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결국 우리는 산왕이기에

2023.03.30


농구 명문의 훈련은 혹독하다. 입학 후 은근히 텃세와 괴롭힘을 걱정하던 신입부원들은 곧 알게 된다, 누굴 괴롭히려면 일단 기력이 남아돌아야 한다는 사실을. 학년을 가리지 않고 독한 훈련에 나가떨어지는 사람들이 종종 나오곤 한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한두 번 정도는 다들 탈주 계획을 꾸미곤 한다. 그러나 세상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어느 루트 어느 방법을 고심하든 다 앞선 자들이 해보고 이미 걸린 길이다. 그럼에도 매년 다들 한두 번은 도망쳐봤다는 것은, 적당한 선까지는 감독님도 눈을 감아준다는 뜻이다. 숨구멍도 없이 틀어막았다가 터져버리느니 한두 시간 기분전환 좀 하고 돌아와서 다시 힘내는 게 나으니까. 그런 이유로 체육관 뒤쪽의 담 앞에는 딱히 이유도 없이 모래 포대가 몇 개 놓여 있고 담 바깥쪽에도 다른 데와 달리 사시사철 푸른 잔디가 깔려 있다. 열정 넘치는 신입부원들이 보통 처음으로 흔들리곤 하는 5월쯤 이 정보를 슬쩍 흘려주는 게 주장과 부주장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무슨 소리냐면, 2학년 정성구와 최동오는 오늘 학교 담을 넘었다는 얘기다.

이명헌은 같이 튀자고 꼬시기에는 이미 세 번째 탈주에서 잇따른 주민 신고를 받고 네 시간 반 만에 복귀한 지 3주도 안 됐다. 아무리 그래도 1학년부터 주전이었던 놈이 매 학기 탈주 행사를 벌이는 건 감독님도 골이 아팠는지 결국 한소리 들었다는 모양이다. 심지어 튀자고 꼬시면 이번에야말로 아침까지 넘겨보겠다고 본격적으로 계획을 짤 녀석이라 더더욱 그렇다.

신현철은 지금은 꼬시면 안 된다. 이건 친구로서의 의리고 우정이다.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동오의 말에 성구가 팔을 휘휘 저었다. 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현철이가 만에 하나 잘못될지도 모를 일은 절대 못 하겠다. 동오가 이해했다는 듯 끄덕거렸다.

김낙수는... 걘 어떻게 한 번을 안 따라오냐. 이번에는 담의 ㄷ도 못 꺼내고 아예 문전박대.

이 밤에 담을 넘었다고 해서 뭐 대단한 할 일이 있는 건 아니다. 여기는 농구부 훈련이 끝나기 전에 버스가 먼저 끊기는 시골이다. 언덕 위 학교에서 도망쳐봤자 뒤로는 높은 산이고 옆으로는 애매한 공터와 늘어선 민가가 전부다. 도보 20분 거리에 있는 시내쯤 나가야 뭐라도 놀 게 있고, 머리를 빡빡 민 산왕 농구부원들은 시내에 나타나기만 해도 시선 집중이다. 그게 아니라도 미성년자가 이 늦은 시간에 시내를 돌아다니면 어련히 알아서 학교로 신고가 들어간다. 어르신들 눈총을 좀 받다 적당히 돌아가야 서로서로 안심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일단 불 켜진 포장마차로 들어가 어묵을 물었다.

놀랍게도 오늘 탈주를 먼저 계획한 사람은 2학년 주전 앤드 유력한 예비주전 모임이라 불리곤 하는 다섯 명 중에서도 제일 성실하고 착실한 최동오였다. 놀랍게도, 라고 하긴 했지만 성구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동오는 자기를 위해서는 결코 도망치지 않아도 친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담을 넘을 녀석이다. 그러니까 오늘 이 탈주는 말은 안 했지만 정성구를 신경 쓴 최동오 나름의 위로라는 소리다.

얼마 전 트라이아웃 이후 성구와 동오는 곧 다가올 인터하이에서 벤치 멤버에 이름을 올렸다. 벤치라고는 해도 다름 아닌 산왕인지라, 2학년은 여기에 김낙수까지 세 명이 전부고 나머지는 다 3학년이다. 1학년부터 주전이었던 이명헌은 당연히 올해도 주전이었고, 정우성이 포워드 한 자리를 꿰찼다. 성구의 포지션인 센터에 주전으로 뽑힌 사람은, 신현철이었다. 

분한가? 모르겠다. 질투가 나나? 그것도 모르겠다. 현철의 이름이 발표되자마자 양 팔을 치켜들고 환호하며 소리 질렀던 건 분명 진심이었다. 씰룩거리는 현철의 눈썹에서 희열과 죄책감을 함께 발견했을 때 제일 먼저 느낀 것도 의아함이었다, 네가 잘해서 뽑힌 건데 왜 나한테 미안해하냐. 오히려 이 산왕공고 안에서 전국대회 스타팅 멤버에 3학년이 아니라 동기가 둘이나 들어갔다는 기쁨이 더 컸다. 우리 2학년 최고다!!

그럼에도 훈련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오는 길, 정성구의 가슴속 어딘가에 명확한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희미한 무언가가 없지는 않았나 보다. 그 무언가가 이렇게 담을 넘게 했고. 

성구는 어묵을 우물거리며 동오를 돌아보았다. 제 기분을 달래주겠다고 성정에도 안 맞는 담 넘기를 한 이 성실한 친우에게도 고민이 없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청소년 대상 농구 잡지에서 산왕 농구부는 늘 뜨거운 소재다. 그렇기에 산왕에서 어느 정도 두각을 보인다 싶은 선수들은 어디서든 자기에 대한 평가 정도는 듣는다. 윈터컵 즈음에는 기사마다 보통 그해 산왕의 마지막 주전 라인업과 함께 내년 주전과 벤치 라인업으로 기대되는 후보 선수들의 목록도 나온다. 작년 말 최동오는 거기 이름을 올렸다. 올해 1학년 중에서도 눈에 띄는 올라운더, 뛰어난 스코어러라고 했던가. 조금만 잘 다듬어지면 이듬해 인터하이부터도 주전으로 뛸 수 있을 것 같다고까지 적혀 있었다. 기사들의 방향이 변한 건 올해 1월부터였다. 그러니까, 정우성의 산왕 입학이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확인된 이후.

올해 1학년 입부식과 몇 번 이어진 연습경기 이후, 모두가 생각했다. 쟤가 에이스네. 그리고 이변 없이, 작년의 이명헌에 이어 정우성은 1학년 스타팅 멤버로 이름을 올렸다.

야, 동오야. 너 혹시 막 서운하고 그러냐?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 사이는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없다는 게 편하다. 동오가 눈을 한번 빙 굴렸다. 생각보다 대답은 빨리 나왔다.

아니라고 하자니 거짓말이고, 맞다고 하자니 그렇게까지 뭐가 맺혀 있진 않네.

그거 뭔지 알지, 성구가 끄덕였다. 하여간 최동오, 머리 좋아. 지금 내 기분을 어떻게 그렇게 딱 맞게 설명하냐? 동오가 두 개째 어묵을 꿀꺽 삼킨 걸 보고 성구가 무를 가리켰다. 동오는 고개를 젓고는 어묵 쪽으로 손짓 했고, 성구는 세 번째 어묵을 동오에게 건넨 후 본인은 소 힘줄을 집었다. 

애초에 농구를 하는 사람이 정우성이라는 선수를 보고 반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돼? 그 약간, 불가항력적인 진실 같은 거잖아. 어묵을 문 탓에 중간쯤부터는 소리가 뭉개졌다. 물론 입을 열면 좀 깨긴 하는데. 여기서는 둘 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겠어, 우성이는 정말 잘하잖아. 동오가 어묵을 한입 삼키고 말했다. 그 표정은 묘하게도 후련해 보였는데, 성구는 그게 어떤 기분인지 문득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아마 현철에게 처음으로 리바운드에서 밀린 날 밤, 욕실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 같은 것.

그러니까. 진짜 잘하는데 어쩌겠어.

성구도 힘줄 조각을 한입에 집어넣고는 다시 눈알을 굴려보았다. 나도 어묵 하나 더 먹을까.

산왕의 모든 선수는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연유로 연습 후 피드백 시간에는 참가한 선수가 다 함께 남는다. 그 말인즉슨 모든 부원 앞에서 탈탈 털린다는 뜻이다. 키와 체격에서 밀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 자기의 최대 무기이자 최대 약점이라는 것을 성구는 알고 있었다. 손을 쭉 뻗기만 해도 네트 끝이 닿을 정도의 키는 타고난 재능이다. 그러다 보니 정성구의 농구는 골 밑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다만 체격이 크다는 건 그만큼 움직일 때 필요한 힘이 많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구 자신의 약점은 스피드였다. 프론트코트가 아니면 공을 따라잡기 어렵다. 본디 작은 키와 스피드로 백코트를 누비던 현철이 프론트코트로 들어왔을 때 현철의 재빠른 움직임에 성구는 턱이 빠질 정도로 놀랐다. 

신현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농구부원 중에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같은 학년인 자신들은 더더욱 그렇다. 슬슬 꽃이 필 즈음부터 현철은 신음을 달고 살았다. 느릿느릿 자라느라 무릎 한번 안 아팠다던 현철의 몸은 1학년 내내 거의 박살이 났다. 관절 뒤쪽마다 살이 텄고, 조금만 격하게 움직여도 근육에 쥐가 났다. 콩나물처럼 자라기 시작하면서 살도 쭉쭉 내렸다. 정성구는 신현철의 몸이 지금처럼 거대해지는 과정을 내내 지켜본 사람 중 하나다. 현철이 갑작스레 크기가 달라진 덩치를 간수하기 힘겨워 고민하다 찾아왔을 때는 성구 본인까지도 속이 쓰렸다. 엄마, 나 어릴 때 키가 확 크면서 여기저기 다 아팠다 그랬잖아, 그때 어떻게 하면 좀 덜 아파? 아니, 나는 아니고 친구가 좀 늦게 크고 있어서. 어, 어... 찜질? 약 같은 건 없고? 마사지도... 응. 아, 반신욕? 잠깐만, 좀 받아적게. 

현철은 작년 초가을까지는 개인 점수가 밑바닥을 깔았다. 던지는 공은 도통 네트를 가르지 못했고 눈높이가 달라진 탓에 파울이 늘어 툭하면 퇴장당했으며 자주 넘어지거나 비틀거리곤 했다. 그냥 그게 다일 수도 있었는데, 현철은 그 몸을 끌고도 훈련이 끝나면 혼자 체력단련장으로 갔다. 식당에서는 추가로 받은 닭가슴살을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넣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고 씩씩거리면서도 쉬는 시간마다 공을 튀기고 운동장을 달리고 프레스 위로 올라갔다. 그래서일까. 처음으로 현철에게 리바운드에서 밀린 그날, 여기저기서 터지던 작은 한숨과는 달리 성구는 오히려 상쾌했다. 신현철 진짜 굉장한데? 이 자식 너무 멋지잖아. 그야말로 노력으로 기적을 만들어낸 친구를 두고, 대체 뭘 어떻게 원망하거나 질투한단 말인가. 

동오도 꼭 같은 마음일 것이다. 자신의 블로킹이 아무리 높아도 타이밍 맞춰 더블 클러치로 넣어버리면 성구 혼자서는 막을 수가 없다. 최동오는 그게 가능한 선수다. 필요할 때면 언제든 이명헌을 도와 볼을 능숙하게 운반하고, 외곽에서 슛도 문제 없이 던지고, 스크린을 걸고 골 밑에서 몸싸움에도 참여한다. 어디다 둬도 자기 몫을 다 해내는 선수다. 그런 동오도 한번 불이 붙었다 하면 수비수 서넛을 혼자서도 제치고 순식간에 점수를 쌓아대는 정우성의 실력 앞에서는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우성이가 날뛰기 시작하면 동오는 늘 주먹을 쥐고 힘차게 응원한다. 가자가자 정우성, 가자가자 정우성!! 

농구를 손에 잡은 학생이라면 산왕에 들어오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다. 누구나 내가 산왕의 자부심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입학한다. 성구도, 동오도 산왕에 들어오기 전부터 산왕을 동경했다. 산왕의 이름 아래 코트에 설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산왕에서 학생들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알게 된다. 우리 모두가 농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여기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다해 싸우기 때문에 이기게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명제는 다시 산왕이라는 이름의 자부심이 된다. 

이명헌도, 정우성도, 신현철도.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성구도 동오도 알고 있었다, 사실은 그 이전의 문제다. 그 녀석들은 정말로 아름답다. 입부 후 선배들과 붙은 첫 연습경기에서 이명헌은 40분 내내 말도 안 되는 패스와 득점 실력을 자랑하며 동기들을 제 수족처럼 부려서 점수 차를 한 자리 대로 지켰다. 정우성은 학년 대항 연습경기마다 1학년 팀 득점의 7할 이상을 혼자 해낸다. 달려오는 걸 눈앞에 빤히 보고도 막을 수 없다는 무력감이 뭔지, 정우성하고 붙으면 뼈저리게 알게 된다. 전 포지션을 다 겪어본 데다 체격까지 좋아서 3번부터 5번까지 어디에 갖다놔도 남들을 압도할 수 있는 선수라니 무슨 유니콘인가 싶은데, 신현철은 온전히 제 노력만으로 그걸 해냈다.

절대적인 것들을 눈앞에 마주해버리면 새삼 깨닫기 마련이다. 저들을 동경하는 마음은 결국 농구를 향한 깊은 사랑과도 이어져 있다고. 이명헌만큼 패싱 레인을 완벽하게 읽고 매치업 상대의 멘탈을 잘 털어버리는 놈은 찾기 어렵다. 1학년 때의 신현철을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현철이 센터에 발탁됐다는 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 모를 수가 없다. 정우성은 그냥 논외, 사기, 치트키. 이쯤 되면 질투니 뭐니 얘기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질투 같은 걸 할 시간이 있으면 저 괴물 같은 녀석들의 움직임을 눈에 더 새기고 싶다. 

너희라면 산왕이 절대적인 패자의 자리에 서게 만들 수 있겠구나, 우리가 영원히 산왕의 이름에 자부심을 느끼게끔 해줄 수 있겠다. 그것이야말로 성구와 동오가 선명히 공유하는 감정이었다.

저들이야말로 우리의 산왕이다.

그래서 그 어떤 감정보다도 우선하는, 가슴에 타오르는 열망은 분명했다.

언젠가는 저 녀석들과 최강 산왕의 이름으로 함께 뛰고 싶다. 저들과 함께.

어묵 네 개씩, 그리고 무랑 소 힘줄 각각 두 개에다 서비스로 계란까지 하나씩 얻어먹고 나서 성구와 동오는 학교로 발길을 돌렸다. 담을 넘은 지 한 시간 조금 지났으니 약간 더 놀다 가도 감독님에게 불려가지는 않겠지만, 애초에 오늘은 힘들어서 도망친 게 아니다. 성구에게는 그냥 자신을 한번 돌아볼 여유가 필요했고, 그 사실을 동오가 먼저 눈치채줬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는 같이 돌아가면 된다.

몇 분만 더 걸으면 체육관 뒷담이 나올 즈음, 

둘 다 용감하다베시.

으아아악! 기척도 없이 등 뒤에서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성구와 동오는 그야말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정확히 1초 후에는 둘 다 이를 악물고 정강이를 움켜잡았다.

둘이 튀었다고 아주 동네 전체에 방송을 해라베시. 그러게, 메아리가 끝내주네... 그렇다고 발로 깔 건 없잖냐. 날 두고 너희끼리만 튄 벌이다베시. 너는 오늘도 나왔다가 감독님한테 걸리면 진짜 죽어, 인마. 그래, 명헌아. 일부러 따돌리고 나간 건 아니야. 근데 이명헌 넌 왜 여기 있냐? 얘 오늘 이것도 탈주로 치냐? 아직 안 걸렸으니 무효다베시. 성구야, 명헌이 걸리기 전에 우리도 빨리 들어가는 게 낫겠다. 그러게, 빨리 들어가자. 뭐 먹고 왔냐베시. 어... 어묵? 기껏 나가서 먹은 게 어묵이냐베시? 무랑 계란도 먹었어. 아! 라멘도 먹고 올걸. 지금 얼른 갈래베시? 야, 정신 차려라, 이명헌.

더운 여름의 밤하늘은 높고 다정하고 상쾌했다. 낄낄거리며 소년들은 담을 넘어 학교로 돌아갔다.

그 어떤 고민이나 걱정이 있다 하더라도, 이 학교는 언제나 그들이 결국 돌아올 곳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들은 모두 산왕의 사람이기에.

+

그해 윈터컵 직전, 주전 포워드 중 3학년이 부상을 당했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윈터컵 출전은 어려워졌고, 조금 빠른 은퇴와 함께 신현철이 포워드를 맡으면서 정성구가 센터에 올라갔다. 발표날 밤 동오는 방으로 찾아와서 눈물까지 글썽이며 축하를 건넸다. 그 눈물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질투나 억울함 같은 감정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새삼 성구는 감탄했다.

이틀 뒤 감독과 이명헌까지 모인 삼자대면에서 도 감독은 성구에게 부주장 이야기를 꺼냈다. 입을 떡 벌리고 뭔가 말하려는 성구를 막은 건 이명헌이었다. 우리 다 만장일치로 널 추천했다고. 동오도, 낙수도, 그리고 현철이도.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없다뿅. 그러고 보니 이명헌, 얼마 전부터 어미 바꿨지. 뭐 심경의 변화 같은 게 있었나, 혹시 뭐 힘든 일이 있나 다음에 물어봐야겠다. 걱정되는 마음에 잠깐 튄 생각이 감독님의 손길에 돌아온다. 내년에는 5번이다. 잘해보자, 성구야. 도 감독의 도닥임에 성구는 입학 후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드물게도 최고 학년이 아닌 후배 선수 중심으로 짜였음에도 산왕은 당연하다는 듯 윈터컵 우승을 차지했고, 3학년 은퇴와 함께 최동오는 주전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다음 달 잡지 기사에는 최동오는 정우성이 없었다면 에이스였을 선수라고 적혀 있었고, 동오는 그 부분을 가리키며 우성이 네가 계속 집중 못하면 그 에이스 자리는 내가 받아가야겠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이듬해, 주장 이명헌을 필두로 산왕은 인터하이 지역 예선을 비롯해 모든 경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3년째 이어지는 무패 신화, 역대 산왕 중에서도 최강의 팀. 

그야말로 그들의 산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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