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테르seter, 해홍기海紅紀.

[대만태섭] 해홍기海紅紀 03.

제 一 장, 사자지연死者之練 完.

해홍기海紅紀 ~東海使臣 紅川紀行~

슬램덩크 2차 창작, 세테르seter 대만태섭.

사자지연死者之練.

한바탕 푸닥거리가 이어진 끝에서야 겨우 상황이 일단락되어 월성댁이 다담상을 새롭게 차려내어 분위기를 환기한다. 단정하니 만족스러운 얼굴로 방싯방싯 미소 짓는 예경의 모습에 대만이 슬금슬금, 자신이 어머니께 열심히 혼나는 동안 거리를 벌린 백부의 곁으로 다가가 앉는다. 말로 꺼내진 않지만 심란한 마음을 숨길 생각은 없는지 잠깐 툴툴거리더니 이내 할머니를 향해 조심스럽게 여쭙는다.

“아무튼, 이제부터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어쩌기는. 동해 용왕께서 거두신 영혼이니 동해로 가야지. 다행스럽게도 이 할미 친정이 월성에 있질 않아. 요 한나절이면 너 머물 정도의 협조는 구할 수 있으니 기다려 보아라.”

이러면 올 한 해 꼼짝없이 휴학하게 될 건 확실하구나. 대만에겐 도저히, 빈말로도 반길 수 없는 이야기다.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진외가陳外家 댁에 신세를 져야 한다니. 사정을 생각한다면 월성으로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차라리 호텔에 장기 숙박을 한다면 모를까, 할머니의 친정댁이라는 가까우면서도 먼 집안에 신세를 져야 한다는 게 그렇게 불편할 수 없다. 대만은 할머니의 안배를 능히 짐작했으면서도 기어이 토를 단다.

“어우, 굳이 양북면까지 갈 필요가 있어요? 그야 거기가 동해 용왕의 영기와 직결된 곳이라는 건 알지만…….”

“추모굿 매개체 노릇을 하려면 상대의 내력이나 출신지의 구전설화도 살펴봐야 할 텐데, 월성 인근 민간에서는 그만큼 사료가 풍부한 데가 없어.”

딱 잘라 단언하는 할머니의 양에 대만이 애써 한숨을 삼킨다. 그래. 괜히 그 먼 경상도에서 인천까지 올라와 혼사를 맺은 거겠어. 무속이 일상생활인 점이며 고서나 사료가 집안에 가득한 점까지, 대만이 나고 자란 집안의 큰집과 무엇 하나 다를 게 없다. 하물며 무속사학자인 둘째 백부가 지금 이 자리에 계신다는 건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보호자이자 할머니의 대리인 노릇을 둘째 백부께 맡긴다는 소린데, 그럼 월성에 내려가는 일조차 둘째 백부와 함께라는 뜻이다. 추모굿 매개체 노릇 끝날 때까지 허구한 날 그놈의 야구 이야기만 잔뜩 듣게 생겼네. 대만은 보란 듯이 삐죽 입술을 내밀어 불만을 표한다.

“저 그럼 둘째 백부랑 함께 지내야 해요? 내도록?”

“우리 조카님, 내가 보호자라는 게 그렇게 불만이야?”

능글맞게 웃으며 건네는 이야기에 대만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하필이면 진외가 댁에서 신세를 져야 하는 이상, 대만에게는 둘째 백부를 제외하면 달리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없다. 커다랗지만 얄팍한 손길이 대만의 머리통을 마구잡이로 헤집는다. 어릴 적부터 변함없이 저를 어여뻐 해준 중환의 손길에 애써 외면하고 있던 대만의 시선이 도르륵 중환을 향해 굴러간다. 추모굿의 매개체 노릇도, 그걸 위해 월성으로 내려가야 하는 상황도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마음을 굳게 먹을 수밖에.

정대만의 할머니, 월성댁의 친정인 월성 최문에 사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는 일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이미 그의 둘째 백부 정중환이 남부 무속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적이면 으레 월성 최문에 신세를 지던 내력이 있어 더더욱 협조룰 구하기가 쉬웠을 테지만, 대만의 솔직한 마음으로는 내심 거절해주길 바랐다. 아무렴, 태어나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진외가 댁에 장기간 신세를 져야 한다는 사실이 이만저만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진외가 댁에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짐을 챙기려니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신경 써야 하는 게 많아서 옷가지를 챙기는 것만 해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그렇다고 월성까지 가서 무분별하게 옷이나 생필품을 살 생각도 없고. 큰집에서 본가로 돌아오기 전, 둘째 백부가 월성으로 장기 출장을 갈 때마다 챙기는 것들을 물어본 게 다행이다. 그렇게 대만이 둘째 백부가 알려준 걸 참고해서 짐을 챙기는 동안, 예경은 대학이며 농구팀 사람들에게 직접 찾아가거나 전화를 돌려 아들의 기약 없을 사회생활의 공백을 어떻게든 줄일 수 있도록 힘썼다. 하루 이틀로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다행스럽게도 정대만의 집안은 대대로 유복했고, 일대의 지역 유지로 지낸 만큼 인맥도 넓어 일주일 정도는 품을 팔아야 할 일들을 나흘간 품 팔아 마무리했다.

그 마무리의 끝에서,

정대만은.

새벽녘의 말그란 달빛이 커튼 너머로 스며드는 것조차 아랑곳없이 수화기를 바라보며 고심에 빠져든다. 며칠 사이 몽유도원의 동해 용궁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유혼의 시선이 점점 매서워지는 동안, 대만은 단 한 번도 먼저 나서서 유혼의 정체를 묻지 않았다. 묻는다고 해서 가르쳐 줄 녀석이었다면 자신이 묻기도 전에 진즉 알려줬을 게 빤하다. 그래서 구태여 묻지 않았고, 그리고…….

“이걸, 알리긴 알려야 할 거 같은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종 잡히질 않네.”

도통 무어라고 말을 해야 송태섭 그 녀석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대만은 자신의 사정을 태섭이에게도 알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참을 망설인다. 그는 송태섭의 고향을 모른다. 중학생 때 전학을 온 건 알고 있지만, 정확히 언제, 어느 때에,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말투에 이따금 묻어나는 남쪽 억양 따라 남쪽에서 인천으로 올라왔겠거니, 그렇게만 생각할 뿐. 아래에 여동생이 하나 있다는 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 이따금 농구부 훈련을 도와주러 향하던 어느 날 그 녀석과 똑 닮은 여학생이 북산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어서 알게 된 사실이었고, 두 사람에게 부모님이란 어머니 하나뿐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알게 된 송아라가 툭, 지나가듯이 말을 흘렸기 때문이다.

송태섭은 제 입으로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 자신이 살아온 세상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그런 녀석을 상대로, 여지껏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려 꼭꼭 숨겨 왔던 과거사를 멋대로 파헤쳐 내던지기가 그렇게 쉬울 리 없다. 하물며, 스스로 겁먹은 사실마저 남에게 드러내지 않으려 숨기는 녀석을 상대로는 더더욱. ……그는 지금껏 살아오며 아쉬웠던 적이 드물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굽힌 것은 농구를 하고 싶다던 그 한순간뿐, 그때가 아니고서는 먼저 아쉬운 마음이 든 적도 거의 없었고, 있더라도 먼저 나서서 언행을 굽혀본 적도 없다.

그래서, 정대만은.

태섭이에게 지금의 상황을 알리고 이해받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그저 우두커니 서서 손에 든 수화기를 내려다볼 뿐이다. 무엇보다 께름칙한 사실은, 혹여 태섭이 자신의 사정을 듣고도 일의 상세를 알려 하지 않고, 단순한 헛소리로 치부해버릴 가능성도 크다는 점이다. 그걸, 그런 경험을 구태여 겪고 싶지는 않다. 대만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깨물고선, 천천히, 떨리는 손길로 수화기를 내렸다.

―――아직은 아냐. 태섭이에게 이 일을 전하는 건…… 일단 뭐라도 진행되고 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면서.


대부분의 준비가 끝나 월성으로 출발하는 날. 굳이 따지자면 정대만 한 사람에게 부지불식간에 닥쳐온 고행苦行이나 다름없는 걸 집안일로 포장하여 감추었다지만, 갑작스럽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대학 농구팀에게 폐를 끼친 건 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대만에게 얽힌 사정을 능숙하게 포장하여 설명해줄 어머니와 함께 대학 농구팀에 들러 사정이 이러하니 양해해 주십사, 인사를 올리고 가져온 사례품을 건넨다. 배구 선수 출신 어머니가 계시니 같은 구기종목 운동이니만큼 가타부타 없이 일사천리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사실이 그렇게 편안할 수 없다. 마악 팀의 주전 슈터로 올린 선수가 갑작스러운 휴학과 함께 운동도 잠시 쉬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감독이며 코치할 것 없이 여기저기서 긴긴 탄식이 흘러넘친다. 다른 선수 상대로도 아찔해질 이야기를, 정대만은 이미 고교시절 2년간의 공백기가 있어 더더욱 한탄스러울 수밖에 없다. 탄식과 표정을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난 우려를 보며 예경이 생긋 웃으며 말한다.

“어머. 저희 아들이 어디 아파서 휴학하는 것도 아니고, 월성군에 내려가서도 농구는 계속할 거예요. 아이 진외가 댁이 월성군 산간 오지에 있는 것도 아니랍니다. 농구팀 합숙 훈련을 ¹경주시로 가신다면 대만이도 합숙에 참가할 수 있도록 융통을 부릴 예정이고요.”

“그러한 조건이라면은… 걱정은 조금 덜겠군요. 하계 합숙 훈련 장소로 경주시를 염두에 두겠습니다.”

아무렴 명문 대학 농구팀으로 유명한 이곳에 선수 하나를 위해 이미 결정되었을 하계 합숙 훈련 일정을 조율할 만큼의 열의나 간절함이 있을성싶지만, 입바른 말이라도 그만한 투자를 할 만큼의 선수라고 인정받아 대만이 뿌듯한 얼굴로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월성에 가서도 개인 훈련 잊지 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음. 대만 학생의 선수로서의 성실함과 꾸준함 만큼 믿음직스러운 게 없죠. 종종 연락하세요. 개인 훈련에 적게나마 도와줄 테니.”

담백한 덕담과 함께 자리가 마무리되고, 속상한 마음에 꾸벅 인사 올리고 떠나는 발걸음이 무겁다. 티가 나도록 행동하진 않지만, 삐죽하게 튀어나온 입술이 잔뜩 상심한 아들의 심경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예경은 애써 웃음을 참는다. 건물을 나와 정문으로 향하는 동안 삐죽하니 튀어나와 있던 입술이 슬금슬금 들어가 어휴, 하는 가벼운 한숨을 토한다. 아마 저 혼자 상심한 마음에 심통을 부려도 변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새삼스레 자각한 탓이겠지. 외동으로 자라 어리광이 심하긴 해도, 책임에서 마냥 눈 돌리도록 키우지는 않았으니까. 정문을 넘어 도로 저 한편에 승합차를 댄 채 나이가 지긋한 초로의 남성과 가벼운 담소를 나누고 있는 중환의 모습이 보인다. 정장 셔츠에 얇은 카디건을 팔꿈치에 얹은 남자를 본 순간, 대만이 으겍, 하고 이상한 신음을 흘린다.

“……그래, 한국사 전공 교수님이시니까 둘째 백부랑 안면이 없으시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아는 분이니?”

“교양과목 중에 사학 계열도 하나 있어서, 학점 받기는 좋을거 같아서 신청했는데… 솔직히 저건 생각 못했어요.”

인천에서 서울까지 두 모자를 데려온 건 대만의 월성행 준비를 위해 내도록 큰집에 머물고 있던 그의 둘째 백부 정중환이다. 외부 차량을 들여놓지 않아 정문 너머 갓길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던 중환을 외부인을 만나고 돌아오던 교수가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덕분에 중환은 계수와 조카를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지 않은 시간을 보냈지만, 느닷없이 교양과목 교수님을 마주하게 된 대만으로선 떨떠름하기 그지없다. 횡단보도에서 파란 불을 기다리는 동안 건너편에서도 예경과 대만을 발견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반긴다. 모르쇠로 무시하고 싶어도 이젠 정말로 둘째 백부와 함께 월성으로 내려가야 하는지라 대만은 떨떠름한 얼굴 그대로 꾸벅 허리 숙여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예경 역시 살짝 고개 숙여 묵례한다.

농구팀에 인사가 끝나면 곧장 월성에 내려갈 생각으로 짐을 전부 둘째 백부의 승합차에 넣어둔 게 아니었다면 두 분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잠깐 자리를 피했을 텐데. 대만은 내심 불평하면서도 칭찬과 덕담과 잔소리를 적절하게 섞어 백부를 향해 자신을 평가하는 교수님에게 그럴싸한 반응으로 대응한다. 그간 농구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고서는 이렇듯 제 3 자를 통하여 교육 평가를 받는 건 드문 일이라 중환과 예경이 귀를 바짝 세우고서 교수를 부추긴다. 곁에서 점점 해쓱하게 변하는 대만의 표정은 아랑곳없이, 잔뜩 들뜬 얼굴로 아들의 교양과목에 대한 평가를 듣던 예경이 함박웃음을 짓는다. 단순교양으로 들을 뿐인데도 웬만한 전공 학생들보다 아는 게 많아 가르치면서도 불쑥불쑥 아쉬운 구석이 많다는 이야기에 싫어할 학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당장 집안이 집안인 만큼 농구에 뜻이 없었다면 대만 역시 가풍을 따라 무속사에 매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하하… 그냥, 뭐. 어릴 때 집안 어른들 따라 이리저리 보고 배운 정도인걸요. 아무리 그래도 전공생보다 잘하는 정도는 아닌데요.”

“어이쿠. 그런 소리 하든들 말아. 게다가 대만 학생, 이번에 집안일로 월성에 내려간다며? ……정 박사에게 이야기는 들었어. 추모굿 매개체라니… 고된 책무를 맡게 됐으니 어깨가 무겁겠어. 그러니 말이야.”

떡 줄 사람은 맘에도 없는데 은근슬쩍 교양만으로 끝내지 말라는 양 얼굴에 자꾸만 금칠하는 게 부담스럽고 짜증스러워 웃으며 거절하자, 이제는 교수가 흡사 밀매상이라도 되는 양 몸을 바짝 붙인 채 작게 속삭여 온다. 이 괴짜 영감탱이 교수가 이번엔 또 무슨 소릴 하려고. 대만은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가다듬는다.

“대만 학생, 추모굿 매개체로 있는 동안 겪은 일들…… 동해 용왕께 불려간 이야기나 뭐 그런 것들을 레포트로 써서 복학과 함께 제출하면, 내 우리쪽 교양과목에서 대만 학생은 졸업 때까지 과제는 면제해줄 용의가 있는데.”

“과제랑 동일한 양식의 레포트면 되나요?”

“음.”

생각지도 못한 행운에 대만이 활짝 반색하며 열렬히 고개를 끄덕인다. 구태여 리포트를 요구하는 목적이야 빤하다. 무당이 아닌 사람이 추모굿을 주관해야 하는 상황은 몹시도 드물다. 교수님은 둘째 백부처럼 멋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니만큼 이러한 조건을 걸고 자신의 리포트를 원하는 거다. ……매일 밤 생각을 정리할 겸 한두 시간을 투자해 리포트를 쓰고 남은 대학 생활 동안 과제의 양이 줄어든다니, 이만한 이득이 어디 있을까. 대만은 그 자리에서 교수님과 담판을 짓고는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어머니를 향해 인사한다.

“그럼 저 다녀올게요 엄마.”

“그래. 시아주버님 말씀 잘 듣고. 진외가 댁에 실례되는 짓도 하지 말고. 그쪽에서 뭐라도 해주시면 감사한 마음으로 잘 받아야 한다? 알았지 정대만?”

“어휴, 우리 예경 여사님은 걱정도.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리 그래도 할머니가 신경 써 주신 건데 거기서까지 사고를 칠 정도로 엄마 아들 멍청하지 않거든?!”

“대만이 너 네가 그만한 신용이 있다고 생각하니? 어휴…… 우리 대만이 잘 부탁드립니다 시아주버님.”

“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계수님. 제가 대만이 단단히 잘 단속 하겠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사고를 쳐도 아주 오랫동안, 그것도 남의 집 귀한 아들내미를 상대로 두 번씩이나 병원 신세를 지게 만든 만큼, 딱 그만큼 늘어나 버린 어머니의 잔소리와 닦달, 그러고도 모자라 둘째 백부에게 신신당부하는 걸 보며 대만은 입술만 샐쭉하게 내밀 뿐이다. 무릎을 다쳐 수술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큰 사고 한 번 친 적 없는 외동아들이라 그만큼 사고 친 이후의 반동이 심하다. 혹여나 또 삐뚤어질까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알아 그 많은 잔소리와 닦달, 푸닥거리에도 구체적으로 반박하며 대든 적은 없지만, 그 이후로는 정말로 사고 한 번 친 적 없이 얌전히 지냈는데도 불구하고 해가 갈수록 길어지는 레퍼토리에는 심통이 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보행로 한복판에서 10분 넘게 어머니와 둘째 백부 사이에 끼여 갖은 실랑이를 당한 끝에서야 대만은 둘째 백부 중환의 승합차 보조석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두 보호자들 사이에 짧은 인사가 오간 끝에서야 운전석에 오른 중환이 대만을 향해 넌지시 묻는다.

“농구부 복귀하기 전에 사고 한 번 크게 쳤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대체 무슨 사고를 쳐서 계수님이 저렇게까지 안달복달 하시냐?”

“……그럴 만 한 일이 있긴 했어요.”

“쯧쯧. 계수님도 화통한 데가 있어서 웬만큼 사고 친 게 아니고서는 대만이 널 혼내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널 너무 오냐오냐 키웠나보다.”

“네. 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이제 그만 월성으로 출발합시다, 둘째 백부!”

이대로는 또 길바닥에 앉아 잔소리를 들을 모양새라 정대만이 서둘러 선수 쳐 외친다. 모로 봐도 의도가 빤한 얄팍한 술수였지만 중환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조카의 술수에 넘어가 주었다.

생각보다 길이 크게 밀리지 않아 서울을 빠져나오는 덴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그 후로는 내도록 긴긴 고속도로를 따라 경상북도로 내려가는 데에만 한세월이다. 어차피 오늘 안으로는 월성에 도착하지 못할 거라며 둘째 백부가 여유를 부린 탓도 있지만, 평소엔 김포 국제 공항에서 국내선을 타고 내려갔을 길을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자니 좀이 쑤실 지경이라 휴게소 닿는 곳마다 내려 틈나는 대로 몸을 풀어댄 자신의 탓도 컸다. 눈에 보이는 거라곤 산천초목뿐인 풍경이지만 조금씩 가팔라지는 산등성이며 화사한 봄꽃들이 여기저기 피어나 눈을 즐겁게 한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하는 길이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사뭇 낯설기만 하다.

……월성이라니,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을 제외하면 가본 적 없는 곳이다. 그마저도 수학여행의 주 목적지는 경주시였고, 월성은 경주 도착 첫날 목적지였던 거대한 사찰과 대왕암을 보려고 반나절 잠깐 들른 게 전부다. 그런 곳을 자신의 사정으로 인해 진외가 댁에 장기간 머물 예정으로 가게 될 줄이야. 아무리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애써봐도 불편하고 착잡한 심정은 변하지 않는다. ……그 유혼이 태섭이네 형만 아니었어도 농구까지 쉬어가며 월성에 내려가진 않았을 텐데. 그렇다고 원망스럽지 않은 건 또 아니지만. 대체 송태섭 그 자식은 고향이 어디라서 사람을 월성까지 내려가게 만드는 건지 모른다. 당사자는 물어도 얼버무릴 거 같고, 대뜸 송아라에게 연락하자니 그것도 모양새가 여엉 아니올시다가 되어버리니, 결국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이달재 정도밖에 없다.

태섭이나 아라보다 달재 녀석이 대하기가 훨씬 껄끄러운데. 어쩔 수 없나.

“어우 진짜, 하필이면…….”

“뭐가?”

저도 몰래 흘린 혼잣말을 득달같이 주워듣고선 캐묻기 시작하는 둘째 백부의 양에 대만이 퍼석거리는 손길로 마른세수를 한다. 알록달록 꽃다운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일마저 착잡하게 느껴져 창문을 올리던 순간, 짙게 선팅된 창문에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리 잡은 턱의 흉터가 도드라진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참, 손 한번 끔찍하게 매워. 어떻게 박치기로 치아를 가격했는데 턱에 흉터까지 낼 수 있는 걸까. 대만은 습관처럼 흉터를 매만지다가,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둘째 백부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왜 동해 용왕께서 참견하셨을까요?”

“글쎄다……. 나는 그 유혼을 모르니 확답할 순 없지만, 유독 신령들께서 마음에 들어 하는 인간은 어느 시대나 있기 마련이니까…. 어쩌면 혈연적으로도 가까운 데가 있을 수도 있겠구나.”

혹은…….

중환은 문득 떠오른 가설에 대해 슬그머니 입을 다문다.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정씨족의 기원이 기원인 만큼, 그리고 저희 어머니께서 월성 최문 출신인 만큼 동해 용왕과의 인연은 문제의 유혼보다 대만이가 훨씬 가까울 거다. ……물론, 동해 용왕께서 혈연만의 인연으로 움직이실 만한 분은 아니시겠지만. 그러나 거두어들인 유혼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제멋대로 세속의 일에 참견할 만한 분은 더더욱 아니다. 애초에 수많은 영령英靈들 중에서도 나라의 대소사가 아닌 이상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는 분이 고작해야 한 유혼의 성불 문제에 참견을 하신 건, 그만큼 일이 위중하다는 뜻이다. ……인천 만신을 통하여 어머니께 경고를 보냈을 정도이니 유혼의 혈연과 대만이의 관계도 제법 확신이 있으신 거겠지.

……그런 경우는 보통, 청실홍실이 매듭지어져 육도윤회의 후생까지 연이 이어지는 상대가 있어 가능한 일이라는 걸, 과연 이 맹랑한 조카님은 이해하고 있을까. 추모굿 매개체가 되는 일 자체가 워낙에 드문 일이니만큼 그런 사실을 일반인인 조카는 모를 확률이 크지만.

“……확실히, 웬만해서는 싫어하는 사람이 드물겠구나 싶긴 했어요. 덕분에 또 한동안 농구 못하게 됐는데도 대화하다 보면 일찍 요절한 게 아까울 정도로는.”

문득 대답처럼 중얼거린 이야기에 중환이 흡, 하고 터져 나오려는 헛웃음을 삼킨다. 어머니와 계수 앞에서는 잘 모르겠다며 갖은 내숭을 떨었으면서 사실은 어떤 인연으로 이어진 유혼인 건지 확신하고 있었구나. 집안에 알리지 않은 건 달리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중환은 자신이 눈치챈 사실을 조카가 알 수 없도록 의미 없이 흘러나오던 라디오 대신 유행가요를 모아둔 테이프를 틀고서, 더는 대만의 사정에 관심이 없는 척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린다. 농구를 다시 시작했을 무렵부터 생긴 흉터를 가만히 매만진다. ……막냇동생과 계수를 적당히 닮아 수려한 얼굴에 진한 인상을 더한 흉터가 오늘따라 왜 저렇게 눈에 밟히는지 모른다. 설마 싶은 마음이지만, 혹시라도 흉터가 이번 일이랑 관련이 있는 건 아니겠지. 신기는 눈곱만도 못한데다 워낙 양기가 강한 아이이니 살면서 귀신에게 해코지당할 일도 없고, 애초에 누군가에게 쉽게 해코지할 원귀나 악귀라면 동해 용왕께서 거둘 리도 없다.

아니겠지. 중환은 괜히 치솟는 불안한 직감을 애써 찍어 누른다.

창문에 비친 흉터를 뭐가 그토록 만족스러운지 손가락으로 문질문질 매만지는 조카가 여느 때와 같지 않음을 알면서도.

  1. 경상북도 경주시의 중심지. 1955년 9월 1일 경주군 경주읍과 그 근방을 경주시로 승격하고, 경주군은 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후일 경주시와 월성군이 통합되어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가 되기에 이른다.


공미포 7,599자.

어… 늦어서 송구합니다. 중간에 좀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다른 원고 작업도 여러개 있어서 하다보니 좀 많이 늦어졌네요. 이번 각주에 대해서, 퇴고 전의 시간배경은 97년대였기 때문에 경주시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경상북도 경주시 하나로 통합이 된 상황이었지만, 퇴고후 원고인 현재 버젼은 시간배경이 93년도 이기 때문에 아직 경주시가 경주 시가지 중심부의 “경주시”와 그외 지역인 “경주군”으로 분할되어 있었습니다. 작중에서 경주군을 “월성군”으로 지칭하는 것은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명칭이 환원된 것이 89년 1월 1일로 비교적 최근이며, 정대만의 친할머니인 월성댁의 고향인 까닭에 그 친지들이 월성댁을 존중하여 고향의 원래 명칭인 “월성”으로 지칭하는 걸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정대만은 아무 생각 없이 집안 풍조가 그러하기 때문에, 또 할머니께서 자신을 몹시 아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월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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