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당신의 눈동자와 편지에 대해서

눈을 들여다 보세요.

부스럭부스럭 편지를 뜯는 명헌의 손길이 그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떨리는 마음으로 펼친 편지를 훑어보는 명헌의 눈가는 여느 때와 달리 조금은 거뭇했고 풍기는 기색은 음울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편지에서 눈을 뗀 명헌이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바라보다 다시금 시선을 내려보면 보는 이의 간절한 마음 따위는 모르는 듯 처음과 같은 모습의 편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

명헌이 형에게.

형 잘 지내고 있어요? 저는 잘 지내요.

오늘도 부상 없이 경기를 무사히 마쳤어요. 여기서 농구하다 보면 가끔 산왕 시절이 떠오르곤 하는데 형도 그런지 모르겠네.

회식한다는 거 안 한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편지를 써요.

미국 음식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왜 아직도 느끼한건지... 형은 잘 먹고 잘 자고 있어요?

그랬으면 좋겠다.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죠?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그럼, 다음에 편지할게요.

명헌이 형 사랑해요.

우성이가.

***

우성과의 관계가 연인이라는 단어로 정의되길 10년.

선후배로 시작된 인연이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것은 자연의 이치와도 같이 자연스러웠고 또한 당연했다. 처음부터 우성을 이성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그저 농구 할 때면 온 세상의 빛을 끌어안은 듯 보이는 그 아이의 눈이 신기해서 계속 바라보던 것이, 저도 모르는 새에 마음 한편을 내주는 일이란 걸 알기엔 너무나도 어린 나이였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다들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어여쁘고 신기해서 보기만 해도 즐거운 것을 만났던 적이. 제게 있어 정우성이 그랬다. 예쁘고 신기해서 바라만 보고 있어도 즐거운 것, 그래서 갖고 싶은 것. 처음에는 그 감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마치 까마귀가 반짝이는 것을 보면 달려들 듯, 아름다운 것을 향해 시선이 가는 것 또한 인간의 당연한 본능이라 생각했었으니까.

다만, 그 애의 기쁨을 바라고 슬픔을 가져오고 싶단 마음이 보통의 선후배 간에서는 생각조차 될 수 없고 정작 제가 생각해 봐도 다른 사람들에겐 적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땐, 아무리 덤덤한 저라고 해도 혼란스러워 머리를 싸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첫사랑은 마치 그 주인을 닮은 것처럼 강렬하고 반짝이며 사랑스럽게 제 일상을 하나씩 차지해 갔고, 이는 스스로 세워뒀던 계획들 또한 하나둘 망쳐놓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단연코 으뜸이라 할 수 있는 건 미국 원정이 정해지고부터 마음 정리하던 저를 어떻게 알았는지 우성이 홀라당 고백해 온 것이었는데, 생각해 본 적 있는가? 간절히 원했으나 절대 얻지 못 하리라 여겨왔던 것이 저를 향해 쏟아질 때 어떤 기분인지.

그날 벅찬 마음으로 인해 기억나는 것은 몇 안 되었지만, 우성이 그날 떠 있던 달보다 크고 반짝였던 것은 마음속 깊이 남겨져 있었다. 관계가 정의 되니 행동으로도 숨길 수가 없어졌고 덕분에 모두가 알게 되었던 날, 현철이 물었었다. 정우성의 어디가 그리 좋냐고. 그때 뭐라 답했더라?

“... 눈동자에 마음이 그대로 비치는 게 꼭 윤슬 같아 예쁘다고 했었나…. 지금은 알 수 없어졌지만용….”

연애 기간 10년, 함께한 것은 그 반년도 채 되지 못할 것 같은 기묘한 연애. 곧 30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연인에게 연애 초반 때와 같은 마음과 표현, 설렘을 바란다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는 잘 알고 있다. 그래, 역설적이게도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허탈한 것이다. 정우성이라면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또, 수 없이 많이 봐왔던 다른 사랑들과 우리의 사랑은 다르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조금씩 줄어들었던 편지 속에 담긴 우성이 희미해져 갈 때마다 각오했던 일이었지만 내가 가진 온도보다 낮은 온도의 연인을 마주하는 것은 각오 따위로 버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명헌은 오늘도 제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외로움을 홀로 삼켜 냈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지펴진 불씨는 우성의 유학으로 인해 금방 꺼지게 될 줄 알았건만 더욱 거세게 불타올라 결국은 29살이 된 지금에도 둘의 관계에는 연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었으니까. 한창인 나이대의 연인이 떨어져 지내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우성의 유학이 꼭 필요하다는 판단은 어린 나이임에도 할 수 있는 것이어서, 두 사람은 헤어질 걱정을 하며 울기보단 서로의 흔적을 쫓을 방법을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성인이라면 몰라도 아직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란 얼마 없었는데 좁고 좁은 선택지 안에서 두 사람이 고른 것은 바로 편지였다. 통화는 외국이다 보니 전화세가 걱정이고 보고 싶을 때마다 가는 것은 비행기 값이 무리였으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꽤 마음에 드는 결과였다. 통화는 어차피 시차 때문에 서로에게 맞는 타이밍을 맞추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비행기는…. 각자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 장시간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마치 편지만이 최선인 듯 바라보며 어린 나이의 무력함을 애써 지워냈더랬다.

성인이 되고 각자의 벌이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꿋꿋이 이어 나간 것은 가진 게 서로를 향한 마음뿐이었던 그때를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것이었지만 명헌은 그 고운 마음으로 내린 결정이 미래의 자신에게 이런 방식으로 꽂힐 줄 알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 전에는 어땠더라….”

멍하니 되뇐 명헌이 일어나 바인더를 꺼내 열어보자 두 사람의 긴 연애를 증명하듯 여러 장의 편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

명헌이 형에게.

형! 보내준 편지 잘 읽었어요! 저는 이제 조금 적응된 것 같아요. 영어는 아직 어렵지만 그래도 행동으로 어느 정도는 말이 통해서 그런지 농구 할 때 큰 어려움은 없거든요.

형이 걱정한 것처럼 차별도 없고 다들 농구를 잘해서 하루하루가 즐거워요.

다만 형을 볼 수 없다는 게 힘들긴 하지만 형도 그럴 테니 잘 참아내 보려고요.

오늘은 햇빛도 쨍쨍해, 아마 밖에서 농구 하게 될 것 같은데 미국은 실내에서도 농구를 많이 하지만 실외에서도 많이 하더라고요? 조금은 다칠 위험성이 있지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하는 농구는 그 나름대로 매력이 있어 좋아해요.

형은 오늘 어떻게 보냈어요? 밥은 잘 먹었어요? 잠은요? 이제 곧 있으면 수능인데 형이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형은 그게 뭐든 늘 잘 해냈으니까.

뭐, 잘 해내지 못하더라도 어때요. 미래 농구 스타가 있는데? 장난이고 저는 나이를 많이 먹어서도 형하고 농구 하고 싶으니까, 형도 형이 할 수 있는 최고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건방진가 싶지만 그래도요.

더 쓰고 싶은데 너무 긴 건 읽기가 불편하다고 했으니까 이만 줄일게요.

명헌이 형 사랑해요.

우성이가.

***

명헌이 형에게.

형이 보내준 편지 잘 읽었어요! 대학 합격 축하해요!

내가 말했죠? 형이라면 잘 해낼 거라고 했잖아요! 졸업식도 못 가고 형 대학 붙은 것도 축하하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그래도 형이 기뻐하는 게 편지에서 느껴져서 그걸로 충분해요. 형이 노력해서 올라가는 것만큼 저도 노력해서 열심히 올라가 볼게요.

요즘은 실내보단 실외에서 농구를 많이 하고 있어요. 저번에 말했던 거 기억나죠?

실외 농구, 꽤 마음에 들더라고요. 같이 할 사람 없이 가더라도 혼자 농구공을 가지고 놀고 있으면 누구라도 와서 함께 하자고 하는데 매번 알 수 없는 상대와 농구를 하다 보니 대처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애먹게 되긴 하지만 덕분에 눈치가 빨라져서 조금 더 다채롭게 수비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영어 공부는 매우 어렵긴 한데 회화부터 해서 그런가? 그래도 해볼 만은 한 것 같아서 조금 안심인 거 있죠? 다행히 샘이랑 크리스가 도와준다고 해서 걱정은 덜었어요.

형은 어때요? 이제 성인이라 술도 마실 수 있고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만날 텐데 설레요? 다른 건 다 좋아도 형이 술은 안 마셨으면 좋겠어요…. 그게 안 된다면 적게라도….

나만 형 술버릇 못 보는 게 너무 아쉬워요. 몸 걱정도 되니까 자주 마시지 말기!

아, 이제 그만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다음번에는 조금 더 자세하게 쓸게요!

명헌이 형 사랑해요.

우성이가.

***

명헌이 형에게.

형 잘 지내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술 좀 적당히 마시라니까 어째 더 많이 마시는 것 같아. 대학생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잘 모르겠지만 형이 너무 스트레스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제 영어는 곧 잘하게 되었어요. 초반에는 발음이 이상하다고 시비를 거는 녀석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뭐 그러지 않는 걸 보면 제 영어 실력이 는 게 아닐까요? 농구는 매번 똑같이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이 있는 느낌이라 조금은 버겁지만, 넘어서는 순간의 느낌을 잊지 못해 매번 힘들어도 부딪혀 보고 있어요.

이곳에 있는 선수들은 죄다 현철이 형하고 비슷해서 오히려 제가 작은 체구라는 게 믿어져요? 덕분에 아마 포지션도 좀 달라질 것 같아요.

뭐로 바뀔지 알겠어요? 하기야 모를 리가 있나. 짜잔 바로 포인트 가드!

내가 본 최고의 포인트 가드는 이명헌인데 참고할 수 있는 이명헌이 옆에 없어서 매일 눈을 감고 형의 플레이를 떠올려 봐요. 그리고 나서 매번 감탄해….

형은 대체 어떻게 그렇게 까지 포인트 가드를 해냈어요? 너무 튀어 나가서도 안 돼, 공이 있는 곳은 물론이고 없는 곳도 봐야 하고 연계도 생각해야지 또 볼의 분포도 잘 생각해야 하는데…. 저 요즘 머리가 너무 아파요. 혹시 있다면 형이 담긴 비디오 좀 보내줄 수 있을까요? 보내주면 나도 여기서 모은 내 사진 보내줄게요! (안 보내줘도 줄 테니까 꼭 받기) 그럼 오늘은 여기서 이만 줄일게요.

명헌이 형 사랑해요. (반말한 거 봐주기.)

우성이가.

***

명헌이 한참을 내려다보다 바인더의 맨 끝, 그러니까 지금의 편지가 도착하기 전 최근의 편지를 펼쳐보았다.

***

명헌이 형에게.

형 잘 지내요? 오랜만인 것 같아요.

저는 언제나처럼 잘 지내고 있어요. 형은 어때요? 이번 여름휴가 때는 꼭 들어가려고 했는데 못 들어가서 미안해요. 요즘 조금 정신이 없어요.

일정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휴식기를 주겠다고 하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줘요. 저도 형이 보고 싶어요.

늘 형한테만 기다려 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해요.

형은 편지도 자주 보내주는데 나는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앞으로는 자주 쓸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명헌이 형 사랑해요.

우성이가.

***

그래, 안다. 처음과 같은 것을 바란다는 게 얼마나 큰 것을 바라는 것인지. 하지만 명헌은 지금 편지의 양에 대해 불만인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있었어야 할 우성의 진심이 비어 보이는 것이 너무나도 불안하고 가슴이 아프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계를 놓을 수 없는 건 늘 편지 끄트막에 적혀있는 사랑한다는 말, 그 한마디 때문이었다. 양이 줄고 내용이 빈약해져도 변하지 않는 저 말 한마디로 명헌은 불씨만 희미하게 남은 듯한 이 관계가 쉽게 포기가 안 됐다.

그래, 사랑한다잖아. 크리스마스에 온다고 했으니 그때 얼굴을 보고 대화하면 분명 쉽게 풀릴 오해일 것일 것이다. 명헌은 밀려오는 불안감을 애써 모른 척하며 달력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어느덧 크리스마스이브. 불안했던 마음도 애써 모른 척하려는 명헌의 노력을 알아봐 주었는지 처음과는 다르게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오래간만에 느껴지는 설렘에 명헌이 이것저것 사들여 방을 꾸미고, 음식을 하기 위해 장을 본 뒤 집으로 들어오면 메신저에 우성의 연락이 도착해 있었다. 분명 기분 좋아야 할 연인의 메시지이거늘, 어째서 이다지도 불안한 마음만 드는 건지. 연락해 달라는 우성의 메시지에 명헌이 서둘러 전화를 걸었을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 형 편지 읽었어요? 미안해요. 일이 틀어져서…. 늦어도 꼭 들어갈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성의 말에 ‘… 그게 뭔데? 이런 날에 나를 혼자 둘 만큼 중요해? 나는 언제까지 너를 기다려야 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명헌은 늘 그랬듯 어른스러운 ‘이명헌’을 연기해 냈다.

“.... 그래. 급한 일이면 어쩔 수 없지.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 잘 처리하고 조심히 와.”

전화가 끊어지고 소파 위로 털썩 앉은 명헌의 머릿속은 우성을 향한 투정과 분노 그리고 섭섭함으로 가득했었으나 결국 내뱉어지는 것은 연약한 투정뿐이었다.

“...근데 우성아, 나도 네가 너무 필요해….”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누가 그랬던가. 그 말은 정답이었다. 답지 않게 열심히 꾸민 트리도, 우성과 함께 먹으려 산 음식들도 지금은 죄다 꼴도 보기 싫은 것으로 전락해 버렸으니, 명헌은 치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틀어져 있던 TV에서는 연일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며 들뜬 마음을 떠들어 대기 바빴으나 명헌은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질 때마다 마치 제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식욕도 없어 그저 멍하니 눈 오는 창밖만 바라보며 머릿속에 가득 찬 정우성만 생각하고 있었을까. 어느덧 밖은 내리는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짙게 어둠이 깔려있었다. 그간의 일들을 계속해서 생각한 명헌이 이대로는 안 되겠는지 종이와 펜을 들고 와 식탁에 앉아 하나 둘 메모하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정우성을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

정우성을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

첫 번째. 우성이가 언제까지 미국에서 활동할지 모른다.

(롱디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음)

두 번째. 우리는 서로의 법적 보호자가 될 수 없다.

(미국에서는 가능.)

세 번째. 우성이가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조용히 되뇐 명헌은 구역감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먹은 것이 없어 나오는 것도 없었건만 메슥거리는 것이 사라지질 않아 한참을 변기를 부여잡고 있다 나왔을까. 물기 있는 입을 손으로 훔쳐내며 고개를 들어보니 그제야 곳곳에 있는 우성의 흔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성이 보내준 비타민과 사진, 기념품과 유니폼 등. 피하고 싶은 인물의 흔적이 시각적으로 쏟아지니 속이 다시금 안 좋아지는 것을 느낀 명헌이 다급하게 집 밖으로 나섰다. 계획을 세우고 나온 것이 아니기에 목적지를 따로 정하지 않았고, 급히 나온 탓에 가진 것이 없었으므로 그저 걷기로 한 명헌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으나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고 주위도 고요해졌을 때쯤 무작정 걷는 것을 멈추곤 다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추위 속에서 한참을 걸어 차가운 복도를 지나 집 앞에 도착한 명헌은 문고리를 잡고서도 한참을 고민했다. 아무도 없이 그저 정우성의 흔적만 가득 단 채로 빛나고 있을 제 방을 생각하면 들어갈 자신도 버틸 자신도 없었지만, 고민하고 또 고민해 봐도 결국 답은 정우성이라 명헌은 땀이 맺힌 손을 움직여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나가기 전과 다름없어 보이는 환한 집의 내부와 현관에 놓인 낯설지만, 낯익은 신발 한 켤레였다. 저번 우성의 생일에 보내줬던 신발이었으니 못 알아볼 리가 없는데 이게 왜 여기 있을까? 명헌이 신발을 보자마자 멈춘 듯한 사고에 멍하니 신발을 바라보고 서 있으면 이곳에서 들릴 리 없는, 제가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전화도 안 받고 이 시간까지 대체 어딜…. 뭐야? 옷이 그게 뭐예요? 지금 그러고 밖에 다녀온 거예요? 아니, 지금까지 이러고 있었어!? 신발은 또 뭐야! 밖이 얼마나 추운데 이러고 다녀요! 감기라도 걸리면 대체 어쩌려고!!”

얼마나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뜬 우성이 명헌의 몸을 살피느라 분주했다. 벌겋다 못해 푸르게 변한 손과 발을 보며 안타까운 듯, 또 속상한 듯 미간을 찌푸린 우성이 차마 손대지 못하고 그 주위만을 맴돌면 명헌은 그제야 제 손에서, 발에서 지독한 추위와 함께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강렬하게 느껴지는 아픔에 명헌이 설핏 인상을 찡그리면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알았는지 손을 보고 있던 우성이 고개를 치켜들고는 두 손으로 명헌의 양 볼을 조심히 감싸 쥐었다.

“형 무슨 일 있어요? 대체 뭔데요… 응? 나한테도 말하지 못하겠어요? 무슨 일이길래 이러고… 이렇게 춥게 돌아다닌 건데요….”

걱정이 담긴 우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명헌은 시선을 땅에 고정한 채로 난생처음, 우성에게 제 속을 끄집어내 보였다.

“네가…. 네가 날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런 거잖아.”

“..뭐?”

작게 들린 명헌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우성이 되물으나 명헌은 답을 돌려주기보단 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날 사랑만 해줬더라도…. 아니, 처음부터 날 그렇게까지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야. 애초에 날 적당히 사랑하지 그랬어?”

“아니, 형, 무슨 소리를,”

“못 온다며! 나보다 중요한 약속이 생겨 못 온다더니 왜 왔어? 헤어지려고 왔어? 아니면 네가 보기에도 내가 불쌍해 보였나?”

명헌의 말에 당황해하던 우성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이에 명헌의 눈물이 멈출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넘쳐흐르자, 우성이 한숨을 내쉬며 명헌을 안아 들고 안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발버둥 칠 것 같았던 명헌은 예상과는 다르게 우성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큰 소리를 내며 운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나 서럽게 울었는지 딸꾹질을 시작한 명헌에 우성이 물을 가져다주기 위해 몸을 떼려 움직이니, 이때까지 얌전히 있던 명헌이 우성의 목뒤 쪽으로 팔을 감고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있는 힘껏 껴안았다.

“.. 싫어 어디, 어디 가려고? 가지 마…. 안 울게…. 안 울 테니까….”

두서없이 쏟아지는 명헌의 말에 두 눈을 질끈 감은 우성이 명헌을 떼려 했던 것을 그만두고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명헌이 형. 내가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요. 딸꾹질 오래 하면 안 좋으니까 물 떠다 주려고 그런 거예요. 오늘따라 속상하게 왜 이러지? 응? 진짜 무슨 일 있었는지 말 안 해줄 거예요?”

“.....”

“좋아요. 형은 말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까 내가 물어볼게요. 일단, 내가 형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거. 그게 무슨 뜻인지부터 알려줄래요?”

“.....”

“형. 무작정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상황을 모면하거나 해결할 수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잖아요.”

“... 그러면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네가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데…. 내가 무슨 말을 더 얹어야 하냐고.”

“그러니까. 나는 지금 그게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나도 모르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걸 어떻게 형이 알지? 내가 형한테 부족했어요? 그렇게 느끼게 했어?”

“.. 됐어,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왜 소용이 없는데? 난 헤어질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다 말해요. 왜, 내가 형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우성의 말에 자포자기한 듯 체념한 표정을 지은 명헌이 우성을 향해 힘 없이 말했다.

“.. 그래. 네가 모르고 있는 것 같으니까 알려줄게.”

우성의 품에서 일어난 명헌이 커다란 바인더 하나를 들고 돌아와 우성에게 건넸다.

“이게 뭐,”

“말하지 말고 네 두 눈으로 봐.”

단호한 명헌의 말에 우성이 바인더를 펼쳐보자, 그 안에는 그간 우성과 명헌이 주고받았던 편지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명헌이 보여준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천천히 넘겨보던 우성의 손이 점차 느려지며 더 이상 넘기지 못하고 멈추었을 때. 우성이 명헌을 올려다보는 동시에 명헌이 공허한 눈으로 말했다.

“알겠어? 이게 내 대답이야. 오늘은 늦었으니 자고 내일 돌아가.”

대답할 시간도 내어주지 않은 채 명헌이 차갑게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혼자 남겨진 방 안, 시선을 내려 멍하니 편지를 바라보던 우성이 바인더를 덮으려 움직이려 한 순간, 닳고 구겨져 엉망인 모서리를 보고는 방을 박차고 나섰다. 그 시각 소파 위에 누워있던 명헌이 큰소리에 놀라 눈 위에 올려져 있던 팔을 들어 올리려 했을까. 동시에 가슴께가 묵직해지며 조금은 씁쓸한 향기가 맡아져 왔다.

“... 뭐해.”

“...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었어요.”

“뭐하냐고 너.”

“쪽팔려서 그런 것도 있었고, 사실은 형이 몰랐으면 싶었던 게 제일 컸어요.”

“정우성.”

명헌이 두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치워내고 팔꿈치로 소파를 딛으며 상체를 일으키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눈가에 눈물이 그득한, 떨구어 내지 않기 위해 애써 울음을 삼켜 내는 우성의 얼굴이었다.

“너 왜,”

“형을 잃는 것보단 내가 애새끼인 게 더 나을 테니까 말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들어줘요.”

“....”

“다 변명이라고 생각해도 좋으니까…. 헤어져도 할 말 없는 거 아는데요. 형을 사랑한 마음조차 부정당하는 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래요….”

말끝을 흐린 우성이 명헌의 가슴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명헌이 이내 한숨을 내뱉으며 천장을 바라보듯 누웠을까. 떨어진 무언의 허락에 명헌의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은 우성이 한참을 망설이다 명헌의 인내가 끊어질 때쯤,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 처음엔 별 게 아니라 생각했어요. 농구를 하고 나서 드는 허전함은 그저 내가 쏟아내지 못한 게 남아있어 그런 거라 생각했고, 형이나 다른 선배들 또 부모님이 보고 싶은 건 늘 그랬으니까. 근데 허전함이 공허함이 되고 그리움이 짙어지면서 나를 되돌아보니 남은 게 없는 것 같더라고요. 부모님을, 형을 두고 이 멀리까지 왔는데 그에 비해 내가 덜 자란 것 같았어요.”

우성의 생각지도 못한 말에 몸이 굳은 명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누운 채로 우성의 말을 듣고 있었다.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해 이 정도 수준에 고여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데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동안 해왔던, 매달렸던 일들도 전부…. 쓸모없게 여겨질 만큼.”

잠시간의 정적 후 다시 우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껴지는 게, 떠오르는 생각이 전부 내가 아닌 것만 같이 느껴지는데 그럼 본래의 나는 어떤가 싶고. 어딘가 망가진 건 알겠는데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한 거 있죠?”

“... 말하지.”

갈라진 명헌의 목소리에 우성이 명헌의 품에 얼굴을 비비며 힘없이 웃어 보였다.

“무슨 자격으로요. 내 욕심으로 떠나온 미국에서 2년, 3년도 아니고 10년 차 씩이나 되어선 슬럼프에 빠진 걸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어요.”

“... 연인이잖아. 그런 게 뭐가 중요하다고.”

“맞아요. 중요하지 않았을거고 그게 맞아요. 형이라면 분명 나를 보듬어 주고 일으켜 세워줬겠죠…. 근데 연인이니까 더더욱 말하지 못한 거 알아요?”

“왜?”

“형은 그런 적 없어요? 좋은 일은 없고 힘든 일투성이인 날 나한테 편지 쓰기 위해서 내용을 고르고 또 골랐던 적. 괜히 걱정할까, 싶어 혼자 삼켜 냈던 적이요.”

“....”

“있죠? 비겁하지만 나도 그랬어요. 가뜩이나 형보다 나이도 어리고 성격도 의지되는 편이 아닌 걸 아는데. 이런 일도 혼자 감당해 내지 못하면 어떻게 형한테 의지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알죠. 아는데 나한테는 또 그게 아니더라고요. 형과 나 사이에서는 늘 형이 참아줬으니까 이번 일 만큼은 신경 안 쓰게끔 혼자 해보려고 했는데, 결국 형을 울리기나 하고. 내가 하는 선택은 늘… 형을 울게 하는 것 같아. 형이 질릴 만도 해요. 그렇죠?”

“우성아,”

“...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농구가 무서워졌어요. 매끄러운 바닥도, 공기 중에 맴돌던 묘한 파스 냄새도, 그리고 환호하는 관중들까지.”

“하지만 분명….”

“경기는 괜찮았죠?”

“평소보다 기복도 없고 문제없어 보였…. 설마 너,”

“티 안 났다니 그거 하나는 성공한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농구도 제대로 못 했으면 형을 볼 낯이 없었을 텐데.”

“....”

“형이 알아챌 수 있는 부분에선 가능한 한 최선을 다했어요. 긴장감으로 눈앞이 흐려져도 눈앞의 볼을 놓치지 않았고, 가끔 하는 전화 통화에서는 혹시나 무의식에 말을 꺼낼까 봐 조용히 형 목소리나 듣고 있었어요. 듣고 있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말을 더 적게 한 것도 있었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될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내 탓이라면 내 탓인 거겠죠.”

“.....”

“오늘 형을 만나기 전까지는 잘 숨겼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근데 형이 보여준 편지 보니까 실패했구나 싶더라고요. 내가 봐도 정말… 아니었어. 형이 그렇게 생각할 만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래서 더 나한테 화가 나. 이런 것도 제대로 못 해내선 결국 다 잃어버렸다는 게.”

우성의 말에 명헌이 우성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 눈을 본 지가 언제였더라.”

“......”

“... 네 눈 위로 비치던 마음을 살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나.”

“......”

“... 안아 줄 수 있게 허락해 줘.”

“.....”

“... 우성아 오랜만인데 한 번 안아보자.”

명헌의 말에 한참을 망설이다 천천히 고개를 든 우성의 얼굴은 온통 붉은 것들로 일색이었다. 우성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낸 명헌이 목뒤 쪽으로 팔을 두르고 조심스레 끌어당기자, 우성이 힘 없이 끌려오며 명헌의 몸 위로 쓰러지듯 겹쳐졌다. 그런 우성의 등을 토닥이며 명헌이 머리 위에 입을 맞춰주니 겨우 참아내고 있던 우성의 울음이 터지면서 적막했던 거실이 조금씩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 진짜 형을 사랑하지 않았던 적 없어요….”

“... 응 알아.”

“매일 매일 형이 보고 싶었어요…. 같이 농구 하고 싶었고… 너무 무서워서 형한테 털어놓고 싶었어….”

“......”

“형한테 닿고 싶었어….”

“미안…. 네가 보여주는 너만 보느라 진짜 너를 못 봤어 내가. 네가 괜찮은 줄로만 알았어….”

“... 형이 왜 미안해요. 내가 작정하고 속인 건데 모를 수도 있지….”

“적어도 오늘, 너를 봤을 때. 네 눈을 살폈어야지. 나야말로 변했던 거야.”

“.....”

“이렇게 쉽게 보이는걸, 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겉으로 보이는 것에 급급해선….”

“형….”

“들여다보고 물어봤었어야 했어. 헤어지자는 말이 나올까 두려웠어도 나는 한 번쯤, 변한 네게 괜찮냐는 물음을 건넸어야 했던 거야. 나는 네 연인이니까.”

“......”

“근데…. 변명하자면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어. 마음이 변한 건 모르는 척할 수 있지만 네 눈을 봤을 때 비어있으면….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네 눈을 보면 견뎌낼 자신이 없어서…. 무서워서 차마,”

조금씩 떨려오는 명헌의 몸에 우성이 다급하게 고개를 들어 명헌의 양 뺨을 그러쥐고는 달래기 시작했다.

“형, 괜찮으니까…. 응? 괜찮으니까 말 안 해도 돼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 좀 사랑해 줘…. 그때와 똑같이 난, 여전히 너한테 사랑받고 싶어.”

명헌의 말에 우성이 안타까운 듯 침음을 삼키며 명헌의 이마에 제 이마를 기대었다.

“아, 형… 형이 나한테 엄청 못되게 굴어도 나는 형 없이는 못 사니까…. 그러니까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나 헤어질 생각 없다고. 형이 헤어지자고 해도 구질구질하게 붙잡을게요. 매일 매일 전화하고 메시지하고 편지 보낼 테니까 제발.”

우성의 말을 끝으로 거실에는 두 사람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한참 동안 서로를 부여잡고 울던 두 사람 덕에 시끄러웠던 거실이 잠잠해졌을 때는 지친 두 사람이 제풀에 지쳐 두 눈을 감고 잠든 뒤였다.

눈물 젖은 크리스마스이브가 지나고 크리스마스 날 아침. 

뻑뻑해진 눈가를 비비며 눈을 뜬 명헌은 지난밤의 기억에 머리를 잡아 뜯고 싶었지만 제 옆에서 들려오는 작은 숨소리에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그 품 안으로 들어갔다. 서로 나눌 대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늦장을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눈을 감으니, 방금 일어났던 것이 거짓말인 듯 명헌은 금방 다시 잠에 들었다.시간이 흘러, 낮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만큼 어두워진 오후. 밥을 먹고 씻은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연인들이라 보기엔 조금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식탁 위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다. 뿅.”

“좋아요.”

“슬럼프는 어떻게 된 건지 알려줘.”

“음…. 어제 말했던 게 전부예요. 형도 알다시피 도전을 즐기는 편이라 그나마 버티고 있긴 한데…. 아직은 어려운? 그래도 형한테 들키기 싫어서 이 악물고 했더니 지금은 좀 나아졌어요. 무섭고 싫어도 꾸준히 운동하면서 농구 하니까 전보단 증상이 덜하더라고요.”

“ 그걸… 나아졌다고 말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나아진 거 맞아요. 적어도 경기할 때 시야가 어지럽진 않으니까.”

“네가 보기에 원인은 뭐 때문인 것 같아? 과한 운동? 아니면 반복되는 일상? 외로움?”

“그걸 모르겠어요. 짐작 가는 게 없어서. 반복되는 일상이라고 해 봤자 산왕 때가 더 하면 더했지, 지금보다 못하진 않았잖아요. 그땐 괜찮았는데….”

“음… 도전하는 게 꺼려져? 아니면 농구가 재미없거나 결과에 집착하게 되는 쪽?”

“뭔가 턱하고 저를 막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물이 고이는 것처럼 실력도 이 정도 수준에서 더 나아지지 못할 것 같달까. 그래서 초조해지고 과한 긴장감이 드는 것 같아요.”

“평소에는 하루를 어떻게 보내?”

“눈 뜨자마자 러닝 뛰고 집에 와서 씻은 뒤에 닭가슴살이나 단백질 채울만한 걸로 대충 아침을 먹어요. 그러고 있다가 보면 운동할 시간이 되니까 구단으로 가서 운동하다가, 운동 끝나면 훈련 일정 있을 때는 훈련하고 없을 때는 개인 훈련이요.”

“쉬는 날에는?”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형도 알다시피 집에서 쉬는 걸 좋아하니까. 보통은 집에서 집안일 하거나 자는 편이죠.”

“평범하네.”

“그러니까요. 저도 이유를 모르겠어요.”

“근데 밥을 늘 사 먹어?”

“보통은요. 귀찮기도 하고 식단 하면 닭가슴살이나 샐러드만 먹으니까.”

“그러면 일단, 그 습관부터 고쳐보자. 재료나 방법은 내가 보내주고 알려줄 테니까 이번에 돌아가서부터는 잘해 먹고 사진 찍어 보내줘. 나도 그럴게, 물론 네가 부담스럽지 않을 경우이지만.”

“부담스럽긴요. 좋아요. 형이 나 생각해서 그런 건데 얼마든지 하죠.”

“그래. 그럼, 슬럼프는 하나씩 시도해 가며 바꿔보는 걸로 하고. 이제는… 이번 일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 어떤 얘기요?”

“오해가 있었잖아. 뭐…. 나 혼자 한 오해였지만 우리 둘 다, 소통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서.”

“그건… 그렇죠.”

“더 말하고 싶은 건 없어? 슬럼프 말고도 내가 걱정할 것 같다거나 신경 쓸까 봐 말 못 한 게 있다면 지금 말해.”

“... 저는 당분간 편지는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제 일이 떠오를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나도 모르게 나올 부정적인 말들을 글로 남겨서 형에게 주고 싶지 않아요.”

“동감이야. 받는 건 상관없지만 차라리 영상통화나 일반 통화를 하는 게 좋겠어. 글은 얼마든지 꾸며 낼 수 있다는 걸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았으니까.”

명헌이 우성을 흘겨보며 대답하자, 우성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곤 웅얼거렸다.

“.. 형한테 보냈던 모든 편지가 꾸며 냈던 건 아니었는데요…. 아니지, 저기에 거짓말이라고 해 봤자 잘 지내고 있다는 거 하나잖아요.”

우성이 섭섭한지 툴툴거렸다.

“다 거짓이라는 게 아니라 너를 똑바로 볼 수 없게, 눈을 가릴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단 뜻이야. 내가 편지에 목맬 게 아니라 전화를 한 통 더하고 영상통화를 통해 네 눈을 들여다볼 노력을 했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지지 않았을 테니까. 그거 방지하자는 차원에서 말한 거지.”

“.. 알겠어요. 그러면 당분간은 편지 없이 메신저나 통화로?”

“응. 가능한 통화를 하는 거로 하자. 매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가벼운 건 메신저로 보내고 무겁거나 긴 이야기는 따로 통화하는 거로.”

“좋아요. 그러면 영상통화는 언제 할까요?”

“영상은… 시차가 있으니까,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네. 아, 너 자기 전에 한 번 나 자기 전에 한 번 할까? 하루를 정리하는 방향으로 해서 속마음을 털어놓는 거지. 어때?”

“저는 좋아요. 러닝 다녀와서 아침 먹을 때쯤 형 전화 받으면 될 것 같아.”

“그래. 나도 아침밥 먹을 때쯤 받으면 될 것 같네. 그럼 더 없는 건가?”

“상대방이 신경 쓸까 봐 숨기는 거 금지. 힘든 일 있으면 상의하기로 약속한 거죠?”

“그래. 약속하자.”

“그러면 다 정리된 것 같으니까 이제, 이게 뭔지 설명해 줄래요?”

“뭘….”

미소를 지은 우성이 꺼내 들은 건 전날 밤. 명헌이 집을 나서기 전 적고 있었던 종이였다. 제 앞으로 들이밀어진 끔찍한 흑역사에 명헌이 정신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종이만 내려다보고 있었을까.

“왜 이런 걸 준비하고 있었는지는 알겠는데 진짜 충격인 건 알죠?”

“.....”

“심지어 1번, 2번은 현실성 때문인지 제일 그럴듯해서 진짜 상처받았거든요.”

“.... 미안.”

“3번이 제일 황당하긴 한데 말이 안 되니까 넘어가 줄게요.”

“응….”

“고마워요?”

“고… 맙지?”

“그러면 종이로 남겨요.”

“뭐?”

“아니~ 형이 종이로 남기는 걸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종이로 남기자고요.”

말을 마친 우성이 명헌의 방으로 들어가 종이 2장과 펜 한 자루를 들고 돌아왔다.

“.. 진, 진짜 쓰려고용?”

“당연하죠? 말로 해서 뭐해요. 확실하게 글로 남겨야 남죠.”

펜 뚜껑을 연 우성이 막힘없이 적어 내려가더니 이내 다 썼는지 펜을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립밤을 꺼내 명헌에게 건넸다.

“이건 또 왜용?”

“도장 찍어야죠?”

“.. 진짜 도장을 가져올게.”

“싫어요. 집에 돌아가면 자주 밥해 먹어야 할 텐데 귀찮을 것 같단 말이에요. 그때마다 보고 힘내게 여기 찍어줘요.”

“왜, 왜 하필….”

“왜라뇨? 내가 형 입술 좋아하는 거 몰랐어요? 하긴, 내가 사랑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알 리가 없구나….”

눈썹을 축 늘어뜨린 우성이 명헌을 향해 말하자, 당해낼 재간이 없던 명헌이 머뭇거리는 손길로 립밤의 뚜껑을 열었다.

“하아...”

한숨을 쉬며 얼굴을 감싼 명헌을 두고, 입술 도장까지 확실히 받아낸 우성은 종이를 잘 접어 챙기곤 명헌의 것도 챙겨 TV 옆에 붙여두고는 말했다.

“여기 좀 밝아진 것 같지 않아요?”

“글쎄용...”

“아, 형 소파에 잠깐만 앉아줄 수 있어요?”

“....?”

우성의 말에 의아함을 드러낸 명헌이었지만 군말 없이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그런 명헌의 앞으로 다가온 우성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주머니를 뒤져 작은 케이스를 꺼내 열곤, 반지를 꺼내 명헌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놀란 명헌이 눈을 크게 뜨고 우성을 내려다보자, 우성이 시선을 맞추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 말대로 우린 서로에게 보호자가 되어줄 수 없어요. 같은 시간대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조차 적어서, 늘 불안했죠.”

“......”

“형을 사랑하는 일이 불안함을 달고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마저 기꺼이 감당하고 싶을 만큼 형을 사랑해요. 이번 슬럼프로 너무 힘들 때, 형 하나만 보고 버틸 수 있었어요.”

눈썹을 긁은 우성이 멋쩍은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직 그 무엇도 정해지지 않았고 미래는 모르는 일이지만 확실한 건, 늘 어제보다 오늘 더 형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거예요.”

명헌의 눈에 맺힌 굵은 눈물방울들이 이내 한가득 모여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내렸다.

“농구를 제외하고 나를 일으키고 주저앉힐 수 있는 건 형이 유일하니까. 그런 내가 불쌍해서라도 오래도록 사랑해 주세요. 형이 계속 사랑해 주면 다시 형이 알던 에이스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아. 내가 해내고자 했던 건 다 전부 다 해냈다는 거 알죠?”

우성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명헌이 우성을 끌어안았다.

“넌 늘... 내 에이스지.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내 에이스란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리고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너 말고는 갖고 싶은 게 없었으니까.”

명헌의 말에 환하게 웃어 보인 우성이 명헌을 있는 힘껏 끌어안자, 명헌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기분 좋은 심장 소리와 따끈따끈한 체온, 옅게 들려오는 숨소리에 제게 꼭 맞는 듯한 품까지. 명헌에게 있어 최고의 기념일은 바로 여기, 이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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