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웅백호/루하나] 보답은 입맞춤으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따스했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유유자적 흘러가고, 날씨는 정말이지 좋았다.
평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난 강백호는 들뜬 기분을 한껏 드러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누가 깨워주지도 않았는데 일찍 일어나다니 역시 난 천재라니까!
어쩐지 모든 게 잘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농구장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선 강백호가 의기양양하게 손잡이를 붙잡아 문을 열었다.
그리고, 강백호의 눈앞에서 공이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렸다.
공을 쏘아 보낸 길게 뻗은 손끝이 조명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손끝을 따라가니 그곳엔 한 인영이 있었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으나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이상적인 슛 폼에 자신도 모르게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강백호는 림을 통과한 농구공이 바닥을 향해 낙하하고, 공이 코트의 바닥에 멈춰서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곤 큰 소리로 소리쳤다.
“왜 네가 여기 있는 거냐! 여우 자식!”
그 우렁찬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서태웅이 강백호를 바라보며 짧게 말을 내뱉었다.
“그건 내가 할 소리다 멍청이.”
**
‘아무도 없는 코트에서 연습해서 멋지게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던 이 몸의 천재적인 계획이…!’
강백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누가 봐도 분한 표정으로 농구공을 집어 든 강백호가, 서태웅을 향해 쏘아붙였다.
“헹, 이 천재의 연습을 방해하지나 말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한 강백호가 팔을 힘차게 들어 올렸다. 서태웅은 강백호의 말에 콧방귀를 한번 뀌곤 뒤돌아 코트 밖으로 나서려 했다.
그때였다.
빡!!!!
강백호의 손에서 날아간 농구공은 강렬한 소리와 함께 서태웅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그리고 이윽고, 서태웅이 힘없이 바닥으로 엎어지는 소리가 농구장 안에 울려 퍼졌다.
강백호의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정말이지, 대형 사고였다.
**
그리고 어느 곳에서는, 올해로 서른 살이 된 농구선수 서태웅이 연습을 끝마치고 돌아와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눈을 떴을 때, 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젊은 얼굴을 한 그의 연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어이, …서태웅. 너 괜찮냐?”
그래, 저 어리숙하고 멍청한 얼굴에 자른 지 얼마 안 된 듯한 짧은 붉은 머리는… 고등학교 1학년쯤의 강백호로 보였다. 서태웅은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이건…’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꿈인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눈앞의 강백호는 대형 사고를 친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곤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러면서도 입에서 나오는 말은 시비를 걸듯 사납기 그지없었다.
“공 한번 맞은 거 가지고 그렇게 비실이처럼 쓰러지니까 이 몸이 연습도 못 하고 있었잖아!”
사고쳐놓고 저러는 건 지금이랑 똑같군. 너무 현실적인 꿈에 잠시 과거를 회상한 서태웅이 슬쩍 미소 지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언어를 그대로 내뱉었다.
“귀엽네.”
강백호는 자신의 뒤에 누군가가 있는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이곳엔 두 사람뿐이어서, 강백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설마 하는 얼굴로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그 제스쳐에 서태웅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끔찍한 것을 본 듯 강백호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으아아악!”
“…”
“여우 자식이 드디어 미쳤다!”
경악하며 날뛰는 강백호를 서태웅이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쩐지 평소와 달라서, 그 시선에 날뛰는 것을 멈춘 강백호가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간질간질한 느낌에 소름이 쭉 돋는 것 같았다.
“뭐, 뭐야. 그 소름 돋는 눈빛은! 빨랑 눈 안 돌려!?”
갑자기 성큼 다가온 낯선 감각에 강백호가 날 선 동물처럼 하악질 했다. 서태웅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팔짱을 끼고 낮게 중얼거렸다.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
조용한 농구코트 안에서, 그 나지막한 말이 울려 퍼지는 듯했다. 자신을 부르는 말은 평소와 같았지만, 그 재수 없는 표정과 짜증 나는 목소리가 어쩐지 평소의 저 녀석보다 여유가 묻어나와서, 백배는 재수 없다고, 강백호는 생각했다.
그런 강백호를 바라본 서태웅이 다시 평소와 같은 무덤덤한 얼굴을 한 채로 입을 열었다.
“강백호.”
“…왜.”
“원온원 할까.”
그렇게 내뱉은 것은, 강백호가 아는 서태웅으로서는 다분히 충동적인 말이었다.
“…?”
“왜? 무서워서 하기 싫나?”
연습해야 한다면서? 그 말에 강백호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서태웅을 바라보며 길길이 날뛰었다.
“이 천재님을 뭐로 보고…! 그래 그 도전 받아주지!”
씩씩거리며 저를 노려보는 강백호를 보며, 서태웅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봐둬.”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태웅이 강백호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태웅은 어느새 저 너머에 있었다.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강백호는 서태웅을 쫓아갈 수도 없었다.
그대로 높이 뛰어오른 서태웅이 그대로 공을 림 안에 처박았다.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림이 강하게 흔들리고, 공이 코트 위로 떨어졌다.
정말이지, 완벽한 슬램덩크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강백호는 순간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 달랐다. 여우 자식의 플레이는 언제나 재수 없을 만큼 깔끔하긴 했으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이건, 강백호가 이해할 수 없는 범주에 있는 플레이었다.
림을 잡은 손을 놓으며 코트 위로 가볍게 착지한 서태웅이 농구공을 강백호에게 던지며 말했다.
“이제부터 네 수준에 맞춰 상대해 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서태웅은 정말이지, 즐거워 보였다.
**
한 번도 막지 못했다.
크윽, 터져 나오는 분함을 집어삼키며 강백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숨을 헐떡였다.
쓰린 패배에 인정하기 싫었지만, 서태웅과의 원온원은 정말로 좋은 수업이 되었다.
오늘따라 아주 날아다니던 서태웅을 흘겨본 강백호가 역시 재수 없는 얼굴이라며 흥.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서태웅은 숨을 고르며 코트 바닥에 놓인 물병을 들어 그대로 들이키고 있었다.
손등으로 제 입가를 한번 훔친 서태웅이 주저앉아있는 강백호를 흘끗 바라보더니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겨 강백호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뺨에 닿아오는 차가운 감촉에 강백호가 움찔, 몸을 떨었다.
“마셔.”
얼떨결에 제게 내밀어진 물병을 받은 강백호가 서태웅과 제 손에 들린 물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게 닥쳐온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장 난 것 같은 강백호를 보며 서태웅이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강백호에겐 유감이지만, 지금의 서태웅은 저런 상태의 강백호를 어떻게 하면 다룰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서태웅이 강백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설마 수분 보충도 안 하는 멍청이는 아니겠지.”
그리고, 이 말을 들은 강백호는 서태웅이 예상했던 것처럼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잡념을 날려버리곤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자식이 이 천재를 뭐로 보고! 아니, 그 전에 이거 네놈이 마시던 거잖아!”
“그게 왜?”
서태웅의 그 태연한 대답에 할 말이 없어진 강백호가 기가 막히다는 얼굴을 하며 서태웅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왜, 신경 쓰여? 내가 마시던 거라?”
“…그럴리가 없잖아! 마시면 될 거 아니야!”
그렇게 소리친 강백호는 병에 입을 대곤 안에 들어있는 남은 물을 그대로 들이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태웅이 다시 강백호를 불렀다.
“강백호”
“…왜!”
푸하. 라는 소리와 함께 병을 내려놓은 강백호가 제 입가에 흐르는 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서태웅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서태웅이 다시 말을 이었다.
“연습은 충분히 된 것 같아?”
그 부드러운 말에 강백호는 순간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도움이 됐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부러 퉁명스럽게 말하고 말았다.
“…흥, 이 천재님에게 그 정도로 연습이 될 것 같아?”
“도움이 됐다는 거지?”
“…”
오늘따라 서태웅이 정말 이상했다. 원래 저렇게 끈질긴 놈이었던가? 그래도 네가 원하는 대답은 절대로 안 해줄 거거든? 서태웅의 시선을 은근히 피하는 강백호의 입이 삐쭉거렸다.
그리고, 그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서태웅이 손을 뻗었다.
덥석
갑자기 멱살이 붙잡힌 강백호가 어어 소리를 내며 서태웅이 당기는 방향으로 그대로 끌려갔다.
쪽
남사스러운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강백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보답.”
받아 간다.
만족한 듯, 잡았던 옷자락을 놓은 서태웅이 담담히 말했다.
그때, 멍하니 서 있던 강백호가 빛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퍽!!!!!!!
강력한 박치기에, 서태웅이 뒤로 휘청거리며 비틀거렸다. 그런 것은 신경 쓰지도 않고 손등으로 제 입술을 벅벅 문지르던 강백호는, 새빨개진 얼굴을 한 채로 분함에 못 이겨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강백호의 첫 입맞춤이었으니까!
첫 키스는 좋아하는 여자애랑 분위기 좋은 장소에서 하려고 했는데… 이, 이런 여우 자식이랑 …?
“이, 인정 못 해!”
“이런 건 절대로 인정 못 한단 말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백호가 농구장 밖으로 내달렸다.
“…?”
원래대로 돌아온 서태웅만이 앞뒤로 얼얼한 자신의 머리를 의아하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
“…웅.”
“서태웅!”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서태웅은 반사적으로 제 이마에 손을 짚으며 눈을 떴다. 꿈이라는 게 실감이 나듯, 아무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잘 거면 들어가서 자! 감기 걸리고 싶냐!”
눈앞에는 아까전의 강백호가 아닌, 올해로 같이 서른 살이 된 자신의 연인이 있었다.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지 아직 두꺼운 겉옷을 걸치고 있는 강백호를 보며, 서태웅이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강백호.”
“엉? 왜.”
그 얼빠진 대답에 꿈속에서 만난 강백호의 얼빠진 얼굴이 생각나서였을까, 서태웅이 슬쩍 미소 지었다.
대답은 없이 미소만 짓고 있는 그가 답답한지 강백호가 따져 묻듯 서태웅에게 말을 걸었다.
“왜 웃고 그래?”
“꿈을 꿨어.”
그렇게 말하는 서태웅이 즐거워 보여서, 강백호는 그 꿈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무슨 꿈인데? 이 몸이 나오기라도 했나 보지?”
그 물음에 서태웅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응.”
정말로 그럴 줄은 몰랐는지 강백호가 눈을 깜빡였다.
“…진짜로?”
“응. 고등학교 1학년의 네가 나왔는데.”
“고등학교 1학년? 아, 농구를 그때쯤 시작했었나. 그때도 이 몸은 천재였지.”
제 턱을 붙잡고 고개를 끄덕이는 강백호에게, 서태웅이 그건 아니라는 듯 딴지를 걸었다.
“…더럽게 못하던데”
“…”
그 순간, 싸늘한 공기가 두 사람의 사이를 지나가는 듯했다. 서태웅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입을 열었다.
“…멍청이.”
“이 여우 자식이…!”
서태웅의 그 말에, 부글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려던 강백호가 소파에 누워있는 서태웅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밖으로 나와! 지금 당장 승부다!”
예상한 그 말에, 서태웅이 입꼬리를 올렸다.
여전히 떠들썩한, 서른 살의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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