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이 밤이 특별해진 건
농구 그리고 낚시. 일상의 반복 속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너. 슈퍼 루키라고들 하던데 내 눈엔 농구를 사랑하는 평범한 고등학생 소년이었다. 폭발적인 재능을 가진 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떠났다. 반면에 나는 농구를 그만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아주 가끔 네 전화가 올 때면 일대일로 맞붙었던 그날의 밤을 떠올리곤 한다. 가로등 불빛 하나에 의지하며 동네의 작은 농구 코트에서 몇 시간이고 튕겼던 농구공의 소리가 아직도 선명하다. 몇 시간이 지나도 지친 기색 하나 없어서 오히려 내가 당황했던 적도 적잖게 있었다는 걸 너는 알까.
농구를 하지 않는 지금은 너와 함께 걸었던 길, 너와 함께 뛰었던 농구 코트, 너와 함께 앉아 쉬었던 나무 밑을 산책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농구공만 쫓던 너의 새카만 눈동자를 보는 것도, 농구 코트와 신발의 마찰음이 묵직했다는 것도, 나무 밑에 눕자마자 잠에 들었던 너의 모습마저 아직 기억한다. 농구하는 방법은 몸이 기억할지라도 서태웅이라는 사람 자체를 기억하는 건 내 머리가 기억하고 있다. 설마 첫 경기가 인연이 되어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지. 인생에 농구와 낚시밖에 모르던 나한테 서태웅이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충격적인 존재였으니까.
[윤대협. 뭐해.]
하늘을 보았다. 네가 참 좋아하는 별이 박힌 하늘이었다. 전화는 아주 가끔이었지만, 문자는 매일 이 시간쯤 온다. 여기가 저녁이라면 지구 반대편은 이제 막 아침이 되었겠지. 그러면 또 상상한다. 잠도 많은 애가 눈을 뜨자마자 부스스한 모습으로 핸드폰 자판을 하나하나 눌렀을 생각을 하면….
[네 생각.
잘 잤어?]
그러면 나는 항상 똑같이 답해준다. 잘 잤냐는 물음도 보탠다. 네 문자를 받으면 우리가 함께 누워 잠에 들었던 나무 밑에 앉는다. 하루의 끝을 그곳에서 마무리한다. 오래 지나지 않아 네 답장이 온다. 답장은 항상 똑같았다. 멍청이. 사실 나는 그런 답장을 받아도 행복해서 웃곤 했는데 그건 아주 나중에 알아차렸다. 누가 알려준 건 아니었지만 문득 개운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을 때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 나는 너를 좋아한다. 아직 그런 마음을 고백하진 못했지만.
[준비운동 잘하고. 다치지 마. 화이팅.]
나는 그렇게 답장을 보낸다. 읽곤 답이 없다. 이런 짤막한 대화를 매일 저녁 주고받는다. 네가 미국으로 가고 난 후부터 주고받은 것이 습관이 되었다. 이젠 이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다. 네가 더 보고 싶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네가 머물렀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덮어보았다. 괜스레 나오는 웃음은 오로지 너 때문이다.
해마다 농구 시즌이 오면 경기를 꼭 챙겨본다. 농구를 그만두고 경기 같은 건 보지 않을 줄 알았는데 처음엔 순전히 너의 플레이를 보고 싶었고, 그다음엔 너의 모습을 보고 싶었고, 그다음엔 네가 보고 싶어서 챙겨보게 되었다. 너는 여전히 멋진 플레이를 했고 여전히 빛이 난다. 공을 만질 때 가장 생기가 도는 너를 오래 보고 싶다. 그것이 네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라고 생각한다.
하루는 그런 질문을 남기기도 했다. 거기선 누구랑 일대일 해? 생각보다 답장은 빨랐었다. 모두 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한다는 의미일까? 그리고 이어진 답을 보고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너랑 할 때가 제일 재미있어. 이번 시즌이 끝나고 귀국하면 또 너를 보러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숨이 벅차도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그날은 하루 종일 싱글벙글, 회사 사람들이 기분 좋은 일이 있냐고 물으면 나는 네, 대답했다.
네 덕분에 농구는 그만두어도 그만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주말엔 농구 코트에서 혼자 공을 튀기며 감을 유지한다. 아주 가끔은 동네 꼬맹이들과 함께 농구를 한다. 아이들은 귀엽고 농구에 대해 제법 진지했다. 이 아이들도 커서 너처럼 멋진 농구선수가 되지 않을까. 얘들아, 서태웅 선수 알아? 알아요! 엄청 잘생기고 농구도 완전 잘 하잖아요! 아이들이 귀여워서 웃는 건지, 네 생각이 나서 웃는 건지. 나 진짜 바보 맞나봐, 태웅아. 나는 마음이 들떠 아이들한테 무작정 약속을 해버렸다. 서태웅 선수가 형 친군데 다음에 귀국하면 싸인 받으러 와. 에이~ 어떻게 아저씨 친구예요~ 진짜야! 약속! 새끼손가락까지 내밀면서 약속했는데, 그때의 내가 감당해 주길 바란다.
이제 손꼽아 네가 오기까지 기다려본다. 낚시 금지 표지판이 세워진 곳에 앉아 떡밥도 없이 찌만 던져두고 있다. 달과 별이 쏟아진 잔잔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기다리듯 말없이 앉아있다. 오늘따라 밤하늘이 참 맑다. 저 바다 너머 저 하늘 넘어 지구 반대편에 있을 너를 생각하면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 다시 만났을 때도 밤하늘이 지금처럼 맑았으면 좋겠다.
'뭐 하고 지냈어.'
"일하고 지냈지."
'농구는?'
"주말마다 했어."
너랑 농구하고 싶어서.
'그 꼬맹이들은.. 귀엽더라.'
"널 알더라고. 팬이래."
'...알아.'
"태웅아."
'왜.'
좋아해.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냥 지켜주기로 했다. 너도, 내 마음도.
"부상 조심해야 하는 거 알지?"
'....모를 리가 없잖아.'
그리고 나는 내 마음을 숨기기 위해 허무맹랑한 이야기나 영양가 없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 쏟아지는 별을 안주 삼아 도수 낮은 캔맥주도 함께 마시면서 일 년에 한 번뿐인 일상을 서태웅이라는 사람으로 채우겠지. 너를 만나기 전엔 농구를 가장 좋아했다면 지금은 서태웅을 가장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그대로 두어야 가장 빛이 나니까. 언젠가 내 마음을 고백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그 순간은 아마 네가 은퇴하고 난 후가 아닐까. 시간은 생각보다 느리면서 빠르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나는 나답게 인사를 건넬 것이다. 웃으면서.
"어서 와. 농구하러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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