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태웅 / 사와루

[우성태웅] 꽃말을 알려줘 (1)

새로운 만남

  • 꽃집 사장 정우성 X 조폭 서태웅

늦은 밤. 산왕 꽃집 안쪽 방에선 아직도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문에 걸린 안내판은 'closed'로 돌려놨지만 문을 미처 잠그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 띠링. 도어벨 소리와 함께 누군가 문을 열고 비척거리며 들어온다. 정우성은 그 기척에 서둘러 방에서 나왔다.

"누구세요?"

친절을 가장한 목소리가 밝게 울린다. 매장 불이 꺼져있어 상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영업시간이 아니라서요."

낯선 이를 향해 몇 발짝 다가갔다.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 도와줘."

그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우성이 다가가던 걸음을 멈췄다. 꽃향기에 가려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짙은 혈향이 난다.

정우성이 재빨리 가게 불을 켰다. 밝은 등 아래 남자의 상태가 적나라하게 비친다. 한쪽 눈은 쥐어 터져 부어있고, 이마를 타고 볼까지 진득하게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힘없이 늘어진 왼팔과 옆구리를 꽉 눌러 잡고 있는 오른팔. 겉으로 보이는 셀 수 없이 많은 생채기들 까지. 정우성이 경악에 가득 차 그에게 다가갔다.

"세상에, 어쩌다... 경찰에는 신고했어요? 구급차 부를게요. 잠시만..."

"안 돼."

"... 네?"

남자가 품 안에서 권총을 꺼내 든다. 정우성이 반응하기도 전에, 권총이 바닥에 떨어진다. 툭. 그가 권총을 발로 차 정우성 쪽으로 밀었다.

"경찰, 안 돼..."

그러곤 서서히 무너진다. 무릎이 꺾이고 상체가 바닥으로 쓰러진다. 정우성은 권총을 주워 들곤 한 손으로 쓰러진 상대의 얼굴을 살짝 들어 올린다. 처음 보는 얼굴... 더럽게 예쁘네.

1. Alstroemeria

: 새로운 만남

서태웅은 이틀을 꼬박 잤다. 뒤척임도 없이 고요히, 죽은 듯이 잠만 잤다. 정우성은 이러다 시체를 신고하게 될까 걱정했다. 다행히도 이틀째 점심, 서태웅이 자의로 눈을 떴다. 온몸에 붕대며 반창고며 칭칭 감고는 좀비처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낯선 방엔 은은한 풀 향과 흙 향이 배어 있었다.

큼, 흠. 서태웅이 낮게 헛기침을 하며 방문을 열었다. 목이 비쩍 말라 칼칼했다. 맞은편으로 작은 부엌이 보인다. 서태웅은 냉장고를 잠시 노려보다 왼편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꽃향기가 훅 끼쳐온다. 이제야 떠올랐다. 서태웅은 어두운 밤, 아픈 몸을 끌고 꽃집에 겨우 들어와 정신을 잃었었다.

"아, 아! 깼어요?"

카운터에 늘어져 앉아있던 정우성이 벌떡 일어나 달려온다. 진녹색 앞치마까지 야무지게 맨 모습이 영락없는 꽃집 주인이었다.

"이틀을 잤어요, 이틀! 몸은 어때요?"

"무, 흠, 물...."

"아... 목마르겠다. 잠시만요!"

우다다. 정우성이 서태웅이 나왔던 방향으로 뛰어갔다. 쿠당탕,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와 앗, 하는 작은 비명소리,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끝에 정우성이 다시 돌아온다. 한 손에 2L짜리 페트로 된 물병을 들고는 해사한 미소를 짓는다.

"컵 씻어놓은 게 없네요. 그냥 마셔요!"

서태웅은 사양 하지 않고 물병을 건네받았다. 윗옷을 적셔가며 물을 한참 마시고 나서야 갈증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 고마워."

서태웅의 대답에 정우성이 잠시 멈칫한다. 눈썹을 살짝 까닥이더니 입꼬리를 씩 올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별말씀을."

정우성이 카운터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턱짓으로 가게 구석의 작은 소파를 가리켰다.

"아직 아프잖아. 앉아서 쉬어."

서태웅이 그의 말을 순순히 따른다.

"이름이 뭐야? 아. 나는 정우성."

"서태웅."

"... 오."

정우성이 작게 탄성을 뱉었다.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서태웅을 요리조리 뜯어보며 이름을 곱씹는다.

"서태웅...."

"뭔데."

"아니. 그냥 이름이랑 얼굴이랑 잘 어울리네, 싶어서."

정우성이 다시 싱긋 웃는다.

"그래서, 어쩌다 그렇게 다친 건데?"

서태웅의 입이 꾹 다물린다.

"나, 너 말대로 경찰에 신고 안 했다? 나름 생명의 은인 같은 건데 그 정도는 말해줄 수 있지 않아?"

서태웅이 정우성을 한 번, 제가 나왔던 방을 한 번, 꽃집 출입문을 한 번 보더니 한숨을 조금 내쉰다. 찔끔 벌어진 입에서 한숨이 야무지게도 튀어나왔다.

"궁금하단 말이야! 너, 내 앞에 총 던진 거 기억 안 나? 그거 보고도 신고 안 했다니까! 내가 신고했으면 넌 감방 직행이었을 건데!"

"그냥. 싸웠어."

"너, 그거지? 조폭 같은 거?"

정우성의 눈이 반짝거린다. 의자를 끌고 조금 더 가까이 오는 모습을 보며 서태웅이 조금 질린 표정을 짓는다.

"너 뭔데."

"나? 정우성!"

"사람들 원래 조폭 무서워하지 않나?"

"너는 조폭같이 안 생겨서 괜찮아! 헉, 너 혹시 등에 용 있고 그래?"

꺄아. 정우성이 작위적인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눈을 가리는 체한다. 가증스러운 작태에 서태웅의 표정이 조금 더 굳어진다.

"용 없어."

"응, 알아. 너 붕대 누가 감았다고 생각해?"

"아...."

정우성의 의자가 또 조금 앞으로 갔다.

"그래서, 그래서? 어쩌다 다친 건데? 왜 여기로 온 거야?"

"너 좀... 이상해."

"이상하다고? 내가? 왜?"

"... 아니다."

"뭐가? 뭐가 아닌데?"

서태웅의 미간이 찡그러진다. 그 미약한 움직임에 눈 위 상처가 벌어졌는지, 쑤시는 아픔이 번지기 시작했다.

"앗, 너 피난다. 밴드 갈아줄게, 잠시만!"

후다닥. 정우성이 또 뒤쪽으로 달려간다. 행동 하나하나가 바쁘다. 또다시 쿠당탕, 무너지는 소리가 나고, 곧 구급상자와 함께 돌아왔다. 끼익. 의자가 더 가까워지고, 정우성이 서태웅의 눈 위를 조심스럽게 만진다.

"에구구. 아프겠다."

"아."

"아파?"

"응."

제가 아픈 것처럼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피가 엉겨 붙은 밴드를 떼어낸다. 정작 서태웅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정우성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어휴. 다 됐다. 어때? 불편하진 않아?"

"너는."

"나?"

"왜 나한테 친절하게 굴어?"

이틀 밤을 잤다는데 몸에 감긴 붕대가 깨끗하다. 첫날 몸 상태를 생각해 보면, 응급처치만 한 게 아니라 새로 붕대를 갈아줄 정도로 신경을 썼다는 뜻이다. 아니, 애초에 이틀 밤이나 신원 모를 사람을 방에 재웠다. 초면에 총까지 보인 위험인물을.

"이유가 필요해?"

"응."

"음..."

정우성이 구급상자를 마저 정리한다. 으음, 으으음. 고심의 소리를 뱉어내면서도 손은 상자를 착착 닫는다. 서태웅 앞에 쭈그려 앉은 채로 고개를 든다. 눈을 위로 땡그랗게 뜨며 실실 웃는다.

"잘생겨서?"

꾸깃. 서태웅의 미간이 찌푸려지다 말았다. 또다시 피보기 전에 정우성이 재빨리 손가락을 뻗어 이마를 꾹꾹 누른다.

"너 잘생겼어."

어느새 둘의 시선이 평행하다. 서태웅을 코앞에 두고 정우성이 상큼하게 웃는다. 그 웃음이 너무도 해맑아 서태웅은 미간에 힘을 줄 수 없었다.

"... 그래."

"으하학!"

서태웅의 떨떠름한 대답에 정우성이 웃음을 터트린다. 

"그래가 다야? 나는? 나도 잘생겼지, 그치?"

"너는 역시..."

"응. 역시?"

"이상해."

정우성의 웃음소리가 더 커진다. 

띠링. 웃음소리를 뚫고 도어벨 소리가 들렸다. 둘은 자연히 출입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중년의 여성이 두리번거리며 가게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정우성이 벌떡 일어나 손님을 반겼다. 여성의 시선이 정우성을 넘어 서태웅에게로 향했다. 온 데 붕대를 감아놓은 그를 보곤 주춤거리는 기색을 보인다.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정우성이 살갑게 말을 걸며 주의를 끌었다. 여성의 당황한 시선이 다시 정우성을 향한다.

"아... 여기 주인아저씨는 어딨어요?"

"제가 얼마 전에 가게 이어받았어요."

"아아... 그때 보고 간 꽃이 있는데..."

여성이 난감한 듯 표정을 찡그린다.

"이름이... 알... 알스? 길었어요."

"...알스?"

이번엔 정우성이 당황한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 나세요?"

"크고, 술이 많이 나있고..."

"으음..."

스무고개하듯 답을 찾는 두 사람을 보던 서태웅이 나직이 한숨을 쉰다.

"알스트로메리아."

그의 나직한 한마디에 둘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맞아요, 그거! 그런 이름이었어요."

"와, 어떻게 알았어?"

"그걸로 부탁해요. 화병에 꽂을 거라 조금 다듬어서요."

"넵!"

비록 이름을 알아낸 꽃을 찾아내는데도 시간이 좀 걸렸지만, 정우성은 무사히 손님에게 꽃을 한 아름 들려 보낼 수 있었다. 

"야, 너 어떻게 그걸 듣고 알았어? 꽃 좋아해?"

손님을 보내자마자 정해진 수순처럼 정우성이 달려들었다. 서태웅은 그의 질문을 무시한 채 제 할 말을 꺼냈다.

"배고파."

서태웅은 공복 2일 차였다. 

먹고 싶은 거 있냐는 질문에 서태웅이 잠시 고민하다 답을 낸다.

"라면."

뭐야, 소박해. 정우성이 금방 끓여준다며 부엌을 향해 가다가 급히 돌아왔다.

"잠시만, 너 환자잖아! 죽 먹어야지!"

"먹고 싶은 거 있냐며."

서태웅이 불만을 담고 쳐다봤다.

"라면."

라면을 요구하는 어투가 제법 단호하다. 정우성은 어깨를 으쓱이곤 다시 부엌을 향했다. '배 앓아도 난 몰라!' 그렇게 덧붙이면서도 그를 위해 제일 큰 냄비를 꺼내 들었다. 라면 다섯 봉이 한 솥에 팔팔 끓여진다.

부엌을 가득 채운 라면 냄새가 조금 열린 미닫이문 사이를 비집고 나와, 꽃집 구석 소파까지 다다른다. 서태웅의 후각이 꽃향기 사이의 짭짤한 냄새를 즉각 잡아냈다. 정우성의 당부대로 얌전히 기다리기를 약 2분째, 서태웅은 소파에 푹 기댔던 등을 세웠다. 성할 곳 없이 다친 몸을 굳이 일으켜 부엌으로 향한다. 문을 밀어 열자 라면 냄새가 후각을 세게 강타한다. 작은 부엌엔 그에 걸맞은 작은 식탁이 있었다. 서태웅은 의자에 앉아 냉장고를 뒤적거리는 정우성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동그란 뒤통수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며 냉장고 구석구석을 뒤져본다. 스읍. 그가 작게 소리 내며 숙였던 허리를 곧이 폈다.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뒤로 돈다.

"으아, 깜짝이야!"

놀란 눈이 아주 동그랗다.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눈, 놀라서 벌어진 동그란 입. 동글동글.

"서태웅아, 기척을 좀 내고 다녀! 언제 온 거야? 기다리랬잖아!"

"언제 되는데."

"거의 다 됐어. 계란이 없더라... 아, 앞접시!"

정우성이 다시 뒤돌아 찬장을 뒤진다. 상부장을 열어보고는 별 소득이 없자 하부장까지 열어 겨우 구석의 밥그릇 하나와 국그릇 하나를 발견했다.

"왜 그릇이 밑에 있는 건데!"

정우성이 괜히 성질을 냈다.

"네가 넣은 거 아닌가?"

"아니야! 전 주인이 놔둔 거야. 나 부엌 안써서... 잘 모른단 말이야."

정우성이 그릇을 문질러 씻으며 우는소리를 했다.

"이 꽃집, 이전 주인분한테서 받은지 얼마 안 됐거든. 아까 봤지? 나 사실 꽃 이름도 잘 몰라."

"그럼 꽃집은 왜 하는데?"

"음... 전 주인이 조금 먼 친척이라, 그냥 받았어. 요즘 일 구하기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몰라."

탁. 그릇이 식탁에 놓이고, 중앙에는 받침도 없이 커다란 냄비가 자리한다. 그 위로 펄펄 나는 김이 다소 공격적이다.

"... 많지 않나?"

라면 5봉지가 통째로 들어간 냄비를 두고 서태웅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게? 둘이서 먹잖아!"

정우성이 마주 앉아 똑같이 갸웃거린다. 

"... 배고파. 먹을래."

서태웅은 이해를 포기하고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정우성이 나서서 그의 그릇에 라면을 한가득 담아준다. 둘은 한동안 후루룩거리는 소리를 내며 식사에 집중했다. 라면 냄새 때문에 더욱 크게 느껴지는 허기에, 서태웅은 열심히 면발을 씹어 삼켰다. 그릇이 바닥날 즈음이 되자 정우성이 슬며시 운을 뗐다.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해 줘."

서태웅이 고개를 들어 정우성을 쳐다봤다. 건조한 눈길에 의문이 담겨있었다.

"어쩌다 다쳤는지. 그리고 왜 여기 들어왔는지."

"..."

서태웅이 입안 가득 넣은 라면에 볼을 조금 부풀리며 열심히 오물댄다. 꿀꺽. 꼭꼭 씹고 나서야 삼킨다.

"싸웠다니까. 도망치는데 여기 안쪽 방에서 불빛이 보여서..."

"앗, 그러면 지금 너 쫓기는 거야?"

"아니."

후루룩. 부정의 단어를 뱉어놓곤 다시 라면을 한입 먹는다. 그가 꼭꼭 씹어먹을 동안 정우성은 제 그릇을 리필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나 이제 조폭 아닌데."

"...그게 무슨 뜻이지? 싸우고 그 조직에서 나온 거야?"

"흠."

서태웅이 잠시 고민하며 뜸을 들였다.

"대충 그런 거다."

"그게 뭐야... 그런 곳 나오려면 손가락도 자르고 그러던데, 진짜 나온 거 맞아?"

젓가락을 집은 손가락이 움찔거린다. 서태웅이 제 손을 슬쩍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뭐... 너 집은?"

"..."

여태 올곧게 마주해 오던 시선이 슬며시 아래로 내려간다. 

"... 없어."

"얼씨구."

정우성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돈은?"

"..."

"직업은? 아, 이제 없지?"

"... 응."

정우성이 활짝 웃는다.

"그럼 서태웅아, 너 여기서 살래?"

정우성을 보는 서태웅의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린다. 가만히 그를 보다 겨우 입을 연다.

"왜... 그렇게까지 해줘?"

정우성이 이번엔 망설임 없이 답한다.

"너, 잘생겼으니까."

서태웅이 입을 조금 열었다 다시 닫았다. 괜히 라면을 내려다보고, 다시, 아직 웃으며 저를 보고 있는 정우성을 봤다.

"... 너도."

으하하, 그치?

신난 웃음소리가 부엌을 가득 채운다.

배부른 환자에게 소염진통제까지 챙겨 먹이자 이른 저녁인데도 금방 잠에 들었다. 정우성은 가게 문을 잠그고 거리로 나왔다. 쪽방 침대를 손님에게 내어줬으니 제 집에 가려는 이유였다. 동시에 나인 투 식스가 지켜지지 않는 서글픈 직장인으로서 잔업 처리를 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여보세요. 명헌이 형."

업무 전화치고는 꽤 친근하게 상대를 부른다.

"그저께 온 그 조폭 새끼, 누군지 알아요? 와, 나 깜짝 놀랐잖아요. 그냥 찌끄래기인 줄 알았는데. 서태웅이래요. 왜, 그 신라였던, 걔인 것 같은데요."

잠시간 상대의 말을 조용히 듣더니 다시 입을 연다.

"네, 네. 일단 잡아놨는데. 더 파볼까요? 이거 완전 럭키 아니에요? 그쵸?"

정우성이 허공에 대고 씨익 웃었다.


클리셰는 맛있으니 클리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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