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열

미열 #3.

루른 동양물 삼부작

달콤한 숨결 by 유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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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황제가 나간 후로 홀로 남은 아키라는 밤새도록 잠들지 못했다.

잊자, 다 잊자. 황제가 한 말 따위는 다 잊고 일단은 자자. 그런 마음으로 찢어진 마음을 추스리고 아키라는 혼례복을 벗었다. 지친 몸을 침상에 뉘이기는 하였으나 잠자리가 바뀌어서인지, 아니면 황제에게서 그런 모욕을 받고 분해서인지 자꾸만 눈이 떠졌다.

그 덕분에 본래는 둘이 누워야 할 침상에서 홀로 뒤척이며 밤을 보냈다. 새벽녁에나 겨우 잠들었다가 불과 두 시진만에 다시 눈을 떴다. 앞으로 자신을 모시게 되었다는 마츠다 상궁이 저를 깨운 탓이었다. 태후가 아키라를 위해서 붙여준 여인은 보기 드물게 당혹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려비 마마, 폐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폐하께서 오셨다고?”

“네, 마마.”

마츠다 상궁이 한 말이 꽤 놀라웠다. 센도 아키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여인에게 되물었다

어젯밤 황제가 한 말을 그 역시도 모두 들었기에 마츠다 상궁은 두 사람의 사정도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당황하는 것이다. 

어젯밤 그렇게도 살벌한 협박을 남기고 떠났길래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 시간에 황제가 찾아왔다. 그 이유란 어제 혼례를 올렸으니 오늘은 황실의 최고 어르신인 태후께 부부로서 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거다.

마츠다 상궁이 전하는 황제의 말은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도리어 말문이 막혔다. 첫날밤은 치르지도 않았고 두 사람의 관계는 시작하기도 전에 깊은 골이 생겼으나 부부로서 해야 할 의무마저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서 준비를.”

“네, 려비 마마.”

황제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간을 좁히고 아키라는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야 하는 상황임을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는 마츠다 상궁과 궁인들이 바삐 움직였다.

“폐하를 뵈옵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단장할 수 있을 만큼 단장하고 아키라는 황제의 앞에 나섰다. 손님을 맞이하는 접견실 내를 서성이던 황제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첫번째 후궁을 바라봤다. 첫날밤에 신랑을 소박놓고 속을 박박 긁어 놓은 신부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무심한 얼굴이었다.

“일어나게.”

“황송하옵니다.”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는 아키라에게 황제는 가벼이 손짓했다. 나비가 팔랑이는 듯한 손짓에 따라 차분히 몸을 세웠다. 

피처럼 붉었던 혼례복이 아니라 산뜻한 살구색 비단옷을 입은 황제는 실제 나이보다 어려보였고 이상하게도 어제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일생에 한 번뿐인 날이니 온갖 화려함으로 치장했는데도… 무겁고 답답한 장식을 걷어낸 모습과 화장하지 않은 얼굴은 갓 떠오르는 태양처럼 찬란하고 바다처럼 해맑았다.

“이것을.”

곧장 태후궁으로 떠날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황제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예측불가였다.

뚜벅뚜벅 걸어온 그가 아키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의외로 굳은살이 배겨 울퉁불퉁하고 거친 손바닥에 좁고 길쭉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대가 내 머리를 올려주어야 한다는데.”

민가든 황실이든, 아무리 가난한 집안이라도 신랑이 신부에게 꼭 보내야 할 예물이 있다. 머리빗과 비녀가 그것이다.

신부에게 처음으로 주는 선물인만큼, 무리해서라도 좋은 것들을 구해서 보냈다. 각자의 형편에 맞춘 규모로 혼례를 치르고 첫날밤을 보내면, 신랑은 자신이 예물로 보낸 빗으로 신부의 늘어트린 머리카락을 손수 빗어주었다.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둥글게 모아 쪽을 지고 마찬가지로 예물로 보낸 비녀를 꽂아주었다.

신부는 평생 예물로 받은 빗으로 머리를 빗고 예물로 받은 비녀로 머리를 장식했다. 굶어 죽는다면 차라리 굶어 죽기를 택했다. 절대 빗과 비녀를 팔지는 않았다. 팔러 가도, 상인조차 구입하기를 거부했다.

신부에게 신랑에게서 처음으로 받은 예물은 목숨을 걸고 간직해야 할 보물이었다. 그러니 세상을 떠날 때도 관 속에 빗과 비녀를 함께 넣어 묻어주었다.

그 가슴 뭉클하고 애틋한 사연을 센도 아키라와 황제 사이에 적용할 수는 없지 않나. 어젯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얼굴로 남들 하는 것은 다 하자고 요구하는 황제를 보니 기운이 싹 다 빠졌다. 며칠 굶은 것처럼 뱃속이 시렸다.

“…여기 앉으십시오.”

솔직히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센도 아키라에게 선택권이 있을 리가.

아키라는 황제에게 등받이 없는 의자를 가리켰다. 귀찮은데 어쩔 수 없다라는 뜻이 담긴 행동은 누군가가 보고 있다면 반역죄라고 지껄여댈 만큼 무례하고 반항적인 기색으로 가득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적개심을 분명히 느꼈을 텐데도 황제는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그저 예의 차분하고 소리도 나지 않게  걸어서 의자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키라에게 등을 보이고 앉았다.

‘내가 평생 머리를 빗겨줄게.’

마츠다 상궁이 황제에게서 받은 상자를 아키라에게 가져왔다. 뚜껑을 열어 안을 보여준다. 드러난 내용물을 바라보며 아키라는 순간 눈을 깜빡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간 탓이었다.

‘매일 네 머리도 올려줄게.’

눈에 들어온 빗과 비녀는 단정하고 우아한 형태였다. 화려한 무늬도 새기지 않았고 온갖 색깔의 보석으로 장식하지도 않았다. 그저 우직하게 만든 장인의 솜씨만으로 승부를 보았다. 심미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빗과 비녀를 탐낼 것이다.

단지 놀랍게도 꽤 오랜 세월의 흔적이 엿보였다. 비록 빗은 대모갑, 비녀는 백옥으로 만들어서 재료만큼은 최상품이었다. 그러나 꽤 많은 사람을 거친 듯이 끝이 뭉특하고 몸체가 반들반들했다. 새 것처럼 맑고 투명한 광택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도 만지고 만진 탓에 땀이 스며들어 그 빛이 탁했다.

‘나한테 시집올래?’

…분명 내 목소리인데 기억에 없다.

빗과 비녀는 낯이 익었으나 자신은 오늘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려비?”

의자에 앉은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아래에 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 후궁을 불렀다. 아, 하고 아키라는 멍청한 목소리를 냈다. 상반된 기억이 혼란스러워서 잠시 넋을 놓은 아키라는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자신을 기다리는 황제를 겨우 인식하고 허둥지둥 손에 빗을 들었다.

오랫동안 사람에게 길들여진 빗은 잡는 순간 손바닥에 착 감겼다. 아키라는 배운 그대로 빗으로 머리를 빗겨주었다. 잠시 동안 이상한 말이 들렸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절로 감탄이 나왔다. 먹물보다 더 새카맣고 풍성한 머리카락은 반들거리며 은색 윤기가 흘렀다. 한 올 한 올이 힘있고 탄력이 좋아서 빗살 사이로 빠져나갈 때마다 마치 현을 뜯는 듯한 소리마저 울렸다.

아무리 황제가 싫어도 한 가지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외모만큼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솜씨가 미흡하여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솜씨 좋게 틀어올린 상투에 백옥 비녀를 찔러넣었다. 완성된 머리를 가만히 눌러보고 단단히 고정되었음을 확인했다. 아키라는 한 발 물러섰다. 두 손을 배 위에 겹쳐두고 공손한 태도로 허리를 숙이려는데,

“마음에 들어. 그대가 고생했군.”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을 위로 올리자 훤히 드러난 목에 이상한 흉터가 보였다. 저것은… 아키라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더 자세히 살피려는데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려비의 수고를 치하했다.

황제의 목소리는 여전히 고저가 없어서, 그가 진심을 말하는지 아니면 거짓을 말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키라는 속으로 그의 기분 따위 신경쓰지 말자고 되뇌이며 황송하옵니다, 하고 기계적으로 답했다.

“폐하, 이제 출발하시지요.”

“곧 나가겠다.”

시간이 꽤 지체되었다며 바깥에서 출발을 재촉했다. 곧 나가겠다고 답했지만 황제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아키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걸까. 마주한 시선에서는 그 속을 알 수 없어서 아키라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마마, 폐하의 옥수를 잡아주시옵소서.”

황제가 원하는 바를 마츠다 상궁이 알아냈다. 키가 큰 아키라를 위해서 한껏 발뒤꿈치를 들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말을 듣고 아키라는 비로소,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는 신랑이 신부의 손을 잡고 걷는다는 관습을 떠올렸다. 어제 그 난리를 치고도 오늘 아침에 머릿카락을 빗겨달라고 찾아왔으니 그것도 지킬 것이라 짐작했어야 했다. 자신이 어리석었다.

아니, 이건 황제가 멋대로 구는 탓이다. 아키라는 모든 잘못을 황제에게 떠넘겼다. 그러면서도 착실히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황제는 제 앞으로 다가온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제 손을 얹었다. 그렇게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태후를 만나기 위해 영수궁을 나섰다. 대리석을 깐 바닥에 도열한 행렬이 보였다.

저 사람은 왜 또… 보통 삼공이 이런 자리까지 동행하나?

가장 앞에 선 후카츠를 발견하고 아키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놓고 그가 불편하다는 감정을 표출했다. 그렇지만 후카츠는 황제만큼이나 낯짝이 두껍고 뻔뻔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에 진력이 났다. 짜증이 치솟았다.

삼공은 정1품 관직으로 명예직이다. 환갑을 넘긴 조정 대신 중에서 임명되는 관직으로 아무런 권한이 없으나, 그때문에 황제와 조정에 미치는 힘이 더욱 막강했다. 황제를 아무때나, 그러니까 나라가 뒤집힐 만큼 특별한 사정이 아니면 황궁 문이 모두 닫히고 누구도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밤이라도 만날 수 있으며 내궁을 제외한 황궁에서 거처를 정하고 기간 제한 없이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직책이었다.

그렇지만 삼공을 지닌 다른 대신들은 황궁에 들어와 살지도 않았고 후카츠처럼 황제의 사생활까지 관여하지 않았다. 황후를 맞이하였다면 공적인 일이 되겠으나 아키라는 후궁이다. 사가라면 첩을 들인 것이니 이는 황제의 사적인 영역에 해당했다. 그러니 삼공이 이런 자리까지 쫓아다닐 필요는 없을 터였다.

“가마를 준비해두었으니 두 분, 어서 오르시옵소서.”

후카츠가 하는 행동을 보면 삼공이 아니라 황제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환관에 가까웠다.

그런 감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후카츠가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며 허리를 숙였다. 가마에 오르라고 청하는 말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진 탓이었다. 태후께서 계시는 수강전까지 같은 가마를 타야 한다는 뜻인가 싶어서 아키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마마, 어서.”

황제의 손을 잡은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아키라에게 마츠다 상궁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재촉했다. 떨리는 목소리에 떠밀려 겨우 움직였다. 한 걸음 앞장설 때까지 기다린 황제가 신랑을 뒤따랐다.

금으로 만든 황룡이 지붕을 감싸고 신혼부부가 탔음을 알리는 뜻으로 붉은 천을 매던 가마에 두 사람이 올랐다. 나란히 앉아 수강전에 도착할 때까지 잡은 손은 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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