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바르셀로나!

올라, 바르셀로나! (2)

동오대만

비행중 by 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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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고백할 걸 그랬나.」

대만이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벌써 소주 한 병 반을 비웠다. 평소 주량과 템포를 생각하면 너무 이르게 달린 감이 있었지만 수겸은 말리는 대신 맞은편 자리에서 소주를 같이 홀짝거렸다. 진정한 친구라면 과음을 말려야 하지만 수겸은 대만이 왜 통제력을 잃었는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잔을 뺏을 마음이 없었다. 대만이 불판 위에 남은 뒷고기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고백할까? 말도 안 하고 헤어지는 것보단 그게 더 나을 거 같아….」

「그건 최동오에게 물어봐야지.」

수겸은 건조하게 한마디 하고는 대만의 접시에 고기를 올려주었다. 대만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탕탕 치면서 말했다.

「그러니까아~! 그걸 모르겠다는 거야아~! 최동오 그새끼도 날 좋아하는지 아닌지 모르겠다고오~! 그 자식 성격 상 차고 나면 나랑 말도 안 섞을 거 같은데엑!」

말끝을 늘리며 몸을 앞뒤로 흔들더니 급기여 고기를 질겅거리며 훌쩍이기 시작한다. 이렇게 독한 주사는 처음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정대만의 기가 막힌 주사를 보면서 수겸은 생각했다. 이 자리에 지금 제가 아니라 최동오가 있어야 했다고. 아니면 이명헌이라도.

자기 관리로 유명한 정대만이 이렇게까지 절제 없이 만취한 까닭은 다 최동오였다. 정대만은 정확히 작년 5월부터 최동오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닥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살갑게 구는 특유의 사교성과 친화력 덕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김수겸과 주장 박재식 단 둘뿐이었다. 차라리 고백하는 게 어떠냐고 물어도 봤지만 사내연애는 하는 거 아니라는 이상하지만 그럴 듯한 논리로 대만은 1년이 되는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심지어 최동오 본인에게도.

그런데 그 짝사랑 상대가 스페인으로 간다고 한다. 1년 6개월. 충분히 다른 사랑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다. 너는 왜 지원했느냐고 묻자 대만이 하는 말이 기가 막혔다.

「나? 나야 최동오가 가슴 속에 따~악 박혀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리 없지. 그런데 최동오 그 자식은 사귀는 사람도 없고 짝사랑하는 사람도 없는 거 같은데 그러면 충분히 거기에서 예쁘거나 잘생긴 애인을 사귈 수 있는 거 아니냐!」

「그럼 왜 신청서를 쓰라고 종용했냐. 그러지 않았으면 같이 한국에서 뛰거나 너 혼자 짝사랑 하면서 유학 생활을 견뎠을 텐데.」

「그야 그 녀석 농구 실력 죽이는 건 사실이잖아…. 그런 실력을 갖고 국내에서 썩히는 건 에바라고.」

대만은 방금 제가 비운 소주잔을 보면서 멍 때리고 있었다. 가만 두면 갑자기 울면서 노래라도 한 곡 뽑을지도 모른다. 수겸이 그만 자리를 파하려고 할 때 대만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 국대 소집될 수도 있대.」

「뭐?」

농구부 소문이라면 가리지 않고 다 섬렵하고 있는 수겸도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대만이 다시 제 잔에 소주를 따르며 웅얼댔다.

「어…. 동오 스페인 소식 뜨고 나서 감독님이 말씀해주셨는데. 그런데 안 될 수도 있으니까 너무 기대는 말래. 국제 대회에 아마추어를 보내는 건 사실 이례적인 일이라고…. 그래도 뽑히면 시즌 끝나자마자 선수촌으로 가야 한다네? 그래서 나 다음 학기는 그냥 휴학하려고. 그래서 아마 9월 시합부터는 나 빠질 거야.」 

 

올라, 바르셀로나! (2) 

호텔 체크인 시작 시간은 오후 세 시였다. 짐을 내려놓고 조금이라도 시차에 적응하기 위해 우선은 동오의 하숙집에 먼저 들렀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주택인 탓에 동오와 대만이 캐리어 양 끄트머리를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래도 2년 가까이 합을 맞춘 사이라고 발이 꽤나 잘 맞았다. 대만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집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튀어나와 그를 맞이했다. 대만은 정신없는 통성명을 마치자마자 동오의 방에 밀어넣어졌다. 친구들이 치사하다며 야유를 보냈지만 시차 때문에 피곤할 거라며 동오는 완강하게 방문을 닫았다. 침대에 누워 멀뚱히 눈을 굴리던 대만이 고개를 들어 말했다.

「나 잠이 안 와.」

「그래도 자야 해. 안 그러면 너 낮에 꾸벅거린다.」

현재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시각은 오전 여섯 시. 그리고 한국은 현재 오후 두 시. 원래라면 한창 활동을 하고 있을 시간에 눈을 붙여야 하니 잠이 오지 않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이틀 동안 시차에 적응하지 못해 오후 두 시에 졸기 일쑤였던 동오는 아예 이불까지 곱게 덮어 주었다. 대만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니, 나 평소에도 여섯 시에 일어나거든? 스페인이든 한국이든 나 지금은 깨 있을 시간이거든?」

「응. 너 놀러 왔으니까 늦잠 자도 돼.」

「너 시차는 핑계고 그냥 나 보여주기 싫어서 그렇지.」

대만이 여전히 주둥이를 쭉 내밀고 따졌다. 동오는 대꾸하지 않고 예약해둔 표를 확인하며 물었다.

「너 여기 며칠 동안 머물 거야?」

「엉? 어…. 3박 4일이니까 금요일 오후 네 시에 가야 해.」

3박 4일. 스페인을 돌아다니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다. 하기야 10월부터 지금까지 선수촌에 있다가 겨우 짬을 내서 왔다고 하니, 주어진 휴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동오는 명헌과 수겸이 보낸 메일함을 뒤졌으나 대만이 국가대표로 차출되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동오는 대만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국가대표 차출은 어떻게 된 거야?」

「어…. 다른 애들이 안 말해줬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얘가 뭔 소리 하나 했지.」

눈을 감고 얘써 잠을 자보려던 대만이 몸을 일으켰다. 정말 몰랐는지 무안한 표정으로 머리까지 긁적였다.

「사실 나도 명단 발표될 때까지는 확정된 줄 몰랐어. 다음날 아침 뉴스 보고 나도 놀랐다니까. 감독님께 물어봤더니 아직 대학 리그 시즌 중이라 컨디션 난조 오지 않게 함구하고 있었대.」

「대단한데. 아마추어가 국가대표로 차출되는 일은 드물잖아.」

「뭐 그래도 막내라 주전으로 뛸 가능성은 낮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기대는 돼.」

대만이 도로 누우면서 씩 웃었다. 동오는 피식 웃으며 예약 내역을 수정했다. 오늘은 아무래도 힘들 테니까 가볍게 카사 바트요를 둘러보고, 주변 공원 산책해야지. 오늘은 야시장이 열리는 날이니까 컨디션 좋아 보이면 같이 가고. 내일은 FC 바르셀로나랑 스페인 농구 경기를 보러 가면 되겠다. 일정표를 최종 확정한 뒤 동오는 뿌듯한 표정으로 대만을 돌아봤다. 대만은 이미 양팔을 번쩍 든 자세로 곤히 자고 있었다. 무슨 유치원생도 아니고 안 잔다고 뻗대다가 10초 만에 잠들다니. 동오는 조용히 웃었다가 노크 소리에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마르타 아주머니가 대만을 흘끔 보고는 물었다.

「정은 얼마나 머물다가 갈 거라니?」

「3박 4일일정이에요. 곧 한국 국가대표 훈련을 받으러 돌아가야 해서 시간을 많이 내지 못한대요.」

「저런. 이따 여덟 시 되면 깨워서 식당으로 데려오렴. 네 친군데 한 번은 같이 식사를 해야 하지 않겠니?」

동오는 어젯밤 부산스럽게 음식을 준비하던 하숙집 식구들을 떠올렸다. 무엇보다도 스페인 현지 가정식을 먹다니, 대만이 좋아할 거 같았다. 그러면 일곱 시 반에 데리고 올게요. 동오가 대답하자 마르타 아주머니가 환하게 웃었다.

「벌써 국가대표라니 잘 하나 보다.」

「네, 저랑 같은 농구 선수에요.」

「어머, 곤란한데. 나중에 너희가 올림픽에 나오면 난 누굴 응원해야 하는 거니?」

뒤에서 아들인 바르톨로메 형이 따졌다. 엄마! 그래도 농구는 스페인이 최고라고요! 소리에 설핏 잠이 깼는지 대만이 뒤척였다. 마르타 아주머니가 쉿 하는 자세를 취하며 바르톨로메를 나무랐다. 얘, 지금 정 잔다, 조용히 하렴. 마르타 아주머니는 이따 보자며 문을 닫고 거실로 내려갔다. 동오는 다시 침대가로 돌아갔다. 의자를 꺼내 대만 옆에 앉아 자는 모습을 구경했다. 지구 반대편에 있으면서도 대만은 태평하게 남의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14시간 동안 좁은 비행기 안에 구겨지다시피 앉아서 왔으니 피곤할 것이다. 게다가 경유해서 왔으니 혹여 비행기를 놓치지 않을까 신경을 바짝 세우느라 에너지 소모도 극심했으리라. 동오는 이마에 붙은 앞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슬슬 매만지면서 생각했다. 대체 내가 뭐라고 네가 여기까지 오니. 나중에 방학 때 만나도 될 걸.

대만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아침 일곱 시였다. 동오가 일어났느냐며 부엌에서 받아온 캐모마일 티를 건넸다. 대만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잔을 받았다. 대만이 티를 홀짝이며 정신을 차리는 동안 동오가 대만의 캐리어를 열어 갈아입을 옷과 속옷을 꺼내 놓았다.

「화장실은 2층 복도 오른쪽에 있어. 다른 데에서 온수를 쓰면 찬물이 나오긴 하는데, 그다지 춥지 않으니까 아마 괜찮을 거야. 대신 팻말에 엑스 자 표시가 있으면 누가 들어있다는 뜻이니까 좀 기다려야 해.」

「어엉.」

동오는 그게 그것처럼 보이는 옷들 사이에서 그나마 제 눈에 예뻐 보이는 상하의를 대만에게 건넸다. 옷을 받아든 대만이 동오의 픽을 보곤 픽 웃었다.

「왜?」

「아니, 갑자기 우리 첫 합숙훈련 때 생각나서.」

아마 1학년 2학기 시작 직전에 있었던 합숙훈련을 빙자한 부어라 마셔라 판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날도 대만은 선배의 술을 받아 마시다가 고주망태 급으로 취해 동오에게 실려 방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자 동오가 그의 캐리어를 뒤져 주인 허락도 없이 속옷과 겉옷을 꺼내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거 말도 않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그 옷꾸러미를 가져다 주며 말했다.

<지금 2층 복도 공용 화장실은 선배들이 쓰고 있어. 1층은 아직 사람 없는 거 같은데, 후딱 씻고 와.>

1년 전 기억이 떠올라 동오도 몰래 웃었다. 대만은 동오가 챙겨준 옷을 소중하게 들고 복도로 나갔다. 중간에 마르코와 만났는지 둘이 재잘대는 소리가 방문 너머로도 들렸다. 동오는 먼저 거실로 나갔다.

테이블은 역시나 한상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각종 종류의 토르티야가 용모를 뽐내고 있었고, 피데우아는 물론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음식인 빠에야와 그 비슷한 쌀밥 음식인 아로스 콘 포요, 코시도 마드리예뇨까지 차려져 있었다. 그 외에 버섯 볶음이나 대파구이 등도 있었다. 다른 식구들은 이미 둘러앉아 식사 중이었다. 옆자리의 아일라가 동오를 흘끔 보며 물었다.

「정은?」

「씻고 있어. 금방 올 거야.」

동오의 말대로 20분 뒤 대만이 옷을 갈아입고 나와 아침식사에 합류했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거실이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다들 동오의 한국생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해 안달이었다. 동오가 제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대만은 서툴지만 직관적인 영어로 과장을 보태 말하다가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바디랭귀지를 동원했다. 여기저기에서 웃음을 터져나왔다. 야, 니 친구 진짜 골 때리는데. 마르코가 동오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동오는 얼떨결에 웃었다. 대만이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수업은 오후에 몰려 있다. 동오는 학교에 가기 전 대만과 함께 시내로 나갔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카사 바트요가 근처에 있다고 말하자, 대만이 눈을 반짝였다.

「와, 그거 되게 유명한 데 아냐?」

「어떤 곳인지는 알고?」

「그…, 으…, 무슨 집 아니냐? 엄청 유명한 사람이 살았다는.」

「가우디가 설계한 집이잖아.」

「아아, 그래! 그거. 그게 이 근처에 있다고? 대박.」

「가우디가 누구인지는 알지?」

「내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거든?!」

대만이 발끈하면서 말했다. 왜 그 뭐시기, 아직도 짓고 있다는 무슨 성당 설계한 사람 아니냐. 영 미덥지 못한 대답이었으나 동오는 그래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무턱대고 왔나. 대만은 이제야 자신의 행동을 돌아봤다. 선수촌 훈련은 대학 훈련보다 더 고되었다. 엇비슷한 수준의 또래 선수가 아닌, 각 나라에서 날고 긴다는 선수를 상대해야 하는 국제 대회를 대비한 훈련인 만큼 모두에게 빡센 하루하루였다. 설마 명헌과 수겸이 그립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당장 도망가고 싶은 수준은 아니었다. 대표로 뽑혀 들어온 영광스러운 곳인데, 힘들다고 징징댈 생각도 없었다. 대만은 막내지만 막내라고 예쁨을 받거나 쉬엄쉬엄 훈련을 받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흥분되고 고양감이 올라왔다. 아시안 게임의 선수 명단은 2년 후 올림픽까지 간다. 대학생이 올림픽 무대까지 나갈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대만은 우연히 얻은 이 기회를 허무하게 날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견딜 수 없이 힘든 날에는 동오를 떠올렸다. 말과 정서가 다른, 완전히 낯선 환경에서 묵묵하게 좋아하는 농구를 배우고 있을 그의 친구 겸 짝사랑 상대를. 그러면 질 수 없다는 생각이 샘솟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열심히 하고 있을 테니까, 나도 지지 말자. 포기하지 말자. 그 마음가짐으로 매일 버텼다.

선수촌 생활은 의외로 할 만 했고, 시간은 빠르게 지났다. 10월에서 11월로 넘어가던 무렵, 감독이 선수들을 불러 일주일 휴가를 주었다. 원래는 이런 거 잘 안 주는데, 너희가 잘 해서 주는 거야. 선배들은 환호성을 터트리면서 들뜬 얼굴로 돌아갔다. 이미 몇 명은 휴가 계획을 줄줄 읊고 있었다. 고참이자 병역 브로커로 불리는 선배 이규찬이 대만의 어깨에 팔을 걸며 물었다.

「우리 막내는 휴가 동안 뭐 할 건가?」

「음, 일단은 친구들 보러 가야죠, 그리고….」

대만은 다시 동오를 떠올렸다. 개는 나 보고 싶지 않을까. 그냥 친구라서 간간이만 생각하고 있을 듯. 선수촌 내는 인터넷이 되지 않아 전화를 걸지 않으면 소식을 주고 받을 수 없었다. 하물며 이쪽이 낮일 때 스페인은 밤일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에 차마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친구는 많이 사귀었을까. 마음에 든 녀석은 있을까. 우리보다 더 친해진 사람이 있는 거 아냐? 거기에선 어떤 농구를 하고 있을까. 팀원 간 소통은 잘 되고 있을까. 여전히 마음대로 잘 풀리지 않은 날에는 방에 콕 틀어박혀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대만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일주일 동안 유럽 갔다오는 건 좀 무리겠죠?」

「어? 글쎄, 좀 빡빡한 일정이긴 하지?」

대만은 선수촌을 나오자마자 핸드폰을 켜 메일함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두 달 동안 동오는 매일 메일을 보냈다. 내용도 각각 달랐다. 어떤 날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상세히 적었다면, 어떤 날에는 자신이 최근에 가진 의문을, 또 어던 날에는 그가 생각하는 농구가 무엇인지 일장연설을 늘여놓았다. 마지막에는 꼭 대만의 안부를 묻는 말을 적었다. 그것을 보니 대만은 무리해서라도 스페인에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페인 왕복 비행기표를 끊었다. 몇 달 동안 쓰지 않고 모은 돈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가장 큰 캐리어를 꺼내 옷가지와 공기 주입기를 챙기고, 더블팩 안에는 농구화와 바람 뺀 농구공을 챙겼다. 동오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캐리어가 금방 차버렸다. 환전과 숙소 예약은 공항으로 가는 길에 해결했다. 더 돌아보거나 잴 필요 없이, 동오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가장 가까우면서 방이 남아 있는 곳으로 정했다. 어메니티나 위생, 환경 같은 걸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그때는 그냥 동오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정작 공항에 도착하고 비행기에 타기 몇 분 전에야 동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큰일났네, 도착 시간이 새벽대라 택시가 안 잡힐 수도 있는데. 그런데 동오가 면허를 따고 스페인에 갔던가? 그래도 친구 중에 한 명은 면허증이 있지 않을까. 일단은 온다는 걸 알리긴 해야 하니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아 이거 또 시간 안 맞다고 못 받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도 잠시 동오는 10초 만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대만이야?」

동오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몇 달 만에 듣는 목소리에 눈물이 먼저 나올 뻔했다. 대만은 뭉개지려는 목소리를 애써 평탄하게 다듬으면서 말했다.

「동오야, 내일 새벽 5시까지 바로셀로나 공항으로 나와라.」

「뭐?」

이젠 탑승을 미룰 수 없다. 공항에서 안내 방송이 울리고 있었다. 대만은 그대로 전화를 끊고 게이트를 향해 달렸다. 전화기도 잊지 않고 비행기 모드로 돌렸다.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비행기는 무사히 새벽 다섯 시 반에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한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대만은 거의 뛰다시피하며(공항 내 세큐리티가 뛰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까지 했다) 빠르게 짐을 찾고 수속을 마쳤다. 동오는 왔을까, 기다리고 있을까. 다른 사람이랑 같이 왔을까. 좁은 비행기 안에서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마침내 초조한 얼굴로 벤치에 웅크리듯 앉아 있는 동오와, 그를 데리고 나온 것으로 보이는 외국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참지 못하고 이름을 불렀다.

나는 반갑고 기쁜데, 동오는 당황스럽기만 한가 보다―혼자 김칫국을 마시고 있을 때 동오가 길 건너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 왔어. 바로 저기야.」

「엥? 거기가 이렇게 가까이…. 와, 정말이네.」

대만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트렸다. 사진이 아닌 실제로 본 카사 바트요는 상상보다 훨씬 컸다. 4~5층짜리 멘션이 통째로 가우디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그 압도적인 크기보다는 동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이질적인 색체와 물결치는 듯한 디자인이었다. 다른 건물과 달리 벽면이 굴곡져 있고, 3층 중앙부터 꼭대기까지는 발코니에 가면 형태의 장식이 붙어 있어 마치 누군가가 행인을 쳐다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 벽면은 또 아래층과 달리 화려한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지붕은 그보다 더 화려해서 마치 무지개를 얹은 듯했다. 지붕 또한 일직선으로 이루어진 삼각 형태가 아닌 울퉁불퉁한 왕관을 연상짓는 모양새였다.

외부도 이렇게 파격적인데 내부는 얼마나 신천지일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대만은 거대한, 성과 같은 건물을 올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뭔가…. 지브리 애니메이션에서 마술사가 살 법한 성 같아.」

정확한 표현이었다. 동오 역시 카사 바트요를 보자마자 비슷한 생각을 했다. 왠지 괴짜 마술사가 틀어박혀 연구를 하고 있을 것 같은 외관인데. 동오라면 억을 주더라도 그다지 살고 싶진 않은 형태의 집이었다.

동오가 예약 내역을 보여주자 직원이 티켓 수령처로 안내해주었다. 돈을 더 내면 각 나라 음성으로 녹음한 가이드 테이프를 대여해준다고 데스크에서 직원이 알려주었다. 동오는 대만을 돌아보며 말했다. 음성 가이드 테이프 대여해준다는데, 들을래? 대만은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가이드 없이 혼자 감상해볼래. 대만의 대답에 동오 역시 정중하게 거절하고는 내부로 들어갔다.

범상치 않은 외관에 걸맞게 내부 역시 휘황찬란했다. 곡선으로 된 건물을 만들기로 작정이라도 했는지 거의 모든 문이 입구며 천장이 아치형이었고, 계단 난간 역시 우아하게 굽이치며 끊겼다. 메인 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스테인드글라스였다. 전망창에도, 문에도 색색의 유리 장식이 박혀 있었다. 스페인 특유의 사시사철 푸른 하늘과 맑은 햇살이 창문에 부딪쳐 파랗고 하얗게 바닥에 드리워졌다. 왠지 물 속에 있는 것 같네, 홀 바닥에 너울진 빛 조각들을 보면서 대만이 중얼거렸다.

빛의 파티오라는 공간에서 대만은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아니 무슨…. 화장실 벽 같은 저 촌스라운 타일은 대체 뭐냐. 그 경이로운 감상평에 동오는 웃을 뻔했다. 그곳엔 파란 마름모꼴 타일이 사방을 빼곡이 메우고 있었다. 옆에서 관광객을 상대하던 가이드가 파티오의 중간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으나 현재는 운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만은 그 설명을 듣고 차라리 다행이라고 대꾸했다. 백여 년 전에 만든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죽고 싶지 않다나 뭐라나. 동오가 작게 지적했다. 대만아, 여기 그래도 엄청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한 엄청 유명한 곳인데.

복도의 천장을 보고 대만이 중얼거렸다. 무슨 고래 뱃속에 들어와 있는 거 같네. 가우디의 건출물답게 복도 천장 또한 비범한 모양새였다. 대만의 감상평대로 천장 역시 굴곡지고 주름이 져 있었다. 천장을 받치는 기둥은 흡사 뼈처럼 느껴졌다. 돌로 이런 모양을 만들어 내려면 대체 얼마나 깎아야 할까. 대만이 중얼거리며 앞장 서서 걷더니 중간에 멈추어서 동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동오야, 나 여기서 사진 찍어줘!」

「사람들 돌아다니잖아. 이쪽에서 찍어.」

동오는 대만에게 다가가 팔목을 잡아 창가 앞에 세웠다. 대만은 초등학생처럼 활짝 웃으며 브이 자 포즈를 취했다. 동오는 셔터를 세 번 눌렀다. 대만에게 보여주려는데 그가 다가오더니 방금까지 자기가 서 있던 자리에 동오를 세웠다.

「자, 이번에는 우리 동오 한 번 찍어보자.」

「아니, 난 딱히 안 찍어도 되는데.」

「줄 때 얌전히 받아, 짜식아.」

이미 대만은 핸드폰을 꺼내고 사진 찍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오는 어색하게 대만을 따라 손가락을 펼쳤다. 대만은 네 번이나 사진을 찍었다. 대만은 화면을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동오야, 너 어째 사진을 잘 안 받는 거 같다?」

「나도 알아. 그리고 보여주지 마. 창피해.」

「씁, 왜 안 담기지? 핸드폰 화질이 안 좋은가 보네. 우리 동오는 매일 실물로 봐야겠다.」

대만은 씩 웃으며 핸드폰을 다시 바짓주머니 안에 넣었다. 사진은 나중에 귀국하고 메일로 보내줄게. 빨리 옥상으로 올라가자. 대만이 동오의 어깨를 툭툭 치며 앞장섰다. 동오는 대만이 건드린 어깨를 멍하니 쓰다듬다가 한소리 들은 후에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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