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놀

교정교열.

백호열

활자 안에서는 모든 것이 분별 없이 물결친다.

 

백호의 첫 음절은 첫 숨에서부터 약 백여일 전후. 분이 떨어지는 나비보단 참매미의 덩이줄기 벼린 것 같은 날개가 부벼지며 나는 뭉특한 옹알이. 살덩이 두개를 마찰시켜 낸 최초의 시이다. 벚나무 아래를 포대기에 쌓인 채 산책하는 백호는 타고난 문학가이다. 노을에서는 붉은 홍옥을 보고 베어문 과육 시큼한 냄새에서는 연꽃의 뽀족함을 느낀다. 연근의 구멍으론 날것의 거품을 떠올리고 머리를 자르기 전 떼어낸 비늘에선 무지개를 그린다. 모친태중 들었던 모든 소리를 기억한다, 그에게 남아있는 온갖 무던함은 배 갈라 나올 때 허파가 찔린 것 같이 들이닥치는 공기의 침입 외엔 없다는 듯, 모든 것을 비유하고 은유하고 앵알거린다. 처음 표를 붙인 모든 날이 백호에겐 노래로 다가온다. 깃털을 머리에 꽂아놓고서 엉금엉금 기어다닌 갓난쟁이 때를 거쳐 규격을 따른 테두리를 만드는 순간 노래는 모양을 갖춘다. 절차와 예법 엄격한 준수법칙 같은 것이 음악의 제조법을 나열시킨다. 그러나 문학가라는 것은 규칙을 안다는 것과는 아주 먼 거리를 둔 사람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백호는 그 이후로 글자의 옷을 입은 음악과는 결별을 선언한다. 자신도 모르는 일별이다. 그것이 슬픈가, 모르겠다. 모른다는 일은 속이 편하다는 말과 결을 같이 한다. 짜맞춘 나무 궤 안으로 그가 그간 그렸던 모든 음악이 단어를 잊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제각기 모양은 달랐지만 동작만은 일정했다. 하나같이 백호의 말이기 때문에. 하나의 존재에서 수천가지 말이 나온다 한들 그 뿌리는 깨엎어질 수 없다. 알록달록하지만 모양은 엇비슷한 웅크린 털뭉치들이 그의 가슴에 순서를 지켜 쌓이면 일순간부터 백호는 넣어둔 시를 꺼내고자 한다. 서투른 열정 탓이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가슴 안에만 넣어두었던가? 그 우림을? 타고난 노래를? 손가락으로도 꺼내지 못한 음을 입으로 꺼낼 수 있을리가 만무하니 백호는 연필을 굴려 때늦은 규격을 익힌다. 하나같이 엉겨붙고 더부룩하고 불편한 나열의 연속. 배운 적이 없으니 틀린 곳을 모른다. 익히기에 재주가 있다 한들 마음이 가지 않으면 하지 못하는 백호는 애가 닳는다. 시간을 보내며 지우고 적고 고치다 버리고 새 종이 꺼내 되짚는다 한들 나아지는 일이 없다. 처참하다. 베끼려 한들 기르지 못한 안목이 제대로 된 충고를 줄리 없어 포기한다. 맴도는 흑연가루만이 백호의 중지손톱 옆 비뚜름하게 딱딱해진 살갗 위에 문질러지며 흔적을 남긴다.

 

마음을 고치는 데에 가장 쉬운 방법은 글을 쓰는 것이다. 백호의 지우개 달린 연필은 싸구려이고, 촌스러운 무늬가 그려진 편지지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만큼 쉽게 버려진다. 어째서일까, 글을 적으면 적을 수록 늘기보단 허전하기만 하다. 그것이 누구의 책임이냐 묻는다면, 백호는 당연지사 누구의 책임도 아니거니와 정 따지자면 하늘의 탓이라는 무도한 발언 하겠지만, 누구도 그에게 어떤 말도 붙이지 않는다. 어느 시기에 딱 멈춰버린 발언이기 때문일지도. 순전히 말을 섞기 싫어서일지도. 그래도 백호는 계속해서 글을 적는다. 마냥 뭉쳐놓은 채 두기엔 가슴 속이 심하게 뜨거워서 견딜 수 없어서. 누구에게든 이 말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답답함이 박힌다. 백호는 한참을 웅크려 적다가 못이기고 첨삭을 부탁한다. 

호열은 백호의 우편에 앉아 한참 글자를 읽어내린다. 단정치 못한 모양을. 속어와 애원을. 한숨을. 그리고 말한다. 너어, 여기에 너무 마음을 쓰는거 아니냐?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는 않아. 그리곤 새 편지지를 꺼내다가 활자를 덧붙인다. 네 글에는 이런 표현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호열은 육각으로 선이 그려진 싸구려 연필을 굴리면서 비등비등한 단어의 우물을 퍼올린다. 호열이 지우개 붙은 연필의 꽁지로 잘 넘긴 뒷머리를 긁어 헤집으면, 너나 나나 별반 다를게 없다는 사실을 까먹었어, 따위의 실없는 소리를 할 차례다. 백호는 실망도 탄식도 붙이지 않고 책상 아래로 호열의 정강이를 툭 치기나 했다. 호의로 이룬 몇 번이 지나고 의무에 비슷한 단계에 오면, 백호도 꽤나 그럴듯한 문장을 구사하는 사람이 된다. 도드라지는 빨간 펜이라던가 돼지꼬리 따위의 교정부호가 없이 순전히 귀와 입으로만 전달하는 교열법은 백호에게 딱 들어맞는 시론이었다. 한결같은 음박의 균열에서 백호는 편안하게 활자를 그린다. 좋은 문장이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적는 것 자체로도 나은 때가 있다. 소리는 노래하고 치아와 혀는 맞붙어서 틀을 만든다. 이해하기 좋은 글자와 그렇지 못한 글자 사이에 선을 그어 단정한 활자를 일군다. 호열이 책을 들추는 시간이 늘어난다. 유치한 로맨스 소설이 주된 물건이다. 가끔 동급생 여학우에게서 추천 받은, 사내아이가 읽기에 께름직한 것도 거침없이 읽어서 좋아보이는 글자를 찢어놓은 노트 한 장에 잘 적어두기도 한다.

 

노을. 교실에 남은 백호는 먹으로 단정하게 선 그은 것 같은 이마의 면을 보다가 여기 읽어줘. 한다. 오 년이 넘도록 백호의 글자는 호열이 본다. 첫 인사부터 마지막 이름까지 되짚어 돌려준다. 하나씩 오가는 말이 줄 때 즈음 호열이 백호에게 더이상 고칠 글이 없어, 한다. 백호는 호열을 보다가, 아냐, 있어, 한다. 호열은 미간에 얕은 골을 새긴 채 다시 한번 글줄을 읽어내린다. 오분여를 공들인 뒤에야 말한다. 이름이 없구나. 받는 사람 말이야. 정확하게 두 줄 비어있는 간지러운 마음의 산문시 꼬리를 연필 끝으로 툭툭 건드리는 호열에게, 백호는 편지를 받아 잘 접었다. 그리고 파스텔빛 편지지에 넣어 딱풀로 모서리만 가볍게 대어 뜯기 좋은 포장처럼 만들었다. 내민다. 호열이 백호를 본다. 백호가 호열에게 다시금 배부른 봉투를 내밀었다. 싸구려 편지지는 버리기 쉽다. 호열은 그것을 안다. 이녀석, 버리는 것 까지 시키고. 중얼거리며 편지 받아 일어나려는 호열의 가쿠란 끝자락을 붙잡는 손톱 옆 살은 지저분한 흑연자국. 네 거야. 글자로 재차 전하기에 봉투는 닫혔고 엎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서있는, 가라앉는 열에 뒤엉킨 얼굴이 백호를 내려다본다. 백호는 호열을 올려다보며 인 찍어 말한다. 네 거라고. 불타는 마음은 진보랏빛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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