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2차 창작

[루센/마키센] 월한강청(月寒江淸) - 외전

+후기

그 인간이 생을 다하면, 너는 다시 내게 종속되는 거야.

맹세할 수 있겠어? 센도?

루카와는 간만에 홀로 외출했다. 볼 일이 있어 쇼호쿠에 잠시 들렀는데 마침 장이 서는 날이어서 센도에게 줄 선물까지 사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언덕을 넘어 강의 상류에 다다르자 센도와 함께 사는 집이 보였다. 그런데 집에 가까워질수록 루카와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이쯤 되면 센도가 내 앞에 짠 하고 나타나서 반겨줄 때가 됐는데, 왜 안 나타나지?

순간 덜컥 겁이 난 루카와가 집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설마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센도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허겁지겁 집에 도착해 문을 벌컥 열어젖혔더니.

“앗, 깜짝이야. 루카와 다녀왔어?”

“...누구?”

집안에서 센도가 처음 보는 남자와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그 남자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왼쪽 눈 밑에 점이 있었는데, 루카와를 바라보는 눈빛이 영 좋지가 않아서 루카와 역시 그 남자를 째려보았다.

“아, 마키 상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겠구나. 이 분은 마키 상이야, 나를 태어나게 해준 바다. 마키 상, 루카와예요.”

센도가 서로를 소개해줬지만 두 남자의 표정은 갈수록 험악해졌다. 분위기가 왜 이런지 모르는 센도만 그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쩔쩔맸다. 문을 소리 나게 쾅 닫고 들어온 루카와가 보란 듯이 센도의 옆에 앉아 센도의 어깨에 의기양양하게 팔을 둘렀다. 그 모습을 잠시 노려보던 마키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보도록 하지.”

“마키 상, 벌써 돌아가시게요?”

마키가 돌아가려는 듯 문밖으로 향하자 센도가 루카와의 품에서 벗어나 얼른 따라붙었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배알이 꼴려서 루카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마키의 뒤통수만 노려보았다.

“다음에 또 올게, 센도.”

마키의 인사에 센도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마키는 바다로 돌아간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센도는 마키가 사라진 빈 자리를 잠시 바라보다 문을 닫고 들어왔다. 루카와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입이 댓 발 나와 있었다. 센도가 웃으며 루카와의 옆에 다시 앉자 루카와가 입을 열었다.

“그놈은 왜 왔대?”

“아아, 나한테 줄 게 있어서 오신 거야. 원래 이맘때면 항상 나한테 이런 걸 주고 가시거든.”

센도가 한쪽에 놓인 옷가지와 장식품들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것들은 루카와에게도 퍽 낯이 익은 물건들이었다. 매년 용왕제 때 쇼호쿠에서 용왕에게 바치는 공물들이었다. 마을에서 진상한 귀한 원단들과 각종 보석으로 만든 장식물들이 다 어디로 가나 싶었는데, 센도에게 가고 있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눈썰미가 좋지 않은 루카와가 보기에도 그것들은 전부 비싸고 귀해 보였다. 순간 자신이 시장에서 사 온 선물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루카와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런 루카와의 속도 모르는지, 센도는 마키에게 선물 받은 원단을 펼쳐보며 이걸로 새 옷을 만들어 입자고 환하게 웃었다.

그날 밤, 루카와는 잠이 들지 못한 채 고민에 빠졌다. 센도와 혼인하면 그 바다한테서 센도를 완벽하게 빼앗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실체를 가진 마키와 마주치니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분명히 센도나 그 녀석보다 먼저 죽을 텐데. 그럼 역시 센도는 그 자식한테 돌아가겠지? 더 분한 건, 그 바다라는 존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단 것이었다.

그 깨달음은 센도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내내 루카와의 가슴 한 켠에 계속해서 남아 마음을 아프게 찔러댔다. 지금 우리는 너무 행복하지만 이 행복은 언젠가 끝이 있을 것이고, 나는 센도를 떠나야 할 것이다. 나는 어째서 한계를 가진 불완전한 존재인 걸까?

그렇게 수년간 거듭해서 고뇌한 끝에, 루카와는 나름의 답을 내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시도해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것을 잘 알았다.

“센도, 부탁이 있어.”

“응? 뭔데, 루카와?”

“내가 죽으면 나를 강가에 묻어줘.”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센도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부탁을 센도에게 하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루카와도 잘 알고 있었지만, 반드시 센도가 해줘야만 했다.

“그리고 무덤 위에 나무를 심어 줘.”

“루카와…”

“그러면 내가 그 나무의 정령으로 다시 태어나서 너를 만나러 올 게.”

센도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변했다. 루카와가 그런 센도를 품에 안으며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이런 부탁해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내 유언이니 꼭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센도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면서 알겠다는 대답만은 절대 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함께 수없이 많은 사계절을 보내고, 마침내 루카와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함께했다. 센도는 유언대로 루카와를 그들이 살았던 집 근처 강의 상류에 묻어주었다. 그러나 그 위에 나무를 심지는 않았다.

미안해, 루카와. 네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어.

나는 이제 내 바다로 돌아가야 하니까.

센도는 땅에 묻힌 루카와를 뒤로 한 채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지만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줄기와 함께 씻겨 내려갔다. 강은 자신을 기다려준 바다를 향해 힘차게 흘러갔다.

며칠 간 지속되던 폭우가 그치고 촉촉해진 땅 위에 한 단풍나무 씨앗이 바람에 날아왔다. 그리고 그 씨앗이 루카와가 몸을 뉜 무덤 위로 내려앉은 사실은 센도도, 마키도 알지 못했다.

-fin.


아래는 후기.

이걸로 전래동화는 끝. 센도는 루카와랑도 마키랑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한가지 고백하자면, 동양풍 AU는 처음 써보는데 생각보다 많이 애먹었습니다. 일단 애들 이름을 익숙한 한국판이 아니라 일본판으로 쓰다 보니 중간에 자꾸 튀어나오는 대협이, 정환이를 쓰다 지우다 다시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고… 동양풍에 절대 나와서는 안 될 외래어들이 구석구석 침투하는 바람에 그거 찾아서 고치느라 또 애먹었죠. (키스를… 키스라고 하지를 모태…) 中편에서 루카와의 심장 박동 소리를 규칙적인 리듬(...)이라고 썼다가 뒤늦게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며 수정했는데 설마 보신 분 없으시겠져…?

(혹시 제가 미처 찾아내지 못한 외래어나 오류 발견하신 분은 조용히 찔러주세요. 제발요.)

이 망상의 시작은 루, 센, 마키의 일본 이름의 한자 뜻을 찾아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루카와(流川)의 한자가 무려 ‘강으로 흐른다’는 뜻인 걸 보고 센도(仙道)라는 이름의 강으로 흐르는 루카와를 떠올렸고, 강은 바다로 흐를 수 밖에 없는데 그 바다가 마키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심지어 마키(牧)는 ‘다스리다’라는 뜻이라니… 형은 어떻게 이름도 마키에요… 마키 상ㅠㅠ

불멸자와 필멸자의 사랑을 다루다 보니 결말을 어떻게 내면 좋을까 잠시 고민했습니다만, 저는 지옥의 해피엔딩충이라 센도가 양다리 걸치는 걸로 잘 합의 봤습니다. 사실 인간인 루카와의 사랑은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들의 불꽃 같은 사랑이지만, 정령인 센도와 마키의 사랑은 일반적인 범주와는 다릅니다. 좀 더 복합적인 감정이에요. 그들은 서로 창조주와 창조물이고, 한 쪽이 다른 쪽에 종속되어 있으며, 여기에 물론 성애적인 사랑까지도 더해져 있어요.

그래서 작중 마키 상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아주 날벼락이 따로 없습니다. 가장 애끼는 센도랑 알콩달콩 잘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인간 하나가 센도를 채가려고 하네? 근데 센도도 그놈 좋다고 붙어있다가 소멸하게 생김(이래서 자식 키워봤자 아무 소용 없음).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자식은 안 된다고 강경하게 나와도 센도가 죽고, 그 개놈자식을 죽여버려도 센도가 죽음. 마키 상 영생 최대의 시련…

결국 마키는 센도를 잃느니, 잠시 떨어져 있는 걸 선택할 수 밖에 없었겠죠. 아카기의 말처럼 백년도 못 사는 인간의 삶은 영생을 사는 그들에겐 찰나에 불과할 테니. 그래도 막상 떨어져 있으니 센도가 보고 싶고 걱정돼서 찾아가 보는데, 그놈이랑 살림 차린 꼴을 보니 또 속이 뒤집히는 마키 상ㅋ 그래도 조금만 참자. 쟤 죽고 센도랑 다시 영생 살면 되니까. 그러나 루카와의 집착은 끝이 없었고 다음 생에 또다시 운명을 걸기까지 합니다.

사실 루카와는 전생에 정령이었고 어떠한 이유로 소멸한 후 인간으로 환생했다는, 발로 지은 설정이 있었는데 본문에 넣기가 애매해서 뺐습니다. 그래서 루카와는 정령을 볼 수도 있고 정령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던 거죠. 그러나 이건 전생의 이야기고, 무덤 위 단풍나무 씨앗이 싹을 틔워서 루카와가 다시 정령으로 태어날 수 있을지는 저도 모릅니다. 정령으로 다시 환생하겠다는 루카와의 유언은 그저 센도를 놓고 싶지 않은 마음에 했던, 필멸자의 집착을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었으니까요.

아무튼 이렇게 제 생애 첫 동양풍 판타지AU 연성은 끝이 났습니다. 진짜 슬램덩크 때문에 별걸 다 하쥬?ㅋ 이게 다 애들 케미가 미쳐서 그래요.

참,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즐거운 덕질하시고 루센, 마키센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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