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놀

호랑이 일기장.

백호열


이제부터 네 이름은 백호다.

자, 백호야. 내가 너한테 한 자 한 자 글을 적을건데. 일단 이건 어디도 새 나갈 일 없을거야. 죽어라 숨길 거거든. 고등학교까지 들어와서 일기장이 뭐냐, 일기장이. 심지어는 비밀 일기장이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처음이니까 가볍게 적어보자. 문학 시간에 강백호 조는거 보는데 진짜 웃기더라. 그 와중에 무슨 먹는 꿈 꾸는지 입을 우물거리는거야. 진짜 잘 자더라. 문학이 백호 보다가 관두던데. 하긴. 얘는 머리를 밀든 안 밀든 상관 없이 평생 가도 하이쿠에는 관심이 없겠지. 그런데 연애편지에는 관심이 좀 많더라. 매번 써제껴서 그런가. 나도 서른번 정도 쓰고 찢고 하면 늘긴 하겠다. 

안녕 백호야. 오늘 비 엄청 와서 너 서랍에서 꺼내는 생각 하려니까 길바닥에서부터 내내 애 닳아 죽겠더라. 왜냐면 네가 들어간 서랍 더럽게 오래묵은 나무라서 가끔 비 오거나 하면 뒤틀렸던 곳이 또 어그러져 가지고 한대 빡빡 쳐야 열리거든. 그래서 오늘 뭐 했냐면, 하루 종일 강가 산책을 좀 했어. 교실 들어가기에 꽃이 너무 활짝 펴서. 왜, 강 끝물로 갈 수록 벚나무를 촘촘하게 심어뒀는데 그게 바람이 불 때마다 후르르 떨어지는 모양이 무슨 봄날에 비라도 내리는 것 같아서 안되겠더라. 그 때 알았어야 했는데, 근데 점심 까지는 날씨가 죽여줬단 말이지. 너도 봤어야 했는데. 사방이 너무 분홍색이어서 하늘까지 그렇게 보이던걸. 근데 그거 아니. 벚꽃잎을 잡아다가 하늘 위로 올리면 태양빛 때문에 붉게 보인다.

오늘 백호가 봄이랍시고 가쿠란을 조금 열어젖히고 나왔는데 받쳐입은 셔츠가 새 것이더라고. 누가 사 줬을까. 흰 것을 보니 농구부원들이 입는 걸까? 좀 벗어보라고 할 걸 그랬나봐. 등판 보면 아는데. 북산고등학교, 이렇게 검은 색으로 적혀있을 것 아니야. 아니면 다른거 사 입히고 싶다. 그런데 내가 거기까지 해도 되나? 뭐 어차피 걘 별 생각 없어서 왜냐고 묻지도 않겠지. 그것도 좋아. 걔가 단순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바보는 세상을 구한다는데, 일단 세상을 구할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구하는 것 같다. 웃기지 백호야. 안 그러냐.

오늘 하교는 혼자 했어. 백호 연습 늦는다더라. 요새 이런 일이 많아. 그래도 너한테 적을 시간은 길어져서 좋다. 데이트 하는 기분 들고. 뭔놈의 연애질이냐고? 웃겨. 나라고 안해본 것 같아? 해봤어. 나도. 그런데 오래 못 가겠더라고… 아무래도 실례하는 기분 들어서 되게 사과만 하게 되더라. 그리고 여자애들은 되게 예민해. 걔네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데 좋아하는 사람 다른 년 아니냐고 막 추궁해. 그럼 난 아니라고 하지. 거짓말은 아니잖아. 너도 나한테 그렇게 따질 거냐? 양다리 걸치고 재수없게 군다고? 야. 차라리 양다리였으면 좋겠다. 그러면 억울하지라도 않을 건데.

백호야. 오늘 네가 나한테 했던 말이 나 자꾸 생각이 나. 

이게 잘하는 짓인지도 모르겠다.

지면에 뭘 적어도 기분이 나아지지가 않아. 백호야. 내가 지금 뭐하고 있니?

백호야, 마음도 닳아. 닳고 깨져. 난 네가 너무 좋은데 가끔씩 터지려는 말들을 누르는게 버거워질 때가 있어. 이건 내가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난 가끔 너를 끌어안는 생각을 해.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건 제정신이 아니니까. 그런데 백호야. 난 두 눈 뜬 채로 번듯하게 서서 너를 보는데도 그런 생각이 들어. 네 손을 잡고 싶고 안고 싶고 너랑 대로변을 걸어다니면서 온갖 말을 떠들면서 달리고도 싶어. 이걸 어떻게 해야 해? 난 정말 뭘 어쩌면 좋아? 네가 매번 나한테 차였다고 말할 때 마다 진심으로 가슴 철렁하던게 싹 씻기는 내가 너무 싫다. 그런데 백호야. 들어봐. 아무리 그래도 네가 나한테 그러는 것 자체가 너무 미운데 또 계속 나한테 오니까 좋아 죽겠어. 네가 행복해지면 좋겠는데 동시에 흠씬 얻어맞고 그만큼 쥐어패고선 질질 짜면서 나한테 와주면 좋겠어. 그러면 난 또, 보건실에서 상자 훔쳐다가 너 봐주고. 이마 문질러주고. 너 실패해서 징징대는거 들어주고. 다음엔 잘 될거야 하면서 그 다음이 내가 되는 상상도 좀 하고. 그리고. 그리고 넌 또 다른 사람 보고. 그런데 더 억울한게 뭔지 아냐. 이번에 네가 좋아하는게 사람이 아니라 공이잖아. 씨발. 공. 주황색 농구공 그거. 네가 하루 온종일 그거 바닥에 퉁퉁 튕기면서 걸어다니는데 진짜 미칠 것 같아. 세상의 모든 공이란 공을 다 터트려버리고 바람도 못넣게 태워버리고 싶어. 그 생각까지 하니까 내가 사람 아닌 것 같아. 그런데 언제는 사람 취급 받았다고 그런 생각 하고 있으려니 웃겨서. 그런데 백호야. 너 그거 하고 싶지? 안하면 죽을 것 같지? 너는 너도 모르는 둔탱이 곰자식이라서 그거 알지도 못할건데, 난 알아. 너 거기로 가야 돼. 왜 아냐면 나 계속 널 보거든. 계속 봐서 알아, 백호야.

백호야. 너는 진짜 이름도 왜 백호냐. 진짜 나 죽어버리겠다.

백호야.

나 정말로 죽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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