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놀

거스러미.

백호열

강조된 첫 문장은 선인장 님 께서 제안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몇 년만에 다시 본 짝사랑 상대가 현관문 앞에서 울고 있다. 아무리 세상사 달관하다시피 한 호열이라도 당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비까지 좍좍 내리고 있었다. 진실로 우중계절이 무엇인지 알려주겠다는 양 코 앞이 안 보이도록 빽빽하게 내리는 물줄기를 뚫고 온 정신력에 호열은 당황한 티를 안낼 수가 없었다. 하여간 개판 났다는 소리다. 뭐라 묻기도 전에 우선 들어와, 하며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이 흠뻑 뒤엉킨 백호를 자신의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백호는 질질 짰고, 정말, 그 덩치를 어디에다 써먹는지 모를 정도로 형편없이 울었는데, 호열은 몇십번 쯤 이런 일을 겪어본 사람 답게 능숙하게 그 거구의 울보를 끌어당겨 벗기고 씻히고 얇은 여름이불로 둘둘 말아놓은 뒤 어느정도 진정한 듯 조금 불그스레하게 달아오른 피부의 백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백호야. 호열은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다정스레 덩치 큰 친구의 이름을 불렀고 백호는 그 것이 다시한번 어떤 신호탄이 되기라도 한 것 처럼 눈에 물막이 어렸다. 이크. 호열은 꽤나 놀란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암만 사회생활을 질기게 했더라도 간만에 마주한 사랑의 실물을 냉막하게 분석하고 단시간에 쫓아버릴 위인은 되지 못했기 때문인지라. 호열아. 한참을 눈물을 흘리던 백호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응. 호열이 부드럽게 답했다. 나 차였다. 호열은 잠시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백호의 약간 길었지만 - 여전히 짧은 붉은색 머리가 물기를 먹어 조금 늘어져 있다.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희대의 장마가 될 것이라고 소란스럽게 말하는 뉴스 말미의 일기예보. 그리고 눈 앞의 망해버린 첫사랑. 그 얼굴의 짠 눈물. 이 모든 것이 호열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거스러미.

양호열을 진학하지 않았다. 우선 진학을 하기에 나쁘지 않은 준수한 성적이었다지만 그는 무언가 새로운 배움으로 가슴을 뜨겁게 하겠다는 어떤 희망이 존재하지 않았다. 학창생활의 일부를 건달처럼 돌아다닌 탓이 적지 않다고는 하겠지만, 일단 그에게는 무슨… 의미라는 것이 없었다. 그의 존재 의의가 무엇인지 사실 스스로 잊어버리곤 했으므로. 그러느니 차라리 돈을 버는게 나았다. 하여서 양호열을 북산에서 졸업장을 받아든 뒤, 무턱대고 그 곳에서 멀리 멀리 사라지기로 한다. 오래되어 물먹은 마음을 그만두는 것이 돈만큼 그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빛에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다지만 자신이 그 그림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 긁으면 툭 떨어지는 진흙자국처럼 그렇게 사그라드는 것이 나으리라. 호열은 어느 지방으로 기어들어갔고 잡히는 대로 일을 했고 버는 대로 저금했다. 통장엔 출금보다 입금의 숫자가 많아졌고 그만큼의 시간도 늘어나서 호열은 더이상 학생이라 불리기보단 청년이나 저기요, 정도로 불리기에 좋은 나이가 되었다. 그 사이에 몇번씩 모 대학의 어떤 포지션을 맡은 붉은 머리의 농구선수 이야기가 종종 스포츠 잡지에 오르기는 했지만 호열은 정말로 그 잡지를 그럴 의도로 본 것은 아니었다. 그저 편의점에서 할 일이 없어서, 정말 잠깐 시간을 채우다가. 눈에 익은 이름이 스칠 때마다 가슴은 화상을 입은 것 처럼 선명하게 따끔거렸다. 잘 살고 있구나, 호열은 언듯 읽히는 모든 인터뷰에서 그의 뜨거운 태양볕의 그을음을 맡았고 그것으로 자신을 위로했다. 이렇게 살면 된다. 아주 조금씩 아물어가는 미련. 떠돌아가는 광풍. 그리고 마음. 호열은 마음을 잘 접어서 어디론가 보내버리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탁 소리가 나게 잡지를 닫은 뒤, 카운터로 갔다. 이거 계산 해 주세요. 대학 농구의 한 지면을 장식하다 못해 표지에 당당하게 오른 강백호의 이름은 호열의 가슴을 저리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므로.

그런데 그 애가 지금 자기 집 안에서 눈물 범벅 밤송이가 되어서 본인이 차였다고 말 한다. 언젠가의 고등학교 생활의 마지막 차임은 쉰 한번째였는데, 자신의 왕국에서 떠나보낸 백호는 더이상 자신이 셀 수도 없는 수많은 경험을 한 채 그렇게 모르는 얼굴과 모르는 시간을 먹고 자란다. 이것이 육아에 가까운 감상임을 호열은 이제는 안다. 자신의 사심이 어떤 의미로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지에 대한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호열을 눈물 젖은 백호의 뺨을 굳은살이 묻은 손으로 닦아내며 미적지근하게 웃었다. 이번에 몇번째 차이는 건데? 성기고 부드러운 질문. 백호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술을 비죽인다. 기억 안 나, 하나하나 세어주는 사람이 너밖에 더 있냐. 호열은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있었냐, 가 아니라 있냐, 였다. 이 오묘한 차이에 그는 둔해지려는 가슴을 꾹 내리누르면서 웃음을 유지했다. 하긴 그러네. 누가 네가 차인걸 쉰번을 세 주냐. 장난스러운 어투. 호열은 백호와의 이 관계성이 어그러지는 것을 원치 않아서 도망쳤던 것이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자신이 펑 터져서 그를 오물 범벅으로 만들어 버릴까봐. 그러나 백호는 다시 자신에게 찾아들었다. 너무 지나치게 밝은 빛은 재앙과 진배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래. 백호는 자신에게 그런 존재였다. 언제 누군가가 누구의 악몽이 될까봐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호열은 어린 마음에 몇번씩 백호의 옆을 맴돌며 혹시나 하는 심상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둘 다 어른이었고, 어느정도 스스로의 생을 버틸 수 있을 정도의 감각은 익혔으리라. 그래서 호열은 백호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을 본 일. 애인. 생각보다 긴 연애. 미래를 그리며 한 동거. 짐을 나누고 옮기며 익힌 생활감. 말다툼. 조금 긴 정적. 그리고 통보. 여기에서 호열은 통보에서 대충 모든 일의 갈래를 짐작했다. 바람났구나, 그거. 호열은 생각한다. 만약 자신이 백호와 그랬다면 죽어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도. 차라리 혀를 깨무는 한이 있더라도 그에게 상처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고, 손목이 부러지는 일이 있어도 그를 집 밖으로 밀어내지는 않았을텐데. 그는 정말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는 능력이라도 있는 것만 같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 일은 변함이 없는 것 같아 호열은 안심이 되는 듯 속이 쓰렸다. 위산이 거꾸로 올라와 식도의 길이가 어느정도나 되는지 알게 될 것만 같아, 그는 잠시 입을 가리고 고민하는 척 했다. 그러던 와중 백호가 말했다. 야, 호열아. 너 나랑 같이 살면 안 되냐. 혼자 살기 너무 심심해서 그래. 여름이불을 둘러맨 채 물 젖은 소리로 그런 말을 하는 첫사랑을, 종다리의 울음처럼 무구한, 그것은 바다를 보지 못한 뭍사람이라던가 새로운 외국어를 처음 접한 사람처럼 순진한 부류였다. 진실로 어떤 의미도 없어서 너무 담백한 말. 호열은 얼음처럼 굳었다가 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른 기암에 배가 뚫리는 듯 한 고통을 느꼈다. 그럼에도 웃었다. 지독한 사회생활의 잔재였다. 갑자기 찾아와서 그런 말 하니까 좀 당황스럽다, 야. 백호가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이런 일 당하고 나니까 너밖에 생각이 안 났어. 호열은 그 말에 지지부진한 모든 경기에서 패배를 선언하고야 만다. 항상 그랬다. 강백호는 언제나 자신을 손쉽게 이기고 만다. 너무 쉬워서 스스로가 경기에 오른줄도 모르는 그런 것들.

그 뒤로 호열은 백호와 다시 상경했다. 그리고 집을 찾았다. 하나는 백호의 대학 문제였고, 둘은 지금 임시로 들어 사는 빌라가 둘이 살기엔 너무 비좁았기 때문이다. 체육특기생으로 들어간 학생 답게 기숙사에서 살 수도 있었지만 그러자니 호열은 외부인이라 룸메이트로 살기엔 어림도 없는 말이었다. 하다면 당연히 자취를 해야 한다. 학교에서 가깝고 호열이 일하기에도 좋은 자리가 있는 곳. 둘은 틈틈이 집을 보러 다녔고 호열은 본인이 잘 곳이면 몰라도 백호까지 재워야 할 집이라면 말이 다르다는 마음을 먹은 채 지독할 정도로 꼼꼼하게 살폈다. 부동산 업자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아직 젊어 보이는데 아주 섬세하시네요, 하는 말에 호열은 부드럽게(백호가 옆에 있었다.) 웃었고, 백호는 으하하 소리냈다. 이 녀석이 좀 그렇긴 하죠! 하고 그의 등을 팡 쳤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백호가 말했다. 야, 이러니까 무슨 신혼집 구하는 것 같다. 백호는 또렷하고 맑은 시선으로 앞을 보았다. 호열은 뭐라 답하지 못하고 열 오른 귓바퀴를 가만히 매만지며 손으로 가리는 데에만 급급했다.

둘은 집을 구했다. 백호는 그 뒤로도 몇번의 출전이 있었고, 북산 시절부터 이어져온 팬과 새로운 팬, 그리고 친구와 지인이 늘어났다. 정말로 호열의 왕국에서 백호는 떨어져 하나의 체계를 확립했던 것이다. 호열은 새 직장을 잡아 일을 했다. 대부분의 생활비는 충분히 충당할 수 있었다. 백호 역시 동거인으로의 몫을 충분히 해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다. 

백호는 어느 아가씨에게 고백을 받는다. 동급생인지 후배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몇번 말을 섞었던 기억이 있고, 시합 전 몇번의 호의가 왔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을 모르기에 백호는 한번한번의 소중한 기억을 다 담아두는 사람이었으므로, 그저 어, 어, 하며 그 수줍은 현장에서 얼이 빠진 채 단정한 정수리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다. 분명 예전이라면 그 고백에 눈물을 뽑으며 감사히 받았어야 할 상황에서 백호는 그 갈급에 가까운 허기짐을 느끼지 않았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그저 머리에는 퇴근하고 돌아온 호열이 익숙하게 가방을 한쪽에 내려두고 주방으로 가 고무장갑을 끼면서, 백호야, 밥 먹고 나면 한번 헹궈두라고 했잖아. 하며 다정스럽게 타이르는 장면만이 떠올랐다. 그래서 백호는 아가씨에게 어물어물 말을 한 것이다. 미안해, 나 아무래도 좋아하는 사람 있는 것 같다. 그 오묘한 불확실성의 틈바구니에서 아가씨는 무어라 말을 더 붙여보려다가 본인이 더 당황하는 얼굴의 백호를 추궁하지는 못하고 그저, 응.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백호는 연거푸 사과를 한 뒤, 다급하게 몸 돌려 집으로 뛰어갔다.

현관을 열고 뒤축을 밟아 대충 벗어버린 신발은 엉망으로 뒤집어진 채 나동그라진다. 쿵쾅거리는 조심성 없는 소리에서 그 주인이 누구인지가 또렷하게 도드라진다. 호열은 거실에 앉아 지난 호 농구잡지를 뒤적이며 소리의 근원을 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왔어? 그리고 좌식 테이블 위에 올린 유리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편안한 반팔셔츠와 검은색 트레이닝복 바지. 비번이어서 올리지 않은 조금 긴 머리 따위가 백호의 눈에 들어온다. 꿀렁거리는 목울대가 힘들게 요동친다. 야. 백호가 신호탄 같은 말을 터트린다. 나 너 좋아하는 것 같다.

지독한 장마에서 일년이 좀 덜 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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