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백호+북산고] 다시 꽃이 피면

"여기야! 여기!"

완연히 핀 큰 벚나무 아래, 벚꽃에 지지 않는 붉은 머리칼이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대여섯은 충분히 앉을 수 있는 커다란 돗자리를 차지한 백호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손을 붕붕 흔들었다. 저 자리는 큰 벚나무가 멋들어지게 가지를 늘어트리고 있어서 벚꽃이 피기 전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치열하게 노리는 자리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 자리를 백호가 떡하니 지키고 있었다. 꽃놀이 도시락을 든 치수가 짧은 웃음을 내뱉었다. 꽃놀이 할 때 자리는 걱정하지 말고 먹을 거만 챙겨오라고 하더니 이런 이유였나. 옆에 선 소연이는 감탄 어린 얼굴로 백호가 차지한 자리로 갔다.

“정말정말 멋지다! 고생 많았어, 백호야."

소연의 칭찬에 백호가 커다란 덩치를 웅크리고 헤헤 웃었다. 하여간 소연이 저 녀석 백호 녀석에 약해 가지곤. 치수는 손에 든 도시락을 소연에게 넘겨주면서 돗자리에 자리 깔고 놓으라고 하고 보낸 후 백호의 어깨를 잡았다.

"언제부터 여기에 자리를 펴 놓은 거냐."

주변 회사나 대학에서도 꽃놀이 장소로 이 자릴 노렸을 텐데. 치수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닌 게 아니라. 백호 때문에 밀려난 건지 좀 떨어진 곳에 넓은 자리를 깔고 앉은 이가 이쪽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음-. 치수의 질문에 백호가 눈을 도르륵 굴렸다.

"어제부터."

짧은 대답에 백호의 어깨를 잡은 치수의 손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어제 언제부터."

제대로 말하라는 무언의 압박에 백호가 머뭇거리다가 결국 대답했다.

"…어제 새벽부터."

하루하고 반나절 가까이 여기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단 소리였다. 치수의 얼굴에 백호가 쭈뼛쭈뼛 말을 덧붙였다. 고릴 나 위험한 짓 안 했다? 새벽에 자리 비어있어서 돗자리 깔고 버티고 있었던 것 뿐이라고. 글구 나 혼자만 이러고 있었던 건 아니고 호열이랑 구식이랑 대남이도 번갈아 가면서 자리 잡아줬고 그, 밤중엔 다들 같이 밥 먹고 벚꽃도 구경하고 있었어. 위험한 짓 안 하고 무리하게 혼자 버티지도 않았다는 말에 치수도 더 뭐라 할 순 없었다.

"이렇게 자리 잡을 거면 나한테 전화라도 해라."

같이 꽃놀이 할 거 아니었나. 그럼 이런 것도 같이 해야지. 치수의 말에 백호가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 씩 웃었다.

"알았어!"

그나저나 도시락 뭐야? 나 배고픈데 먼저 먹으면 안 돼? 다른 녀석들도 와야지. 치수가 가져온 도시락을 노리는 사이 다음 인물이 천천히 다가왔다. 큼직한 도시락 가방을 든 인물은 먼저 와 있는 이들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치수야, 소연아, 백호야."

"안경선배!"

"준호 오빠 오셨어요."

"어서 와라, 준호야."

백호는 커다란 도시락 가방을 보고 신나서 뛰쳐나갔다. 뭐야? 뭐 가져왔어? 나 살짝 구경하면 안 돼? 하하, 다들 오면 열어보자. 백호가 옆에서 도시락을 노리고 기웃대는 것을 자연스럽게 막은 준호는 치수가 가져온 도시락 옆에서 자신이 들고 온 가방을 두었다. 

"다른 얘들은 아직 안 왔나 보네."

준호가 아직 허전한 자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곧 약속 시간이니 오겠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쪽으로 익숙한 얼굴들이 왔다. 어머, 벌써 오셨어요? 한나가 커다란 보온병과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오고 있었다. 그 뒤로 달재와 오일이, 병욱이가 같이 오고 있었다. 다들 약속대로 먹을 것을 들고 오고 있었다.

달재, 그거 뭐야? 어, 샌드위치- 나 좀 만 줘. 백호는 맘 착한 달재에게 엉겨 붙어서 결국 샌드위치를 얻어먹었다. 백호가 달재 옆에서 샌드위치는 념념 먹고 있을 때였다. 호식이와 재훈이 둘이서 큰 비닐봉지를 영차영차 들고 오고 그 뒤로 중식이 도시락으로 보이는 큰 가방을 들고 오고 있었다. 무거운 모양새에 다들 같이 옮겨주었다. 봉지 안에는 온갖 종류의 음료수와 과자가 담겨있었다.

"얼마나 가져온 거야?"

편의점을 털었니? 한나의 말에 재훈이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저희 부모님이 슈퍼 하시거든요. 꽃놀이 간다고 하시니까 많이 먹을 거라고 이거저거 챙겨주셔서. 

중식이가 가져온 것은 이런저런 빵과 샌드위치였다. 이거 역 근처 빵집 샌드위치 아냐? 이거 맛있는데. 소연이가 샌드위치 포장을 보고 말했다. 맞아요, 우리 집이에요. 정말? 어머나, 나 거기서 빵 많이 사는데. 그렇게 와글와글 떠들고 있을 때 묵묵하게 다가온 이가 있었다.

"태웅아!"

먼저 알아챈 소연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서 와! 한나의 인사에 묵묵히 고개를 숙인 태웅은 가져온 도시락 가방을 건넸다. 분홍색이 귀여운 찬합 도시락이었다. 여우 자식 안 어울리게. 백호가 입술을 삐죽였다. 다들 가져온 도시락과 먹을 것은 돗자리 한 가운데 모아놓았다. 한 사람이 분홍색 도시락통을 보고 저거 저 녀석 거 아닐 거라는 이상한 주장을 펼쳤지만 분홍색 도시락은 다른 사람들 도시락 옆에 얌전히 놓이게 되었다.

태웅이가 오고 바로 태섭이가 도착했다. 태섭은 이미 한자리를 두둑이 차지한 도시락과 먹을 것에 질린 얼굴을 했다. 

"뭐 여기서 잔치 할 거예요?"

좀 적게 가져왔나 싶었는데 잘 된 건가. 태섭이 다른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작은 그러나 그래도 큰 도시락 가방을 내려놓았다.

"이 인간은 왜 안 와?"

이제 올 사람은 다 왔는데 한 사람이 안 왔다. 오겠다고 통화했는데 잊어버렸나? 이 녀석 집에 가봐야 하나? 그런 말을 할 때 즘에 누군가 달려왔다. 만만쓰!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백호가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벌떡 일어났다.

"만만쓰 배고프다고!"

“늦었다. 정대만.”

"왜 이렇게 늦어요."

"차 막혀서 늦었다, 왜!"

지각자가 당당하게 외쳤다. 그리고 약속 시간에서 10분도 안 지났잖아. 이거 사 오느라고 늦었다고. 대만이 손에 들고 있는 쇼핑백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며 말했다.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쇼핑백 다들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뭔데요?"

"XX백화점 OO의 꽃놀이 기간 한정 벚꽃이 올라간 삼색 당고다."

나 이거 한 시간 동안 줄 서서 산 거다. 어때? 자신만만한 얼굴에 태섭이 대놓고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대만이 자신만만하게 가져온 쇼핑백도 도시락들 옆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올 사람들은 다 온 셈이었다. 도시락을 얼른 열자는 요청에 맨 먼저 온 치수의 도시락을 열었다. 우와아. 뚜껑을 열자 환호성이 터졌다. 귀엽고 화사한 도시락이었다. 동글동글한 주먹밥에 길게 자른 김을 둘러 농구공 모양을 하고 있었다. 주먹밥 사이사이 녹색 브로콜리와 방울토마토가 곁들여져 있었고, 중간중간 주먹밥 위에 올라간 분홍 꽃은 얇게 썬 햄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 밑 찬합은 스프링롤과 한 입 사이즈로 동글동글 튀겨진 돈가스가 삼색 어묵과 같이 들어가 있었다. 잘 쌌지만 화사하고 예쁜 위 찬합에 비하면 딱 봐도 허술해 보였다. 그걸 보고 백호가 자신만만하게 잘 만들 도시락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거 소연이가 만든 거지?”

엄청 예쁘고 맛있어 보인다. 그렇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도시락을 보고 있는 백호 뒤로 치수가 조용히 다가와 섰다. 

“내가 만들었다.”

엥? 거짓말! 거짓말 같으면 먹지 마라. 치수와 백호가 투닥거리는 사이 나머지 사람들이 서로서로 도시락과 가져온 음식들을 펼쳐놓기 시작했다. 달재와 중식이가 가져온 샌드위치와 빵을 한쪽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준호가 가져온 도시락을 열었다. 2단으로 된 도시착의 첫 번째 칸은 전부 큼직큼직한 주먹밥이었다. 내용물은 갓이랑 명란이야. 준호가 즐거운 얼굴로 말했다. 야채 하나 없이 주먹밥으로 가득 찬 첫 번째 칸 아래에는 닭튀김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정직하게 탄수화물과 단백질이 가득한 전형적인 남고생 도시락이었다. 수가 많으니까 든든하게 챙겨 왔어. 그렇게 말하는 준호는 보며 한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 사람 섬세하면서 이상한 부분에서 털털하다니까.

그 다음에는 태웅이가 들고 온 도시락을 열었다. 치수랑 투닥거리던 백호도 라이벌의 도시락을 구경하기 위해 고개를 쭉 빼고 섰다. 분홍분홍한 뚜껑을 열자 차곡차곡 들어간 유부초밥이 보였다. 각 유부초밥 위에는 잘게 썬 달걀지단, 게살 마요네즈, 불고기, 닭고기 소보로가 색색이 얹어져 있었다. 그런 유부초밥이 2단 가득 담겨 있었다. 어머, 예뻐라. 한나가 감탄했다. 맛있어 보인다, 태웅아. 소연이 놀라운 얼굴로 말했다. 여우 자식 누가 여우 아니랄까 봐 유부초밥 챙겨왔네. 소연의 감탄에 백호가 공연히 핀잔을 내뱉었다.

“이야. 도시락 어머니께서 싸 주신 거냐?”

이거 손 많이 갔겠다. 태섭이 유부초밥을 보며 말했다. 태웅이 과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같이 했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많이 싸주셨어요. 많이 드세요.”

깍듯하게 말한 태웅은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백호를 바라보았다. 멍청이, 너도 먹어. 안 말해도 먹을 거거든! 다들 익숙하게 싸우는 둘을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펼쳐놓은 도시락 사이에 한나가 커다란 보온병에 챙겨온 차를 두는 걸로 먹을 준비가 다 되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요란한 합창이 끝나자마자 모두의 젓가락과 손이 바쁘게 음식을 향했다. 어머, 맛있네요? 한나가 커다란 준호의 주먹밥을 한 입 먹고 감탄사인 탄성을 내뱉었다. 맛있지? 직접 만든 갓 절임을 넣은 거야. 많이 있으니 잔뜩 먹어! 준호가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백호는 양손에 샌드위치와 빵을 들고 두 볼 가득하게 우물거리고 있었다. 야, 그러다 체한다 마시면서 먹어라. 태섭이 그런 백호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소연이는 달재가 싸 온 유채 샌드위치를 먹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거 맛있어요! 아삭아삭하고 담백해요. 소연의 칭찬에 달재가 머쓱하게 웃었다. 맛있어? 우리 누나가 봄이면 늘 만드는 거야. 정말 맛있어요. 혹시 어떻게 만드는지 알려 주실 수 있으세요? 달재와 소연이가 샌드위치 레시피에 대해 이야기 하는 동안 한나는 중식이가 가져온 샌드위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치수는 태웅이가 가져온 유부초밥과 준호가 가져온 주먹밥을 덜어서 천천히 먹었다. 

그 때, 긴 바람이 불면서 가지를 흔들어 만개한 벚꽃이 꽃잎을 떨어트렸다.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이들이 말을 멈추고 푸른 하늘에 비처럼 떨어지는 작고 부드러운 꽃잎을 바라보았다. 

“고릴, 좋지.”

치수는 옆을 바라보았다. 짧게 깎았던 머리는 이젠 제법 길어져 있었다. 처음 양아치 같았던 모습에서 이제는 스포츠맨의 모습을 한 녀석은 제법 어른스러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일 년 사이에 정말 많이 변했다. 백호도 자신도 이 농구부도. 짧으면서 빠른 시간에 치수는 새삼 놀랐다. 하지만 그런 기색을 삼키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


가져온 음식들이 많았지만 운동하는 남고생들의 위장에는 거뜬한 양이었다. 어느새 도시락을 깨끗이 해치우고 다들 대만이 가져온 당고를 하나씩 입에 물었다. 달콤한 앙금과 은은하게 벚꽃 향이 나는 살짝 짭짤한 절임이 잘 어울렸다. 어때, 맛있지! 대만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좀 재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다들 별 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간식까지 먹고 좀이 쑤신 녀석들이 근처 자판기까지 달려가서 늦게 도착한 녀석이 음료를 쏘는 내기를 하고 있었다. 기운 넘치는 녀석들 같으니. 치수는 뛰어가는 녀석들을 흘끗 보고는 웬일인지 참여하지 않은 백호에게 다가갔다. 백호는 다가온 치수를 올려다보았다.

“강백호.”

“응? 왜, 고릴?”

“왜 꽃놀이 하자고 한 거냐.”

벚꽃 보는데 이유가 있어? 고릴 낭만이 없어. 백호는 그렇게 말하다가 치수에게 꿀밤을 맞았다. 아파, 고릴! 엄살을 부리는 백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음 인터하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서 대표단에 뽑힌다 어쩐다 하면서 연습하던 녀석이 나랑 준호 대학 발표 나오자마자 갑자기 이런 준비를 하면 뭔가 이유가 있을 테니까.”

치수의 말에 백호가 엄살 부리던 것도 멈추고 머리를 긁적였다. 들켰네. 그렇게 말하곤 머리를 긁던 손을 떨구었다. 

“이제 마지막이니까.”

고릴도 안경선배도 만만군도 졸업해서 가니까. 마지막으로 같이 벚꽃을 보고 싶었어. 그 것 뿐이야. 아까보다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턱.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이 얹어졌다. 커다란 손을 머리칼을 북북 쓰다듬었다. 무슨 짓이야, 고릴! 치수는 백호의 항의를 듣는 둥 마는 둥 머리를 더 헝클이고는 백호 옆에 털썩 앉았다.

“뭐가 마지막이냐.”

어? 백호는 옆에 앉은 치수를 보았다. 치수는 이제 음료를 잔뜩 뽑아서 들고 오는 녀석들을 보며 덤덤히 말했다.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겨우 졸업해서 대학 가는 거 가지고 청승 떨지 마라.”

대학 가서도 너희들 연습 봐주러 가끔 방문할 거다. 준호랑 대만이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니까 걱정 말아. 그리고 원래 그러라고 있는 OB니까. 너도 이제 선배가 될 테니 후배들에게 잘 해주고. 다치지 말고. 연습하기 전에 확실하게 몸 풀고. 길게 잔소리와 걱정을 늘어놓던 치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내년에 벚꽃 보러 오자.”

내년에 들어올 후배들도 같이. 얼마나 들어올는지 모르겠지만. 백호는 멍하니 내년을 이야기 하는 치수를 보았다. 황급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은 하늘이 눈부셔 슬쩍 눈물이 났다. 백호는 부신 눈을 깜박이고 가장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응! 알았어!”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 준호가 다가와 물었다. 벚꽃 이야기 했어. 백호가 냉큼 대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치수는 별 말 하지 않았다.

음료를 사러온 녀석들이 돌아와서 잠시 한적했던 자리가 다시 시끄러워졌다. 그 위로 벚꽃이 조용히 떨어지고 있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캐릭터
#강백호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