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만 오른쪽

[태섭대만] 초콜릿의 유통기한은 생각보다 길다 上

발렌타인데이는 이용당했다

송태섭은 후회했다. 나오기 전에 날짜를 한 번 더 확인하지 않은 것을.

NBA에서도 손꼽히는 포인트 가드가 된 후로 송태섭은 집보다 차나 비행기가 익숙한 사람이었다. 집에 발 붙이고 있는 시간보다 경기를 위해 이동하는 시간이 더 길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태섭은 미국 자가의 냉장고를 잘 채워두지 않는다. 신선한 식자재를 사기 보다는 우유와 각종 프로틴 가루, 냉동 닭가슴살을 더 많이 구비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요리를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미국에 온 이후로 줄곧 자취했던 유학생에게 외식은 사치였다. 또, 싼값에 패스트푸드로만 때우기엔 그는 몸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있는 돈 없는 돈 쪼개서 해 먹는 습관을 들였다. 미국에서 살면서 가장 잘 들인 습관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송태섭은 이번 주에 홈팀 경기만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오전부터 마트를 찾았다. 전기세만 먹는 냉장고를 조금 채워둘 생각이었다. 만약, 오늘이 발렌타인데이임을 알아챘다면 포기했을 일정이었다. 질리게 쫓아다니는 파파라치가 오늘따라 더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만했다. 발렌타인데이에 홀로 움직이는 느바 스타 선수라니. 자신이 파파라치였어도 따라붙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파파라치가 아니라 난데없이 지목 당한 피사체에 불과했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지독하네.”


식료품 코너에 들어가자마자 단내가 훅, 끼쳤다. 마트 입구부터 곳곳에 초콜릿과 비슷한 유의 과자들이 화려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미국에서 유명한 브랜드부터 해외의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까지. 각종 상품들이 발렌타인데이를 기념해 특별한 포장지를 입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눈이 돌아갈 만한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몸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간식류를 강박적으로 끊은 송태섭의 흥미를 끌진 못했다. 그는 카트를 밀며 채소 코너로 가려고 했다. 화려한 포장 속에 밋밋한 검은색 상자를 보지 않았더라면.


‘어…….’


검은색 상자에 빨간 리본. 정석적이면서도 해가 지날수록 화려해지는 발렌타인데이에 비하면 수수했다. 특히 온갖 흘림체 로고 사이에서 딱딱한 고딕체 상표가 그런 인상을 더했다. 그래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왠지 정대만이랑 닮아서. 그는 검은 정사각형 상자의 파베 초콜릿 하나를 집어 카트의 가장 안쪽에 내려두었다. 장을 다 보고 계산할 때 가장 마지막에 꺼낼 수 있도록. 그때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었다.

*

차고에 주차를 끝낸 그는 조수석에 내려둔 장바구니를 흘낏, 바라봤다. 결국, 그는 초콜릿을 계산하고 말았다. 혹여나 파파라치가 초콜릿을 발견할까 봐 이번에도 초콜릿을 장바구니 가장 안쪽에 쑤셔 넣었다. 마음 같아서 마트로 돌아가 환불하고 싶었지만, 송태섭의 가오에 식품류 변심 환불 같은 건 없었다. 장바구니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내내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쉬었다.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 장바구니를 식탁 위에 올렸다. 구매한 식자재를 꺼내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생활용품을 제자리에 채워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꺼낸 초콜릿 상자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제 손으로 초콜릿으로 산 게 얼마 만이지. 송태섭은 기가 차서 헛웃음만 나왔다. 그렇게 산 게 하필 그 형에게 마지막으로 받은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이라니.


‘어디까지 구질구질해질 건데, 송태섭.’


진한 자괴감과 함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상자가 살짝 우그러지는 소리가 나서야, 힘을 뺐다. 송태섭은 한숨을 내쉬며 초콜릿을 든 채로 거실 카우치에 털썩, 앉았다. 차마 열어보진 못하고 하염없이 상표를 응시했다. 굳은살이 붙고 뼈마디가 툭툭 불거진 굵직한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상표 위를 문질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빨간 리본을 풀었다. 카우치 앞의 낮은 테이블에 리본을 올리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하얀 유산지를 치우자 초콜릿이 하나씩 칸칸이 나누어져 있었다. 개중 하나를 골라 든 송태섭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유심히 살펴보았다.


‘좀, 작아진 것 같은데.’


예전에 정대만에게 받았을 때는 초콜릿이 전부 칸마다 꽉 차 있었다. 그 때문에 조금 꺼내기 힘들 만큼. 그래서 그냥 커다란 포크로 푹푹 찍어서 먹었다. 그런데 오늘 산 초콜릿은 칸 안에 적당한 크기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 편이 훨씬 예쁘긴 하다만, 양이 줄었다는 인상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긴, 물가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요즘 과자며 아이스크림이며 전부 양이 줄고 크기가 작아지고 있으니까. 애써 그리 생각하며 송태섭은 떨떠름한 얼굴로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오랜만에 먹은 초콜릿은 맛있었다. 마트에서 파는 초콜릿치고 가격이 좀 있던 만큼 입안에서 혀와 함께 녹는 식감이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도 송태섭의 눈썹이 영 펼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한 번 더 꺾여 요란하게 휘었다. 그는 초콜릿을 하나 더 꺼내 곧장 입에 털어 넣었다. 달았다. 너무 달았다. 송태섭은 상자를 눈높이 위로 들었다. 몇 년 전, 정대만이 주었을 때는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상품명을 찾았다. 뜻 모를 이태리어 옆에 ‘밀크 초콜릿’이라고 적혀 있었다. 밀크 초콜릿. 새까만 상자에 빨간 리본까지 묶어둔 주제에 밀크 초콜릿. 송태섭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연애하던 시절, 정대만이 그에게 준 것은 쌉싸래한 소금 초콜릿이었다.

송태섭은 곧장 핸드폰을 들었다. 상표 이름을 검색해보니 인터넷에 상품이 떴다. 이탈리아의 유명 초콜릿 브랜드였다. 둘러본 결과, 맛마다 상자와 리본의 색깔이 달랐다. 밀크 초콜릿은 검은색에 빨간 리본, 다크 초콜릿은 빨간색에 검은 리본 등등. 초콜릿을 주력하는 만큼 온갖 맛의 초콜릿이 있었다. 그중 소금 초콜릿은 민트색 상자에 하얀 리본이었다.


‘이게 뭐지……. 잘못 나온 건가? 공정상의 실수, 뭐 그런 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며 송태섭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초콜릿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초콜릿을 노려봤다. 칸칸이 가지런히 놓인 초콜릿이 왜 이렇게 어색하게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그는 답을 알았다. 인제야 눈치챈 게 어이없을 정도로 뒤늦은 자각이었다. 아침에 곱게 왁스로 고정한 머리카락이 그의 손에 양쪽으로 쥐어 뜯겼다.


‘몇 년 사이에 포장이 바뀐 건 아닐까?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 초콜릿을 받은 게 언제 적인데.’


자그만치 8년 전이다. 정대만이 대학 리그를 뛰고, 그는 한창 프렙 과정을 밟고 있을 때였다. 송태섭은 갑작스럽게 덮쳐오는 아득한 거리감에 머리가 아팠다. 커다란 손이 뜨끈하게 열이 오른 이마를 문질렀다. 카우치 위에 다리를 올려 끌어안고 무릎에 이마를 올렸다. 커다랗고 단단한 몸이 둥글게 말렸다.

한국의 대학 리그 시즌은 봄여름이다. 덕분에 정대만은 가을 끝물부터 미국에 가겠다며 염불을 외웠다. 리그가 끝났다고 연습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드래프트를 대비해서 한창 바쁠 시기에 그는 시간을 내서 와주었다. 8년 전의 겨울은 매우 추웠다.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어도 모자랄 판국에, 어린 송태섭이 정대만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그런 송태섭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정대만은 이미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며,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말했다.


“딱 기다리고 있어라, 태섭아.”


비행기를 타기 직전 공항에서 연락한 정대만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텐션이 높았다. 그때의 송태섭은 그가 오랜만에 만나서 기분이 좋은 거라 여겼다. 그 또한 틀린 말이 아니겠다만, 지금 생각하면 기대감을 애써 숨긴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전화만으로 정대만의 귀여운 꿍꿍이를 알아챌 만큼, 어린 송태섭은 그를 알지 못했다. 그 덕에 그날, 드물게도 송태섭은 깜짝 놀라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정대만이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그의 품에 초콜릿을 안겨주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이맘때쯤에 우정 초코라며 한 무더기의 사내놈들에게서 초콜릿을 받아와 송태섭의 속을 박박 긁어두던 정대만이. 얄밉게도 놀라게 한 당사자는 녹을까 봐 조마조마했다며 후련한 얼굴이었다.

검은 상자에 빨간 리본. 그리고 정적인 고딕체 상표. 누가 봐도 가게에서 산 초콜릿이었다. 그래도 기뻤다. 애초에 정대만이 만들어 줄 거라 기대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초콜릿을 고이 품에 안은 송태섭은 그날 초콜릿을 다 먹었다. 하나씩 집어 먹다 보니 금방 다 먹었다. 몇 개는 입에 물고 정대만 입으로 넘겨주었으니, 혼자 먹었다고 할 순 없지만 어쨌든. 그때의 송태섭은 전혀 몰랐다. 그게 마지막 초콜릿이 될 줄은. 그리고 그건 정대만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송태섭이 이미 헝클어진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왁스가 다 풀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이마를 가렸다. 심란한 마음에 카우치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커다란 손을 배 위에 올렸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아 아주 느릿하게 뛰었다. 평소와 비슷할 텐데, 그렇게 느껴졌다. 반쯤 내리감은 눈이 어둑해졌다.

송태섭은 중학생 때의 정대만도, 고등학교 정대만도 사랑한다. 동시에 선수로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학에서 쉬지 않고 농구를 한 정대만은 더 대단했다. 3학년이 된 그는 대학 리그가 끝난 후 진행된 드래프트에서 얼리로 구단에 입적했다. 감독이 대학 리그에서부터 꽤 눈여겨 보았던 건지, 그는 구단에 입적하자마자 프로 리그에 발을 들였다. 주전이 아니었지만, 상황에 따라 교체 멤버로 꾸준히 지목되어 코트를 밟았다.

정대만은 자신에게 향하는 기대에 어떻게든 부응하는 사람이다. 송태섭이 사랑하는 그의 깔끔한 폼, 공이 단번에 림을 통과하는 시원한 소리, 그 뒤를 따르는 정대만의 만개한 미소가 카메라 정면에 잡힌 순간. 관중들이 그날의 송태섭처럼 사랑에 빠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대만은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사랑을 손에 쥐었다.

그래서 한결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여전하다고. 그라면 평생 바뀌지 않을 것 같다, 고 여겼다. 바보 같게도. 송태섭은 프로 리그를 보면 볼수록 정대만이 낯설어졌다. 3년 동안 키도 조금 더 크고 몸도 커졌지만, 타고나길 몸 선이 길쭉길쭉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와 인상이 많이 달라지진 않았다. 오히려 변한 것은 성격이었다. 그와 같은 대학을 가서, 같은 팀으로 뛰었다면 어땠을까, 싶을 만큼.

자신의 센스를 믿고 필요하면 몸으로 먼저 밀고 나가던 사람이 조금 신중해졌다. 여전히 농구 센스는 탁월했으나, 홀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보다 경력과 나이가 많은 선배들에게 의지하는 모습이 종종 엿보였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상대방을 압박할 때는 TV로 보는데도 조금 압도되었다. 단순히 불량해 보이는 게 아니라, 묵직하게 내려다 보는 강인한 인상이었다. 누구에게 배운 걸까. 대학 리그에서 함께 한 센터? 아니면 지금 같은 구단인 주장? 누구든 정대만이 배우고 따랐을 이가 부러웠다. 카메라가 그를 비출 때마다, 심장이 쿵, 쿵 뛰었다.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며 두근대는 게 아니라 바닥을 치고 또 쳤다. 이미 구멍이 뚫려 바닥이 어디인지도 보이지 않는데.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농구 하는 당신이 달라지는 게, 서러웠다.


대학리그를 마치자마자 프로 리그에 데뷔한 그해, 정대만이 미국에 오지 못했다. 송태섭도 프렙을 마친 후 무사히 대학에 입학했다. 그래서 한국에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 돌아가면 다시 가기 싫어질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이 없는 사이에 많이 변한 정대만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송태섭은 작전상 후퇴라고 홀로 되뇌었다.

대학에 입학 후, 그도 기대하던 NCAA에 입성했다. 하지만 주전 자리는 멀고도 험했다. 이미 확고하게 주전을 꿰찬 이들이 있고, 선수층이 두터운 학교였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보다 키가 크긴 했지만, 이곳에선 작은 선수들 중에서도 송태섭이 작은 편이었다. 송태섭은 가끔 감독이 무슨 이유로 자신을 뽑은 걸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곧바로 ‘뽑았으면 끝이지. 좋다매?’ 하고 드리블 연습이나 했다. 몸을 좀 더 키우기 위해 식단을 조절하고, 헬스 강도를 올렸다. 그래도 아직은 덜 여문 몸이었다. 연습 경기에서 센스는 그가 우위인데도 신체 탓에 밀리는 상황이 연이어 터졌다. 덩치에 나가떨어져 코피가 터졌을 때는 턱이 아프도록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머리에 흰 수건을 올리고 벤치에 앉아서 코트를 보는 내내 옅은 갈색 눈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건, 포인트 가드인 송태섭에게 큰일이었다.


“야! 태서바!”


정대만이었다. 언제나 답은, 정대만이었다. 그게 퍽 웃기면서도 허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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