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놀

강백호 씨, 주머니 봤어요?

백호백


백호야, 내일 경기 몇 시라고 했지? 호열이 백호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 등판의 반대쪽으로 지긋이 내리누르며 물었다. 백호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풀기 위해 길게 숨을 내쉬고는, 호열이 자세를 되돌리자 입을 열었다. 오후 여섯 시 삼십 분. 끝이 위로 쭉 올라간 짙은 눈썹이 통증인지 시원함일지 모를 것으로 꿈틀거리는 것을 내려다보며 호열은 가만히 웃었다. 천재 강백호가 또 팀을 구해내야겠는데. 어깨는 안 무거우신가요? 장난스러운 말을 뱉는 호열은 백호가 알게 모르게 시합 직전까지 긴장을 하는 것을 알아서 그것을 털어내기 위해 운을 띄웠다. 말을 들은 백호는 감고 있던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호열의 담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더 이상 젖살이 빠지는 막바지 시절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뼈대가 좀 더 굵어지고 키가 조금 더 컸다. 목소리는 또렷하고 손마디는 휘어짐 없이 든든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조금은 순해 보이는 눈매가 어느 부분을 짚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먹으며 근육의 결을 더듬고 있으면, 백호는 그가 얼마나 자신을 오래도록 사랑했는지 새삼 깨닫고는 했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답은 모른다. 호열은 그 이야기에 대해서만큼은 대답을 꾸준하게 회피했다. 너 그거 알면 부담스러워서 죽을걸. 그게 이유에서였다. 아마 호열은 자신이 사랑고백을 하지 않았다면 죽어도 마음을 나누려 들지 않았으리라. 홀로 순응한 것과 다르다. 첫 고백에서 보인 가라앉은 눈빛은 오래도록 말라붙은 '혹시'를 반추하는 얼굴이었으므로. 아무리 눈치를 개 죽 쒀서 줘버린 강백호라 할지라도 호열의 그 음울한 시선은 어떻게 못 알아차릴 수 없었다. 백호야, 너 그거 착각이야. 호열은 처참한 일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말했고 백호는 그런 호열을 몇달간 쫓아다니며 열정을 쏟았다. 그것이 호열의 얼마나 되는 시간을 보상했는지는 모른다. 아마 한참 부족할 것이라고 백호는 확신에 가까운 짐작을 했다. 그리고 대체로 그런 류의 짐작은 들어맞는 일이 많다. 

어디서부터 말하면 좋을까. 백호와 호열은 연애한지 이제 십 년 조금 덜 됐다. 중학교에서 그들은 서로 만나 약간의 세계를 공유하며 좁게 난 창으로 아롱아롱 떨어지는 불빛 따위를 그리면서 고등학교를 함께 졸업했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같은 대학에 진학했다. 백호는 재활 후 악착같이 참여한 경기실적 - 우수한 성적으로 꽃 피운 체육생 추천 입학이었고, 호열은 괜찮은 점수로 장학금을 받고 들어왔다. 북산의 교무실에 들어가 나란히 합격소식을 전한 뒤 빈 복도를 걸으면서, 그래서 호열아, 너 과가 뭐냐. 뒤늦게 묻는 백호에게 호열은 아쉬운 티 하나 내지 않고 물리재활 쪽. 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백호는 그게 하늘에서 목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풀쩍 뛰었다가 그쪽에 관심이 있었느냐 호열을 추궁했고 호열은 씩 웃으며 천재의 전속 물리치료사 한 명 있어야 하지 않겠어? 하는 말에 백호는 크게 웃었다. 그의 목에 팔을 걸고 언제나처럼 씩씩하게 학교를 벗어났다. 나머지 수순은 자연스럽다. 그 둘은 떼어놓기 힘든 무언가처럼 달라붙어 대학 근처로 이사 왔고, 돈을 합쳐 반듯한 방 두 칸짜리 빌라에 월세를 얻었다. 호열과 백호는 일상의 패턴을 맞춰 살았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순간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져서 떼어낼 수 없다는 생각을 했을 때 백호는 불확실성의 세상으로 친구를 끌여들였고 그는 연거푸 거절하면서도 다정하게 그를 달랬다. 그 생활 속에서 강백호는,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 같았지만 그의 몇 안 되는 미덕 따위가 그를 더 이상 거절로 굴복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었기에. 그래서 그는 꾸준하게 마음을 휘두르며 내달렸던 것이다. 백호의 삶에서 호열이 자신을 이만큼 그를 애먹인 적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호열이 백호를 애 먹인 적 자체가 없었다. 첫 거절과 첫 거부의 사이에서 부드럽게 문질러지면서 백호는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에 죽어가는 개구리가 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양호열의 그 얼굴. 자신이 치댈 때마다 어쩔 줄 몰라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가만히 상황을 음미하는 듯 혼몽 간을 노니는 듯한 그 그을음의 흔적에서 백호는 쓰라림이 무엇인지를 매번 새롭게 알았다. 그리고 결국 양호열은 언제나처럼 일주일 정도 만에 먹어치울 식자재를 사서 양손에 나눠 들고 돌아가는 가을날에, 좋아. 하고 강백호의 눈물로 짓무른 얼굴을 앞에 세운 채 말했다. 네가 이겼어, 연애하자. 손을 뻗어 백호의 사나운 눈꼬리에 붙은 물길을 엄지로 닦아내면서, 그러니까 울지 마. 하는 소리. 강백호는 이번에도 양호열이 자신을 봐줬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날 백호는 호열을 품에 넣은 채 길바닥에서 펑펑 울었다.

그래서 백호는 짧은 생각을 갈무리한 채 입꼬리를 말아 웃었다. 이 천재는 그깟 무게 따윈 이고 져도 이기는 데에는 상관없다고! 여전한 천진함에 호열은 푸핫, 꽃망울이 터지는 모양으로 웃었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백호의 화덕같이 완만한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잘 다녀와. 사랑해. 백호는 호열이 자신의 팔을 풀어주자마자 그의 상체를 당겨 자신의 몸 위로 올리듯이 끌어안았다. 내일 언제 올 수 있는데. 호열이 백호의 뜨거운 체온을 얼굴로 느끼며 목덜미에 파고들었다. 전반전 끝나기 전까지는 갈게. 정말이지? 음, 약속할게. 그래. 백호가 이렇게까지 확답을 듣고자 한 일은 첫 프로 진출 경기 이후 처음이었던지라 호열은 그날은 일을 빨리 끝내고 경기장에 가야지, 하고 온몸을 백호에게 던진 채 한참을 안겨 있었다. 

연속되는 리바운드, 지치지 않는 듯 코트를 내달리는 백호를 본다. 호열은 그와의 약속을 꼭 지켜 후반전 시작이 되기 전 경기장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차가운 바깥바람이 묻은 머플러를 풀러 자리 아래쪽에 놓아두고선 경기가 재개된다는 부저가 울리는 것을 듣는다. 그리고 코트에 나오는 얼굴. 저 붉은 빛. 눈 감아도 쉽게 잊히지 않을 선명함에 호열은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만면에 웃음을 띄우게 된다. 휘적휘적 걸어 고개를 빙 돌리는 것이 아무리 봐도 자기를 찾는 모양이라 호열은 응원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달아오르기 전 소리친다. 잘생겼다 강백호! 농구천재 강백호! 언제 적 구호인지 모르는 것을 입 밖으로 내면서 호열은 킬킬거렸고 그 웃음기 섞인 외침은 방아쇠가 되어 양 사이드를 뜨겁게 달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백호가 근원을 찾는 것에도. 먼 곳에서도 시선이 맞는 것을 어쩜 그렇게 선명한지. 호열은 한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백호는 악당처럼 웃었다. 공이 날아든다. 그리고 백호는 필사항전이라는 글자를 입에 문 채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 호열은 인파에 섞여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땀범벅이 된 백호가 잘 잡고 있던 트로피를 다른 팀원에게 넘겨주더니, 척척 걸음을 옮긴다. 이것은 또 색다르다. 호열은 그가 또 뭘 하려나, 세레모니를 준비한 게 있나 싶어서 그저 웃기만 했다. 아니, 근데. 저 놈이 심판석으로 가네?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책자 하나를 냅다 낚아채네? 백호야 너 뭐 하니? 호열은 백호가 얇은 경기 책자를 둘둘 말아 입에 대는 것을 보곤 입을 쩍 벌렸다. 암만 세레모니라 해도 그거 너무 과한 거 아니냐, 백호야! 그리고 강백호가 입을 연다.

야! 양호열! 우리 연애까지 삽질만 십년 넘은 것 같은데 결혼은 그냥 스무스하게 가자. 어? 이 천재랑 평생 살자!

환호와 박수를 가로지른 돌발행동은 청혼이다. 내가 요리는 못해도 청소는 잘하잖아! 요리는 지금처럼 네가 해 줘! 쩌렁쩌렁 넓은 코트를 울리는 말의 내용에 좌중 고요해졌다. 그리고 헉헉거리는 숨소리. 희대의 나이스 플레이어 강백호의 청혼상대 이름은 아무리 들어도 남자의 그것이었다. 이리저리 수군거리는 소음이 얼마간 이어진다. 백호는 잠깐 말아놓은 책자를 내렸다. 보이는 얼굴이 의미 모를 불안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그것은 세간의 평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 너, 왜 답 빨리 안 해? 따위의 유치한 것이라서… 결국 강백호는 다시 꿱 소리 지른다. 

야 임마! 안 받아줄 거야?!

그때까지 굳은 듯 있던 호열은, 그러니까 본인이 우는 줄도 몰랐던 양호열 씨는, 한결같이 폭발처럼 날아드는 강백호 씨의 유치하고 올곧은 대답 독촉에 굳었던 뇌가 사르르 풀리는 것을 느낀다. 와하하, 울음 섞인 웃음이 조용한 곳 일부에서 터져 나온다. 호열은 양손을 이렇게, 입가에 대고선,

그래, 천재가 나 좀 데리고 살아주라!

하고 답을 내놓았다. 

정적. 그리고 쏟아지는 환호. 양 옆의 사람이 호열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 호열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볼썽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환한 얼굴로 자신의 쪽으로 오는 백호를 보며 후다닥 관중석의 맨 첫 줄로 내려갔다. 반지를 주려나 봐. 들뜬 사람들의 목소리에 호열은 어쩐지 귀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백호가 바지를 더듬는 찰나.

아차. 이 유니폼 바지는 주머니가 없다. 즉슨, 강백호가 그렇게 비밀로 꼭 닫아놓고 소중하게 모셔놓은 반지가 락커룸 어딘가에 콱 박혀 있다는 말이다. 그걸 깨달은 강백호는 안색이 파리해졌고, 그걸 모를 양호열이 아니라 그는 난간에 상체를 기대 늘어트리고선 낄낄대며 웃었다. 옷 갈아입고 와, 백호야. 기다리고 있을게. 그 말씨는 언제나처럼 추궁하거나 재촉하는 것 아니어서, 백호는 입을 우물대다가, 두고보자! 라는 이상한 말을 남기고 왁자한 웃음을 터트리는 팀원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샤워실로 들어가 오분쯤 뜨거운 물을 맞으면서. 강백호는 생각한다. 헐. 나 그럼 유부남이네? 나 그럼 이제 평생 양호열이랑 여보 하면서 사네? 이거 진짜인가? 그리고 망상은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간다. 마치 그가 스스로를 유부남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 처럼…….

덜 마른 머리를 한 채 경기 인터뷰도 빼놓고 허둥지둥 출구로 뛰쳐나온 백호가 본 것은 눈에 익은 검은 세단에 기대 서 있는 호열이었다. 짧게 유지한다지만 그래도 고등학생 때의 박박 민 머리에서 어느정도 긴 머리카락이 겨울바람을 타고 무겁게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호열은 큭큭 소리죽여 웃으며 몇걸음 백호에게 다가가 아랫입술을 누르듯이 입맞추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차체를 빙 돌아 조수석 문을 열어주는 젠틀한 서비스까지 해 주었다. 타시죠, 남편 강백호 씨. 그 말을 들은 백호는 기분이 째진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가슴에 새롭게 새겼고, 결국 반지는 호열이 그 사이에 예약해놓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까맣게 잊었다. 그렇게 몇십 분 밤거리를 드라이브 하다 건네주었다. 호열은 두번 울지 않았다. 대신 백호의 옷깃을 끌어다가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오래 살자. 백호가 웃었다. 너 꽉 잡혔거든? 각오해라.

검은 세단의 붉은 후미등이 긴 선을 남기며 인적이 드문 도로를 따라 달렸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 ..+ 3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