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절각도

태섭대만 | 비바람이 부는 날 함께 하교를 해요

키가 또 쥐똥만큼 자랐다. 이 정도 자란다고 해서 서태웅이나 강백호에 비할 바는 못되겠지만, 인터하이 이후로 꾸준히 자라고 있었다. 아직 성장기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쥐똥쥐똥 부지런히 크다보면 어쩌면 졸업할 무렵에 준호선배 정도는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몇 센치가 더 자라야하려나, 농구를 계속 할거니까 위로도 옆으로도 좀 더 거침없이 자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태섭이 보스턴백에서 프로틴 가루가 든 봉지를 꺼냈다.  우유가 든 플라스틱 물병 속으로 가루를 단번에 털고 병뚜껑을 닫은 뒤 세게 쥐어 흔들었더니 금방 걸쭉하게 거품이 꼈다.

"또 그거 먹냐?"

추가 개인연습을 끝내고 수건을 대충 머리에 얹은 대만이 터벅터벅 다가왔다. 곧이어 태섭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태섭은 굳이 대꾸하지 않으려고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톡 한 마디 던졌다.

"선배도 단백질이랑 우유 잘 챙겨드세요. 지금 미리 안 먹어두면 나중에 뼈 삭는다니까."

"임마, 나는 잘 챙겨먹고 있다고. "

사실 말하지 않아도 대만은 몸 관리에 철저한 편이었다. 과거의 아픈 경험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아니면 어려서부터 각잡고 운동선수로 뛰어온 이력 때문인지 매 경기마다 이제 더 이상 아프지도 않다는 왼쪽 무릎에 아대를 착용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경기 전 식사부터 준비운동까지 꼼꼼이 신경쓰는 사람인 것도 모자라 최근에는 관절에 좋다며 웬 영양제 알약을 꼬박꼬박 챙겨먹는 것 같았다. 아마 헤실헤실 즉흥적으로 풀어지는 표정과 대조적으로 머릿속에서는 신경쓰는 게 많은 모양이라고 태섭은 생각했다. 지금도 대만은 실없는 소리를 하는 와중에 자기 앞무릎의 오목하게 패인 관절 접합부에 손가락을 가져가 구석구석 매만지고 있었다.

"무릎 이제 안 아픈 거 아니었어요?"

"어, 어? 안 아파."

자기가 무의식적으로 만지고 있는 것조차 몰랐다는 듯, 얼뜨는 멍청한 목소리로 대만이 대답했다. 그는 뒤이어 안 아픈데 그냥 느낌이 이상한거 같기도 하고. 하면서 궁시렁댔다.

"느낌이 이상해요?"

"아니 가끔 비 오는 날마다 이러더라고. 치료는 완벽하다는데 아주 쪼끔 시린다. 밖에 비 많이 오냐? 나 우산 안 가져왔어."

나도요, 대답하고 태섭은 괜히 바깥을 흘깃 보았다.

잘 안보이는데, 비가 오나?

우리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었던 어떤 날도 이렇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날 마치 어깨 위로 물먹은 솜이 쏟아지는 것 같던 감각은 꼭 비 오는 날씨 때문만이 아니었다고 태섭은 생각했다.  기적처럼 올라온 전국대회에서 산처럼 버티고 선 선수들을 뚫고 돌파하던 기억, 잘 올라가지 않는다던 너덜한 팔을 들어 깨끗하게 3점짜리를 넣는 그 날의 기억은 태섭에게 있어, 그리고 대만에게 있어 큰 자부심이었다.

그럼 그 날에도 대만은 이상한 느낌이 나는 무릎으로 그렇게 꼿꼿한 슛을 올렸던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은 마음과 최상의 컨디션인 채로?

"아으, 씨... 어떡하냐. 점점 많이 내리는 것 같다. 바람도 세고."

"이 정도는 뭐... 그냥 쫄딱 맞고 집 가서 뜨끈하게 샤워나 해요."

"윈터컵이 코앞인데 가을비 맞고 감기라도 걸리면 곤욕이잖냐."

그러시겠죠, 도련님. 태섭은 조금 시니컬해질 뻔했지만 이번에야말로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비는 원래 내리면 맞는 것이었다. 대만은 어떨지 몰라도, 태섭은 비 오는 날 누군가 우산을 들고 데리러오지 않은지도 좀 오래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 둘만 남았는데 그럼 수고하십쇼, 하고 총총이 빗속으로 사라져버리기엔 좀 뭐해서, 태섭은 청순가련은 모르겠고 청승가련을 자처하는 선배와 함께 쓸 버려진 우산이 있을까 락커룸을 뒤져보았다. 나오라는 버려진 우산은 없고 웬 반짝반짝 은박 씌워진 야유회 돗자리 같은 건 하나 있었는데 둘이서 이거라도 쓰고 가면 되나 싶었다. 우산 대신 이거라도 써야 할 판인데요, 물어보았더니 대만은 그럼 이거 쓰고 보폭 잘 맞춰 걷자며 킬킬 눈을 빛냈다. 하여튼 어처구니 없는 사람. 이게 무슨 2인 3각 경기도 아니고.

* * *

그러나 대만과 태섭이 벌인 이 웃기지도 않은 빗속의 2인 3각은 시작부터 뜻밖의 복병을 만나 좌초하는 듯 했다. 우선 돗자리를 머리에 쓰고 나란히 달리기에 둘의 신장차가 조금 있었다. 그리고 바람이 생각보다 너무 거셌다. 표면적이 넓은 돗자리는 펄럭이고 휘청이면서 걷는 동안 시야를 격렬하게 방해했다. 가뜩이나 바닷가를 옆에 끼고 찻길 가장자리에 난 좁은 인도를 두 운동부 남자 고등학생들이 걷는데, 바다는 바다인지 교문 앞보다 바람이 곱절은 세고 차가웠다. 미끄러지듯 지나쳐가는 차량들의 쌩쌩거리는 매정한 소음, 그리고 바퀴가 물웅덩이를 빠르게 밟으며 튀기는 물세례에 대만과 태섭은 두 번 정도 바짓단을 희생하고 요량껏 피해서 걸었다. 이 또한 태섭에겐 사실 어쨌든 상관없었지만, 대만은 그게 아무래도 찝찝했는지 살짝 걸음을 재촉하길래 태섭은 은근슬쩍 자리를 바꿔 차도 방향에 섰다.

"우리... 꼴이 좀 웃기네. 벌써 많이 젖었다."

"그러게 그냥 뛰어가자니까요.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진짜."

역시 이런 바보같은 짓은 그만두고, 집까지 빡세게 뛰자고 말해야겠다. 태섭은 쓰고있던 돗자리를 접으려고 자기 쪽으로 힘을 주어서 확 잡아챘다.

하지만 그 순간, 빠앙 하고 큰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태섭은 잠시 몸을 굳힐 수 밖에 없었다. 그 사이 경적을 울린 차는 바람을 일으키며 쌩 지나가고, 태섭의 불퉁한 평소 표정이 조금 얼떨떨하게 풀린 사이 대만의 팔이 태섭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대만은 태섭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가, 다른 차가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팔의 힘을 탁 풀었다.

"얌마, 갑자기 차도 쪽으로 그걸 젖히면 어떡하냐. 가뜩이나 비 오고 어두워서 라이트 켜고 지나가는데 은박돗자리로 진로방해 해버리면은.."

"아니 나는 이제 그만 돗자리 접을 생각이었다고요. 어차피 너무 젖은 거 같아서."

접으면 접는다 말하고 같이 접으면 되지, 이런 때 조차 너는 말이 참 없다. 말하지 그랬어. 대만의 투덜거림이 귀를 간지럽혔지만 태섭은 무시하기로 했다. 나 이러는 거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무슨.

당겨진 옷매무새를 정돈하던 태섭의 시야에 희끄무레하게 뭔가가 툭, 잡혔다.

"어, 저거 내 모자."

가방 안에 대충 넣어둔 태섭의 하얀 모자가 좀전의 소동을 틈타 열린 지퍼 사이로 빠져나왔는지 발이 달린듯이 멀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바닷바람을 타고 바닥을 쓸며 주욱주욱 나풀나풀 밀려가는 캡모자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던 태섭이 대만과 눈을 마주쳤을 때, 대만은 자기 가방을 내려놓고 냅다 모자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비 맞기 싫다고 칭얼대던 모습은 어디갔는지, 내리는 비를 개의치않고 큰 개가 원반을 쫓아가듯이 자꾸만 멀어지는 모자를 잡겠다고 무작정 내달리는 선배를 보며 태섭은 들고있던 은박 돗자리를 꼭 쥐었다.

"굳이 안 잡아도 돼요! 못 잡아요, 그거. 괜찮으니까 빨랑 오기나 해요."

좋아하는 모자긴 하지만 누구한테 이 모자 좋다, 내가 좋아하는 모자다, 멋지지 않냐 한 번도 말해본 적 없었다. 이것 또한 일부러 말을 안한 건 아니고,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내가 모자 하나 좋아하는 게 뭐라고. 태섭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일일이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근데! 이거 너가 자주 쓰는 거잖아, 흐헉. 기다려봐."

태섭의 만류를 제대로 들은건지 어쩐건지 대만은 숨차게 모자를 따라가면서도 그렇게 경쾌했다. 그렇지만 모자는 구르고 굴러 도로 옆 폭이 좁은 해변으로 쏙 빠졌고, 모자를 따라 대만도 쏙 도로를 이탈했다. 세차게 비가 오는 가을 오후 7시, 하늘은 평소보다 더 어둡고 바람은 귀를 세게 때리는 와중에 해변도 비를 맞아 상태가 엉망진창이었다. 안그래도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는 비를 맞고 신발에 달라붙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모래밭은 도로보다 어두웠고, 그와 이어지는 바다는 그 가장자리부터 검었다. 평소에는 해안선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시간도 좀 늦고 날씨도 너무 궂어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운 배경에서 대만은 여전히 부리나케 빠르게 멀어지는 모자를 쫓고 있었다.

태섭은 그 모습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오라고요, 좀! 괜찮다니까. ... 바다까지 따라 들어갈 거냐고요!"

맑은 날 가족들과 바다에 가면 고향 바다는 그렇게 잔잔하고 평온할 수가 없었다. 밀려드는 물결도 커튼이 내려오듯이 부드럽게 모래밭을 쓸고 점잖게 빠져나가서 종아리를 담그고 있으면 간지러웠다. 송아라가 냅다 밀쳐서 엉덩이부터 물에 주저앉아도 위기감이라고는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는 변화무쌍하다는 것 또한 태섭은 이골이 나게 잘 알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 바다는 백사장을 꼭 할퀴고 말겠다고 벼르는 것처럼 우렁찬 소리를 내면서 파도를 부수었다. 가뜩이나 거리도 깊이도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물이었다. 솨아솨아 암벽에 부딪히는 흰 파랑을 내려다보면서 태섭은 물 너머에 그리고 물 밑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비 오는 날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향해 난 암벽 사이의 비밀 기지에 들어가기도 했다. 한없이 좁은 굴 속 시야로 바다를 바라보면, 굴 속은 조용하고 굴 바깥은 소란스러웠다. 그러면 세상에 나 하나 덜렁 남겨져있고, 나에게 세상이 호의적이지 않은 티를 내는 것 같아 더더욱 외로워졌었다. 지금 북산고 앞 바다에 거친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 말은 곧 오늘의 바다가 어느 날의 짠내를 몰아와 태섭의 갈비뼈 사이를 조금 시리게 만든다는 뜻이었다.

그런 태섭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만은 파도가 날름 혓바닥에 올린 태섭의 모자를 향해 여전히 씩씩하게 걷고 있었다. 파도가 밀려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것을 반복하는 동안 흰 모자는 파도 끄트머리를 따라 닿을듯 말듯 조금씩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대만은 운동화도 벗지 않고 성큼성큼 바닷물을 밟더니 무릎까지 푹 잠기고 나서야 모자를 가까스로 건질 수 있었다. 아직도 비는 촘촘하게 내리고, 차고 어둡고 거친 바다에 대만은 종아리를 먹혔다. 그런데 바로 빠져나올 생각은 하지 않고 이 사람이, 젖은 모자를 들고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태섭을 향해 히 웃는 것이었다.

그 태평한 얼굴을 보는 태섭은 본인이 이를 악문 줄도 몰랐다. 이 사람이 정말, 바다 무서운 줄을 모르네.

"선배, 거기서 당장 나와요. 위험해요."

여차하면 대만을 끌고 나올 생각으로 태섭이 모래변으로 향하던 참이었다. 이 궂은 날 바다에 담궈진 대만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수선했다. 익숙한 흉조를 막 목격한 사람처럼 긴장이 끓어올랐다. 시야가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것 같았다. 태섭은 습관처럼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어 주먹을 쥐려다가, 그 팔을 휘저어 균형을 유지하며 후다닥 뛰어내려갔다.

답지않게 허둥대며 다가오는 태섭을 보고도 대만은 바다에 잠긴 다리로 가만히 시선을 옮기더니, 몇 번 괜히 발을 굴러 허우적거렸다.

"와, 바빠서 바다 내려와본지 진짜 오래됐네. 맨날 오면서 가면서 보는데도 담그는 건 진짜 오랜만이야."

"아니 계속 그렇게 한가한 소리 할거예요? 지금 우리 둘 다 비 맞은 생쥐 꼴이에요!"

"태섭아, 그거 아냐?"

어느새 대만은 태섭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태섭은 그런 대만을 바로 끄집어내려다가, 대만과 눈이 마주친 순간 우뚝 섰다. 

저 바보같은 눈.

뭐 하나 하루에 시큰둥한 일이 없이 수 백 번 웃었다 화냈다 바쁜 눈.

"내가 무릎을 다쳤을 때 받았던 재활 치료중에서, 이렇게 물 속에서 하는 게 있었거든. 

물 속에서 걸으면 관절에 무게가 덜 실려서... 그 순간에는 가끔 내가 다리를 다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어."

대만은 어설프게 발을 구르며 그 때 했던 동작들을 재현해보려는 것 같았다.

"물 속에 잠겨서 걸으면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는데. 바다 속에 잠겨 이렇게 발을 디디니까 그 때 생각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

그리고 파도처럼 밀려와서 아무렇지 않게 부대끼며 낯간지러운 이야기를 해서 영향을 미치고, 또 파도처럼 빠져나가는 사람의 스스럼없는 얼굴. 

"그 때 수영장에 들어가면, 물 속에서는 꺾여있지 않았는데 물 밖에서는 꺾여있는 내 다리가 꼭 내 처지 같아서 병원 뒤편에서 죙일 울었던 적도 있었다니까."

"..."

태섭은 변하지 않은 얼굴에 달랑 매달린 턱 흉터를 보았다. 그 때 그렇게 힘들었냐고 물어볼까, 사실 태섭의 성격에 평소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굳이 묻지 않을 질문이었다.

"그 때 그렇게 힘들었나요? 주변에 패악질이라도 하지 않고서는 못 견딜만큼?"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진정으로 바라면 그걸로 안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 두 가지에 모두 해당하니 이대로 가면 좋은 결과 뿐이라는 확신도 있었어."

"그 때까진 살면서 마음처럼 안되는 일이 별로 없었나봐요? 참 그러기도 쉽지않네."

"그 땐 몰랐는데 아마 그랬나봐. 쫌 웃기지않냐?"

여튼 진짜 힘들었지. 대만은 습관처럼 미소지으며 머쓱하게 얼버무렸다. 그 얼굴에 차가운 빗물이 눈물처럼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지만 그는 울고있지 않았다. 말간 얼굴이 웃고 있었다. 태섭은 평소 대만에게 '의젓하다'는 수식어보다는 '순수하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해왔음에도, 이 순간 어쩌면 그 웃음은 의젓하기 때문에 순수한 웃음일지도 모른다고 무심코 생각했다. 나이를 헛으로 먹은 것은 아닌지, 대만은 고등학생 주제에 중학생처럼 굴다가도 문득 어른처럼 말하는 희한한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중학생 때도 희한한 사람이긴 했다. 태섭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도 흉내내지 못할, 태섭과 축을 두고 반대에 앉아있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이윽고 대만은 모자를 손에 쥐고 안전한 뭍가로 찰방거리며 올라오긴 했지만, 여전히 발등을 잔물결에 담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너는 어쩌다 무슨 일 생겨도 공백 없이 계속 운동해라. 실력도 괜찮고 농구도 좋아하는데 아깝잖아."

"......내가 당신인 줄 알아요?"

"그치만 사람은 누구나 잃기 전까지 곧 잃어버릴 줄도 모르고 함부로 하잖아. 소중한 것들이 언제까지고 아무 일도 없다면 좋겠지만, 그러려면 대단한 행운이 필요하고 소중한 것을 잃는 건 생각보다 흔한 일인 것 같기도 해."

"..."

나는 그걸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처음에는 막 비련의 주인공처럼 너무 화가 났었다고, 대만은 말을 덧붙였다.

"그런 순간들이 올 때마다 매 번 언제까지고 괜찮을 수만은 없는 게 당연한건데, 인정하고 도움 구하는 게 또 대단한 용기더라. 그니까 너는 나처럼 찌질하게 그러지 말라구."

"..."

킥킥, 대만이 웃으며 파도 끝자락을 밟고 태섭에게 다가왔다. 어느새 가까운 거리를 두고 대만이 태섭의 팔을 잡았다. 어느샌가 또 주머니에 찔러넣고있었던 손이 딸려 올라왔다. 그 손에 다 젖은 흰 모자를 쥐어주고 장난조로 너의 소중한 모자를 내가 건져왔노라, 내일 음료수라도 진상하거라 으스댔다. 그리곤 다시 함께 걷던 차로변 길가를 향해 멀어졌다. 센 척 하다보면 꺾인단다, 임마야. 하고 무심한 투로 투덜거리며 조언 아닌 조언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돌아보다가 황망히 따라가는 태섭은 조금 말문이 막혔다.

얼마나 말문이 막히냐면 대만과 길이 갈리고 나서도 그 빗속에서 집을 빙 둘러 갈 정도로.

* * *

그런대로 평소 면역력이 받쳐준 덕분인지 두 사람 모두 하굣길에 아주 푹 젖고도 감기에 걸리는 일은 없었다. 다만 신변의 변화가 있다면, 태섭은 대만에게 아주 조금 더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부분이었다. 뭐 대단한 결심은 아니고, 분명히 일관성있게 행동하는데도 종잡을 수 없는 이 남자의 쓸모없는 정보가 궁금했다. 농구부에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의 취미는 뭐였는지, 그 껄렁한 친구들은 어디서 만나서 어떻게 친해진건지, 형제자매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영화 취향은 어떻게 되는지...... 분명히 물어보면 말간 얼굴로 바로 대답해줄 사람이었지만, 애시당초 태섭이라는 사람이 질문을 시시콜콜하게 던질 수 있는 성격이 아니어서 아무리 허들 낮은 대화라할지라도 그 비밀이 풀리는 일은 그 동안 없었다. 태섭은 살갑지 않게 살가운 사람이라 자연스럽게 알게 된 내용을 생색내지 않고 알아주는 것에 능숙했다. 반대로 조금 두서없이 자기 욕심을 채우는 질문을 던지는 일엔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바보 정대만. 어른스러운 정대만. 다정한 정대만. 바보 정대만. 태섭은 대만을 불러세워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대신 체육관 구석에서 그가 연습삼아 3 포인트 슛을 쏘는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그물망으로 빨려들어가는 레인보우샷(rainbow shot)이었다.

태섭에게는 매일 보다보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그렇게 잘 쏘는 슛이고 매일 쏘는 슛인데도 한 번 성공할 때마다 그가 아이처럼 주먹을 꽉 쥐고 새롭게 즐거워한다는 점. 갓 농구 배운 사람처럼 울고 웃는 주제에 MVP 경력이 있는 선수여서 기본기가 탄탄하고 담이 크다는 점. 사실 시합 중에 제일 먼저 칭찬하고 제일 먼저 감싸주는 사람이라는 점. 시합 끝나고 먹는 아이스크림 하드는 무조건 바닐라 맛을 고른다는 점. 하지만 백호가 바닐라 맛을 먹겠다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면 다른 맛을 입에 물고 백호에게 바닐라를 내민다는 점. 그럴 때면 엉아가 양보한다고 큰 소리 치고 생색내는 게 취미다가도 진짜 위로를 해야 할 순간에는 생색내지 않는다는 점. 정대만이라는 복잡다단한 사람은 그 모든 것의 총체였다.

어쩌면 그가 농구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빠르게 뛰고 부딪히고 공을 넣으며 크로아상처럼 겹겹이 걸친 다양한 감각과 생각들이 떨어져나가서일지도 몰랐다. 특히 그가 공을 쥐고 하체부터 반동을 실어 던질 때 모두가 허공의 농구공을 바라보는 그 순간은 아주 찰나인데도 농구 경기의 모든 시간들 중 가장 조용하니까. 그 시간은 태섭도 참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그에 대한 상념을 죽이다보니 대만은 어느새 오늘의 연습을 다 마친 듯했다. 뒷정리를 하는 발걸음이 창 밖의 날씨처럼 가벼워보였다. 전날의 비는 다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싹 개어있는 하루였다. 비 온 다음 날 공기 중의 먼지가 가라앉아 유난히 푸른 하늘이 눈부셨다. 창 너머로 드리운 햇살을 받아 반들반들 빛나는 대만의 뒷머리를 보며 태섭은 어제를 자꾸만 자꾸만 복기하게 되었다. 어제 우리가 마시고 있던 공기 중에도 물이 가득 차서 내 시선까지 굴절시킨 건 아닐까. 왜 그 때부터 내 마음에 물이 찰랑거릴까. 깔끔하고 버석했던 예전으로 돌아오지 못할까. 다음 날이 되었다고 해서 일상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마음만 애꿎은 방향으로 꺾여서 울렁거렸다. 바야흐로 격렬하게 밀려올 사랑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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