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기뉴

밍기뉴 - 1부 : 심해기지 (1)

송태섭을 찾아떠나는 송아라의 여정. 태섭대만 기반.

*
해당 편에서는 송태섭과 정대만 모두 나오지 않습니다.
오탈자 교정 등의 이유로 수정될 수 있습니다.
감상시 참고바랍니다.


1부 | 심해기지 (1)


이한나

이한나는 원두커피를 주력으로 하는 자그마한 규모의 카페테리아에서 일했다. 대학생 시절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짬으로 이한나는 깔끔하고 유연히 업무를 소화해냈고, 사장도 그런 그녀를 내심 마음에 들어했다. 카페는 멈추지 않는 시냇물과 비슷했다. 총 네 개의 테이블이 꽉 찬 적도, 전부 빈 적도 없었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단골 서너 명과 테이크 아웃을 해가는 손님 한두 명이 띄엄띄엄 들어왔다. 음악은 사장의 취향에 맞춰 주로 보사노바 재즈를 틀었다. 사장이 원두커피를 내릴 동안 이한나는 주문을 받거나 테이블을 정리했고, 가끔 파르페와 같이 장식이 잔뜩 올라간 스폐샬 메뉴를 만들었다. 지루하다면 지루할지도 모르나 그만큼 아늑하고 편안하기도 했다.

새 직장이 생각보다 빨리 구해지지 않았더라면 이한나는 이곳에서 최소 두어달은 더 일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얼마 후 집에서 멀지 않은 어느 스포츠 의류 매장에 부매니저로 출근하기로 했다. 일주일 전에 입사 합격 통보를 받았다. 매장 규모가 상당히 큰데다 인지도도 높고, 잘하면 본사 발령까지도 노릴 수 있다. 아마 이곳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환경일 터다. 당분간은 휴일도 반납하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녀야겠지. 느긋하고 평화로운 여유따윈 꿈도 못 꿀지도 모른다. 하나도 아쉽지 않은 건 아니나 새롭게 시작할 일에 대한 두근거림도 있었다. 그렇기에 성심성의를 다해 마무리하고 가리라는 그녀다운 다짐을 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녀의 업무 마감 시간에 맞춰 조금 특별한 손님이 오기로 했다. 그 손님은 카페 단골도 아니고, 사장과 안면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오직 이한나를 만나기 위해 구태여 시간을 내어 오기로 했다. 먼저 연락을 준 것도 그쪽이었다. 워낙 오랜만이라 이렇게 만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이한나는 반가움으로 들뜨는 한편 긴장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를 만나러 오는 주인공은-

"오랜만이에요, 언니!"

이한나의 오랜 친구이자 옛 연인이었던 '송태섭'의 유일한 여동생, 송아라였기 때문이다.

송아라는 이한나와 안면이 있는 편이었다. 안면만 있다 뿐이겠는가. 한땐 자매 지간처럼 지냈다. 송태섭과 연인 사이였으니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따지고 보면 송태섭을 만난 횟수보다 송아라를 만난 횟수가 더 많았다. 경계가 허물어진 계기는 단순했다. 이한나의 첫 해외여행지는 미국으로, 송태섭을 보러 가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였다. 열흘 가량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이한나늗 송태섭보다 그들과 지낸 시간이 더 길었다. 더군다나 세 살 어린 여자애가 언니, 언니, 하며 저를 친언니처럼 대하는데 싫을 리가 없었다.

"영상 편지?"

"네."

송아라는 파르페에 꽂힌 스틱형 쿠키를 집어 먹었다. 이한나의 기억이 맞다면 송아라는 올해로 27살이었다. 그런데도 이한나의 눈에는 여전히 10대 여자아이로 보였다. 처진 눈매는 송태섭을 꼭 닮았지만, 생김새를 떠나서 어딘가 동그랗고 포실한 면모가 있었다. 여동생이라서 그런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좀 더... 송아라는 햄스터처럼 양 볼을 우물거리며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갈 테이블 위로 꺼냈다. 낡은 캠코더였다. 캠코더엔 알록달록한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송아라의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한나는 송아라에게 양해를 구하고 캠코더를 집어들었다. 잔기스와 긁힌 자국을 봐선 쓴지 족히 20년은 넘어보였다. 스티커는 세월감을 가리기 위한 일종의 위장술인 듯했다.

"미국에 간다니까 엄마가 주셨어요."

"미국? 직접 가서 주려고?"

"응."

송태섭은 가족들에게 종종 제 경기영상을 녹화한 테이프를 보내곤 했다. 이한나도 웬만한 경기 영상은 다 기억한다. 송아라와 같이 봤으니까. 송아라는 그동안 받은 테이프에 대한 보답도 할 겸 연락이 닿는 사람들의 응원을 모아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손편지나 사진은 자주 보냈으니 새로운 감동을 주고 싶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태섭이가 좋아하겠다."

이한나는 제 앞에 놓인 카페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절반 가까이 사라진 송아라의 파르페와 달리 이한나의 카페라떼는 립스틱 자국만 남은 채 거의 그대로였다. 이한나의 시선에 송아라의 가방에 달린 우스꽝스러운 눈과 입을 가진 도넛 모양의 키링과 걸렸다. 송태섭이 선물했던 거다. 송아라는 키링을 보자마자 "이게 뭐야! 진짜 못 생겼어!" 라고 외치며 꺄르르 웃어댔다. 이제는 빛바랜 순간이 되어버린 그날을 이한나는 여전히 기억했다. 시원섭섭하고 애틋했다. 이한나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캠코더 만큼은 아니지만 쓴지 족히 10년은 되어 모서리가 너덜너덜거렸다. 수첩을 받아든 송아라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연락처는 휴대폰에 저장해둬서 가져가도 돼."

"고마워요!"

수첩에는 북산고등학교 시절 함께 했던 이들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연락처를 새롭게 갱신한 경우도 있지만, 과연 얼마나 연락이 닿을지는 미지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자그마치 10년이 흘렀다. 많은 것이 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건너건너 소식을 듣는 것과, 직접 연락을 취하는 건 또다른 무게가 있었다. 다들 살아가기 바쁘니까. 스쳐지나가는 바람조차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송아라의 이 작고도 경쾌한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어쩌면 모두의 기억에 남을 또 하나의 추억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한나는 약 2년전 송태섭과 헤어졌다. 장거리 연애 8년을 포함해 9년이었다. 이별 통보를 한 쪽은 송태섭이었다. 자그마치 일만킬로미터가 넘는 장거리엔 많은 제약이 따랐으나 이한나는 정말로 괜찮았다. 송태섭을 응원하는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았으므로.

하지만 송태섭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수화기 너머로 들러오는 그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이한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헤어지고 싶지 않은 동시에 헤어지고 싶어했다. 인식과 이해는 별개였다. 사실 2년이나 흐른 지금도 이한나는 그의 마음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 말을 발판 삼아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다. 한나, 네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면 좋겠어. 언제나 여유로운 어조로 여긴 말이지, 라는 서두를 달며 타지의 생활을 들려주던 그의 목소리는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직도 귓가에 선했다. 이한나는 송아라와 함께 본 경기 영상에서 중간중간 손바닥을 보던 송태섭을 떠올렸다. 손바닥을 펼치고, 시선을 내리꽂았다가 당당히 고개를 들고서, 다시 코트 안을 누비던 그의 모습을.

"미국은 언제 가?"

"3주 뒤예요."

"그때까지 완성하려면 바쁘겠네."

"그러니까 언니가 도와줘야 해요. 첫 순서니까! 준비됐죠?"

이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에 힘입어 송아라는 곧바로 캠코더 세팅에 들어갔다. 아직 조작이 익숙하지 않은지 버벅거리는 송아라를 위해 이한나는 기본적인 조작법과 몇 가지 팁을 알려주었다. 송아라는 수첩을 꺼내 열심히 메모까지 해가며 이한나의 설명을 경청했다.

촬영은 순조로웠다. 이한나는 전날 밤 미리 써둔 편지를 꺼내 읽었다. 손에 편지지를 쥐고 있었지만 시선이 활자에 머무르는 시간보다 렌즈를 향한 시간이 훨씬 길었다. 중간중간 웃어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연습한 것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이한나와 송태섭은 연인 관계를 끝낸 뒤에도 드문드문 연락했다. 그들은 연인이기 이전에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하고 아끼는 사이였기에. 사랑의 정의는 다양했다. 이한나는 여전히 송태섭을 사랑하고, 송태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지 사랑하는 형태가 달라졌을 뿐이다. 이한나는 송태섭의 나아감에 대해 신앙에 가까운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송태섭은 어디서든 잘 해내고 있을 것이다.

정말 고마워요. 고맙긴, 나중에 또 연락해. 응, 언니도요. 촬영을 마친 후 송아라는 손 인사에 그치지 않고 두 팔 가득 이한나를 끌어안았다. 포옹은 한겨울을 밝히는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따뜻하고 포근했다. 송태섭은 참 좋은 동생을 뒀다. 이토록 사랑스럽고 귀여운 동생이 준비한 깜짝선물을 받게 될 그의 표정을 이한나는 어렵지 않게 머릿속에 그렸다. 상상하면 할수록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얼굴이었다.


채치수

채치수는 농구선수가 된 지 어느덧 8년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는 재작년 시부야를 기점으로한 실업 농구팀에 입단하였으나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채치수의 문제가 아니었다. 팀 전체의 문제였다. 한때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었다. 품어온 의지와 노력은 분명 틀리지 않았는데,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반대편에 서있는 기분. 손을 뻗어도 닿을듯 말듯 닿지 않는 느낌이 딱 그랬다.

꿈을 이루어도 새로운 꿈이 나타나는 법이다. 비슷한 원리로 역경을 극복해도 새로운 역경이 들이닥친다. 채치수는 근래 들어 제 마지막 인터하이를 떠올리곤 했다. 마침내 제 꿈을 이루어졌음을 깨달았던, 최선이 최고가 되었던 영광의 순간을. 그러나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그때를.

청춘과 현실의 괴리는 크다. 청춘을 청춘이라고 할 수 있는 건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돌아갈 수 없는 청춘을 곱씹기 보다 지난한 현실에 익숙해져야 했다. 채치수는 새삼스럽게 제 열여덟 살의 여름엔 많은 운이 따랐음을 느꼈다. 당시 노력을 한낱 운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다. 노력이 제 빛을 발하는 데에도 운이 필요하다는 걸 통감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고, 기왕 하는 김에 더 잘 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헤쳐나가기엔 현실은 조금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농구를 그만두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채치수의 운은 아직 다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흘 전 들어온 이적 제의가 그 증거였다. 심지어 연락이 온 곳이 지난해 슈퍼리그에서 우승을 거머쥔 강호팀이었다. 그쪽에서 무슨 조건을 제시하든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채치수는 당연히 승낙했고,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제 발목을 잡던 현팀과 이별을 고하기로 했다. 계약 종료와 성사를 잇달아 거친 채치수는 고양감을 느끼는 한편 허탈함도 느꼈다. 기회가 주어질 만큼 제게 자격이 있다는 안도감과 어떤 역경은 딛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빠져나와야한다는 현실에 수긍한 자신을 함께 인정해야 했기에.

그런데 이런 시기에 연락온 이가 하필 송태섭의 동생이라니, 타이밍이 이리도 절묘할 수가 없었다. 채치수는 어울리지 않게, 그러나 으레 오빠가 가지는 심심한 배려를 바탕으로 송아라가 있는 곳까지 친히 찾아갔다. 대중교통으로는 두 시간 가까이 걸리지만 자차로 가면 한 시간이면 오갈 수 있다는 점도 한몫했다. 송아라가 알려준 약속 장소는 해남 부속 고등학교 근방에 자리한 커피숍이었다. 채치수는 송아라를 한 번도 본 적은 없으나 금세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커피숍은 주차장이 제공될 정도로 규모가 커서 얼핏 패밀리 레스토랑처럼 보이기도 했다. 원목으로 된 문을 밀고 들어가자 직원이 나와 몇 명이냐고 물었다. 먼저 온 일행이 있다고 하자 직원은 순순히 물러났다. 채치수는 입구와 가까운 테이블을 먼저 살폈다. 낯익은 얼굴은 안 보였다. 계단참이 있는 왼쪽으로 가니 네댓명의 무리가 둘러앉아 손에 담배를 끼운 채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편협한 생각임을 알면서도 채치수는 그들중엔 송아라가 없으리라 단정했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부분 일행이 있었으나 세 번째 테이블만 여자 혼자 앉아 있었다. 때마침 여자가 고개를 들며 채치수와 눈이 마주쳤다.

채치수는 확신했다. 송태섭의 여동생이다. 여자도 비슷한 속도로 알아봤는지 다짜고짜 채치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치수 오빠 맞죠?"

"나인줄 어떻게 알았지?"

"보자마자 알겠던 걸요?"

송아라는 맞은편에 앉은 채치수에게 넉살 좋게 메뉴판을 건넸다. 여기 케이크도 스파게티도 다 맛있어요. 채치수는 그제야 이곳이 커피숍이라는 이름을 가진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는 걸 알아챘다. 송아라의 앞엔 크림이 잔뜩 올라간 팬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채치수라면 절대 시키지 않을 종류였다. 채치수는 딱히 허기지지 않았기에 블랙커피를 주문했다. 커피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송태섭이 여동생에 대한 얘기를 꺼낸 적은 없으나 어렴풋이 짐작하긴 했다. 여동생이 있는 오빠만이 할 수 있는 소소한 일면들이 그에게 이따금 보이곤 했으니까. 몇 살 터울일까. 채치수는 송아라의 외관으로 나이를 가늠했다. 어깨까지 오는 어중간한 길이의 단발 머리, 넉넉한 품의 연노랑색 맨투맨, 도넛 모양의 장식이 달린 카키색 백팩. 어림잡아 열일곱 살? 하지만 그 나이라면 송태섭과 나이 차이가 너무 크다. 그럼 대학생? 더이상의 추측은 의미도 없고 예의도 아닌 것 같아 채치수는 생각을 그만뒀다.

"송태섭에게 영상 편지를 보낸다고?"

"네."

"쉽지 않을텐데, 대단하군."

고저가 없는 무덤덤한 어조였지만 채치수의 감상은 진심이었다. 채치수는 정말로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제 오빠와 친한 사이였다고 해도 자신과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연락을 취하고, 그들의 허락을 받아 하나로 엮는 건 전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며칠 전에 한나언니를 만났어요. 두번째가 오빠구요."

송아라가 백팩에서 캠코더를 꺼냈다. 온갖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캠코더는 장난감 같았으나 지저분해 보이진 않았다. 송아라는 옛날부터 집에 있었던 거라며 캠코더를 간략히 소개했다. 어릴 때 엄마가 이걸로 많이 찍어 줬어요. 오빠들이랑 저랑. 추억에 잠긴듯 송아라는 조금 전과 달리 얌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태섭인 잘 지내고 있나?"

당연히 잘 지내고 있을 거라는 대답이 돌아 올 줄 알았으나 송아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캠코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생각에 빠져서 못 들은 건가? 채치수는 설핏 위화감을 느꼈으나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맥없이 끊긴 대화가 머쓱해서 뭐라도 말해야하나 고민하던 차에 커피가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면을 내려다보며 채치수는 송태섭의 얼굴을 떠올렸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믿음직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주장을 맡길 수 있었다. 채치수가 미처 해내지 못한 걸 송태섭은 단단하고 유연하게 해내리가 믿었기 때문에. 입시에 집중하고자 했던 인내가 바닥나 체육관으로 돌아갔을 때 채치수는 제 안목이 전혀 틀리지 않았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송태섭은 어디서도 잘 해낼 거다. 채치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예전에 송태섭이 미국에서 뛴 경기 영상을 봤다. 확실히 수준이 다르더군. 거기서 해나가는 자체로도 잘하고 있는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한참 말이 없던 송아라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일순 위화감을 느꼈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송아라는 포크로 팬케이크 조각을 찍어 한입에 넣었다. 생크림을 찍어 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송아라가 팬케이크를 씹어 삼킬 동안 채치수도 커피를 마셨다. 왼쪽에서 한참동안 시끄럽게 떠들던 무리가 우르르 일어나 떠날 채비를 했다. 그들이 지나가자 담배 냄새가 훅 끼쳤다. 채치수에게 담배는 이해할 수 없는 종류였다. 제 팀에도 몰래 담배는 피는 인간이 있었다. 당사자는 전혀 티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뛸 때마다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장점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유해함의 응집체를 왜 놓지 못하는 걸까. 채치수는 냄새로 인한 불쾌감을 커피향으로 상쇄시키고자 잔에 코를 박았다.

"시작해도 될까요?"

"딱히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당연히 괜찮죠! 근황 얘기도 좋구요."

캠코터에 빨간 불이 들어오며 미세한 기계음이 들렸다. 촬영을 위해 세팅하는 손놀림은 능숙하진 않았으나 어설퍼 보이지도 않았다. 채치수는 대학교 시절을 포함해 경기 전후로 종종 인터뷰를 했다. 처음에는 몸이 바짝 굳은 채로 최선을 다했다는 말만 반복했으나 몇 번 해보니 그런대로 할만했다. 요컨대 지금의 그에게 낡아빠진 캠코더 앞에 서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가 아닌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말하는 건 또 다른 느낌이라, 채치수는 운전하는 내내 고민했더랬다. 얼굴을 못 본지도 족히 5년은 넘은 고등학교 시절 후배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과연 무엇일까.

송아라의 연락을 받았을 당시 채치수의 마음은 거절하는 선택지로 기울어 있었다. 그래서 일정을 확인한 후 연락을 주겠다고 답했고, 송아라는 자신의 출국일자를 알려주며 시간은 언제든 맞출 수 있으니 편히 알려달라고 했다. 채치수는 며칠간 거절의 말을 골랐다. 할 수 있는 말은 다양했다.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하거나, 따로 연락할 테니 연락처를 알려달라며 완곡히 거절하는 방법도 있었다. 전혀 난감할 게 없는데도 채치수는 고민했다. 생각과 달리 좀처럼 전화기에 손이 가질 않았다. 그래도 역시 거절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날 저녁 출장을 앞둔 여동생이 고등학교 시절 얘기를 꺼냈다. 오빠, 그때 기억나? 흔한 물음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채치수를 십여년전의 어느날로 되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채치수는 전화로 송아라에게 전했다. 거절이 아닌, 자신이 그쪽으로 가겠다는 말을.

촬영은 웬만한 인터뷰보다 짧았다. 무작정 인사를 하고 오고가는 질문 없이 스스로 갈래를 잡고 말하는 게 어색했다. 근황으론 조만간 다른 팀으로 옮기기로 했다는 것만 얘기했다. 종종 십여년 전의 우리가 떠오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이에겐 필요없는 말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다음은 누구에게 갈 거지?"

"달재 오빠요. 준호 선배님한테도 전화했는데 받질 않으셨어요. 다른 분들도요."

마지막 말을 꺼내는 송아라의 목소리는 겉으론 평이했지만 어딘지모르게 풀이 죽어있었다. 채치수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권준호의 연락처를 보여달라고 했다. 송아라는 이한나에게 받았던 수첩을 건넸다. 역시 옛날 번호였다. 채치수는 볼펜을 꺼내 권준호의 전화번호가 적힌 칸에 길게 가로줄을 긋고 숫자를 옮겨 적었다.

"권준호는 얼마전에 이사했어. 이쪽으로 전화하면 받을 거다."

고마워요, 오빠. 수첩을 돌려받은 송아라는 언제그랬냐는듯 명랑한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커피잔은 바닥이 드러났다. 접시에 남아있는 거라곤 뭉그러진 생크림 덩어리 뿐이었다. 권준호라면 송아라의 제안을 받아줄 것이다. 권준호는 채치수를 만날 때마다 그 해 여름에 대해 이야기하니까.

청춘이란 언제나 그리워지는 법이다. 이루어지지 않을 법한 일이 어느새 이루어졌던 순간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채치수는 그 청춘이 지금의 제게 큰 힘이 되었다는 걸 안다. 그래서 현실에 가로막혀도 견뎌낸다. 채치수는 자신이 그렇게 나아가고 있듯이 송태섭도 그러하길 바랐다.

"태섭이한테 안부 전해줘."

"그럴게요!"

송아라는 채치수를 향해 팔이 떨어져라 손을 흔들었다. 어째 여동생이 한 명 더 있는 것 같았다. 제게 여동생'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불현듯 송아라가 오빠'들'이라고 한 게 머릿속을 스쳤다. 송태섭에게 남동생도 있나? 채치수에게 동생이라곤 채소연 뿐이라 달리 상상이 되지 않았다. 여동생과 남동생이라면 상당히 피곤했을지도.


권준호

권준호는 3년 넘게 사귄 여자친구와 2년 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당일 중고등학교 동창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찾아와 축하해줬으나, 유독 기억에 남는 건 정작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 한 이들에게서 걸려온 뜻밖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하나, 둘, 셋. 준호형 / 안경군 / 선배님, 결혼 축하해요! / 축하해! / 축하드려요.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고막에 내리꽂는 축하에 권준호는 어안이 벙벙했으나 이내 그들이 누군지 곧바로 알아챘다. 송태섭, 강백호, 그리고 서태웅. 타이밍은 완벽한데 전혀 통일되지 않은 게 너무나 그들다웠다. 권준호는 그들의 막무가내식 축하가 흐지부지되지 않도록 장난으로 응수했다. 전화 잘못거셨는데요. 무뚝뚝한 반응에 수화기 너머로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다. 우렁찬 비명의 주인공은 강백호일 거라고 권준호는 어렵지 않게 추측했다. 우당탕 부서지는 소리와 부산스런 웅성거림에 권준호는 터지기 직전인 웃음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곧 누군가 목을 가다듬는 듯하더니 물어왔다. 큼큼, 여보세요? 그, 권준호 선배님 번호 아닙니까? 그들의 무게를 전부 더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정중한 어투에 권준호는 결국 파안대소했다. 아하하하하하! 나 맞아, 태섭아. 아, 뭐예요-! / 뭐야! 송태섭과 강백호가 동시에 야유를 쏟아냈다. 어찌나 소란스러운지 바로 옆에 있는 듯했다. 서로 멀리 살지 않아? 셋이 용케 모였네. 지금 태웅이네 집이에요. 못 가서 죄송해요.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이렇게 축하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안경군! 허니문은 미국으로 와! 이 천재가 끝내주게 구경시켜 줄테니까! 아, 좀 조용히 해봐! 태웅아, 너도 한마디 해. 결혼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그건 아까 했잖아! 행복하세요. 재미없는 여우놈, 나와봐! 안경군, 이몸이 말이지-! 전혀 정리될 기미가 안 보이는 바다 너머의 상황이 권준호의 눈에 훤히 그려졌다. 결국 통화는 흐지부지하게 끝났지만 그저 목소리 뿐인데도 반가웠고, 멀리 있어도 잘 지내고 있다는 확신이 들어서 안도했다.

권준호가 송아라의 연락을 받은 건 아내의 부탁으로 물러터진 복숭아를 사기위해 온동네 마트를 전전하던 때였다. 권준호의 아내는 약 4주 뒤 출산 예정이었고, 그녀가 무언가 먹고 싶다고 말을 꺼내면 그는 총알처럼 튀어나가 구해왔다. 그도 그럴 게, 그의 아내는 임신 후 부쩍 입이 짧아지고 먹는 양이 줄어든 참에 먹고 싶은 거라도 구해주지 않으면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주변에선 입덧 시기가 지나면 괜찮다고 했건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예외인 모양이었다. 삼시 세끼를 먹는 둥 마는 둥하다가 저녁 8시 뉴스가 시작할 즈음 그녀는 '무르기 직전인 물렁물렁한 복숭아'라 생각난다고 했고, 권준호는 추리닝 차림에 야상 점퍼만 걸친 채로 나와 알뜰코너까지 싹싹 뒤지던 와중 전화를 받은 것이다.

송아라는 자신을 송태섭의 여동생이라며 간략히 소개하며 채치수에게 연락처를 받아 전화했다고 말했다. 송태섭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걸 권준호는 그날 처음 알았다.

송태섭에게 보낼 영상 편지에 참여해줄 수 있냐는 물음에 권준호는 반색하며 흔쾌히 승낙했다. 다만 아내가 출산을 앞둔 탓에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의 사정을 고려해 송아라가 점심시간에 맞춰 회사 근처로 오기로 했다. 권준호는 점심을 사줄테니 근처 식당에서 만나자고 제안했으나 송아라는 가까운 공원이 있다면 거기에서 잠시 만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냈다. 황금같은 점심시간을 길게 뺏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약속 장소는 회사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작은 공원이었다. 권준호는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이나 샌드위치를 포함한 간식 몇 가지와 마실거리를 사서 햇살이 잘 드는 벤치에 앉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선선했다. 떨어지는 낙엽이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권준호는 안경을 벗어 내려두고 잠시 눈을 감았다. 청각에만 의지하자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자연스레 흘러들어왔다.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자전거 바퀴가 콘크리트와 마찰하며 기어가 돌아가는 소리, 노인들의 심심한 담소와 새가 지저귀는 소리…. 간만에 찾아온 여유였다. 약속이 없었다면 이런 여유를 누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터다. 아마 직장인들로 북새통인 식당에 꾸역꾸역 자리잡고서 끼니를 해결했을 테지.

"저기요-, 주무시나요-?"

밝은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권준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권준호는 감고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처진 눈매에 동그란 눈을 가진 여자가 서있었다.

"송아라예요. 준호 오빠죠?"

"맞아. 만나서 반가워, 아라야."

송아라가 악수를 청했다. 내민 손을 권준호는 선뜻 맞잡고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었다. 권준호는 안경을 다시 쓰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옆으로 비껴앉아 송아라가 앉을 자리를 내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송아라는 연두색 니트에 진청색 데님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얼핏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같았다. 이 시간에 나올 수 있는 걸 고려하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밀크티랑 매실차 있는데 뭐 마실래?"

"매실차요!"

"여기. 샌드위치랑 삼각김밥도 있어."

"감사합니당-."

편의점 봉지를 받아든 송아라가 메뉴를 고를 동안 권준호는 제 후배를 떠올랐다. 까마득한 기억 너머로 부옇게 남아있던 송태섭의 얼굴이 점점 선명해졌다. 여동생이라니. 권준호는 새삼 알고 지낸 시간에 비해 송태섭에 대해선 아는 게 그다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 끝에 송아라는 계란 샌드위치를 골랐다. 송아라가 포장을 뜯어 한입 베어무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권준호도 자신이 먹을 메뉴를 골랐다. 가츠 샌드위치와 참치 삼각김밥이었다. 잠시 대화는 미뤄두고 짧은 식사시간을 가졌다. 햇빛을 머금은 적당한 바람이 기분좋게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마치 소풍을 나온 듯했다.

식사가 끝날 즈음 권준호는 미처 선택받지 못한 초코바를 꺼내 송아라에게 건넸다. 송아라는 빨대로 매실차를 빨아들이며 왼손으로 초코바를 받았다. 권준호는 대화의 공백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편안했다. 아, 좋다. 초코바까지 먹어치운 송아라가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보다 먼저 한 사람 있니?"

"한나 언니랑 치수 오빠요."

"치수는 의외네. 낯간지럽다고 안 할 줄 알았는데."

"직접 와주시기까지 했는걸요."

송아라는 가방에서 자기 손바닥보다 조금 큰 캠코더를 꺼냈다. 잠깐 구경해도 돼? 권준호의 부탁에 송아라는 기꺼이 캠코더를 건넸다. 캠코더는 세월감이 가득한 데에 비해 붙어있는 스티커는 새것에 가까워 보였다.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거야? 맞아요. 스티커는 네 작품이지? 오빠 보는 눈이 있네요. 하하, 내가 좀 보는 눈이 있지. 권준호는 너스레를 떨며 미세하게 일어난 스티커 하나를 티나지 않게 엄지로 지그시 눌렀다. 샛노란 번개 모양의 스티커였다. 연보라색 리본과 하얀색 곰돌이 스티커와는 주제가 달라 보였으나 쌩뚱맞진 않았다. 캠코더는 다시 제 주인에게 돌아갔다. 송아라는 전원을 켜고 이리저리 비춰보며 화면을 점검했다.

"어떻게 찍으면 잘 나올까?"

"으음-. 단풍이 있어서 이대로 찍어도 잘 나올 거 같아요. 잠시만요."

송아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섯 발자국 가량 가재걸음을 쳤다. 상체를 뒤로 빼며 구도를 맞추는가 싶더니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엄지를 치켜 세웠다.

"대박! 그대로 가요!"

"바로 찍는 거야?"

"오빠만 괜찮다면요!"

"잠깐만."

권준호는 급히 옷매무새를 다듬고 머리를 정돈했다. 안경도 한 번 더 올리고 편의점 봉투는 발치로 옮겼다. 준비를 끝마쳤다는 의미로 권준호가 엄지를 내보였다. 시작할게요! 시이-작! 상쾌한 구호가 공원 한 켠에 울려퍼졌다.

촬영 내내 가을 바람이 은은하게 불었다. 왁자지껄 뛰노는 아이들도 여전했고, 나뭇가지 위에 옹기종기 모인 새들은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권준호의 목소리와 크고 작은 소음들이 영상에 고스란히 담겼다. 기껏 해야 특별할 것 없는 근황과 응원이 전부지만, 엉망진창이었던 언젠가의 통화처럼 마음만은 잘 전해지리라.

마지막 인사를 끝마칠 즈음 권준호의 머리칼에 새빨간 단풍잎이 내려앉았다. 오갈래로 뻗은 선명한 불꽃이 언젠가의 여름을 떠오르게 했다. 권준호는 품에서 카드 지갑을 꺼내 카드와 명함 사이에 단풍잎을 끼워넣었다.

"잘 나왔어?"

"네! 시간내주셔서 감사해요."

"아냐, 오히려 내가 고맙지."

점심 시간은 반시간 가까이 남아있었으나 송아라에게 일정이 있는 관계로 빠르게 헤어졌다. 송아라는 미국에 가서 영상 편지를 직접 가져다 줄 생각이라고 했다. 와, 대단하네. 곧장 튀어나온 감탄에 그녀는 가지런한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분명 태섭이도 좋아할 거야. 권준호는 확신에 가득찬 말을 덧붙였다. 송아라는 여전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등학교 시절, 무지막지한 녀석들 사이에서 권준호는 특출난 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선수였다. 권준호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체력을 키우고 싶어서 시작한 게 하필 농구였다. 그러니 농구만을 위해 뛰어든 이들의 특별함과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한계를 아무렇지 않게 수긍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권준호는 재능과 열정이 비례관계에 있는 이들을 볼 때마다 감탄하는 동시에 부러웠다.

하지만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느냐 묻는다면 절대 아니었다. 권준호에겐 끈기가 있었다.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존재를 알 수 없는 잠재력이 응해주기를 바랐다기 보다, 그저 매순간 최선을 다했다.

권준호는 취직한 이래로 농구를 완전히 그만뒀다. 대학교 시절 농구 동아리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길거리 농구에 가까웠고, 그마저도 술 모임에 밀려 흐지부지 되었다. 언젠가 농구를 하는 것보다 보는 게 더 익숙해졌다. 결혼을 하고 아내가 임신을 한 뒤론 그마저도 어려웠다. 좋아해 마지않던 것과 멀어지는 건 흔한 일이다. 농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두근거림을 따라가면 언제나 열여덟 살의 여름에 다다랐다. 뜨겁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인데도 권준호는 제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느꼈다.

언젠가 아내가 말해준 적이 있다. 매사 잔잔히 흘러가는 당신은 유독 농구 얘기만 하면 눈이 반짝인다고. 단순히 추억을 말한다고 하기엔 농구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같다며. 권준호를 만나기 전까지 농구는 공을 던지는 운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그녀였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농구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니. 권준호는 제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런 엄청난 이유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농구를 좋아했으니까. 특별함과 평범함이 구분이 모호해질 만큼 최선을 다했으니까.

권준호는 아내가 주었던 수식어를 지금 생각나는 누군가의 이름 앞에 붙여보았다. 농구를 하기 위해 태어난 송태섭. 참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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