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선명하게 나뭇잎을 핥고 있었다

태웅대만 | 안 사귀는 동갑내기들이 주번을 해요

* 동갑 고1 탱댐

* 당시 교육과정 및 교육환경에 대한 가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제목은 실제 고1·2 전국연합학력평가 필적확인란 문구입니다. 원문은 한수산 작 1982년 소설 '유민' 입니다.

199x년 4월 xx일. 월요일.

 교실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가 찌걱찌걱 털털털 돌아가며 거슬리는 소음을 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원을 꺼 버릴 수는 없었다. 교실의 공기는 너무 후덥지근했고, 북산고등학교 1학년 10반의 인구 밀도는 전기밥솥의 쌀알들만큼이나 복작거렸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따스운 봄 더위가 시작되는 계절이었다. 막 학교를 올라온 1학년 내기들이 조금 더 고등학생다워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1학년 10반 정대만의 목표도 이제 어엿한 고등학생이니 중학생 때보다 발전한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자는 내용이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오늘도 일과가 끝나면 체육관행이 예정되어 있었다. 부장 선배의 혹독한 훈련은 조금 두렵지만 작년의 영광을 고등학교에서도 재현하기 위해 소년은 열의를 다지고 있었다.

"대만아, 너 이번 주 주번인가?"

아침부터 같은 반 친구 호식이가 어깨를 두드렸다. 호식과는 같은 농구부 신입부원이었다. 호식은 중등부 MVP 정대만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호식이 무석중의 슈퍼스타라며 추켜세우는 말에 대만은 조금 으쓱해졌다. 동갑임에도 불구하고 연습 경기 뒤에는 언뜻 대만에게 동경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대만은 호식에게 잘해주고 싶어졌다.

"어어, 나랑 21번이랑. 아직 학교 안 왔나봐."

대만은 1학년 10반 20번이었다. 주번을 맡을 차례가 돌아왔기 때문에 월요일인 오늘부터 한 주 간 21번 친구와 칠판 지우기, 선생님 교재 나르기 등 자잘한 일을 도맡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걔 오늘 열 나서 병결이래. 며칠 못 나올 것 같아서 대신 22번 보고 순서 바꿔 달라고 했다던데."

"22번?"

22번이 누구였더라... 애석하게도 학급 친구들의 프로필을 외우지는 못하는 관계로 대만이 말끝을 흐렸다. 이왕이면 말 잘 듣고 일 잘하는 애였으면 좋겠다. 한 주가 좀 더 편할 수 있도록.

"22번 서태웅 아냐?"

호식은 조심스럽게 대만의 앞자리를 내다보았다. 그러고보니 한 명 더 있었다, 농구부 동기. 존재감은 절대 무시할 수 없지만 어쩐지 말을 많이 걸어본 적은 없던 이름이었다. 호식도 아마 마찬가지인지 입을 다셨다. 앞 자리의 주인은 개인 연습을 하고 오는지 아직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몰랐네, 둘이 잘 해보지 뭐."

조금 어색할 것 같은데, 이 기회에 친해질 수도 있겠네. 대만은 머쓱하게 웃어 넘겼다. 호식은 자기도 태웅을 잘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라며 언젠가 농구부 끝나고 다 같이 라면이라도 먹으러 가자고 권해왔다. 대만도 좋다고 말을 받았다. 그게 언제가 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대화가 끝나자마자 교실 문이 드르륵 밀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서태웅이었다. 단연코 서늘한 얼굴이었지만 대만은 어쩐지 눈이 마주쳤을 때 그의 표정이 맹해보인다고 생각했다.

"오늘 주번 누구야? 칠판 지워라."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학생들은 수업에 집중하는둥 마는둥 금방 산만해졌다. 그런 아이들을 본 선생님은 잠자코 수업을 끝내주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칠판을 지우고 교구를 정리하는 것은 주번들의 몫이었다. 대만은 조용히 일어나 앞자리에 구부정하게 엎어져있는 등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야, 서태웅. 너 주번 바꿨다며, 일어나봐."

들었는지 어쨌는지 태웅은 미동이 없었다. 뜨거운 햇볕이 쏟아져들어오는 창 아래에서 잘도 자는구나 싶었다. 그렇다고 흔들어 깨우기엔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대만은 잠시 고민하다가 잠든 태웅의 머리 위로 조용히 한 마디 했다.

"...서태웅, 농구부 가자."

그러자 마치 열려라 참깨 주문을 들은 마법의 동굴처럼 움직이지 않던 태웅의 두 팔이 스르륵 풀렸다. 유순한 얼굴의 태웅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거면 될 줄 알았지, 이 녀석도 나 못지 않게 농구를 좋아하는 녀석이니까. 대만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쏘리, 뻥이야. 우리 빨리 칠판 지우고 교재 날라다 드려야 돼."

태웅은 눈길을 천천히 돌렸다. 우하하 웃는 대만의 말간 얼굴을 째려본 것 같았다. 그러더니 대꾸도 없이 벌떡 일어나서 칠판을 향해 비척비척 걸었다. 농구 할 때는 그렇게도 힘 있게 뛰는 녀석이 지금은 스위치를 내린 듯 흐느적거리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대만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차박차박 따라 걸어 칠판 지우개를 집었다.

"그래도 우리 둘 다 키가 크니까 칠판이 수월하다. 원래였으면 높은 곳은 내가 다 닦았을 거야."

너도 평소에 주번 하면 높은 곳은 너 혼자 다 쓸고 무거운 건 너 혼자 다 들지? 운동부니까. 대만은 실없이 키득거렸다. 이런 사소한 말 조차 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도 그럴게 태웅은 늘 잠을 잤으니까. 그리고 그런 대만 역시 햇살에 눈이 감기는 꿈나라 단골 고객이었다. 태웅은 살갑게 말을 거는 대만을 향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냥 마찬가지로 칠판 지우개를 쥐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대만은 조금 머쓱해진 티를 숨기며 태웅에게서 칠판 지우개를 빼앗아 구석에 대고 팡팡 두들겼다. 뽀얀 분진이 모락모락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대만은 칠판 지우개들을 칠판 선반에 내려놓고 선생님이 두고가신 학습 교구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시선을 눈치챈 태웅이 교구 상자를 한 아름 들었다. 그리고 대만이 남은 절반을 들었다. 이제 이 짐들을 교무실에 가져다두기만 하면 다음 수업 시간까지는 자유가 예정되어 있었다.

"사회과 교무실은 3층이었지? 빨리 갔다오자."

복도를 나란히 걷고있으니 방심하기 무섭게 침묵이 파고들었다. 어쩐지 다시 대화가 없으면 민망한 기분이 들어 대만은 시시콜콜한 질문을 던졌다.

"이따는 체육 있지? 우리 키 받아다가 체육관 창고도 미리 열어야 된대."

"너는 늘 쫑알쫑알 말이 많네."

"뭐?"

답해주기를 기대하고 던진 말도 아니었는데, 답이 돌아온 것도 모자라 내용도 뜻밖이었다. 태웅은 방금 들은 건 착각이었다는 듯 척척 다리를 뻗어 앞서질러갔다. 대만은 조금 황당했지만 성큼성큼 따라붙었다.

"내가 말 많은 데 보태준 거 있냐? 이 자식."

"나도 농담이야."

별 농담 같지도 않은 농담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말을 튼 것이 다행이라 할지, 대만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웅을 바라보았다.

*

늘 그렇듯 점심 먹고 조금 졸다보니 벌써 6교시 체육 수업이었다.

역시 오랜만에 주번이 돌아오니 할 일이 많은 것이 조금 익숙하지 않았다. 대만은 체육 창고 한 쪽 문을 잡고 힘을 주어 열어 젖혔다. 녹슨 철문이 끼이 하는 소리를 내며 벌어졌다가 쾅 하고며 닫혔다. 오늘 체육 시간에는 뜀틀을 한다고 했다. 뜀틀과 매트리스를 미리 끌어다놓아야 했다. 하필 내가 주번일 때 뜀틀같은 걸 날라야 한다니, 줄넘기 같은 거면 좀 좋아. 대만이 툴툴거렸다. 태웅은 대만을 뒤따라 들어와 눈으로 가만히 오늘의 준비물을 찾았다. 뜀틀은 꽉 들어찬 좁은 체육 창고의 구석에 다소곳하게 비치되어 있었다. 옮기기 위해서는 우선 동선을 치워야 할 것 같았다. 뜀틀을 들고나올 길목에는 방향 지시에 쓰이는 깔대기, 경기에 쓰이는 점수판 등이 어지럽게 담긴 종이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대만은 한 상자씩 들고 옮기다가 태웅을 보았다. 태웅은 한 마디 말도 없이 대만의 옆에서 대만을 따라 상자를 들고 있었다. 조용히 할 일을 하는 것이 너도 운동부긴 하구나, 대만은 생각했다. 고개를 돌려 태웅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상자를 들고 발을 떼었다.

그 때 순간 태웅이 상자를 집어던지듯 내려놓고 대만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턱. 머리 위를 짚은 태웅의 손에 대만이 숨을 삼켰다.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 건든 것인지 높은 선반 위 상자에 쌓아둔 농구공들이 무너지려 하고있었다. 제일 위에 얹힌 공부터 굴러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태웅이 잡아 멈춘 것이었다.

"어우, 야... 몰랐네. 고맙다야."

"조심해."

"잠깐 멍 때리느라... 머리 맞을 뻔했는데 덕분에 살았어."

너 꽤 좋은 놈이구나? 태웅쓰. 태평하게 고마워하는 대만에게 태웅은 보란듯이 한숨을 쉬었다. 덜렁이. 한 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 근데 운동신경 진짜 좋다. 어떻게 그걸 바로 잡냐?"

 태웅이 대만을 힐난하건 아니건 대만은 종알종알 친한 척을 해대며 상자를 마저 옮기고 뜀틀을 문 쪽으로 밀었다. 학급에서 나름대로 신체 건강한 운동부 롤을 맡고 있는 둘에게는 냉장고만한 뜀틀도 비교적 수월했다. 문을 열고 뜀틀을 옮기려던 차, 대만은 둥근 문 손잡이를 찰칵찰칵 돌리다가 당황했다.

"이거 문 왜 안 열리냐?"

얼타는 대만을 두고 태웅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왔다.

"비켜봐."

태웅이 힘주어 문을 밀며 문고리를 돌렸지만 끼긱끼긱 소리만 들릴 뿐 문은 어딘가 잘못 맞물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 신경질적으로 태웅이 계속 문고리를 돌리다가 이윽고 몸으로 문을 쿵 부딪혔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열리지 않는 철문에 대만은 조금 초조해졌다. 쉬는 시간 끝나기 전에 이거 다 갖다놓아야 하는데.

"두드리면 밖에서 누가 열어주지 않을까."

탕탕탕탕. 철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응답해주지 않았다. 아직 쉬는 시간이 끝나지 않은 시각이라 바깥이 시끄러워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만은 바로 나가지는 못하겠다 싶어 매트리스에 풀썩 앉았다. 앉아있으니 눕고 싶어 바로 철퍼덕 디비져 누웠다. 에휴, 될대로 되어라. 어차피 10분도 안 남았다. 그 동안에도 태웅은 열리지 않는 문가에 가만히 기대서서 대만이 태평하게 뒹굴거리는 꼴을 지켜보았다. 너도 와서 누워. 대만이 매트리스 옆을 팡팡 두들겼다. 태웅은 얼씨구, 희한한 놈을 보는 표정으로 다가오지 않았지만 이 순간에도 장난기가 든 대만을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기를 조용히 몇 분, 쉬는 시간이 끝나자마자 대만이 벌떡 일어나 문을 두들긴 덕분에 밖에서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창고가 열리면서 빛이 쏟아져들어오고, 친구들이 체육관에 정렬해 있었다. 창고 문에 기름칠을 좀 하던가 해야겠네. 체육 선생님이 혀를 차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아자뵤, 이렇게 우리 둘이 갇혀 죽나 했다. 열어줘서 고마워. 문을 열어준 아이에게 대만이 감사인사를 하며 씨익 웃었다. 뒤돌아 태웅이에게도 그렇지? 하며 추임새를 넣던 대만이는 따라나오던 태웅이의 빛에 눈이 부신 듯 가늘게 뜬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찔러도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던 그 무심한 인상이 보여주는 하찮은 모습에 어쩐지 조금 놀려주고싶은 기분이 들었다.


199x년 4월 xx일. 화요일.

어제 본의 아니게 주번을 하느라 하루 어울려서일까, 어제 아침보다 오늘 아침 대만에겐 옆에서 칠판을 지우는 태웅의 존재가 조금 더 익숙했다. 태웅과는 생각보다 손이 잘 맞는 편이었다. 농구부에서도 패스나 원온원 같은 걸 가끔 하긴 하지만, 아직 입학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데다 다른 부원들보다 상대적으로 대화를 많이 나누는 편은 아니라서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농구부 바깥의 태웅을 보는 것 역시 새로웠다. 그 시간 동안의 태웅을 더 알아간다는 점이 대만에게는 마치 돌발 이벤트와 같았다. 태웅은 지난 쉬는 시간에도, 지지난 쉬는 시간에도 엎드려 자고있더니 이번 쉬는 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 공교롭게 앞자리가 태웅이라서 대만은 좋았다. 어제 일로 조금 더 태웅이 편해지기도 했다. 구부정하게 굽은 하얀 등을 보고있던 대만은 팔을 쭉 뻗어 그 위로 글씨를 썼다. ㅈㅏㅁ.. ㅌㅐㅇㅇㅣ. 평소 자는건지 죽은건지 모르게 미동도 없는 태웅을 생각하면 아마 세상 모르고 넋을 잃어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태웅이 부스스 일어나 뒤를 째려봤다.

"... 나 잠탱이 아냐."

"아 들켰네, 자느라 모를 줄 알았더니."

누가 봐도 장난이 분명한 목소리에 태웅은 대만을 다시 멀뚱히 바라보다가 푸스스 제 자리에 엎드렸다. 대만은 조금 싱거워서 다시 그 등에 글씨를 썼다. ㅂㅏㅂㅗ. 역시 태웅은 고개를 확 세운다.

"... 너 진짜."

"이히히."

"바보라는거, 혹시 자기소개?"

"내가 왜 바보야?"

"어제 공 굴러떨어지는 것도 못 봤잖아, 바보야."

"그건 너 보느라 실수한거지."

"내가 못 봤으면 어쩔 뻔했어."

"왜, 너 바람돌이 슈퍼루키 서태웅이잖아. 그래서 너가 와서 막아줬잖아."

어제 농구부에서 선배에게 슈퍼루키라고 불리운 것을 대만은 놓치지 않았다. 태웅은 그 말에도 부끄러운 기색 한 점 보이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대만이 태웅에게 라이벌 의식을 불태운다는 것을 농구부의 모두가 알았다. 무석중 MVP 대 신라중 슈퍼루키의 대결은 무석중 MVP의 일방적인 호승심처럼 보였지만, 사실 신라중 슈퍼루키 역시 둘째 가라면 서러운 투지의 화신이었다.

"이따 또 원온원해."

"어제 삼 점 슛 못 막아서 애석했구나, 태웅쓰? 와라, 이 엉아가 받아주마."

어제 원온원은 서태웅의 방심으로 정대만이 깜짝 슛을 날려 이겼다. 부러 그 점을 콕 집어 놀리는 대만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태웅은 순간 빠직 소리가 난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티가 나게 못마땅해하더니 팔을 뻗어 대만의 정돈된 머리를 엉망진창 헤집고는 새침하게 몸을 돌려 다시 엎어졌다. 태웅 답지 않은 친근한 스킨십에 대만이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신경질적으로 아우 씨! 하고 투덜거렸다. 하지만 동시에 코를 찡그려 큭큭 하고 웃고 있었다. 대만의 다른 친구들과 태웅에게는 분명히 큰 차이가 있었다. 태웅은 그렇게 살갑지도 않았고 먼저 뭔가를 궁금해하는 법이 별로 없었지만 그렇다고 질문이 없는 친구는 아니었다. 말이 많다기보단 생각보다 표정이나 반응이 다채로웠다. 남이 들으면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할 지 몰랐지만, 적어도 대만에게는 태웅이 꽤 솔직하게 느껴졌다. 

"태웅쓰야. 깬 김에 나 체육복 좀 빌려주라."

태웅은 눈을 멀뚱히 떴다.

"우리 같은 반인데. 오늘 체육 없잖아."

"아아니, 그런 거 말고. 선풍기 직빵인 자리라 아직 좀 추워서... 오늘 나 체육복 안 가져왔단말야. 있어 없어?"

주섬주섬 체육복 저지를 꺼내주었더니 대만이 좋다고 냉큼 받아 팔을 꿰었다. 굳이 태웅에게 빌리지 않아도 다른 친구들이 있을텐데 대만은 태웅에게 체육복을 빌렸다. 자기보다 한 사이즈 커서 팔이 조금 긴데도 팔뚝을 걷고 씩씩하게도 입었다. 대만은 볼일을 다 보았다는 듯이 태웅의 체육복 저지를 입고 다른 친구들에게 어깨동무를 걸며 매점 콜? 하고는 멀어졌다. 태웅은 대만이 교실 문을 넘어 복도로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풀썩 엎어졌다. 

이게 누가 누구더러 잠탱이래.

종례가 다 끝나도록 대만은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그 어깨에는 좀전에 빌려준 태웅의 체육복이 덮여있었다. 어찌나 곤하게 자는지 모두가 하교한 뒤 적막한 교실에 색색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농구부에 갈 준비를 마치고 가방을 싼 태웅은 대만의 앞 책상에 기대서서 대만의 정수리를 한참 구경했다. 오후에 길게 드리운 햇살을 오랫동안 맞은 대만의 갈색 머리카락과 곧은 등이 병아리처럼 따끈따끈하고 잘 마른 흰 수건처럼 바삭바삭해보였다.

"일어나, 잠탱아."

이 잠탱이는 대꾸가 없다. 얼마나 단 꿈을 꾸고있을지, 태웅은 다시 대만을 내려다보며 머리 위로 한 마디 떨어뜨렸다.

"일어나, 정대만."

...대만아. 자고 있는 사람 앞에서도 소리내어 말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고 있으니 대만이 부스스 일어나 시야의 초점을 맞췄다.

"어우, 야. 좀 일찍 깨우지. 나 진짜 잘 잤다."

"내가 깨웠는데 네가 안 일어났어."

"체육관 가는거지? 같이 가자."

대만이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대로 자연스럽게 태웅의 체육복 저지를 입은 채였다. 태웅은 짐을 싸서 나가려는 대만을 조용히 따라나섰다.

그 날의 원온원은 깔끔하게 태웅이 이겼다. 대만은 툴툴거리면서도 아이스크림을 사다 바쳤다. 초코와 딸기 중 태웅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딸기를 골랐다.


199x년 4월 xx일. 수요일.

종례를 마치고 할 일이 많은 날이었다. 우선 반 청소를 해야하고, 담임이 시킨 학급 행사 준비도 해야했다. 태웅과 대만은 각각 물걸레 자루를 들고 교실에 섰다. 쭉쭉 미는 게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역시 귀찮은 일은 그 이후에 걸레를 화장실에 가서 빨아다가 말려놓는 일이었다. 그런데 웬일로 태웅이 대만의 물걸레를 쓱 가져갔다. 본인이 두 개 다 빨아오겠단다. 아마 낮에 대만이 딸기 우유를 사다주어서일지도 몰랐다. 친구들이랑 매점에 간 김에 어제 딸기 아이스크림을 잡던 태웅이 생각나서 잠든 뒤통수에 하나 던져준 것이었다. 굳이 하루에 딱 4개 들어오는 레어템이라는 사실은 태웅에게 피력하지 않았다. 딸기우유를 받은 태웅은 일어나서 묘한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착하게 대걸레 빨래를 도맡는 것이다. 대만은 왜인지 쑥쓰러워져서 입을 삐죽였다.

아차차, 일이 이걸로 끝이 아니지. 고등학교에 올라와 새 학급이 시작되는 4월이었다. 신학기를 맞아 담임은 학급 마니또를 준비했다고, 주번들에게 마니또를 배정할 쪽지를 접으라고 시켰다. 이름을 적어 접은 쪽지들을 유리병 안에 넣어 한 명씩 가져가 마니또를 정하는 방식이었다. 쪽지를 만들기 위해 대만이 교무실에서 색도화지와 칼, 자, 마커를 가져왔다. 한 사람이 종이를 자르면 다른 한 사람이 이름을 적고 접기로 했다. 태웅은 책상 밑에서 책받침을 꺼냈다.

"어, 조던 책받침이다."

나도 집에 이거 있는데. 조던 좋아하나보네. 대만이 친숙하게 물었다.

"좋아해."

"나도 좋아한다."

마이클 조던. 완전 멋있지 않아? 너 그 아대도 조던 따라한거지? 대만은 공통주제가 나와서 반가웠다. 태웅은 마이클 조던을 정말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신발도 에어 조던인데다 옷도 나이키를 자주 입고, 이렇게 수줍게 조던을 좋아한다고 고백해오는 걸 보니...

태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이름을 적고 종이를 접었을 뿐이었다. 집중하려나보다, 별 생각 없이 대만도 종이를 서걱서걱 잘랐다. 빨리 끝내고 체육관을 가야했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조용히 할 일을 했다. 종이도 다 자르고 이름도 다 적었을 무렵, 대만이 물었다.

"인원 수 맞나 마지막으로 확인할까?"

그러자 태웅이 답지 않게 파드득 놀랐다. 얼마나 크게 놀랐는지 머리카락이 곤두선 것처럼 보였다.

"내가 아까 확인했어. 숫자 맞아."

"뭐, 네가 확인했다면 맞겠지. 근데 뭐 그렇게 놀라냐?"

태웅은 마찬가지로 대답하지 않았다.


199x년 4월 xx일. 목요일.

주번 생활도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 오늘 내일만 하면 한동안은 칠판 지우기도, 교재 나르기도 안녕이었다. 대만은 생각에 잠겨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담임이 앞 자리 아이들에게 가정통신문 뭉치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앞 자리 아이는 뒷 자리 아이에게, 뒷 자리 아이는 그 뒷 자리 아이에게 가정통신문을 넘겼다. 태웅이 팔을 뻗어 그 앞 자리 아이에게 가정통신문을 받는 기척이 보였다. 대만도 자신에게 넘겨질 종이를 생각하며 태웅의 등을 바라보았다. 태웅이 팔을 뒤로 돌려 대만에게 가정통신문을 넘겼다. 대만은 덥썩 잡았다. 아니, 잡으려고 했지만 안 잡혔다.

대만이 잡으려는 찰나 태웅이 팔을 휙 들어 대만이 가정통신문을 잡지 못하게 방해했다. 이 녀석, 유치한 장난을. 대만은 약이 올라 다시 한 번 태웅의 가정통신문을 향해 팔을 뻗었지만, 역시나 태웅은 재주도 좋게 요리조리 종이를 휘둘러대는 통에 잡기가 어려웠다. 대만의 뒤에는 아무도 없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배부가 늦어진다고 눈총을 받을 뻔했다. 어쩌면 태웅은 그걸 알고 이렇게 자꾸 가정통신문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일지도 몰랐다. 에잇, 눈에는 눈이다. 대만은 손을 뻗어 이번에는 태웅의 옆구리를 찔렀다. 태웅이 움찔하는 틈을 타서 종이를 빼앗았다. 속 시원했다.

*

5교시에 안 졸린 사람이 있다면 사람이 아니거나 권준호다. 대만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 5교시도 절찬리에 디비져 자는 중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덮고있던 체육복을 확 들어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등이 순간 추워졌다. 실눈을 뜨고 보니 서태웅이었다.

"네 체육복 가져가."

오늘 덮고 자는 체육복도 대만의 것은 아니었다. 체육복의 원래 주인되는 친구에게 태웅이 체육복 저지를 내밀었다.

"그거 대만이가 덮고 잔다고 했는데."

"내 꺼 줄게. 가져가."

그러고는 대만에게 다시 체육복 저지가 얹혔다. 아까와는 다른 냄새였다. 아마 태웅의 것이겠거니 대만은 생각했다. 설핏 잠이 깨서인지 다시 눈이 스르르 감겨왔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

"너 왜 내 체육복 안 빌려?"

"그게 뭔 소리냐?"

"내 체육복. 전에 빌려갔었잖아."

잠에서 깨고 보니 어김없이 수업이 끝나있었다. 멍한 머리로 눈만 간신히 뜬 대만에게 태웅이 허리를 쐑 틀어 질문했다. 뚱딴지같은 소리에 대만이 얼타는 사이 태웅은 가방을 챙겨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같이 가자는 얘기가 오늘따라 없는 것이 이상했다. 내가 체육복 맡겨놓은 것도 아닌데, 별 소리를 다 한다고 생각하면서 대만이 기지개를 켰다.

그 순간, 책상 밑에 뭔가 버스럭 하고 떨어졌다. 포장지에 담긴 초콜릿과 쪽지였다. 벌써 마니또가 다녀갔나보다. 대만은 접혀있는 쪽지를 폈다. 쪽지에는 한 줄이 달랑 적혀있었다. 흐늘하고 살짝 비스듬한 손글씨였다.

        너 잘 때 잠꼬대하더라. 귀엽다.

대만은 누가 볼까 조심스레 쪽지를 다시 접고 체육관으로 부리나케 걸음을 재촉했다. 태웅이 먼저 가버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의 원온원은 대만의 실수가 많았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로 마음이 떠서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다리를 자꾸 헛짚었다. 한 번은 그러다가 태웅의 다리와 꼬여 크게 넘어질 뻔 했다. 다행히 직전에 태웅이 잡아주어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대만에게 말려 태웅이도 넘어지는 바람에 주위의 걱정을 샀다. 대만이 먼저 넘어지고 태웅이 그 위에 넘어지면서 턱과 턱이 닿았다. 다행히 각도가 틀어져 입술은 닿지 않았다. 정신이 들어 심기일전하고 제대로 해보려고 하니 태웅도 마음이 영 딴 세계에 가있는 것 같았다. 상태가 별로인 두 얼간이들의 원온원은 오늘 무승부였다.


199x년 4월 xx일. 금요일.

어제 대만이 받은 쪽지는 같이 노는 친구들에 의해 반에서 소소하게 유명세를 탔다. 안그래도 놀리기 쉬운 인상의 대만은 친구들의 총공격을 받았다.

"올~ 우리 대만이 입학한지 한 달도 안됐는데 연애 시작하는거야?"

"야, 니네가 붙어있어봐서 알잖아, 나 털어서 나올 거 없는 남자야."

"아니면 대만이를 몰래 흠모하던.... 작고 수줍은 여학생?"

"오바하고있지, 또!"

짖궂게 놀리고는 있지만 나쁜 뜻이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대만도 쾌활하게 되받아쳤다. 이 정대만이 중학교 때도 인기가 좀 많았단다. 친구해주는 걸 감사히 여겨! 주변이 우하하 뒤집어지고 대만도 따라 웃던 참이였다. 뭔가가 등에 꿍 하고 박혔다. 꿍?

뒤돌아보니 멀대만한 키에 문짝만한 덩치를 가진 남학생이었다. 다시말해 서태웅이었다. 서태웅의 숱많은 까만 머리가 대만의 등에 꿍 박혀있었다. 얇은 머리카락이 등에 닿는 것이 간지러워서 대만은 태웅의 머리를 북북 헤집었다. 이전의 복수다.

주변을 둘러보니 서태웅이 웬일이래, 하는 의아한 시선들이 꽂혔다. 응, 우리 친해졌어. 대만은 친구들에게 서태웅을 소개했다. 이번 주 주번 같이 했잖아. 생각보다 좋은 놈이야. 태웅은 자신이 하는 소개를 들은듯 만듯 대만의 친구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냥 대만의 정수리에 턱을 얹고 가만히 친구들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이윽고 대화 주제가 변하고 대만이 자기 자리에 앉아 친구들과 시답잖은 수다를 떨 때에도 태웅은 그저 대만의 뒤에 서서 상반신을 굽혀 대만의 어깨를 짓누르며 자리를 지켰다. 친구들은 상황에 위화감을 느꼈지만 대만이 아무렇지않아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오늘은 시험 날이라 이전 교시도 시험, 다음 교시도 시험이었다. 시험이 어려웠니 쉬웠니 다음 시험은 이게 나오니 안 나오니 옥신각신하고있으니 종이 금방 울렸다.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저마다 시험 잘 봐라, 넌 시험 못봐라, 하고 인사했다. 대만도 어깨에서 떨어져 앞 자리로 가는 태웅에게 인사를 건넸다.

"시험 잘 봐라."

"너도."

시험은 어려웠고 대만은 골머리를 앓았다. 비록 공부에 깊은 조예는 없지만 그래도 낙제로 대회에 나가는 것이 불투명해지는 경험은 싫었다. 그러건 말건 태웅은 일찌감치 답안지 작성을 끝내는 것 같았다.

"맨 뒷 사람이 답안지 걷어와라."

키가 큰 아이들은 뒤에 섞어 앉히는 편이었다. 맨 뒷 자리에 앉은 대만이 자기 답안지를 가지고 벌떡 일어났다. 태웅은 이미 답지를 책상 한 구석에 밀어놓고 숙면 중이었다. 태웅을 깨우지 않고 답안지를 슬쩍 가져와 자기 답안지 위로 쌓던 대만은 무심코 손에 든 답안지 윗 귀퉁이 필적확인란과 눈이 마주쳤다. 

       햇빛이 선명하게 나뭇잎을......

흐늘흐늘 구부러지는 글자가 익숙했다. 뜨끈한 봄 더위 때문일까, 손끝이 데인 듯 열이 확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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