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태섭] 해홍기海紅紀 02.
제 一 장, 사자지연死者之練 02.
해홍기海紅紀 ~東海使臣 紅川紀行~
슬램덩크 2차 창작, 세테르seter 대만태섭.
사자지연死者之練.
전날 저녁으로 먹고 남은 누룽밥을 양은 냄비에 눌어붙지 않을 만큼 바싹 익힌 후, 찬물로 숭늉까지 우려 조금 늦은 아침을 때운 정대만이 커다란 등산 가방에 가득 채운 짐을 어깨에 가볍게 이고, 한 손에는 농구공을 들고서 자취방을 나선다. 온 사방에서 힐끗거리는 시선을 모른 척 공을 두어 번 튕겼을까, 날씬하고 우아한 검은색 중형 세단 한 대가 다가와 정차한다. 익숙한 승용차의 등장에 대만이 슬그머니 표정을 구긴 채 뒷좌석에 등산 가방을 벗어 던지고는, 잽싼 발걸음으로 보조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그는 자신을 마중 나온 어머니의 장난기 가득한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며 애써 한숨을 삼킨다.
“왜 엄마가 와요?”
“얘는, 오랜만에 보는 엄마한테 하는 말이 하필 그거니?”
귀염성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아들의 투덜거림에 여자 역시 샐쭉거리며 아들을 타박한다. 출발하기 전에 연락한 걸 대체 뭐라고 생각한 건지, 자신이 직접 데리러 올 거라고는 생각한 적 없다며 입술을 샐쭉거리는 걸 멈추지 않는다. 대만일 무척이나 귀여워하여 작년부터 골머리를 앓던 연구조차 손 놓은 채 마중하러 가겠다는 시아주버님이 부담스러울까 긴 설득 끝에 자신이 데리러 온 건데 그게 그렇게 불만인 모양이다.
“아니이… 할머니가 사람 보내신다고 하셔서, 엄마가 오실 거라고는 생각 안 했단 말예요.”
“어머님께서 보내려던 분이 느이 둘째 백부인 건 알고 하는 소리니?”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투덜투덜 불만을 늘어놓던 대만의 입술이 우뚝 다물린다. 아버지가 다섯 형제의 막내인 탓에 정대만에겐 백부만 넷이요, 그중에서도 가장 사이가 좋은 게 둘째 백부인 정중환이지만 자취방에서 큰집까지 가는 길 내내 나란히 앉아 뻔한 잔소리며 관심도 없는 야구 이야기를 듣는 일만큼 고역이 따로 없다. 어머니의 배려에 불편한 상황을 피했음을 깨달은 대만이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표한다.
“소자, 어마마마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읍해 마지않사옵니다.”
“깔깔깔 대만이 너도 참. 어서 가자. 그렇잖아도 어머님이 너 온다고 이거저거 많이 준비하고 계신 모양이야.”
할머니께 호출받아 큰집으로 향하기 전에 본가에 들러 벌써부터 긴장되어 벌렁거리는 마음을 감추려 얼음을 동동 띄운 제호탕¹ 한 사발을 들이켠다. 할머니 앞에서까지 마냥 편하게 차려입는 꼴을 보일 순 없어 청재킷 대신 정장 재킷을 골라 복장을 단정하게 갖춘다. 큰집으로 향하는 길목을 따라 익숙한 풍경이 늘비해 대만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풍경을 눈에 담는다. 마냥 수다스럽지도 않고 지나치게 과묵하지도 않아 가족들에겐 마냥 살가운 아들이 답지 않게 입을 꾹 다문 채 복잡다단한 표정을 짓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아, 예경은 걱정스러운 맘에 아들을 향해 말을 건넨다.
“그런데 아들,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어머님이 이런 날에 너를 다 부르실까?”
“그으… 음, ……엄마. 예전에 그, 누구시더라. 친가 쪽 어른 한 분이 추모굿 하신다고 고생하셨던 적 있잖아요.”
“계셨지. 대만이 너희 셋째 작은할아버님네 아주버님. 요샌 좀 괜찮으신지 모르겠네.”
아들의 물음에 자연스럽게 당시의 일을 떠올린 예경의 낯에 어렴풋한 시름이 서린다. 대만이 막 농구를 시작하던 시절에 시댁을 발칵 뒤집었던 일이다. 아들에게는 하루하루 농구 실력이 늘어나 그 당시 아이를 가르쳐주던 농구 교실의 감독님이며 코치들에게 칭찬이나 한가득 듣던 시절의 일이라 그 외에 세세한 일은 기억나지 않겠지. 예경의 사정은 다르다. 제 어릴 적을 쏙 빼닮아 지나치게 활달한데다 도무지 자리에 가만히 있질 못하는 성격 때문에 매일같이 어딘가 한 군데 다쳐 들어오던 아들이 농구에 정을 붙인 후로는 그나마 통제할 수 있게 되어, 예경이 그나마 다른 일에도 눈 돌릴 여력이 생겼을 때 터진 일이라 그때 그 일은 도무지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았다. 당장 무당도 아닌 산 사람이 추모굿 매개체가 되는 일 자체가 친정에서는 우스개 농담처럼 여겨지던 일이라 더더욱. ……헌데 왜 갑자기 그때 일을 꺼내는 걸까. 우리 말썽꾸러기 아들은.
“엄마는… 그때 일 기억 하세요?”
“그럼. 그때 시댁이 얼마나 난리였는데. ……태중 약혼이었다던가? 상대측 일가족이 사고로 몰살당하는 바람에 성불을 못 하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고 했어. 그 아주버님께서 그걸 가족들이랑 상의도 없이 덜컥 받아들여서 이혼을 하네마네 난리도 아니었어. 그런 걸로는 이혼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해서 별거하겠다고 큰동서께서 펄쩍 뛰고……. 잠깐, 설마? ――대만이 너?!”
“그, 저도 원해서 받아들인 건 아니고… 불가항력이었사옵니다 어마마마.”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더니 아닌 척 애교까지 부리는 모양새가 기가 막혀, 예경은 잠시 갓길에 차를 세우고 답답한 속을 다스린다. 그때 먼발치에서 보았던 난리가 다시금 뇌리에 되살아난다. 잠깐 엇나간 적이 있긴 해도 크게 부모 속을 썩이는 일 없이 저 나름대로 그럴싸한 효자 노릇은 할 줄 알던 아들이, 하필 다 자라서 대학까지 들어간 다음에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그래서, 누구니?”
“뭐가 요?”
정말로 몰라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의뭉스럽게 구는 건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그는 아들에게 화내지 않도록 몇 번이고 입술을 짓씹으며 천천히, 또박또박하게 되묻는다. 이번에도 뭘 묻는지 모르겠다며 시치미를 뗀다면 시댁에 도착하기 전에 크게 한 번 단매를 들 생각이었다.
“대만이 네가 성불시켜 줘야 하는 상대가 누구냐고.”
“……그게, 저도 아직 잘 몰라요. 상대가 저를 아는 눈치이긴 한데… 누군지 확실하지 않아서. 그래서 저도 여기저기 발품 좀 팔아야 해요.”
“아이고, 맙소사…….”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따로 없다. 대만을 임신하면서 끊었던 담배가 오늘따라 유독 간절해지는 기분이다. 예경은 긴긴 심호흡 끝에 끓어오르는 울화를 다스리고는, 곁에 아들을 태우고 시댁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되뇌었다. ……상황을 캐묻는 건 시댁에 도착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막내아들의 외동아들이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유독 대만이를 귀여워하시는 시어머님도 그 정도는 엄연히 눈감아주실 테고. 그나저나, 추모굿의 매개체라니. 그냥저냥한 일마저도 신기가 제대로 트이지 않아 이도 저도 아닌 대만이에게는 큰일 날 일이니만큼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며칠 전에 시어머님께서 전화 주셨을 때는 그렇게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걱정스럽고 착잡한 마음을 애써 다스린 예경이 콱, 가속기를 밟아 속도를 올린다. 혹여 단속에 걸려 과속 딱지를 떼게 되어도 까짓것 벌금 좀 물면 그만이다. 돈 따위가 아들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시내 한복판에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하는 모양새에 대만이 핼쑥한 표정으로 보조 손잡이를 바싹 움켜쥔다. 대답하면서도 내심 어머니께서 많이 놀라고 화내시겠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느닷없이 과속 운전을 하실 줄이야. 제발, 제발 무사히, 무탈하게 큰집에 도착하기를. 대만은 태어나 처음으로 그렇게 빌고 또 빌었다. 어영부영 과속으로 달린 끝에 십여 분도 채 걸리지 않아 큰집에 도착하자마자 대만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모른 척 서둘러 차에서 내린다. 멀끔하니 별일 아니라는 듯한 표표한 얼굴로 마중을 나온 할머니와 둘째 백부의 모습에 떨떠름하게 웃은 대만이 으으, 하고 어깨를 파르르 떤다.
여느 때였다면 그런 대만을 버릇없다며 꾸짖었을 둘째 백부가 지금은 그저 모든 걸 이해한다는 양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새에 대만의 표정이 샐쭉하게 변한다. 정대만의 어머니, 정씨 집안 막내 정중헌의 처 이예경 여사의 거친 운전은 친가와 외가 모두에게 유명한 탓에, 아들인 대만과 남편인 중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예경이 운전하는 차에는 동승 하려고 들지 않는다. 측은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할머니도, 마냥 재밌으면서 그저 모든 걸 이해하는 척 너그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둘째 백부도 그렇게 얄미울 수 없다. 그는 툴툴거리는 마음을 숨기는 일 없이 두 웃어른을 향해 꾸벅 인사한다.
“저 왔습니다 할머니, 둘째 백부.”
“그래, 욕봤다. 어서 오거라.”
“고생했구나. 어서 와라 대만아.”
고부갈등을 논하기에는 중헌과 예경 사이에서 몸소 중매를 서서 맞선 자리를 꾸린 게 그의 시어머니였고, 중환은 적당한 구석에서 계수季嫂를 존중하여 예우할 줄 아는 사람인지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인사가 오간다. 고즈넉하고 싱그러운 정원을 지나 고래 등 같은 기와집으로 들어서는 걸음이 평소보다 무거운 걸 제외하면 정말 꼭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만남이다. 한옥의 특징을 담은 외관은 그대로 둔 채 한지를 바른 창호문은 앞뒤로 유리를 덧대고, 대청마루에는 크리스털 샹들리에며 사랑방이며 곳곳의 방마다 형광등이 달려 있으니 온전한 한옥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많다. 지금이야 많이 무뎌지긴 했지만, 중학교에 올라갈 적만 하더라도 큰집에 오면 꼭 어딘가 별천지라도 온 느낌이 들어 두근두근 가슴 설레는 맘으로 잠들곤 했다. ……좌식 생활이 기본인 곳이라서 불편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지만.
사랑방에서 주방 찬모님이 한껏 솜씨를 부린 다담상 사이로 둘러앉아 느긋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대로 무속과 친밀하여 조선 시대부터 인천 대지주로 이름 높았던 정문鄭門과 서해 만선주滿船主 집안 사이에서 태어난 것치고는, 정대만의 신기는 눈곱만도 못한 수준이다. 더군다나 됨됨이마저 그 어머니를 빼닮아 활달하여 그나마 있는 신기조차도 억눌러버릴 만큼 양기로 가득한 사람인지라 스스로는 신기가 전혀 없다고 생각해 왔으니 그 눈곱만도 못한 신기로 인해 덜컥 누군지도 모를 유혼의 추모굿 매개체로 선정된 사실이 당혹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거다. 그런 사정에도 이야기가 제법 차분하게 진행될 수 있는 건 그의 친할머니이자 친정이 정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가풍을 가진 월성 최문崔門에서 나고 자란 월성댁 덕분이다. 성정이 워낙에 불같은 탓에 대만을 낳고 나서야 조금 누그러진 며늘아기의 성질머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월성댁은 혹여 예경의 불같은 성질머리에 탈이라도 나랴 싶어 그의 입을 다물게 했고, 워낙 여기저기서 예쁨받으며 자란 탓에 이상한 구석에서 눈치 없는 대만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입막음 당한 제 어머니의 속을 뒤집는다.
“그래, 그 유혼과 이야기는 나누어 보았고?”
“일단은요. 그런데 음…… 정확히 누군지도 모르겠고, 어느 인연이 닿아서 그렇게 된 건지는 저도 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마냥 여상스럽게 말하고픈 기색이 역력해 예경의 시선이 단박에 흉흉해져, 대만이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려 어머니의 찌를듯한 눈초리를 피한다. 눈치 없고 무신경한데다 무딘 구석까지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사물을 예리하게 바라보는 직관이 있는 아이가 저렇듯 말을 뭉개버리는 걸 보면 유혼의 정체를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외따로이 확인이 필요할 만큼 복잡다단한 인연인 모양이다. 어쩌다 왈패 노릇을 하게 된 대만의 이웃사촌 이영걸과 허구한 날 어울려 다니며 고등학교마저 빼먹고 다니던 3년 전에도 이렇게까지 말을 얼버무린 적은 없다. 술·담배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엇나갈 대로 엇나가 집안 어른들 속만 썩였으면서도 당당하던 녀석이 말을 얼버무리는 모양새에 월성댁의 입에서 절절한 한숨이 흘러넘친다. 고등학교 시절 크게 엇나간 이후로는 집안 어른들의 타 들어가는 속을 알아 괜한 사고를 친 적 없는 녀석이 두 사람의 걱정스러운 맘을 알면서도 꿋꿋하게 입을 다무는 구석을 보며 대만의 둘째 백부 중헌이 기분 나쁜 얼굴로 히죽 웃는다. 피는 못 속인다고, 지금껏 제 어머닐 닮은 구석만 있다고 생각했던 막내 조카 녀석의 반응이란 마치, 계수와 맞선을 보고 온 날의 막내가 보여 준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아 대강 가늠이 간다. 그렇다고 말을 상세히 털어놓지 못하고 얼버무리고 뭉개버리는 모양새는 또, 남의 집 귀한 아들을 상대로 크게 주먹질까지 했었다던 그때의 모습과 비슷해 누군가를 마음 깊이 생각하고 있는 조카의 모습에 마냥 놀려주고픈 마음 반, 하필이면 그런 상대가 차마 가족 친지들에게 쉽게 말 못 할 상대라는 사실에 참담한 마음이 절반이라 괜히 신경 쓰인다.
“대만아. 네가 납득가지 않는 건 둘째치고, 네 예상이라도 들어야 우리가 도울 수 있지 않겠니?”
괄괄하게 들리긴 해도 내심은 걱정스러운 맘에 너그러이 타이르고 있음을 알아, 대만이 움찔 목을 움츠리며 할머니 월성댁을 바라본다. 평생을 보고 자란 애정 가득한 시선에 저도 몰래 바짝 긴장하여 꾸역꾸역 묻어두고자 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려, 대만은 우물쭈물 어젯밤 동해 용궁에서 겪은 일이며 들은 것들로 스스로 판단한 사정을 조심스럽게 설명한다. 동해 용왕이 구태여 인천 만신을 경유하여 경고를 한 사유는 품에 고이 끌어안고 보호하고 있는 유혼을 아껴서지, 저희들 정씨 집안을 걱정한 게 아니라는 사실하며 그만치 아끼는 게 당연하게 여겨질 만큼 정순한 존재라는 사실까지. 과연 자신이 추모굿을 해줘야 하는 대상과 말다툼을 벌여 동해 용왕이 단호하게 끼어들어 말렸다는 사실은 말할 수 없어 입을 다물었지만, 지금 사랑방에 앉아 다담상을 들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들은 대만의 평생을 지켜본 보호자들이라 그가 동해 용왕 앞에서마저 사고를 친 정황을 불현듯 깨닫는다. 관세음보살…… 월성댁이 늘 가지고 다니는 손목의 염주를 알알이 굴리며 염불로 마음을 다스린다.
“그리고 그게……. 음. 제 추측이 맞는다 쳐도 걔네 집안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거 관련해서 걔랑 이야기해본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진짜로, 함부로 말씀드렸다가 걔네 집에 폐 끼칠까 봐서요.”
“……동해 용왕께서 죽은 아해의 유혼을 그리도 아끼신다니, 적어도 이 할미는 평생토록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구나. 국난이 아니고서는 사바의 일에 참견조차 하지 않으시는 분이……. 짐작은 했다만, 대만아. 네가 할 추모굿이 예삿일은 아니구나.”
늘 상 차분하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평정을 가장하지 못하고 와르르 떨린다. 대만은 살아온 평생토록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할머니를 보는 건 처음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마을 잔치처럼 치러졌던 장례식에서조차 할머니는 차분하니 담담한 기색을 유지하셨는데. 정대만은 친가와 외가 모두 무속에 친숙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지긋지긋하리만치 굿판을 자주 보고 자랐지만 단 한 번도 귀신을 보거나 느껴본 적이 없다. 명절이나 제삿날이 되어 차례와 제사를 지낼 때면 종종 사촌 형제들이 조상신께서 오셨다며 위패 너머 어딘가를 바라볼 때조차 대만은 단 한 번도 조상신의 왕림枉臨을 느껴본 적 없다. 그러니까, 이번에 꿈자리가 몽유도원의 동해 용궁으로 고정되어 유혼과 동해 용왕을 본 게 난생처음 겪는 무속 현상이다. 그나마 나고 자란 집안이 집안이라 글월로나마 보고 들은 게 있어 곧장 알아차렸을 뿐. 해서, 동해 용궁에 있는 그 유혼. 태섭이네 형제일 수사귀가 남다르다는 사실은 깨달을 수 있어도 그게 얼마나 신이한 일인지는 실감할 수 없다.
“아무리 선하고 정순하다 해도 유혼의 본질은 귀鬼. 후손의 상념을 양식으로 그들을 지키는 조상신조차도 산 사람과 깊이 마주하면 해를 끼치건만. 아무리 동해 용왕의 보증이 있어도, 대만이 네 스스로 그렇게 느꼈다 하더라도 사자가 무해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라. 진정 선하고 정순한 혼이었더라면 추모굿을 받아 성불할 생각보다 그대로 소멸할 생각을 했겠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월성댁의 충고에 아들을 바라보던 예경의 시선이 더더욱 파르라니 사나워져, 대만이 어깨를 움츠린 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할머니 말씀처럼 선한 귀신이 없다는 건 알지만, 동해 용왕씩이나 되는 존재가 정순하다고 했고, 겉으로 보이는 태도에 악의가 느껴지지 않아 그대로 덜컥 믿어버린 게 할머니가 보시기엔 어마어마한 문제인 모양이다. ……그치만 태섭이도 자신을 싫어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도리어 친근하게 굴었으니까 그 녀석의 형제인 유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 같은데. 월성댁과 예경이 들으면 대경하여 달려들 생각을 저 혼자 떠올리던 대만이 아, 하고 부러 할머니와 어머니, 둘째 백부의 관심사를 돌리려 말을 꾸민다.
“음. 근데 확실히…….”
어딘가 의뭉스러우면서도 불퉁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는 대만의 양에, 그게 자신을 향한 따가운 눈초리를 피하려고 꾀어내는 언행이라는 걸 알면서도 월성댁과 중환, 그리고 예경까지 세 사람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긴장 서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설마, 아무리 월성댁의 막내아들의 외동아들이며 동시에 항렬이 같은 사촌 형제들 사이에서는 늦둥이나 다름없어 집안의 막둥이라고 해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토록 철없이 굴진 않겠지. 그러나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세 사람의 아련한 기대는 대만이 툴툴거리며 꺼낸 이야기에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추모굿 매개체 노릇해야 해서 또 한동안 농구 못 하게 될 거 생각하니까 좀 짜증 나긴 하네요.”
상황에 비해 몹시도 태평스럽기 그지없는 이야기에 사랑방 가득히 깔려있던 긴장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은근한 짜증이 대신한다. 호로록. 맑게 우려낸 녹차로 평정을 되찾으려 했지만, 한술 더 나아가 숫제 익살스럽게 웃는 막내 손주의 양에 도리어 울화가 치민 월성댁이 나직한 목소리로 며늘아기를 부른다.
“……며늘아가.”
“네 어머님.”
“우리 손주가 훈육이 좀 필요한 모양이구나.”
“제 생각도 마찬가집니다 계수님.”
“호호호호……. 어머님과 시아주버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네요.”
예경의 목소리가 사랑방 가득히 높고 낭랑하게 울려 퍼진다. 등짝이 남아나지 않을 위기를 감지한 대만이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예경이 아들의 팔뚝을 붙잡아 왕년에 스파이크를 때리던 실력 그대로 등짝을 후려친다. 철썩. 듣기만 해도 절로 등이 아픈 거센 마찰음에 중환이 몸을 움츠리며 굼질굼질 무릎걸음으로 조카와 거리를 벌린다. 그리고 들려오는 예경의 울화통 터진 목소리.
“으이구, 내가 너 때문에 못 살아, 못 산다고!!”
“아, 아! 아, 엄마. 아. 아파요. 아, 아악, 예경 여사님!! 여사님 아들 등짝 맞다 죽어!”
“죽던가, 이 말썽쟁이야!!!”
정대만은 오늘도 어머니의 손아귀에서 도망치는 데 실패했다.
오매육烏梅肉과 백단향白檀香 초과草果 등의 한방재료를 꿀에 재운 후 중탕하여 만든 냉차.
공미포 6,647자.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게 대만태섭은 맞나. 그냥 정대만을 괴롭히고 싶었던 내 무의식의 표출이 아닐까. 그냥 그런 생각만 들고 그러네요. 참고로 대만이 어머니 이예경씨는 대만이 임신과 동시에 은퇴한 전직 아마추어 배구선수입니다. 살아남아라 정대만. 동시에 태양수인이지요. 대만이네 아버지 정중헌은 햇살수인이었습니다. 햇살수인과 태양수인이 만나 양기충만 포카리수인이 태어나는 바람에 신기는 흔적과 흔적기관 사이의 어드메쯤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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