 그렇게 몇 년쯤 지나, 미토 씨가 삼십대 중반의 능선을 넘어갈 때 즈음. 어쩌면 겨울.
*
막 꺼낸 등유 난로를 가운데에 두고서도 파출소 안은 쉽게 뎁혀지지 않아서 미토 씨는 겨울용 점퍼를 입고 업무를 봤다. 물가의 가나가와는 입김이 나올 정도의 온도는 아니었으나 하다고 그냥 있기에는 영 쌀쌀한 날씨였다. 한창 서류를 적던 와중 덜컥 하고 파출소의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미토 씨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시죠? 볼 캡의 그늘이 짙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체격이 아주 좋은 것을 넘어서 심하게 컸다. 키가 문짝을 넘어섰다. 미토 씨는 느슨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모를 일에 예비하기 위해서였다. 사고 접수이신가요? 물음이 끝날 때 즈음 남자는 모자를 벗었다. 짧게 자른 머리는 붉다. 아.
하나미치.
홀린 듯 말한 이름에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어쩐지 어린애라고 하기엔 좀 여유가 묻은 얼굴로 웃었다. 필시 문 밖은 겨울일 터인데 봄 꽃이 들이닥친 바람의 향내가 나는가. 미토 씨의 머리에서 요란한 경고등이 울렸다. 울리다 못해 뇌를 탕탕 치는 것도 같았다. 하나미치가 입을 열었다. 미토 씨, 나 스물 다섯인데. 미토 씨는 자리에 풀썩 앉아버렸다. 이젠 그냥 요헤라고 불러도 되나? 등받이에 등도 기댔다.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등받이에 등도 기대고 이마에 손도 얹은 미토 요헤이 순경 앞에 서서 히죽히죽 웃는 사쿠라기 하나미치 선수의 시뻘건 머리보다 미토 씨의 목이 더 빨개진 것은 뭐 나중 일 아닌가. 하여튼 미토 씨는 본인이 뿌린 씨를 거둘 차례가 왔다. 이름을 불러야 하는 것이다.
자, 말해 줘요, 미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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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깊은 카멜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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