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우성명헌] 물든 후에야 깨닫는 것

2023.03.27

그때는 눈은 늘 공을 좇았다. 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달려가 있으면 공은 그래야 마땅하다는 듯 손에 들어왔다. 보통은 드리블 후 슛, 때로는 받아들고 돌진, 가끔은 다시 손에 들어오기 전 잠깐 들러야 할 다른 손으로 패스. 코트는 늘 나와 공과 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세계가 더 넓어졌을 때 받은 질문에 답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나를 새로이 만들 것. 

- 미국에 와서 달라진 게 있나요? 

- 여기서는 키가 작은 편이라 포인트가드도 하는데, 자꾸 예전 버릇이 나와요. 

공은 평소에는 그저 어떤 물성에 지나지 않는다. 공이 득점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들어갈 림과 네트가 필요하고, 골대가 놓일 코트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그 공을 던질 손과 그 손으로 공을 던져줄 또다른 손이 필요하다. 

공은 사람이 존재해야 득점으로 이어진다. 공을 던지기 위해서는 공을 받을 사람이 있어야 한다, 공을 받으려면 누군가 공을 던져줘야 한다. 날아오는 공을 받던 입장에서 공을 던져줘야 하는 입장이 된 다음에야 깨달은 건, 거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짠, 놀라워라. 농구가 다섯 명이 뛰는 경기란 걸 몰랐느냐고? 그 얘기가 아니라, 늘 매번 최고의 공이 달라붙듯 손에 들어왔기에 그게 어떻게 만들어지는 건지 신경써보지 않았다고 해야 맞겠다. 

K는 원바운드 패스를 더 편하게 받는다, R은 본인이 움직이게 하기보다 C를 통해 공을 전달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다. S는 사인을 빠르게 읽지만 스피드가 부족하다. 공을 제대로 던지려면 사람을 먼저 살펴야 한다. 새로운 코트에 서면서 나는 공보다 사람에 관심을 갖는 법부터 익혀야 했다.

농구는 사람과 사람이 함께 하는 운동이라는 것을 나는 당신에게 배웠다. 다섯이 한 마음으로 뛰어야 하는 스포츠라는 것을. 1:1로는 날 못 이겨. 정말이지, 그런 말을 하고 있으면 좀 말렸어야죠. 물론 투덜대봤자 당신은 덤덤하게 답해주었겠지만. 그건 사실인데뿅. 제 잘난 맛에 코트를 누비던 애송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쳐준 사람도 당신이었다. 

내게 오던 공은 늘 당신에게서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공들은 한 번도 허투루 던져진 적이 없었다. 아, 공뿐 아니라 곁에 선 사람까지 들여다봐야 하는 자리에 선 후에야 나는 깨닫는다. 당신이 늘 나를 지켜보았음을, 내 모든 것을 꿰뚫어보았음을. 그것은 그저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음을.  

형.

항상 나를 봤어요? 그렇게 계속 나를 지켜봤어요?

 

그때는 모든 것이 공기처럼 당연했다. 당신의 수신호가 늘 나를 향해 있다는 것이 기쁜 만큼 너무나 당연해서. 에이스였으니까, 나보다 골을 더 잘 넣는 사람은 없으니까. 코트에는 너 혼자 있는 게 아니다베시, 덤덤하고 단호하게 지적하면서도 당신은 내게 공을 던져줬다. 당신의 패스로 이어지는 공의 끝에는 늘 내가 있었다, 본디 공이란 늘 내게로 오는 것이라 믿었다.

그 모든 것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왜 그렇게 늦게 깨달았을까. 그렇잖아, 우리는 1년 반을 함께 보냈고, 그 시간이 당연하지 않았다는 걸 그때 알았다면 나는 마침내 전해야 하는 이 말을 당신의 얼굴을 보고서 할 수 있었을 텐데. 거대한 태평양과 14시간의 간격을 사이에 두고 한 주에 한 번이나 두 번 겨우 연결되는 흐릿하니 감이 먼 전화선 너머로가 아니라, 당신의 눈을 마주보고 당신의 손을 잡은 채로. 그러나 그 시간은 지나간 지 오래다. 당신과 함께 뛸 수 있던 시절의 나는 왜 그렇게 어렸을까, 늘 당연하다는 양 받기만 하던 내가 당신에게는 어떻게 비쳤을까. 

명헌이 형.

그거 알아요? 이스트미들턴의 포인트가드 정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이명헌에게서 나왔다는 거. 나는 매일같이 형을 봐요. 내 안에 형이 이렇게 많이 담겨 있는 줄 몰랐어요. 우성아, 공 봐뿅. 그때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항상 형 말을 잘 들었잖아요. 그러느라 몰랐던 거예요. 그 말 뒤에는 목소리를 내면서 내게 공을 던져주던 형이 있다는 그 당연하고도 절대적인 진실을. 

당연하다는 듯이 내게 패스하던 형의 손 끝, 내가 있는 곳으로 던지기 좋게 몸을 돌리기 위해 움직이는 발, 내가 여기 있을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기에 이쪽을 향하지 않는 눈, 그리고 아마도 공을 받아들고 달려가는 내 뒤를 좇았을 시선. 내 안에 알알이 박혀 있던 그것들을 지금에야 하나하나 되짚어가요. 그리고 전부 되살려서 씹어삼켜요. 혀 끝에 형의 시선이 닿고 목으로 형의 호흡이 넘어가면 내 숨은 마침내 형의 형태로 바뀌어요. 산왕의 에이스가 아닌 지금에 와서야, 내 움직임 하나하나가 형으로 만들어지고 있어요. 공을 던져서 경기를 이끄는 법도, 그 공을 받을 사람들을 살피는 법도, 마땅하지 않은 흐름을 끊어 되돌리는 법까지. 나는 내 안에 선명히 살아 있는,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포인트가드에게서 받아와요. 

- 너는 맘껏 던져서 골을 넣으면 된다베시.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겠다베시. 

-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뿅. 네가 에이스다뿅.

- 너는 잘해낼 거야, 우성아. 

아, 내 안에는 어쩜 이렇게 많은 당신의 목소리가 남아 있는지. 

당신이 내게 던져준 공들의 궤적은 어쩜 저렇게 하나같이 선명한 언어를 그리고 있었는지.

당신은, 어쩜 그리도 깊이 나를 사랑했는지. 

기억 속에서 당신과의 순간을 끄집어내면서 깨달았다. 당신의 모든 모습을 더듬어갈 수 있을 만큼 왜 내 눈이 당신을 기억하고 있는지를. 한 걸음 늦었다는 사실조차 너무나 늦게 깨달았고. 너무하잖아요, 그 모든 게 특별한 순간이었다고 왜 그때는 알려주지 않았어요? 팀원들과 함께 뛰는 법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도 코트 바깥의 시간을 즐기는 법도 다 알려줬으면서, 어떻게 형이 내게 그런 공들을 던져줄 수 있었는지는 왜 알려주지 않은 거예요? 

원망해봤자 소용 없다. 원망할 대상이 틀렸으니까. 게다가 그때의 꼬맹이가 말해준다고 알기나 했을까. 1년 넘게 훤히 눈으로 봐놓고도 몰랐는데. 결국에는 머리를 쥐어뜯을 뿐이다. 물론 물리적으로 쥐어뜯을 머리는 없지만. 

교내 연습 경기에서 당신과 같은 팀이 되는 게 싫었다. 아니, 싫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당신의 공은 언제나 완벽하게 내 손에 들어왔으니까. 하지만 당신에 맞서 싸우는 일이 정말로 즐거웠다. 그것은 아마도, 코트 위에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당신과 마주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내달리는 내 뒤에 선 당신이 아니라 건너편 코트에 당당히 선 당신을 보는 게 유달리 즐거웠던 까닭을, 그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언젠가 당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꿈에서 깨어난 날이 있었다. 나는 그날 결국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말았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뛴 경기에서, 고작 십 몇 초를 남기고 내게로 운명을 넘겨주던 그 순간의 눈동자. 아, 당신이 결국 내게 결정권을 넘겼음을 왜 그때는 알지 못했을까, 그 눈동자 안에 담긴 것이 지금 내 안에 있는 것과 그렇게나 닮아 있었음을 그때는 왜. 

그리하여 당신이 웃으며 나를 보내주고 나서도 몇 년이 지난 지금에야,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명헌이 형. 있잖아요.

이제 정우성은 아주 많은 이명헌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정우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은 이명헌의 순간들이어서, 나는 때로는 형과 함께 뛰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요. 너무 오랫동안 그게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는 걸 몰랐어요. 그 시절 이명헌이 애틋하게 아끼던 어린 정우성의 안에는 오직 정우성 본인밖에 없었더랬죠.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나 자신보다도 더 많은 이명헌으로 물들어 있어서. 나는 매일같이 내 안에 새겨진 이명헌의 움직임을 되짚어요, 이명헌의 시선을 떠올리고 이명헌의 수신호를 곱씹어요. 그러노라면 그 순간순간이 정우성을 새로이 다시 만들어요. 나의 매일은 이역만리에서 형을 그리워하며 정우성을 이명헌의 것들로 다시 빚는 시간이에요. 이 먼 곳에서 홀로 앉아 형이 새겨준 기억 하나하나로 나를 재구성하는 그 감각이 너무 슬프고 황홀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나는 기꺼이, 이 감각을 감히 사랑이라 부르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지금의 정우성이 쥐고 있는 건 거의 다 이명헌에게서 나온 거니까요. 그 명명命名마저도.

그렇기에 나는 마침내, 당신에게 말한다.

늘 그랬잖아요. 형은 한두 번 나를 코트에서 쫓아내더라도 결국 다시 불러들여서 마지막까지 공을 내 손에 쥐여줬어요. 그리고 형의 에이스는 마땅히 와야 할 곳에 도달한 공을 결코 놓치지 않고요.

그러니, 나를 다시 형의 코트로 들여보내줘요.

나는 여전히 형의 에이스예요. 

전화선 너머로 희미하게 들리는 낮은 숨소리 속에서, 이제 나는 여전히 굳건한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것은 나 역시 뒤늦게 꼭 당신처럼 울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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